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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박영균>

12/30/2020

 
인간은 인체의 신비 속에 살아간다. 인간은 평생 인체 중 뇌 기능의 50%도 쓰지 못한다고 한다. 인류가 정복을 못한 것은 우주가 아니라 사람의 ‘뇌’일 것이다. ‘뇌’를 연구하는데 청춘을 바친 한 젊은이가 있다. 이 젊은이는 앞으로도 ‘뇌’를 연구하는데 그의 많은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지난 1년간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강타로 온 나라가 흔들렸다. 이 와중에도 ‘뇌’에 빠진 이 젊은이는 꿋꿋하게 나아갔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꿈’을 져버리는 순간에, 그는 그가 지난 10년간 목표한 꿈을 이루었다. ‘뇌’에 빠진 젊은이, 박영균 교수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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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 교수는 그의 삶에서 '뇌'란 '나를 생각하고 존재하게 하는것'이라고 말한다.
1985년 4월 22일 전남 광주 출생
 
[학력]
2000-2002년 광주과학고등학교 졸업
2002-2006년 KAIST 생명과학 학사
2006-2011년 KAIST 생명과학 박사
 
[경력]
2011-2013년 KAIST 자연과학연구소 박사 후 과정
2013-2015년 스위스 Friedrich-Miescher Institute 박사 후 과정
2015-2019년 미국 MIT 박사 후 과정
2019-2020년 미국 MIT 연구원
2020년 9월~現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조교수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경과학을 연구한 신경공학자로서 미국 MIT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뒤, 지난 9월 1일 자로 카이스트의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조교수로 부임한 박영균이라고 합니다.
 
광주과학고 출신이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흥미가 있으셨나요?
 
어릴 때부터 어떤 사물이나 물체에 대해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유치원에 프리즘이 있었는데, 사물들의 색깔이 바뀌는게 신기해 몇시간씩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낮에 구름에 햇빛이 가려져서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게 되는데, 혼자 방에 누워있으면서 관찰하게 되는 그런 현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점점 ‘과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는 저의 관심사에 대해 알게 되신 후 주말마다 서점에 가서 원하는 책을 사주셨는데, 한번은 서울과학고 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소개한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는 책을 사서 보게 되었어요. 서울과학고 학생들이 입학 후 어떻게 과학에 매진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좌절을 느끼며, 어떠한 과학자로 발전하는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과학고등학교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고, 제가 태어난 광주에 있는 광주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광주과학고등학교를 1년 월반하여 2년 만에 조기졸업 후,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에 진학하셨어요. 많은 전공 중 ‘생명과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평소 과학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저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과학을 공부하는 대상 그 자체인 ‘생명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뇌’ 였습니다. 이는 ‘생명과학’으로 전공을 택하고, 훗날 ‘신경과학’을 선택하여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뇌’는 자연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공부하고 연구하기 어렵겠지만, 대신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도전의식’ 또한, 제 전공을 선택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되었습니다. 전공을 선택하는데 있어 제가 대학 및 대학원 진학할 당시마다 저의 부모님은 무조건 제가 좋아하는 길을 택하여 걸어가는 것을 믿고 지지해주셨습니다.
 
지금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전공을 택하며 고민을 할 시기인데 첫째로 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서 선호하는 직업군과 전공 역시 매번 달라집니다. 10, 20년에 한 번꼴일까요? 사람이 평균 80년을 산다고 가정해본다면 시대적 흐름은 적어도 5~6번은 바뀌지요. 그러니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분야와 전공을 찾아 택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으십시오’ 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지금 현시대에 사람들이 ‘누구나’ 원하는 직업은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 대부분이 지원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그 직업군 안에서 서로가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므로 결국에는 머지않은 시간에 ‘레드오션’이 되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분야가 유망할 것이다라는 본인의 뚜렷한 이유들에 기반해 블루오션을 찾아 그 분야에 종사한다면,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하고 독특한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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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카이스트 내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진행 당시 토스트마스터스클럽 동료와 함께.
카이스트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치신 후 또 다른 박사후과정을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 마치셨어요. 카이스트에서 박사 이상의 경력을 지니셨기에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스위스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당시 외국의 유수한 기관에서 연구 경험을 쌓고 논문을 쓰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또한 ‘대학교수’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수학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도(멘토링)하였을 때 그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보는 것이 굉장히 보람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국내 박사 학위로도 충분히 교수가 되는 것은 가능하나, 제 분야는 해외에서도 ‘박사후과정’(이하 PostDoc – 포닥)을 마치고 타 분야 연구 경험을 쌓으며 저명한 기관에서 논문을 제출 및 발표하는 것이 국내외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포닥을 하기위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포닥을 해외에서 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위스로 가기 직전에 결혼을 하였고, 가서는 아이가 생기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기에, 그 무게는 만만치 않았지요. 힘든 포닥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꼭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버텼습니다.
 

시스템 신경과학 연구를 하시다가 신경 공학 기술 개발로 연구 분야를 바꾸셨어요. 학사-석사-박사-포닥까지 끝낸 분야에서 갑자기 연구 분야를 바꾼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큰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나요?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의 포닥 생활을 마치고 2015년 미국 MIT로 거처를 옮기면서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시스템 신경과학을 연구하였고, MIT에서는 신경 공학 기술 개발을 하였어요. 전공을 비교 설명해드리자면, 시스템 신경과학이란 뇌의 신경 세포와 그 사이의 연결, 뇌 전체의 네트워크, 이렇게 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분석해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한 연구이자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신경 공학은 뇌 기능과 뇌 질병을 이해하는 연구기술들을 개발하고, Brain-machine interface처럼 뇌의 기능을 보조하는 장비나 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위스에서 시스템 신경과학을 연구하던 시절부터 신경 공학 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스위스에서 했던 연구는, 뇌가 어떻게 행동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하기 위해, 움직이는 생쥐로부터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생명 신호를 한꺼번에 측정하면서 뇌를 조절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쥐 행동의 동영상, 생쥐의 발성, 생쥐 뇌의 전기 신호, 근육의 신호들을 동시에 측정하면서 최근에 개발된 광유전학을 통해 뇌를 조절할 수 있고, 이러한 신호와 조절의 타이밍들을 동기화시켜 기록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었습니다. 이를 개발하면서, 제가 사용한 도구(tool)라던가 제가 그동안 몰랐던 뇌에 관한 여러 신경 공학에 관해 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스위스를 떠나 MIT에 가면서 전공 분야를 완전히 신경 공학 기술 개발로 바꾸었는데 그 계기는 또 다른 ‘목마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뇌에 관해 연구할 때면 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반도체를 보면 너무 복잡해 보이지만 반도체 회로를 만든 전문가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그 세세함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저도 그 복잡해 보이는 ‘뇌’를 정말 깊게 이해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고민 끝에 ‘뇌를 한차원 깊이 이해하려면 뇌를 연구하는 기술개발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신경 공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 주 전공이 아니었던 신경 공학 기술 개발 분야에 뛰어들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실험실을 차릴 때 제 시스템 신경과학과 신경 공학 연구를 둘다 한 경험이 도움이 될것이라 믿었고, 올 9월에 연 저의 실험실에서도 두 분야의 연구를 융합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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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 교수가 미국 MIT에서 연구 중 쉴드에 관해 발표한 논문.
2019년 1월자 'Nature Biotechnology' 표지를 장식했다.
2015년에서 올해까지 햇수로 6년간 미국 MIT에서 포닥 및 연구원으로서 어떤 기술 개발에 참가하셨는지 소개해주세요.
 
저는 두 가지 기술 개발에 참가했습니다. 첫 번째는 쉴드(SHIELD)라는 것인데요. 이것은 뇌 전체를 투명하게 하면서 그 안에 있는 정보를 보전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두 번째 기술인 이플래쉬(eFLASH)는 투명화된 뇌를 아주 빠른 속도로 염색하는 기술입니다.
 
SHIELD에 대해 먼저 설명드리자면, 포유동물의 뇌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미경으로 한 번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뇌를 볼 수 있는 깊이 만큼 얇은 절편으로 잘라서 본 다음에, 그 절편들의 정보를 합하는 방식으로 과학자들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뇌의 조직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인 조직투명화 (Tissue clearing)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뇌를 투명하게 한 상태에서 그 안을 이미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 투명화’ 기술은 단점이 있었는데, 뇌를 투명화시키기 위해 세제등을 사용해 뇌 조직의 지방을 없애는 과정에서, 단백질이나 핵산 혹은 세포구조같은 다른 필수적인 정보들도 왜곡되거나 파괴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개발한 SHIELD는 특정한 에폭시 (epoxy) 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뇌의 개개분자와 뇌 안의 세포 구조를 보존한 다음에 투명화 시킴으로써, 뇌 전체를 정보가 보존된 상태에서 3차원으로 시각화시킬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3차원으로 시각화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조직 내 정보들은 조직염색을 필요로 합니다. 염색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기술 중의 하나가 항체를 통해 염색하는 것인데, 항체는 본디 분자가 크기 때문에 뇌와 같이 아주 큰 조직을 항체로 염색하려면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며, 또 조직의 겉면만 염색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개발한 기술인 이플래쉬는 아주 빠르고, 저렴하면서, 다양한 항체와 조직에 적용할 수 있는 3차원 면역 염색법입니다. 예를 들면 생쥐의 전체 뇌를 하루만에 면역염색할 수 있습니다.
 
이 쉴드와 이플래쉬의 개발 후 여러 공동연구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도네가와 스스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1987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교수님과 쉴드를 이용해 뇌의 ‘공포 기억 저장소’의 ‘지도’(map)를 만든 연구가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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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박영균 교수 둘째 아이 돌을 맞이하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뮤지컬 배우인 아내 서채송 씨와 두 자녀들은 박영균 교수에게 최고의 원동력이다.
카이스트에서의 포닥,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의 포닥, 미국 MIT에서의 포닥. 총 세 번의 포닥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포닥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내가 정말 좋은 교수가 될 수 있을까?’, ‘존경받는 교수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저 자신을 의심하게 될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타지 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유학을 하는 본인도 힘들지만, 그 가족도 똑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포닥 시절, 특히 시스템 신경과학에서 신경 공학 기술 개발로 전공을 바꿀 때 저는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했습니다. 당시 아내는 ‘당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가라’며 지지해주었고, ‘잘할 수 있을 거다. 당신은 신께서 선택하신 능력을 준 사람이다’라며 꾸준히 격려해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제게 최고의 내조자이자 동료이고 동지입니다.
 

그동안의 힘든 시기도 이겨내고 지난 9월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조교수로 정식 임용되면서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셨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기관에서 채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지원부터 임용까지 그 ‘여정’도 험난했을 것 같아요.
 
저는 2018년 중순쯤부터 대학 교수직을 지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미국과 한국 등의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 이력서, 연구계획서, 강의계획서 등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내면은 다부지게 단단해진 것 같아요. 이듬해 8월 즈음에 미국의 몇몇 대학 교수직에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대학도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그중 하나가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였습니다.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임용 지원의 서류 심사에 합격한 다음에 면접 기회를 받게 되어 2020년 1월, 한국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면접을 본 날짜가 1월 5일인데, 2주 후인 1월 20일, 국내 코로나19 환자가 처음 발생했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중국에 코로나19가 점점 퍼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면접을 현지 캠퍼스에서 본 이후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공대 학장님, 후에는 총장님과의 면접을 보아야 했는데 그때는 이미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번진 이후였기에 원격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카이스트에 오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수로 지원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의 커리큘럼을 찾아보고 공부했었는데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만큼 뇌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분들이 모여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하는 곳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학, 생명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화학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시며 시너지를 내는 학과입니다. 저는 이렇게 멋진 연구기관이자 학교인 모교에 다시 오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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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뇌신경학회에서 박영균 교수(당시 MIT 박사후과정 중)가 발표한 논문 포스터. 카이스트 박사과정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김대수 교수는 이제 어엿한 교수 동료가 되어 모교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11년 동안은 ‘학생’으로 재학하다가 이젠 ‘교수’로서 다시 모교에 오게 되었는데 그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카이스트는 지금의 제가 있게 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입니다. 과학자로서, 공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출 수 있었고,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제가 원하는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카이스트 생명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지만, 바이오및뇌공학과나 다른 과의 수업도 자유자재로 수강 및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배움에 한해서는 원없는 자유와 학구적인 분위기 때문에 제가 연구를 이어나가고 성과를 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 이곳에 교수로 부임하여 제가 그동안 연구하며 배운 것들을 후배들께 지도하며 전달하고 후배들이 꿈을 펼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번 학기에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수업은 많이 못하셨을 것 같아요. 부임 후 첫 강의인데 어떤 강의를 맡으셨는지 소개해주세요.
 
카이스트는 기본적으로 강의가 영어로 진행됩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Single Cell Brain Mapping]이라는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학과와 과목의 목표가 학제적이기 때문에 전산과, 생명과학과 등 바이오및뇌공학과 외에도 여러 전공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으며, 박사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이지만 네 명의 학부생이 청강하고 있습니다. 이 과목은 뇌 전체의 지도를 만드는데 이용될 수 있는 최신 기술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대면 수업은 못하고 Zoom 프로그램을 이용한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교육 철학이 있으시다고요?
 
저는 다른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는 ‘다원주의’를 교육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대학의 교육은 어떠한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때,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문에 대한 ‘열린자세’를 고양시킬 수 있는 교육과 멘토링을 대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뀌어 가는 사회 때문입니다. 사람이 쌓아올린 지식의 양은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고,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배울 수 없기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가진 인재들은 협업에 참여하고, 혹은 협업을 리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다원주의’를 가지도록 하는 방법으로 제가 생각해본 하나는 과학 수업에 ‘역사 강의’를 접목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패러다임이 그 분야를 지배하다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됨으로써 과거의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과정이 반복되며 과학이 발전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누군가 수돗물에 납을 넣는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리겠지만, 납이 사람들에게 유해하다고 알려지기 전까지는 휘발유에도 납이 들어있었고, 심지어 수도관도 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특정한 발견을 소개할 때, 그 지식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정한 발견 전에는 과거엔 어떤 패러다임이 존재했었고, 그것이 왜 사람들이 맞는다고 생각했었고, 이 특정한 발견 이후 사람들의 반응과 사회적 반향들은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결국엔 어떻게 하여 사람들이 오늘날의 생활 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과학과 역사를 함께 소개한다면 학생들이 ‘다원주의’에 대해 훨씬 더 잘 이해하면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방법은 ‘Debate Discussion’인데요.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세 팀으로 나누어 현 시국에서 결론을 못 내리고 논쟁 중인 사안에 대해 동의를 하든 동의를 하지 않든 상관없이 편과 입장을 나누어 토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사안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음에도, 지지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서 토론을 하다 보면 ‘왜 이것을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존중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다원주의’를 제 강의를 통해 고양시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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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 교수는 카이스트 재학 중 10년간 합창 동아리 '코러스'에서 활동했다.
사진은 2011년 11월, 합창단 공연 당시 합창단에서 즐겁게 활동했던 선배인 김세현, 김철호와 함께.
연구를 정말 좋아하지만, 모두의 삶이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 해소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스트레스 쌓인 것도 모르고 그저 저 자신에게 깊게 몰두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연구하는 순간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죠? 사람들은 제게 ‘넌 왜 화가 나도 과학을 하니?’,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연구를 하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제겐 아이가 둘이 있어요. 첫째는 7살이고 둘째는 2살이에요. 온종일 연구실에서 수많은 연구 자료와 씨름하다가 기운을 쭉 빼고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생기가 돌아요.
 
제가 학부 때 카이스트에서 두 개의 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하나는 ‘가오리’라는 수영 동아리와 ‘코러스’라는 합창 동아리예요. 미국 연구실은 사생활을 존중하는 문화라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고, MIT 수영장에서 수영을 많이 했어요. 수영을 하다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상쾌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노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아내를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오르네요. 지인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함께 축가를 하며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앞서 언급했듯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카이스트 합창 동아리에서 10년 동안 활동을 했어요. 합창 동아리에서는 뮤지컬 공연도 자주 했어요. 뮤지컬을 좋아했는데 당시 아내는 미국의 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우연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는 아내와 만나 그렇게 뮤지컬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있지요. 가끔 연구를 하며 막히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뮤지컬 노래를 듣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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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미국 MIT에서 열린 뮤지컬 배우이자 싱어인 서채송 씨가 참가한 "The Pirates of Penzance" 오페라 공연 당시 . 유학시절 박영균 교수와 결혼한 그녀는 박영균 교수가 가장 힘들 때 그의 곁을 지켜준 든든한 조력자이자.
2000년 과학고등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올해 2020년. 20년간 과학도의 길을 걷고 계시는데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했을 것 같나요?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무엇이 되어있을 것 같나요?
 
저는 2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과학고 진학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과학고는 특수목적을 둔 학교의 특성상 과학과 수학 과목을 배우는 시간이 긴데, 저 같은 경우는 과학과 수학을 좋아하니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아요. 또한, 과학고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친구들과 함께 자고 한솥밥 먹으며 오랜 시간 모여앉아 토론하고 문제를 풀며 시간 보내었던 것이 추억으로 깊이 남아있고, 그 친구들은 지금도 아주 소중한 인연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늘 손으로 무언가 하는 것을 즐겼는데요. 만약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의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당시 생쥐의 뇌수술을 많이 했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시는 외과 의사분들이 하는 수술과는 천지 차이지만, 만약 과학자가 되지 않았으면 외과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른 직업은 잘 상상이 안 갑니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민첩성이 떨어지고. 합창은 10년을 했지만,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고… (웃음) 그래서 외과 의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과 꿈은 어떻게 되시나요?
 

꿈과 목표는 교육과 연구 두 가지로 나눠서 있는데요.
 
교육적인 부분은: “카이스트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과 함께 일하면서 학생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뇌 혹은 뇌 기술 개발,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면서 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꿈입니다.
 
만약에 제가 연구실을 열고 10년, 20년이 지나 다섯 명 정도의 학생이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저보다 나은 교수가 되어 있다면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연구적인 부분은: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한가지 목표이고, 그 기술들로 인해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의 연구들이 촉진되고, 우리 뇌에 대한 지식이 한 차원 깊어질 수 있게 하는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해서 20년, 30년, 그 후 언제라도 치매나 우울증, 자폐증 같은 질환에 실제로 제 연구가 적용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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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조교수로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박영균 교수와 앞으로 그와 함께 연구를 이끌어나갈 그의 첫 랩 소속 제자 몇몇과.
에필로그... (박영균 교수의 못다한 이야기)

저는 모든 학문의 종착역은 그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의 ‘궁금증’, 즉 ‘본인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근에 신경과학, 뇌에 관한 과학이나 공학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제 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므로 ‘뇌’에 관한 연구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 인터뷰를 읽고 계실 독자, 특히 학생분들께서 신경과학 및 신경 공학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두시고, 연구에 참여해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과학 연구가 중요시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뺄 수 없지요. 코로나19의 창궐 이후 과학 연구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사회적으로 많은 분이 실감하셨으리라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19는 언젠가 정복되겠지만 그전에 사스와 메르스가 있었듯 이런 대유행 질병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나게 될 것인데 이런 질병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과학과 공학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11여 년간 학생으로, 지금은 교수로서 제가 서 있는 ‘카이스트’라는 대학은 굉장한 뛰어난 학생들과 교수진이 서로 활발히 의사소통하면서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게 모인 학교라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얼마 전 제 학과의 학생이 창업하였습니다. ‘연구하기 위해서’는, 또한 ‘연구하기에’는 정말 좋은 학교이며, 이룬 연구를 바탕으로 창업한다거나 발전시킨 기술을 가지고 의학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과학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의사가 되는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카이스트는 연구’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쌓은 과학 지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의 문은 많은 뛰어난 여러분을 위해 열려 있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2021년 3월, 카이스트에서 만납시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영균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본 기사는 기획 인터뷰로 [슬로우뉴스] 언론사에 동시게재 됩니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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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문정훈>

3/11/2020

 
그의 SNS를 보고 있노라면 먹는 이야기와 음식 사진으로 가득 차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교수의 SNS와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그는 말한다.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노는 세상’을 연구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세계를 뛰어 다니고 있다. 지금도 누구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것 같은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문정훈 교수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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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1988년~1991년 부산고등학교 졸업
1991년~1996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사 졸업
1997년~1999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석사 졸업
2002년~2006년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경영학 박사 졸업
                             (Management Science & Systems) 

[경력]
1997년~2001년 서울대 교내 벤처 이지팜 (창업 참여)
2006년~2010년 KAIST (한국과학기술원, ICU) 기술경영학과 교수
2010년~現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연구 영역]
- 농식품 분야 마케팅 및 브랜드 경영
- 농식품 분야 산업 전략
- 농식품 분야 정보 경영
- 농식품 분야 신제품 개발
- 지역 및 커뮤너티 비즈니스 개발 

[주요 저서]
“푸드 트렌드 No. 1: 취향존중” (2017)
“푸드 트렌드 No. 2: 펀슈머” (2018)
“푸드 트렌드 No. 3: 뉴밀리어” (2019)
“슬림 디자인” (2017, 편역서)
“음식의 가치: 10인의 음식 탐구자가 말하는” (2018)
“우리 한닭 이야기: 그리고 28가지 요리법” (2018)
“푸드 로드” (2020)

[주요 연재 칼럼]
식품저널 “문정훈 교수의 농식품 비즈니스 이야기” (2014년~2016년)
농심 누들푸들 “문정훈 교수의 식품 심리학” (2015년)
농심 누들푸들 “좋은 음식을 먹자” (2016년)
중앙일보 “문정훈의 미래의 밥상” (2016년)
이데일리 “문정훈의 맛있는 혁신” (2018년~2019년)
한국일보 “문정훈 칼럼” (2019년)
매일경제 “더 테이블” (2019년~現)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에서 푸드 비즈니스 랩을 이끄는 교수 문정훈입니다. 저는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고,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먹는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랩에서는 우리의 연구 영역을 “From Earth to Mouth”라고 설명합니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농식품 산업전략, 농식품 마케팅, 그리고 농식품 융복합 및 정보경영. 이 세 가지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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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도시 출신 농대 교수가 농사를 한 번도 지어보지도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여 농부들이 보기엔 장난 같겠지만 100평방 미터 정도의 땅을 빌려 2년간 텃밭 농사를 지었다. 아니 농사짓는 흉내를 내어 보았다는 말이 맞겠다. 배운게 하나 있다면 '불면증 환자에 쟁기질은 특효약이라는 것'.
경영학 박사이시지만 학부와 석사는 농업생명과학대학 출신으로 현재는 모교에서 농식품 산업, 정보, 신제품 개발 등을 연구하고 계십니다. 현 분야에 몸담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 진학 전까지 고향에서 자랐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가난을 딛고…’하는 그런 극적인 배경을 가지진 않아요. 전형적인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계에 종사하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 교수’이니 많이들 제가 학창시절 공부를 아주 잘했을 거라고들 생각하십니다. 사춘기와 반항기가 또래와는 상당히 늦게 고2 말 때쯤 왔던 것 같아요. 그 때문인지 고 3 때 학업에서 상당히 고전했습니다.

제 두뇌가 또래와 비교하면 가장 번뜩였던 시기는 오히려 고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제 두뇌의 암기력은 정말 ‘끝판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중학교 시절의 사회 교과서는 머릿속에서 책장이 넘어가고, 책장에 있던 그림과 매 단원의 제목들 글자들도 그대로 그림처럼 프린트되어 남아 있어요. 아마도 지금도 제 두뇌 어딘가엔 ‘포토그래픽메모리 암기력’의 역량이 숨어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사춘기와 반항기를 맞아 그 역량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고3 말기에 다시 한번 크게 작동했던 것 같습니다. ‘기필코 서울대를 가겠다’라는 목표를 세웠고, 그 동기부여는 ‘포토그래픽메모리 암기력’을 작동하게 했습니다. 목표가 생기니 달라지더군요.

현시대의 입시 제도, 특히 수시전형에서는 암기력 좋은 지원자가 그다지 유리하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정시 제도에서도 예전만큼 암기력이 중요하지 않지만, 제가 입시생이던 학력고사 시절에는 암기력이 정말 중요했어요. 그래서 다행히 저에게 유리했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먹거리에 관련한 관심도가 올라가면서 외식, 조리, 농업 등에 대한 관심도도 같이 올라갔습니다. 특히 농업생명과학대학은 ‘생명과학’과 직결되기 때문에 현시기엔 상당한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입학하던 91년에는 그리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도시 출신인 제가 농업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나요? 다수의 학생이 그러했듯, 당시 저 역시 전공보다는 ‘서울대학교’라는 학교를 목표로 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 때 저의 맹목적이었던 서울대학교 진학 선택은 참 잘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제 친구 중에 존경할만한 친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강의 중 배운 것도 많았지만, 친구들로부터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활은 참 즐거웠습니다. 동아리 활동이 저의 대학생활의 절반 이상이었어요. 입대 전까지 ‘한소리’라는 교내 합창단 활동도 했고, 교내 미식축구부에서 2년간 선수로서 활동도 했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학과 공부에서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특히 저의 석사 지도교수님이셨던 최영찬 교수님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최영찬 교수님께서는 제가 석사 진학을 고민하던 1996년 가을, 저와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이제 우리 농업은 경제학이 아닌 경영학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식품산업과 외식산업이 잘 되어서 농업을 끌고 나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 날의 그 말씀은 저를 여기까지 있게 하셨습니다. 제가 모교의 교수로 부임하며 저는 교내에서 교수님 바로 옆방을 쓰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분의 제자이자, 후배이며, 이젠 동료 교수가 되었지요. 교수님께서는 은퇴가 2년 남으셨고, 아직도 저의 좋은 멘토가 되어 주고 계십니다.

제 학부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농업경제학은 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입니다. 농산업의 발전을 정책으로 만들어 나가는 거지요. 농업에 대한 정책은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렇기에 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는 관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영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쌀, 쇠고기, 돼지고기 같은 농산물을 일상재(Commodity)로 여겨지는 경제일수록 정책이 더 큰 영향을 끼칩니다. 소위 ‘공급 곡선과 수요 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이 형성되지요. 정부는 정책으로 이 공급 공선을 움직이며 가격을 조정하고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료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소비자가 쌀, 쇠고기, 돼지고기를 ‘일상재’가 아닌 ‘브랜드 제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단지 공급 곡선과 수요 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이 형성되지 않고, 매우 복잡한 원리나 체제로 바뀝니다. 비유해볼까요? ‘핸드백 가격은 공급 곡선과 수요 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이 형성된다.’ 이상하지요? ‘샤낼’ 백의 가격과 마트 ‘PB’ 상품 백의 가격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소비자들이 상품의 특성을 차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정부 정책으로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힘들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경영학의 관점’이 중요해집니다. ‘브랜드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마케팅을 어떻게 하는가?’, ‘고객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지죠. 경영학의 영역이 되지요. 제 지도교수님께서는 90년대에 우리 농산물도 이렇게 제가 앞서 비유한 ‘핸드백’처럼 ‘정책의 원리가 바뀌게 되고, 따라서 경영학이 중요한 시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셨습니다.

현시대의 상황은 어떤가요? 감자나, 양파 같은 것은 여전히 ‘일상재’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만, 쌀, 포도, 사과, 쇠고기 같은 품목들은 ‘브랜드’, ‘품종’, ‘생산지’에 따라 소비자들의 취향과 선호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일상재’의 영역을 벗어났지요. 그러니 농업에서 ‘경영학’의 접목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경영학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학자는 국내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영찬 교수님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계셨고, 저는 이 길을 제가 개척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업경제학 박사 과정을 수료까지 하였지만, 최영찬 교수님은 제게 ‘박사과정 학위 졸업을 농업경제학이 아닌 경영학을 하는 게 어떻겠냐’라는 조언을 해주셨고, 다시 뉴욕주립대학교 경영대학원으로 진학해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4년여간 KAIST에서 경영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농식품 분야에 경영학의 길을 제대로 열기 위해 2010년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로 이직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석사 진학 당시 이미 계획했던 것들을 차곡차곡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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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0명의 음식 탐구자가 모여, 음식과 관련한 다양한 가치를 살펴보는책 <음식의 가치> 공저했다.
SNS를 접하시는 많은 분은 "교수님은 맨날 먹고, 마시고, 놀러 다닌다"라고 생각할 것 같을 정도로 수많은 나라와 국내 특산물에 대해 포스팅을 하십니다. 연구 분야가 분야인 만큼 세계 수많은 나라의 요식업을 체험하시며 겪은 에피소드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앞서 정책에 대한 설명해 드렸듯, 현대 대한민국에서 농업의 발전은 농부가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요가 공급을 이끄는데, 특히 먹거리야말로 전적인 수요가 공급을 이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통업을 포함한 식품산업과 외식업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농업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품산업과 외식업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빠르게 읽어내고 이를 비즈니스에 반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식품산업과 외식업의 요구에 따라 농업의 방향이 정해지지요. 즉, 먹거리 산업은 다른 여타 산업들보다도 특히 ‘어떤 수요를 만들어 내느냐’가 가장 핵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를 비롯한 제가 이끄는 서울대 푸드비즈랩의 인원들은 신제품과 신메뉴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농업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식품기업들이 어떤 제품들을 내놓고, 어떤 신제품을 기획하며, 외식업에서는 어떤 메뉴들이 인기 있는지 그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정말 ‘엄청나게 많이’ 먹습니다. 수요를 이해하기 위함이지요.

하나 재밌는 것은, 수요 쪽이 공급 쪽을 너무 이해하지 못하면 예기치 못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관측을 하면, 오히려 국내 농업에 불리하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산지에서의 어떤 새로운 시도가 있는지, 어떤 가치를 담은 농산물이 나오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들을 발굴해서 소비자, 식품제조사 및 유통업체, 외식업체와 최대한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분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제가 ‘외식업’ 관련 연구를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 저는 외식업 전문가가 아닙니다. 외식업 관점에서 소비자를 어떻게 만족하게 할 수 있는지, 외식업 관점에서 어떻게 농업과 함께 상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국외 출장도 많고, 국외 여행도 자주 갑니다. 제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공무 출장을 가는 때도 있지만, 방학 때에는 가끔 제가 여행을 계획해서 가기도 합니다. 그때 같이 가고 싶은 분들은 같이 가자고도 제안하기도 하고, 실제로 동행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함께 여행을 함께하시면 저의 일정에 상당히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동해 들어가는 관문으로만 활용하고 계속 시골로만 다닙니다. 시골도 그저 시골이 아닌 한국으로 말하면 읍내 촌을 굽이굽이 들어간 ‘깡 시골’이죠.

여행을 가도 관광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 지역엔 어떤 음식재료들을 재배하는가?’, ‘이 음식재료들을 어떻게 음식문화에 녹여 내고 있는가?’ 등을 외식업과 식품 가공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가장 서민적으로 먹는 상품, 가장 고급스럽게 먹는 상품 등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합니다. 생산에 대해서는 생산자들, 첫 재배자인 농부와도 이야기를 나누지만, 음식재료를 잘 다루며, 생산자보다 그 음식재료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셰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저희에겐 정말 중요합니다. 생산자는 재배 기술에 능하지만, 이를 소비자에게 가치 제안할 수 있는 측면은 셰프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전 세계에 꽤 많은 생산자(농부)들, 셰프들, 로컬 식품제조사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행에서 지역의 농산물과 음식을 관찰하고 먹고, 생산자, 셰프, 가공 전문가들과 만나서 대화하니 저의 상상력도 향상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동안 상상도 못 하던 것을 저들은 실현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배우게 되면, ‘이를 한국에서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랜 고민을 하고, 나아가서는 이를 오히려 완전히 뛰어넘는 ‘한국만의 그 무엇’이 될 수 있도록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합니다.


현재, 국가 연구·개발 사업으로 토종닭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울대 푸드비즈랩은 우리 토종닭의 홍보 마케팅을 맡았습니다. 저희가 상품 아이디어를 기획하여 외식업체, 식품제조사들과 함께 나누며 토종닭의 소비를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희는 ‘토종닭 스테이크’, ‘(뼈 없는) 토종닭 구이 상품’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상품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 좋습니다.

​이 상품 기획의 출발은 프랑스 브레스 (Bresse) 지역의 토종닭관 련된 조리법과 문화, 외식 상품화, 셰프와 생산자들의 협업과 역할 등을 관찰하면서 시작되었어요. 복잡한 과정과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토종닭은 푹 끓여 먹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구워 먹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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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여름.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된 토종닭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鷄)발자' 촬영 중.
​전세계 다양한 토종닭과 그 요리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우측은 함께 출연한 신민섭 루블랑 셰프.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책과 칼럼 연재를 통해 많이 알려져 계십니다. 학자로서 결과를 책과 칼럼으로 풀어내신다고 하는데, 논문으로는 발표를 안 하시나요? 특별히 책 출간과 칼럼 게재 활동에 애정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교수이자 학자로서 연구한 결과물을 논문을 통해 발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할 의무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SCI급 저널에 출간은 논문은 35여 편이고, 그 외 국내외 저널과 학술대회 발표 논문 등을 합치면 300편이 넘습니다. 다작한 편이라 할 수 있지요.

논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새로운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학술 논문은 새로운 지식이 ‘학계’라고 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머물고 말거나, 이 지식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고, 산업의 현장까지 전달되어 실현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자 그동안의 연구 결과들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 출간과 칼럼 기고를 통해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을 쓸 때에는 타겟층을 분명히 분리하여 씁니다. 현재, 저희 랩에서 1년에 한 번씩 출간하는 ‘푸드 트렌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3호까지 출간되었지요. 이 책은 농업계, 식품업계, 외식업계에 계신 분들을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그리고 과거 출간했던 ‘우리 한닭 이야기’ ‘음식의 가치’ 그리고 이번 달 출간되는 ‘푸드 로드’와 같은 책은 소비자가 대상인 책이지요. 마지막으로 신문사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은 정책 입안자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구 결과에서 나온 내용과 지식이 현장까지 전달되는데 평균적으로 2~3년 걸릴 것을 단시간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특정 대상이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방송에도 가끔 출연합니다. 음식이나 농업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및 교양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로 간단한 인터뷰를 하기도 하지만, MBC ‘마이리틀 텔레비전’이라는 예능에 8회 정도 출연을 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한 주제로 김구라 씨와 함께 닭, 냉동만두, 해산물, 돼지고기 등을 다루었지요. 그리고 ‘위대한 계(鷄)발자’라는 4부작 다큐멘터리에 셰프님 두 분과 함께 출연하여 토종닭의 세계에 관해 깊이 탐구하는 과정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송 하는 이유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음식과 식재료에 있어서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도록 돕고, 그들을 더 세련되고, 까다롭게 (Sophisticated)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련되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은 질적으로 높은 수요를 만들어 냅니다. 특정 상품군에 세련되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 지역에서 그 상품군의 관련 산업이 발전하게 되지요. 수요가 공급을 자극하여 혁신을 만듭니다. 수요는 양도 중요하지만, 질이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우리 소비자들이 각 음식재료에 대해서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알고, 세련되고, 까다로운 감성을 가지게 될 때, 그 원재료를 생산하는 농업, 이를 가공하는 식품제조업, 이를 움직이는 유통업, 이를 요리하는 외식업까지 함께 발전하게 됩니다. 저와 저희 랩이 가장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세련되고 까다로운 소비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여러 칼럼, 책, 이런 방송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그 방향을 인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3년여 동안 SBS 라디오에서 팟캐스트로 방송하고 있는 ‘말술남녀’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여 다양한 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맨날 먹는 소주와 맥주가 아닌, 자신만의 취향을 찾자는 취지입니다. 다양성이 더해지면, 그 다양성 속에서 산업의 경쟁력이 자연스럽게 상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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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병 소주와 갈색병 맥주만을 마시는 분들에게 전통주를 포함한 새로운 술의 세계를 알려드리는 SBS 라디오 팟케스트 '말술남녀' 멤버들. 3여년동안 출연하며 애주가를 더욱 까다로운 소비자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농식품 분야의 연구를 하는 만큼 식품 기업과 외식 기업들의 협업 또는 산학협력을 진행하고 있는지, 하고 있다면 어떠한 형태로 진행하고 있는지 소개해주세요.
 
저희는 저희가 연구를 하면서 획득하게 된 지식과 역량을 논문이나, 책, 칼럼으로 단지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실현’도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협업, 산학협력입니다. 바로 현장에 있는 분들과 함께 현장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겁니다.

농수산업 분야에서는…
포항 송학농장, 홍성 성우농장, 안성 조아라 농장, 보령 다정수산 등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송학농장의 경우 아주 독특한 재래돼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어떻게 상품화할 수 있을까?’에 대해 수년째 함께 논의하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만들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우농장은 돈사 환경제어 시스템 관련해서 연구를 했고요. 안성 조아라 농장은 토종닭 농장으로 저희가 상품 패키지 개발에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정수산은 젊은 선장님이 멸치 조업을 중심으로 해서 아주 고품질의 서해 수산물을 가공까지 하고 계시는데, 마케팅 전략 관점에서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 다른 관점에서, 다양하게 협업하고 있지요.

외식기업으로는…
막걸리 전문점인 월향, 롯데 계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과 협업을 하고, 컨설팅을 해드렸습니다. 지금도 몇몇 업체에서 컨설팅 요청을 하셔서 협업을 진행 기획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습니다.

식품제조사로는…
과거 SPC 그리고 CJ제일제당과 산학협력을 했습니다. SPC는 사회적 가치 창출 전략에 관한 것이었고, CJ는 비비고 관련한 글로벌 홍보 마케팅에 관련된 것이었지요. 삼진어묵과도 협업을 했고, 다이어트 업체인 쥬비스와도 함께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현재는 스타트업기업인 서울시스터스의 김치파우더 제품 개발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풀무원과 최근 새로운 음료 제품 콘셉트 개발 및 수산물 간편식 제품 콘셉트 개발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음료 제품은 아마 4월쯤 출시될 것 같아요. 저도 저희의 연구 결과물이 어떻게 실제 상품으로 출시될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 외…
농식품부, 농촌진흥청, 한식진흥원, 농정원, 한국 농수산유통공사 등 국가기관과의 협업을 비롯해 국가 연구·개발 사업도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토종닭 마케팅 및 상품화, 토종꿀 마케팅 및 상품화는 장기 연구·개발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산학협력의 경우는 반드시 서울대학교 산합협력단과의 계약을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과제 범위와 기간에 따라 비용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가 되지요. 그러나 영세한 스타트업기업이나 농업 생산자와의 협업은 때에 따라서 비용 없이 조금씩 도와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업 및 생산지, 관련자분들과의 산학협력 과정을 통해 제가 더 많이 배우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우정으로 돕지만, 오히려 제가 돈을 드려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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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 교수는 2016년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식품전시회인 SIAL Paris(격년 개최)에서 '올해의 혁신 식품' 선정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초청받아 매회 선정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의 유일한 아시아인이다.
농경제학자로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교수님 본인은 ‘케인지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신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부의 대기업 규제나 농업인들에 대한 보조금 정책에 부정적인 발언을 자주하는 저를 보며 많은 분은 제가 ‘신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시지만, 사실 저의 성향은 ‘케인지언’에 더 가깝습니다.

‘케인지언’의 핵심은 결국, ‘수요를 창출해야 경제가 돌아간다’라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기업 규제 관련 정책이 수요를 더 창출한다고 보기 어렵고, 농업인들에 대한 보조금이 수요를 더 창출하지도 않는데, 이런 정책이 ‘케인지언’에 기반을 둔다는 주장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정권 이후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간 경제정책은 일관되게 포퓰리즘에 가깝습니다. 특히 농업 정책은 더더욱이요. 여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 하고, 야당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정의의 사도’가 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당신은 서민이고, 당신의 돈을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빼앗아 갔다’며 국민을 선동하며 대기업을 가리키는 거지요. 그러면서 대기업을 규제하고, 서민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의의 사도’ 코스프레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우리 농산물 가격이 왜 이리 비쌀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엔 우리나라 농산물이 비싼지도 몰랐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교묘하게 ‘농산물 가격이 비싼 건 유통 대기업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많이 챙겨 먹어서 그렇다’라는 선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조금을 지급할 명분이 생기고, 이 보조금은 농촌 지역에서 표를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젠 이에 대한 대찬 선전을 여야 구분 없이 경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품목마다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 농산물이 비싼 이유는, 국내 농업 생산비 자체가 높은 게 가장 큰 이유 때문입니다. 규모가 너무 작고, 기술집약적이지 못한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생산비를 낮추려면 농업에 우선 자본이 들어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생산 단위 간 통합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다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의 여러 정책 자체가 이를 막고 있지요. 그렇기에 저는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정부의 관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니, 저를 ‘신자유주의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이 많습니다.

제가 ‘정부는 농업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들어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추도록 관여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 단위 간 통합이 일어날 수 있도록 관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구요.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타 산업에서 자본과 통합이 없는 혁신을 본 적이 있으신지.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왜 농업의 규모화만 주장하냐? 그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반박을 하시죠. '네. 아닙니다.' 농업의 규모화가 정답은 '아닙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한 산업 내에서 다양한 ‘전략집단(Strategic Group)’이 존재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경영 목표와 전략, 또 서로 다른 형태와 규모를 가진 다양한 경영체 집단이 존재해야 산업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 농업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다양한 전략집단입니다. 현재 우리 농업의 산업 구조는 파편적(Fragmented)이라고 봐야합니다. 역동적이기가 힘듭니다.


정부가 농업과 농촌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농촌 지역 인구소멸 문제와 관련하여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주 지원 및 복지 정책’을 비롯해 음식재료에 대한 소비자들의 양적인 수요와 질적인 수요를 끌어 올릴 정책, 지역 농산물을 가공으로 그 가치를 높이는 ‘지역 농식품 클러스터 정책’ 등 수많은 정책을 재구축할 길이 너무 멉니다. 그러나 정권은 십수 년이 넘게 여론의 지지도를 의식한 정치적인 농업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방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식품부의 젊은 사무관들을 만나보면 상당 부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관은 영혼이 있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는 농식품부에 있는 게 아니라 고인 물인 정치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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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 교수는 연구를 하며 또 결심한다.
'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바꾸겠다'고.

SNS를 통해 시국에 대한 교수님의 뚜렷한 소신을 밝히는 포스팅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희 랩의 목표는 ‘세상을 바꾸겠다’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바꾸겠다’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행복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더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삶에서 사람들이 행복한 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잘 한번 떠올려 볼까요? 사랑하는 이의 행복한 생일이 되었을 때 우리가 모여서 일을 하나요? 두 남녀가 만나 새로운 가족으로 출발하는 행복한 결혼식에 신랑 신부와 그 가족과 하객들이 모여서 수영이나 낮잠을 자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우리는 언제나 이런 행복한 순간에 모여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어울려 놉니다. 이건 인간의 DNA에 언제부터인가 각인된 것입니다. 인종과 문화,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행복한 순간에는 먹고, 마시고, 노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행동이 언제나 타인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연구 주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에 관련된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나 혼자 맛있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한 미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더불어 행복한 음식에 관한 연구를 많이 수행하고 있고, 그 중심에 사회적 가치 창출이 있지요. 사회적 가치 창출은 경제적 가치 (Economic/Business Value) 창출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돈 버는 것’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고, 이타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가치’의 창출입니다.

근래 사회적 가치 창출 중 가장 주목받는 개념은 바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입니다.환경에 관련된 사항도 많이 다루지만, 도시와 농촌 간의 관계, 소비자와 농부의 관계, 식품제조사와 농부와의 관계 등도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이 이득을 볼 때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거나, 착취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나서서 손해를 보는 쪽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규제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시너지를 내며 상승할 수 있는, 그리하여 공유 가치 창출(Creating Shared Value)이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과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저희 랩에서는 이러한 환경의 가능성과 구현의 방법에 관해 연구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먼저 지금까지 저와 서울대 푸드비즈니스 랩이 했던 여러 가지 연구 내용과 에피소들을 재밌게 엮어낸 책 ‘푸드로드’가 이번 달에 출간됩니다. 저희가 어떻게 연구를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하며, 그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고 적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읽기 편하게 풀어서 썼습니다. 일종의 ‘이야기책’ 같은 겁니다.

이 책은 전문서적이 아니라 교양서에 가까운 책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렸던 풀무원으로부터 의뢰받았던 음료 신제품 콘셉트 개발 과정, 문샤인이라는 외식업체가 요청한 프랑스 포도주를 더 팔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에 대한 저희 랩의 문제 해결 과정 등. 의뢰인이 저희 랩을 찾아와서 문제 해결을 부탁하고, 저와 저희 랩 연구원들이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 대한 에피소드 등 총 열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랩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데, 이 책이 그분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고, 오히려 호기심을 더 끌어 올리는데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올여름을 목표로 ‘유럽의 시골’이라는 또 다른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시골을 많이 다니는데, 특히 유럽의 시골에서 제가 보고 느꼈던 것, 먹었던 것,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했던 내용을 일종의 음식 기행문 형식으로 집필 중입니다. 절반 정도 집필하였고, 현재는 한참 작업 중입니다.

저는 앞으로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겁니다. 그 출발은 1996년 제 지도교수님과의 술자리에서 비롯되었고, 그 길을 제가 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시행착오도 많았고, 제 고집이 강하다 보니 여러 가지 부딪히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의 진정성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연구와 프로젝트를 함께 해보셨던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제가 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약속이나 제 신념을 저버리는 행동을 절대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저를 그런 사람으로 인식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신념 있는 사람, 학자, 교수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전국 각지의 많은 분이 힘들어하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하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문정훈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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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전쟁], [멀티팩터] 저자 <김영준>

2/12/2020

 
2007년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을 꾸준히 올린 10년 만인 2017넌 '골목의 전쟁'을 출간한 김영준 작가. '1만 시간의 법칙'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재까지 초판 10쇄가 재판되며 꾸준한 인기와 주목을 받고 있다. 무명작가로 시작하여 지난 2월 4일 그의 신간인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을 출간하기까지. 김영준 작가와의 솔직, 담백 가득한 인터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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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카페에서 일하던 중.
김영준 작가는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은 직장인과 다르기에 좋아 보일수 있으나
매일매일 카페에 출근을 하다보면 결국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라고 말한다.
[출생]
1983년 9월 9일

[학력]
성도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경력]
2007년~現 네이버 블로그 ‘Second Coming’ 운영
2010년~2012년 IBK 기업은행 잠실지점 외환/기업여신 계장
2017년 골목의 전쟁 (스마트북스) 저자
  •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선정
  • 2018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2019년 한국의 논점 (2018) 등저
  • 2019년 10월 기준 10쇄 발행
2020년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 (스마트북스) 저자

[미디어 출연 및 강연]
>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TBS 민생연구소
> 부산시 인재개발원 글로벌인재개발양성과정
> 서울신용보증재단
> 동서식품
> 현대홈쇼핑
> 흥국증권 리서치센터 외

[칼럼 연재]
> 허핑턴포스트
> 시사인
> 오마이뉴스
> 서울신문
> 비즈한국 외
現 서울신문, 미래에셋은퇴연구소 등에 기고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골목의 전쟁]의 저자 김영준이라고 합니다.
2007년부터 ‘김바비’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경제 및 사회현상에 대한 글을 써오고 있으며, 이번에 [멀티팩터 :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새로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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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부푼 꿈을 안고 입사 한 IBK 기업은행에서. 2011년 연수 당시 동기들과 함께.
학생 `김바비`는 학창시절에도 골목상권에 관심이 많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었나요?

제 첫 책 제목이 ‘골목의 전쟁’이어서 그런지 제가 원래부터 골목상권에 관심이 많은 줄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 재미와 흥미로움을 가지고 좋아했을 뿐이고 골목상권은 그런 제 흥미로움의 일부였을 뿐이지요.

제 부모님은 방임형으로 자식을 키우신 편이어서 저에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시던 분들이셨는데 그 덕분에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많이 했습니다. 책이 그저 재미있고 좋아서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축구하고, 축구게임을 하고. 제 어린 시절은 아마 책을 빼면 제 나이 또래의 다른 남자들과 별다르지 않을 거예요. 제가 제대로 읽은 첫 활자 책은 제 나이 또래의 아재들이 그렇듯이 삼국지였습니다. 읽으면서 그 글 속의 이미지를 상상하니까 정말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중 책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제 부모님께서 이혼하시면서부터였어요. 당시 동네 이웃 분들이 저만 보면 안타까운 눈빛을 짓거나 저희 부모님에 대해 수군수군 이야기하곤 했지요. 어떤 분은 ‘네가 나서서 엄마 아빠를 화해시켜야지 뭐 하고 있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요. 그 모든 게 다 듣기 싫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져 모든 것은 잊기 위해 독서에 몰두했던 이유도 있었어요. 그 당시 타인과의 대화도 제게는 스트레스였지만, 책은 저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독서 외에 게임도 아주 열심히 했어요.

독서란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던 게 가장 큽니다. 사람들은 주로 책을 읽을 때 ‘내가 여기서 무언가 인사이트를 얻어야 해! 배워야 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일단 ‘재미있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삼국지를 읽고 재미있으니까 초한지를 읽고, 초한지를 읽다 보니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고, 그러다 논어도 읽고,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도 읽고, 흥미에 흥미가 꼬리를 물고 무는 거지요. 또한, 손자병법이 재미있다 보니 동양 전서를 넘어 서양 군서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도 읽게 되고요. 재미있어서 이런 식으로 자꾸 확장되는 겁니다.

그렇게 책과 게임, 그리고 축구만 하면서 보냈던 게 저의 10대였습니다. 공부는 안 했어요.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4년 넘게 방황했는데 그 시기가 비교적 짧았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에서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진로에 대한 고민도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아는 게 없어서 고민이 없었던 쪽에 가까웠어요. 뭘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또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지요. 당시 상황에선 그걸 고민하는 것도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점수였으니까요. 일단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수능 점수부터 높게 내고 보자’라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당시엔 지금과는 입시제도가 달랐고, 수능 비중이 현저히 높았으니 제겐 행운이었어요. 그리고 행운도 잘 따랐습니다. 수능도 그럭저럭 잘 봤으니까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제게 진학할 학과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자 그제야 고민의 순간이 따랐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흥미나 동기부여는 없었지만, 돈은 벌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게 무역학과였습니다. 그 당시 제 나름대로는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벌어 먹고사는 나라니 무역을 배우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였어요.

제 주변엔 입시정보 같은 것도 없었고 진로 상담을 제대로 해줄 전문가나 어른도 안 계셨어요. 아마 당시 누군가가 제게 ‘돈 벌려면 공대 가야 해’라고 했다면 공대에 진학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진학한 무역학과였는데 정작 무역은 재미가 없었고, 제일 재미있게 들었던 수업은 ‘재무학’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을 가면서 관련 책들을 찾아 읽었어요. 피터 번스타인의 [리스크], [투자 아이디어] 같은 책들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관련 수업을 듣기 위해 찾다 보니 무역학과 말고 경제학과와 경영학과의 관련 수업이 많더라고요. 덕분에 무역학과에 몸을 담으면서도 다른 학과의 수업도 무척 많이 수강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CFA (Chartered Financial Analyst:국제재무분석사), FRM (Financial Risk Manager:국제재무위험관리사) 등 금융 쪽의 유명한 해외자격증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금융 분야에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재미’를 쫓아 걸어온 시절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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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퇴사를 권하는 사람들은 퇴사를 하면 그 이후에 모든 일이 알아서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김영준 작가가 은행을 퇴사하고 간 남미 여행은 로망 중 하나였지만 그 로망의 댓가는 매우 비쌌고 가혹했다.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은행 직원으로 일하다가 2년 만에 돌연 퇴사하고 영업직에 뛰어들게 됩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대학 졸업 후 IBK 기업은행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은행은 제가 입사하고 싶었던 최우선순위 직장은 아니었어요. 당시 저희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곤궁을 겪으며 제가 방황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저는 ‘내가 지금부터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가자’라고 생각했었죠. 당시 제가 입사시험에 합격한 곳 중에선 가장 높은 연봉을 제시한 곳이 바로 기업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정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나라의 경제적 고통을 분담하겠다고 공기업과 은행들 신입사원 연봉을 25%씩 삭감해버렸어요. 저는 가장 돈 많이 주는 곳을 가고자 은행을 선택한 거였는데 웬걸 막상 들어가서 동의하지도 않은 연봉 삭감을 당하니 제가 합격한 곳 중에서 가장 낮은 연봉이 된 겁니다. 제 은행 생활의 가장 큰 불만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은행 일이 맞지 않거나, 힘들었던 것 전혀 아니었어요. 선임들과 상사분들 모두 다 좋은 분이었고, 흔히 있을 법한 직장 내 인간관계로 인한 충돌이나 고민 같은 건 없었어요.

오히려 은행 일은 그럭저럭 잘한 편이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게 벌써 10년 가까이 된 데다 행원 생활만 한 것이 전부기에 은행 일에 어떻다고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실수를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어요. 저는 그건 그럭저럭 잘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점에서 담당한 일은 기업 대부와 무역/외환 업무였습니다. 무역학을 별로 안 좋아한 무역학과생이었지만 그래도 배운 가닥이 있어서 어떤 프로세스로 무역서류가 오가는지는 알고 있었고, 해외 송금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도 이해하고 있었기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문의가 올 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고 정확하게 설명은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행의 업무시간 내내 몰리는 엄청난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를 견디는 건 제일 중요한 중압감으로 다가왔어요. 대부분 사람은 은행이 영업을 9시부터 4시까지 한다고 해서 직원도 그 시간만 일하는 거로 생각하시는데 그건 전혀 아닙니다. 또한, 대기 손님이 밀려있는데 손님 안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일 안 하는 걸로 보이는 것도 전혀 아니고요. 처리해야 할 서류도 많고, 전화도 엄청나게 밀려옵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시스템이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경험으론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어요.

그래도 일 때문에 힘들다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모든 직장생활이 그렇듯 ‘안 힘든 일이 어딨겠거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제가 불만이었던 것은 역시나 연봉이었습니다. 강제로 삭감당했고, 언제 회복될지 기약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정부가 바뀐 이후에야 회복이 될 텐데, 회복된다 쳐도 그 기간에 삭감된 연봉만큼을 소급 적용해서 다시 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하니 차라리 다른 곳에 신입으로 입사해서 연봉을 더 받고 싶었습니다. 은행이 아닌 다른 금융업에 도전도 해보고 싶었고요.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민폐가 되지 않게 인사발령 시즌에 맞추어 한 달 전에 퇴사하겠다고 통보를 하고 퇴사를 하였습니다.

여러 금융권 기업에 지원했는데 서류심사는 늘 무난하게 통과했습니다. 다만 면접이 언제나 문제였어요. 당시 저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제 열의를 보이면 잘 해결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기업은행’이라는 남들 보기에 무척 좋아 보이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것 때문에 ‘부적응자’ 혹은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왔으니 우리 회사는 적응 못할 거다’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붙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 퇴사 사유 중 하나가 강제로 삭감당한 연봉이었지만 면접에서 ‘돈’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금물이기에 이에 대한 사연은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편견은 그렇게 더욱 강화되었고요.

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구직하던 당시에 대형은행에 취직하여 짧지만 그래도 근무 경력이 있으니 퇴사하더라도 무난하게 다른 곳에도 합격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같은 지원자 중에서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도 참 많았으니까요.

그렇게 1년이 넘도록 일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너무 이른 퇴사 결정이 제 커리어 전체를 망친 거였죠. 공백기는 계속 길어지고 나이는 더 먹어가니, 커리어는 사실상 끝난 거였어요. 완전히 망했지요. 그 당시 얼마나 많은 불안감과 한숨으로 밤을 보냈었는지… 좌절감도 엄청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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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보험 영업을 하던 시절. 그에게 보험 영업은 매우 큰 딜레마를 던져준 경험이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어요. 배운 도둑질이 있으니 그나마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보험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면 적어도 상품설명이나 전문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을 테니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는 매일 10km씩 걸어 다니며 보험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좌절을 참 많이 겪었어요. 한번은 어떤 분이 질병 보험가입을 희망하셨는데, 당시 당사자분의 질병과 이력 등을 고려하면 가입이 어렵거나, 가능하더라도 제약 사항이 엄청나게 걸리고 보험료도 높게 나오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그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표정이 굳으면서 화를 내시더라고요. ‘자기가 아는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었는데, 그 사람은 다 된다고 하는데 너는 왜 안된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보험료를 비싸게 받으려 하는 수작이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니 당사자께서 말씀하시는 ‘아는 다른 사람’은 당사자의 병력사항을 은폐하고 보험에 가입시키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보험에 가입하면 나중에 질병이 발생했을 때 고지 위반으로 보험금 못 받고 계약 해지됩니다.’라고 그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무능하고 보험료 비싼 거 가입시키려는 사기꾼’이라며 욕을 하시더라고요. 아마 보험 영업으로 소비자를 직접 대면하는 분들이라면 잘 이해하실 겁니다. 이런 상황을 한두 사람에게서만 겪은 게 아니었기에 참 답답했어요. 그러나 보험 영업을 하며 사람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았습니다.
 

2007년부터 `김바비`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블로거는 10년 후인 2017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지요. 바로 `골목의 전쟁` 출간이 그 시작이었는데요. 필명으로 블로그 활동하시던 와중 본인 명의의 책 출간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종종 ‘김바비’란 필명을 어떻게 지었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2007년에 블로그를 만들면서 ‘필명을 뭐로 할까?’ 고민했는데, 그때 켜둔 라디오에 흘러나오던 게 가수 바비킴의 음악이었어요. 그렇게 제 성의 ‘김’을 붙여서 ‘김바비’라고 한 거죠. 아마 그때 가수 인순이 음악이 나왔으면 ‘김인순’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바비’의 풀네임인 ‘로버트’라고 지을지 고민도 해보았는데, ‘로버트 김’이라는 어감이 로비스트의 이름으로 연상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김바비’로 지었어요.

처음 블로그를 만든 목적은 공부를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해외금융자격증인 FRM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는데 공부하면서 정리하는 게 필요했어요. 정리를 할 때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풀어서 쓴다면 ‘그때는 그 지식이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하나 포스팅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덕분에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이 제 블로그를 방문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당시엔 포스팅 하나를 쓰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블로그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2년경부터입니다. 퇴사하고 시간 여유도 있으니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몇몇 글이 다른 경제 블로거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그 덕분에 제 블로그도 구독자가 늘어났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이런 공유와 확산은 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서 포스팅이 금방 발견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포스팅을 꾸준하게 몇 년을 써도 그에 걸맞은 구독자가 없기도 합니다. 그 점에서 저는 운이 좋았어요.

그러다가 별도로 맛집과 연어 무한리필 전문점에 대한 포스팅을 비롯해 상권에 관한 포스팅을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출판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솔직히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책을 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 책을 쓸 깜냥이나 실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어요. 책은 저보다 더 경력과 경험이 출중하신 분들이 쓰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이거 사기 아닌가?’라는 의심도 했어요.

책을 내신 다른 블로거 분들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마음 편하게 먹고 일단 한번 만나보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골목의 전쟁]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책을 집필하는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손에 꼽기가 힘들 정도로 많아요. 처음에 계약했던 출판사가 출판사업을 접는 바람에 잘 쓰고 있던 원고가 붕 떠버리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셔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새로 출판사 구해서 편집하는 동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책의 편집일정이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던 시점이라 낮과 저녁에는 장례식 오시는 손님들께 인사하고, 새벽에는 원고 수정을 해야 했어요.

이제 와서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 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았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자식에게 짐을 안겨주셨던 분이거든요. 제가 멀쩡히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둔 것은 경제적으로나, 생활로나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버지를 챙겨야겠단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계기로 내린 저의 고지식한 선택은 처참한 결과를 맞았고요. 그리고 제 삶에 운명처럼 다가온 기회를 준비하며 정신없고 바쁜 와중에,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시고 세상을 뜨셨어요. 자식으로서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이건 정말 너무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집필 과정이 힘든 게 아니라 그 외적으로 벌어진 일들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그런 우여곡절을 넘은 끝에 [골목의 전쟁]이 출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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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출간된 '골목의 전쟁'은 출간 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며 주목 받았고,
2019년 10월 부로 초판 10쇄가 재판되는 등 꾸준한 인기를 받고 있다.
2017년 출간되었지만 꾸준히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골목의 전쟁`입니다. 무명저자임에도 불구하고 `골목의 전쟁`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사실 제가 이번 새 책인 [멀티팩터]에서 마지막에 쓴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에필로그 제목이 ‘골목의 전쟁은 어쩌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저는 무명저자임에도 완벽한 무명저자는 아니었습니다. 책을 낼 당시에 저는 당시 블로그 구독자 수 7천 명이 넘었고 페이스북은 페이스북 친구와 팔로워 포함해서 6천 명이 좀 넘었습니다. 당시 제 블로그를 구독하시는 분 중에선 다른 경제 블로거들도 계셨고, 금융업계 종사자도 계셨고, 언론 등 다양한 비즈니스에 종사하시는 분들 또한 많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본명은 몰라도 ‘김바비’란 이름으로는 알려진 존재였어요. 그리고 그분들은 책을 많이 사서 보고 읽으시는 분들이기도 했고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저는 아주 대단한 인플루언서는 아니더라도 이미 작은 인플루언서의 반열에 올라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골목의 전쟁’이 출간된 시기와 운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가 원고를 쓰고 발표할 때는 문재인 정부가 막 출범하던 시기였는데 당시 최저임금 이슈가 아주 불을 뿜었습니다. 최저임금이 첫해에는 16.4%, 그다음 해에는 10.9%가 올랐으니까요. 이런 엄청난 증가세 때문에 자영업에 관한 이슈도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더군다나 각 지역에서 상가의 공실이 가속화되던 시기였고요. 이런 이슈가 지속이 되니 그 두 가지 문제를 같이 다룬 제 책이 주목받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책 발매 시점도 마찬가집니다. 책 내용이야 제가 썼지만 그런 맞물리는 이슈들은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어요. 그저 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요.

바로 이런 여러 요소 덕에 때문에 ‘골목의 전쟁’은 무명작가의 저자가 쓴 책이지만 입소문을 탈 수 있었고 시기와 적절한 이슈가 맞물리면서 책의 수명이 꽤 오래갈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제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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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ㅍㅍㅅㅅ에서 진행한 강연 당시. '골목의 전쟁' 출간 후, 작가 개인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단숨에 유명작가로 떠올랐는데요. 강연, 인터뷰도 많이 하셨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기보다는 당황스러운 게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무언가 대단한 통찰을 하고 있다고 여겨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선생님’, ‘작가님’ 이렇게 부르니 당황했어요. ‘나는 그런 수준의 인간이 아닌데…’, ‘더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더 훌륭한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있어 보이는 유창한 용어나 유식한 단어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글을 읽을 때 어려운 단어가 많으면 싫증을 느껴요. 두 번 세 번 찾아봐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 단어가 머릿속에 기억이 오랜 남는 것도 아니라서 나중에 또 나오면 다시 또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흥미를 잃게 됩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기에 저는 글도 제 수준에 맞게 씁니다. 그렇기에 제가 그나마 잘한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생각이나 견해를 제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전달하지요. 이게 제가 늘 지향하는 바기도 하고, 가장 희망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쉽게 읽힌다’, ‘재미있다’라고 하는 것이 제게는 ‘가장 기쁜 칭찬’ 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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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4일, 김영준 작가의 신작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이 출간 되었다.
출간 일주일 만에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예스24 '오늘의 책'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 2월 초, 신작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이 출간되었습니다. 아직 신작을 접하지 못한 독자를 위해 대해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할게요.
 
우선 [멀티팩터]는 성공을 주제로 한 책입니다. 현재 성공에 관한 콘텐츠들은 참 많습니다. 이건 그만큼 사람들이 성공을 원하고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콘텐츠들은 대부분 성공한 사람/기업의 공통점을 찾아서 정리한 것이거나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성공한 사람의 경험담입니다. 좋은 내용이긴 하나 제가 궁금한 것은 과연 ‘거기서 제안하는 대로 한다 해서 성공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결과를 보고, 그 과정을 평가하는 경우 결과에 끼워 맞춘 과정을 도출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공 콘텐츠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이것이지요. 결과에 과정을 끼워 맞추니 진짜가 아니라 그럴싸한 것을 도출해내고 있거든요.

그렇게 성공이 명확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 방법론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이나 기업 또한 그들의 대단한 성공을 장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투자에선 단기 성과는 운이라 하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이어져야지만 실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단기적 성과를 가지고 성공에 대한 원인을 도출하는 것은 애초에 틀린 것이 아닐까요?

이 때문에 성공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은 재현 불가능한, 고장 난 비법을 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짐 콜린스의 책들이 대표적이며 그 아류작들도 마찬가지죠. 성공에 대한 잘못된 콘텐츠는 오히려 사람들을 성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 한 치 앞도 모르는 불확실성 앞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불확실성은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죠. 실제로 사회는 서로 매우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작은 원인이 다른 곳에서 큰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서로 반응과 영향을 복잡하게 미치기에 ‘나의 선택이나 결정이 내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기에 저는 제 책을 통해서, ‘불확실성 하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며 성공을 추구하고자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공한 기업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제 책은 ‘성공에 관한 책’이자 ‘불확실성 하의 전략적인 선택’에 관해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골목의 전쟁]이 ‘실패’에 대해서 다룬 책이니 이제는 반대로 ‘성공’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골목의 전쟁]의 3장에서 짧게나마 다룬 주제이기도 합니다. 골목 상권과 자영업이란 주제는 이제 전체적인 추세에서 다소 멀어졌으며, 제가 원래 쓰던 글에서 골목 상권과 자영업이란 주제는 일부에 불과했기에 정말로 제가 쓰고 싶었던 내용을 이번에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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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인터뷰 당시. 김영준 작가는 행운과 타인의 도움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걸 알기에,
​ "받은 도움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은 제 새 책인 [멀티팩터]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쓰기도 하지만 자기 생각을 전파하고 확산하기 위해서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번 신간은 성공에 관한 제 생각이 널리 확산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그래서 성공에 대한 더 다양한 담론과 분석들이 비롯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집필할 겁니다. 앞서 밝혔듯이 저는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남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다양한 생각과 견해를 쉽게 풀어내고 전파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쌓아나가야겠지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글을 써낼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응원 덕에 책을 출간되고, 책을 사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행운과 타인의 도움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 점에서 저는 마음의 빚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받은 도움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입니다만 이렇게 끝까지 인터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고,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김영준 작가 블로그] blog.naver.com/breitner
[김영준 작가 페이스북] facebook.com/paulbreit
[김영준 작가 유튜브] youtube.com/c/김바비노믹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영준 스마트북스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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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 2편 [인터뷰]

1/23/2020

 
1989년 부산대 치의예과 학부생으로 발을 들인지 30년 만에 그는 모교 치의학전문대학원(치과대학)의 원장(학장)이 되었다. 80여 편의 SCI급 논문을 포함한 16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치의학계 국내 교수 중 해외 강연을 자주 하는 그는 치과계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치과대학의 학장으로서 행정가,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이자 모범적인 지도력을 펼치고 있는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김현철 원장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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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당시
[학력]
1988 창원고등학교 졸업
1995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2004 부산대학교 치의학박사 (보존 및 보철학 전공)

[경력]
2004년~現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2012년~2018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과보존학교실 주임교수
2015년~2017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과 학과장
2018년 9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첨단치과의료기기사업화센터 초대 센터장
2017년 3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부원장
2019년 3월~現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2008년~2009년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 생체공학연구실 방문교수 
2007년~2010년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 치과의료전문평가위원 
2011년~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청 신개발의료기기분과위원
2019년 7월~2021년 7월 부산광역시 치의학산업지원위원회 부위원장

2011년~2014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교육연구실장
2013년~2015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치의학연구소장 

[직능단체 경력]
2010년~2014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7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공보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부회장 

2005년~200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섭외이사
2009년~2011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기획이사
2011년~2013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국제이사
2015년~201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수련고시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보존학회 학술이사
2019년~ 現 총무이사

2014년~2016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8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현미경치과학회 부회장

2015년~2017년 Asian Pacific Endodontic Confederation (아시아태평양근관치료학회연맹) Council (이사)
2017년~2019년 APEC Secretary (총무이사)
2019년~現 APEC President-elect (차기회장)

2016년~2018년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조직위원회 학술분과 위원장

現 European Endodontic Journal (유럽근관치료학저널) Associate Editor (부편집장)
現 Journal of Endodontics (근관치료학저널) Scientific advisory board (학술자문위원)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School of Dentistry)원장 김현철입니다. 전문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이 한국에서 특이하게 운용되고 있어 무엇인가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치과대학(College of Dentistry)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의 교수인 만큼 저는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치과의사자격을 가진 임상교수이니 치과병원 치과 보존과(Department of Conservative Dentistry)에서 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으니 행정업무도 상당 부분 겸하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강의, 연구, 임상, 행정 등 여러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치과의사들에게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치아 신경치료에 관한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알려져 있고, 연구자들 사회에서의 저는 신경치료에 사용하는 기구와 재료를 평가 연구 개발하는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와 관련하여 국외로는 “Henry Kim”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름이 불릴 일이 별로 없는데, 외국 친구들은 여전히 이름을 부르니 영어 예명이 더 익숙한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 수묵화에 깊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돌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에 가족관계도 들어가는 것이 한국적인 소개인 듯하여 덧붙인다면, 최근 군 복무를 마친 아들과 2월 군 복무를 앞둔 아들. 그리고 두 아들과 저보다 더 많이 가장 역할을 하는 아내. 이렇게 4인 가족의 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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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ProEndo Conference에서 그는 7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했다. 
치과대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진학하게 되셨는지 대학 입학 이전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엔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선망하는 직업 없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어요. 초등학교(창원 양곡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와 집을 오가며 8비트 게임 흑백 게임을 하러 오락실도 갔던 기억도 있고, 어릴 때부터 서예/묵화 화실을 다니며 먹물을 가까이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당시 교과목인 특활로 서예를 시작하여, 5학년부터는 묵화를 하게 되었고,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였는지 그 후로 중학교(창원 양곡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방학 때마다 방학 기간 내내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니며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고등학교(창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너무 취미생활을 너무 깊이 있게 하지 말라고 하였던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잠시 멈추었어요.
 
하지만 공부는 안 하고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수험생이 된 3학년이 되었어도, 카메라를 들고 철새 도래지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원인이었는지, 재수하게 되었고, 1년 후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만 해라’고 압박을 하시거나, 사교육을 위해 학원에 보내시지 않았으니 정말 평범한 학창 생활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선두권 성적이었어요. 고등학교 진학 후, 노력형(Effort-Type)이었다고 해야 할지, 1학년 초반, 전교 중위권에 머물렀던 성적은 매 학년, 학기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제도였어요. 타 대학교 치의학과에 지원하였는데 평상시보다 시험을 잘 본 듯하였습니다만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진 찍으러 다닌 시간이 아니었으면 합격하였을까요? (웃음)
 
재수생 시절, 학원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두 번 꼭 일어나야만 할 때 외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더 오르긴 했지만, 재수하고도 늘 여유롭지 못한 것이 입시 성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잠시 산업디자인학과로 진로를 고려했었으니 예술적인 꿈은 늘 내재하여 있었나 봅니다.
 
아주 특별한 계기나 깊은 고민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그림 등으로 표현되던 예술적 감성을 포함한 치의학과(치의예과)로 지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산대 치과대학에 입학하여, 현재까지 30년간 모교와 연결 고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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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학교에 설치된 최신 실습장비(Virtual Reality Haptic Device)를 이용한 실습 지도.
대학 졸업 후 개원 의사이셨지만 학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대학교수로서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의 길을 겸하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 합격으로 바로 개원하여 치과의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치과 전문의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지만 저는 치과보존학 수련과정을 지원하며 3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공의 과정 중에는 진료와 함께 전문 영역의 공부도 깊게 하지만 학생들의 교육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즉, 후배들의 학습 도우미를 하는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본인이 더 공부하게 된다고 하는데 저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학습의 깊이를 직접 대면하였습니다. 또한, 진료하면서 ‘가르침의 기쁨’도 깨닫게 된 것은 후에 교직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공의 과정 중에 새로운 기구나 재료 사용에 관심을 두고,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던 그런 ‘도전적’ 성향들이 지금 연구자로서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해군에서 군의관 생활을 하였습니다. 3년동안 해병대 부대에서도 장병들을 보살피고 해군 함대에서도 일하였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1998년 당시, 육해공군에서 사용하던 치과기구재료의 목록이 한국전쟁 이후로 이어져 온 미군 부대 장비목록이었는데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구할 수도 없는 사용할 수도 없는 목록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록을 보며 저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 목록들을 현대화하기 위해 작업을 주도하여 시작했습니다. 물론 뒤를 이어 마무리하신 많은 분의 노고가 있으셨겠지만, 그 결과로 지금의 리스트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성향도 교직하면서 행정도 하는데 기초적인 경험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군의관 입대 훈련 입소 하루 전 첫아들이 태어나고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이름도 없던 아기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서른 살 아빠로 입대했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군의관 복무 동안 둘째도 태어나고, 군의 규율 속에서 3년을 보낸 후에 흔히 말하는 '개인 치과 원장님'으로 3년 반가량을 보냈습니다. 개원 당시부터 교직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에 개원 여건 조건 등을 정할 때 이직 가능성을 고려하였습니다.
 
개원 치과의사로서의 경험은 현실의 삶이던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를 기다리고 환자의 불편감을 해결해드리고 경영을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 현실은 변화나 발전 등의 미래 지향적인 용어와는 연결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재정적인 풍족한 삶’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평생 사는 ‘개체로서의 삶’의 의미를 담기에는 제한성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개원하여 진료하고 봉사를 하는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개원가 원장님이 세상을 등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생의 끝에 그간 관계를 가져왔던 환자들에게 전해지는 아쉬움은 소위 '반려동물'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수치상으로 표현한다면, 평소 구강건강관리를 하는 담당 환자가 2천여 명일 때 그분들로부터 아쉬움의 위로를 듣는 그런 존재와 삶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보다는 좀 더 크고 넓게 의미 있고 가치를 높이는 ‘사람’의 삶을 갖고자 교직을 택하였다면, 직업 선택의 계기로 적절할까요?
 
학교에 일하면서 받는 인사말 중에 가장 잘못된 질문이 ‘방학이라 쉴 수 있어 좋겠다’는 말입니다. 대학의 교원은 교육, 연구, 진료, 행정 등 다양한 키워드로 업무를 나누어 보게 됩니다.
 
결국 개인 진료 생활을 접고 2004년 처음 대학으로 올 때는 강의와 진료가 거의 다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행정업무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수치로 정량화하기는 어렵지만, 학원장을 맡은 지금은 행정 업무가 가장 많은 업무를 차지하는 듯하고, 오히려 교육이 뒷순위로 밀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방학은 수업만 없을 뿐인데 “수업의 없음(방학)”이 결코 시간적인 여유는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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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갈라 디너 당시.
학술분과위원장으로서 인사 및 학회 경과 보고를 하고 있다. 

원장님께서는 한 해에만 열 건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의 학회에 참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연구와 학술활동을 이어가는 계기나 배경이 있었는지요?
 

저는 교직을 택하고 학교에 오기까지 연구를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전혀 모르던 임상 치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임교원이 되기 전에는 외래교수로 강의를 해왔고, 진료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 착각하였다가, 의미도 알 수 없었던 SCI급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가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현재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연구분야에서 Top 0.14%로, 특히 제가 중점으로 연구하는 니켈티타늄 기구를 포함한 치과기구(Dental Instruments) 영역에서는 Top 0.065% (Asia 1위, 세계 7위)에 자리매김할 정도로 해당 분야에서는 나름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2004년 대학에 임용된 후 2007년까지는 국내 논문 발표에 머물렀지만, 2007년부터 SCI급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런 변화에는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처음 SCI급 논문에 게재된 것은 연구방법으로 유한요소분석법을 이용한 것인데, 이 연구를 하게 된 배경도 특별한 호기심을 혼자 혹은 측근들에게만 제한하여 나누지 않고 직접 다른 분야의 연구자를 찾아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 큰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당시 공과대학 기계공학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뵙고, ‘이런저런 내용의 연구를 하고자 하는 데 도움을 주십사’ 부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관련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원생을 소개해 주시고 관심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셨습니다.
 
즉, 치의학계에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방법론적인 부분을 공과대학에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그 계기였던 것이고, 그야말로 치의학과 공학 융합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공대와의 협업으로 만든 결과물을 발표하는데 또 다른 큰 조력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작성한 논문을 해외 우수 저널에 발표하려면 영어 교정도 상당히 중요한데, 이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 홍콩대학교의 Gary SP Cheung 교수님이십니다.
 
영어 교정 회사를 통한 교정은 전문성의 결여로 인해 그 교정 효과가 미비한데, 같은 전공분야의 Cheung 교수님은 제가 원하는 바 문맥 구성(plot)을 잘 유지하면서도 매끄러운 흐름의 문체로 교정을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전까지 단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하던 SCI 논문을 수정도 없이 바로 게재 수락을 받았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충격과 같은 경험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후로도 많은 연구에 대해 조언과 영문 교정 등의 도움을 주셔서 저에게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멘토이십니다.
 
Cheung 교수님은 3~4년간 메일을 통해 도움을 주신 후, 어느 메일 회신에선가 이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그냥 도움 요청 없이 진행하라는 조언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멘토-멘티의 관계가 아닌 '동료연구자'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제게는 참 고마운 분입니다.
 
Cheung 교수님과는 매년 한 번 정도는 해외학회 등에서 뵙기도 하고 서로를 방문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 교류 및 global collaboration이 연구자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제가 Cheung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제가 외국 교수나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공동 연구를 제안받는 위치에 와 있으니 새삼 Cheung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연구가 이어지면서 해외 학회에서 강의 요청이 오게 되는데, 사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한국인으로서 상당히 부담이 느껴지는 활동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이고 사양하였지만, ‘연구자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고, 학교와 한국을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여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영어 강의를 할 때는 강의자료를 일찌감치 만들어 수차례 연습을 반복하고, 발언 내용을 적어 반복해서 읽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사이사이 참고할 메모를 적어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강의는 한국어 강의와 마찬가지로 강의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외강의 초보 시절 모스크바에서 강의할 때, 제 영어 강의를 러시아어로 동시통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강의 당시 흥분하고 긴장했던 상태였는데, 동시통역자가 말이 빠르니 천천히 하라고 팔을 마구 휘저어서 제 시선을 끌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최근에는 동남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인도 등)를 넘어 중동(이집트, UAE, 요르단 등)에서 강의 기회를 많이 얻게 되면서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중동의 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를 통한 다양한 소통은 더 많은 연구 주제를 생산하고, 제 학생들도 더 많은 연구 주제를 공유하게 되면서 개인 연구 주제를 찾는 가능성을 높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석, 박사과정의 제 학생 중, 연구 주제가 없어서 고민하는 학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결과들에 대해 제가 검토하고 지도하여 논문 작성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제 바쁜 일정 때문에 논문작성 지도가 지연되거나 논문 수정이 지연되는 일들이 지속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간혹 해외 연구자들의 논문 작성을 도와주는 작업이 6개월에서 1년씩 지연되기도 하여 독촉을 받는 것에 비교하면, 대부분의 국내 학생들이 좋은 내용으로 권위가 있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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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학회 차 이집트 방문 당시.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느냐?` `한국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으실 정도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바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쁘신 와중에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는지 소개 부탁합니다.
 
비교적 잦은 빈도로 해외 출장을 가다 보니, 간혹 외국에 있어도 계속 ‘외국에 있는지 국내인지’ 농담 반 진담 반의 짓궂은 말씀들을 하십니다. 작년부터는 원장직을 수행하느라 해외출장 기회를 몇 건 줄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 해외출장 일정을 다녀오면 환자 진료를 포함하여 밀려있는 일들로 인해 저 자신이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구 관련 강의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비행시간 동안이라도 충분히 쉬는 장점을 누리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로 나가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반가운 조우도 있으며,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찍을 일도 더 많으니, 약간의 휴식과도 같은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얕아서 역사 깊은 유적지나 건축물에 대한 배경은 잘 알지 못하고, 들어도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구조를 건축했는지’, ‘어떤 자재를 이용하였는지’, ‘어떤 예술적인 건축 방식이 응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세계 불가사의로 거론되는, 이집트 피라미드, 인도 타지마할, 요르단 페트라, 로마 콜로세움 등. 그리고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이나, 스페인 성가족성당 등이 제가 눈으로 보고 즐긴 예술과 과학이 접목된 건축물들입니다.
 
사실 제 취미는 앞서 말씀드린 수묵화(ink-and-wash painting, 水墨畫)입니다. 그러나 취미라고 하기엔 지금은 좀 애매하게 취미생활을 일 년에 한 번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선지에 먹을 갈고 농담(light and shade, 濃淡)을 조절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5년 전입니다.
 
그 5년 전의 그림 작업조차 10년을 넘게 벼르고 별러 정교수로 승진하던 날 한 점(painting), 그리고 같은 달 한 점, 그다음 달 한 점을 더 그리고는 지금까지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한두 시간 혹은 두세 시간이면 한 점을 그릴 수 있을 만한데 지금은 그런 여유를 갖기조차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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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0년에 한 번을 즐기기 어려운 취미생활인 수묵화 작품과 함께.
평소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침이면 잠을 깨기 위해 휴대전화로 밤새 들어온 이메일 리스트를 확인하고, 출근 후 이메일 답을 쓰는 것으로 업무가 시작됩니다. 진료가 있는 날은 진료하면서 진료 틈틈이 결재 등 학교업무를 해야 합니다. 진료가 없는 날은 학교 원장실에서 업무를 봅니다.
 
40년이나 된 학교지만 계속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 맞는 교육연구 환경 개선 사업을 비롯하여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의 제반 업무, 국내의 세 가지 학회 업무 그리고 국제 학회 활동을 위해 수시로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하여 업무를 진행합니다.
 
점심시간은 거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계속 회의를 진행하고 삼십 분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밀려있던 일 중 논문 심사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해외 저널에 연구 논문이 많이 실리는 만큼, 해외 저널에 투고되는 논문의 심사 의뢰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은, 심사하지 못한다고 거절을 하지만, 제가 주로 투고하고 게재하는 해외 저널의 경우엔 심사를 거절할 수가 없어 틈틈이 심사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하루 ‘1부’의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이 됩니다. 간단한 저녁 식사 후 ‘2부’가 이어지는데, ‘2부’는 보통 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는데 효율이 높은 시간입니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거나 논문 첨삭 지도를 하고, 진행 중인 실험 내용에 대해 점검을 하는 것 역시 외부로부터 가장 방해요소가 적은 저녁 시간에 진행합니다.
 
보통 밤 9시에서 10시경 귀가를 하는데,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시간이 제겐 쉬는 시간 겸 가장 여유를 갖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퇴근길에는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시차가 있는 외국 분들과의 업무도 간혹 퇴근길 차에서 이루어집니다. 데이터 통신과 통신 애플리케이션이 발전되어 전화통화가 많이 편리해진 것이 도움됩니다. 집에 와서는 이제 ‘3부’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이 시간에는 주로 개원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부 강의와 해외 강의 자료를 만들고 보완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보통 자정이 넘어가고 다음 날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정해진 근무시간에 일하고 나머지 시간이 자유롭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등 원하는 취미 생활을 더 할 수 있을 텐데, 교직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일을 하기에 따라서는 활동 범위와 영역이 광범위하기에 바삐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교직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조만간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해보고 싶은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하얀 화선지를 펼쳐두고 담묵과 농묵의 먹색을 즐기고 싶습니다. 유화와는 달리 덧칠이 되지 않고 화선지가 젖어있을 때와 먹물이 다 말랐을 때가 색이 달라지기도 하는 먹색의 특징과 여백을 남겨두고 마무리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는 수묵화는 참 매력적입니다. 여백 한 자락에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적고 낙관(seal)을 찍는 날을 매일 매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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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연구실에서 실험 중 연구 장비들과.
`중이 제 머리를 목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치의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이신 교수님은 누구에게 치과 치료를 받으시나요? 또한, 치아 건강을 위해 독자분들께 조언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 받아보는 질문 같습니다만, 저도 치료나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면 당연히 치료를 받습니다. 가까운 병원에 동료 교수에게 받기도 하고 제자인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치과의사인 아내에게 진료를 받기도 합니다만 근무시간과 퇴근 시간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진료가 더 현실적인 선택 방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치료할 내용이 없으니,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약 칫솔의 선택에 특별한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칫솔은 너무 크지 않은 것을 선택하시라 권하는 정도이고, 전동 칫솔이 더 좋은지 물어보시는 분들께도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치약도 정말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시중의 어느 치약을 쓰셔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간혹 시린 치아에 사용하면 완화 효과가 있는 치약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치과의사가 소개해주실 겁니다. 치약 칫솔의 종류나 방법보다는 식후에 그리고 가능하다면 취침 전에 칫솔질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치아 질환이나 구강 내 질환은 미생물과 입속의 잔여 음식물에 의해 발생하므로 칫솔질로 이를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잘 제거가 되지 않는 점착성이 높은 음식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양치질을 자주 잘한다면 음식이나 간식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올바른 가이드인 것 같습니다.
 

아내분도 치과의사이십니다. 이미 전 질문에서 집안에 `가장`으로서 많은 공백을 아내분이 대신 채워주고 계시다고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부부가 같은 분야 종사자로서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치과의사 아내의 장점은 믿고 치료를 받을 데가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직자로서 그 어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치과 방문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다행히 저도 근본적으로 치과 치료가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이 없으니 그다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장이 생계를 담당하는 것과는 달리 개인 치과를 운영하는 아내가 조금은 더 많이 살림을 관리하게 되는 상황이라 저보다는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 중 임상 실습을 참여하는 후배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래 직업으로 교수를 꿈꾸던 제게는 동종 직업인 배우자를 갖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으로 생각하던 차 저를 만났던 아내의 처지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정을 갖게 되었기에, 즐거운 청춘을 남들보다는 조금 짧게 즐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제가 학교에서 퇴근이 늦으니, “우리는 아빠 왜 못 봐?” 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들과의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일에 집중하여 숨 가쁘게 달려왔던 제 생활 방식에 아내가 아이들 양육을 도맡아 한 부분이 크니 고맙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내로서 그 어떤 내조보다 저를 이해해주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장점인데, 반대의 관점인 아내로서 저는 과연 장점이 있을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2008년, 1년간,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파견 근무를 가서 가족들이 같이 해외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해외 생활을 체험한 것이 가족들에게는 장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시절 방학 기간일 때마다 제가 해외 출장이 있어 아이들만을 데리고 해외를 같이 나갔던 적도 두세 번 있었습니다.
 
가장 대학 입시에 혈안이 되어야 할 시기인 고3이 되던 겨울방학에도 같이 해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재수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해외 체험을 하고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갖게 만드는 기회를 줄 수 있었던 게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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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원장은 작년 3월 모교의 원장으로 취임했다. 52세로 부산대학교 전체 학장 원장 중 최연소 원장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따른 보직자 선출이 아닌 것은 그 집단의 발전적인 모습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실력과 겸손까지 갖춘 존경스런 인물이었다. 
89년도에 학사과정에 입학하셔서 2019년 3월, 모교의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오르시기까지 지난 30년을 부산대에서 보내셨습니다. 교수님께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1989년 치과대학(치의예과)에 입학하고 6년의 학부생활, 전공의 과정 3년, 군의관 3년과 그리고 3년여 짧은 개원의 생활을 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9년은 제가 모교와 함께 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고, 학교는 개교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개략적으로, 대학을 입학하고 30년 한 세대의 기간을 모교와 함께하였습니다. 30년 중 15년은 학부생으로 배우고, 전공의로 배우고, 군과 사회에서 조금 더 폭넓은 경험으로 배운 시기였고, 교수로 대학으로 돌아온 2004년부터 지난 15년 간은 배우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쪽에 더 가까이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지역 치과의사분들께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것 또한 저에게 새로운 학습의 과정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기술이 이끌어가는 치의학계에서, 새로운 것을 평가하고 올바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즐겁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구나 재료가 개발되어 치과 임상에 사용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더 보람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배움과 지식 나눔의 과정을 거칠 수 있고, 연구 개발을 통한 국제사회와 소통을 할 수 있는 대학 교원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그 기관이 모교인지라 더욱 다행스럽습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데는 가족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고, 주변의 많은 일을 차질없이 진행하는 데는 학교와 학회의 동료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도 가장 고마운 분을 꼽으라면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좋은 환경에서 바른 생각과 큰 꿈을 갖도록 해주셨고, 최소한은 유전적으로 지금 제가 하는 일과 생활이 가능하도록 역량을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학교는 공적인 기관으로, 큰 조직이기도 하면서, 제게는 어쩌면 집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으로 소중한 공간입니다. 학교가 잘되어야 제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고, 저를 포함한 각 교수가 더 뛰어난 업적과 역량을 가질수록 학교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와 저 자신을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동등하게 생각하며 일하는 것이 즐겁고, 학교의 발전을 개인의 성취로 여기며 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족에 한정된 발전을 추구하였다면, 개원가 원장의 자리를 유지하면 오히려 더 풍요롭게 여유롭게 즐겁게 일과를 보내고, 개인적인 성취감도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큰 나를 포함한 조직의 발전을 위해 발을 들였으니 그 바람에 맞는 방향의 일이라면 늘 반갑고, 모든 학교 업무가 직장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내 몸처럼 아끼고 집안일처럼 생각하는 학교의 원장이 되었으니 더욱 애정을 갖고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학과장 보직을 시작으로 부원장으로 2년, 그리고 원장까지 연속으로 5년간 보직을 맡고 있습니다.
 
두 분의 전임 원장님을 보좌하며 학교의 미래를 같이 설계하고 그 방향을 유지하면서 보직을 수행하고 있어,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발전하는 대학이 느껴질 때 보람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은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 영상을 제작하였다.
앞으로 원장으로서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은 어떤 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이 있으신가요?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은 1979년 치의예과의 설치와 함께 역사가 시작되어, 제가 원장으로 취임한 작년 2019년이 불혹인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취임하면서 강조한 대학의 발전 방향이 ‘국제화 및 특성화’입니다.
 
지금까지는 치과대학이 그 학문적 지향점이 분명하였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육연구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4차산업 혁명시대에 그리고 직업관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학령인구의 감소가 눈앞에 닥쳐온 오늘날, 지금까지의 같은 학교의 역할만으로는 장기적인 퇴보의 기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히 ‘치과의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지속적 성장 발전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혹을 맞은 대학이 사람의 인생처럼 변화하기 어려워 점점 퇴보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해서는, 미래 지향적으로 선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안으로 작년부터 디지털 치의학교육 특성화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치과의료에서 도입이 활발히 되는 디지털 장비의 사용에 대해 학부과정에 실질적으로 교육하고 실습과정도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산대 치과대학’이라고 하면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강점으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경쟁력을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 외국 치과대학생이나 대학원생 등의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치과의사들도 우리 대학을 방문하여 배우고 체험하고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제치의학교육센터 등의 실질적 운용이 되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외국으로의 직접 홍보를 통해 외국인을 유치하고자 세부 수행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대학이 명실상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선도치의학교육기관으로 변모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라 생각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제화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실용성을 얻고자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영상을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Pusan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Dentistry의 약자 ‘PNUD’를 이용하여 “Passion N(and) Ur(Your) Dream”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만들고 내부 역량 집중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화 특성화를 주제로 한 변화와 발전 과정을 통해 학교가 세계적인 기관으로서 인정받는 꿈을 꾸고, 학생과 교직원은 물론 동문과 지역주민 역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품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림
2020년 1월 24일은 구정이다. 국내 최대 명절인 이날,
​김현철 원장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범아랍 근관치료학회에 초청되어 연사로 강연을 한다.
공식 질문) 새해 2020년 해외일정을 포함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이라는 숫자가 생소하지만, 벌써 6개월 이상의 일정이 계획된 상태입니다. 학원장으로서는 다양한 학교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부담됩니다만,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행사 준비는 그나마 부담이 적은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는 학원장 임기 첫해로 해외 일정을 최소화하였는데 2년 차인 2020년에는 해외 일정이 작년보다는 많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1월, 모로코 PanArab Endodontic Conference (http://www.paec2020.com)에 초청 연사로 참석예정이며, 4월 초에는 테네시주 Nashville에서 열리는 미국근관치료학회(American Association of Endodontists) AAE 2020 annual meeting에 참석하여 논문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5월에는 요르단대학에 학생
 평가를 위해 방문이 예정되어 있고, 6월에는 말레이시아 학회, 9월에는 인도 Chennai에서 열리는 제12회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Endodontic Associations World Endodontic Congress)에 Keynote speaker로 참여하여 강의할 계획입니다. 10월에는 한일보존학회가 일본에서 열리는데 대한치과보존학회의 총무이사로 참석할 계획이 있습니다.
 
대략 6건의 해외일정인데 한두 건은 못 가게 될 수도 있고, 안 가는 것이 저에게도 오히려 편안함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가 더 먼 훗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면 은퇴를 즈음한 시기의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60대의 삶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그때 적당한 활동과 계획한 대로 보람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아직은 대학교원 정년(만65세)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어 지금까지의 활동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후배 교수님들의 연구 환경 개선과 대학의 장기 발전 계획을 잘 수립하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기반 조성에 조력하는 것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의 일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연구 발표는 꾸준히 이어가면서 학교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이루어지고 있지만, 해외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거나 때로는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해외 강의도 체력이 되는 한 기회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기회가 된다면, 저는 기회를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 합니다. 은퇴를 즈음해서는 그간 발표한 논문들의 해석과 주요점을 담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 제가 그린 그림들을 넣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앞으로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과 국내 치의학계의 발전에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현철 ProEndo 부산대학교 IFEA PAEC
영상 제공: 부산대학교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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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 1편 [기자수첩]

1/23/2020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1편 [기자수첩] - 기자가 받은 한통의 편지.

나는 AVEC G 발행인이자 수석기자이다.
이번 김현철 원장을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뷰 과정을 담은 [기자수첩]을 기획하게 되었다.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과정은 그 어떤 인터뷰이의 인터뷰 과정보다 특별했다.
그 과정을 1편 [기자수첩] 그리고 [인터뷰]는 2편에 나누어 공개하는 바이다.

우선 AVEC G에 대해 소개하자면 공식 홈페이지는 보다시피 광고가 없다. 외부후원도 없다.
트래픽으로 돈을 버는 시스템도 아니다.
스폰서도 없고, 인터뷰 기사를 위해 어떠한 금전적 혜택도 받지 않는다.
100% 재능기부로 오히려 나의 사비로 홈페이지 제작과 운영을 위해 쓰이는 돈이 많다.
 
사람들은 내게 `왜 하냐?`라는 질문을 종종 하기도 한다.
나는 `청년들에겐 IMF보다 취업이 힘든 시기이지 않느냐. 최대한 많은 분야에서 청소년, 청년들의 멘토로 그들이 걸어온 길을 소개함으로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난 참 무거운 마음과 함께 AVEC G를 창간했다.
 
2019년 5월 AVEC G를 창간하고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 명망, 인품, 지위, 시국 등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가장 적절한 인물을 인터뷰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기사를 읽고, 10년이 훨씬 더 지난 방송을 찾아보는 등 1명의 인터뷰를 섭외하기까지 같은 분야 종사자 100여 명 이상을 꼼꼼히 선별했다.
 
나는 AVEC G의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가 인터뷰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쌍방의 열정은 시너지를 가져왔고, 심도 깊은 인터뷰가 모인 AVEC G의 인터뷰 기사가 차곡차곡 쌓여가며 AVEC G는 그렇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터뷰 전문 사이트`가 되어가고 있다.
 
김현철 원장과의 첫 인사는 2019년 6월 말 SNS를 통해 처음 이루어졌다. AVEC G가 창간된 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김현철 원장이 부산대신문에 기고한 `부산의 치의학 40년, 그리고 미래`를 읽은 후였다.
 
나는 김현철 원장에게 인터뷰 의뢰를 했다. 그는 검토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답장을 남겼다. 그는 원장직을 맡은 지 3개월 만이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바빴을 뿐더러 AVEC G 인터뷰 특성상 `현 위치까지 올라온 과정`에 대해 `과거`를 묻는 질문이 많은 만큼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고 있었던 그 시기에 외부 언사를 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8월, 빛나는 성과를 내고 있었던 그에게 다시 한 번 SNS를 통해 연락했다. 그는 나의 의뢰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쁜 일정에 그는 `다음 시기`를 기약했다.
 
나는 10월 다시 인터뷰 일정을 물었다. 그 사이 AVEC G는 `인터뷰 전문 언론사`로 시스템은 나름 삐꺽이던게 기름칠 되어 구축된 시기였다. 해외에서 오래 사는 내가 한국 문화에서 `생각해볼게요`, `다음에요`라는 답은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김현철 원장이 하는 `다음`, `보류`라는 단어를 쓴 답변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가 `거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역시 정말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이번엔 정말 삼고초려가 되겠네요.` 등의 부탁 어린 메세지를 보냈다.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오류입니다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서요^^`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일정을 소개하며 양해를 구했다. 맞다. 지난 6월도 그렇고 8월도 그렇고. 10월에도. 그는 절대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인터뷰 협조 공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12월 중순까지 10분도 쪼깨야 하는 상황이라 12월 중 비행기 안이나 공항에서 답변을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답했다.
 
12월 말이 다가왔고, 나는 `옐로카펫` 창안자인 `옐로소사이어티` 이제복 대표, 배우 이재윤, 유상재, 춘천지방법원 류영재 판사, KB증권 이승종 앵커, 프로볼링 김승민 선수의 인터뷰 원고를 한꺼번에 윤문과 사진 편집과정에 거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리고 그중 유상재 배우와 류영재 판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기사가 2019년 안에 출고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도, 그리고 31일에서 2020년 1월 1일이 되던 그 순간에도 원고를 첨삭하고 있었다. 김현철 원장은 1월 1일 제야의 종소리의 메아리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며칠 되지 않아 내게 서면 인터뷰 원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별도로 편집팀에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울었다.
그리고 더 오래 울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업적이나 일에 대한 보상을 금전적인 것으로 받는 것에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겐 `입에 풀칠할`, `지금 당장 필요한`. 하지만 나는 독자의 반응에만 감사하며 `보람`만으로 걸어왔으나 내게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현실에 너무 지쳐있던 그때였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금전적인 보상을 원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애초에 AVEC G는 재능기부로 시작한 일이니.
 
그저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가?' `힘들게 일하는 걸 누가 알아주지?`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6개월이 지나 60여명의 인터뷰 기사를 출고하니 '이제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게 아닌데, 더 잘할 수 있는데...' 아쉬움을 곱씹으며 하루 12번 넘게 AVEC G의 존폐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김현철 원장이 보낸 편지는 결정적으로 내가 AVEC G를 통해 인터뷰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다.
 
난 김현철 원장과 어떻게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는지 기억을 하진 못한다. 그리고 우린 공통된 친구도 없다. 난 그 점이 굉장히 의아하다. 그러나 아마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 우연 또한 신의 뜻이겠지 생각해본다.
 
약속한다. AVEC G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사회에서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분들을 만나고, 좋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나는, 인터뷰어로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AVEC G 인터뷰이의 인터뷰를 기사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다면, 하늘에 두 손 모아 감사할 것이다.
그림
- 김현철 원장의 편지 전문: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저는 사실 AVEC G를 잘 모르고 (완전히 모르고)
더더군다나 박 기자님도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모릅니다.
 
우연히 SNS에 포스팅되는 글들을 통해 소신 있게 철학을 지키며
언론인, 준(?)공인으로서의 자세를 다듬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반복되는 인터뷰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연결고리 혹은 저와 통하는 철학은 Passion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삶이 동물의 생과 다른 것은
열정이 있는가 아닌가로 구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은 욕구에 따른 생명유지를 위한 필요에 따른 행동만 하지만,
사람은 철학과 소신이 있어 사회 속의 자아실현과 자아의 희생을 통한 무리 속의 존재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삶, 인생에서 문제가 되는 몇 가지가 “욕심” 혹은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어쩌면 동물들도 갖는 본능적인 행동양식이라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동물들이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잇감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 동물의 욕심은 사람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비교”에서 비롯되는데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의 환경과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결국 욕심이고 욕심의 끝은 개인의 행복감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간혹 제자들이 결혼을 즈음하여 예비 배우자와 함께 인사를 올 때면, 제가 축하의 말로 전하는 것이 비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처가와 본가의 비교 혹은 내 아이와 저 집 아이의 비교,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을 피폐하게 하므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삶의 지혜일 것이라 전해주고 있습니다.
 
AVEC G의 박 기자님도 욕심을 갖지 않았기에 남들과는 다르고 어쩌면 어려운 길을 지켜나가는 언론인으로 자아를 지켜나가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가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직업 정신이 뛰어나다, 남들과 비교하여 뛰어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뛰어난 존재가 되어 가는 삶을 사는 기자이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직업에 있어 간혹 혹은 자주 사회의 문제나 사람 간의 문제가 되는 것이 “권위”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 대해 느끼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권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타인이 인정해줄 때 그야말로 권위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권위는 약육강식의 서열을 말하는 것뿐입니다만, 사람에게 권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간의 예의가 권위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대학병원 환경미화 여사님과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십여 년 전,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이 독립법인으로 이전 개원을 하고 병원에는 너덧 분의 여사님들이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유지관리를 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보통 9시 진료 전에 8시경에 시작하는 아침, 세미나 일정 등으로 더 이른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세미나를 위해 복도를 걷는 중 이른 시간부터 출근하셔서 청소 업무 중인 여사님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쳐다보지 않으시고 바닥만 계속 닦으셨습니다. 약간의 무안함이 있었으나, '못 들으셨나 보다'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후로도 두세 번 그런 일이 반복되어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어느 날은, 제 인사에 주변을 둘러보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반갑게 인사말을 돌려 주셨습니다.
 
그제야 생각한 것이, 그 시간대가 환자들이 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대부분 의료진인 교수와 전공의 선생님들이 오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청소하시는 여사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지레짐작하시고 묵묵히 하시던 일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먼저 시선을 주시기도 하고,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직업의 차이는 있고, 당연히 업무의 난이도가 다릅니다만,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그 직업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존재감이나 권위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여 명의 의사직이 근무하는 병원에 서너 분의 여사님들이 일을 못 하거나 안 하시게 되면, 과연 병원이 제대로 운영이 될까요? 100여 명의 의사 중에 누군가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을 할까요? 의사 서너 분이 안 나오더라도 병원은 잘 운영이 될 것입니다만, 반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보지 않은 일 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하는 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대의 직업을 존중하고 그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는 권위를 갖게 되나, '내가 의사이니 여사님께는 인사를 받아야지, 내가 먼저 하지는 않아도 되려니...' 생각하는 사람은 권위를 얻을 수가 없고, 스스로 주장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에 비교를 하고 욕심을 낼 수 있고 권위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동물의 생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 역할을 잘하여 주장이 아닌 주어진 삶의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하며, 지난 50년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생이 아닌 삶을 더욱 가치 있도록 그려 보고자 합니다.
 
인터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독자들께도 미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본편: 바로가기

글: 글렌다 박 발행인 및 수석기자, 김현철 원장
사진 제공: 김현철 원장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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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지방법원 판사 <류영재>

1/11/2020

 
2017년 우연한 계기로 사법농단이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3천 명 판사들의 분노를 잠재우며 사태의 의미를 축소하고 무마하려는 정권에 류영재 판사는 진실을 알리는 SNS 포스팅을 꾸준히 올리며 맞섰다. 그리고 국민들이 알지 못했던 사법농단의 진실의 어둠 속에 불씨를 붙였다. 그 작은 불씨였던 그녀의 포스팅은 횃불이 되어 결국 사법농단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도 SNS를 통해 판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비법조인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류영재 판사는 올해로 임관 10년 차를 맞이하였다. 판사로서 걸어온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사법농단을 비롯해 검찰개혁, 사법고시 존폐 등 법조계의 여러 현안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그림
* 지난 2019년 12월 12일 열린 제1회 메디치포럼 행사장에서 '평생의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이날 류영재 판사는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출생]
1983년 2월 27일 (대구)
  
[학력]
 1998년~2001년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졸업
2001년~2006년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경력] 
2009년 제50회 사법시험 합격
2011년 제40기 사법연수원 수료 (사법연수원장상 수상)
2011년~2013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013~2015년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2015~現 춘천지방법원 재직 중
 
[논문]
♠ 명예훼손죄에 대한 헌법합치적 해석론과 재판실무의 운용, 한국언론법학회, 언론과법 제15권 제1호(2016)
♠ 사법의 책무와 독립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실천적 제안: 사법행정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법과사회이론학회, 법과사회 60권(2019)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춘천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영재입니다. 춘천에 살면서 일과 시간에는 재판 업무를 하고 밤에는 야근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쉴 때는 SNS를 통해 비법조인 페이스북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기도 합니다. 판사 중 SNS를 하는 분들이 드물어 본의 아니게 그 방면으로 알려졌기도 합니다. 인권보장, 표현의 자유, 차별금지에 관심이 많고 요즘엔 법원개혁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림
4살 때 남동생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고등학교인 대원외고 출신으로 만화가를 꿈꾸며 미술대학 진학`, `디자인과 출신 판사`, `사법농단의 진실을 알린 판사` 등 개인의 배경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예능 출연, 야구경기 시구 등 판사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자주 보이셨어요. 사회적으로 그리고 대중에게 알려지다 보니 삶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제 경력이 판사치고는 특이하지만, 사람 자체는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경력만으로 제 삶이나 이미지가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이하다’, ‘화려하다’, ‘천재적이다.’ 등.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제 얘기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디자인과를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은 단순히 디자인이 제게는 너무 어려웠고, 디자인 외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그에 비교해 법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학문이었고,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도 제 성격과 맞아 비교적 수월하게 시험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법원에 와서도 재판부 구성원들이나 소수의 친구와 어울렸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주위에 법조인들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법조인들과만 어울리다 세상의 상식과 내 상식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SNS를 통해 비법조인들의 생각을 나눔 받고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SNS 시작 당시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진 않았는데, 2018년 사법농단을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 포스팅을 공개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은 제 성격과 거리가 먼 삶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포스팅 하나를 할 때도 자기검열이 강해지게 되었고요. 특히, 몇 번 특정 언론이 작정하고 저를 ‘정치판사’라고 낙인 찍으러 비난했을 때는 온 가족 친척들이 ‘괜찮으냐’고 연락이 온 적도 있었어요. 그러한 순간은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맷집이 길러져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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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사법연수원 수료식.
류영재 판사는 수료식 당시 연수원 40기 969명 중 10등으로 사법연수원장상을 수상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당시 10등으로 사법연수원장상을 받으며, 연수원 입소부터 목표하셨던 판사가 되셨습니다. 만약 그 당시 변수가 생겨 판사가 되지 않고, 지금 검사나 변호사가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연수생 시절 검찰 시보와 변호사 시보를 각각 해보았는데, 당사자들과 거리감이 굉장히 좁혀진 상태에서 일해야 하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검사나 변호사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싸움꾼이 되어서 재판에 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의뢰인이나 피해자와 함께 울고 웃으면서요.
 
검사는 피해자를 대신하여 피고인을 수사하고 기소하여 유죄를 입증하는 역할을 하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수행하지요. 판사직보다 훨씬 활동적이고 상상력이 있어야 하며 사회정의를 중요히 여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 검사가 되었더라면, 글쎄요. 에너지가 달려 좀 힘들어했을 것 같습니다.
 
한편 검찰개혁에 대해 언급하자면,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조심스럽지만, 현재 검찰제도는 검사 한 명 한 명이 열심히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검사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기에 무리가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검사는 본래 수사 과정에서의 적법절차 원칙이 지켜지도록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를 통제하고 법률전문가로서 범죄를 기소하여 재판에 임하는 역할의 전문가인데, 지금은 직접 수사 및 수사지휘에 너무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로 인해 아무래도 수사의 적법성 통제나 공소유지 역할은 부실해지고요. 이 경우 검사도 스스로 본연의 역할을 못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재판이 부실해져 국민이 공평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 검사가 검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변호사면, 일단 ‘이기고,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되는 데 집중했을 것 같아요.
변호사는 무엇보다 의뢰인을 위해서 사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고 법리를 찾으며 의뢰인이 최고의 이익을 얻을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제가 지금은 판사이고, 판사 본연의 역할 중 하나가 ‘형사재판절차에서의 수사적법성 통제’라고 생각하기에 저는 형사법에 관심이 많고, 또한, 판사 역할의 본질이 ‘인권보장’이어서 헌법과 인권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변호사가 된다면 민사 분야에 전념할 것 같습니다. 민사소송은 변호사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이끌어져 나올 수 있는 분야라서 흥미롭고 뿌듯할 것 같아요. 그리고 틈틈이 공익소송 대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공익소송 대리는 소수자, 약자와 법적으로 연대할 방법이니까요.
기억에 남는 재판은 무엇이고, 판사로서 가장 ‘공정한 재판’을 위해 유의하는 점은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우선 지적장애인이 피해자이거나 피고인이었던 형사재판들이 떠오릅니다. 지적장애인이 피해자이거나 피고인일 경우, 그들과 제대로 의사소통하고 그들의 진술을 제대로 이해하며 신빙성을 판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술조력인 내지 신뢰관계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그들이 재판참여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한 번은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했는데 그 진술번복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 전문가 상담을 추진해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거부로 진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다른 장애를 겪고 있는, 예를 들어, 시력 저하 또는 청력 저하를 겪고 계신 노인 당사자들의 재판 참여권 보장도 문제가 되겠지만, 특히 지적장애인이 형사사건의 피고인 또는 피해자가 되면 그들의 재판참여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하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재판할 때는 양 당사자 중 한쪽에 ‘편파적인 진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에 대해 가장 유의하는 것 같습니다. ‘공정한 재판’ 진행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가 찾은 답은 ‘솔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사자들에게 심증을 드러내고, 그 심증이 형성된 근거를 말하며 앞으로의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당사자들과 토론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 사건 한 사건마다 시간을 많이 투입할 수 없어서 이런 방식의 재판 진행이 힘들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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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류영재 판사는 탐사보도 인터넷 방송인 '뉴스타파'에 출연하여
현직 판사로서 느끼는 '사법농단'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그동한 못한 고백과 진실을 밝혔다.
벌써 사법농단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도 4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판사로서 겪은 사법농단의 의미와 이 시기에 중요시해야 할 법원개혁의 큰 방향성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2017년 우연한 계기로 드러나게 된 사법농단은 크게 ① 사법부의 청와대, 국회에 대한 재판 관련 협의․정보제공․법률자문서비스 제공, ② 사법행정권자의 개별 재판 통제, ③ 판사 사찰 및 특정 연구회 탄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법농단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청와대나 국회를 견제하고 통제하여 국민의 자기지배를 실현하게 하는 사법부의 역할을 져버리고 사법부가 오히려 청와대나 국회와 협력하여 사법조직을 강화하고 통치권력의 일환이 됨으로써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법원 내부로는 판사들의 재판을 통제하고 외부로는 청와대 등과 협력하면서 사법독립을 스스로 버린 사건이기도 합니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권한, 사법행정과 재판의 연결, 승진 중심 법관인사제도, 불투명하고 통제받지 않는 구조가 한 데 모여 발생한 참사인데, 특히 사법이 어떤 경로를 거쳐 사법부가 되고 사법권력이 되는지 잘 보여준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사로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느끼고 있으면서 방지하지 못한 데 책임감을 느낍니다. 위와 같은 사법개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법의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국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가 강화되어야 하며, 사법부가 아닌 법관이 독립될 수 있도록 인사제도를 변경해야 합니다.
 
사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판결문 공개, 사법행정 정보 공개, 시민사회 참여형 사법행정 시스템 등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고, 국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하여 법관 외부평가 및 다면평가, 법관 징계제도 개선 등이 논의될 수 있으며, 법관 독립을 위하여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판사회의 강화, 전보인사 축소 등의 인사제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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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UN OHCHR (유엔인권고등판무관) 출장 당시 제네바에서
그동안 ‘판사’로서 참 많은 일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현직에 대해 고민해보신 적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특별히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보람을 가질 때는 언제인가요?
 
저는 판사를 천직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매번 ‘나 같은 사람이 재판에 임해도 되는가?’ 자괴감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판사로서 뿌듯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형사재판을 하면서 수사기관이 절차적인 위법을 저지른 사실을 발견하여 적절히 통제한 순간이 있었고, 유무죄를 고민하면서 기존의 익숙한 법리를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고 좀 더 인권보장적으로 법을 해석할 수 있는지 각종 연구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재판을 진행하면 할수록 재판은 단순히 시험을 치듯 정답을 맞혀나가는 과정이 아닌 것 같아요. 부여받은 많은 역할이 있고, 항상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벼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해 연구 활동이나 사회생활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들을 깨닫게 된 것도 자랑스럽네요.

앞서 언급했듯 SNS를 통해 좋은 글을 포스팅하고, 기사를 공유하며 비법조인들과 활발한 소통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 외 단점, 그리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댓글이나 메시지 혹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판사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법조인, 그중에서도 판사들로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판사들끼리만 만나고 판사들끼리만 얘기하는 것은 사실 편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내 생각이 시대정신에 들어맞는가?’, ‘우리 사회의 담론을 따라가고 있는가?’, ‘사람들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한, ‘헌법은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하고 법 또한 현실과 떨어져서는 안 되는데, 헌법과 법을 해석하는 판사가 너무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고 온라인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회의 담론은 다양하며 수준이 높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많이 배웠고 재판 사안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 배움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법조인들과 비법조인들 사이에 괴리가 상당하다는 점, 재판에 대한 오해가 크다는 점도 깨달았고 그 괴리를 좁히며 오해를 풀기 위해 SNS를 활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SNS를 해서 가장 좋은 장점은 알지 못했던 사회의 담론들을 알게 되고, 그 이슈들에 대해 좋은 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SNS로 인해 예기치 않은 오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SNS는 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개된 의사표명이기도 하므로, 혹여 제 포스팅이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부정확하지 않은지 계속 ‘자기검열’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이 SNS의 단점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댓글이나 메시지, 에피소드보다는, 제가 어떤 이슈 - 주로 인권보장, 차별금지 등의 이슈 - 에 대해 포스팅을 하고, 비법조인 페이스북 친구분이 저와 다른 의견을 댓글로 달아 주시고, 제가 거기에 대해서 다시 제 의견을 밝혀 나가면서 토론을 길게 할 때, 그 토론의 결과가 어떻게 끝나든지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저는 판사임을 밝히고 SNS를 하므로 저의 페이스북은 완벽한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위 ‘키배’를 끝장나게 뜬다든지, 그런 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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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판사는 '판사의 본질은 '인권보장'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2013년 유럽인권재판소 출장 당시.
현재 전국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에서 5천여 명의 학생과 그 외 변호사시험(이하 변시) 재수생 수만 명이 예비 법조인을 꿈꾸며 공부 중입니다. 학부 졸업 후 2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신 판사님께서는 사법고시 존폐와 로스쿨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법시험을 보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즉시 판사로 임관된 전형적인 “사시세대” 법률가입니다. 한편으론, 대학 졸업 때까지 법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법과 무관한 학과를 전공한 후 비로소 법을 공부해 법조인이 되었다는 점에선 로스쿨생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사법시험이나 로스쿨이나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기간 한정 없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시험공부를 한다는 점에서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시스템은 법조인이 되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법률지식을 충실히 습득하는데 최적화되어있고, 성적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학벌이나 성별 등에 의한 차별을 뒤집을 기회가 제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시스템은 한편으론 외국 로스쿨에는 필수과목으로 법조인으로서는 정말 중요한 학문인 인권법이나, 그 외에 논증하는 법이라든지, 사실인정 하는 법이라든지, 법철학이라든지 법조인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학문을 배울 기회와 필요성을 모두 배제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로스쿨은 그에 비해 학부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 후 법조인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끔 되어있고, 로스쿨에서도 법조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익히도록 하는 제도인데, 문제는 지금 그 취지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로스쿨 제도가 갖는 학벌과 연령, 성별 차별 등의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양 제도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어떠한 법조인 양성 과정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법조인 양성제도로 로스쿨 제도를 선택했고, 그 사회적 합의를 존중합니다.
 

법조인을 꿈꾸는 분들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만큼 제가 특별히 훌륭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래도 조언을 드리자면, 로스쿨에 입학하기까지, 그리고 로스쿨을 수료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계속 고되고 지친 과정이 지속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일단 법조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니,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열심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가능하다면, 법이 사람을 다루는 실용학문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 주시길 바래요. 법은 기본적으로 논리학에 가깝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분야는 현실, 그것도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尊敬`. 이 단어의 어원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 국어단어는 명시하고 있습니다. 법정물을 보면 재판정에서 판사를 대할 때 대부분 `존경하는 판사님`이라는 문장과 함께 발언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법관 사이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존경하는`을 붙이는 관례가 있습니다. 판사님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법조인은 어떤 분이 계신지요?
 
먼저 군부독재 시절 독재에 부역하지 않는 재판을 하려고 노력했고 그 후에도 법원개혁과 진정성 있는 재판을 위해 행동하시고 고민하신 선배 법관님이신, 박시환 전 대법관을 존경합니다. 어떤 판사가 훌륭한 판사인가 - 아무리 법리에 밝더라도 행동하는 양심을 갖지 못하면 훌륭한 판사라고 칭할 수 없다는 점을 몸소 실현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님도 존경하는데요, 그분이 내신 소수의견들과 대법관 퇴임 이후에도 꾸준히 전념하시는 소수자 인권보장 활동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사법연수원 교수님이자 선배 법관이 계십니다. 연수생 시절부터 현재까지 판사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재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이 세 분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훌륭한 판사, 완벽한 법조인이라고 자평하지 않으세요. 밖에서 보면 두 분은 대법관까지 역임했고 다른 한 분도 소위 아주 잘나가는 법조인인데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정성 있게 법조인으로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모습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는데요,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있다는 점이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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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판결'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춘천지방법원 류영재 판사의 사무실.
사무실 한쪽에 세워둔 자전거가 눈에 띈다.

올해로 10년 차 법관이십니다. 어떤 판사가 되고 싶으세요?
 
2011년 판사로 임관했을 때엔 법리적으로 밝고 중요한 재판을 도맡아 하는 판사가 되고 싶었어요. 욕망이 넘치는 시기였죠. 그런데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고, 법관의 본연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고, 사법의 역사를 배우면서 소위 ‘잘나가는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된지, 나아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법농단이 발생할 즈음에는 이미 ‘승진‘, ’잘나감‘ 같은 직장 내 위치에 대한 욕심은 버린 지 오래였고, 대신에 각종 ‘인권규범‘을 공부하고 재판에서 느낀 ‘문제의식‘에 대해 고민하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사법농단을 거치면서 판사에 대한 어떤 고정된 상은 더 옅어진 것 같아요.
 
지금은 제발 나이가 들더라도 세상의 담론, 상식과 괴리되지 않고, 아집과 고집에 빠지지 않고, 선민의식과 오만함에 빠지지 않고, 항상 눈앞에 있는 재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최소한 “덜 꼰대스럽다”라는 얘길 듣고 싶네요.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년에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개인의 삶과 재판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SNS를 통한 소통은 계속하겠지만, 사법농단 및 법원개혁을 알리기 위해 계속해왔던 외부 활동들을 가능한 줄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신 재판에 더 집중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싶어요. 올해 써놨던 발표문들을 논문으로 편집하는 작업도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별것 없는 인터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류영재 뉴스타파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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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엔터테이너' 배우 <이재윤>

12/24/2019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렸던 그는 태평양을 건넜고, 성인이 그는 자신의 꿈을 찾아 다시 고향을 찾았다. 힘겨운 역경을 이겨내고 드라마, 영화, 예능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는 진정한 ‘멀티엔터테이너’ 배우 이재윤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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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재윤 (Jae Yoon Peter Lee)

[생년월일]
1984년 12월 15일

[학력]
여의도 초등학교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
University of Toronto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과 졸업
 
[경력]
드라마 출연 -
2004년 MBC《논스톱5》
2005년 DMB《얍》
2006년 MBC 《늑대》
2008년 SBS 《행복합니다》
2009년 MBC 《맨땅에 헤딩》 신풍철 역
2010년 MBC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박철 역
2010년 MBC 《폭풍의 연인》 이형철 역
2011년 SBS 《내 사랑 내 곁에》 이소룡 역
2011년 MBC 《오늘만 같아라》 장지완 역
2012년 SBS 《유령》 조재민 역
2012년 SBS 《야왕》 주양헌 역
2013년 JTBC 《무정도시》 지형민 역
2013년 MBC 《황금 무지개》 김만원 역
2014년 tvN 《마녀의 연애》 맞선남 역
2014년 MBC 《드라마 페스티벌 - 형영당 일기》 이철주 역
2015년 tvN 《하트 투 하트》 장두수 역
2015년 SBS 《애인 있어요》 민규석 역
2015년 MBC 《화려한 유혹》 홍명호(문선호) 역
2015년 UMAX & O'live 《나에게 건배》 이지혁 역
2016년 tvN 《또! 오해영》 한태진 역
2016년 다음 tv팟 《통 메모리즈》 백승화 역 (특별출연)
2016년 MBC 《역도요정 김복주》 정재이 역
2017년 tvN 《아르곤》 허훈 역 (특별출연)
2017년 tvN 《변혁의 사랑》 변우성 역
2018년 tvN 《마더》 정진홍 역
2018년 JTBC 《뷰티 인사이드》 영화 '나를 모르는 너에게' 남자주인공 역 (특별출연)
2018년 MBC 《나쁜 형사》 강우준 역
2019년 TV조선 《조선생존기》 정가익 역
2019년 OCN 《왓쳐》 김강욱 역 (특별출연)
 
영화 출연 -
2012년 《회사원》 신입남(영업2부) 역
2012년 《첫사랑 보관소》(단편 영화)  현우 역
2014년 《관능의 법칙》 황현승 역
2014년 《그댄 나의 뱀파이어》 이주형 역
2015년 《이스케이프》(단편 영화) 김 경위 역
2019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해골문신 역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최근에 영화 <나쁜 녀석들>로 찾아뵈었고, 현재 드라마와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배우 이재윤입니다. 반갑습니다.
 
초등학교 때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하셔서 대학교까지 10여 년간의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이재윤'이 아닌 '피터 리'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가게 되었어요. 나이 열 한 살 채 되지 않았던 제겐 모든 것이 낯설었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란 부모님께서도 그러셨겠지만, 제겐 더욱 쉽지 않았지요.
 
동생과 단둘이 서로 의지하며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입학했던 첫날이 기억나요. 첫 수업이 불어 수업이었는데, 영어도 못 하는 제게 불어가 얼마나 낯설고 생소했던지 첫날부터 수업 도중에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Peter’라는 제 영어 이름은 뒤늦게 성당에서 알게 된 분들이 지어주셨어요. 우리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제 세례명 ‘베드로’를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 덕에 토론토 소재의 가톨릭 학교인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에 이어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에 진학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캐나다는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나라이지요. 제 생각엔 다른 곳 들보다 비교적 인종차별이 적은 것 같아요. 다만, 각각 외모와 언어, 문화와 생각의 차이가 서로 부딪히다 보니 그것이 ‘인종차별’이라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다름을 약점으로 삼고 놀리거나, 무시하다 보니, 싸우기도 하고, 문제도 생기고 했지만, 그곳이 한국이었던, 캐나다였든, 제가 느끼는 것은 같았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그렇게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어요. 비교적 평범한 키에, 그리 용감하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마음 한편엔 저도 모르게 ‘나는 동양인을 대표한다’,라는 마음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 주변에 어울리던 동양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더욱 못 참았지요.
 
제가 ‘센 캐릭터’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약해서 학창시절엔 싸움이 나도 끼어들지 못했어요. 하지만 강해 보이고 싶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어요. 한국과는 시스템이 달라 엘리트 체육부가 아닌 생활체육이라고 해도 운동부에 들어가려면, ‘Try-out’이라 하여 일종의 오디션 같은 것을 통해 그해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뽑곤 했는데, 저는 모든 체육 종목부 ‘Try-out’에 참여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종목이 육상이었어요. 학교를 대표해서 100m 단거리 선수로 대회를 나갔고, 항상 1, 2등을 차지했어요.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강남구, 서울시, 도를 거쳐 올라가듯 온타리오주 대회 참가 자격을 받으며 제가 원했던 것처럼 ‘학교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육상을 통해 알게 된 특별한 지인이 바로 ‘벤 존슨’이에요. 대회가 열리던 대학가에 벤 존슨이 개인 훈련 사유로 와있었고 시합을 참관하고 있었어요. 저는 용기 내 다가가 사인을 받았죠. 그런데 존슨은 제가 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한 대화는 기억을 못 하지만, 함께 훈련하지 않겠냐고 했던 것이 어렴풋해요. 그렇게 해서 몇 달간 개인 훈련을 받았어요. 집에도 초대해 함께 식사도 하고, 부모님 세대의 유명한 운동선수라 특히 부모님께서 무척 신기해하셨어요. 정말 좋은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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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tvN 드라마 ‘마더’ 촬영 당시>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였지만 1년 만에 자퇴하고 '배우'라는 꿈을 찾아 한국 귀국을 택하셨습니다. 연극영상학으로는 우리나라 최고 중 하나인 동국대에 입학하셨는데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스포츠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토론토대학에 입시지원을 하였습니다. 합격통보를 받은 후, 우연히 한국분이 운영하는 가게를 들렸는데, 그분께서 제게 토론토 지역 신문에 실린 캐스팅/오디션 광고를 보여주며 지원해보라 추천을 해주셨어요. 연기자, 모델, 가수를 캐스팅하는 토론토 최초의 오디션이었죠. 어머니의 호기심에 지원서와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을 보냈어요. 관계자분의 설득 끝에, 저는 대학 입학 1년 만에, 그리고 그렇게 ‘피터 리’로 학창시절을 보냈던 토론토 생활의 막을 내리고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우’ 인생의 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지요.
 
저는 그동안 연기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거나, 배우나 연예인이란 직종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느낀 건 한국에 와서 연기 수업을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재미있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면의 무언가를 깨버리는 희열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극장 스크린과 TV에 나오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회사 대표님과 부모님께서는 제가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들어가길 원하셨어요. 몇몇 곳에 지원서를 넣고, 운 좋게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동국대에 지원서를 넣은 이유는 단지 최민식, 한석규, 박신양, 유준상, 이정재, 고현정, 김혜수…. 제가 존경하는 수많은 선배님께서 거쳐 간 대학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어요.

입학한 후, 엄격한 규율과 전통처럼 내려온 선후배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학창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제겐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답답했고, 힘들었어요. 하지만, 동국대 학부 시절은 이론과 실습교육을 통해, 연극 무대도 직접 만들고, 관객분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이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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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째 함께 사는 반려견 ‘구마’와>
2004년 스타들의 등용문이라는 MBC 시트콤 <논스톱 5> 출연을 시작으로 데뷔 15년 차 배우로 활동 중이십니다. 배우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 연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올해로 ‘배우’로서 데뷔 15년 차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도 너무 신기한 요즘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제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하곤 합니다.
 
‘죽기 살기로 버텨서’ 한 것이 아니라, 한 작품씩 제 기준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걸어오다 보니 별 탈 없이 여전히 작품을 제작하는 관계자분들과 무엇보다 시청자, 그리고 팬분들께 꾸준히 선택받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들어 ‘누굴 위해 연기를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묻고 하는데, 솔직한 답은 ‘나를 위해서 하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작품을 봐주시는 팬분들,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들과 프레임 밖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제작진분들. 너무 많은 분이 얽혀 있기에 단순히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 연기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기하면서 제가 행복하고, 제가 행복해야 다른 분들에게도 활기차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작품에 임하다 보면 역할에 몰두하면서 감정들이 다양하게 휘몰아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일상에도 번져 버리죠. 너무 예민하다 보니 촬영 기간 동안 살도 빠지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데, 작품이 끝나고 그 순간이 다 지나고 나면, 그만큼 많은 인연과 소중한 추억이 생깁니다. 성취감을 안겨주는 작품이 완성되어있고…. 작품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저 자신에게는 가혹해지는데, 끝에는 보람되고, 스스로 뿌듯해집니다. 그리고 반복되듯 다음 작품에 선택을 받기를 기다립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작품에 들어갈 수 있기에, 선택받지 못했던 그 시간이 가장 괴로웠던 것 같아요. 선택을 받아도, 제 노력이 무시당하거나, 바라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거나, 주목받지 못하고, 땀 흘려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기를 하는 동안 만큼은 행복하니까 그 힘으로 버티고 발전할 수 있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배우 지망생, 단역배우, 신인 배우가 그 ‘선택’을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작품과 배역이라는 것이 모두가 선택 받을 만큼 공평하거나 너그럽지도 않은 냉정한 곳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자책하다 보면 저 자신을 너무 미워하게 되더라고요. 기회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있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을 추천 드려요.

  
배우 활동에 있어 많은 제의와 제안이 들어올 텐데, 작품 선정 기준과 배역을 준비하고, 대본을 숙지하고,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그 모든 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작품은 타이밍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어떤 멋진 답변보다, 솔직하게 답하자면, 휴식기에 다가온, 제 마음에 다가온 작품을 선택합니다. 모든 작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시작하진 않아요. 욕심이 있다 보니 아쉬운 부분들이 잘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의받은 배역의 대사 중 와닿는 부분, 연기하기 재밌을 것 같은 것, 빨리 카메라 앞에서 해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거나, 도전해보고 싶은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한다거나…. 어디에라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작품 안에 저 자신을 그려보지요. ‘그 안에 나는 어떤 모습이지?’라는 질문과 함께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처럼 메소드 연기를 하며, 흔히 말하는 ‘연기 변신’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결국 보이는 건 ‘이재윤’이기에 가능한 배역을 준비하며 ‘나’로 부터 출발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극 중 배역이 느끼는 것을 저도 최대한으로 이해하고 제 안으로 빨아들이려고 노력하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지만 공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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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tvN 드라마 ‘하트투하트’ 대본리딩 현장>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감독님들이나 작가님들의 작품들도 다시 하고픈 마음에 선택하기도 합니다. ‘대박 날 것 같은’ 흥행성보다 ‘촬영이 즐거울 것 같은’ 스텝 간의 화합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물론 흥행도 중요 하지만, 작품을 들어가면 그 기간이 짧지 않고, 많은 스태프진과 소통해야 하기에, 극 중 배역에 집중해야 하는 연기자로서 또 다른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주는 작품들은 저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겐 2015년 방영되었던 tvN 드라마 <하트투하트>에서 이윤정 감독님과 함께한 겨울이 기억에 남아요. 무척 추울 때 촬영했지만 정말 행복했거든요. 제 배역은 경찰대 졸업한 엘리트 형사역으로 현장을 뛰고 싶어 강력계 형사과를 지원한 상남자 스타일로, 어른들껜 예의 바르고, 친구들에겐 의리 넘치고, 약자를 배려하는 캐릭터였어요. 전 배역에 더 애착을 갖고 공감하며 연기 했고, 함께 했던 최강희 배우와의 호흡도 좋았어요. 감독님의 섬세함과 배려 깊은 현장이, 작품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던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여러 의미에서 출연했던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작품의 결과가 좋든지, 안 좋든지, 밉든지, 애정이 깊든지, 제겐 지난 15년간 인연이 되었던 작품들은 지금의 ‘배우 이재윤’이 걸어온 필모그래피를 그려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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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주짓수 체육관에서 승급 당시>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이재윤을 만들어준 대표작은 '우리 동네 예체능'이다'라고. '멀티엔터테이너'가 주류인 세상에 많은 대중은 아직도 '배우 이재윤'을 '국가대표급 피지컬을 지닌 스포츠맨'으로 기억합니다. 올해 이소룡의 묘지를 방문하셨을 정도로 무술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만약 연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저는 8년째 주짓수를 하고 있어요. 크로스핏과 웨이트 트레이닝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요즘은 배역 준비하느라 체중 증량하며 몸을 키우고 있습니다. 스포츠는 연기만큼 제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무술 또한 마찬가지예요.
 
어릴 적부터 저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이소룡 영화를 보고 자랐어요. 그때부터 무술과 몸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때마다 언급하는 저의 우상은 이소룡이에요. 외국 생활을 하며 그의 영화 그리고 철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양인을 대표하는 스타이자 무술가이고,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그는 철학을 전공한 철학가입니다.
 
지난 2월, 부모님을 모시고 시애틀에 이소룡 묘지에 다녀왔어요. 그동안 아버지를 꼭 모시고 함께 가고 싶었거든요. 묘지 앞에 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소룡이 살던 집과 그가 걷던 거리, 단골식당에서 단골 메뉴를 그가 앉던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맛보며 ‘이소룡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만약 배우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고교 시절에 했었고, 토론토대학 입학 당시에도 계획했던 운동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앞서 설명했듯 어릴 적부터 유명해지는 게 꿈이었어요.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든지 저는 제 분야에서 인정받고, 제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을 것 같아요.
 
여러 연예인 동료분들이 중 사업을 부업으로 하는 동시에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사업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낯도 많이 가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또한, 저는 배우 본연의 일 외에 신경을 뺏기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보내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또한, 저는 배우 본연의 일 외에 신경을 뺏기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다만, 시간이 지나 배우라는 직업에서 은퇴하게 된다면, 좋아하는 운동을 기반 삼아 체육관을 운영하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고. 도와줄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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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미국 시애틀 이소룡 묘소에서>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내년 방영 예정인 김희선 선배님, 주원, 이다인 배우 등과 함께 드라마 <앨리스>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년 개봉예정인 영화 <특수요원>(가제)도 준비 중입니다. 올해 이렇게 두 개의 좋은 작품을 만나서 내년에도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작품이 15년 전의 신인이었던 제가 바라던 그 ‘드라마’와 ‘영화’인 만큼, TV에 나오는 ‘배우’가 되고자 했던 ‘목표’를 갖고 달려와 ‘꿈’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거창하진 않아도 그것이 ‘성공’이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또 다른 ‘목표’가 계속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마음도 그렇고 생각도 참 변덕스럽기에, 인터뷰를 통해 독자 분들께 지금 이 순간 느낀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고민하고 노력했어요. 저의 짧은 ‘지금 이 순간’을 통해 누군가에겐 ‘빛나는 순간’의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터뷰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꿈’, 그리고 ‘목표’를 잃지 마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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