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부산대 치의예과 학부생으로 발을 들인지 30년 만에 그는 모교 치의학전문대학원(치과대학)의 원장(학장)이 되었다. 80여 편의 SCI급 논문을 포함한 16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치의학계 국내 교수 중 해외 강연을 자주 하는 그는 치과계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치과대학의 학장으로서 행정가,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이자 모범적인 지도력을 펼치고 있는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김현철 원장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 2018년 10월,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당시 [학력] 1988 창원고등학교 졸업 1995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2004 부산대학교 치의학박사 (보존 및 보철학 전공) [경력] 2004년~現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2012년~2018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과보존학교실 주임교수 2015년~2017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과 학과장 2018년 9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첨단치과의료기기사업화센터 초대 센터장 2017년 3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부원장 2019년 3월~現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2008년~2009년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 생체공학연구실 방문교수 2007년~2010년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 치과의료전문평가위원 2011년~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청 신개발의료기기분과위원 2019년 7월~2021년 7월 부산광역시 치의학산업지원위원회 부위원장 2011년~2014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교육연구실장 2013년~2015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치의학연구소장 [직능단체 경력] 2010년~2014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7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공보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부회장 2005년~200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섭외이사 2009년~2011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기획이사 2011년~2013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국제이사 2015년~201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수련고시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보존학회 학술이사 2019년~ 現 총무이사 2014년~2016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8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현미경치과학회 부회장 2015년~2017년 Asian Pacific Endodontic Confederation (아시아태평양근관치료학회연맹) Council (이사) 2017년~2019년 APEC Secretary (총무이사) 2019년~現 APEC President-elect (차기회장) 2016년~2018년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조직위원회 학술분과 위원장 現 European Endodontic Journal (유럽근관치료학저널) Associate Editor (부편집장) 現 Journal of Endodontics (근관치료학저널) Scientific advisory board (학술자문위원)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School of Dentistry)원장 김현철입니다. 전문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이 한국에서 특이하게 운용되고 있어 무엇인가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치과대학(College of Dentistry)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의 교수인 만큼 저는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치과의사자격을 가진 임상교수이니 치과병원 치과 보존과(Department of Conservative Dentistry)에서 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으니 행정업무도 상당 부분 겸하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강의, 연구, 임상, 행정 등 여러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치과의사들에게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치아 신경치료에 관한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알려져 있고, 연구자들 사회에서의 저는 신경치료에 사용하는 기구와 재료를 평가 연구 개발하는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와 관련하여 국외로는 “Henry Kim”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름이 불릴 일이 별로 없는데, 외국 친구들은 여전히 이름을 부르니 영어 예명이 더 익숙한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 수묵화에 깊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돌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에 가족관계도 들어가는 것이 한국적인 소개인 듯하여 덧붙인다면, 최근 군 복무를 마친 아들과 2월 군 복무를 앞둔 아들. 그리고 두 아들과 저보다 더 많이 가장 역할을 하는 아내. 이렇게 4인 가족의 일원입니다. 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ProEndo Conference에서 그는 7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했다. 치과대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진학하게 되셨는지 대학 입학 이전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엔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선망하는 직업 없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어요. 초등학교(창원 양곡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와 집을 오가며 8비트 게임 흑백 게임을 하러 오락실도 갔던 기억도 있고, 어릴 때부터 서예/묵화 화실을 다니며 먹물을 가까이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당시 교과목인 특활로 서예를 시작하여, 5학년부터는 묵화를 하게 되었고,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였는지 그 후로 중학교(창원 양곡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방학 때마다 방학 기간 내내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니며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고등학교(창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너무 취미생활을 너무 깊이 있게 하지 말라고 하였던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잠시 멈추었어요. 하지만 공부는 안 하고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수험생이 된 3학년이 되었어도, 카메라를 들고 철새 도래지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원인이었는지, 재수하게 되었고, 1년 후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만 해라’고 압박을 하시거나, 사교육을 위해 학원에 보내시지 않았으니 정말 평범한 학창 생활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선두권 성적이었어요. 고등학교 진학 후, 노력형(Effort-Type)이었다고 해야 할지, 1학년 초반, 전교 중위권에 머물렀던 성적은 매 학년, 학기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제도였어요. 타 대학교 치의학과에 지원하였는데 평상시보다 시험을 잘 본 듯하였습니다만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진 찍으러 다닌 시간이 아니었으면 합격하였을까요? (웃음) 재수생 시절, 학원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두 번 꼭 일어나야만 할 때 외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더 오르긴 했지만, 재수하고도 늘 여유롭지 못한 것이 입시 성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잠시 산업디자인학과로 진로를 고려했었으니 예술적인 꿈은 늘 내재하여 있었나 봅니다. 아주 특별한 계기나 깊은 고민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그림 등으로 표현되던 예술적 감성을 포함한 치의학과(치의예과)로 지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산대 치과대학에 입학하여, 현재까지 30년간 모교와 연결 고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학교에 설치된 최신 실습장비(Virtual Reality Haptic Device)를 이용한 실습 지도. 대학 졸업 후 개원 의사이셨지만 학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대학교수로서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의 길을 겸하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 합격으로 바로 개원하여 치과의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치과 전문의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지만 저는 치과보존학 수련과정을 지원하며 3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공의 과정 중에는 진료와 함께 전문 영역의 공부도 깊게 하지만 학생들의 교육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즉, 후배들의 학습 도우미를 하는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본인이 더 공부하게 된다고 하는데 저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학습의 깊이를 직접 대면하였습니다. 또한, 진료하면서 ‘가르침의 기쁨’도 깨닫게 된 것은 후에 교직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공의 과정 중에 새로운 기구나 재료 사용에 관심을 두고,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던 그런 ‘도전적’ 성향들이 지금 연구자로서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해군에서 군의관 생활을 하였습니다. 3년동안 해병대 부대에서도 장병들을 보살피고 해군 함대에서도 일하였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1998년 당시, 육해공군에서 사용하던 치과기구재료의 목록이 한국전쟁 이후로 이어져 온 미군 부대 장비목록이었는데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구할 수도 없는 사용할 수도 없는 목록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록을 보며 저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 목록들을 현대화하기 위해 작업을 주도하여 시작했습니다. 물론 뒤를 이어 마무리하신 많은 분의 노고가 있으셨겠지만, 그 결과로 지금의 리스트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성향도 교직하면서 행정도 하는데 기초적인 경험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군의관 입대 훈련 입소 하루 전 첫아들이 태어나고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이름도 없던 아기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서른 살 아빠로 입대했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군의관 복무 동안 둘째도 태어나고, 군의 규율 속에서 3년을 보낸 후에 흔히 말하는 '개인 치과 원장님'으로 3년 반가량을 보냈습니다. 개원 당시부터 교직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에 개원 여건 조건 등을 정할 때 이직 가능성을 고려하였습니다. 개원 치과의사로서의 경험은 현실의 삶이던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를 기다리고 환자의 불편감을 해결해드리고 경영을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 현실은 변화나 발전 등의 미래 지향적인 용어와는 연결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재정적인 풍족한 삶’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평생 사는 ‘개체로서의 삶’의 의미를 담기에는 제한성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개원하여 진료하고 봉사를 하는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개원가 원장님이 세상을 등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생의 끝에 그간 관계를 가져왔던 환자들에게 전해지는 아쉬움은 소위 '반려동물'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수치상으로 표현한다면, 평소 구강건강관리를 하는 담당 환자가 2천여 명일 때 그분들로부터 아쉬움의 위로를 듣는 그런 존재와 삶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보다는 좀 더 크고 넓게 의미 있고 가치를 높이는 ‘사람’의 삶을 갖고자 교직을 택하였다면, 직업 선택의 계기로 적절할까요? 학교에 일하면서 받는 인사말 중에 가장 잘못된 질문이 ‘방학이라 쉴 수 있어 좋겠다’는 말입니다. 대학의 교원은 교육, 연구, 진료, 행정 등 다양한 키워드로 업무를 나누어 보게 됩니다. 결국 개인 진료 생활을 접고 2004년 처음 대학으로 올 때는 강의와 진료가 거의 다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행정업무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수치로 정량화하기는 어렵지만, 학원장을 맡은 지금은 행정 업무가 가장 많은 업무를 차지하는 듯하고, 오히려 교육이 뒷순위로 밀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방학은 수업만 없을 뿐인데 “수업의 없음(방학)”이 결코 시간적인 여유는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2018년 10월,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갈라 디너 당시. 학술분과위원장으로서 인사 및 학회 경과 보고를 하고 있다. 원장님께서는 한 해에만 열 건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의 학회에 참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연구와 학술활동을 이어가는 계기나 배경이 있었는지요? 저는 교직을 택하고 학교에 오기까지 연구를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전혀 모르던 임상 치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임교원이 되기 전에는 외래교수로 강의를 해왔고, 진료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 착각하였다가, 의미도 알 수 없었던 SCI급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가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현재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연구분야에서 Top 0.14%로, 특히 제가 중점으로 연구하는 니켈티타늄 기구를 포함한 치과기구(Dental Instruments) 영역에서는 Top 0.065% (Asia 1위, 세계 7위)에 자리매김할 정도로 해당 분야에서는 나름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2004년 대학에 임용된 후 2007년까지는 국내 논문 발표에 머물렀지만, 2007년부터 SCI급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런 변화에는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처음 SCI급 논문에 게재된 것은 연구방법으로 유한요소분석법을 이용한 것인데, 이 연구를 하게 된 배경도 특별한 호기심을 혼자 혹은 측근들에게만 제한하여 나누지 않고 직접 다른 분야의 연구자를 찾아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 큰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당시 공과대학 기계공학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뵙고, ‘이런저런 내용의 연구를 하고자 하는 데 도움을 주십사’ 부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관련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원생을 소개해 주시고 관심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셨습니다. 즉, 치의학계에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방법론적인 부분을 공과대학에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그 계기였던 것이고, 그야말로 치의학과 공학 융합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공대와의 협업으로 만든 결과물을 발표하는데 또 다른 큰 조력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작성한 논문을 해외 우수 저널에 발표하려면 영어 교정도 상당히 중요한데, 이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 홍콩대학교의 Gary SP Cheung 교수님이십니다. 영어 교정 회사를 통한 교정은 전문성의 결여로 인해 그 교정 효과가 미비한데, 같은 전공분야의 Cheung 교수님은 제가 원하는 바 문맥 구성(plot)을 잘 유지하면서도 매끄러운 흐름의 문체로 교정을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전까지 단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하던 SCI 논문을 수정도 없이 바로 게재 수락을 받았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충격과 같은 경험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후로도 많은 연구에 대해 조언과 영문 교정 등의 도움을 주셔서 저에게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멘토이십니다. Cheung 교수님은 3~4년간 메일을 통해 도움을 주신 후, 어느 메일 회신에선가 이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그냥 도움 요청 없이 진행하라는 조언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멘토-멘티의 관계가 아닌 '동료연구자'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제게는 참 고마운 분입니다. Cheung 교수님과는 매년 한 번 정도는 해외학회 등에서 뵙기도 하고 서로를 방문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 교류 및 global collaboration이 연구자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제가 Cheung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제가 외국 교수나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공동 연구를 제안받는 위치에 와 있으니 새삼 Cheung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연구가 이어지면서 해외 학회에서 강의 요청이 오게 되는데, 사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한국인으로서 상당히 부담이 느껴지는 활동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이고 사양하였지만, ‘연구자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고, 학교와 한국을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여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영어 강의를 할 때는 강의자료를 일찌감치 만들어 수차례 연습을 반복하고, 발언 내용을 적어 반복해서 읽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사이사이 참고할 메모를 적어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강의는 한국어 강의와 마찬가지로 강의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외강의 초보 시절 모스크바에서 강의할 때, 제 영어 강의를 러시아어로 동시통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강의 당시 흥분하고 긴장했던 상태였는데, 동시통역자가 말이 빠르니 천천히 하라고 팔을 마구 휘저어서 제 시선을 끌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최근에는 동남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인도 등)를 넘어 중동(이집트, UAE, 요르단 등)에서 강의 기회를 많이 얻게 되면서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중동의 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를 통한 다양한 소통은 더 많은 연구 주제를 생산하고, 제 학생들도 더 많은 연구 주제를 공유하게 되면서 개인 연구 주제를 찾는 가능성을 높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석, 박사과정의 제 학생 중, 연구 주제가 없어서 고민하는 학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결과들에 대해 제가 검토하고 지도하여 논문 작성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제 바쁜 일정 때문에 논문작성 지도가 지연되거나 논문 수정이 지연되는 일들이 지속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간혹 해외 연구자들의 논문 작성을 도와주는 작업이 6개월에서 1년씩 지연되기도 하여 독촉을 받는 것에 비교하면, 대부분의 국내 학생들이 좋은 내용으로 권위가 있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2017년 12월, 학회 차 이집트 방문 당시.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느냐?` `한국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으실 정도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바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쁘신 와중에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는지 소개 부탁합니다. 비교적 잦은 빈도로 해외 출장을 가다 보니, 간혹 외국에 있어도 계속 ‘외국에 있는지 국내인지’ 농담 반 진담 반의 짓궂은 말씀들을 하십니다. 작년부터는 원장직을 수행하느라 해외출장 기회를 몇 건 줄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 해외출장 일정을 다녀오면 환자 진료를 포함하여 밀려있는 일들로 인해 저 자신이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구 관련 강의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비행시간 동안이라도 충분히 쉬는 장점을 누리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로 나가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반가운 조우도 있으며,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찍을 일도 더 많으니, 약간의 휴식과도 같은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얕아서 역사 깊은 유적지나 건축물에 대한 배경은 잘 알지 못하고, 들어도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구조를 건축했는지’, ‘어떤 자재를 이용하였는지’, ‘어떤 예술적인 건축 방식이 응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세계 불가사의로 거론되는, 이집트 피라미드, 인도 타지마할, 요르단 페트라, 로마 콜로세움 등. 그리고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이나, 스페인 성가족성당 등이 제가 눈으로 보고 즐긴 예술과 과학이 접목된 건축물들입니다. 사실 제 취미는 앞서 말씀드린 수묵화(ink-and-wash painting, 水墨畫)입니다. 그러나 취미라고 하기엔 지금은 좀 애매하게 취미생활을 일 년에 한 번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선지에 먹을 갈고 농담(light and shade, 濃淡)을 조절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5년 전입니다. 그 5년 전의 그림 작업조차 10년을 넘게 벼르고 별러 정교수로 승진하던 날 한 점(painting), 그리고 같은 달 한 점, 그다음 달 한 점을 더 그리고는 지금까지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한두 시간 혹은 두세 시간이면 한 점을 그릴 수 있을 만한데 지금은 그런 여유를 갖기조차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2016년 7월, 10년에 한 번을 즐기기 어려운 취미생활인 수묵화 작품과 함께. 평소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침이면 잠을 깨기 위해 휴대전화로 밤새 들어온 이메일 리스트를 확인하고, 출근 후 이메일 답을 쓰는 것으로 업무가 시작됩니다. 진료가 있는 날은 진료하면서 진료 틈틈이 결재 등 학교업무를 해야 합니다. 진료가 없는 날은 학교 원장실에서 업무를 봅니다. 40년이나 된 학교지만 계속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 맞는 교육연구 환경 개선 사업을 비롯하여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의 제반 업무, 국내의 세 가지 학회 업무 그리고 국제 학회 활동을 위해 수시로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하여 업무를 진행합니다. 점심시간은 거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계속 회의를 진행하고 삼십 분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밀려있던 일 중 논문 심사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해외 저널에 연구 논문이 많이 실리는 만큼, 해외 저널에 투고되는 논문의 심사 의뢰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은, 심사하지 못한다고 거절을 하지만, 제가 주로 투고하고 게재하는 해외 저널의 경우엔 심사를 거절할 수가 없어 틈틈이 심사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하루 ‘1부’의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이 됩니다. 간단한 저녁 식사 후 ‘2부’가 이어지는데, ‘2부’는 보통 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는데 효율이 높은 시간입니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거나 논문 첨삭 지도를 하고, 진행 중인 실험 내용에 대해 점검을 하는 것 역시 외부로부터 가장 방해요소가 적은 저녁 시간에 진행합니다. 보통 밤 9시에서 10시경 귀가를 하는데,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시간이 제겐 쉬는 시간 겸 가장 여유를 갖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퇴근길에는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시차가 있는 외국 분들과의 업무도 간혹 퇴근길 차에서 이루어집니다. 데이터 통신과 통신 애플리케이션이 발전되어 전화통화가 많이 편리해진 것이 도움됩니다. 집에 와서는 이제 ‘3부’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이 시간에는 주로 개원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부 강의와 해외 강의 자료를 만들고 보완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보통 자정이 넘어가고 다음 날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정해진 근무시간에 일하고 나머지 시간이 자유롭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등 원하는 취미 생활을 더 할 수 있을 텐데, 교직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일을 하기에 따라서는 활동 범위와 영역이 광범위하기에 바삐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교직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조만간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해보고 싶은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하얀 화선지를 펼쳐두고 담묵과 농묵의 먹색을 즐기고 싶습니다. 유화와는 달리 덧칠이 되지 않고 화선지가 젖어있을 때와 먹물이 다 말랐을 때가 색이 달라지기도 하는 먹색의 특징과 여백을 남겨두고 마무리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는 수묵화는 참 매력적입니다. 여백 한 자락에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적고 낙관(seal)을 찍는 날을 매일 매일 기다립니다. 2015년 5월, 연구실에서 실험 중 연구 장비들과. `중이 제 머리를 목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치의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이신 교수님은 누구에게 치과 치료를 받으시나요? 또한, 치아 건강을 위해 독자분들께 조언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 받아보는 질문 같습니다만, 저도 치료나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면 당연히 치료를 받습니다. 가까운 병원에 동료 교수에게 받기도 하고 제자인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치과의사인 아내에게 진료를 받기도 합니다만 근무시간과 퇴근 시간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진료가 더 현실적인 선택 방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치료할 내용이 없으니,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약 칫솔의 선택에 특별한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칫솔은 너무 크지 않은 것을 선택하시라 권하는 정도이고, 전동 칫솔이 더 좋은지 물어보시는 분들께도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치약도 정말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시중의 어느 치약을 쓰셔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간혹 시린 치아에 사용하면 완화 효과가 있는 치약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치과의사가 소개해주실 겁니다. 치약 칫솔의 종류나 방법보다는 식후에 그리고 가능하다면 취침 전에 칫솔질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치아 질환이나 구강 내 질환은 미생물과 입속의 잔여 음식물에 의해 발생하므로 칫솔질로 이를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잘 제거가 되지 않는 점착성이 높은 음식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양치질을 자주 잘한다면 음식이나 간식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올바른 가이드인 것 같습니다. 아내분도 치과의사이십니다. 이미 전 질문에서 집안에 `가장`으로서 많은 공백을 아내분이 대신 채워주고 계시다고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부부가 같은 분야 종사자로서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치과의사 아내의 장점은 믿고 치료를 받을 데가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직자로서 그 어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치과 방문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다행히 저도 근본적으로 치과 치료가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이 없으니 그다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장이 생계를 담당하는 것과는 달리 개인 치과를 운영하는 아내가 조금은 더 많이 살림을 관리하게 되는 상황이라 저보다는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 중 임상 실습을 참여하는 후배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래 직업으로 교수를 꿈꾸던 제게는 동종 직업인 배우자를 갖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으로 생각하던 차 저를 만났던 아내의 처지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정을 갖게 되었기에, 즐거운 청춘을 남들보다는 조금 짧게 즐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제가 학교에서 퇴근이 늦으니, “우리는 아빠 왜 못 봐?” 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들과의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일에 집중하여 숨 가쁘게 달려왔던 제 생활 방식에 아내가 아이들 양육을 도맡아 한 부분이 크니 고맙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내로서 그 어떤 내조보다 저를 이해해주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장점인데, 반대의 관점인 아내로서 저는 과연 장점이 있을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2008년, 1년간,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파견 근무를 가서 가족들이 같이 해외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해외 생활을 체험한 것이 가족들에게는 장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시절 방학 기간일 때마다 제가 해외 출장이 있어 아이들만을 데리고 해외를 같이 나갔던 적도 두세 번 있었습니다. 가장 대학 입시에 혈안이 되어야 할 시기인 고3이 되던 겨울방학에도 같이 해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재수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해외 체험을 하고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갖게 만드는 기회를 줄 수 있었던 게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김현철 원장은 작년 3월 모교의 원장으로 취임했다. 52세로 부산대학교 전체 학장 원장 중 최연소 원장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따른 보직자 선출이 아닌 것은 그 집단의 발전적인 모습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실력과 겸손까지 갖춘 존경스런 인물이었다. 89년도에 학사과정에 입학하셔서 2019년 3월, 모교의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오르시기까지 지난 30년을 부산대에서 보내셨습니다. 교수님께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1989년 치과대학(치의예과)에 입학하고 6년의 학부생활, 전공의 과정 3년, 군의관 3년과 그리고 3년여 짧은 개원의 생활을 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9년은 제가 모교와 함께 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고, 학교는 개교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개략적으로, 대학을 입학하고 30년 한 세대의 기간을 모교와 함께하였습니다. 30년 중 15년은 학부생으로 배우고, 전공의로 배우고, 군과 사회에서 조금 더 폭넓은 경험으로 배운 시기였고, 교수로 대학으로 돌아온 2004년부터 지난 15년 간은 배우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쪽에 더 가까이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지역 치과의사분들께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것 또한 저에게 새로운 학습의 과정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기술이 이끌어가는 치의학계에서, 새로운 것을 평가하고 올바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즐겁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구나 재료가 개발되어 치과 임상에 사용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더 보람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배움과 지식 나눔의 과정을 거칠 수 있고, 연구 개발을 통한 국제사회와 소통을 할 수 있는 대학 교원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그 기관이 모교인지라 더욱 다행스럽습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데는 가족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고, 주변의 많은 일을 차질없이 진행하는 데는 학교와 학회의 동료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도 가장 고마운 분을 꼽으라면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좋은 환경에서 바른 생각과 큰 꿈을 갖도록 해주셨고, 최소한은 유전적으로 지금 제가 하는 일과 생활이 가능하도록 역량을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학교는 공적인 기관으로, 큰 조직이기도 하면서, 제게는 어쩌면 집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으로 소중한 공간입니다. 학교가 잘되어야 제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고, 저를 포함한 각 교수가 더 뛰어난 업적과 역량을 가질수록 학교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와 저 자신을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동등하게 생각하며 일하는 것이 즐겁고, 학교의 발전을 개인의 성취로 여기며 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족에 한정된 발전을 추구하였다면, 개원가 원장의 자리를 유지하면 오히려 더 풍요롭게 여유롭게 즐겁게 일과를 보내고, 개인적인 성취감도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큰 나를 포함한 조직의 발전을 위해 발을 들였으니 그 바람에 맞는 방향의 일이라면 늘 반갑고, 모든 학교 업무가 직장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내 몸처럼 아끼고 집안일처럼 생각하는 학교의 원장이 되었으니 더욱 애정을 갖고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학과장 보직을 시작으로 부원장으로 2년, 그리고 원장까지 연속으로 5년간 보직을 맡고 있습니다. 두 분의 전임 원장님을 보좌하며 학교의 미래를 같이 설계하고 그 방향을 유지하면서 보직을 수행하고 있어,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발전하는 대학이 느껴질 때 보람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은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 영상을 제작하였다. 앞으로 원장으로서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은 어떤 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이 있으신가요?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은 1979년 치의예과의 설치와 함께 역사가 시작되어, 제가 원장으로 취임한 작년 2019년이 불혹인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취임하면서 강조한 대학의 발전 방향이 ‘국제화 및 특성화’입니다. 지금까지는 치과대학이 그 학문적 지향점이 분명하였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육연구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4차산업 혁명시대에 그리고 직업관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학령인구의 감소가 눈앞에 닥쳐온 오늘날, 지금까지의 같은 학교의 역할만으로는 장기적인 퇴보의 기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히 ‘치과의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지속적 성장 발전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혹을 맞은 대학이 사람의 인생처럼 변화하기 어려워 점점 퇴보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해서는, 미래 지향적으로 선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안으로 작년부터 디지털 치의학교육 특성화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치과의료에서 도입이 활발히 되는 디지털 장비의 사용에 대해 학부과정에 실질적으로 교육하고 실습과정도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산대 치과대학’이라고 하면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강점으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경쟁력을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 외국 치과대학생이나 대학원생 등의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치과의사들도 우리 대학을 방문하여 배우고 체험하고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제치의학교육센터 등의 실질적 운용이 되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외국으로의 직접 홍보를 통해 외국인을 유치하고자 세부 수행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대학이 명실상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선도치의학교육기관으로 변모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라 생각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제화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실용성을 얻고자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영상을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Pusan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Dentistry의 약자 ‘PNUD’를 이용하여 “Passion N(and) Ur(Your) Dream”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만들고 내부 역량 집중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화 특성화를 주제로 한 변화와 발전 과정을 통해 학교가 세계적인 기관으로서 인정받는 꿈을 꾸고, 학생과 교직원은 물론 동문과 지역주민 역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품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2020년 1월 24일은 구정이다. 국내 최대 명절인 이날, 김현철 원장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범아랍 근관치료학회에 초청되어 연사로 강연을 한다. 공식 질문) 새해 2020년 해외일정을 포함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이라는 숫자가 생소하지만, 벌써 6개월 이상의 일정이 계획된 상태입니다. 학원장으로서는 다양한 학교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부담됩니다만,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행사 준비는 그나마 부담이 적은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는 학원장 임기 첫해로 해외 일정을 최소화하였는데 2년 차인 2020년에는 해외 일정이 작년보다는 많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1월, 모로코 PanArab Endodontic Conference (http://www.paec2020.com)에 초청 연사로 참석예정이며, 4월 초에는 테네시주 Nashville에서 열리는 미국근관치료학회(American Association of Endodontists) AAE 2020 annual meeting에 참석하여 논문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5월에는 요르단대학에 학생 평가를 위해 방문이 예정되어 있고, 6월에는 말레이시아 학회, 9월에는 인도 Chennai에서 열리는 제12회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Endodontic Associations World Endodontic Congress)에 Keynote speaker로 참여하여 강의할 계획입니다. 10월에는 한일보존학회가 일본에서 열리는데 대한치과보존학회의 총무이사로 참석할 계획이 있습니다. 대략 6건의 해외일정인데 한두 건은 못 가게 될 수도 있고, 안 가는 것이 저에게도 오히려 편안함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가 더 먼 훗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면 은퇴를 즈음한 시기의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60대의 삶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그때 적당한 활동과 계획한 대로 보람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아직은 대학교원 정년(만65세)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어 지금까지의 활동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후배 교수님들의 연구 환경 개선과 대학의 장기 발전 계획을 잘 수립하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기반 조성에 조력하는 것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의 일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연구 발표는 꾸준히 이어가면서 학교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이루어지고 있지만, 해외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거나 때로는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해외 강의도 체력이 되는 한 기회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기회가 된다면, 저는 기회를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 합니다. 은퇴를 즈음해서는 그간 발표한 논문들의 해석과 주요점을 담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 제가 그린 그림들을 넣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앞으로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과 국내 치의학계의 발전에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현철 ProEndo 부산대학교 IFEA PAEC 영상 제공: 부산대학교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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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1편 [기자수첩] - 기자가 받은 한통의 편지. 나는 AVEC G 발행인이자 수석기자이다. 이번 김현철 원장을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뷰 과정을 담은 [기자수첩]을 기획하게 되었다.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과정은 그 어떤 인터뷰이의 인터뷰 과정보다 특별했다. 그 과정을 1편 [기자수첩] 그리고 [인터뷰]는 2편에 나누어 공개하는 바이다. 우선 AVEC G에 대해 소개하자면 공식 홈페이지는 보다시피 광고가 없다. 외부후원도 없다. 트래픽으로 돈을 버는 시스템도 아니다. 스폰서도 없고, 인터뷰 기사를 위해 어떠한 금전적 혜택도 받지 않는다. 100% 재능기부로 오히려 나의 사비로 홈페이지 제작과 운영을 위해 쓰이는 돈이 많다. 사람들은 내게 `왜 하냐?`라는 질문을 종종 하기도 한다. 나는 `청년들에겐 IMF보다 취업이 힘든 시기이지 않느냐. 최대한 많은 분야에서 청소년, 청년들의 멘토로 그들이 걸어온 길을 소개함으로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난 참 무거운 마음과 함께 AVEC G를 창간했다. 2019년 5월 AVEC G를 창간하고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 명망, 인품, 지위, 시국 등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가장 적절한 인물을 인터뷰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기사를 읽고, 10년이 훨씬 더 지난 방송을 찾아보는 등 1명의 인터뷰를 섭외하기까지 같은 분야 종사자 100여 명 이상을 꼼꼼히 선별했다. 나는 AVEC G의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가 인터뷰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쌍방의 열정은 시너지를 가져왔고, 심도 깊은 인터뷰가 모인 AVEC G의 인터뷰 기사가 차곡차곡 쌓여가며 AVEC G는 그렇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터뷰 전문 사이트`가 되어가고 있다. 김현철 원장과의 첫 인사는 2019년 6월 말 SNS를 통해 처음 이루어졌다. AVEC G가 창간된 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김현철 원장이 부산대신문에 기고한 `부산의 치의학 40년, 그리고 미래`를 읽은 후였다. 나는 김현철 원장에게 인터뷰 의뢰를 했다. 그는 검토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답장을 남겼다. 그는 원장직을 맡은 지 3개월 만이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바빴을 뿐더러 AVEC G 인터뷰 특성상 `현 위치까지 올라온 과정`에 대해 `과거`를 묻는 질문이 많은 만큼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고 있었던 그 시기에 외부 언사를 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8월, 빛나는 성과를 내고 있었던 그에게 다시 한 번 SNS를 통해 연락했다. 그는 나의 의뢰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쁜 일정에 그는 `다음 시기`를 기약했다. 나는 10월 다시 인터뷰 일정을 물었다. 그 사이 AVEC G는 `인터뷰 전문 언론사`로 시스템은 나름 삐꺽이던게 기름칠 되어 구축된 시기였다. 해외에서 오래 사는 내가 한국 문화에서 `생각해볼게요`, `다음에요`라는 답은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김현철 원장이 하는 `다음`, `보류`라는 단어를 쓴 답변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가 `거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역시 정말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이번엔 정말 삼고초려가 되겠네요.` 등의 부탁 어린 메세지를 보냈다.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오류입니다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서요^^`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일정을 소개하며 양해를 구했다. 맞다. 지난 6월도 그렇고 8월도 그렇고. 10월에도. 그는 절대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인터뷰 협조 공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12월 중순까지 10분도 쪼깨야 하는 상황이라 12월 중 비행기 안이나 공항에서 답변을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답했다. 12월 말이 다가왔고, 나는 `옐로카펫` 창안자인 `옐로소사이어티` 이제복 대표, 배우 이재윤, 유상재, 춘천지방법원 류영재 판사, KB증권 이승종 앵커, 프로볼링 김승민 선수의 인터뷰 원고를 한꺼번에 윤문과 사진 편집과정에 거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리고 그중 유상재 배우와 류영재 판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기사가 2019년 안에 출고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도, 그리고 31일에서 2020년 1월 1일이 되던 그 순간에도 원고를 첨삭하고 있었다. 김현철 원장은 1월 1일 제야의 종소리의 메아리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며칠 되지 않아 내게 서면 인터뷰 원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별도로 편집팀에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울었다. 그리고 더 오래 울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업적이나 일에 대한 보상을 금전적인 것으로 받는 것에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겐 `입에 풀칠할`, `지금 당장 필요한`. 하지만 나는 독자의 반응에만 감사하며 `보람`만으로 걸어왔으나 내게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현실에 너무 지쳐있던 그때였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금전적인 보상을 원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애초에 AVEC G는 재능기부로 시작한 일이니. 그저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가?' `힘들게 일하는 걸 누가 알아주지?`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6개월이 지나 60여명의 인터뷰 기사를 출고하니 '이제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게 아닌데, 더 잘할 수 있는데...' 아쉬움을 곱씹으며 하루 12번 넘게 AVEC G의 존폐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김현철 원장이 보낸 편지는 결정적으로 내가 AVEC G를 통해 인터뷰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다. 난 김현철 원장과 어떻게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는지 기억을 하진 못한다. 그리고 우린 공통된 친구도 없다. 난 그 점이 굉장히 의아하다. 그러나 아마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 우연 또한 신의 뜻이겠지 생각해본다. 약속한다. AVEC G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사회에서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분들을 만나고, 좋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나는, 인터뷰어로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AVEC G 인터뷰이의 인터뷰를 기사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다면, 하늘에 두 손 모아 감사할 것이다. ![]() - 김현철 원장의 편지 전문: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저는 사실 AVEC G를 잘 모르고 (완전히 모르고) 더더군다나 박 기자님도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모릅니다. 우연히 SNS에 포스팅되는 글들을 통해 소신 있게 철학을 지키며 언론인, 준(?)공인으로서의 자세를 다듬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반복되는 인터뷰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연결고리 혹은 저와 통하는 철학은 Passion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삶이 동물의 생과 다른 것은 열정이 있는가 아닌가로 구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은 욕구에 따른 생명유지를 위한 필요에 따른 행동만 하지만, 사람은 철학과 소신이 있어 사회 속의 자아실현과 자아의 희생을 통한 무리 속의 존재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삶, 인생에서 문제가 되는 몇 가지가 “욕심” 혹은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어쩌면 동물들도 갖는 본능적인 행동양식이라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동물들이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잇감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 동물의 욕심은 사람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비교”에서 비롯되는데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의 환경과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결국 욕심이고 욕심의 끝은 개인의 행복감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간혹 제자들이 결혼을 즈음하여 예비 배우자와 함께 인사를 올 때면, 제가 축하의 말로 전하는 것이 비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처가와 본가의 비교 혹은 내 아이와 저 집 아이의 비교,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을 피폐하게 하므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삶의 지혜일 것이라 전해주고 있습니다. AVEC G의 박 기자님도 욕심을 갖지 않았기에 남들과는 다르고 어쩌면 어려운 길을 지켜나가는 언론인으로 자아를 지켜나가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가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직업 정신이 뛰어나다, 남들과 비교하여 뛰어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뛰어난 존재가 되어 가는 삶을 사는 기자이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직업에 있어 간혹 혹은 자주 사회의 문제나 사람 간의 문제가 되는 것이 “권위”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 대해 느끼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권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타인이 인정해줄 때 그야말로 권위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권위는 약육강식의 서열을 말하는 것뿐입니다만, 사람에게 권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간의 예의가 권위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대학병원 환경미화 여사님과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십여 년 전,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이 독립법인으로 이전 개원을 하고 병원에는 너덧 분의 여사님들이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유지관리를 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보통 9시 진료 전에 8시경에 시작하는 아침, 세미나 일정 등으로 더 이른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세미나를 위해 복도를 걷는 중 이른 시간부터 출근하셔서 청소 업무 중인 여사님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쳐다보지 않으시고 바닥만 계속 닦으셨습니다. 약간의 무안함이 있었으나, '못 들으셨나 보다'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후로도 두세 번 그런 일이 반복되어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어느 날은, 제 인사에 주변을 둘러보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반갑게 인사말을 돌려 주셨습니다. 그제야 생각한 것이, 그 시간대가 환자들이 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대부분 의료진인 교수와 전공의 선생님들이 오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청소하시는 여사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지레짐작하시고 묵묵히 하시던 일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먼저 시선을 주시기도 하고,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직업의 차이는 있고, 당연히 업무의 난이도가 다릅니다만,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그 직업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존재감이나 권위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여 명의 의사직이 근무하는 병원에 서너 분의 여사님들이 일을 못 하거나 안 하시게 되면, 과연 병원이 제대로 운영이 될까요? 100여 명의 의사 중에 누군가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을 할까요? 의사 서너 분이 안 나오더라도 병원은 잘 운영이 될 것입니다만, 반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보지 않은 일 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하는 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대의 직업을 존중하고 그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는 권위를 갖게 되나, '내가 의사이니 여사님께는 인사를 받아야지, 내가 먼저 하지는 않아도 되려니...' 생각하는 사람은 권위를 얻을 수가 없고, 스스로 주장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에 비교를 하고 욕심을 낼 수 있고 권위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동물의 생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 역할을 잘하여 주장이 아닌 주어진 삶의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하며, 지난 50년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생이 아닌 삶을 더욱 가치 있도록 그려 보고자 합니다. 인터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독자들께도 미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본편: 바로가기 글: 글렌다 박 발행인 및 수석기자, 김현철 원장 사진 제공: 김현철 원장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17년 우연한 계기로 사법농단이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3천 명 판사들의 분노를 잠재우며 사태의 의미를 축소하고 무마하려는 정권에 류영재 판사는 진실을 알리는 SNS 포스팅을 꾸준히 올리며 맞섰다. 그리고 국민들이 알지 못했던 사법농단의 진실의 어둠 속에 불씨를 붙였다. 그 작은 불씨였던 그녀의 포스팅은 횃불이 되어 결국 사법농단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도 SNS를 통해 판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비법조인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류영재 판사는 올해로 임관 10년 차를 맞이하였다. 판사로서 걸어온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사법농단을 비롯해 검찰개혁, 사법고시 존폐 등 법조계의 여러 현안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 지난 2019년 12월 12일 열린 제1회 메디치포럼 행사장에서 '평생의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이날 류영재 판사는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출생] 1983년 2월 27일 (대구) [학력] 1998년~2001년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졸업 2001년~2006년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경력] 2009년 제50회 사법시험 합격 2011년 제40기 사법연수원 수료 (사법연수원장상 수상) 2011년~2013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013~2015년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2015~現 춘천지방법원 재직 중 [논문] ♠ 명예훼손죄에 대한 헌법합치적 해석론과 재판실무의 운용, 한국언론법학회, 언론과법 제15권 제1호(2016) ♠ 사법의 책무와 독립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실천적 제안: 사법행정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법과사회이론학회, 법과사회 60권(2019)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춘천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영재입니다. 춘천에 살면서 일과 시간에는 재판 업무를 하고 밤에는 야근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쉴 때는 SNS를 통해 비법조인 페이스북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기도 합니다. 판사 중 SNS를 하는 분들이 드물어 본의 아니게 그 방면으로 알려졌기도 합니다. 인권보장, 표현의 자유, 차별금지에 관심이 많고 요즘엔 법원개혁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4살 때 남동생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고등학교인 대원외고 출신으로 만화가를 꿈꾸며 미술대학 진학`, `디자인과 출신 판사`, `사법농단의 진실을 알린 판사` 등 개인의 배경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예능 출연, 야구경기 시구 등 판사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자주 보이셨어요. 사회적으로 그리고 대중에게 알려지다 보니 삶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제 경력이 판사치고는 특이하지만, 사람 자체는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경력만으로 제 삶이나 이미지가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이하다’, ‘화려하다’, ‘천재적이다.’ 등.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제 얘기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디자인과를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은 단순히 디자인이 제게는 너무 어려웠고, 디자인 외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그에 비교해 법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학문이었고,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도 제 성격과 맞아 비교적 수월하게 시험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법원에 와서도 재판부 구성원들이나 소수의 친구와 어울렸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주위에 법조인들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법조인들과만 어울리다 세상의 상식과 내 상식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SNS를 통해 비법조인들의 생각을 나눔 받고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SNS 시작 당시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진 않았는데, 2018년 사법농단을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 포스팅을 공개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은 제 성격과 거리가 먼 삶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포스팅 하나를 할 때도 자기검열이 강해지게 되었고요. 특히, 몇 번 특정 언론이 작정하고 저를 ‘정치판사’라고 낙인 찍으러 비난했을 때는 온 가족 친척들이 ‘괜찮으냐’고 연락이 온 적도 있었어요. 그러한 순간은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맷집이 길러져 익숙합니다. 2011년 사법연수원 수료식. 류영재 판사는 수료식 당시 연수원 40기 969명 중 10등으로 사법연수원장상을 수상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당시 10등으로 사법연수원장상을 받으며, 연수원 입소부터 목표하셨던 판사가 되셨습니다. 만약 그 당시 변수가 생겨 판사가 되지 않고, 지금 검사나 변호사가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연수생 시절 검찰 시보와 변호사 시보를 각각 해보았는데, 당사자들과 거리감이 굉장히 좁혀진 상태에서 일해야 하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검사나 변호사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싸움꾼이 되어서 재판에 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의뢰인이나 피해자와 함께 울고 웃으면서요. 검사는 피해자를 대신하여 피고인을 수사하고 기소하여 유죄를 입증하는 역할을 하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수행하지요. 판사직보다 훨씬 활동적이고 상상력이 있어야 하며 사회정의를 중요히 여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 검사가 되었더라면, 글쎄요. 에너지가 달려 좀 힘들어했을 것 같습니다. 한편 검찰개혁에 대해 언급하자면,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조심스럽지만, 현재 검찰제도는 검사 한 명 한 명이 열심히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검사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기에 무리가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검사는 본래 수사 과정에서의 적법절차 원칙이 지켜지도록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를 통제하고 법률전문가로서 범죄를 기소하여 재판에 임하는 역할의 전문가인데, 지금은 직접 수사 및 수사지휘에 너무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로 인해 아무래도 수사의 적법성 통제나 공소유지 역할은 부실해지고요. 이 경우 검사도 스스로 본연의 역할을 못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재판이 부실해져 국민이 공평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 검사가 검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변호사면, 일단 ‘이기고,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되는 데 집중했을 것 같아요. 변호사는 무엇보다 의뢰인을 위해서 사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고 법리를 찾으며 의뢰인이 최고의 이익을 얻을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제가 지금은 판사이고, 판사 본연의 역할 중 하나가 ‘형사재판절차에서의 수사적법성 통제’라고 생각하기에 저는 형사법에 관심이 많고, 또한, 판사 역할의 본질이 ‘인권보장’이어서 헌법과 인권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변호사가 된다면 민사 분야에 전념할 것 같습니다. 민사소송은 변호사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이끌어져 나올 수 있는 분야라서 흥미롭고 뿌듯할 것 같아요. 그리고 틈틈이 공익소송 대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공익소송 대리는 소수자, 약자와 법적으로 연대할 방법이니까요. 기억에 남는 재판은 무엇이고, 판사로서 가장 ‘공정한 재판’을 위해 유의하는 점은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우선 지적장애인이 피해자이거나 피고인이었던 형사재판들이 떠오릅니다. 지적장애인이 피해자이거나 피고인일 경우, 그들과 제대로 의사소통하고 그들의 진술을 제대로 이해하며 신빙성을 판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술조력인 내지 신뢰관계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그들이 재판참여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한 번은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했는데 그 진술번복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 전문가 상담을 추진해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거부로 진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다른 장애를 겪고 있는, 예를 들어, 시력 저하 또는 청력 저하를 겪고 계신 노인 당사자들의 재판 참여권 보장도 문제가 되겠지만, 특히 지적장애인이 형사사건의 피고인 또는 피해자가 되면 그들의 재판참여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하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재판할 때는 양 당사자 중 한쪽에 ‘편파적인 진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에 대해 가장 유의하는 것 같습니다. ‘공정한 재판’ 진행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가 찾은 답은 ‘솔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사자들에게 심증을 드러내고, 그 심증이 형성된 근거를 말하며 앞으로의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당사자들과 토론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 사건 한 사건마다 시간을 많이 투입할 수 없어서 이런 방식의 재판 진행이 힘들 때가 많습니다. 2018년 8월, 류영재 판사는 탐사보도 인터넷 방송인 '뉴스타파'에 출연하여 현직 판사로서 느끼는 '사법농단'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그동한 못한 고백과 진실을 밝혔다. 벌써 사법농단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도 4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판사로서 겪은 사법농단의 의미와 이 시기에 중요시해야 할 법원개혁의 큰 방향성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2017년 우연한 계기로 드러나게 된 사법농단은 크게 ① 사법부의 청와대, 국회에 대한 재판 관련 협의․정보제공․법률자문서비스 제공, ② 사법행정권자의 개별 재판 통제, ③ 판사 사찰 및 특정 연구회 탄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법농단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청와대나 국회를 견제하고 통제하여 국민의 자기지배를 실현하게 하는 사법부의 역할을 져버리고 사법부가 오히려 청와대나 국회와 협력하여 사법조직을 강화하고 통치권력의 일환이 됨으로써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법원 내부로는 판사들의 재판을 통제하고 외부로는 청와대 등과 협력하면서 사법독립을 스스로 버린 사건이기도 합니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권한, 사법행정과 재판의 연결, 승진 중심 법관인사제도, 불투명하고 통제받지 않는 구조가 한 데 모여 발생한 참사인데, 특히 사법이 어떤 경로를 거쳐 사법부가 되고 사법권력이 되는지 잘 보여준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사로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느끼고 있으면서 방지하지 못한 데 책임감을 느낍니다. 위와 같은 사법개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법의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국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가 강화되어야 하며, 사법부가 아닌 법관이 독립될 수 있도록 인사제도를 변경해야 합니다. 사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판결문 공개, 사법행정 정보 공개, 시민사회 참여형 사법행정 시스템 등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고, 국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하여 법관 외부평가 및 다면평가, 법관 징계제도 개선 등이 논의될 수 있으며, 법관 독립을 위하여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판사회의 강화, 전보인사 축소 등의 인사제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2013년 UN OHCHR (유엔인권고등판무관) 출장 당시 제네바에서 그동안 ‘판사’로서 참 많은 일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현직에 대해 고민해보신 적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특별히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보람을 가질 때는 언제인가요? 저는 판사를 천직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매번 ‘나 같은 사람이 재판에 임해도 되는가?’ 자괴감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판사로서 뿌듯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형사재판을 하면서 수사기관이 절차적인 위법을 저지른 사실을 발견하여 적절히 통제한 순간이 있었고, 유무죄를 고민하면서 기존의 익숙한 법리를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고 좀 더 인권보장적으로 법을 해석할 수 있는지 각종 연구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재판을 진행하면 할수록 재판은 단순히 시험을 치듯 정답을 맞혀나가는 과정이 아닌 것 같아요. 부여받은 많은 역할이 있고, 항상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벼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해 연구 활동이나 사회생활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들을 깨닫게 된 것도 자랑스럽네요. 앞서 언급했듯 SNS를 통해 좋은 글을 포스팅하고, 기사를 공유하며 비법조인들과 활발한 소통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 외 단점, 그리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댓글이나 메시지 혹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판사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법조인, 그중에서도 판사들로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판사들끼리만 만나고 판사들끼리만 얘기하는 것은 사실 편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내 생각이 시대정신에 들어맞는가?’, ‘우리 사회의 담론을 따라가고 있는가?’, ‘사람들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한, ‘헌법은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하고 법 또한 현실과 떨어져서는 안 되는데, 헌법과 법을 해석하는 판사가 너무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고 온라인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회의 담론은 다양하며 수준이 높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많이 배웠고 재판 사안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 배움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법조인들과 비법조인들 사이에 괴리가 상당하다는 점, 재판에 대한 오해가 크다는 점도 깨달았고 그 괴리를 좁히며 오해를 풀기 위해 SNS를 활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SNS를 해서 가장 좋은 장점은 알지 못했던 사회의 담론들을 알게 되고, 그 이슈들에 대해 좋은 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SNS로 인해 예기치 않은 오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SNS는 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개된 의사표명이기도 하므로, 혹여 제 포스팅이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부정확하지 않은지 계속 ‘자기검열’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이 SNS의 단점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댓글이나 메시지, 에피소드보다는, 제가 어떤 이슈 - 주로 인권보장, 차별금지 등의 이슈 - 에 대해 포스팅을 하고, 비법조인 페이스북 친구분이 저와 다른 의견을 댓글로 달아 주시고, 제가 거기에 대해서 다시 제 의견을 밝혀 나가면서 토론을 길게 할 때, 그 토론의 결과가 어떻게 끝나든지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저는 판사임을 밝히고 SNS를 하므로 저의 페이스북은 완벽한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위 ‘키배’를 끝장나게 뜬다든지, 그런 일은 없어요. 류영재 판사는 '판사의 본질은 '인권보장'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2013년 유럽인권재판소 출장 당시. 현재 전국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에서 5천여 명의 학생과 그 외 변호사시험(이하 변시) 재수생 수만 명이 예비 법조인을 꿈꾸며 공부 중입니다. 학부 졸업 후 2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신 판사님께서는 사법고시 존폐와 로스쿨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법시험을 보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즉시 판사로 임관된 전형적인 “사시세대” 법률가입니다. 한편으론, 대학 졸업 때까지 법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법과 무관한 학과를 전공한 후 비로소 법을 공부해 법조인이 되었다는 점에선 로스쿨생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사법시험이나 로스쿨이나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기간 한정 없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시험공부를 한다는 점에서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시스템은 법조인이 되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법률지식을 충실히 습득하는데 최적화되어있고, 성적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학벌이나 성별 등에 의한 차별을 뒤집을 기회가 제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시스템은 한편으론 외국 로스쿨에는 필수과목으로 법조인으로서는 정말 중요한 학문인 인권법이나, 그 외에 논증하는 법이라든지, 사실인정 하는 법이라든지, 법철학이라든지 법조인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학문을 배울 기회와 필요성을 모두 배제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로스쿨은 그에 비해 학부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 후 법조인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끔 되어있고, 로스쿨에서도 법조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익히도록 하는 제도인데, 문제는 지금 그 취지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로스쿨 제도가 갖는 학벌과 연령, 성별 차별 등의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양 제도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어떠한 법조인 양성 과정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법조인 양성제도로 로스쿨 제도를 선택했고, 그 사회적 합의를 존중합니다. 법조인을 꿈꾸는 분들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만큼 제가 특별히 훌륭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래도 조언을 드리자면, 로스쿨에 입학하기까지, 그리고 로스쿨을 수료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계속 고되고 지친 과정이 지속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일단 법조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니,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열심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가능하다면, 법이 사람을 다루는 실용학문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 주시길 바래요. 법은 기본적으로 논리학에 가깝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분야는 현실, 그것도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尊敬`. 이 단어의 어원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 국어단어는 명시하고 있습니다. 법정물을 보면 재판정에서 판사를 대할 때 대부분 `존경하는 판사님`이라는 문장과 함께 발언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법관 사이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존경하는`을 붙이는 관례가 있습니다. 판사님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법조인은 어떤 분이 계신지요? 먼저 군부독재 시절 독재에 부역하지 않는 재판을 하려고 노력했고 그 후에도 법원개혁과 진정성 있는 재판을 위해 행동하시고 고민하신 선배 법관님이신, 박시환 전 대법관을 존경합니다. 어떤 판사가 훌륭한 판사인가 - 아무리 법리에 밝더라도 행동하는 양심을 갖지 못하면 훌륭한 판사라고 칭할 수 없다는 점을 몸소 실현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님도 존경하는데요, 그분이 내신 소수의견들과 대법관 퇴임 이후에도 꾸준히 전념하시는 소수자 인권보장 활동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사법연수원 교수님이자 선배 법관이 계십니다. 연수생 시절부터 현재까지 판사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재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이 세 분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훌륭한 판사, 완벽한 법조인이라고 자평하지 않으세요. 밖에서 보면 두 분은 대법관까지 역임했고 다른 한 분도 소위 아주 잘나가는 법조인인데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정성 있게 법조인으로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모습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는데요,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있다는 점이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춘천지방법원 류영재 판사의 사무실. 사무실 한쪽에 세워둔 자전거가 눈에 띈다. 올해로 10년 차 법관이십니다. 어떤 판사가 되고 싶으세요?
2011년 판사로 임관했을 때엔 법리적으로 밝고 중요한 재판을 도맡아 하는 판사가 되고 싶었어요. 욕망이 넘치는 시기였죠. 그런데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고, 법관의 본연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고, 사법의 역사를 배우면서 소위 ‘잘나가는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된지, 나아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법농단이 발생할 즈음에는 이미 ‘승진‘, ’잘나감‘ 같은 직장 내 위치에 대한 욕심은 버린 지 오래였고, 대신에 각종 ‘인권규범‘을 공부하고 재판에서 느낀 ‘문제의식‘에 대해 고민하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사법농단을 거치면서 판사에 대한 어떤 고정된 상은 더 옅어진 것 같아요. 지금은 제발 나이가 들더라도 세상의 담론, 상식과 괴리되지 않고, 아집과 고집에 빠지지 않고, 선민의식과 오만함에 빠지지 않고, 항상 눈앞에 있는 재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최소한 “덜 꼰대스럽다”라는 얘길 듣고 싶네요.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년에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개인의 삶과 재판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SNS를 통한 소통은 계속하겠지만, 사법농단 및 법원개혁을 알리기 위해 계속해왔던 외부 활동들을 가능한 줄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신 재판에 더 집중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싶어요. 올해 써놨던 발표문들을 논문으로 편집하는 작업도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별것 없는 인터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류영재 뉴스타파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렸던 그는 태평양을 건넜고, 성인이 그는 자신의 꿈을 찾아 다시 고향을 찾았다. 힘겨운 역경을 이겨내고 드라마, 영화, 예능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는 진정한 ‘멀티엔터테이너’ 배우 이재윤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이름] 이재윤 (Jae Yoon Peter Lee) [생년월일] 1984년 12월 15일 [학력] 여의도 초등학교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 University of Toronto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과 졸업 [경력] 드라마 출연 - 2004년 MBC《논스톱5》 2005년 DMB《얍》 2006년 MBC 《늑대》 2008년 SBS 《행복합니다》 2009년 MBC 《맨땅에 헤딩》 신풍철 역 2010년 MBC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박철 역 2010년 MBC 《폭풍의 연인》 이형철 역 2011년 SBS 《내 사랑 내 곁에》 이소룡 역 2011년 MBC 《오늘만 같아라》 장지완 역 2012년 SBS 《유령》 조재민 역 2012년 SBS 《야왕》 주양헌 역 2013년 JTBC 《무정도시》 지형민 역 2013년 MBC 《황금 무지개》 김만원 역 2014년 tvN 《마녀의 연애》 맞선남 역 2014년 MBC 《드라마 페스티벌 - 형영당 일기》 이철주 역 2015년 tvN 《하트 투 하트》 장두수 역 2015년 SBS 《애인 있어요》 민규석 역 2015년 MBC 《화려한 유혹》 홍명호(문선호) 역 2015년 UMAX & O'live 《나에게 건배》 이지혁 역 2016년 tvN 《또! 오해영》 한태진 역 2016년 다음 tv팟 《통 메모리즈》 백승화 역 (특별출연) 2016년 MBC 《역도요정 김복주》 정재이 역 2017년 tvN 《아르곤》 허훈 역 (특별출연) 2017년 tvN 《변혁의 사랑》 변우성 역 2018년 tvN 《마더》 정진홍 역 2018년 JTBC 《뷰티 인사이드》 영화 '나를 모르는 너에게' 남자주인공 역 (특별출연) 2018년 MBC 《나쁜 형사》 강우준 역 2019년 TV조선 《조선생존기》 정가익 역 2019년 OCN 《왓쳐》 김강욱 역 (특별출연) 영화 출연 - 2012년 《회사원》 신입남(영업2부) 역 2012년 《첫사랑 보관소》(단편 영화) 현우 역 2014년 《관능의 법칙》 황현승 역 2014년 《그댄 나의 뱀파이어》 이주형 역 2015년 《이스케이프》(단편 영화) 김 경위 역 2019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해골문신 역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최근에 영화 <나쁜 녀석들>로 찾아뵈었고, 현재 드라마와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배우 이재윤입니다. 반갑습니다. 초등학교 때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하셔서 대학교까지 10여 년간의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이재윤'이 아닌 '피터 리'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가게 되었어요. 나이 열 한 살 채 되지 않았던 제겐 모든 것이 낯설었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란 부모님께서도 그러셨겠지만, 제겐 더욱 쉽지 않았지요. 동생과 단둘이 서로 의지하며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입학했던 첫날이 기억나요. 첫 수업이 불어 수업이었는데, 영어도 못 하는 제게 불어가 얼마나 낯설고 생소했던지 첫날부터 수업 도중에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Peter’라는 제 영어 이름은 뒤늦게 성당에서 알게 된 분들이 지어주셨어요. 우리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제 세례명 ‘베드로’를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 덕에 토론토 소재의 가톨릭 학교인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에 이어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에 진학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캐나다는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나라이지요. 제 생각엔 다른 곳 들보다 비교적 인종차별이 적은 것 같아요. 다만, 각각 외모와 언어, 문화와 생각의 차이가 서로 부딪히다 보니 그것이 ‘인종차별’이라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다름을 약점으로 삼고 놀리거나, 무시하다 보니, 싸우기도 하고, 문제도 생기고 했지만, 그곳이 한국이었던, 캐나다였든, 제가 느끼는 것은 같았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그렇게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어요. 비교적 평범한 키에, 그리 용감하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마음 한편엔 저도 모르게 ‘나는 동양인을 대표한다’,라는 마음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 주변에 어울리던 동양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더욱 못 참았지요. 제가 ‘센 캐릭터’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약해서 학창시절엔 싸움이 나도 끼어들지 못했어요. 하지만 강해 보이고 싶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어요. 한국과는 시스템이 달라 엘리트 체육부가 아닌 생활체육이라고 해도 운동부에 들어가려면, ‘Try-out’이라 하여 일종의 오디션 같은 것을 통해 그해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뽑곤 했는데, 저는 모든 체육 종목부 ‘Try-out’에 참여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종목이 육상이었어요. 학교를 대표해서 100m 단거리 선수로 대회를 나갔고, 항상 1, 2등을 차지했어요.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강남구, 서울시, 도를 거쳐 올라가듯 온타리오주 대회 참가 자격을 받으며 제가 원했던 것처럼 ‘학교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육상을 통해 알게 된 특별한 지인이 바로 ‘벤 존슨’이에요. 대회가 열리던 대학가에 벤 존슨이 개인 훈련 사유로 와있었고 시합을 참관하고 있었어요. 저는 용기 내 다가가 사인을 받았죠. 그런데 존슨은 제가 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한 대화는 기억을 못 하지만, 함께 훈련하지 않겠냐고 했던 것이 어렴풋해요. 그렇게 해서 몇 달간 개인 훈련을 받았어요. 집에도 초대해 함께 식사도 하고, 부모님 세대의 유명한 운동선수라 특히 부모님께서 무척 신기해하셨어요. 정말 좋은 추억입니다. <2017년 12월 tvN 드라마 ‘마더’ 촬영 당시>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였지만 1년 만에 자퇴하고 '배우'라는 꿈을 찾아 한국 귀국을 택하셨습니다. 연극영상학으로는 우리나라 최고 중 하나인 동국대에 입학하셨는데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스포츠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토론토대학에 입시지원을 하였습니다. 합격통보를 받은 후, 우연히 한국분이 운영하는 가게를 들렸는데, 그분께서 제게 토론토 지역 신문에 실린 캐스팅/오디션 광고를 보여주며 지원해보라 추천을 해주셨어요. 연기자, 모델, 가수를 캐스팅하는 토론토 최초의 오디션이었죠. 어머니의 호기심에 지원서와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을 보냈어요. 관계자분의 설득 끝에, 저는 대학 입학 1년 만에, 그리고 그렇게 ‘피터 리’로 학창시절을 보냈던 토론토 생활의 막을 내리고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우’ 인생의 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지요. 저는 그동안 연기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거나, 배우나 연예인이란 직종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느낀 건 한국에 와서 연기 수업을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재미있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면의 무언가를 깨버리는 희열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극장 스크린과 TV에 나오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회사 대표님과 부모님께서는 제가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들어가길 원하셨어요. 몇몇 곳에 지원서를 넣고, 운 좋게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동국대에 지원서를 넣은 이유는 단지 최민식, 한석규, 박신양, 유준상, 이정재, 고현정, 김혜수…. 제가 존경하는 수많은 선배님께서 거쳐 간 대학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어요. 입학한 후, 엄격한 규율과 전통처럼 내려온 선후배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학창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제겐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답답했고, 힘들었어요. 하지만, 동국대 학부 시절은 이론과 실습교육을 통해, 연극 무대도 직접 만들고, 관객분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이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11년째 함께 사는 반려견 ‘구마’와> 2004년 스타들의 등용문이라는 MBC 시트콤 <논스톱 5> 출연을 시작으로 데뷔 15년 차 배우로 활동 중이십니다. 배우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 연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올해로 ‘배우’로서 데뷔 15년 차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도 너무 신기한 요즘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제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하곤 합니다. ‘죽기 살기로 버텨서’ 한 것이 아니라, 한 작품씩 제 기준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걸어오다 보니 별 탈 없이 여전히 작품을 제작하는 관계자분들과 무엇보다 시청자, 그리고 팬분들께 꾸준히 선택받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들어 ‘누굴 위해 연기를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묻고 하는데, 솔직한 답은 ‘나를 위해서 하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작품을 봐주시는 팬분들,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들과 프레임 밖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제작진분들. 너무 많은 분이 얽혀 있기에 단순히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 연기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기하면서 제가 행복하고, 제가 행복해야 다른 분들에게도 활기차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작품에 임하다 보면 역할에 몰두하면서 감정들이 다양하게 휘몰아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일상에도 번져 버리죠. 너무 예민하다 보니 촬영 기간 동안 살도 빠지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데, 작품이 끝나고 그 순간이 다 지나고 나면, 그만큼 많은 인연과 소중한 추억이 생깁니다. 성취감을 안겨주는 작품이 완성되어있고…. 작품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저 자신에게는 가혹해지는데, 끝에는 보람되고, 스스로 뿌듯해집니다. 그리고 반복되듯 다음 작품에 선택을 받기를 기다립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작품에 들어갈 수 있기에, 선택받지 못했던 그 시간이 가장 괴로웠던 것 같아요. 선택을 받아도, 제 노력이 무시당하거나, 바라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거나, 주목받지 못하고, 땀 흘려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기를 하는 동안 만큼은 행복하니까 그 힘으로 버티고 발전할 수 있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배우 지망생, 단역배우, 신인 배우가 그 ‘선택’을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작품과 배역이라는 것이 모두가 선택 받을 만큼 공평하거나 너그럽지도 않은 냉정한 곳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자책하다 보면 저 자신을 너무 미워하게 되더라고요. 기회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있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을 추천 드려요. 배우 활동에 있어 많은 제의와 제안이 들어올 텐데, 작품 선정 기준과 배역을 준비하고, 대본을 숙지하고,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그 모든 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작품은 타이밍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어떤 멋진 답변보다, 솔직하게 답하자면, 휴식기에 다가온, 제 마음에 다가온 작품을 선택합니다. 모든 작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시작하진 않아요. 욕심이 있다 보니 아쉬운 부분들이 잘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의받은 배역의 대사 중 와닿는 부분, 연기하기 재밌을 것 같은 것, 빨리 카메라 앞에서 해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거나, 도전해보고 싶은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한다거나…. 어디에라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작품 안에 저 자신을 그려보지요. ‘그 안에 나는 어떤 모습이지?’라는 질문과 함께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처럼 메소드 연기를 하며, 흔히 말하는 ‘연기 변신’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결국 보이는 건 ‘이재윤’이기에 가능한 배역을 준비하며 ‘나’로 부터 출발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극 중 배역이 느끼는 것을 저도 최대한으로 이해하고 제 안으로 빨아들이려고 노력하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지만 공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2014년 11월 tvN 드라마 ‘하트투하트’ 대본리딩 현장>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감독님들이나 작가님들의 작품들도 다시 하고픈 마음에 선택하기도 합니다. ‘대박 날 것 같은’ 흥행성보다 ‘촬영이 즐거울 것 같은’ 스텝 간의 화합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물론 흥행도 중요 하지만, 작품을 들어가면 그 기간이 짧지 않고, 많은 스태프진과 소통해야 하기에, 극 중 배역에 집중해야 하는 연기자로서 또 다른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주는 작품들은 저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겐 2015년 방영되었던 tvN 드라마 <하트투하트>에서 이윤정 감독님과 함께한 겨울이 기억에 남아요. 무척 추울 때 촬영했지만 정말 행복했거든요. 제 배역은 경찰대 졸업한 엘리트 형사역으로 현장을 뛰고 싶어 강력계 형사과를 지원한 상남자 스타일로, 어른들껜 예의 바르고, 친구들에겐 의리 넘치고, 약자를 배려하는 캐릭터였어요. 전 배역에 더 애착을 갖고 공감하며 연기 했고, 함께 했던 최강희 배우와의 호흡도 좋았어요. 감독님의 섬세함과 배려 깊은 현장이, 작품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던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여러 의미에서 출연했던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작품의 결과가 좋든지, 안 좋든지, 밉든지, 애정이 깊든지, 제겐 지난 15년간 인연이 되었던 작품들은 지금의 ‘배우 이재윤’이 걸어온 필모그래피를 그려주고 있으니까요. <2013년 7월 주짓수 체육관에서 승급 당시>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이재윤을 만들어준 대표작은 '우리 동네 예체능'이다'라고. '멀티엔터테이너'가 주류인 세상에 많은 대중은 아직도 '배우 이재윤'을 '국가대표급 피지컬을 지닌 스포츠맨'으로 기억합니다. 올해 이소룡의 묘지를 방문하셨을 정도로 무술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만약 연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저는 8년째 주짓수를 하고 있어요. 크로스핏과 웨이트 트레이닝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요즘은 배역 준비하느라 체중 증량하며 몸을 키우고 있습니다. 스포츠는 연기만큼 제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무술 또한 마찬가지예요. 어릴 적부터 저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이소룡 영화를 보고 자랐어요. 그때부터 무술과 몸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때마다 언급하는 저의 우상은 이소룡이에요. 외국 생활을 하며 그의 영화 그리고 철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양인을 대표하는 스타이자 무술가이고,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그는 철학을 전공한 철학가입니다. 지난 2월, 부모님을 모시고 시애틀에 이소룡 묘지에 다녀왔어요. 그동안 아버지를 꼭 모시고 함께 가고 싶었거든요. 묘지 앞에 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소룡이 살던 집과 그가 걷던 거리, 단골식당에서 단골 메뉴를 그가 앉던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맛보며 ‘이소룡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만약 배우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고교 시절에 했었고, 토론토대학 입학 당시에도 계획했던 운동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앞서 설명했듯 어릴 적부터 유명해지는 게 꿈이었어요.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든지 저는 제 분야에서 인정받고, 제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을 것 같아요. 여러 연예인 동료분들이 중 사업을 부업으로 하는 동시에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사업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낯도 많이 가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또한, 저는 배우 본연의 일 외에 신경을 뺏기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보내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또한, 저는 배우 본연의 일 외에 신경을 뺏기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다만, 시간이 지나 배우라는 직업에서 은퇴하게 된다면, 좋아하는 운동을 기반 삼아 체육관을 운영하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고. 도와줄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할 것 같아요. <2019년 2월 미국 시애틀 이소룡 묘소에서>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내년 방영 예정인 김희선 선배님, 주원, 이다인 배우 등과 함께 드라마 <앨리스>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년 개봉예정인 영화 <특수요원>(가제)도 준비 중입니다. 올해 이렇게 두 개의 좋은 작품을 만나서 내년에도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작품이 15년 전의 신인이었던 제가 바라던 그 ‘드라마’와 ‘영화’인 만큼, TV에 나오는 ‘배우’가 되고자 했던 ‘목표’를 갖고 달려와 ‘꿈’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거창하진 않아도 그것이 ‘성공’이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또 다른 ‘목표’가 계속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마음도 그렇고 생각도 참 변덕스럽기에, 인터뷰를 통해 독자 분들께 지금 이 순간 느낀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고민하고 노력했어요. 저의 짧은 ‘지금 이 순간’을 통해 누군가에겐 ‘빛나는 순간’의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터뷰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꿈’, 그리고 ‘목표’를 잃지 마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에스미디어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19년 9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당시 9세였던 김민식 군이 사망했고, 이번 달 10일 ’민식이법‘이란 이름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3년부터 아동 인권 NGO 단체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제복 대표는 오늘도 기도한다. 그가 창안한 ’옐로카펫‘이 더 많은 어린이보호구역에 설치되어 앞으로는 더 이상의 아동이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없기를…. * 최초의 옐로카펫 설치 전 기념촬영 (2015년 4월) [출생] 1987년 4월 6일 [학력] 해운대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의용전자공학과 졸업 [경력] 2013년 9월~2016년 9월 (사) 국제아동인권센터 가치공유팀 팀장 2016년 10월~現 옐로소사이어티 (아동 안전/인권 NGO) 대표 2017년 12월~現 아동안전위원회 위원장 [주요성과] ♠ 옐로카펫 창안 - 어린이 횡단보도 안전지대 옐로카펫 창안 및 전국 어린이 보호구역 내 확산 설치 - 2016년 8월 국민안전처 ‘어린이보호구역 정비 표준모델’ 수록 - 2018년 6월 행정안전부 ‘옐로카펫제작 및 설치 가이드라인’ 수록 - 2018년 고등학교 통합사회 교과서 수록 ♠ 옐로카드 개발 - 어린이 교통안전용품 옐로카드 개발 및 보행자 반사용품(反射用品) 안전기준 확립 - 전국 30만 이상 아동에게 배포 ♠ 옐로키즈 교육 - 참여연극형 교통안전교육 옐로키즈 개발 및 전국 어린이 안전 박람회 공개 교육 - 서울, 경기도, 인천, 대전 등 어린이 안전 박람회 공개 교육 ♠ 어린이 안전 법안 입법활동 -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조두순 접근금지법’ 발의 (2019년 11월 정은혜 의원실과 발의 및 기자회견) -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제안 및 캠페인 추진 - 2019년 12월 호주어린이재단과 MOU 체결 - 2019년 12월 “당신은 이 아이가 보이나요?“ 아동학대 신고동참 캠페인 추진 및 개정안 제안 - 아동 친화적 주택정책 최저주거기준 개정안 제안 (주거기본법 제17조에 의한 국토교통부령 최저주거기준) [수상] 2011년 5월 - 2013년 2월 연세대학교 창업동아리 Y-Media 회장 - 창업공모전 5회 수상 (중소기업청, 특허청장) - 중소기업청 선정 전국 1위 창업동아리 수상, 실리콘밸리 기업탐방 및 창업 프로세스 체험 - 실용신안권 (자동으로 높이 조절이 가능한 목발) 2015년 '2015 Design for Asia Awards' 옐로카펫 NGO 최초 종합대상 수상 (홍콩디자인센터) 2019년' 2019 서울교통문화상 최우수상 수상' (옐로카드, 옐로키즈)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어린이 횡단보도 안전지대에서 익숙하게 보실 수 있는 ‘옐로카펫’을 최초로 창안해서 전국으로 확산시킨 ‘옐로소사이어티’ 대표 이제복입니다. 최근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어린이 안전 법안’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문 입법 활동을 하는 ‘아동안전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옐로카펫이 완성된 모습 (2015년 4월) (사)국제아동인권센터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아동안전과 인권을 위해 앞장서고 있으신데요. 대학에서는 '아동', '인권', '안전'이라는 단어와는 먼 의공학부 출신이십니다. 현 분야에 몸담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저는 대학 시절, 의공학부를 전공하면서 또 창업동아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공모전 수상도 다섯 번을 했고, 국비 지원으로 실리콘밸리까지 다녀왔어요. 당시 세계 1위 다이어트 애플리케이션 회사 대표가 ‘한국 시장에 곧 진출할 계획인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지요. 고작 학부생인 제게 그렇게 대단한 제안을 받은 것에 감격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말 열정적으로 작업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왠지 모르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들면서 모든 것이 막연한 회의감이 들었어요.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온 거죠. 그래서 저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자 세계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쓴 여행일기를 다시 찾아보았어요. 제 초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서요. 여행일기를 보니 제가 여행 중 언젠가 쓴 한 일기 중 제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어요. “만약 나에게도 작은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누군가를 위해서 쓰며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다”라는 문장이었어요. 그 글을 보고 깊게 고민했어요.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요. 제가 당시 독일의 문호 괴테를 참 좋아했는데 고민하던 같은 순간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의 뜻은 행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많이 가져도 불행할 수 있고,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 전제는 ’희망만 있으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이 사회에서 이 ‘희망’조차 없는 사람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자라오며, 배우며,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가슴을 ‘쿵’ 치며 떠오는 건 다름 아닌 ‘아동’이었어요. 축복받지 못한 출생에 버림받은 아이들, 이유도 모른 채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 배고파서 굶주리는 아이들, 각종 사고와 범죄에 노출되는 아이들에게 저는 도저히 “아이야, 지금 네가 불행한 것은 너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질 거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다이어트 애플리케이션 사업을 바로 중단했고, ‘앞으로 내 삶은 이런 아동을 돕기 위해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세계여행 중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Be the justice!’를 외치는 모습 (2008년 4월) 2015년도에 '옐로카펫'을 최초로 창안하셨고 이후 전국에 확산되어 지금은 전국의 어린이 보호구역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옐로카펫'을 떠올리게 된 계기와 '옐로카펫'의 의미를 소개해주세요. 처음엔 아동 인권 활동 NGO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도에 전국에 슬픔을 안겨준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많은 국민과 같이 굉장히 침울했지만 저는 그때 또 하나의 작은 희망을 본 것 같습니다. 과거, NGO 같은 사회단체에서 ‘아동 인권’을 아무리 외쳐도 대다수 국민분은 크게 관심이 없으시거나, ‘인권’이라는 단어가 가진 느낌 때문에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제가 본 것은, ‘우리 국민분들께서 아동의 안전에는 정말 강한 소망과 열망이 있으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아동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활동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작게 시작하자’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아동이 안전한 마을 만들기’라는 것을 시작하자‘라고 목표를 정해 번화가가 아닌 마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바로 성북구 길음동이었는데, 그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을 직접 걸으며 조사한 결과, 마을 주민들께서 ’횡단보도 교통사고가 가장 빈번하다‘고 의견을 모아주셨습니다. 또한, 통계를 찾아보니, 마침 19년 연속 아동 사망사고 1위가 ’보행 중 교통사고‘였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이어나갔습니다. 횡단보도에서의 아동사고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원인은 아이들의 키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고, 그리고 갑자기 뛰어나가는 직진본능이 주원인이었습니다. 저는 정부에서 내놓은 이런 분석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려 19년 연속이나 가장 많이 아동이 사망하는 사고가 횡단보도 교통사고인데 그 사고의 원인을 ’아동의 특성과 본능‘의 탓을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키가 작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특성‘입니다. 그리고 ’직진본능‘이 있는 것도 특정된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부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는 사고의 원인에 대해 ’아동’을 탓하면서 스스로 손을 들어서 키가 커 보이게 ‘극복’하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분석이 애초에 아동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 틀렸기에 나온 분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 논할 때 ‘늦게 다니지 말라’ 혹은 ‘복장이 잘못됐다’라고 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엔 적합한 비유와 논리가 아니죠. 저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인식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키에 대해 스스로 극복하라고 탓할 게 아니면서, 아이들이 키가 작아서 잘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직진본능이 있음에도 안전한 횡단보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사고를 애초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운전자도 안전하고, 그렇게 마을이 안전해지는. 많은 시험과 연구 끝에 아이들의 키가 작아도 색 대비로 잘 보이며, 운전자가 멀리서도 주목할 수 있고, 또 외부와 구별된 공간을 만들어서 그 안에 머무르고 싶게 넛지 효과가 나는 디자인의 ‘옐로카펫’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옐로카펫’ 홍보영상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공개한 날짜가 세월호 1주기인 2015년도 4월 16일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홍보영상이 이슈가 되면서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졌고, 지금은 전국 각지의 어린이 횡단보도 안전지대에 ‘옐로카펫’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옐로카펫 창안 후 언론과의 인터뷰 당시 (2015년 4월) 2020년 12월, 1년 후인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의 만기출소를 앞두고, 지난달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조두순 접근금지법’ 발의하셨습니다. 왜 그동안 어린이 안전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국내 아동 성범죄는 한해 9,349명, 하루 평균 26명으로 발생하는 아주 심각한 범죄입니다. 그런데도 성범죄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법 기반은 미비한 것이 현실입니다. 아동안전위원회가 발의한 「조두순 접근금지법」의 핵심은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 후 피해 아동에 대한 접근금지 기준을 기존 100m에서 500m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조두순 출소가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그를 교도소에서 출소를 막을 수 없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출소한 후, 그가 또다시 피해자 앞에 서는 것과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이 법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출소하기 전, 최대한 이른 시일 내 「조두순 접근금지법」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시켜 피해 아동과 그 가족이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현 시국에 「조두순 접근금지법」이 상정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 같아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조두순 접근금지법」을 포함한 어린이 안전 법안들이 국회에서 후속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계류되고, 결국 폐기되는 과정을 보면 매우 답답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서는 국회에서 누구도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고, 스스로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안전 법안은 모두 공감하고 동의해도 누구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국회의원실에는 수많은 입법 과제가 산재해 있다는 이유로 그중에서 결국엔 유권자도 아니고 예산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아동안전 법안은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밀리게 됩니다. 아동안전 법안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국회의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처럼 ‘민식이법’, ‘해인이법’, ‘하준이법’, ‘태호유찬이법’, ‘한음이법’ 등이 계류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가 죽어서 논쟁거리가 되면 그때는 관심을 보이지만, 아무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다시는 아이의 이름을 내세운 법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동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이 나와 활발히 활동하며, 아동이 ‘살아 있을 때’, ‘안전할 때’, ‘지금 지켜줄 수 있는’ 법안이 상정되어야 합니다. 조두순 접근금지법 발의 및 입법 촉구 기자회견 (2019년 11월) '옐로소사이어티'와 더불어 '아동안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하시며 ‘옐로카펫’ 외 아동을 위한 창의적인 제시를 많이 하는 성과를 내셨습니다. 학부 전공인 의용전자공학이 도움이 될 때는 언제인가요? 외관적으로 보면 의용전자공학이라는 전공이 아동안전 NGO 활동과는 무관해 보이기 때문에 어린이 안전 전문 NGO 대표로 활동하는 모습을 제 모습을 본 대학 동기들이 가끔 놀라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의용전자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옐로카펫, 옐로카드, 그리고 옐로키즈와 같은 창의적인 해결책을 창안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아동의 인권을 다루는 NGO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동료 활동가 대부분은 문과 출신이었기에 아무래도 문서를 다루고, 서류 작성을 하는 활동에는 강점이 있으셨지만, 상대적으로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나 발명을 고안하는 것에는 생소해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시절부터 늘 무엇인가를 연구하여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실물을 창안하는 것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저는 되돌아 생각해봐요. ‘내가 만약 ‘아동 인권’을 전공했었다면, ‘아동 사망사고 1위 횡단보도 교통사고’라는 문제 상황에 대해 ‘옐로카펫’이라는 솔루션을 직접 만들 수 있었을까요?’라고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분야에서 희소성 있는 의용전자공학 공부를 한 덕분에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강점으로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학 시절 창업동아리 활동에 매진했었는데 이때 쌓은 경험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창업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현실적으로 접근한 해결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저는 창업동아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학생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사업기획서 작성,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개발 추진을 수없이 많이 해봤습니다. 이 모든 경험이 NGO로서 새로운 사회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고안하고,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끔 후배들에게도 조언합니다. ‘무엇이든지 의미 없이 여겨지는 것이라도, 정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시간은 나중에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라고 말입니다. 제4회 SAFE 대전 안전체험 한마당에서 참여연극형 교통안전교육 옐로키즈 교육 (2019년 10월) '옐로소사이어티'의 슬로건인 '아동이 안전한 나라, 가족이 행복한 나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또한, '아동'이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가 처음으로 아동 관련된 일을 시작할 때는 사회에서의 아동이 작고 힘없는 존재라는 특수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이 일이 결코 아동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동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자’를 대표하기 때문에 아동을 기준으로도 안전한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나이를 불문한 남녀노소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전’이라는 것은 국민이 보장받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이라는 ’권리‘가 지켜질 때 우리는 그 위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다른 권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약자인 ’아동‘. 그 ’아동‘의 안전이 충분히 보장되는 나라가 될 때, 우리 모두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옐로소사이어티‘는 국민 모두와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아동이 안전한 나라, 가족이 행복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교통문화상 최우수상 수상 (2019년 10월)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근본적으로 아동이 안전한 나라가 되기 위한 법 기반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어린이 안전 법안은 특정 어린이가 죽음으로써 논란이 떠오르면, 사회적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회에서 급하게 주먹구구식으로 많이 발의하곤 했습니다. 그마저도 국회에서 상정되면 다행인데, 이번 ’민식이법‘ 등 어린이 안전 법안을 국회가 처리하는 모습과정을 보면, 발의만 할 뿐, 끝까지 책임지고 입법을 완수하는 노력의 모습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동안전위원회를 설립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한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동안전위원회는 어린이 안전에 대해서 꼭 제안하고 싶은 법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 곳, 최소한 검토라도 하고 입법을 위한 노력을 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곳으로 누구든 찾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아동안전위원회 이전, 우리 사회에는 기존에 그런 ’공간‘이 없었어요. 국회에 청원 제도가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고, 그곳에서 수천수만 건의 청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동, 어린이, 유아 등에 관한 청원은 단 45건뿐이었고, 그중에서 일부라도 반영된 것은 단 1건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국회가 사회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고, 다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고요. 아동안전위원회를 설립하고 3주 동안 입법 제안을 받았습니다. 페이스북에 ’우리가 아동이 안전한 나라의 법을 만들려고 하니 꼭 만들었으면 좋겠는 법을 제안해 달라‘고 했습니다. 무려 3주 동안 250건 이상의 제안을 주셨습니다. 절대적으로 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0년 동안 45건에 불과했던 국회 청원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의 제안이지요. 저는 이때 다시 한번 확신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아동이 안전한 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녀였고, ’아동‘의 유년기를 보냈고, 그렇게 자란 성인인 누군가는 그 또래의 ’아동‘인 자녀가 있고, 우리는 그 소중한 ’아동‘의 안전을 우리는 지켜주고 싶지요. 하지만 어딘가에 말하면 그것을 책임지고 이루어 줄 것이라는 신뢰를 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가슴 속에만 묵혀두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모든 국민께 ’아동이 안전한 나라‘에 대한 열망을 모으는 ’사회적 공간’을 지닌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저 사람에게 아동의 안전과 행복에 관한 법을 제안하면 최소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어린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고, 책임지고, 끝까지 추진한다는 신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AVEC G]와의 뜻깊은 인터뷰를 통해 활동을 소개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동이 안전한 나라, 가족이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옐로소사이어티‘와 ’아동안전위원회‘의 활동을 응원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제복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스무 살의 나이에 무용과 공연예술계에 각각 입문하여, 지난 3일 폐막한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된 성승정 감독.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 댄스필름계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댄스필름, 그리고 무용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열정에 대해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 2019년 11월, artist GYU x 선인장베게 - 라이브페인팅 퍼포먼스 <Forever never> 공연 당시 (갤러리 '빈칸') [출생] 1992년 4월 27일 [학력] ▶ 대전 삼천중 졸업 ▶ 대전 충남고 졸업 ▶ 서울대 사범대학 사회교육학/미술대학 영상매체예술 복수전공 학사 졸업 ▶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 석사과정 수석입학 및 재학 중 [경력] ▶ 2011~2018 서울대 중앙 재즈댄스 동아리 ‘몰핀’ 안무가 ▶ 2017~ 댄스필름&퍼포먼스팀 ‘선인장베게’(cactuspillow) 비디오그래퍼 ▶ 2017년 12월 ‘선인장베게’ 첫 필름 <집 떠난 빛-눕고 싶은 어둠> 업로드, 이후 <Glass You>, <이런 저런>, <박효신-숨 댄스커버> 등 발표 ▶ 2018년 7월 ‘선인장베게’ 공식 데뷔: Cactuspillow x Osisun-아트스페이스 ‘Osisun’ 개막공연 ‘오지선다’ 안무 (전석매진) ▶ 2018년 12월 ‘선인장베개’ 독자적 몸언어 <댄스어> 제작 - 서울대학교 영상매체예술 졸업전시에서 <초급 댄스어1> 발표 ▶ 2018년 10월~2019년 6월 <99>, <자우림-샤이닝 댄스커버>, <창 · 살>, <이합의 춤> 등 댄스필름 ▶ 2019년 8월 댄스필름 <왱> 제작 ▶ 2019년 10월 무용가 김백봉 아카이브전 ‘2019 춤의 얼굴’ 영상감독 ▶ 2019년 11월 artist GYU x 선인장베개-라이브페인팅 퍼포먼스 <Forever never>(갤러리 ‘빈칸’) ▶ 2019년 11월~12월 전시 ‘타임리얼리티’ 中 팀 ‘프로젝트 밴드스텝’ <다른 악보> 참여(코리아나 미술관) ▶ 2020년 2월 <초급 댄스어2> 공연 예정(Osisun x 지하극장) [수상] ▶ 2019 선인장베게 댄스필름 ‘왱’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감독상 수상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영상매체예술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성승정 입니다. 저는 댄스크루 ‘선인장베개’에서 댄스필름과 무용공연, 퍼포먼스를 포함해 여러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선인장베개’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거나, 댄스필름을 제작하기도 하고, 다른 분야의 여러 예술가와 함께 협업도 하고 있습니다. 부안 적벽강에서 촬영 당시 (2019년 11월) 점점 주목을 받는 분야이지만 ‘댄스필름’은 아직 생소합니다. 어떤 계기로 ‘댄스필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나요? 댄스필름은 말 그대로 댄스와 필름을 결합한 것으로, 어떤 형태로든 무용을 담은 영상물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좁게는 하나의 공연물처럼 무용만을 콘텐츠로 하는 경우(예: 스크린 댄스)를, 넓게는 음성과 인터뷰를 가미하여 댄서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뮤직비디오 등 춤이 소재로 등장하는 일체의 영상물 모두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통일된 용어로 정의되어 자리 잡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Dance film’이나 ‘Screen dance’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영상물이 제작 및 상영되고 있습니다. 결합이 되는 것이 댄스와 필름이다 보니, 무용에서 오는 독자적인 요소, 그리고 영화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법들이 모여 독자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장르이기도 합니다. 특히 피사체가 되는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점, 이인무나 군무 등에서는 대형이 있다는 점에서부터 일반 영화와는 또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로 시작했던 무용이 점차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고, 영상이라는 매체에 몰입하게 된 것도 공연 일부에 사용될 요소로서 시작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학부 때는 무용 따로, 영상 따로,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댄스커버 (안무: 성승정) 무용은 철저히 공연예술로서만, 영상은 미술적인 맥락에서만 배웠습니다만, 미대에서 배우는 영상을 공부하면서, ‘가장 나다운 것’, ‘내가 주로 하는 것’들을 접목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바로 춤이었습니다. 그렇게 미술대학에서 학기 말마다 제출하는 제 작업물들은 ‘댄스필름’이 되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춤 동아리 친구들과 프로젝트처럼 몇 가지 필름들을 시도하고, 미술대학에서 기말 전시에도 댄스필름을 제출하면서 저의 주력 장르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선인장베개가 제작한 몸 언어 '댄스어'에 관한 전시. 댄스어와 관련해서는 내년 2월 오시선에서의 공연/전시를 비롯해 많은 차기작들이 예정되어 있다. 댄스필름의 매력은 ‘댄스로부터 출발하느냐’ 아니면 ‘필름에서부터 출발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댄스로부터 출발한다면 공연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과 생생함을 영상으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누리게 해 줄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필름에서 출발한다면 색다른 촬영과 편집의 기법, 독자적인 화면구성을 요구한다는 점이 매력입니다. 작업을 거듭하면서 영상이라는 매체에서만 시도될 수 있는, ‘춤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찾게 되었는데,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춤과 영상이 ‘물리적으로만 결합하는 것이 아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느껴지는 지점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제 작업물들은 ‘선인장베개’ 유튜브 채널에서 대부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서울무용영화제 수상작도 메인에 올라와 있으며 그간의 다양한 작업물들이 아카이빙 돼 있습니다. 댄스필름은 국내에서는 아직 다소 협소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이라는 장르도 협소한데 거기다가 영화까지 결합했으니까요. 개인적인 체감상 무용계와 영화계의 교집합 미만의 언저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이미 수많은 예술가들이 댄스필름을 제작하고 있으며, 특히 음악가들에 의해 뮤직비디오 등의 형태로 아주 많이 향유되고 있습니다. 무용단의 공연 홍보영상 등은 말할 것도 없지요. 심지어는 넷플릭스를 통해서 현대무용 영상이 유통되기도 합니다. 반면, 국내의 댄스필름 시장은 갈 길이 멉니다. 그나마 무용인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퍼지고는 있지만,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언급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돌파구를 찾자면 역시 뮤직비디오의 형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현재 국내 대중들에게 댄스필름의 형식과 ‘비슷하다’라고 느낄 만한 것은 K-pop 뮤직비디오일 것입니다. 그나마 ‘춤’과 ‘영상’과 양식이 가장 두드러지는, 현재로선 가장 흔한 형태의 작업물이기 때문이죠. 다만, 국내에는 ‘무용’과 ‘댄스’가 분리되어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가 계속해서 ‘댄스필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이유는, 공연예술의 현장성과 영상의 미장센 두 가지를 모두 쟁취할 수 있다(물론 이 지점에서도 큰 노력과 도전이 있어야겠지만)는 가능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무용’과 ‘영상’ 이 두 가지 산업이 각각 지닌 가능성 때문도 있습니다. 공연장 바깥의 관객에게도 무용을 접할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댄스필름이 지닌 무용의 대중화 측면에서의 기능일 수 있겠고요, 영상 산업은 현시대에 책보다 더 흔히 읽히는 매체가 되었기 때문에, 매체 특성으로만 봤을 때는 오히려 ‘모두가 배워야 하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대해 전망하기를, 무용이야말로 꽤 미래지향적인 영역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노동이 소멸하고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을 미래에, 결국 시대의 철학이 다시 몸에서 전파될 수 있는 예술에 집중되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분명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할 것이고, 단련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동작에는 더 큰 인간적 가치를 부여하겠지요. 가까운 시일 내로 댄서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안방에서, 대중교통에서 TV로, 이동통신으로 흔하게 유통되고 소비될 것을 전망합니다. 영하 11도에서 '선인장베개' <집 떠난 빛-눕고 싶은 어둠> 스케치 촬영 中 (2017년 12월) 지난 11월 3일 막을 내린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한 수상작 댄스필름 ‘왱(zzz)’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이 작품의 기획은 작년 어느 여름날 방 안에서 우연히 친구와 모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기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짝짝’ 소리를 내는 것,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것들 모두 무용 동작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영감이 떠올랐어요. 제목은 처음부터 ‘왱’이었는데,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첫 화면의 갸우뚱한 무용수의 얼굴도 당장 ‘왱?’이라 말할 것 같은 것이 바로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어요. 상영 시간은 6분 37초이고 다섯 명의 무용수가 차례로 주연을 맡으면서 진행됩니다. 스스로 어렵다고 느끼면서도 가장 즐기는 작업 방식은 무용수 개인의 개성을 담아내는 것인데, 개인에게 어떤 역할이 어울릴지 맞히는 것입니다. 무용수의 특기를 알아보고,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 역시 저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모기를 잡는 동작을 안무로 해석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개성의 반영’을 중시했고, 같은 맥락에서 주제의 확장성을 크게 염두에 두었습니다. 현실에서 똑같이 모기를 잡는다 해도 어떤 이는 쉽게 잡지만, 어떤 이는 온 방 안을 헤매기도 하지요. 또 누군가는 ‘만날 자기만 물린다’라고 억울해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사람마다 모기에 관한 다른 대처와 사고방식을 보이는데, 이것이 제가 찾은 ‘군상’이었고, 이런 각각의 개성을 여기서 모았습니다. 또한, 중첩된 목표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여, 나중에는 별안간 뒤엉켜 다투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지요. 여기서도 누군가는 경쟁에 몰입하고, 누군가는 이를 즐기며, 또 다른 누군가는 현 상황에서 이탈하고자 한다는 것에 대해 캐릭터를 설정했습니다. ‘왱’의 후반부에는 사람들이 더는 모기에는 관심이 없고 경쟁 상황 자체에 몰입하는데, 누군가가 경쟁에서 빠져나감으로 분위기는 싸늘해지죠. 이는 상황 자체에 과몰입하던 사람들이 일탈한 사람을 제2의 목표로 삼는 순간을 표현합니다. 정작, ‘경쟁의 종식은 아무도 예상 못 한 누군가가 맺을 수 있다’라는 ‘현실 인식’에서, 가장 늦게 참여하고, 그저 즐기던 사람이 화면의 가장 바깥쪽에서 모기를 잡아버림으로써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반전을 주었습니다. 군무의 경우, 3가지 패턴의 움직임의 순서를 다섯 명이 세 개의 패턴 순서에 맞추어, 그 경우의 수(3!)는 여섯 가지이기에 반드시 두 명 혹은 세 명이 동시에 같은 패턴으로 군무를 맞추게 됩니다. 각각의 패턴에도 귓가의 모기를 쫓는 동작, 모기향을 뿌리고 떨어진 모기를 밟는 동작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댄스필름 ‘왱’은 무엇보다도 이를 잘 소화하고 표현해준 무용수들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무용수 각자의 개성을 발현과 모기에게서의 주제 확장이 좋은 평가를 받아 ‘최우수 감독상의 수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작 댄스필름 ‘왱(zzz)’ 함께 활발하게 활동 중인 댄스크루 ‘선인장베게’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선인장베개’는 서울대 재학 시절 활동했던 재즈댄스 동아리 ‘몰핀’에서 제가 진행했던 작업이었던 공연물, 영상물 등에 전문성을 함양하고자 제가 직접 만든 크루입니다. 한 마디로 ‘더 제대로 해보자’라는 마음이 컸죠. 처음에는 서울대 교내 무용부 학생과 함께 댄스필름을 찍어서 올리면서 채널을 시작했고, 이후에는 다른 여러 실력 있는 무용수들을 영입했습니다. 크루가 만들어져가던 초기엔 모르는 사람에게 함께 작업하자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나름의 작업물들도 생기고 그렇게 자신감도 붙어, 지금은 꽤 많은 인원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성원 중 디자이너와 작곡가, 미술가도 있어 대부분의 작업물이 위탁이나 외부 용역 없이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댄스필름 작업을 계속하면서 감사하게도 공연의 기회도 꾸준히 가질 수 있었고, 창단 연차에 비하면 많은 경험을 축적한 단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대표이자 안무가, 비디오그래퍼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선인장베개’는 구성원 모두 지위를 가리지 않고, 아이디어를 내고, 안무자로 활약할 수 있는 단체 입니다. 여러 명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사람들이 모여 ‘인력 풀’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구성원 대부분이 다른 분야나 소속된 단체에서 활동 중인 경우가 많기에,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모였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느슨한 조직이기도 합니다. 외부적으로 ‘선인장베게’는 영상뿐 아니라, 무용공연, 퍼포먼스를 포함해 다른 예술가와 협업도 자주 합니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그 사이에서도 공연이나 영상물 제작 건이 있을 때마다 뜻을 모아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이유는, 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언제든 무대를 마련해줄 수 있는 것이 제가 ‘선인장베개’를 유지하는 가장 큰 목적이고,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었을 때 서로의 보람과 유대를 확인할 때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상 'TRAIN' 출연 캡쳐 (2017년 8월) 많은 공연 중 특히 오시선에서의 공연이 눈에 띕니다. ‘선인장베게’와 함께 작년에 이어 내년에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으신데요.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무용공연은 해외에서 많이 보아온 사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시도된 적이 드문 것 같습니다. 미술과 무용의 만남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국내에서도 무용이 대안공간을 찾아 공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들어 다원 예술에 대한 작가들의 욕구, 그리고 관객들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영향이 크겠지요. 미술관 등 극장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무용을 펼친다는 것에, 무용인으로서는 ‘더 다양한 계층과 관심사를 가진 관객들을 내가 직접 밖에 나가서 만나겠다’라는 의지의 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극장 공연의 관객층은 주로 무용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미술관 등의 다른 공간은 비교적 더 넓은 일반 관객층을 지녔고, 미술 관계자들도 많지요.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극장을 벗어나기 위해 흔히 말하는 ‘장소 특성형 공연’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해당 장소만이 지닌 특성이나 공간의 맥락, 역사를 작품의 일부로 흡수하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선인장베개’의 첫 공연이었던 <오지선다>도 미술관 공연이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장소 특성형 공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지선다> 티저 캡쳐 (2018년 7월) <오지선다> 평면 티저 영상 캡쳐 (2018년 7월) 미술관에서의 무용은 우선 감상의 태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극장은 무용수가 환상적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면, 미술관은 무용수에게 작품으로서의 기품을 줍니다. 극장에서 무용수는 출연자이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하지만, 미술관에서의 무용수는 ‘오브제’에 가깝지요. 쉽게 말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작품’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워낙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기에, 두 성격이 뒤섞여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도 현대 예술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다만, 관객으로서는 ‘미술관에서 여러 작품을 둘러보듯’ 무용수를 대하는 것과, ‘극장에서 앉은 채 시선을 고정 당해’ 무용수를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때때로는, ‘무용이라는 장르를 미술관에 옮겨 놓는다’라는 개념이 그다지 유기적으로 와닿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무용인이 전시실에서 극장에서처럼 공연하는 때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미술관과 극장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극장에는 극장의 역사가 있었듯, 미술관에도 미술관에서 나온 맥락이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었던 티노 세갈의 <키스>(2010)라는 작업의 예를 들자면, 두 남녀가 바닥을 뒹굴며 서로 애무하고, 키스하는 작품인데, 특이한 점은 관객이 가까이 가면 ‘티노 세갈’, ‘키스’, ‘2010’ 등의 단어를 말하면서 작품의 정보를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극장에서 무용수가 할 수 있을 법한 연기를 펼치고 있습니다만, 작가는 분명히 ‘미술사’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오브제성과 형상성을 배제하고자 한 것이고, 그로 인해 배우나 무용수의 순간적인 행위와 경험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지요. 이 지점에서 무용과의 접점이 생길지언정,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작가가 그 순간성을 ‘전시’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안무가인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가 지난 2018년 4월,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찾아왔었습니다. <파제, 스티브 라이히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 페이즈>를 선보였는데 이는 미술관에서 ‘전시’가 아닌 ‘공연’에 가깝습니다. 미술관이 극장의 역할을 했고, 미술관으로서는 그녀의 안무가 지닌 미술적인 가치를 알아본 것이지요. 아마도 이 같은 그림을 상상하고 많은 무용수가 갤러리를 찾아가는 것이겠지만, 안느 테레사의 경우, 수학적인 본인의 춤과 동선을 흰 모래 위에 그림으로써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본인의 공연이 전시적인 성격도 지니도록 했습니다. 이 같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다른 장르의 예술이 다른 장소에 가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미술관에서 펼쳐진 공연을 모범사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지선다> 공연 (2018년 7월) 처음 ‘선인장베게’가 오시선(Osisun – 이하 오시선)에서 공연하게 된 것은 철저히 박재영 작가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현대미술 작가로서 이미 왕성하게 활동 중이셨던 분인데 서울대 재학 당시 박재영 작가님의 수업을 수강했었습니다. 수업마다 각자의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면서 차기 작업을 논의하는데, 제 포트폴리오는 수많은 작업 중에도 혼자 춤을 추며 작업을 하니 신선하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박재영 작가님 역시 작가이면서도 기획자의 역할도 즐기시는지라, 본인이 큐레이터로 있는 예술 공간을 열고자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오시선이었고, 오프닝 기념으로 퍼포먼스가 어떻겠냐며 제게 먼저 공연을 제안해주셨습니다. 저로선 큰 영광이었지요. 그래서 오시선이라는 공간의 시작과 동시에 ‘선인장베개’의 본격적인 공식 활동이 시작된 셈입니다. 오시선이라는 공간은 특별합니다. 평소에는 박재영 작가님 본인이 운영하시는 ‘Downleit’이라는 디자인회사의 공간으로 운영되다가, 다른 작가의 전시나 퍼포먼스가 있을 때는 작업공간이 벽 안으로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공간이 됩니다. 온 벽과 천장이 흰색인 화이트 큐브가 되면서 전시하기 적합한 공간으로 변신하지요. 이미 저명한 여러 작가분의 전시 공간이었던 오시선이 더 특별한 이유는, 저처럼 가능성은 보이지만 갓 학부를 졸업한 어린 작가들에게도 전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학부 졸업전시 이후 곧바로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지요. 박재영 작가님은 매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졸업전시를 둘러보시고 작가로서 가능성 있는 친구들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오시선에서 펼쳤던 ‘선인장베개’의 첫 공연 ‘오지선다’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다섯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 동작들을 만들어 각각 다른 공간과 시간에 배치하면서, 재조합과 해체를 통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발산하는 공연이었습니다. 설명이 다소 어렵지만, 다섯 가지의 선택지로 주어졌던 주제가 점차 뒤섞이고, 확장되는 공연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객관식처럼 주어졌던 인생의 보기가 사실은 수많은 갈림길이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했으며, 각각의 공간도 그 당시에 다섯여 군데가 있었으므로, 각 동작을 다른 공간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경우의 수로 벌어졌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스트리밍도 이루어졌는데, 웹에서 공연을 감상하게끔 한다는 확장의 측면을 염두에 뒀지만, 공연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뒤쪽 공간을 관객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끔 한 의도도 있습니다. 또한, 장소가 골목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인 것처럼 연기하기도 하고, 실제 행인들이나 오토바이, 자동차도 공연의 일부로 흡수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마무리는 무용수들 모두가 골목에 나타난 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이었는데, 무용수가 아닌 사람들이 공연 일부가 되기도, 무용수가 공연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도 하는 속임수를 썼고, 대부분 재미있게 감상했던 것 같습니다. <오지선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 (2018년 7월) 처음엔 어쩌면 관객으로서는 다소 난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관객분들이 생각보다 아주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감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개별 안무가 지닌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각 공간에서 펼쳐졌던 상황에 대해 관객분들 모두 나름의 해석을 하셨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관객 자리해주셨었는데, 아무래도 박재영 작가님의 공간 오프닝이었던 것만큼, 작가님의 명성을 통해 찾아오신 관객도 많았겠지만, 그 간의 활동들을 토대로 ‘선인장베개’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관객들도 많이 와주셔서, 이틀간의 공연이 다 만석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무사히 첫 공연을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첫 공연의 평이 좋은 편이었기도 하고, 작업 방식도 서로 맞는 느낌이었기에, 박재영 작가님과 저는 첫 공연 후에도 종종 함께 작업했었습니다. 그렇게 ‘선인장베게’의 첫 공식 데뷔 이후, 한동안은 필름 제작에 집중하다가, 올해 상수역 부근에 있는 ‘빈칸’이라는 갤러리에서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석사과정 중이신 이규석 작가님과 협업하여 라이브 페인팅 퍼포먼스를 하였습니다. ‘선인장베개’와 듀엣으로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인간의 집착’에 관한 주제로 페인팅과 안무가 결합한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올해 연말까지는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타임 리얼리티’라는 전시에서 ‘프로젝트 밴드스텝’이라는 팀으로 ‘선인장베개’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나 최근 홍콩의 민주화운동에서 보이는 ‘언론 보도-실제의 불일치 현상’을 모티브로 한 퍼포먼스입니다. 미술가와 음악가, 무용가들이 한데 모여 전파 방해를 하는, 규모 있는 다원 예술입니다. 오는 12월 14일 오후 5시에도 한차례 예정되어 있습니다. 내년 2020년 2월엔 다시 오시선에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내년 공연은 학부 당시 졸업 전시회에서 만들었던 ‘댄스어’를 공연의 형태로 처음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작년 공연 당시엔 아무래도 학부 졸업 이전이었고, 무용 전공이 아닌 상태였지만, 지금은 저 자신의 위치나 실력이 발전하였다고 믿기에, 자신 있고, 기대도 큽니다. 안무 역시 좀 더 완성도 있고, 구성도 더 짜임새가 탄탄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댄스필름 '왱(zzz)' 촬영현장 (2019년 7월) 이번 무용제의 작품인 ‘왱(zzz)’를 비롯한 많은 작품의 안무를 맡으셨습니다. 안무 역시 창작인 만큼 고민도 많고, 고통도 많을 것 같은데, 한 작품의 안무를 만드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영감을 얻는 과정은 주로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모양에서 받을 수 있고,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빙하가 쩍 갈라지는 것을 보고도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혹은 좋은 노래를 들으면서 악기 소리나 가사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도 있고요. 주로 걷거나, 샤워하는 동안 많은 영감을 얻는 편인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산책을 하거나, 고민할 주제를 정해놓고 샤워를 하기도 합니다. 특히 풀리지 않는 문제나 진행 중인 작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에는 해당 주제를 골몰히 생각하면서 걷다 보면 해결될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혼자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도 좋아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을 하다 보면 무대 위의 어떤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동작을 하는 것이 효과적일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르기도 합니다. 안무는 머릿속으로 먼저 떠오른 부분을 제외하고는 직접 계속 움직여보아야 합니다. 아마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부분이겠지만 생각만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지점들이 훨씬 많은 것이 무용의 특징입니다. 일단 무용복으로 갈아입고 연습실의 공간을 누비면서 움직이다 보면 좋은 동작이 떠오를 때도 있고, 우연히 즉흥적으로 움직이던 도중 마음에 드는 동작이 나올 때도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독무 이상의 군무를 만드는 것은 무조건 서로 움직이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움직이기 전, 작품 창작이 시작되는 처음 순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과정은 아무래도 어떤 이미지나 생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군무라고 해도 ‘서로가 하나의 뒤엉킨 실타래 같아 보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시작지점이 필요하니까요. 이번 필름 ‘왱’의 경우에도 도입부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은 처음 순간에 떠올랐던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이후에는 주제를 ‘모기 잡기’로 상정한 만큼 우리가 모기를 잡기 위해 하는 일상적인 동작들을 되짚어보고 직접 움직이면서 발전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동작을 만들어내죠. 저는 주로 일상적인 몸짓이나 non-verbal language 등을 안무로 발전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 작품의 창작 기간은 작품의 길이나 밀도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번의 프로젝트 당 1~2개월이 걸리고, 평균 주2~3회, 매번 3시간의 연습을 합니다. 연습을 집중력 다해 진행하면, 15분의 공연을 만드는 데에 4~5시간씩 9~10회의 연습을 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탄탄한 계획이 수립된 이후에 구성원 모집이나 연습 일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안무가로서 준비되지 않은 채로 무용수와의 연습을 잡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이디어 구상 기간이나 동작을 짜는 것까지 합치면 한 달 정도 더 소요되지요. 프로젝트당 대략 두 달에서 석 달 정도가 소요된 것 같은데, 앞으로 30여 분이나 50여 분을 넘는 단독공연을 하게 된다면 더 자주, 길게 연습을 하게 되겠네요. 비록 제가 아직 해보아야 할 경험도 많고 젊은 편이지만, 안무를 위해, 그리고 창작을 하고자 하는 분들께 조언을 드린다면 이것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최대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누구보다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일상생활에 임하지 않으면, 작품도 예리하지 못하고, 평범하기 마련입니다. 길 가다가 떨어진 낙엽을 보더라도 평소와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해보세요.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서도 변화를 느껴보세요. 핵심은 언제나 ‘관찰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7월, 오시선에서 개최된 '선인장베게'의 <오지선다> 공연 영상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공식적으로 우선은 ‘선인장베개’를 극장에 많이 올려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화랑이나 미술관을 전전한다 해도 무용이라는 장르가 결국은 극장에서 잘해야 정말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에 내년 목표는 공연 전문 극장에서 단독작품을 올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수입에 대한 걱정과도 연결이 되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다른 작가들이나 안무가들의 영상제작을 맡아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느낀 점은 메인 감독이 아니라 다른 작가나 안무가들의 작업 현장에서 일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자극도 받고 사람도 만날 겸 해서 외주를 좀 더 진행하고 싶습니다. PC도 신형으로 바꿔서 작업효율도 높이고 싶습니다. 또한, 무용 역사나 이론에 대한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싶고, 졸업 후에는 박사학위를 진학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목표는 무용 예술을 한국에서 더 친숙하고 흔하게 향유되는 예술로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스무 살에 처음 무용을 접해본 저로서는, 무용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신체적, 정신적인 차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스스로 취미 삼아 하기도 좋고, 감상하기도 좋은 예술입니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서 댄스필름이든 무용(혹은 댄스)이든 충분히 향유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어서 이를 더 대중화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만큼 큰 보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무용인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용인들 역시 선진적인 교육을 모색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또한, 이렇게 ‘댄스필름’이라는 예술 장르가 있다는 것도, 이런 댄스필름의 영상을 접해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큰 재미가 있다는 것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년에는 건강관리 겸해서 좋은 취미로 집 근처 무용학원을 등록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긴 내용의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와 ‘선인장베개’의 행보를 지켜봐 주세요! 또한, 저희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무척 좋은 콘텐츠를 지니고, 심지어 뮤지컬이나 콘서트보다 푯값이 저렴하여 상대적으로 금전적인 부담감이 적은 무용공연이 많으니 관심 갖고 많이 찾아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본 인터뷰의 일부는 '시사N라이프'를 통해 2019년 11월 13일 보도 되었음을 알립니다. 기사 원문: 링크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성승정 이경택(지하극장)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그동안 'Avec G'는 인터뷰 기사에 댓글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많은 독자 분들의 문의와 요청으로 댓글 창을 오픈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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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team will contact you as soon as possible.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삭막하고 흉흉하다. 그런 지금, 전혀 모르는 남이 도움을 청할 때, 그런데 거기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손을 뻗기는 망설여진다. 그런데 김예원 변호사는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어느 누군가 캄캄하고 깊은 곳에서 도움을 외치는 소리를 찾아 기꺼히 나선다. 그리고 그런 김예원 변호사의 마음 속의 작은 꿈은 자신이 장애인, 여성, 아동 등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되도록 오래 오래 말이다. * 2016년. 아이 셋 가운데 둘째 임신 중, 장애인권리보장법 연대활동 당시. [출생] 1982년 11월 19일 [학력] 강원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 제51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41기 수료 前 법무법인 태평양이 설립한 공익재단법인 동천 공익전담변호사 前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상임변호사로 재직 現 장애인권법센터 대표 / 변호사 現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법률위원 現 재단법인 사랑샘 이사 現 사단법인 한국여성변호사회 비상임이사 現 사단법인 정신장애인인권연대 KAMI 이사 現 사단법인 장애인법연구회 교육국장 現 공익법률기금 사무국장 現 서울지방변호사회 국선변호특별위원회 위원 現 서울특별시 녹색시민위원회 위원 現 KBS 시청자위원 現 법무부 장애인차별시정심의위원회 위원 現 강원도 인권위원회위원 現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운영위원 現 대검찰청 검찰미래위원회 위원 現 한국장애인개발원 혁신자문단 위원 現 한국장애학회 감사 現 강원도 장애인권익옹호기관 법률자문단 위원 現 한국자원봉사센터 기록문화 추진위원 現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위원 [취득 자격] • 변호사 (법무부) • 사회복지사 (보건복지부), • 성폭력 전문상담원 (여성가족부) [수상] • 공로상 (장애인 인권), 한국여성변호사회 (2015년 1월) • 장관표창, 보건복지부 (2016년 12월) • 청년변호사상, 대한변호사협회 (2017년 2월) • 공로상 (아동 인권), 한국여성변호사회 (2018년 1월) • 곽정숙 인권상, 곽정숙 기념사업회 (2018년 3월) • 서울시 복지대상, 서울특별시 (2018년 4월) • 청년 공익변호사 대상, 법조공익모임 나우 (2018년 12월) • 우수변호사상, 대한변호사협회 (2018년 12월)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 김예원입니다. 장애인권법센터라는 비영리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장애인, 여성, 아동 등에 가해지는 폭력과 학대, 차별 이슈에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한쪽 눈이 없어져서 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시각장애인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 아이를 기르는 워킹맘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AVEC G]와 인터뷰를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금은 어엿한 변호사가 되셨지만, 당시엔 법과대학 입학이 사법고시 합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학창시절, 진로에 대해 겪었던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말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 의사표시를 분명히 해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하는 스타일이었지요. 자라나면서 따돌림과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유는 오로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시각장애가 제게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그랬기에 성적도 좋았습니다. 법조인이 무엇인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법’이라는 도구로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꼭 법조인이 되겠다’라고 일찍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은 법학으로 정했고, 입학 후에는,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2013년, 사건당사자와 회의. 변호사는 언제나 당사자의 ‘needs’를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공익 변호사로서 장애인 인권침해 및 인권 제도와 정책 개선을 위해 앞장서고 계십니다. 이 '장애인 인권'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많은 분이 제가 ‘왜 장애인권 일을 하는가?’ 종종 궁금해하시다가, 제가 장애인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가 장애인이기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지만, 정작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장애 이슈’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저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시설 분리정책이 심했습니다. 제 삶의 영역에서 장애인을 친구로 이웃으로 맞이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은 불쌍하고, 도와야 하는 사람’ 딱 그 정도로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지요. 후에, 변호사가 되고, 어떤 미신고시설에서 일어난 수십 년간의 장애인 학대 사건 피해자들을 지원하게 되었어요. 그 사건을 보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이런 일이 지속된 데 아무런 문제 제기를 못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제겐 변호사로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일들에 매진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지요. 제가 진행했던 사건들로부터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삶의 새 지평을 열게 된 셈입니다. 아직 '장애인 인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장애인 인권 문제 때문에 맡는 사건 중에서도 가장 의뢰가 잦은 사건의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애인 인권 관련 사건은 장애를 원인으로 일어나는 ‘인권침해’ 사건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장애가 있으므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배제나 취약성을 이용하여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사건, 또는, 장애를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하거나, 분리하는 등의 장애인 차별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학교나 직장, 지역사회, 서비스를 받는 기관 등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죠. 또한, 생애주기별을 따지지 않고, 골고루 나타납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부터, 삶을 마감하는 상황에 있는 노인까지, 장애를 이유로 당하는 불합리한 일은 나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가장 의뢰가 잦은 사건들은 사회적으로도 물의가 큰,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사건입니다. 저는 장애 논쟁거리와 젠더 이슈를 함께 대응하는 변호사다 보니, 특히 발달장애인에 대한 성범죄 사건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물론 저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입장입니다. 2019년, 법제도 개선을 위한 법률개정안 발제 당시. 제도개선은 김예원 변호사의 궁극적 활동 목적이다. 현재 특히 '장애인 인권'을 위해 대응하고 있는 이슈가 있나요? 우선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을 접하면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해서 필요한 법률지원 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최근에는 장애인 학대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변호사를 위한 업무매뉴얼을 집필했어요. 사건을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제도의 덫에 갇혀서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때에는 정책연구나 입법 활동을 병행합니다. 최근 들어 입법을 위해 노력하는 이슈는, 성 착취 당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을 자발적 성매매 당사자가 아닌, 성 착취 피해자로 국가가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또한, 저는 여러 정책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는데요, 이번 정부의 주요 과제인 장애인 탈시설을 위한 법안 마련과 정책연구도 분야의 여러 전문가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인권법센터 대표 변호사를 비롯해 공익, 사단, 재단, 법인 등 소속된 현직 직함만 19개에 달합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고 일주일 7일이 모자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 많은 소속의 직무를 동시에 이행하시나요? 제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네요. (웃음) 저는 몇 개의 일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직함이 없이 연대해서 활동하는 것도 많거든요. 인권 관련 이슈는 매일 다양하게 새로 생기기 때문에 이에 문제의식을 같이하는 단위끼리 성명서도 발표하고 지속적으로 점검하면서 개선을 위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힘들지만 어렵지는 않아요.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일이기에 가능합니다. 저는 전국의 여러 장애 단체, 여성단체 등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권법센터가 영리활동을 하지 않기에, 1인 법률사무소이긴 하지만 중요한 일을 추진할 때는 꼭 당사자와 함께, 그리고 그 당사자를 함께 지지할 수 있는 단체와 연대하여 진행하는 편입니다. 여러 단위의 운동이 있지만 요즘 특히 애착을 두고 활동하는 영역은 정신장애 관련 일이에요. 최근 조현병이 있는 사람의 범죄가 쟁점이 되면서, 사회적으로 정신장애 자체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잘못된 통계와 부적절한 보도들을 지적하며 싸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 김예원 변호사는 세 아이를 둔 워킹맘이다. 그녀의 마음에 항상 사랑이 샘솟게 해주는 인생 최고의 선물들과. 아직 어린 세 아이의 육아를 병행하면서 공익 활동만 전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워킹맘 변호사'로서 본인 만의 시간 관리 팁을 공유해주세요. 저는 아이 셋이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아 집중육아기를 보내고 있어요. 육아는 제 인생 최대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변호사 업무는 성취 중심적인 일이 많아서 육아와 같이 감정과 시간을 계속해서 들여야 겨우 상황 유지만 할 수 있는 돌봄 노동과는 결이 좀 다르니까요. 그런 부분이 오히려 저에게는 자극이 되어 삶의 활력으로 작용합니다. 법률서면 하나를 완성한 후 설거지를 뚝딱 하면 머리를 쓰다가 몸을 쓰게 되어 분위기 전환이 되기도 하고요. 정책토론회에 가서 논리정연하게 이런저런 주장을 하고, 집에 돌아와 비논리적인 놀이를 이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상호작용을 해요. 그러면 신기하게 한 활동에서 올라갔던 긴장이 내려가면서, 재미있고 평안한 마음이 들어요. 시간 관리 ‘비법’이라는 것은 따로 없고, ‘매일 그 날 해야 할 일을 한다’라는 마음, 그리고, ‘지금 이 시간도 결국 지나간다’라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단,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에는 가장 최우선으로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올해 4월, KBS ‘오늘밤 김제동‘ 출연 당시. 김예원 변호사는 ‘언론을 통해 바뀌어야 할 것들을 널리 알리는 일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전 질문의 답변에서 설명했듯, 매일매일 그날의 할 일을 해 나가면서 살아가는데 급급한 저의 현재 상황에서, 5년 후 계획이나 10년 후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작은 꿈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바로 이 일을 오래오래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에요. 저는 애초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이 일을 통해 더 직업적으로라도 머리에 있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이 일을 해 나가셔서 길을 닦아오신 분들이나, 아낌없이 주변에 사랑을 나누시는 분들을 보면, 더욱 힘이 납니다. 저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고요. 많은 공익 사건을 맡다 보니, 일상이 유지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려고 더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의 오늘 역시 감사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예원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방송국 PD를 동경해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지만, 실용음악계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가 던진 '편곡도 잘할 것 같다'라는 한 마디는 그가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떠오르는 작,편곡가, 프로듀서,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생의 파장을 불러왔다. KBS 예능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의 편곡가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음악감독 최영호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중음악 작곡가와 편곡가, 그리고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최영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인지도 높은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지만,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항상 교회와 학교에만 왕래하던,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과 음악을 좋아했기에, 공부하는 시간을 빼면, 항상 농구나 수영 등, 운동과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직업의 선택이 넓어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을 뿐, 미래에 대한 대단한 포부나,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적성에 맞는 꿈보다는 ‘대학’을 목표로 달리는, 그래서 슬프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한, 현 대한민국 교육환경에 처한 고교 수험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고교 재학 당시, 이미 언급했듯, 적성보다는, 전형적인 교육환경에 맞춰진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보았던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 정도가 있었던 직업이 ‘외환딜러’와 ‘방송국 PD’였습니다. 1994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인 김민종(한현 역)이 외환딜러였는데, 제게는 그 역할이 매우 멋있어 보여서, 직업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아요. 방송국 PD 또한, 인터넷은 걸음마를 떼던 당시였고,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전화’의 기능만 하던 때라, 대한민국에서 TV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이 대단했기에, 그 영향력의 중심에 있던 방송국 PD직을 동경했습니다. 외환딜러가 되려면 경제학과에 진학해야 했고, PD가 되려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야 했는데, 응시했던 학교 중, 합격한 곳이 신문방송학과였습니다. 아쉽게도 동경을 가지고 입학한 신문방송학과는 저와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미리 상상하고, 기대했던 수업의 내용이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업들이 주를 이루니 흥미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미디어 직업군에 대한 실전적인 수업보다, 국내외 정치, 경제 등 시사 수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실습보다는 학문적인 접근이 많았던 커리큘럼이, 제게는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대학입학 후, 다행히 적성을 찾아, 프로음악가로 데뷔를 했기에,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 초년에 하게 됐습니다. 음악은 전혀 전공과 관련이 없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대중음악계에 입문하게 되셨는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프로듀서로서 필요한 음악적 기술들을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많은 시간, 노력을 쏟은 만큼, 그에 들어맞는 기술과 노하우를 얻게 됩니다. 피아노 연주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취미 중 하나였고 성격상 무엇을 하든, 지독하게 해내는 편이었기에,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형교회의 반주자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대형교회는 피아노 전공자 혹은 그 이상의 경력자가 피아노 반주를 전담하며, 초등학생이 반주를 맡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제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남달랐던 음악 감성으로,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개최하는 대형 공연의 무대에 많이 올랐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 활동으로 시작하였지만, 활동을 지속하다 보니, 지역 내에서 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저는 교회 지인의 아르바이트 추천을 받게 되었는데, 모 대중가수의 건반 세션이었습니다. 그것이 첫 대중음악계에 처음 입문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학교의 수업 방향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 대학입학 후,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대중가수의 건반세션을 생각보다 자주 제의받았습니다. 저의 어릴 적 취미를 살리고, 좋아했던 연주를 통해 수입도 생기니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신문방송 분야에 남을 것인지, 음악 자체를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저 자신에게 질문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 시급이 2천 원가량 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연주 한번 하면 기본 40~50만 원씩 받았고, 그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문직으로 전환해도 되겠다’라는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과장님을 찾아가, 음악으로 진로를 정했으며, 앞으로 음악 일을 열심히 해야 하기에,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았고, 공중파 방송은 전국을 누리던 시절에, 저는 연주하면서 방송 출연도 많이 하고, 그때마다 주변 지인들의 부러움도 사니, 나름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20대 초반인 어린 나이에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축하해주는 분위기였는데, 부모님만은 약간의 반대를 하셨습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이신 저의 어머니께서는, 성공과 미래에 대한 보장보다, 제가 대중음악에 종사하는 것 자체에 불편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든지, 하지 못하게 막으시기보단, 기회의 길을 터주시고, 응원해주셨기에, 크게 반대를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대중음악계의 기독교인으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저의 굳건한 신앙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중음악계로 입문 후 처음 했던 작업 혹은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소개해 드렸던 대로, 교회 지인의 아르바이트 추천으로 하게 된 모 가수의 건반 세션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세션맨이라 불렸던 드럼의 강수호, 베이스 기타의 이태윤, 전자기타의 함춘호 님과 함께했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어서 그런지 제게 ‘첫 작업’이라는 게,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주거나 전환점을 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녹음실의 상황, 그리고 같이 연주했던 연주자들은 생각이 나는데, 아쉽게도 어떤 프로젝트였는지, 누구의 음반 관련된 녹음이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대학 초년이었으니 98~99년 사이였는데, 음반에서나 볼 수 있던 이름의 당대 최고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해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신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재의 '프로듀서 최영호' 하면 KBS 예능 중 여러 가수가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가 떠오릅니다. 처음 음악 편곡작업을 하게 된 그 시작은 어떤 무대였나요? 98년 프로연주자로 데뷔한 후. 연주를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명 작곡가 그리고 프로듀서와 인연을 쌓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고성진 작곡가가 2003년 즈음, 제게, ‘편곡도 잘할 것 같다’라고 하시며, 한 음반에 들어갈 곡의 편곡기회를 주셨습니다. 경험과 재미 삼아 했었던 편곡에 대한 대중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평가가 좋았고, 이후 편곡 의뢰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곡 의뢰를 비롯해 음반 제작에 대한 의뢰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맺게 된 가수들과의 인연은 방송편곡 작업으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인연이 인연을 부른다고 할까요? 첫 ’불후의 명곡‘ 편곡작업은, 방송이 처음 편성되었던 2011년, 시즌1 시절, SG워너비 이석훈 씨의 부탁을 받아서 하게 된, ‘봄날은 간다’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서는 매주 출연 가수가 바뀌듯, 편곡자도 바뀝니다. 저 역시 고정 편곡자가 아니지요. 출연이 확정된 가수의 해당 기획사는, 소속 가수의 무대를 맡아줄 편곡자를 직접 찾아 의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게 우연인지, 저와 인연 있는 가수들이 자주 출연하며 함께 무대를 꾸미다 보니, 제가 ‘고정 편곡자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한 가수가 일 년에 한 번 출연하게 되더라도, 제가 50명의 가수 작업을 해주다 보면, 매주 나가게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제가 작업한 무대를 보고, 의뢰가 또 들어와서 새로 작업하는 가수도 생기다 보니, 점차 의뢰 횟수가 늘어나, 한주에 두 팀 이상의 가수에게 의뢰가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작곡과 편곡의 경계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단순히, ‘가락을 만드는 사람’을 작곡자라 하고, ‘이미 존재하는 가락에 덧대 음악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편곡자라 했지요. 쉽게 말해, 음악을 전혀 할 줄 몰라도, 입으로 ‘흥얼흥얼’하며 만든 곡을 만든 사람을 ‘작곡가’라 칭했기에, 대중음악계에는 악보를 읽을 줄 모르고 화성학도 모르는 작곡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락’이라는 것에 음악을 입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편곡자들이 했었지요. 조금 진지한 얘기를 하자면, 그래서 과거엔, 음반 시장에서 작곡가보다 편곡가의 위상이 훨씬 더 컸고, 그에 비교해, 저작권 차원에선 작곡가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다툼의 여지도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가락만 만드는 사람을 작곡가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BTS의 ‘DNA’를 아무 반주 없는 상황에서 가락만 부른다거나, 혹은 통기타로 연주하며 누군가에게 들려준다 생각해보시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합니다. 현시대의 대중들은 이미 그 음악의 intro(전주)에 나오는 선율, 악기의 음색 등에서 곡에 대한 매력과 존재를 느끼기에, 가락뿐 아니라, 곡 전체를 만드는데 ‘기여’를 한 사람도 작곡가라고 칭합니다. 가락을 만들어 내는 능력과 그 가락에 얹힐 음악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을 작곡자라 하며, 그 두 가지의 역할 특화되어 나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코드나 비트 등, 음악만 만들어 내는 ‘트랙메이커’와 그 음악 위에 이제 가락을 작곡하는 ‘탑라이너’입니다. 국내의 SM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대형 기획사들을 통해 이미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송캠프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작곡자들과 국내 작곡자들을 한곳에 모아 일정 기간 작곡을 하고, 그 기간에 나온 곡들을 국내 유명 가수들과 기획사에 런칭하는 시스템입니다. 작곡가의 기준이 나누어지면서, 편곡의 개념 역시 과거와는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창작곡이 아닌, 바로 ‘재구성’라고 하여, 이미 존재하는 원곡을 새롭게 재해석 하는 것입니다. 리메이크 시에는, 가수마다 각자 지닌 개성이 다르므로 편곡작업을 할 때는 그 가수의 성향과 특징 파악이 매우 중요합니다. 동시에, 원곡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인지하고,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살리고, 바꿀지, 범위의 계산 등 멀리서 큰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원곡을 망쳤다는 원성과 비난을 살 경우가 많습니다. 작업 기간은 곡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일이 많을 땐 1주일에 4곡 이상도 해본 적도 있어요. 그러나 평균적으로 한 곡당 1주일 정도 걸립니다. KBS 예능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를 통해, 지난 몇 년간 출연하는 수많은 가수의 음악 편곡을 담당하시면서 '최다 연승기록', '최다득점기록', '왕중왕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기록을 세우고 계십니다. 매주 방영되는 만큼 매주 기분도 색다를 것 같습니다. 우선은, 이제껏 제 부족한 음악을 잘 표현해준 수많은 가수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인 시간과 음악적 노력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기쁘기도 합니다. 창작이란 ‘영감’(靈感) 을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게 그런 ‘영감’을 허락해주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통해 편곡한 많은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명곡은 소향 씨와 함께한 'you raise me up'입니다. 음악적으로 신경을 많이 썼기에 작업 시간도 오래 걸렸고, 그만큼 만족스럽게 나온 무대이기도 합니다. 소향 씨가 당시 폐렴으로 노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도로 의지하고, 독려하며 작업에 임했던 기억이 있어, 기독교인인 저에겐 더욱 의미가 있는 곡입니다. ‘불후의 명곡’은 예상치 않았던 훗날의 정말 많은 작업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고마운 방송입니다. 그동안 다수의 경연 방송에 참여했지만, 유독 ’불후의 명곡’을 통해 보여준 제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 연결되고, 파생 된 프로젝트들이 매우 많기에 정말 고마운 프로이지요. 특히, 제가 예전엔 음악적 기능에 집중했다면, 이 방송을 통해 관객, 혹은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중요함, 그리고 그 힘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프로그램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닌, 시선이 집중될 수 있게 구현해야 하는 음악의 형태이기에, 곡의 가사나 내용이 마치 생동감이 넘치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연습하고, 터득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의도치 않게 뮤지컬 작업도 하게 되었고, 다른 음악 작업 때도 듣는이들에게서 더 큰 공감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 작, 편곡, 프로듀서 외에 가수 테이와 함께 '핸섬피플'이라는 밴드 활동도 하고 계십니다. '핸섬피플'의 소개 부탁드릴게요. 2005년, 테이 3집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2곡에 참여했는데, 작업하는 동안 테이와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고, 좋아하는 음악적 성향도 잘 맞아, 매우 즐겁게 작업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만남이 이어져 테이 씨의 콘서트 밴드 마스터까지 맡게 되었고, 그렇게 더 많은 음악적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밴드 음악을 좋아했고, 테이 씨도 학창시절 록 밴드에서 활동했었기에, ’언제가 꼭 한번 같이 밴드를 해보자‘ 얘기를 했었는데, 실현 된 것이 바로 ’핸섬피플‘입니다. 밴드 이름을 처음 정할 때 후보가 둘이 있었는데 이름은 ‘브로큰보이즈’와 ‘세컨플로어’였습니다. 고장 난 소년들이란 뜻의 ‘브로큰보이즈’란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완해주며, 조금씩 완성되어 가자’라는 의미였고, ‘세컨플로어’는 실제 홍대에 있는 어떤 2층 카페 이름이었는데 그냥 어감이 좋아서 후보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적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부정적인 말이나 단어가,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배워왔고, 그게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았나 봅니다. 그래서 평소에 아무리 속상해도 스스로 자책하는 말이나, 자기 비하하는 말은 항상 인지하고 속으로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 저에게 ‘브로큰’이라는 단어와 ‘세컨’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에 와닿지 않고, 조금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테이 씨와 회사에서 아무리 설득해도 저는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그걸 답답해하던 테이 씨가 홧김에 ‘그럼 그렇게 긍정적인 단어로만 해야 하면 핸섬피플로 하던가!’라고 던진 말에 제가 바로 ‘오케이!’를 외친 게 팀명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긍정적인 이름이라 매우 마음에 들긴 하지만, 조금은 민망한 이름이라 추후 굳이 팀명에 대한 의미라는 게 외모가 잘생겨서 ‘핸섬’이 아닌 음악이 ‘핸섬’하다는 설명이네요. (웃음) 여러 다른 인터뷰 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테이 씨는 정말 성품과 인격이 잘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소위,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고 할까요? 어떤 이들은 서로 간의 윈-윈 하는 비즈니스를 위해 단기간 예우를 갖추고, 도움을 주는 등 잘할 수는 있으나, 삶에서 영향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오랜 기간 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옆에서 바라본 테이 씨는 항상 주위 지인들을 돕고 챙기는 사람입니다. 의리 차원에서 초창기 멤버들을 챙기고, 오랜 기간 큰 손해를 감수하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을 오랜 기간 지켜본 1인으로써 테이 씨는 정말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밴드 ‘핸섬피플’은 스타일리쉬한 음악을 하는 대표적인 밴드로 인식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마룬파이브 첫 내한공연 당시, 오프닝무대에 출연제의를 받았었고, 첫 싱글인 ‘shall we dance'를 발표했을 땐, 팝가수 에릭 베넷의 극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싱글앨범 3장과 정규앨범 1장을 발표했으며, 들국화 리메이크 프로젝트 음반에도 ’세계로 가는 기차‘로 참여했습니다. 또한, MBC ’나는 가수다‘의 방송에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고, 국내 최대 EDM페스티벌, ’UMF‘에도 초대받아 무대에 섰었습니다. 테이 씨의 군 복무로 인해, 2011~2012년까지 2년 동안만 활동했으며, 다시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성결대, 서경대, 백석예술대학에서 제자이자, 후배, 미래의 동료가 될 이들을 양성하고 계시는데요. 대중음악계의 종사자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현재 성결대 실용음악과에서는, 프로덕션에 관련된 전반적인 과정을 배우는 ‘세션레코딩’, 편곡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편곡법’, 앙상블에 대해 배우는 ‘라이브퍼포먼스’ 등의 수업을 맡고 있으며, 서경대 실용음악과는 학부와 콘서바토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학부 보컬과 작곡 전공자들의 전공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음악 감독 활동이 주 역할이지만, 연출 활동경력도 상당하여, 백석예술대에서는 음악 관련 과가 아닌 공연기획과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공연연출’ 수업을 맡아 방송 및 콘서트 PD 및 감독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3명의 제자가 실제 필드 연출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최근까지 ‘워너원’, ‘지창욱’, ‘GOT7', ’소리바다어워즈‘ 등의 큰 공연들에 연출을 맡아 활동 중입니다. 가수를 꿈꾸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기고, 대형 기획사에는 몇십 명, 몇백 명에 이르는 연습생들이 있습니다. 매년 연예계 관련 학과의 입학 경쟁률은 치열해져 갑니다. 그 사이, 대중음악계는 그 어느 곳보다 혹독합니다. 하지만, 무대의 크기, 장소, 모인 관객 수, 그 모든 것을 넘어 그저 노래하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면 가수를 해도 됩니다. 초반에는 누구나 잘 버틸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버팀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계 때문일 수도 있고, 본인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정신력 문제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땐 꿈이 어디에 있는지,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연예계에서는, 사람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을 소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특히, 음악계에서는 그것이 아주 오랜 기간 (수십 년이 될 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후발주자들이 먼저 대중의 인지도와 인기를 얻는 성공을 이루었을 때 받는 상대적 박탈감은 매우 큽니다. 그러나, 큰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그게 평생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지요. 아이돌을 포함해 아무리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탑가수들도 대부분 수십 년이 지나면 찾아주는 이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그때도 음악 자체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며, 그 외적인 것에 집착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하게 됩니다. 주위에 보면 소위 ’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지요. 음악도 충분히 취미처럼, 혹은 그 이상 준 전문가처럼 활동하거나,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 결정인 만큼, 가수가 되고 싶거나,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본인이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시기를 조언합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꼭 대중음악계라고 지칭하기보단 삶에서의 자세를 항상 강조합니다. 혼자가 아닌 여러 분야의 기술을 가진 사람과 동조하는 만큼,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같은 동종업계에서 특출나는 실력과 영향력을 갖추어 특별한 권한과 혜택을 누리고 싶다면, 그만큼 특별하게 노력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인들과의 경쟁이 아닌, 같은 재능과 감각을 가진 특정인들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졸릴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여가도 적절히 즐기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매우 당연하며, 20대가 더욱 즐겁게 누릴 수 있는, 그 시절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했듯,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평범한 또래들이 다 하고 있는데 본인 또한, 이런 것들을 다 누리면서, 특별한 지위와 특권까지 얻으려 하는 것은, 그 발상 자체부터 잘못됐다고 봅니다. 돈도 많이 벌고, 또래 집단에서 흔하게 얘기하는 ’넘사벽‘ 실력을 갖추어, 프로세계에서 활동하며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명예를 누리고 싶다면, 저는 ’그만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밤새며 도전하는 사람보다는, 매일 밤새는 사람이 더 좋은 실력을 갖출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은 경쟁에서 살아남아, 많은 곳에서 찾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스타 작곡가들 인터뷰 영상이 꽤 많은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핵심 내용은 비슷합니다. ‘실력을 갖추는데 지름길은 없다.’, ‘지하작업실에서 수년간 나와 본 적이 없다.’, ‘죽기 살기로 하는 방법밖엔 없다.’ 등등 인터뷰 중 실력향상 방법에 대한 대답들과 저의 생각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된 길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방향성을 알려만 주는 거지요. 그저 음악을 자체만으로 즐기며 할 사람과, 특별하게 탁월한 실력을 갖추기 원하고, 특별한 혜택을 누리길 원하는 사람에 관해서요. SNS를 통해 성실한 남편, 그리고 육아대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행사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참가하는 등, 가족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는데요. 가족은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현재의 아내와의 첫 만남은 교회에서였습니다. ‘교회 오빠’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당시 아내는 제게 ‘교회 누나’였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제가 꿈꿔오던 이상형을 만났고, 정말 열심히 따라다녔죠. 그러나 당시 아내는 매우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에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1년여의 구애 끝에 겨우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 복무는커녕,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사회초년생인 저를 애인으로 받아준 게 고마워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아내가 깼습니다. 아내 덕에 저의 성품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저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연애의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상대방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어요. 또한, 저는 매우 차갑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성향을 지녔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바람만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만큼 감성적이고, 따뜻하며,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예요. 그런 아내 입장에서는 저와의 만남이 매우 힘들었을겁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저를 오랜 기간 참고 기다려주며, 서로 배려하고,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몸소 보여주고, 실천했습니다. 특별히 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대부분 제게 맞춰줬어요. 제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처음엔 아내를 위해서 했던 노력인데, 결국, 그런 노력이 동료들과 함께 협업해야 하고, 대부분 공동체나, 조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저에게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어요. 저는 그렇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고, 잡아주고, 이끌어준 아내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유전자가 아이들에게는 전혀 없는 듯합니다. 두 아들 모두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잘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나마 첫째는 음감이 좋은지 한번 들은 노래를 곧잘 따라 하며, 둘째는 음악이 나오면 리듬을 타긴 하는데 보통 평범한 아이들의 수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어떤 직업이든 원하는 것이 사회적이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저는 자녀들이 솔직히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그저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대부분 부모님이라면 같은 생각이실 것 같습니다. 저는 삶에 대해서는 교육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녀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의에 대해 강조하는 편입니다. 추가로 정직에 대한 부분도 엄중히 가르칩니다. 이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덕적 삶을 강요하는 차원의 접근이 아닌, 한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관련된 방향성이기에, 반대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본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람에 있습니다. 가족이 삶에서 부여하는 의미는 제 유일한 안식처, 영원한 제 편, 제 삶의 목적 등, 결국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2018년 5월 12일 방영된 KBS '불후의 명곡'에서 소향이 부른 'You Raise Me Up'은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최영호 또한, 본인이 프로그램을 통해 편곡한 수많은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으로 꼽는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이제껏 그동안 음악 인생계획에 없었던, ‘음악 감독’이란 역할을 최근 몇 년간 부쩍 많이 맡게 되었습니다. 연주자,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와는 또 다른 포지션인데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꿈은 언젠가 꼭 한번은 모든 국민이 한 번쯤은 듣고, 부를 만한 ‘국민히트곡’을 써서 ‘히트 작곡가’ 타이틀을 달아보고 싶습니다. 그 전에, 어떤 역할이 맡겨지더라도, 일의 결과보다는, 정직하고 성품이 바르며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책임감 있는 음악가가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무명 음악가며, 부족한 저에게 이런 소중한 인터뷰 기회를 주신 [Avec G] 미디어 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음악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기도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독자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최영호, KBS 영상 제공: KBS K-POP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가수 g.o.d의 '길'이라는 곡의 가사이다. 수많은 어린이들은 세상을 알아가며, 청소년이 되며, 성인이되며, 어제의 꿈은 오늘 바뀌고, 내일의 꿈은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뀐다. 진로는 평생이 걸려있기에 소중하고, 중요하다. 반평생을 '진로, 상담 연구'에 헌신한, 진로상담자 김이준 교수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로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 전문적인 조력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진로상담사 김이준입니다. 저는 진로 전문가로서, 진로와 관련된 상담, 교육, 연구, 개발 등을 통하여 생애발달 측면에서 진로와 관련된 주요 논점을 다루고,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로 분야 전문가이시고, 진로교육 관련 강의를 주로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본인 역시 학창 시절,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격동의 시기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매우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예술중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열여섯 살 될 때까지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학도였고, 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성적이 잘 나올 때면, ‘의대에 진학해볼까?’라는 순진한 생각도 하기도 했었을 만큼, 명확한 꿈은 없었습니다. ‘흥미’, ‘적성’, ‘가치’, ‘강점’ 같은 단어들은 생소했기 때문에, 성적이 높으면, ‘명성 있는 대학에 진학해야지’, ‘점수 맞는 학과에 가야겠다.’, ‘이런 소망이 다 이루어지면, 인생은 행복할 것이다’ 같은 무척 단순한 생각을 했었고, 딱 그 정도의 고민만 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기 때문에 맨 처음 진학한 과는 건축공학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공학의 공부를 깊게 하면 할수록, 저에게는 어렵게 다가왔고, 흥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전공이 결정된 상태였기에, 내적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대로 이어 나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돌고 돌아, 적성에 맞는 전공인 심리학을 공부하기까지 굉장히 고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심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심리학과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이 재미있었으니까요. 묘하게도 건축과 심리학, 이 두 학문이 매우 동떨어진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비슷한 부분도 많습니다. 건축은 예술과 과학적이 접목된 분야이고, 심리학도 예술적이며, 과학적인 분야라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은 엔지니어로서 갖춰야 할 기본기가 필요한데, 그런 부분이 저에겐 어려웠습니다. 심리학 역시 측정 및 연구방법이 어렵긴 하지만, 몇 개의 과목은 빨려들 듯 재밌기도 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상쇄시켰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과거의 모든 경험도, 미래의 디딤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심리학 학사 졸업 후, 심리학에도 여러 분야가 있지만, 심리상담교육 분야로 진출하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제도의 인지도가 낮고, 도입되지 않았던 시기였는데요. 어떠한 계기로 심리상담과 생활지도를 대학원에서 전공하게 되셨나요? 심리학은, 인간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깊이 연구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배우는 것 모두가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꿀맛 같은 공부가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며, 공부에 푹 빠져 보냈고 제가 인간의 심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임을 그때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뒤늦은 공부 덕분에 나이에 맞는 인간관계도 없었고 안정된 위치에 놓여있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으론 불안했고, 미래의 전망에 암울했으며, ‘비전’이란 단어는 현실에 와닿지 않는 공허한 낱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공을 파고들면서, 제 인생 중 가장 큰 화두였던 ‘진로’를 찾는 사람의 심리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처럼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적성을 찾아 헤매는 학생들에게 진로에 대한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성인들에게 힘이 되어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없던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진로 의사결정은 많지 않은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이직의 시기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은퇴한 중년의 삶에서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서 우리 곁을 맴돌게 된다.’ 누구나, 언젠가는 한 번쯤 돌아보게 되는 진로에 대한 고민입니다. 진로상담자로서, 저는 중요한 시기마다 내담자들과 상담하며, 그들의 가까운, 또는, 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열망이 생기고 나니, 학업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이 타올랐습니다. 심리학에는 여러 가지 세부 전공이 있고, 그중 ‘상담심리’는 제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기도 했고, 상담을 통해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상담은 사람의 심리가 변수가 많듯, 연구와 발전이 끝없는 분야이기에, 공부할 양은 대단히 많았습니다. 존경하는 은사님들의 조언도 있었지만, 저는 자연스럽게 학업의 연장을 선택하며,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연한 기회에, 현장에서 청소년 진로상담 그리고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병행했는데, 그런 실전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진로문제는 제가 풀고자 했던 오랜 시간 저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관심주제가 ‘진로’이다 보니, 저는 석사 학위 논문도 진로 분야에 대해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진로상담’은 ‘심리상담’ 안에 주로 ‘진로’라는 주제를 다루는 전문 분야입니다. 제는 석사-박사과정 당시, 세부 전공으로 진로를 전공으로 선택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상담’이라고 하면 아동, 청소년, 부부와 같은 대상별 상담이나 우울, 폭력, 트라우마 등 주제별 상담을 떠올리시는데, ‘진로상담’ 역시, 내면의 우울, 정서적인 부분 등을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이 진행하며, 심리상담과 동떨어진 분야는 아닙니다. 저는 박사과정 진학을 꽤 어렵게 결정을 하였습니다. 저는 상담을 배웠고, 수련을 받을 때 저를 분석해 주신 선생님과 함께 이 전문 분야에서 오랜 작업을 했었습니다. 전문성을 갖춘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수련을 받고, 상담자 본인을 되돌아보는 교육분석을 받게 됩니다. 이 시간이 굉장히 길지요. 제게는 이 과정이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박사과정은 전에 취득한, 학사와 석사와 비교하여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니까요. 시간, 비용, 연구의 방향성 등. 진로와 관련한 수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저 자신의 진로상담을 받으면서,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박사과정에 진학해서는 더 열심히 진로상담 관련 분야를 공부하며, 연구에 몰두하였고, 포스트모던 진로이론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제가 중점적으로 활동하는 일은, 변화하는 시대만큼 진로상담이론들도 진화하고 있기에, 시대에 맞는 진로상담이론을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먼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겠지요. 저는 환경에 잘 조율되는, 진로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로상담의 기법을 향상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학위 취득 후, 현재 진로교육전문가와 진로상담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분야에 대해 생소하실 독자분들을 위해, 직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진로상담자는 상담을 전공하고 세부 전공으로 진로를 선택하여 그와 관련된 수련을 해 온 사람들입니다. 진로교육전문가는 교육학을 전공자를 비롯해 인적자원개발 등을 배경으로 한 경영학 전공자, 평생교육 관련 분야에서 고용 및 직업에 대해 연구한 배경이 있는 사람, 그 외, 공학, 금융, 예술 등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교육자이면서도 진로상담자이기 때문에, 진로상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때에 따라, 교육의 일환으로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구직과정에서 이력서를 쓰거나, 조직의 정보를 얻어야 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서류작성이나 면접 준비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의 구직기술 관련 교육을 할 때도 있습니다. 진로는, 자신의 내적 부분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외부 환경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므로, 진로상담자는 개인 심리내적인 부분과, 개인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대해서도 민감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정확하고, 현실성 있는 진로상담을 위해, 현 사회의 고용환경, 고용정책, 구직과정, 구직기술, 직업환경, 네트워크, 정보 활용 등을 익히고 배워야 하므로 진로 전문가로서 심리상담을 뛰어넘어,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심리적인 부분, 교육적 측면 모두가 필요하지요. 저는 상담과 교육, 두 개의 분야를 공유하는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인 셈입니다. 기존에는 청소년,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진로상담이 주였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 직장인뿐만 아니라 중장년층, 시니어 계층으로까지 그 나이 대상과 분야가 확대되면서, 경력을 기반으로 한 진로상담을 의뢰하는 분들도 부쩍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진로 분야의 전문가 중, 재교육을 필요한 하는 대상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진로상담자로서 활동하며, 내담자의 변화를 지켜보며, 저도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조금씩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것을 체감할 때의 기쁨이 매우 큽니다. 개인의 환경에 따라. 시급한 구직 때문에 저를 찾아올 수도 있고,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용기를 얻기 위해 상담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여러 차례의 실패로 낮아진 자기 효능감을 높이고자, 상담이 필요할 수 있겠지요. 각자의 상황과 수준에 맞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조력 기술로 개입하는 것. 그것이 진로상담자의 역할입니다. 2012년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미래 코칭>을 시작으로, 진로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집필하셨습니다. 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진로상담자이기 때문에 특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삶 전체에서 진로만큼 중요한 일도 없으므로, 자신의 진로를 찾는 진지한 탐색과 노력, 그리고 고민이 수반되기를 바라며 몇 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예컨대, 제가 집필한 책을 통해 진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를 얻을 수 있다면, 개인의 진로문제를 고민하고, 대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2012년 출판한 첫 책,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미래 코칭’은 현장에서 10년 정도 상담했던 내용을 쉬운 설명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이 책은, 학부모와 교사들이 읽고, 자녀와 학생들 지도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기대로 썼던 책입니다. 제가 처음 집필한 책이었는데, 대중들로부터도 기대 이상의 좋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운 좋게, 2017년, ‘진로 고민하고 답하다’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새롭게 출판되기도 하였기에, 제게는 각별한 책입니다. 2014년 출간된 ‘청소년진로역량워크북’은 일전에 없었던 새로운 진로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시작된 작업이었습니다. 또한, 기존 프로그램을 수정 및 보완하여 소개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필 과정은 특별히 길었고,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추억이 많은 책입니다. 이 ‘청소년진로역량워크북’은 4명의 저자가 2주일에 한 번씩 함께 모여, 1년 6개월가량의 학습 스터디를 해나가며 작성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각자 맡은 주제만 나누어 작업하고, 합치는 방식의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큼 끈기와 열정이 필요했습니다. ‘초중고 대학교에서 어떤 진로프로그램이 효율적일까?’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2019년에 출판한 ‘어른들도 진로가 고민입니다’라는 제가 성인들을 만나 진로상담을 하면서 느낀 다양한 경험을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현장 경력자들에게도 지침이 될 수 있게끔, 조금 어렵더라도 진로이론을 통한 사례들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대중서가 될 거라고 생각지 않고 집필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께 호평을 받아서, 처음엔 무척 어리둥절하기까지 했지만, 그만큼 ‘진로에 대해 누구나 고민하고 있는구나….’라는 현실을 다시금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책을 통해 줄곧 강조하는 바는, 진로문제에 ‘마술적인 해답 같은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자신이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성찰해 보는 과정이 진로이며, ‘삶을 걸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우리의 진로’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진로교육전문가' 및 '진로상담가'로 활동하며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 같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나요? 내담자가 자기답게 삶을 구성해 나가고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볼 때 같습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낙담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볼 때, 저는 감동하고, 어떤 때는 뭉클하기도 합니다. ‘원하던 일을 찾았어요’, ‘ 합격했어요’, ‘저 잘되었어요’ 등의 메시지는 기쁨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행복한 소식이지만, 제 마음에 퍼지는 보람과 행복함은, 성취나 목표달성보다는 조금 다른 지점에 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각자의 아름다움을 스스로가 발견하고’, ‘삶을 충실히 누리는 모습을 보게 될 때’라고 할까요. 아주 어린 시절에 상담했던 누군가가 성인이 되어 자기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당당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보람됩니다. 지금까지 본인을 이끌어준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저의 좌우명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의미의 사자성어와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자칫 미련한 시도 같아 보이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결국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성급하게 빠른 길로 가려고 하기 보다, 정도(正道)를 따라 한발씩 옮겨가다 보면,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눈앞의 이익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저만의 소신 있게, 제 본분을 지켜가는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 삶에 영향을 준 롤모델은 너무나 많습니다. 한 분야에서 자신을 바쳐 최선을 노력을 다하는 분들은 모두 저의 롤모델이십니다. 또한, 저는 훌륭한 선생님들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사과정, 박사과정 당시, 은사님들이 계시고, 좋은 선후배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들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보통 새해가 되면 두 가지 정도 계획을 떠올리는데 매년 비슷합니다. 새로운 친구 세 명 사귀기, 운동하기, 매일 공부하기 정도…. 올해는 덧붙여, 한 권의 책을 또 집필하기 위한 기초 조사 중이고, 학술 연구도 시작하려 합니다. 책이나 논문을 집필한다는 것은, 제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정리한다’라는 개념도 있지만,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연구와 실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용한 자료를 남겨주고픈 바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저는 의미 있는 책, 훌륭한 논문을 집필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도 많이 하고, 연구도 많이 해야겠지요. 이런 계획 외에 버킷리스트랄까, 그런 소원,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대화로 청취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중매체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터놓을 수 있는 개별적인 진로상담은 어렵겠지만, 진로 관련 교육의 가능성을 예상해봅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분들께 진로 도움을 드렸으면 하고요. 나머지는 제 직분대로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상담하려고 합니다. 제가 저의 분야에서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면, 좋은 제안을 받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이 오기도 하니까요. ‘진로’는 저에게 언제나 미지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다가가도 저만치 물러나는 까칠한 대상이며, 어설픈 자만심을 허용하지 않는 어려운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세월이 흘러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잡히지 않기에 끝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은데요. 너무도 어렵지만, ‘진로상담자’라는 저의 직업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내적인 가치를 지켜나가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진로문제가 얼마나 어려운데 상담한다고 달라지나?'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단 한 사람의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이준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최고의 형사 분야 변호사, 교수, 직능단체 위원, 스타트업 기업가... 수많은 변호사 준비생들은 그의 저서를 교과서 삼아 공부하고, 일반인들은 그가 만든 무료 앱으로 도움을 받는다. 그의 SNS은 법조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사이다처럼 터트리는 것으로 인기가 높다. 그는 바란다. 다른 어떤 것보다, ‘법조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김정철 변호사'로 기억 되기를.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법무법인 우리 대표변호사 김정철입니다. 저는 2013년부터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고, 올해 2학기부터는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겸임교수로 부임하여 로스쿨 학생들에게 형사소송 실무를 강의할 예정입니다. 형사법 박사로, 변호사로서는 형사사건을 주로 담당하였고, 20여 년 가까이 학생들에게 형사법을 강의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사 전문변호사로 인지도가 조금씩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또 다른 직함은 ㈜ 로팡의 대표이사입니다. 저는 소송사건의 승소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후, 특허를 출원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이미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에서 각 특허취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미천한 수준이지만 향후 대한민국도 미국처럼 리걸테크 분야가 반드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스타트업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시작으로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법률 서식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안드로이드 앱을 개발하여 배포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변호사 차용증’ 앱입니다. 저는 법무법인을 설립하여 이끄는 대표변호사이기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면서, 스타트업 회사를 막 시작한 새내기 창업가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직책으로 여기는 것은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법과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법과대학생들이 입학하면서 사법고시 준비에 돌입했으니, 7년 만에 합격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현재 적성을 못 찾고 방황하거나, 그저 막연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청년들이 많습니다. 교수님의 합격 전까지 고시 준비 시절은 어땠나요? 저는 법과대학에 입학 후 아무런 생각 없이 동기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는 것에 흠뻑 빠져 있었고, ‘법대문학회’라는 학회 활동을 통해 선후배들과도 가깝게 친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지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대학 3학년 때까지는 학교 수업만 간신히 들어갔고, 실제 공부를 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던 1년 선배가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제야, ‘아, 나도 사법시험 준비를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전 그때 재학 중 합격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저랑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당구장이 하나 있었는데, 친구들과 저는 거의 그 당구장에 살다시피 했었습니다. 당구 하고, 술 마시는 것이 일과였고, 사법시험은 점점 머리에서 잊혀 가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학교에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이 붙거나, ‘주변에 누가, 누가, 합격했다더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제야 잠시 법대에 들어온 이유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저는 사법시험 1차를 98년도에 합격했습니다. 재학 중에 저도 1차에 합격했으니, 신나게 놀고, 시간 보낸 것에 비교해 너무 운 좋게 1차를 빨리 합격했습니다. 당시에 2차는 주관식 시험으로 총 7과목의 법 과목을 치렀는데, 7과목 중 행정법만 0.5점 차로 과락을 맞았고, 형사소송법은 거의 최고점에 가까운 67점인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만약, 행정법 과락만 면했으면 소위 동차 (1차와 2차를 같은 해에 붙는 것) 합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법고시 시험을 우습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오만함이 장기간의 신림동 고시 생활로 접어들게 했습니다. 사법고시 1차 시험 합격자에게는 2차 시험 기회가 다시 한번 부여되기에, 다음 해에 다시 2차 시험을 다시 치렀는데,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답안도 잘 썼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사법시험은 2차에 두 번 낙방하면 다시 1차 시험부터 준비해야 해서, 제가 가진 좌절감은 너무 컸습니다. 그 두꺼운 헌법, 민법, 형법 객관식 문제집들을 다시 공부하고, 선택과목 등도 다시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은 제게 정말 크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2000년, 2001년 두 번 연속으로 1차 시험에 아슬아슬하게 1점 차 내외로 낙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2002년, 3번째 도전 만에, 다시 1차 시험에 합격하였고, 다시 2차 시험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치루는 2차 시험이었지만, 준비 부족으로 또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4번째 2차 시험을 낙방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정말 저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배수진을 친다‘라는 생각으로 2차 시험에 임했습니다. 2차 시험이 이루어지는 4일간 내내, 저는 하루 2시간을 채 잠을 자지 않고, 밥도 거의 먹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까지 공부했던 모든 내용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미친 듯이 정리한 교재를 읽고, 또 읽어보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이때가 돼서야 오만했던 98년도의 저의 모습은 사라지고, 시험 앞에 겸손한 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몇 개월 후, 제45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의 소식을 듣고, 기쁨을 느끼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이후부터 가정의 경제 형편이 급격히 나빠진 이유로 저는 대학에 합격한 후에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 재학 중에도 과외를 계속해야 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신림동에서 공부에만 전념하여야 했지만, 제 생활비뿐 아니라 부모님의 생활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돈을 벌기 위해, 99년도 두 번째 2차 시험 낙방 후,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막 대학을 졸업하여 스물넷 밖에 안 된 어린 제가, 그것도 사법고시에 합격도 못 한 상태에서 고시학원의 강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수강생 대부분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고, 저보다 오래 공부하신 선배님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법시험 공부를 놓을 수 없었고, 다른 직종의 아르바이트를 하면, 사법시험 공부에 소홀해질 수 있었기에, 사법시험 공부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최적의 길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미 과외를 하면서 학생들의 성적을 많이 높여주었던 경력 덕에, 부모님들로부터 과외비를 두 배로 올려 줄 테니 계속 과외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신림동 학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었습니다. 당시, 3살 차이 나는 제 친동생(김정호, 현 ㈜ 노크 대표)이 아직 대학도 졸업하기 전인데, 책을 쓰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아직 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책을 쓴다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 출판사와 계약까지 마치고,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출간된 책은 2001년 비비컴 출판의 ‘제4의 물결 디지털 영상 제작과 편집’으로 현시점에도 영화, 방송, 영상 장비, 편집 등 영상 디지털 계에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 편집자 주).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어 신림동 출판사에 이메일로 간략한 원고를 만들어 ‘이런 식으로 형법 교재를 출간하고 싶다’라고 투고를 하였는데, 정말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책을 써보라는 권유를 하였습니다. ‘책이 팔리기 위해, 강의할 학원도 연계시켜주겠다‘라면서요. 당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공부를 지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고, 제가 가진 환경에 대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지만요. 그러나, 전 '합격'이라는 희망은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다행히도 저에게는 누군가에게 지식을 잘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꾸준한 강의를 했던 덕에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면서, 공부를 계속해나갈 수 있었고, 저를 믿어주는 가족, 그리고 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려고 발 벗고 나서는 최고의 친구가 주변에 있었기에, 부족했던 환경은 제게 장애물이 아닌, 미래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림동에는, ’합격 전, 강의한 경력 있다면, 실제 시험에서는 합격하지 못한다‘라는 일종의 정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강사들이, 강의하면서도 사법시험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본인이 강의하는 과목에만 집중하니,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받기 어렵고, 강의에 신경 쓰느라 실제 사법고시 준비에 집중하기 어려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명강사로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던 시점에 제가 합격하였다는 소식은 학원가에서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아껴주시던 당시 학원 원장님을 비롯한 동료 강사분들은, 제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강의하면서, 공부를 지속하였던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저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합격 소식을 전화로 들으셨는데, 이때 약국에서 약을 사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합격 소식을 듣고, 생면부지의 약사를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셨다는 뒷얘기를 들었습니다. (웃음) 예전에 한 예능프로에서 개그맨 이경규 씨가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함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굉장히 와닿았습니다. 짐을 지고 있을 때는 너무 힘들지만,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면서, 다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았다면 강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강의 경험이 없었다면, 형사법적 이론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현재의 형사 전문변호사로서 지금처럼 사회적으로나, 분야에서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주변 친한 후배들에게, ‘가난은 사람을 성공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는 현시대에, 저는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금에서는 싹이 트지 않지만, 흙에서는 싹이 튼다’라고 말입니다.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을 모두 형사 및 형사소송법으로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분야가 다름 아닌 금융투자, 투자사기인데요. 특별히 이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형사법은 형법과 형사소송법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형법은 죄와 형벌을 다루는 실체법으로, 각 죄의 구성요건과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은 절차법입니다. 어떤 죄를 범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혐의가 생기어 증거를 수집하는 수사부터, 기소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사재판의 절차를 규정하는 법률입니다. 저는 사실 법과대학에 진학한 이유가 1995년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이자 일명 ‘귀가시계’라고 불리기도 했던 ‘모래시계’ 보고, 검사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대를 가서도 검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사법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되었고, 형사법 공부도 다른 법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법시험에 합격 후, 사법연수원에서 검사시보를 해보면서 형사법은 검사에게 필요한 것 보다, 수사와 재판을 받는 피의자와 피고인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형사 전문변호사로 성공해보고 싶다’라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금융사기' 및 '투자사기'에는 신규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소위 ‘돌려막기’ 사기 수법이 있습니다. ‘90일 만에 원금의 2배 수익 보장’을 내세우며, 미국 전역에서 8개월 만에 4만여 명으로부터 1,500만 달러를 끌어모은 사기범 찰스 폰지(Charles K.Ponzi)의 범행수법에서 유래되었기에 이를 ‘폰지사기’ 라고도 합니다. 금융의 특성이 일반이 잘 알기 어려운 ‘정보의 비대칭성’에 존재하기에, 사기범들은 이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을 속입니다. ‘월 3% 수익 보장, 원금보장’이라는 문구에 현혹되어, 실제 어떤 금융기법으로 수익을 거둔다는 것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묻지마 투자’를 하게 됩니다. 특히, 다른 신규 투자자들에게 받은 돈을 기존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으로 나누어주기 때문에, 실제 수익 보장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사기 수법입니다. 이전 우리투자증권의 금융투자상품(기업어음, CP) 불완전판매 손해배상 청구사건에서 첫 승소를 하면서 금융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두게 되었고, 관련 통합법률인 자본시장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의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고려대학교 법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숨투자자문 투자사가 사건이 터지면서 피해자 2700여 명을 대리하여 관련 소송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제가 박사과정 논문이었던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의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 이유는, 자본시장법 제178조는, 미국의 SEC 10B-5 RULE을 받아들여 만든 조항으로서, 사기적 부정거래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으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투자자 보호를 위한 포괄적 규정으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금융상품에 대한 설명의무, 적합성 원칙 위반 등의 소위 불완전판매의 경우에도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상의 구성요건의 해석을 시도한 논문으로, 향후 투자자를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본 조항이 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것입니다. 법과대학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2009년 '법무법인 우리'를 설립하였고, 대표변호사 3인, 구성원 변호사 6인, 직원 5인을 갖추며,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법무법인을 설립하면서 10년이 넘게 키워오면서 지켜온 가치는 무엇인가요? 법무법인 ‘우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위 판사나 검사를 거치지 않은 전관 출신이 아닌 변호사들이 모였기에, 사건을 수임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설립 초가엔, ‘우리’가 고객들에게 저희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저는 법무법인 ‘우리’가 전문성을 가지고 고객에게 충실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위 별산제(변호사들이 법률사무소의 방을 빌리는 대가로 일정의 금액을 지급하고, 변호사는 자신이 수임하는 모든 사건을 처리함)를 과감히 포기하고, 공산제 법무법인을 고집하였습니다. 법무법인 ‘우리’의 전문분야를 나누어, 분야별 전문변호사를 구성하였고, 사건을 수임하게 되면, 해당 전문변호사가 이를 담당하여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각 변호사의 전문성은 점점 높아지고, 고객들에 대하는 데도, 더욱 높은 수준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설립 10년 차인 현재, 기업 M&A, 경영권 분쟁, 상장 관련 법률서비스 등, 과거 대형법무법인에서만 다룰 수 있었던 사건들도 처리할 수 있는 중견 법무법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변호사를 의사에 비유합니다. 고객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환자와 같으므로, 이를 치료하는 변호사는 그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고, 그 문제를 다룰 때,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소신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 들어 기업자문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문을 맡은 기업들과는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로 여기며, 법률서비스와 함께 중요한 경영판단 시, 리스크 관리에 중점을 두고, 기업의 입장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자문에 임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에게 전문성은 필수이며, 제 소신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진정성’을 가지고 사건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법무법인 ‘우리’는 그 이름처럼 ‘우리’가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은, 저희 법무법인의 변호사들과 직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법무법인 우리와 고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변호사와 직원들이 즐겁게 웃으며 일할 수 있는 법무법인, 고객도 함께 웃는 법무법인으로 만드는 것이 대표변호사로서의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무법인의 전문성 강화를 기본으로, 법무법인의 변호사들과 직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복지를 지원하며, 이들이 먼저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행복한 마음은, 고객분들께 최상의 법률서비스와 함께 전달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변호사 차용증’이라는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법률문서 작성 앱을 개발하여 배포하셨습니다. 현재 무료서비스로 제공 중인 ‘김변호사 차용증’ 앱은 스마트폰 사용자들 사이에서, 작성한 차용증·각서 등의 전자문서에 전자서명법 제3조에 따라, 실제 문서에 서명한 것과 같은 효력(전자서명)을 부여하는 기능을 합니다. ‘전자서명’이라 함은 서명자를 확인하고, 명의자가 당해 전자문서에 서명하였음을 나타내주는, 전자문서에 첨부되거나 논리적으로 결합한 전자적 형태의 정보를 말합니다. 따라서, 전자적 형태로 서명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전자서명도 종이에 서명한 것처럼 똑같은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 실제로 이용자 중, ‘김변호사 차용증’ 앱을 통해 작성한 차용증을 법원에 ‘지급명령신청’의 증거자료로 제출하여 승소가 확정된 사례가 있으며, 그 법적 효력을 인정받은 바 있기도 합니다. 즉, 이 앱은 전자서명을 통해 서명자가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위조의 문제도 해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법률문서를 당사자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4차산업 혁명 시대 최대 화두 중 하나인 인공지능(AI) 기술은 우리나라 법률서비스 분야에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정형화된 간단한 법률문제는 인터넷을 통해 상담받고, AI가 관련 문서를 작성해주는 서비스가 등장해서 운영 중이기도 합니다. 북미 지역에만 이러한 리걸테크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업체만 700여 개가 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방증합니다. 리걸테크 산업은, 일반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법률서비스를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높기만 한 법률 시장의 보이지 않는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비전문가에 의한 법률 사무 처리에 대하여, 변호사법이 금지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AI 법률서비스는 그만큼 뒤처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앱을 시작으로, 모든 법률서류를 스마트폰으로 작성하는 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한, 이 앱의 가입자를 기반으로 한 플랫폼으로의 확장이 목표입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도 리걸테크 기업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앱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지만, 향후 발전 가능성을 확신하고 ‘투자’를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이 앱을 통해 아무런 금전적 배상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향후, 본 서비스의 사업적 확장성을 볼 수 있는 좋은 투자자를 만나 사업이 확장된다면, 금전적인 보상이 배에 배가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간혹 앱을 사용하시다가 제가 개발자라는 것을 아시고서, 저희 법률사무소로 문의 전화를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전화는, 어떤 한 분께서, ‘앱을 이용하여 돈을 빌려주었더니, 더 잘 갚는 것 같더라면서. 너무 편리하게 잘 쓰고 있다’라며 감사 전화를 해주셨습니다. 전 불만을 토로하시는 전화인가 해서 겁을 냈었는데, 막상 칭찬을 받으니, ‘앱을 개발해서 배포하기를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뿌듯했습니다. SNS를 통해 법원이나 검찰 등의 그릇된 행정에 대해 지속해서 소리 높여 비판하고 계십니다. 현직 변호사이자, 로스쿨 교수로서, 지속해서 대면하며, 업무를 하여야 하는, 법원이나 검찰을 비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법원과 검찰의 잘못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같은 법조인입니다. 일반인들의 경우는 법률을 잘 모르고,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인 경우가 많지만, 같은 법조인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떤 점이 현행 제도와 관행에 어긋난 것인지 등을 잘 알고 있으므로, 더 정확한 비판이 가능합니다. 같은 판사, 같은 검사끼리는 서로 동질감으로 인해 비판하기 어렵고, 변호사는 변호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법원과 검찰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문제 삼는 것을 꺼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법조계가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먼저 법조인 개개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법조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준수해왔다면, 지금과 같은 ‘법조 불신’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법조계에 대해 ‘누군가 꼭 던져야 할 질문’과 ‘해야 할 비판’은 계속할 예정입니다. 법조계가 신뢰받지 못하면, 그 안에서 생존하는 변호사 역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판사 출신 변호사가 재판장인 판사와의 친분을 이야기하지 않고, 의뢰인도 이를 물어보지 않는 세상이 와야 하기 때문이며,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미 많은 전관 출신 변호사들의 잘못된 행태들로 인해 법조계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이 생기고 있고, 의뢰인들의 인식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갈수록, 작은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더, 법무법인 ‘우리’가 대형법무법인에 견주어 뒤처지지 않은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많은 고객에게 인식시키고, 법무법인의 모든 구성원이 자부심을 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법무법인 ‘우리’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20주년을 상상하면서, 발전 방향을 다양하게 고민하고 실험할 계획입니다. 올해 10월, 제2회 우리자선골프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작년보다 더 많은 후원기업이 참여 의사를 밝혀, 성황리에 행사가 진행될 것이 예상됩니다. 이를 잘 준비하여, 개최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업강연 등을 활발히 할 생각으로 여러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저는, ‘신뢰받는 법조계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였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꿈은 글로벌 리걸테크 IT 기업의 회장입니다. 굉장한 꿈이지요? 상상해서 행복하고, 다가갈수록 빛나는 게 꿈이니까요. ‘김변호사 차용증’은 이미 설명해 드린 대로, AI 법률서비스 시장을 대비하여 기술개발에 필요한 국내 법률특허(‘승소 가능성 평가장치 및 방법’)를 2016년 취득하였으며, 작년 7월에는 일본 국제특허도 취득하였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에서의 특허취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와 뜻이 맞는 최고의 실력자들을 만나, 함께 AI 승소 가능성 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법률장벽을 낮추고,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기술은 사람을 공평하게 만든다’라는 것이 제 신념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혁신적 기술은 소외되는 사람 없이 그 기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공평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그동안 ‘형사분야의 최고 실력자’라는 타이틀로 모두에게 알려지기 위해 지금껏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김정철 변호사’가 ‘법조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라고 응원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응원과 바람들이 실제로 제가 그런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니까요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요즘 날이 무덥습니다. 다들 건강한 여름 보내시고, 가정에 시원한 폭포수 같은 웃음꽃이 만발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정철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국내 최고경영자, VIP의 죽음 위기관리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실제 상황에서 실무를 관리하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기업인 중앙의전기획의 대표! 또한, 개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며, 기회와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책과강연'의 대표! 사람의 장례를 관장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꿈을 선사하는 이정훈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하는 기획자 이정훈입니다. 자기소개하면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선명한 사회적 정의가 될 수 있는 만큼 제 직업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 덕분에 인터뷰를 제안받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한다’라는 말을 쉽게 풀어 설명하며, 진로를 소개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시지만 대학에서는 사범대학의 일어교육과를 1996년에서 2005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다니셨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저는 학창시절에 진로를 고민해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X세대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97년의 IMF 금융위기가 대한민국을 휩쓸었습니다. 당시 전 스물한 살이었고, 매일 뉴스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서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옆집의 친근했던 아저씨로 불리던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딸린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고민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97년 이후 가족들의 단란하게 둘러앉아 먹던 저녁 식사의 풍경은 사라졌고, 불 꺼진 거실 식탁은 쓸쓸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 역시 그 시절의 중심에 있었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리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채업자들의 독촉을 피해 수년간 죽은 듯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그 빚으로부터 자식들을 지켜내느라 삶이 누더기가 될 지경까지 내몰렸었죠. 동생은 공장으로, 전 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게 99년 말즘이었어요. 학교를 10년 만에 졸업한 이유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체류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고교 시절, 제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생에게 진로를 묻는다는 것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대학)’을 묻는 거니까요. 고등학생에서 ‘진정 되고 싶은 것’이란 질문은 ‘이상적’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코 ‘이성적’인 질문은 아니죠. 저는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고, 대학이야 당시에도 갈 생각만 있으면 갈 곳은 많았었으니, 진로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여유가 있었어요. 사람들도 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다 적절한 시기에 결혼하는 것이 제가 봐온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목적이 행복을 담보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았던 세상은요. 그랬었기에, 저 자신에게도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인식을 바꾼 것이 97년 금융위기입니다. 당시, 제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처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삶은 불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경제적인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사범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동국대의 장례비지니스 아카데미 과정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 후에는, 생사문화산업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셨는데요. 흔치 않은 공부를 시작하고, '교사'라는 정규직을 포기하면서 고민과 걱정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 입학 후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고, 밥숟가락 하나라도 덜자는 생각에 서둘러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복무 중에도 제대 후 돈 벌 생각만 했습니다. 일본행을 결심한 이유도 돈 때문입니다. 취학 비자를 받고 도쿄로 떠났습니다. 당시 3개월 치 기숙사비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17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2년간은 하루 두 곳 이상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습니다. 눈뜨면 일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7만 원으로 시작한 가난한 유학 생활이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의 사회인으로 길이 열리면서, 7년간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일했습니다. 유학 생활 당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배경은 물론, 인맥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한동안은 무척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순됩니다만, 그런 환경 안에서도 삶을 변화시킨 질문을 제 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평범하지만, 한 번도 저 자신에게 해 본 적이 없는,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일본어 한마디 할 수 없었던 저는, 일본 현지에서, 말 못 하는 장애가 있는 존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저 자신에게 되물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현재 ‘내가 가진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요. 당시 전 간절했고,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일자리는 곧 생계였기에 절박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면접을 할 기회가 생겼고, 감사하게도 채용이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일한 지 수개월쯤 됐을 때, 사장이 그러더군요. ‘언어도 못 하는 당신을 채용한 것은 다름 아닌 좋은 웃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면서요. 전 그때 처음, 웃음에도 ‘좋은 웃음’이 있을 수 있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장의 말을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학창시절에는 무엇을 해도 대충이었고, 삶에 대한 애착도, 꿈도 없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살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고 있단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 어느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죠. 일본에 있는 동안 후지tv에서 통·번역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철강회사에 정직원으로 입사해 2년간 직장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순탄할 것만 같았던 일상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룸메이트의 자살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겁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죽음이 제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퇴사했고, 자연히 7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룸메이트의 죽음이 장례를 사업 구상으로 직결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에서 기업 최고경영자의 회사장 장례를 몇 차례 본적이 있었는데, 제 사업을 고민하던 중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국내의 대행업체를 찾아보니, 당시에는 이러한 장례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기획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7년간 유학하면서 분명히 배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배움에 늦을 때란 없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이 매우 단순한 편이어서, 필요한 것이라면 배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늦었다’, ‘오래 걸린다’라는 핑계를 댈 시간에 먼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장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처음’이란 과정은 거쳐야 하는 법이니까요. 당시 기업회사장을 다룬 전문서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출판된 원서들을 있는 대로 사들인 다음, 한동안 그 책들을 읽고, 정리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정리한 자료를 한 권의 매뉴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기업의 위기관리시나리오(최고경영자의 죽음) 대응 매뉴얼의 초안입니다. 그게 벌써 11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후,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동국대학교 생사문화산업학과의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그곳에서 업계 전문가분들과 인맥을 쌓았고, 부족한 경험도 쌓았으며, 사업에 필요한 네트워크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동국대 생사문화산업학과 석사과정에서 졸업이 아닌 수료로 남게 된 이유는 졸업장은 제게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 필요한 것을 얻었고,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적잖이 필요한 시간을 썼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계획은 없지만, 대중매체에 대해 공부를 하고자 준비 중입니다. 현재 대표 기획자로 활동하고 계시는 <JCP>는 국내 유일한, 그리고 국내 최초의 기업 최고경영자의 죽음에 위기관리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실제 상황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기획사입니다. 기업위기관리시나리오 컨설팅은 ‘기업 최고경영자’의 갑작스러운 상황 즉 죽음에 대비해 미리 위기관리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일을 말합니다. 국내 최초의 전문기획사로 창업 16년 차의 기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인의 장례는 사후 장례식장에서 통상 3일간 장례를 치릅니다. 장례가 간소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처음 장례를 치른다 할지라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반면, 회사장(최고경영자의 공식의례로서의 장례식)은 의전, 행사(빈소 운영, 언론대응, 의전, 영결식, 안장식, 분향소 설치 운영 등)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므로 사전에 구체적인 계획 없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장례 기간 중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특히 기업 내에 기업회사장에 대해 경험자가 없으므로, 배경지식과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이를 사전에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이 JCP(중앙의전기획)의 역할입니다. 창업 이후 처음 6개월간은 전혀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죠. 죽음을 비즈니스적인 시각으로 성급히 접근하다 보니, 정작 죽음이란 민감한 문제에 기업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던 겁니다. 1인 기업을 창업했을 당시, 국내 1000대 기업에 ‘기업 회사장 매뉴얼’을 발송했는데, 회장님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거센 항의를 해 왔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기에,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강한 회의가 들 즈음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업 비밀유지 원칙에 따라 사명은 밝힐 수 없지만, 모 기업의 최고경영자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제가 보낸 매뉴얼이 총무팀장의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이죠. 연락을 받고 여의도로 달려갔고,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황과 실제와의 간극은 컸습니다. 위기도 있었고, 반전도 있었습니다. 장례 마지막 날, 고인의 운구를 회사에 모시고, 영결식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분들이 회사장 영결식장에 다수 참석하셨고, 그때 JCP(중앙의전기획)의 존재가 기업 사회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각 기업의 수행 팀장이 회사 명함을 받아서 갔고, 그 한 장이 연결고리가 되어 본격적으로 ‘회사장’을 ‘컨설팅’이란 전문영역으로 구축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업은 성시할수록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만, 죽음이 반가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죽음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JCP(중앙의전기획)는 사전에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고 관리합니다. 죽음은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짧게는 수 주, 길게는 5년 이상 관리한 기업도 있습니다. 현재 34곳의 기업을 관리하고 있고, 평소 기업별 시나리오를 변동 상황에 맞게 수정 및 업그레이드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기업 최고경영자에 관한 변동정보관리와, 그에 따른 행사 진행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자연히 해당 기업과 대상자의 행보에 대해 주의 깊게 살피게 됩니다. 과거 척박한 환경에서 기업을 일구신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치와는 오히려 거리가 멉니다. 어느 기업의 회장님께서는 슬리퍼를 기워가며 20년이나 신으셨을 정도니까요. 이런 분들의 일상은 공개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기업의 역사는 곧 창업주의 역사입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존경심도 생기게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런 분들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비록 소속된 기업은 아니지만, 직원 이상으로 대상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JCP>가 주관한 장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는 무엇이며, 누군가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맞이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동안 기획했던 장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라면, 안산세월호합동분향소를 디자인했던 일입니다. 이후 한동안 운영관리를 하면서, 몇 달간 안산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유족들의 울음소리가 동트기 직전까지, 그 넓은 분향소 천막 위를 떠돌았습니다. 허공으로 찢겨나간 카랑카랑한 울음들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매일 밤 그 울음을 듣는 게 참을 수 없이 힘들어, 자리를 피했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영정이 제단 위에 놓일 때마다, 그 앞에 쓰러져 우는 유족들을 대면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앞에, 무너져 우는 것 외에, 유족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이들이 어떻게 기억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세월호는 제게도 큰 숙제를 던져준 사건이었습니다. 떠나는 분들의 삶이 좋은 의미로 기억되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호흡이 멎는 순간 죽음으로 삶은 온전히 동등해집니다. 변동 가능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결과를, 우린 ‘진리’라고 합니다. ‘죽은 이에게 허락된 것은 한 평 땅’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 광경을 일 년에도 수차례씩 봅니다. 타자의 죽음이, 몸에 스미는 산 경험으로 다가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며 사는 것’과 사는 대로 ‘휩쓸리듯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제게 ‘의식을 깨우치는 망치’였습니다. 현재 <JCP>와는 현저히 다른 분야인 <책과강연>이라는 출판에이전시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지난 2년간 67명의 글을 투고하여 100% 계약 유치 성공이라는 기록을 쓰기도 하였는데요. <책과강연>의 대표로의 활동상을 소개한다면? 죽음을 다루는 JCP와 정반대로 ‘책과강연’은 개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출판기획에이전시입니다. ‘책과강연’을 한 단어로 붙여 쓰는 이유는 이 브랜드가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상징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기반을 제외하고 나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기회란 배경이나 잔고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본인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책과강연>은 당사자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찾아서 책이라는 기회로 연결하는 ‘북 닥터’의 역할을 합니다. 개인의 삶을 들어 올리는 기회의 지렛대가 <책과강연>의 역할인 셈이죠. JCP라는 별난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연을 하게 되었고, 전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소통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대중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변화와 성장을 갈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힘들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신을 한계 짓는 유리천장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기회를 기획하라’ 문신처럼 가슴에 새긴 말입니다. 저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믿을 구석은 자신뿐이고, 그 안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JCP가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일이라면, <책과강연>은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 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JCP를 운영하면서, 네 종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10여 년 이상의 비즈니스 경험을 더해 <출판기획 에이전시 책과강연>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간 출판을 처음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공부해가며, 들어오는 원고를 철저히 편집자의 관점에서 고민했습니다. ‘기획’의 본질은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에도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어서, 새로운 영역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알게 된 지금에야 두려움을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몰랐던 것들이 더 많아지니까요. JCP(중앙의전기획)과 <책과강연>은 별개의 회사여서 사무실도 다릅니다. 대게 <책과강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일주일에 한 번 JCP에서 근무합니다. 회의는 유선이나 메일로 진행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사업에 체계가 생기니, 업무의 루틴이 잡혀서, 일에 혼선이 생기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제가 도맡아 하기보다,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직원들의 역량에 파악하여 맡기고, 직원들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 또한, 기획자로서 제가 맡은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년간 <책과강연>은 제 전문분야가 아니었기에 배경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제 책을 몇 종 냈다고 해서 출판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창업 전 1년간, 출판업을 알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출판편집에 관한 각종 서적을 읽고, 강연이란 강연은 다 찾아다니고, 출판기획, 편집, 인쇄, 마케팅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가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습니다. 68명이 투고한 원고를 읽고, 첨삭하는 과정에서, 마치 제 원고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100% 계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운도 따랐고, 함께한 동료들의 헌신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지난 2년간, 주말, 평일 저녁 시간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한 것도 있었지만요. <책과 강연>을 통해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 그리고 사업 성장을 위한 전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책과강연>은 ‘지식생태계’입니다. 변화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이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가장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커뮤니티입니다. <책과강연>은 출판기획에이전시로서, 계약을 염원하는 저자들의 기획과 집필을 돕는 동시에, 출판사로서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출판사만 5만 곳이 넘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 숫자보다 출판사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작은 출판사가 좋은 원고와 만날 기회가 적습니다. <책과강연>은 연구생이란 제도를 통해 실력 있는 저자를 양성하고, 그 제도 안에서, 저자와의 직접출판도 동시에 기획하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만든다’라는 것이 <책과강연>의 성장전략입니다. 앞으로 2년 안에 연간 20종 이상 신간을 낼 수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는 것이 단기 목표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JCP(중앙의전기획)와 <책과강연>은 과정이 목표입니다. 저는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앞으로도 기존 관습과 선입견을 탈피하여, 도전하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안에만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조건상 불리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생각의 방향에 따라 기회는 언제든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올해로 마흔셋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지만, 여전히 절반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배우는 게 즐겁고, 만드는 것을 변함없이 동경합니다. 몸은 늙어도 생각만큼은 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시대에 발맞춰 변모해 나갈 <중앙의전기획>과 <책과강연>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정훈, JCP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국내 1호 동기부여가'로 활발히 활동하는 권혁탁.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대다수가 경험하지 못하는 기적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을 부여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글과 이야기, 노래를 통하여 알리며,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치유하고, 공감하고, 변화 시키는 힘을 전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국내 1호 동기부여가이자, 매일 꿈을 쓰고, 노래하는, ‘꿈 쓰는 피터펜’(Pen) 권혁탁입니다. 저는 저의 삶을 담은 글, 이야기, 그리고 노래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연출 전공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십니다. 초, 중학교 시절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정말 잘 따르는, 더 없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결석 한번 하는 것도 무서워하고, 매번 반장을 도맡아 하며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수학, 과학 과목의 3년 성적 평균이 5%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는, 과학영재 시험에 응시하여 2차까지 붙기도 했습니다. 3차가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친구와 노느라 미처 제때 응시를 하지 못해 끝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또래보다 일찍 다가온 사춘기는 제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껏 부모님의 말씀,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이견 없이 순응하고, 따르던 제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삶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길 원했습니다. 그 무렵 한창 가수 비(정지훈)가 가요계에 데뷔하여, ‘안녕이란 말 대신’이라는 노래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제2의 비가 되겠다‘라며, 안양예술고등학교 (이하 안양예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거다‘ 싶어, 저도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사실 진로를 정하기에는 어린 나이었던 제가, ’연극영화과‘에 대한 큰 거부감이 없던 이유는, 중학교 1학년 즈음, 어머니께서 주부극단 소속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그때 몇 차례 공연을 보며 익숙한 얼굴들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직접 본 경험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제2의 비’를 꿈꾸며 안양예고 입학을 꿈꾸던 친구는 약 6개월간, 그리고 저는 2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입시 준비를 하고, 안양예고의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엔 경쟁률이 10:1 정도로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전국 각지에서 시험을 보러 온 재능 넘치는 학생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고, ’당연히 떨어졌겠지‘라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날, 함께 본 친구는 떨어지고, 제 이름만 올라와 있었습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하던 현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평생지기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며, 욕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다 같이 기뻐하고, 많은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연기자로서 앞길이 창창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그 후,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다고요? 2005년 출연했던 <애나 어른이나>라는 단편영화로 제6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남우연기상 수상했고, 2006년 촬영했던 <젊은 날의 초상화>라는 단편영화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경쟁부문의 역대 부산국제영화제 ’고교생 최초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입시생으로서, 연극영화과로 명망 있는 대학교에 쉽게 입학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6월을 맞으면서, 제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집을 사느라 대출을 받아 빚이 꽤 많았습니다. 그 여파로 저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힘들어졌고, 때문에, 저는 학교도 다니면서, 또 재능을 살려 용돈 벌이가 가능했던 홈쇼핑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당시엔, 제 몸이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가까이 (아르바이트, 실기, 입시, 체육대회 준비, 게임, 축구 등)을 깨어서 활동하였고, 그런 일상이 몇 달간 지속 되었습니다. 가방을 멘 자리에 몇 달 동안 멍이 지워지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발톱에도 멍이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몸은 제게 계속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몸속에 있던 시한폭탄이 터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고, 옆에는 어머니와 큰이모가 함께 계셨는데, 진단받은 병명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습니다. 삶에서 많은 것이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잠깐 쉬고 나면, 여느 때와 달리,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였지만, 퇴원하지 못한 채, 백혈병을 위한 치료를 받으며, 몇 주가 지나고 나니, 지난날의 사고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병원에서 제가 했던 생각은 오로지 ‘살아 나가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채워지는 경험은, 죽음에 이르기 전 느낄 수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체험이었고, 그 순간 제게 힘을 주었던 것은, 당시 고통을 함께한 가족도, 지인들의 응원도 아닌, 제가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연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현재‘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버텼습니다.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싫었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저를 ‘삶’이라는 양지로 이끌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티다 보니, 결국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삶이란, ’미래의 기대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백혈병의 치료과정이 너무 힘들어, 잠시나마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미래의 제 모습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습니다. 제2의 삶을 얻게 된 현재, 제가 지금 존재할 수 있도록, 수많은 분이 노력하셨고, 기도해주셨다는 것을 알기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정적으로 사는 만큼, 미래를 기대하게 되고, 새로운 꿈들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활동명 '꿈쓰는 피터펜'으로 현재 국내 1호 동기부여가로 활동 중이십니다. '동기부여가'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꿈 쓰는 피터펜’이라는 별명은, 작년 ’피터펜의 꿈’이라는 앨범을 발매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피터펜‘이 아닌, ’피터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수로서, 작가로서, 연사로서, 행사나, 강연회 등의 무대에 오르게 되니, ‘네 덕분에 내가 더 열심히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 ‘당신의 삶은 저에게 힘이 됩니다’ 등의 반응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 ‘내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을 줄 수 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더는 상상 속에서 숨어 사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나와, 매일 꿈을 쓰고, 이루는 꿈 쓰는, ’피터펜(pen)이되자‘라고 마음먹게 되면서, 활동명을 확실히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직업명은, 얼마 전 귀인처럼 만난 ’국내 1호 개인 브랜드 매니저‘인 국도형 PD님께서 지어주신 개인 브랜드입니다. 개인 브랜드라는 직업이 생소하게 들리실 수 있는데요. 개인 브랜드 매니저란 직업은 이미 북미에서는 대중성을 가진 직업으로, 인물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개인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장점을 계발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입니다. 저는 국도형 PD님과 함께 제가 살아온 삶, 지나온 역경들에 대해 진지하게 나누게 된 후, PD님께서 ‘타인을 이롭게 하라’라는 본인 직업의 슬로건처럼, 절 사회에서 이롭게 쓰고자, 앞으로의 진로를 제시해주시며,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직업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 이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개인 브랜드로 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최초이기 때문에 오는 무게감도 좀 느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제가 걸어온 삶을 공유함으로, 타인에게 삶에 동기를 유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모든 동기부여가를 대표하여, 활동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기적을 경험한 이후, 하루하루가 새로울 것 같은데, 본인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힐링 뮤직&토크 콘서트 <첫번째인생>의 '기획자', '연사', 'MC'를 모두 맡고 계십니다. 저는 평소에 재미있고, 가슴 뜨겁게 할 수 있는 일, 북적북적 사람 냄새 나는 일을 좋아합니다. 본격 힐링 뮤직&토크 콘서트 <첫번째인생>의 역사는 저의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제인‘이라는 친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초, 제인이 뜬금없이 ‘야, 피터펜, 내가 곧 뭔가를 할 건데, 그냥 넌 참여만 하면 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현재의 팀원인 윌로우, 제인, 자유 그리고 저(꿈 쓰는 피터펜)까지, 이렇게 네 명이 모이게 되었고, 그때 계획을 세웠던 것이 <첫번째인생>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던 콘서트는 각자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연이 되며, 우여곡절 끝에, 5월, 첫 번째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렇게 7월 27일, 3회째 행사를 마쳤습니다. <첫번째인생>은 매일이 처음이라 서툰, 모두를 위한 콘서트입니다. 무대 위에서, 저는 연사가 되기도 하지만, 저희 무대에는, 매달 새로운 연사들이, 콘서트 속, 또 다른 콘서트인, <꿈의 무대>를 통해, 일반인도 무대에 올라, 자신이 준비한 공연을 선보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평범한 삶을 살던 그들이지만, <꿈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들을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라이퍼’가 되고, 무대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자신의 삶, 느꼈던 감정, 마음에 품어왔던 자신만의 무대를 꾸미게 됩니다. 한 ‘라이퍼’는 지난 20년 동안 갖고 있던 울렁증을 극복하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으며, 다른 ‘라이퍼’는, 평소 가게에서만 조용히 해오던 디제잉의 정식 데뷔를 <첫번째인생>을 통해 가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라이퍼’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생일축하를 받고 또 울기도 웃기도 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첫번째인생>을 꾸려나가는 저희는 인지도가 높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묵묵히 한 달에 한 번씩, 쉬지 않고, 자신의 서투름과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고, 해소할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각자의 삶을 나누며, 치유하며, 공감을 할 수 있다면, 분명 찾아와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유난히 학벌을 많이 중시하고 있고, 심지어 어느 대학 출신이냐에 따라 사람의 배경을 판단하기도 하지요. 안타까운 현실인데, 활동하면서 본인이 활동 분야의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단점보다, 강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저는 부천대학교 관광경영과를 야간과정으로 졸업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대학교, 자격증, 스펙 등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취업 준비를 한다거나, 어느 곳이든 지원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할 때면, 한없이 작아져야 하고, 배경으로만 판단하는, 그런 사회가 싫었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세상의 시선이나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것이 저의 가치관이고, 있는 그대로의 제 능력을 인정해 줄 일들을 찾았습니다. 공기업이나 대기업 등, 보편적인 직장에 입사를 준비다면, 서울 내 대학 출신도 아니고, 어학연수나,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 저는, 다른 취업준비생들에 비교해 많이 부족하고, 채용조건에는 부족한 지원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펙만을 최선으로 여기는 세상의 편견에 조금씩 맞서다 보니, 지금처럼 제 능력과 경험을 인정해주는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잃었던 꽃 같은 학창시절을 보상해주듯, 많은 사람이 제 뜻에 동참하며, 제가 계획하는 사업에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시도, 취업도,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목표’와 올바른 ’방향‘이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막연하게 행동하게 되고, 그러면 분명 망설이고, 돌아가게 될 거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갈 방향을 정해놓고 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그리고 취업준비생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권글'이라는 필명으로 SNS에 글을 올리고 계십니다. 혹시 그동안 올리신 글 중, 추천해주고 싶은 글귀가 있으신가요? 권글은, 하루에 하나씩 당신에게 ‘권하는 ‘글’ 의 약자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타인에게 제 생각을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기 이전에, ‘브런치’라는 공간에 글을 연재하기 위해 작가신청을 다섯 번 정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올릴 수 있으면서도, 사적인 공간인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게 되었고, 벌써 70개 정도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글의 개수도 그리 많지 않고, 인지도도 낮은 작가이지만, 나중에는 ‘권글’ 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에 딱 떠오를 수 있는, 이미지와 개성이 뚜렷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호평을 받았던 권글을 몇 개 공유하자면: - 상처받는 것에 무뎌지지 마세요. 무뎌지는 것이 꼭 강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더 이상 참지 말고 말하기 위해 애쓰세요. 참지 마세요. - 빠른 걸음보다는 바른 걸음이 중요하고 사치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 중요하다. 삶의 자세.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그 어떤 것보다, ‘남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인의 말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고, 죽이기도 할 수 있으며, 그 무게는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작년 내내, 휴식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무너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두렵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안하고, 흔들리는데, 누구의 삶에 관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저는 약 3개월가량 외부 활동을 끊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자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제대로 마음먹었습니다. 김은숙 작가가 집필한 2013년 방영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의 부제목이기도 했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문장처럼, ‘우연히 시작했지만, 이 ’동기부여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자.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 삶에 희망을 주고,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목표는, 올해 안에 제 삶의 ‘뮤즈’를 만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투병할 당시, 삶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는 것이, 죽음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희망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때 꿈꿔왔던 그 사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터뷰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권혁탁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집보다 텐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멘트 하나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 20년 간 여행전문기자와 작가로 활동하며 32개의 나라에서 천 일 넘게 머문 그는 오늘도 꿈꾼다.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들만 더 여행할 수 있겠다면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은 것'이라고... 꿈을 그리는 여행서 전문 출판사 <꿈의지도> 김산환 대표의 이야기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행서 전문 출판사 '꿈의지도' 김산환 대표입니다. 예술대학 출신이신데 어떤 계기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했습니다. 지금이야 문예창작학과가 대학마다 있지만, 당시엔 4년제 대학 가운데 유일했습니다. 이처럼 생소한 학과를 선택했지만, 딱히, ‘시인이 되겠다’라는 큰 포부는 없었습니다. 그저, ‘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입학하고 나자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생운동입니다. 당시에 글을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모순을 직시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적 모순을 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많은 문예창작과의 선후배들이 들려줬습니다. 자연스럽게 문학을 하는 것은 모순에 맞서 싸우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출하는 방식은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휴학을 포함해 6년간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사이 문학은 점점 멀어졌고요. 단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운동권인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학교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사회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어요. ‘무엇을 하며 살까?’ 이 고민을 품고 48일간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남을 이 산행을 하는 동안 찾아낸 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이상도 다치지 않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찾자’라고 마음먹었고, 바로 ‘등산 잡지사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은 문학과 운동만큼 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등산 잡지 기자가 되겠다는 꿈은 1년 반 뒤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자도 분야가 많지만 다름 아닌 '여행 전문'기자로 15년간 활동하셨습니다. 현재도 아웃도어 전문 여행작가로 꾸준히 여행에 대해 탐문하고 계신데요. '여행'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등산잡지 (월간 ‘사람과 산’) 기자로 일하는 3년은 행복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산으로 취재를 가고, 산과 사람 이야기를 기사로 풀어내는 일도 좋았습니다. 마감 때마다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고, 잡지가 발매되면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받으면 저는 다시 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시엔, 그렇게 그저 산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으로만 남는 게 아니었습니다. 산에는 좋은 계곡이 있고, 유서 깊은 사찰이 있고, 아름다운 숲이 있고, 그 품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등산잡지 기자는 등산로를 안내하는 게 주된 임무였지만, 산에 깃든 문화유산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또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산으로 취재 다니며, 하나둘씩 얻어낸 사진과 글이 모이자, 산과는 다른 이야깃거리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여행’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휴식이나 여행 같은 개념이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몇 년 동안 산을 다니며 모은 이야기를<낯선 세상 속으로 행복한 여행 떠나기> 라는 책으로 펴내자 큰 반항이 일었습니다. 1998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족한 책이지만, 도서를 제외하고, 여행 정보를 찾을 방법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라, 더욱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 신문사의 레저 담당 기자로 이직했습니다. 과거, 신문사 기자들을 2~3년에 한 번씩 담당을 바꿉니다. 스포츠에서 경제, 사회, 문화부로 적을 옮기며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게 합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한 분야를 한 사람이 오래 맡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신문사에 그런 규정이 있었지만, 저는 레저(여행) 담당만 고집했습니다. 물론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고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여행이 좋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여행하는 삶. 이것은 어쩌면 제 몸 안의 DNA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코흘리개 시절 마을 앞을 오가는 기차를 보며 가보지 못한 저 먼 곳을 동경했던 그 마음이 여행의 시작이란 것을, 여행은 바로 미지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모든 삶의 방향은 새로운 세상, 가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여행 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취재를 위해 많은 여행지를 방문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있나요? ‘어느 곳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여행 관련 강의를 하면 항상 듣는 질문입니다. 저는 많은 나라를 훑은 여행가는 아닙니다. 다만, 한 곳을 가더라도 깊게 가고, 반복해 가면서 체화시키는 스타일입니다. 그렇게 깊게 만난 곳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그중에서도 몇 곳을 꼽으라면 소련 몰락 후의 러시아, 백야와 함께했던 알래스카 자동차 여행, 지상 최고의 호화를 누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기차 여행 등이 있습니다. 1999년, 아내와 함께 한 달간 러시아를 배낭여행 했습니다. 서울로 유학 왔던 고려인 3세 나타샤와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만난 러시아는 소련 몰락 이후 고단했습니다. 러시아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택시 운행을 부업으로 할 정도로 사는 게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을이 곱게 물들던 백야의 수즈달(러시아의 고도)에서 천 년 전의 러시아를 만났고, 뼛속까지 시리고 투명한 바이칼 호수에서는 시베리아의 영혼과 마주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일주일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닥터 지바고>를 읽으며 러시아의 황금기를 추억했습니다. 이 모든 여정에서 숱한 러시아인들을 만났고, 그들의 대부분은 친절하고 따뜻했습니다. 석 달 동안 홀로 자동차를 몰고 여행한 알래스카는, 여름에도 녹지 않는 빙하와 어디서도 튀어나오는 야생동물들로 즐거웠지만, 때로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긴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알래스카 고속도로를 16시간 동안 운전을 하다 지친 나머지, 운전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 모습을 누군가 밖에서 봤다면 분명히 실성한 사람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 힘든 여행의 시간도 지나고 나면 행복한 추억이 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탄 블루트레인 기차 여행은, 제 인생에서 가장 ‘초호화’ 여행으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케이프타운에서 프리토리아까지 24시간을 달려가는 이 기차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기차입니다. 기찻삯이 무려 200만 원 가까이 하는데, 여기에는 숙박, 식사, 주류 등 모두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사나 객실 모두 5성급 호텔 이상의 클래스를 선보입니다. 바에서는 위스키와 보르도 특급 와인, 쿠바산 시가 등이 모두 무료입니다. 이 기차를 타고 아프리카 평원을 가로질러 가며 인생 최고의 사치를 경험했습니다. 여행기자로 산다는 것은 때로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게 해줍니다. 여행하면서 수많은 나라도 다녔지만, 그만큼 수많은 사람도 만났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연, 그리고 사람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주세요. 2004년, 알래스카 자동차 여행을 할 때, 스웨덴에서 온 마티에스라는 남성과 일주일간 동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숲이 벌목할 가치가 있는지를 재는 독특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는 스웨덴 같은 북유럽에서나 가능한 직업입니다. 마티에스는 본래 모터사이클로 북미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래스카에 도착하는 순간 바이크가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자 바이크를 스웨덴으로 보낸 후 히치하이커가 되어 알래스카를 여행하다 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친구는 귀국을 위해 앵커리지로 떠나기 전날 저녁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그가 배탈이 나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히치하이크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자신의 생리적인 문제로 얻어 탄 차가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음식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날, 그는 배낭에 고이 담아두었던 가장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길에 섰습니다. 히치하이크에도 예의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1999년, 바이칼을 여행할 때는, 두 명의 할머니 캠퍼를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교사, 다른 한 사람은 인형극장 대표였는데, 두 사람은 학교 동창입니다. 여름휴가를 맞아 바이칼호숫가로 캠핑을 온 것입니다. 허름한 텐트에서 환갑을 넘긴 할머니 두 분이 여유롭게 캠핑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할머니들의 삶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우리나라에도 여행을 떠나는 할머니들이 많지만, IMF를 겪던 그 시절, 할머니 둘이 떠나는 여행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할머니들과 밤늦도록 모닥불을 피우고 놀았습니다. 아리랑을 불러주고, 밤하늘의 별을 헤며, 밤늦도록 시간을 보냈습니다. 2004년,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만난 북유럽에서 온 여학생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 명의 친구는, 대학을 선택하기 전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왔습니다. 그들은 석 달간 아르바이트해서 여행 경비를 모았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경비 가운데 일부를 가난한 원주민 아이들에게 줄 연필이나 노트 같은 선물을 사 왔습니다. 그들이 험한 산을 넘어 인디오 아이들을 찾아갈 때 동행을 했습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대하며,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이들이 ‘천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어린 천사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행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가슴이 따뜻합니다. 제가 도움을 주기보다, 도움을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행 중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물론, 때로 사기꾼이나 도둑을 만나는 등,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행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일화입니다.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여행의 묘미를 주기도 합니다. 여행을 주제로 강의도 많이 하십니다. 보통 어떤 내용의 강의이며 질의시간에는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받으시나요? 여행에 관한 관심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아주 보편적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행보다 가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전에 질문받은, 역시 ‘어디가 가장 좋았냐?’입니다. 이 질문은 받을 때마다 답변 전, 우선 질문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가장 좋은 여행지는 사람과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의 여행 스타일이나 관심도, 재력을 포함한 능력 등이 모두 맞아야 그에게도 좋은 여행지입니다. 즉, 질문자가 어디가 좋았느냐고 묻는 것은 제가 좋아한 여행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흥미를 느낄만한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국내 여행지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계절을 고려해서 답변하기도 합니다. 같은 장소라도 계절에 따라 주는 감동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계절이라 하더라도, ‘어느 곳으로 가는가?’에 따라 여행의 느낌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한겨울의 강원도와 제주도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행지입니다. 또한, 삼사월의 강원도는 겨울 끝물로 볼 것 없는 여행지이지만, 남쪽은 꽃 피는 화사한 봄입니다. 그럼 어디로 여행을 가야 할까요? 여기에 여행을 떠나고 싶은 그때의 기분이나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자신에게 최적화된 여행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행에 대해 강의를 할 때마다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출발하는 게 여행의 절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못 가거나 주저할 이유를 찾아보면 100가지도 넘습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두렵고, 언어가 안 되고, 동행이 없고… 이런 여행을 못 가는 이유에 발목을 잡히면 평생 여행을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출발을 하고 나면, 여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우려했던 일의 대부분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일단 떠나기만 하면, 그 여행은 절반은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자로 활동하시다가 직접 <꿈의지도>라는 도서 출판을 창립하셨습니다. <꿈의지도>는 어떤 회사이며, 현재 대표로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요? ‘여행 전문기자로만 활동하는 것!’ 이것은 제가 신문사 기자로 일을 시작할 때 가졌던 하나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다른 분야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기자 생활 마지막 순간에 결국 다른 분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것도 연예부로. 사실, 몇 달만 버티면 다시 여행 담당 기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연예부로 발령 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편집국장은 제가 얼마나 간절히 여행기자로 일하고 싶어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다른 부서로 발령 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를 그만두었습니다. 처음부터 출판사를 본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여행작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여행지나, 여행 이야기를 가끔 한 권의 책으로 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큰 뜻 없이 기획한 캠핑장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이, 속된 말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 ‘오토캠핑’ 열풍이 불면서 캠핑용품은 물론 캠핑 관련 도서까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책이 너무 잘 팔리자 마음이 살짝 바뀌었습니다. 여행작가로 사는 것도 좋지만 여행서를 만들어 파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쓰는 게 아닌,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서 여행서를 펴내는 출판을 주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120여 권의 여행서를 펴냈습니다. 나름 여행서로 일가를 이룬 셈입니다. 특히, 휴대성 좋고, 작가의 경험이 충분히 녹아들어 독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콕 찍어 알려주는, 해외여행 가이드북인 ‘홀리데이’ 시리즈를 42권까지 발행한 것에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사실, 해외여행 가이드북 시리즈 시장은 작은 출판사가 넘볼 수 없는, 메이저 출판사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시장에 도전장을 냈고,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의지도는 ‘사람과 여행을 잇는 징검다리’를 모토로 합니다. 앞으로도 여행서 한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서를 제외한 다른 분야도 출간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서는 꿈의지도가 전담하고, 자기계발이나 에세이 같은 다른 분야는 서브 브랜드를 통해서 풀어갈 생각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요즘 들어 관심을 두는 것은, ‘깊은 여행’입니다. ‘깊은 여행’은 여행이 점점 깊어져 사람의 본질, 혹은 어떤 한계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한계라는 것은 여행의 방식과 수단, 대상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과거의 여행이 보는 것, 대도시 위주, 크고 화려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면, 앞으로의 여행은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 작은 도시와 자연을 찾아가는 스타일로 옮겨 갈 것입니다. 또한, ‘깊은 여행’은 여행과 자신의 취미, 혹은 관심사를 연결해 일회성이 아닌 지속해서 여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흐름을 저는 깊은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깊은 여행’이란 자전거, 백컨트리 스키, 백팩킹, 카누, 프리 다이빙 같은 좀 더 액티브하면서 아웃도어적인 것입니다. 몸으로 극렬하게 느끼면서 한계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독성이 강해서 단순한 관광이나 도심을 거니는 정도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여행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여행은 경험을 통해 성숙되고, 점점 미지의 공간과 시간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잘 놀 줄 아는 사람’, ‘사람들에게 노는 즐거움을 전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에게 여행은 스스로 즐거운 일이지, 어떤 당위성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놀면서 즐기는 여행의 기쁨을 사람들이 다 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 그게 저의 소명이며, 소망입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산환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경기도 연천이라는 시골에서 트럼펫을 배우며, 서울대 음악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하고, '클래식 전공자는 유학이 필수'라는 불문율을 깬 순수한 국내파. 학벌이 클래식 음악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뛰어넘어, 현재 연주자로서 자신의 활동을 한정 시키지 않고, 강의, 지휘, 작,편곡, 행정, 그리고 포토그래퍼로서의 활동까지 하며 하루 하루를 숨가쁘게, 그리고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소중하게 쓰고 있는, 트럼페터 유재우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연천군 출신으로 현지에서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술전문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 트럼펫 연주자 유재우입니다. ‘Avec G’와 인터뷰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일반적으로 접하기 쉬운 악기가 아닌데, 어떤 과정으로 입문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성장기를 겪어왔는지 궁금합니다. 경기도 연천군 소재 연천노곡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요. 당시 전교생이 80명 정도로 작은 규모의 학교였지만 전국 마칭 밴드 경연대회에 출전해서 해마다 입상했을 정도로 전통 있는 학교입니다. 3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관악부 활동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내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 처음 트럼펫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악기에 배정되었지만 몽글몽글하면서도 밝으며 진취적인 소리를 가진 트럼펫을 연주하는 선배님들이 아주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며칠 지나지 않아 트럼펫 파트로 바꾸게 되었고요, 트럼펫을 시작한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악기를 처음 잡았을 때의 마음속 설렘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당시엔, 악기를 다루는데 있어서 재능은 또래 친구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펫에 대한 의욕이 너무 앞서서 그랬는지, 친구들 실력보다 늘 뒤처져 있었고, 그저 친구들처럼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어요. 항상 저음 파트를 연주했었는데, 빛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트럼펫 연주 하는 일이 제일 신나는 일이었고요. 주말마다 학교에서 악기를 빌려와서 연습할 정도로, 트럼펫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습니다.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 위기가 한 번 있었어요. 초등학생들 사이였지만, 관악부 규율이 굉장히 엄격했거든요. 가뜩이나 소심한 제가 이겨내기에는 너무 가혹해서, 어머니께 관악부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것도 극복하지 못하면 더 큰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어머니의 질책에 대한 원망이 많았지만, 그때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셨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한 백학중학교 시절에도, 관악부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고등학교 때는 안타깝게도 관악부가 없었어요. 음악 선생님(당시 전곡고등학교 음악부장 서성곤 선생님)을 찾아뵙고 트럼펫을 전공하고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했더니, 선생님께서 저의 열정을 보시고 다방면으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언제든 연습할 수 있도록 음악실 열쇠도 내어주시고, 부모님처럼 대해주시며, 제게 정말 많이 헌신해주셨어요. 당시에 제게 악기가 없었는데, 선생님이 갖고 계시던 트럼펫도 제게 물려주셨고, 음악실에서 연습하다가 버스를 놓치면, 그 늦은 시간에 집까지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선생님께서 운전해서 데려다주신 적도 많았고요. 대회에 출전할 때는, 새벽같이 우리 집을 방문하셔서, 직접 지방에 데리고 다녀오실 정도로, 선생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에는 관악부가 없어서 연주력이 떨어질까 걱정되어, 서울에 있는 아마추어 연주단체에 가입해서 음악 활동을 계속했었습니다.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매주 출석하는 저를 갸륵하게 보셨는지,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 개인지도를 받으라며 선생님을 추천해주셨어요. 그때 저는 제 음악인생의 은인인 스승님을 소개받게 되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고의 트럼페터 중의 한 분이신 안희찬 선생님이십니다. 그때가 제가 18살 되던 해였어요. 안희찬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절 보시는 눈매가 굉장히 위엄 있으셨는데, 저를 여러모로 연구하시며, 유쾌하게, 그리고 정말 재밌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전공을 하기에는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서, 걱정도 많이 해주셨어요. 처음 악기에 입문했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선생님 만나 뵙기 전인 고등학교 때까지, 트럼펫을 독학해왔기 때문에, 기본기가 부족함은 물론이고, 잘못된 습관도 많았어요. 오른손잡이가 당장 왼손잡이가 되어야 하는 것만큼, 악기 습관을 바꾸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정신적 고생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고요. 안희찬 선생님께서는 제게 조그마한 발전의 기미만 보여도, 그 부분을 크게 여겨주시고, 칭찬을 많이 해 주시면서,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선생님 문하생 중 가장 부족한 학생이었는데도, 실력보다는, 제가 트럼펫을 향해 열망하는 꿈과 열정을 높게 사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시고자 애쓰셨어요. ‘트럼펫 연주자는 위축되면 안 된다’라고 하시면서요. 덕분에, 대회에 나가거나, 입시 때마다, 온전히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자신있게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트럼펫 연주자 역시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대에서 위축되면, 악기 시작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소리가 나는 악기가 바로 트럼펫이에요. 저는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진은준 선생님을, 대학원에서는 강석진 선생님을 사사하였습니다. 두 스승님께 갖는 감사함과 추억도 많습니다. 학부 시절, 진은준 선생님과의 첫 수업이 생각나는데요. 제가 겉모습과는 다르게 수줍음이 많은데, 그 때문에 긴장이 심했던 탓인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악기가 잘 불리지 않는 거예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시울까지 붉어졌는데, 그 모습을 보시고, 절 한껏 안아주셨습니다.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선생님이시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대학원 1학년 때까지 진은준 선생님께 배웠는데, 당시 집안도 갑자기 어려워지고,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 생겨서, 공황장애도 생기고, 심한 방황을 했습니다. 악기도 잘 불리지 않고, 학업 생활도 충실하지 못해, 선생님께 F 학점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당시엔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저 자신을 성찰하고 보니, 그 학점을 주신 선생님께 너무 감사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다른 학점을 받았더라면 아마 평생 정신 차리지 못했을 거로 생각합니다. 많은 걸 깨닫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오히려 내치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의 마음 한편에 제 자리를 비우고 기다리고 계셨더라고요. 정말 반갑고 또 감사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원에 복학해서, 진은준 선생님 후임으로 부임하신 강석진 선생님을 사사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들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많은 기술적 아이디어와 악기와 음악을 대하는 좋은 의식을 심어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다소 젊은 연세이신데, 제 나잇대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많은 부분을 빠르게 공감하시고, 같이 고민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감사한 선생님 덕분에 대학원 졸업시험까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클래식 음악이 서양에서 파생된 만큼 북미, 유럽 등 현지의 교수님과 학교에서 수학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학하지 않고 한국에서 학사와 전문사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유학을 다녀오면 좋죠. 트럼펫은 서양 악기니까요. 견문을 더욱 넓힐 수도 있고요. 낯선 타지에서 수년간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을 겪는 것 자체가 위대한 수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학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여건 때문이었어요.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론, 저보다 더 힘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의연하게 음악을 배우고, 연주활동을 해나가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전 과거가 너무 힘들었기에, 지금 돌아보면, 제 처지에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 것만으로도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저의 경험에 의하면 유학파든 국내파든 기회는 누구에게나 늘 공정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잘해낼 수 있는 실력과 열정, 바른 인성 등을 갖추고 있으면,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꿈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펫이야말로 끊임없는 유지와 보수, 계발해야 하는 분야로써 덧없는 예술 분야입니다. 추상적인 분야가 아니며, 인과관계가 뚜렷한 분야입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사람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인정받는 공정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연습에 있어 성실해야 함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실함’은 흔하디흔한 말이자,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생활에서 적용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엉뚱한 표현일 수 있지만, 저는 연습실로 ‘유학 간다’라는 생각을 하고, 지금도 연습실에서 막차가 끊길 때까지 악기와 사투를 벌이고 귀가하는 게 일상입니다. 연습실에 갈 시간이 없으면 귀가해서 차 안에서라도 못다 한 연습을 합니다. 연습할 때, 당장 며칠 안에 협연이나 중요한 연주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임하면, 한 시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으며, 도태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그렇듯, 악기와 음악 역시, ‘교만’에 빠지는 순간 쌓아놓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과거, 선생님께서 제게 ‘자신감은 자만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악기와 음악을 사랑하느냐’, ‘무엇을 위해 연습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가 좋든, 그렇지 못하든, 모든 것은 자기에게 달린 것입니다. 절대로 다른 핑계, 예를 들어, 저처럼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이 아닌, ‘성숙’에 애를 쓰고 있는 이유, 어제의 저 자신과 비교하며, ‘어제보다 열심히 하는 오늘을 보내려고 애썼는지’, 또한, ‘사람 되고자 애썼는지’, 저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은 없었는지' 등. 늘 저 자신에게 질문하고, 성찰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해외의 어느 학교에서 얼마나 오래 유학한 것보다, 제가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부분들입니다. `트럼페터 유재우`하면 수많은 공연 중 단연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연주회가 떠오릅니다. 트럼페터에게 난곡으로 꼽히는 이 곡으로 수차례 무대에 오르셨고, 연주마다 굉장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본인에게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은 어떤 의미인가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총 여섯 곡으로, 1721년 쾨텐 궁정의 카펠마이스터로 있던 바흐가 자신의 협주곡 중 여섯 곡을 모아 크리스티앙 루트비히 브란덴부르크 공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그 여섯 곡 중, 2번 작품에 트럼펫이 등장하는데요, 연주 내내 말도 안 되는 고음이 등장해서 많은 트럼펫 연주자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트럼펫 연주자를 섭외하지 못해 클라리넷, 호른, 심지어 색소폰 등 다른 악기로 대체해서 연주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입니다. 바흐가 활동하던 바로크 시절 트럼펫은 배음 체계로, 구현된 음정만 소리 낼 수 있었는데, 다양한 음정들을 내려면 배음 간격이 좁은 고음역으로 가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현대에 접어들며, 바로크 음악 고음을 연주하기 위해 ‘피콜로 트럼펫’이라는 소형 악기가 고안이 되었는데요. 피콜로 트럼펫의 탄생에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연주 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트럼펫은 Bb, C, Eb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저는 독주회 때, 피콜로 트럼펫 레퍼토리를 빼놓지 않을 정도로 이 악기를 좋아합니다. 2015년 봄, 동료의 추천으로 서울 성동구 옥수동 루터교회에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의 첫 연주를 했고요. 2017년에는 춘천시립교향악단과 2018년에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그리고 코리안체임버오케스트라(구 서울바로크합주단)와 이 곡을 함께 연주했습니다. 곡 자체가 워낙 힘들어서 그런지, 트럼펫 연주자로 섭외되고, 결정되는 과정에서부터, 연주회가 진행되는 과정이, 때로는 굉장히 매우 급하게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공연 하루 전날, 연주자 교체로 인하여 제가 긴급 섭외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모든 연주회가 제게는 정말 큰 도전이었고, 또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면 유연성을 잃게 되어서 그것을 회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과정도 하나의 수양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트럼페터로서 가장 자부심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또한,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음악가로서 강조하는 덕목이 있다면? 저의 신조는, ‘사람이 되자’와 ‘항상 감사하자’입니다. 트럼펫에는 ‘희망’과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트럼펫은 직업이기 전에,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제 평생 눈물, 땀, 기쁨, 슬픔, 좌절, 환희 등 그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겪은 더 없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와 함께 무대를 꾸미고, 트럼펫 연주를 통해 관객분들의 마음에, ‘희망과 치유’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저 자신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덕목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성실한 연습’을 해야 함은 기본이고요. 특히 ‘사람됨’과 ‘감사함’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며, 저 또한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감사함’을 매사에 찾고,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음악가이기 전에, ‘바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맑고, 바른 정신으로 연습하고, 연주해야, 관객들의 마음에 그 정성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금물’입니다. 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면, 악기 소리와 전체적인 음악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이 ‘숭고한 음악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강의, 연주활동, 지휘자, 작/편곡, 사단법인 음악 단체 회장 겸 이사로서의 행정업무, 본인의 앙상블 팀인 브라스시티의 리더, 심지어 사진작가로서의 활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연히 트럼펫 연주가 본업이고요. 따라서 연습과 연주 활동에 방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맡은 직분에 따른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계획을 잘 세워서 시간을 배분하고, 부지런히 생활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한 일입니다. 피아노나 현악기,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연습해도 시간이 모자랄 수 있는 악기들입니다만, 금관악기는 그렇게 많이 연습하면 몸이 혹사당하여, 오히려 연주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연습한 시간 이상만큼 필요합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공부와 일들을 합니다. 음악 안에서도 연주자 이상의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트럼펫에 접목할 수 있는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데, 제게 주어진 모든 활동을, 귀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맺게 되는 인연들은 언제나 소중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올해는 유독 지휘를 할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현재 <서울아카데믹윈드앙상블>의 예술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고요. <행복한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연주자 겸 부지휘자 직책도 맡고 있으며, 수원시에 있는 <영통구청소년오케스트라>와 성남시에 있는 <분당청소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휘자는 깊은 통솔력과 통찰력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하는 직책입니다. 그래야 그 단체가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성원 모두와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나누고, 다 함께 성장하는 방법들을 항상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편곡자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작곡과 편곡은 오래전부터 늘 관심이 많은 분야였으며, 특히 편곡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연주자라면 누구나 본인이 직접 만든 작품을 연주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실제로 본인이 작곡하거나 편곡한 작품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많습니다. 작곡가, 편곡자의 대부분은 수요가 많은 편성의 작품을 주로 만들어냅니다. 가령, 서점에 가면 일반인들이 많이 다루는 색소폰이나 플루트의 악보는 많은데,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 트럼펫 악보 칸은 거의 텅텅 비어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색소폰이나 플루트 악보를 그저 트럼펫 조표로 옮겨서 출판한, 말도 안 되는 악보를 본 적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의 계기로 작곡과 편곡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때로는 제 연주회에 제가 만든 작품을 연주해 본 적도 많았습니다. 제 열정을 알아주시는 분들의 추천으로, 인천시립교향악단, 성남시립교향악단, (사)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 광명심포니오케스트라 등 국내 유수의 교향악단 및 앙상블 단체의 객원 편곡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14년 방영되었던, KBS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에서 나오는 악보 제작과 편집 업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6년부터 분당에 있는 가나안 교회에서 편곡자로 일하고 있고요.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편곡을 의뢰해주셔서, 지금도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구성의 작품, 솔로 레퍼토리 등 많은 클래식 및 대중음악 작품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작품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면, 추후 정식 작품집 출간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사진을 찍는 취미도 생겼습니다. 아직 사진작가라고 칭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요. 제가 총무 겸 트럼펫 연주자로 있는 팬아시아필하모니아(Pan Asia Philharmonia) 연주회가 열리면, 연주 업무와 더불어 연주회 사진을 촬영해서 기록을 남기는 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단원분들의 연주 모습을 촬영하다 보니, 사람들과 색다른 소통을 할 수 있는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장면들도 너무 신기했고, 사진을 보정하면서 얻는 성취감도 상당했고요. 사진기를 갖고 다니다 보니,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같이 큰 연주 장소에 촬영하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취미생활을 한 적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사진 분야에 대해서도 틈나는 대로 공부하고 즐길 계획입니다. 올해의 목표는, 어릴 적 고향에서 봤던 밤하늘의 장대한 은하수를 사진으로 담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나요?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제 장인어른께서 종합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계시는데요. 언젠가 장인어른께서 근무하시는 병원에 찾아뵌 적이 있는데, 병원 로비에 들어섰더니, 직접 로비에 나오셔서 따뜻하신 눈빛과 어조로 대기 환자분들 상담도 해주시고, 고민을 들어주시는 장인어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거룩하시던지, 한참을 병원 로비에 서서 장인어른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느끼는 따뜻하시고, 마음 넓으신 장인어른의 모습이, 환자분들께는 몸이 아파 약해진 그분들의 마음에, 어쩌면 ‘희망을 가져다주는 천사’로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회에서 가치 있고, 정의롭게 살 수 있을까’라고 고민해봤던 시간이었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환갑을 한참 넘기셨는데, 지금도 시간을 내셔서 끝없이 공부하시고, 깨닫고자 하십니다.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저의 소신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고,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자 노력하며,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돕고 함께 하다 보면, 제가 목표하는 ‘정의로운 음악가’, 사람을 살리는 ‘슈바이처 같은 음악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단기적인 계획과 장기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당장은 청소년 교향악단과의 협연 일정 등 중요한 연주들이 예정에 있습니다. 가을에는 중국 원저우 대학교에서 초청 독주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해외연주’라는 특별한 일정이어서, 굉장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외, 금관 앙상블 연주회, 지휘 및 편곡 일정 등 연말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일정을 건강하게 잘 소화해야 합니다. 최근 저의 신상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지난주에 제가 저의 아내와 함께 10년 정도 활동하던 사단법인 CMAK음악인협회(이사장 피아니스트 정혜경)의 총회에서 회장 겸 이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간 협회를 이끌어 오신 이사장님과 여러 선생님의 유지를 잘 받들어서 협회를 짊어지고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 음악인의 참여와 동행, 협력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요, 또한 인재 발굴 및 육성사업 등 여러 가지의 업무를 추진해나가야 하는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의 다양한 활동들이 앞으로도 한국 음악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보다도 트럼펫으로 많은 관객 분들께, 언제나 ‘희망과 치유’를 선사해 드릴 수 있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이 인터뷰를 접하는 분들 중, 특히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는 청소년 및 청년 분들에게, 제 인터뷰가 희망의 메세지로 다가오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기회를 주신 ‘Avec G’ 관계자분들과,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유재우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집단이 모였을 때 개개인의 사상과 사고가 다르더라도, 오로지 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선택을 따라하는 것은 '군중심리'이다. '군중심리'는 정확하거나,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기에 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때때론 개인의 삶에서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거대 정당을 지지하는 현재, 야당 중에서도 국회의원이 최소수로 이루어진 '정의당'을 고교시절부터 본인 만의 소신과 확신을 가지고 지지하고 있다. 그는 바로 문준혁 정의당 경남대 학생위원회 위원장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정의당 동물복지위원회 운영위원이자, 경남대학교 학생위원장으로서, ‘기본이 되는 세상을 원하는 시민’, 문준혁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하시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중퇴하고, 대학 입학 전까지 1년여 동안 어떤 삶을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저는 한마디로, ‘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학교생활에는 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학생 인권 관련 동아리도 만들고, 방송 동아리에서 기자도 하는 등, 교내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방송 관련해서 기자 활동을 주로 했었습니다.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는 규정이, 일정 규모의 학생이 모이면 동아리를 직접 개설할 수 있었는데, 저는 당시 ‘학생 인권동아리’를 만들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구해야 했는데, 선뜻 나서주시는 선생님도 없었고, 동아리 인원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 인권동아리’를 통해, 지역 청소년 단체를 만들고, 지역 사회 활동을 했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을 비롯한 많은 분께서 저를 아껴주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2학년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고, 대학 입학 전까지 저는, ‘꿈을 찾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정당에 가입한 후 이뤄진 정치 및 시민단체 활동 경험… 그리고 여행도 정말 자주 다녔습니다. 진로에 맞는 대학 학과도 자주 찾아봤는데요. 중퇴 이후의 삶이 저의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행하면서, 제가 서울에 산다고 착각할 정도로, 서울을 포함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많은 걸 보고, 배웠고, 경험을 쌓았습니다. 아마 그때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 역시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종영한 JTBC 드라마 'SKY캐슬'에서는, 오늘날 고교생들의 '입시지옥'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후반부에는 전교 1등인 예서와 우주가 나란히 고등학교 중퇴를 선택합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시공부에 그렇게 썩 관심이 없어서 예서와 우주의 입장에서 고교 시스템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승-전 명문대학 보내기’라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는 강남 8학군, 특목고 등 좋은 고등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면, SKY를 비롯한 카이스트 등 국립 특수대학교로 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좋은 고등학교가 해야 할 일은 학생 개개인의 적성에 맞는 꿈과 진로를 찾아주고,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기조의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대학 입학 이전, 이미 정의당 예비당원 협의체 '허들'의 위원장을 비롯해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의당 심상정 후보 청년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정치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 인권동아리를 운영하고, 지역 청소년단체를 운영하면서, 학교 인조잔디구장 유해물질 검출이라던가, 학생 인권보장에 대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지역 의제를 다루기도 했었고요. 동아리와 지역단체를 운영하며 느낀 것은, 많은 사회 문제가 시의회를 거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거나, 혹은 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크게 바뀌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의정에 관여하게 된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당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정식으로 ‘정의당’ 당원으로 활동하게 된 ‘허들’은, ‘차별을 뛰어넘자’라는 뜻이 있으며, 2017년 4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정의당은 만14세부터 만 18세까지 정식당원은 아니지만, 정의당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 ‘예비당원’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허들’은 진보정당이라면 현재의 주체인 청소년들에게도 정식 당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예비당원들이 모여 만든 협의체입니다. ‘허들’에서 의견을 개진하며 현재 활동하는 규모는 100여 명입니다. 이들 중 저를 포함한 여덟 명은, 재작년 2월, ‘정당 가입 연령 제한 폐지’ 등, ‘청소년참정권 보장을 위한 헌법소원 청구인단’으로도 참여했었습니다. ‘허들’은 정의당 당 대회에서 ‘청소년참정권 특별결의문’도 발의시킨 이력이 있습니다. 제가 ‘허들’의 위원장으로 재직 중일 당시엔, 퍼포먼스와 정책개발 위주의 활동을 했었습니다. 비록 피선거권은 없었지만, 4기 당직 선거에서는 부대표로 출마 선언도 했었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자체적으로 ‘청소년 정책 공약’을 상정해, 출마자들과 협의하는 자리도 가졌고,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특성화고 실습생’들에게 현 사회가 부여할 수 있는 최대의 복지, 그리고 시급하게 대처 되어야 할 개선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초대 위원장으로서, 조직을 갖추고, 조직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였기에, 뜻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좋은 경험을 하였고,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지지율이 더 높은 여당이나, 야당 중에서도 거대 정당이 아니며, 국회의원도 297석 중 6석밖에 차지하지 않는 소수 정당인, '정의당'을 지지하는 본인의 소신은 무엇인가요? 현재 저는 정의당의 '마산시지역위원회 운영위원', '경남대학교 학생위원회 위원장', '동물복지위원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데, 마산시지역위원회는 옛 마산시의 당원들이 모인 지역위원회입니다. 100명 남짓 되는 규모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맡은 제 역할은 경남대학교 학생위원회 위원장과 겹치기도 하는데요. 지역위원회와 경남대학생 위원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지역 내 대학/교육문제 현안 대응을 하는 역할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남대학교 학생위원회는, 10여 명 정도로 이루어진 대학별 학생위원회입니다. 교내 문제 대응과 풀뿌리 조직으로서, 교내에서 정의당이 더욱 알려지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저는 위원장으로서, 교내 다른 단체들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대학위 운영과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집행을 맡고 있습니다. 정의당을 지지하게 된 이유는 조금은 현실적인 이유와 이상적인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의 친지 분들께서도, ‘왜 작은 정당에 들어가냐’라고 많이 물어보십니다. 그래도 양당과는 다른 정치를 하는 진보정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당 기득권 정치를 벗어나 ‘지속 가능한 사회’,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정의당의 지향은 제겐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로는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진보정당이지만, 강기갑 의원님의 지역구이기도 했던 사천에 제 본 지역 기반도 있었기에 정의당을 택했습니다. 정당에 입당할 당시엔, ‘세상을 바꾸는 도구’일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지만, 지금은 사실 애증이 많이 쌓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제게, ‘학교’의 역할을 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저 자신에게 물으며, 진로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정의당의 제게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만 꼽자면, 바로 ‘꿈’입니다. 진로에서의 꿈도 있지만, ‘기본이 된 세상’, ‘정의당이 만들어 갈 세상’에 대한 ‘꿈’이기도 합니다. 2017년, 청소년 시절부터 꾸준히 정의당의 당원으로 정치는 물론 다방면의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청소년 신분으로 활동하다가 청년이 되어 활동하니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현 사회에서 ‘청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청년’은 다가올 ‘미래세대’가 아닌, ‘현재’이고, 대한민국 사회의 부정적인 차별과 혐오를 ‘직격’으로 맞은 세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으니까 고생해도 된다’, ‘젊으니까 다음에 해도 된다’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린 것을 짧은 시간에 보았습니다. ‘청소년’ 신분으로 활동하다가, ‘청년’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바뀐 대우는 사실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을 하나 든다면, 청소년은 드러나서 소비 혹은 동원당하지 않고, 청년은 수면 위로 드러나 소비 당하거나, 동원당하는 것이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은 청년 조례와 법안에 대해 많은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시급하게 법안이 발의되어야 할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현 정부는, 탁상공론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이기에 혜택을 받는 것은, ‘국가장학금’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경남에는, ‘청년정책네트워크’라던가 혹은 ‘경남청년센터 온나’와 같은 거버넌스라던가, 청년만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초년생인 제게 오는 실질적인 혜택은 미비합니다. 청년을 위해 꼭 발의 되어야 할 법안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기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기본법’에는 다름 아닌 현시대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건강한 시민으로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청년의 현실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만큼, 청년 정책의 종합적 지원근거가 되는 ‘청년기본법’ 제정을 더는 이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사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회활동가를 비롯해 정치인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누구인가요? 생전 국회의원이시자, 정의당 원내대표이시기도 했던, 지난 23일, 1주기를 맞이하신 故 노회찬 의원님입니다. 노회찬 의원님은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이끈 분이셨습니다. ‘정치인은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라는 저의 짧았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회찬 의원님과 기억이 남는 추억이라면, 언젠가 청년학생위원회 총회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대통령 선거에서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었는데 국회 안에서 영향력이 달라진 게 있습니까’라고 여쭈니, 웃으시면서, ‘의석이 달라진 게 없으니, 없다’라고 하셔서 저도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노회찬 의원님 생전 몇 번 뵈었었고, 이제는 뵐 수 없기에, 사적으로 시간을 내 찾아뵙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됩니다. 노회찬 의원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행동, 그리고 철촌살인의 화법들을 닮고 싶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의원님의 검소함과 겸손함, 그리고 친근함에서 나오는 느낌이 있었는데, 저 또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현재는 생태계와 환경에 관련된 의제를 다루고 싶습니다. 그래서 경남도당에 생태(혹은 녹색)위원회를 발족시켜 지역에서 활동해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서울의 환경 의제에 관심이 많지만, 실상은 지역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기에, 지역 안의 의정 및 사회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학생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기에, 이 둘이 잘 연결할 수 있는 방식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당인 혹은 정치인의 목표는, ‘자기 확장’과 ‘집권’에 있다고 봅니다. 일단 정치에 발을 들인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바꾸는 것’이 최종 목표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목표는, ‘지역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현직 정의당 국회의원이신 여영국 의원님 역시, ‘국회가 지역 의회의 반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라고도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만큼 중앙정치의 정쟁이 심하다는 뜻이라고 해석해봅니다. 저는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지역에서부터 성장한, ‘전문성 있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 저의 목표이자 꿈입니다. 저는 선·후배 동료 및 함께 정치 활동을 하는 분들께, ‘그래도 저 사람에게 인간성은 있고, 최소한의 기본은 되어있다’라고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일반 시민은 물론, 노동자에게, 성소수자에게,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노약자에게, 청소년에게, 청년에게, 그리고 자연에게까지, 정말 ‘좋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겠죠? 개인적으로 이번 [AVEC G]와의 인터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실 인터뷰는, ‘거기서 거기’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하였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제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은 물론, 여러 질문을 접하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생각을 정말 많이 하였습니다. 그만큼 깊이 있고, 전문성 있는 인터뷰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훗날, ‘몇 년 전 이 인터뷰에서 봤던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라고 기억하시게끔, 다시 뵐 때는 훨씬 성장한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랜 시간을 들이고, 힘든 고민을 하며 인터뷰에 임한 만큼, 읽으시는 독자분들에게도 많은 인터뷰 사이, 더 가슴에 깊이 남는 인터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문준혁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1980년과 90년 대, '어른들은 몰라요!'를 외치던 그들은 오늘 날의 기성세대가 되어, 당시 그들이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질문을 청소년들에게 다시 던진다. '늬들이 뭘알아?'라고 말이다. 현 시대의 청소년들은 과연 정말 모를까? '청소년의 작은 움직임이 나라를 바꾼다'고 믿는, '고3 정치인', 정재한 군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의 시선에서 인권신장과 법적 및 제도적 개선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반영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정책학회장인 정재한 입니다. 반갑습니다. 청년 정치인, 젊은 정치인과의 인터뷰는 해보았지만, 본 기자도 ‘청소년 정치인’, '청소년 활동가'와의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청소년으로서 정치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뉴스와 신문을 즐기시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만화영화보다는, 뉴스와 신문 보는 것을 더 즐겼습니다. 이후 중,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어렸을 때부터 봐온 뉴스와 신문 덕에 사회현상에 관해 관심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사회 분야에 호감이 생기더니, 사회과목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문과 뉴스 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만 한정되어있었고, 여당과 야당의 구분도 잘 못 하는 등, 기초적인 지식도 없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나중에는 ‘정치는 내가 아닌 전문적인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관심도도 낮아졌습니다. 그러던 2016년, JTBC 방송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간의 유착관계와 정부 현안과 연설문이 담긴 태블릿 PC 발견과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비리가 보도된 이후, 당시 정부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보도가 연달아 터지면서, 내적으로만 간직하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고, 제가 거주하고 있는 부산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지속해서 참석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박근혜 탄핵’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는 걸 직접 바라보면서, ‘그동안 암울했던 시대를 시민의 손으로 끝냈다’라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후, 잘못된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사회적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알게 되면서, 적극적인 정치 참여로 이런 사태를 막겠다는 감정이 교차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정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현 정권에서 청소년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재한 군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링크1: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332382_24634.html 기사 제목: ’심장 박동` 듣는 순간…`엄마` 되기로 결심했지만‘ 매체: MBC ‘뉴스데스크’ → 10대 미혼모 관련 위 기사에 대해서 추가로 조사해본 결과, 10대 미혼모를 포함한 전체 미혼모의 수치는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작년 기준, 전국에는 60여 개의 미혼모 지원시설이 있지만, 입소 후 3년 미만 동안만 의료비 지원부터, 의식주 보장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취업지원(학원을 통한 교육)까지 도와주고 있습니다. 즉, 3년이 지나면 시설을 나가 주체적으로 양육을 시작해야 하며 모든 경제적 부담도 혼자 짊어져야 합니다. 미혼모 지원시설에 T.O가 있어 입소하면 다행이지만, 전국적으로 미혼모 지원시설이 아직 턱없이 부족하여, 위 기사처럼 아이 아빠와 함께 또는 혼자서 아이 양육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건 부족한 지원시설뿐만이 아닙니다. 산모와 그 부모와의 대립으로 인한 가족관계의 단절과 30만 원 내외인 정부지원금을 가지고 아이의 기저귓값과 분윳값을 충당하기도 힘들어,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 힘들어지는 점, 추가적인 교육(고등교육과정 포함)을 더 받고 싶으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또 친구들과 사회적 시선으로 그럴 수 없다는 점 등, 수많은 사회적 인식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산모가 생명을 지키려고 한 고귀한 선택에 대해, 사회는 왜 비난과 낙인을 찍어버리는지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혼모에 대한 부드러운 시선과 사회적 편견과 낙인 없애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더는 사회의 낙인으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 복지 취약계층 없이 모든 국민이 서로 협력하며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링크2: https://blog.naver.com/kofrum1234/221336458711 제목: ‘중고등학생도 피는 전자담배!’ 매체: 식품커뮤니케이션포럼 → 청소년의 전자담배 흡연 관련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의 흡연율은 2017년 이후 다시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청소년 흡연율 상승의 주된 요인은 전자담배의 보급률 증가이며, 미성년자라도 온라인에서 성인인증 없이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독물질이 없고, 냄새가 나지 않고, 휴대가 간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흡연을 하는 청소년들의 일부는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점을 알면서도 담배 속에 포함된 니코틴에 중독되어 흡연을 계속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교육 당국과 각 학교에서는 청소년 흡연을 막기 위해 ‘금연학교’ 운영과 전자담배의 유해성을 담은 안내문을 지속해서 배포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언론 보도 및 다큐멘터리 등을 학생들에게 꾸준히 보여주며, 흡연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환자 등을 소개하기 때문에, 담배에 대한 유해성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향락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흡연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으며, 흡연으로 인한 직, 간접적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흡연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흡연의 유해성이 다양한 방법으로 입증되어왔고, 모든 병의 근원인 만큼, 청소년을 비롯한 전 세계의 모든 흡연자가 담배를 끊고 자신의 건강을 지켜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링크3: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9889 제목: ‘술 마시고 배째…업주 울리는 간 큰 청소년’ 매체: 제주新보 → 신분증 위·변조해 음주 후 청소년 보호법 악용 신고, 업주는 영업정지 사건 관련 최근 신분증 위·변조로 성인으로 위장한 청소년들이 술, 담배 등 청소년들이 구매할 수 없는 물품 등을 구매한 후, 업주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악의적인 목적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업주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 국회에서도 이루어져, 청소년들로 피해를 당한 업주들을 도와주고, 악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한 청소년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지금은 계류 중에 있어, 실현되지는 못 하는 상황입니다. 청소년 구매 금지 물품을 구매한 청소년들이 악의적인 마음을 먹고 경찰에 신고하여 업주에게만 피해를 주고, 정작 본인은 법의 사각지대를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청소년들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 청소년 보호법을 속히 개정하여,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업주에게는 구원의 손길 내밀고, 악의적인 마음을 먹고 고의로 피해를 주는 청소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링크4: http://www.kidstvnews.co.kr/view.php?ud=2019042910500149528743e6153c_29 제목: ’자녀와 같은 학교 다니는 고교교사 489명’ 매체: 키즈TV뉴스 → 같은 고교를 재직/재학하는 부모·자녀 문제 지난해 6월, 서울의 숙명여고에서 교무부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문제와 정답을 유출하여, 중·하위권을 유지하던 딸들이 단번에 문과와 이과에서 각각 전교 1등을 만들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후 교육부에서는 위와 같은 사례를 근절하기 위해 교사와 자녀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할 수 없도록 ‘상피제’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500여 명이 가까운 교사가 여전히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일단 자녀와 부모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면, 자식을 위한 부모의 욕심이 끝이 없듯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할 것이고, 지필 평가 외에도 수행평가 등의 성적입력과 교내대회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직간접적으로라도 성과보수를 부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저는 처음에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해 처음 접한 후 ‘내가 그동안 뭐를 위해 이렇게 노력해왔을까? 배경만 있으면 입시고 뭐고 다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멍해졌습니다. 이후, ‘만약 아버지가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다면, 전교 1등은 아니더라고 성적이 향상되어 흔히 말하는 SKY에 들어가지 않았을까?’라는 유치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으며, 학교를 뛰어넘어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허탈감과 실망감이 온몸을 감싸왔고 수시를 비롯한 ‘학종’ 제도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날이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은 그동안 우리를 ‘정답’이란 명목 아래 가둬놓게 한, 주입식, 대입 위주의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볼 수 있으며,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교육제도의 뿌리부터 개혁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성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은, ‘내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모두 ‘어렵다’, ‘힘들다’라는 말은 많이 합니다. 현시대의 대한민국의 학생,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건 어떤가요? 학교란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고, 대인관계를 키우는 기관이지만, 대한민국에서 12년 동안 학생으로 있어 본 결과, 학교와 교육은,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수능’이란 단어와, ‘범위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운 모든 내용이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또한, 수학과 같이 답이 정해진 과목과 자기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과목까지도, 출제자와 집필자들이 답을 정해놓고, 그 답을 우리는 무조건 암기해 나가며 1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공부해 나갔습니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공부해오다 어느덧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학생의 관점에서 보는 대학입시는 너무나 처참하고, 심각했습니다. 물론 친구들끼리 웃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시간도 있지만, 학생 대부분 평균 5시간 정도 자면서, 휴일에도 공부해야 하는 처지에, 반강제적으로 공부하고, 대학을 가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좋은 생활기록부를 만들기 위해 담당 교사한테 다시 봐달라고 매달리며, ‘친구들을 이겨야 내가 산다’라는 신조로 모든 대인관계를 끊고 미친 듯이 공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심한 경우, 엄청난 스트레스와 주위에서 몰려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예도 있었습니다. 등급과 성적이 대학과 심지어 직업까지 결정해버리는 사회, 한 문제라도 더 맞기 위해, 서로 민감해져 삭막한 사회를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대입경쟁과 스트레스로 환멸을 느끼게 하는 주입식, 대입식 구조를 탈피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일을 찾고 이루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런 교육제도가 하루빨리 도입되었으면 합니다. 고등학생 신분이지만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활동 혹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난해 3월, 국회에서 있었던, ‘18세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청소년 농성과 삭발 기자회견’에 의견이 맞는 친구들과 자발적으로 참가한 기자회견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날 함께 참가한 사람들은, ‘18세 선거연령 하향’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담은 연설을 비롯해, ‘선거연령 하향을 담은 선거법이 개정될 때까지 농성하겠다’는 의견을 담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이후, 선거법 개정을 촉구하며, 청소년들이 앞장서 삭발을 했습니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졌고, 여러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힘들게 했으며, 선거법 개정이 이제는 절실하게 느껴지게 됐습니다. 제게 있어 ‘18세 선거연령 하향’은 언론과 학교에서도 토론을 해 평소에도 많이 접한 부분이어서 관심이 많았으나, 그간 활동을 통해 부모님과 생기는 갈등 등을 비롯한 내적 갈등이 있어 외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였고,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의 제 생각을 처음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외부에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세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청소년 농성과 삭발 기자회견'에 참가할 만큼 '청소년 선거권'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정재한 군은 이제 2개월 후면 만 18세가 됩니다. 하지만, 국방, 교육, 납세, 근로의 의무를 지니면서도, ‘선거권’을 가지지 못 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나요? 현행 헌법 제24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만 19세 이상의 성인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고, 40세 이상의 성인에게만 한정하여 대통령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흐름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OECD 34개국 중 우리나라를 제외한 33개국에서는 18세와 그 이하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율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본 선거권 제도는 세계적 추세에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부 보수층과 우익단체에서 주장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미숙하여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없으니 선거권을 부여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은 모순이 있습니다. 만약 청소년이 미숙하여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없다면, 사고력이 저하되어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노인과 장애인 일부에게도,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 성립됩니다. 역사 속 지난날, 3.1운동을 돌아보면, 당시 만 17세였던 유관순 열사부터 이화학당을 비롯한 전국 200여 학교의 청소년(학생)들이 주도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을 기여했으며, 재작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촛불집회 때는 사회문제를 지각하여 대부분 스스로 참가한 청소년(학생)들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역사 속, 그리고 현시대 청소년들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과연 청소년들이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청소년은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주인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청소년들에게 그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선거권을 제한했고, 그것은 역효과를 나타내어 청소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국회와 정부는 선거연령을 하루빨리 하향해야 하고, 청소년들에게 주기적인 정치교육을 통해 정치와 사회의 관심도를 높이는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을 알려 나가기를 바랍니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학 입시를 위해 하루하루가 치열합니다. 대학 진학에 있어 지망하는 학과가 있나요?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단체 등에서 논평과 기고문 작성, 사무 실무 익히기를 통해 프로젝트 기획과 진행을 해봤고, 토론회 등에 참석하여, 저의 의사를 밝히는 활동을 하는 등, 제 적성을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한 진로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찾은 적성에 맞는 학과가 있는 대학에 진학 후, 정부 부처와 국회 등에서 인턴십을 경험하면서 사회생활의 실무와 대인관계를 전문적으로 익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학 졸업 후, 국정전문대학원에 진학하여, 국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정책개발과 법제화에 관련된 연구를 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한 진로는,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내외 정치 상황 및 대응에 대해 전문적으로 이해한 동시에, 국제관계와 외교적 시각을 구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의 계획은 이렇습니다만, 작년에 KBS에서 방영된 ‘코인법률방’이란 예능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 이후, 법에 대해 관심도가 증가하여, 헌법에 대한 해설과 판례가 동시에 나와 있는 책을 구매하여 스스로 추가적인 공부를 해 본 이후, 변호사라는 직업도 제 적성과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최근에는 법조계로 진출하고 싶은 꿈도 생겼습니다. 청소년의 관점에서 현재 정치 상황을 본다면? 국회는 지난 4월, 국민 민생 현안 패스트트랙 지정 강행 이후 80일이 넘게 열리지 않다가 최근 극적 합의하여, 본회의와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 등을 이어나갔습니다. 일부 국회의원을 제외한, 언론에 공개되는 국회 상황을 보면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상호 간 존중은커녕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가짜뉴스 생성과 망언을 이어나가는 등, 국민이 신뢰할 수 없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민생을 내팽개치고, 국민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국회를 보고 있자니, 그들의 이중적인 잣대에 대해 너무나 실망스럽고, 더 이상의 미래는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국회는 더 이상의 분열을 야기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이념싸움과 민생을 담보로 한 분쟁을 멈추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그런 모범적인 국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요즘은 주로 대입공부를 하고 있지만, 짬이 날 때면 가출청소년(학교 밖 청소년)과 복지 취약계층에 관심을 두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련 다큐멘터리와 신문기사, 각 기관의 전문화 된 보고서를 읽고 있으며, 실태 파악과 구체적 해결책 마련을 위해, 이들을 지원할 정책을 구상하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미혼모, 미혼부를 포함하여 정부의 지원조건에 맞지 않아, 생활고에 허덕이거나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국민이며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고통받지 않기 위해 법적, 정책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전 세계를 다니며,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세상은 도전하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이 나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넓은 지구를 중심으로 나중에는 우주를 중심으로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가 되어 여러 방면에서 필요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청소년의 선거가 가능한 나라, 그를 넘어 청소년이 국회 진출까지 가능한 나라가 될 수 있기까지, 청소년이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펼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꿈과 기회를 지지해주시도록 독자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정재한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 사진을 비롯하여 지면에 게시된 모든 자료는 인터뷰이의 개인 제공으로 언론사의 정치적 의견이 내포되지 않음을 알립니다. 최종 수정 날짜: 2021년 8월 1일
실업률은 2000년 이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실업자 수는 IMF 때보다 2배라고 한다. 문화계의 청년 실업자 역시 날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도 아닌 외국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독일의 교향악단에서 10년 간 활동하며,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제3악장에 임명되어 오는 시즌 부터 부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과의 인터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 후, 독일 오케스트라에 적을 두고, 실내악과 독주 등 다양한 연주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입니다. ‘Avec G’와 인터뷰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예체능 전공 특성상 진로를 일찌감치 정하게 됩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일곱 살 때, 가까운 이웃 한 분이 음악학원 원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운영하신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함께 배웠는데요. 1년 정도 후에는, 당시 학원의 바이올린 선생님이셨던, 김희송 선생님의 권유로 개인지도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취미로 바이올린을 하던 중,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진로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학업에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할 것인가’에 대한 갈림길에 서서 고민을 오래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예술고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 전공자 중에도, 기악 전공자들은, 훨씬 더 일찍 예술중학교를 진학하여,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예고에 응시해보고, ‘붙으면 음악의 길로, 떨어지면 인문계로’라는 마음을 먹고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사실 실기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중학교 내신이 괜찮았던 덕에 붙게 된 것이었는데, 저는 이것이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예술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다른 고민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전공해야 하니, 저를 잘 이끌어줄 좋은 강사 선생님을 찾아야 했는데, 저도, 어머니도,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무작정 교내 현악 부장 선생님께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만난 우정은 선생님 밑에서 2년간 공부하며, 바이올린의 기초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전공생들이 익혀야 할 레퍼토리들도 많이 익혔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예고에 잘 적응하여, 입학 후 있었던 첫 실기시험에서 1등을 하고, 2학년 때는 교내 오케스트라 악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김대환 선생님을 만나 고3이 되었을 때, 여러 콩쿠르의 출전과 입상 경험을 쌓으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였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6년의 세월 사이,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와 뷔르츠부룩 국립음대에서 디플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서울대 재학시절 다양하고 많은 앙상블 활동을 했습니다. 크고 작은 앙상블 단체부터, 프로 오케스트라, 그리고 선후배, 동기들과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 연주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큰 흥미를 느꼈고, 그렇게 실내악과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 일원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유학 이전, 독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클래식 음악의 전통이 깊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 클래식 음악가를 비롯해 일반인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작곡가들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고요. 무엇보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필하모닉을 비롯하여 역사와 전통이 깊은 오페라극장과 오케스트라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저는 그런 독일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떠났던 2009년은 독일 대학 학제 제도가, 디플롬(학·석사통합과정)에서 학사와 석사로 바뀌는 과도기였습니다. 제가 진학했던 라이프치히 국립음대는 아직 바뀌기 전이었기 때문에 디플롬과정에 입학한 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디플롬을 마친 후, 바로 동 대학의 새롭게 바뀐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였는데, 이때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정단원으로 입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를 휴학하게 되었고, 다시 복학할 즈음, 현지 교수님께 독일의 정통한 클래식 음악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뷔르츠부룩 음악대학의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는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Meisterkalsse’라는 박사학위에 준하는 독일의 학위는 총 4학기로, 2년 과정입니다. 졸업시험의 부담이나, 오디션, 콩쿠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학기를 연장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연장하지 않고 2년 만에 졸업하였습니다. 독일에 와서 처음 만난 Aitzol Iturriagagoitia 교수님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Zakhar Bron에게 사사하신 스페인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셨습니다. 솔리스트로서, 그리고 현악 4중주단의 리더로서 종횡무진 활동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신 시기라 열정이 대단하셨죠. 3시간을 쉬지 않고 지도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보잉과 자세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훈련 시켜주셨고, 새로운 곡들을 익히는데 생각해야 할 것들, 연주 전반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뷔르츠부룩 음대에서 사사한 Herwig Zack 교수님은 슈투트가르트 체임버오케스트라에서 10년 이상 악장으로 활동하신 분이셨습니다. 많은 제자가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것은 물론,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과 함께한 3년간의 기간 동안, 많은 바이올린 솔로 레퍼토리들을 익혔고, 오케스트라 엑섭들, 악장으로서 익혀야 할 곡들도 이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바흐와 베토벤 등, 독일 음악의 해석과 연주에 대해 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유학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목표 설정이 중요할 것 입니다. 유학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또 ‘발전시키고 싶은지’, 유학 후에는 ‘어떤 음악 활동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목표하는 학업 후의 진로에 따라, 어떤 선생님께 배워야 할지, 교수님의 배경과 성향을 파악하여, 꼼꼼히 알아본 다음, 외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이후에도 현지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은 다름 아닌 교향악단의 단원으로서의 활동이신데요. 박사 과정을 끝낸 이듬해부터 독일 중부방송교향악단의 객원 단원으로 시작해, 이직을 거치셨지만 꾸준히 교향악단의 일원이셨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교향악단 체계를 비교해서 설명해주세요. 저는 라이프치히에서 디플롬을 마치고,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011년,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오디션에 합격하여 2018/19시즌까지 정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프로 오케스트라 경험은 대학 시절 객원 단원으로서 참여했던 것이 전부이기에 구체적인 시스템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한국 오케스트라의 유럽투어도 많아지고, 세계적인 레이블과의 음반 작업 등, 국내 오케스트라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한국과 비교하면 오케스트라의 역사가 아주 깊고, 그 긴 세월 동안 정립된 독일만의 시스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원선발과정이 있습니다. 단원들이 오디션에 직접 참여하여 투표하여 선발하고, 또 수습 기간 역시 단원들의 최종투표로 수습 단원의 종신 여부를 결정합니다.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출 동료를, 동료들이 ‘직접’ 선발하여 결정하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거쳐 단원이 되면,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게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동반 상승효과를 내는 것 같습니다.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특성 때문에 한국과 독일의 오케스트라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음악가들의 실력은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발전과 클래식 문화의 활성화를 이야기한다면, 연주자보다는 행정과 기획에 더 큰 비중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오케스트라들은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관객과의 거리를 점점 좁혀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덕에 클래식 공연을 찾는 관객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고요. 한국 특성상, 세계적인 지휘자나 솔리스트가 참여하는 공연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바로 이런 특성을 잘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에 단원으로 계시면서, 또, 실내악과 독주자로 활동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의 활동을 오케스트라에서 적극 지지해주고, 홍보한다면, 결국 오케스트라도 동반 홍보 효과를 보면서 더 많은 관객분이 오케스트라 공연에 찾아와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개개인이 오케스트라의 자산이라 여기고, 이들의 특성과 연주 활동에 맞게, 여러 연령층을 타겟으로 하는 홍보전략을 기획하고, 활용한다면, 관객확보에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 예측합니다. 제 경험을 빌려 독일 오케스트라의 입단 오디션을 준비하는 분들께 조언을 드리자면, 독일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음색을 중요시합니다. 보통 오디션의 첫 번째 라운드에서 고전협주곡을 연주하게 되는데, 많은 오케스트라가 막을 치고 진행(블라인드 오디션)합니다. 서류심사 혹은 데모 등 1차를 통과하여, 현지 오디션에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의 실력의 편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음색과 스타일로 한번 거르고, 다음 라운드는 낭만 협주곡,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 엑섭을 보게 됩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주를 추구하기보다는, 입단하고 싶은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들으면서 분석해보고, 본인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곡을 연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연주를 듣고도, 10명이면 10명, 100명이면 100명의 의견이 다 다릅니다. 음악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오디션에 떨어져도 낙담할 필요가 없고, 본인이 ‘어떤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주했는지’, 또 ‘얼마나 잘 표현하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결국엔 좋은 결과도 따라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8년간 활동했던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의 종신 단원 직을 내려놓고,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제3악장으로서 새 출발을 앞두고 계십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요. 데사우 극장에서 활동한 8년간 많은 오페라와 심포니들을 연주했지만, 그중에서도, Antony Hermus 가 상임 지휘자로 재임 중에 펼쳤던, 바그너의 ‘니벨룽엔의 반지’ 전곡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연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었는데, 반지 시리즈 전곡 연주를 통해 바그너의 스펙타클하고도 깊은 음악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었기에, 큰 여운이 남습니다. 과연, 독일인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여러 실내악 연주 가운데, 재작년에 있었던 ‘윤이상 탄생 100주기 기념음악회’가 생각이 납니다, 이는 같은 오케스트라 오보이스트 동료의 제안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현지 동료들이 한국인인 저보다 더 윤이상의 음악을 깊이 알고, 이미 많은 작품을 연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느끼는 한편, ‘윤이상의 음악을 더 공부해야겠다’라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기념음악회는 연주 전, 인터뷰가 지역 신문에 실리기도 하였고,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제1 바이올린으로서 많은 새로운 곡들을 익히고, 동료들과 실내악 연주도 하면서, 즐겁게 음악 활동을 했었는데요. 8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새로운 무언가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데사우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악장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악장으로서 전 오케스트라를 끌고 가면서 연주를 해보니 너무나 짜릿하고, 재미있어서, 다시 열정이 조금씩 살아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일반 단원이 아닌, ‘악장’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하고, 마침 공석이었던,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의 오디션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제 상태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운이 좋게도 제3악장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의 ‘종신 단원’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정말 큰 결정이었습니다. 저희 부부 모두 라이프치히에 유학을 와서, 학업을 마친 이후, 10년을 자리 잡고 살고 있었고, 큰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이도 유치원에 잘 적응하여 다니고 있었기에, 저의 ‘악장’이라는 개인적인 소망 때문에,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종신을 보장받은 직장을 나와 새롭게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심적인 압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가 전적으로 지지해주었고, ‘지금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단원으로 있었던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는 극장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심포니콘서트, 실내악 등 클래식 음악의 모든 장르를 전용 홀에서 연주합니다. 이에 반해, 제가 이번에 제3악장으로 임명된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닉은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오페라는 하지 않고, 주로 심포니콘서트만 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립오케스트라로서 지겐 도시를 중심으로 그 주의 남부지방 여러 도시에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 투어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20 시즌부터 베를린필 수석 베이시스트를 역임한 새로운 음악 감독 Nabil Shehata가 함께하게 되는데요. 그와 만들어갈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유학을 끝낸 예술계 종사자들이 영구 귀국하는 반면, 이제 독일에서 영구히 자리 잡으셨다고 볼 수 있는데요. 국내 활동에 대한 미련은 없나요? 처음 독일에 유학을 왔을 때는, 학업을 마치면 바로 귀국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 둘을 낳고, 또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벌써 세월이 훌쩍 지나 10년째 독일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 종신 단원이 되니, 그것을 내려놓고 귀국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가족이 생겨, 두 아이가 모두 다 독일에서 태어나, 잘 적응하면서 커가고 있기에, 계속 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계신 가족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켠에 미안함이 있습니다. 멀리 살고 있어 자주 못 보니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저희 부부 둘 다 음악을 하기 때문에, 음악가로서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인 독일에서 사는 것에 대해 이해해 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독일 모든 오케스트라와 극장은 여름에 한 달 남짓 휴식기를 갖게 됩니다. 이 기간에는 언제나 한국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독일 환경에 대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크고 작은 음악회에도 늘 연주회장을 채워주시는 관객분들입니다. 작은도시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열리는 음악회에도 항상 많은 관객분이 찾아주십니다. 나이대는 주로 장년층, 노년층인 분들이 많으신데요. 노부부가 한껏 멋을 내고 연주회장에 오셔서 음악도 감상하시고, 중간 휴식시간엔 샴페인이나 포도주를 곁들이며 즐기시는 모습들도 참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아내이신 바이올리니스트 김유선 님과 함께 활동하는 '부부 바이올리니스트 듀오'를 비롯해 같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도 유명합니다. 아내 분과의 첫 만남을 소개해주신다면? 아내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윤이상 국제 음악제 실내악 아카데미’에서 입니다. 함께 연주했던 현악 앙상블에서 옆에 앉아 연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대구 출신으로 당시 대학원생이었고, 저는 서울대학교 졸업을 막 하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멀리 떠날 것을 아는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이끌리어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계획한 것에 맞추어 저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1년 후, 아내도 제가 있는 라이프치히로 독일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원래 유학 생각이 없었었는데, 제가 설득을 하기도 했고, 본인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유학 와서 치른 첫 시험이자,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석사과정 입학에 합격하면서, 저희는 나란히 함께 라이프치히 음대를 다니게 되었고, 그해 여름 결혼을 했습니다. 같은 전공이라, 서로의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부분들이 많은 것은 큰 장점입니다. 그와 동시에, 함께 작업할 때, 서로 예민해서 생기는 긴장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긴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는, 지혜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둘째를 낳고, 아내는 유학 전 꿈꿨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독일에 유학하여 석사 공부를 마쳤는데, 육아 때문에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어서,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생각한 것이 바로 유튜브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연주를 할 수 있고,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많은 인원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집에서 취미 삼아 연주하여 올린 영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독자가 늘어나고, 꾸준히 좋아해 주는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유튜브 연주 활동을 해보자고 결심한 후, 재미있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참신하고 재미있는 편곡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치유를 선사할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최근 독일로 연주 투어를 온 한국 앙상블 단체의 연주를 갈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가서 연주도 보고, 한국의 동료들도 만나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었지만, 무엇보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말로 편하게 소통하며 연주하는 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는 매년 여름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늘 한국에서 지냈는데요 그동안은 아이들도 어렸기에 연주 활동할 생각을 거의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 방문할 때뿐만 아니라 시즌 중에 짧은 휴가 때라도 연주 기회가 있다면 활발히 나서서 해볼 생각입니다. 현재는 독일에서 영주권자로 자리 잡고 살아가고 있지만, 늘 마음 한편엔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들이, 훗날 어떠한 형태로는 한국 클래식 문화 발전에 유용하게 쓰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연주이든, 행정이든, 한국 클래식 문화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동할 계획이 있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어 악장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배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연주 활동을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을 기억하여주시고,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상민 영상 제공: YouTube 채널 ‘부부바이올린 부부의 힐링연주bubuviolin’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은 누구에겐 도전이고, 다른 이에겐 미래이다. 어떤 이는 ’꿈’을 ’별‘에 비유해, ’멀어서, 닿을 수(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자신이 소원했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연구 기관이자, 미국 의과대학인 존스 홉킨스대 권형배 교수의 이야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부터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과학부에 부교수로 임용된 권형배라고 합니다. 현재는 신경과학자이자 저명한 대학의 교수로 활동 중이시지만 학사전공은 축산학이셨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신경과학을 전공하게 되신 건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생물학에 많은 흥미를 느꼈고, 고등학교에서도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계속 생물학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유전공학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유전공학은, ’미래의 식량이나, 의약품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며 뉴스에서 많이 다뤄졌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재미와 흥미를 느꼈던 생물학이었기에 대학도 생물학과에 지원했었는데, 크게 생각지도 않았던 2지망이 되는 바람에 축산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입학 후, 타전공 과목도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었고, 하고 싶었던 생물학과, 화학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을 생화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석사과정에 진학해보니, 생물학에 정말 많은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그중 ’신경생물학‘은, 당시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학부에 ’신경생물학’이라는 과목도 없었고, 신경생물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은 국내 전체에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당시, 미래에 ’뇌과학‘이 크게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미국 유학을 신경생물학으로 정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론 20년 가까이 신경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하면서, 다행히 적성에 맞으며, 만족할 만한 분야를 찾아서, 후회는 없습니다. 고려대에서 생화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의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박사 취득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셨는데요. 미국에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대는 뉴욕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미국의 의대와 비슷하게 의사도 양성하지만, 연구도 굉장히 왕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경생물학 분야는, 교수님 대부분과 학과가 의과대학에 있어서, 의대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특별히 의대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처음 신경생물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대부분 말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에서는 전공 선택이 자유로웠기에, 다른 분야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경 생물학을 전공으로 택해서 공부하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고, 유학생이 끝까지 졸업하는 비율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그랬기에 주변의 동료, 선배님은, 저보고, ’그곳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하고, 제가 전기 생리학을 하는 실험실로 간다고 할 때, 좀 과장되게 말해서, ’미쳤다‘라고도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전기 생리학 분야에 대해 전혀 접해 본 적이 없고, 신경 생물학 자체에 대한 지식도 없는 데다가, 영어도 못 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최악이라는 건 대충 감으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까지 온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면, ’무조건‘, 그리고 ’언젠가‘는,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 한 가지만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정말 ’인생을 걸고‘ 열심히 했으나, ’열정‘만 가지고 잘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라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의 제 모습만 보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경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박사과정 당시, 전공과목도 낙제하고, 자격시험도 낙제했었습니다. 두 번 낙제하면 곧, ’강제 추방‘이기 때문에,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말을 안 해도 상상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엔, 불안감과 중압감도 문제지만, 유일하게 시험을 통과를 못 한 유학생으로 낙인이 찍힌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다들 부모님들과 친구들 불러서 하는 졸업 논문 심사도 통과를 못 했고, 저보다 나중에 입학한 후배의 졸업 파티에 가서 축하를 해 줬던 ’웃픈‘ 기억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학업 중,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제가 어마어마한 양의 실험 자료를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수도 있지만, 박사 6년 과정 동안, 일 년에 360일 정도를 일했고, 그 과정 동안에 생겨난 데이터의 양은 정말 하늘을 솟구치듯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논문도 좋은 곳에 여러 편 낼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 학과에서 가장 바보 같았던 제가, 졸업할 때 수여되는, ’최우수 논문상‘ 같은 상도 받았습니다. 과정은 다른 친구들보다 절실하고, 힘들었지만, 그리고 학위를 끝내기까지의 기간도 조금 더 길었지만, 참고 인내한 결과는 더 큰 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사 후 과정에 지원할 때는, 거의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었고, 그 후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이뤄졌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학업 외에 배운 점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여서, 그 많은 에너지가 축적되면 될수록, 나중에 폭발하는 힘은 몇 배로 크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의 박사 후 과정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아이 셋을 키우면서 육아와 연구를 동시에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이는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직장을 못 찾고, 직장을 못 찾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얻게 될지,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연구로는 최고의 성과를 내는 시기였는데, 반대로 가족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시기였습니다. 그 짧지 않은 기간을 버텨주고 희생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많은 것들을 얻고, 또 배웠는데, 하버드대학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은, 제 사고방식과 연구에 대한 이해 자체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옛말에, ’성공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계속 보고, 부대끼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논문과 실험 이외, 은연중에,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어질 수 있는 배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이 나중에 랩을 꾸려나갈 때도 큰 도움이 됐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의 박사 후 과정을 마치신 후 6년간 미국 플로리다와 독일 뮌헨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국내외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많은 정보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독일의 연구소입니다. 노벨상 수상자도 많이 배출했고, 각 연구소에 자금이 충분히 제공되서, 연구 주제를 고를 때 위험 부담이 큰 내용도 연구비 걱정 없이 시도해 볼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 있는 연구소입니다. 제가 교수지원을 할 당시, 때마침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미국 플로리다에 최초로 설립되어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계획은, ’처음부터 연구비를 많이 투자해서 초반에 승부를 본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막스 플랑크가 가지는 큰 장점이고 그걸 최대로 활용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제 독립적인 실험실을 운영할 때, 어려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혼자 실험을 할 때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연구를 해 나가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연구비 부담은 적었지만, 좋은 인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실험실을 세팅하는 것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과학 특성상, 연구 분야도 빨리 바뀌어서,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되었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그룹 리더로서 전반적인 연구 방향을 잡을 때, 주어진 시간과 재원을 가지고,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인지‘, ’결승점은 어느 곳으로 정할 것인지‘, ’누구에게 달리게 할지‘, 이런 모든 것들이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제가 모든 것을 다 정해야 했기에, 결정의 순간에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연구 주제는 ’학습과 기억‘인데, 항상, ’무엇이 본질일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뇌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변화가 뭔지, 어떤 요소들이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뇌의 어디에 기억이 저장되는지, 그것을 안다면 실제로 그 기억을 바꾸거나, 없앨 수 있는지, 심지어 가짜 기억도 심어줄 수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으면, 기술 개발 실험도 같이 했습니다. 한국의 연구소와 비교해 볼 때, 미국은 확실히 장점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연구자의 풀이 아주 방대하고, 또 연구비의 규모가 월등히 높습니다. 둘째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재능을 가진 연구원들이 지원합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가지는 막연한 불안감, 정규직에 대한 압박 등, 스트레스받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가진 계획과, 삶에 대한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고려하고, 또한, 가족 배경에 따라서, 자리 잡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 한국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고, 미국이 더 잘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7년 동안 연구하면서 여러 논문도 내고 상도 몇 번 수상하였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걸 한가지 꼽는다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동물에서 빛을 이용하여, 행동과 감정에 관련된 신경 세포를 표지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입니다. 이 연구를 통하여 기존의 신경 생물학이 가지는 한계선을 바꿀 수 있었고, 다른 많은 사람의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 개발로 두 개의 논문을 ‘Nature Biotechnology’와 ‘Nature Methods’에 발표했고, NIH(국립보건원)에서 주는 Director’s Pioneer Award도 받게 됐습니다. 연구비의 규모도 커서, 연구실 운영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고, 좀 더 깊은 견해를 가지고 연구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국립보건원에서 받은 이 상은, 미국에서도 아주 받기 힘든 영예로운 상이라서, 제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0년 간의 박사/박사후과정, 그리고 6년 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올해,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임용되셨습니다. 또 다른 도전을 하는 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과학부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그룹 리더 포지션은 5~9년 사이에 떠나야만 하는 규정이 있어서, 가장 적정기라고 생각하는 시기에 원하는 여러 곳에 지원을 했고, 다행히 많은 학교에서 저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면접을 다녀온 학교 대부분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습니다. 그 중, 저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을 선택하여, 결정했습니다. 연구소에서 대학교로 옮기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보통 의대에서는 강의 부담이 많지 않고, 연구비에서 모든 실험 장비와 재료, 저와 연구원들의 월급을 대부분 충당합니다. 제 가장 큰 의무는, 연구비가 부족하지 않도록, 계속 받아오는 일이고, 자원 받은 돈으로 연구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많이 내는 것입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점은 국내 대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교수의 급여가 학교에서 지급되는 시스템이라, 연구비 충당에 대한 부담이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연구소에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특별한 압박은 없습니다. 올림픽에 비교해볼까요? 출전하는 선수들은 모두 시합 전, 각자 자신의 최고 기록과 상태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장단점을 본인과 다른 선수들이 다 알고 있고,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고, 최대한 집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빛을 발합니다. 연구도 비슷한 성향을 가집니다. 요즘 연구는, 우연히 뭔가 굉장한 걸 발견하는 확률은 거의 사라지고, 최신 장비와 기술을 가지고, 인력을 많이 동원해서, ‘블록버스터급’의 논문을 제출할 때, 분야의 명성 있는 잡지에도 실리면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말할 수 없이 좋아야 하고요. 현재의 저는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크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국내 대학, 연구소 등과 연계하여 분야의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한국의 여러 교수님과는 이미 친분도 많이 있고, 실제로 같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데로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과 2016년에 받은 상은 미국에서 연구하는 신경생물학자분들이 만드신, ‘Association of Korean Neuroscientists’(미국 한인 뇌과학자 협회)라는 단체에서 받은 상입니다. 매년, ‘Society of Neuroscience’(뇌신경학회)에서 모임을 갖고, 한국 과학자들의 모임을 주선하며, 각각의 한국 과학자들의 힘은 약할지 모르지만, 모였을 때, 큰 시너지와 힘을 내려는 취지의 모임입니다. 그 규모가 점점 커지는 만큼, 저도 힘을 집결시키고, 서로 공동 연구도 많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과학자들의 수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규모가 작습니다. 그만큼 목소리도 약하고, 힘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각각이, 뿔뿔이 흩어져서, 본인의 일만 한다면, 그나마 힘도 없을 것입니다. 작더라도 이런 모임이 계속 이어지면서 서로 도울 수 있다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는 단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국내 신경과학의 수준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종사하는 사람 수가 없고, 그렇기에 연구비의 지원과 환경이 절대적으로 열약합니다. 물론, 제가 한국을 떠나올 시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으며, 지금도 빠르게 성장 중입니다. 많은 과학자가 북미나 유럽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고, 또 귀국하여, 한국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후배도 이제는 유학을 떠나올 때, 이미 경쟁력과 정보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제가 한국 과학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골프의 박세리 선수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까지 가고 난 후, LPGA에 대한 도전의 장이 열렸고, 지금은 수많은 ‘세리키즈’ 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구선수 박찬호가 있었기에,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금의 추신수, 류현진 선수 등이 좀 더 활동하기 좋은 조건이 되었습니다. 제 목표는 일단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고, 좋은 선례를 남겨서, 나중에 도전하는 후배들이, ‘저 정도는 나도 해볼 만하다’라는 동기 부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과학 분야에도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나오고,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전체적인 한국 과학의 수준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입니다. 1992년에서 2012년까지 20년간 학업을 하고, 그 후,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또 다른 6년이 흘렀는데요. 만약, 중,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진로를 재선택 할 수 있다면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나요? 저는 다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다시 과학자가 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제게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도 하지만, 소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다양하게 많은 재능이 없는 것은 저의 장점입니다. 다행히 성격도 조용하고, 운동, 음악, 미술 등에 다 재능이 없는 제게 ‘과학자’란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처음 대학원에 지원하면서 가졌던 꿈은, ‘국내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이미 제 꿈을 이뤘습니다. 게다가 제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제가 처음 가졌던 꿈보다 더 큰 꿈을 이뤘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별 고민이 없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 배우, 가수 등이 가장 힘들었을 때가 평생 꿈꿨던 큰 상을 받거나, 히트작품을 하고 난 다음, 그다음 시즌과 작품을 준비할 때라고 합니다. 수많은 과학자는, ‘평생에 한 번쯤은 환경이나 과학 논문은 발표해봐야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정말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 그 기쁨은 반년 정도 지속됩니다. 그다음 논문 발표할 연구 과제가 마땅치 않으면, 그 부담감이 처음 목표했었던 논문 발표를 위해 노력했었던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해집니다. 어느 정도 논문 발표하는 수준이 되고, 어느 정도 연구비를 타게 되면,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이것을 충족하려면, 최소한 여태까지 한 정도를 하면, 그냥 본전이고, 그 이상의 성과를 내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어, 좀 하네!’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좋은 논문을 하나 발표하면, 어쩌다 ‘소 뒷걸음질하다가 쥐 잡은 격’이라는 인식밖에 주지 못 합니다. 본인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이제 언덕 하나를 넘은 경우인데, 그 정도의 노력을 쉬지 않고 계속했을 때 단지 같은 높이에 머물 수 있고, 그 이상을 해야 더 높은 산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 산을 넘으면, 그 뒤에도 또, 다음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루에 10시간 연구하던 사람은 이제 12시간, 14시간, 16시간 이렇게 시간을 늘려야 할까요? 이처럼 연구비와 논문을 잘 내도 아이러니하게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도, '위기'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럴 때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어쩌면, ‘이제 그만하면 됐다. 잘했다. 이제 산에서 내려가자.’라는 마음도 들지 모릅니다. 다음 산으로 갈지 말지, 그만 내려갈지, 올라가려면 어떻게 갈지, 이 모든 것은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 들어 올 때 노 저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는, 물이 들어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물이 들어오니,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막상 바다에 나가 보면, ‘뭘 해야 하지?’에 대한 고민이 쌓이며, 앞일은 더 막막해집니다. 지금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노를 조금 저어 보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다에 나갔던 윗세대들의 조언도 얻을 것이고, 저만의 새로운 길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기술 개발의 도움으로, 기존의 노를 젓는 방식은 안 먹힐 수도 있습니다. ‘더욱 열심히 일해서 네이처, 과학 논문을 백 개까지 발표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럼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노벨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르지만 아마 더 큰 부담감이 생기고, 삶이 더 피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뼈를 깎는 노력에, 운도 많이 따라 줬고, 시기상 바다로 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박사과정 시절, 나중의 목표가, ’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의 청년들에게 꿈을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교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쑥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져서,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되고는 싶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열쇠를 쥐어야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세포 배양 백 개 하던 것을 더 열심히 해서 이백 개를 하는 것이 답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배양하던 세포를 다 죽여서 자신만 살아남는 것이 답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세포 배양을 할 시간에 그것을 자동화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답일까요? 생각보다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납니다. 저도 아직 답은 모르지만, 더욱 많은 도전자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물길을 내는 것이, 기존의 길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나가는 것 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저만의 실험실을 시작할 때, 나이 많이 드신 교수님들이 여러 조언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한 우물을 파라‘, ’나만의 영역을 구축해라‘,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20년 전에는 우물을 팔 땅도 많았고, 우물만 파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물을 파면, 자기 식구들 정도만 마실 물만 나옵니다. 이미 어떤 사람들은 송수관으로 물을 자동으로 실어 나르고 있고, 사막에도 물을 끌어서 공장을 만듭니다. 그런데도 옛 방식으로 우물을 파고 있으면 그게 정답일까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쭉 시도해 왔던 일을 오히려 최소로 하고, 잘 모르면서 위험 부담이 큰, 애먼 짓을 계속 시도했습니다. 그 애먼 짓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크게 보면 그 노력이 언젠가는 새로운 물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남의 밥그릇을 뺏지 않고도, 많은 사람이 혜택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연구를 계속해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사진 제공: 권형배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목회자의 소명이란 어떤 것일까? 미주 장신대학교 교수이자 다우니제일교회에서 목회를 맡고 있는 안성복 목사와 함께, 그가 걸어온 목회자의 길, 목사로서의 소신을 비롯해, 국내 사회의 흔들리는 기독교의 입지 속 지켜야 할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독자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 다우니 시에 위치한 다우니 제일교회를 섬기고 있는 안성복 목사입니다. ‘부르심’이라고 표현할까요? 언제,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목회자로서의 진로를 택하게 되셨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이 ‘목사’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딸 셋을 낳은 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라는 서원 기도 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목회하셨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린 제 눈에 설교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을 모아두고 그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 놀이’를 할 정도로 목회를 좋아했었어요. 물론, 제 나름대로 방황했던 청소년기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결국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대학 재학 중에도 ‘이 길이 정말 내가 가야 하는 길인가?’라는 더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직후입니다. ‘신학대학에 복학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깊어져 갈 당시, 아버지의 권유로 기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날, ‘나를 지으시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분명한 소명감’을 가지고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 번도 망설이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목사가 된 후에도, 모든 직장생활이 그렇듯, 언제나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말 못 할 힘든 고충도 있으셨을 법합니다. 원하는 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만, 목사가 된 것은 제게 언제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남들에게 말 못 할 힘든 고충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감사를 잊게 하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꿈속에서 제가 아주 큰 부자가 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속의 제겐 목회지가 없었습니다. 설교할 수 없고, 섬길 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꿈을 깨고 나서, 그것이 꿈인 것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주보에 ‘목사 안성복’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지요. 2017년, 처음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공부할 때, 당시 환율이 1700원 정도까지 올라가, 유학생에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듬해, 교회의 교육 목사로 시무하게 되어, 한 달에 600불(현 환율 한화 약 70만 원)을 받으며 생활할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미국 땅에 내가 섬길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정말 어려운 시절에 저의 큰 누님께서 제게 보내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라는 구절이었는데요. 이 말씀은 언제나 제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대한 자세가 다른 것이지요. 저는 어려움 또한, ‘제게 주신 은혜’라고 믿습니다. 목회학 박사이시지만 현재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수 중이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왔습니다. 2010년,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학교에서 제가 연구한 학문은 목회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설교는 심리학, 교육학, 상담학, 과학, 철학, 미술, 음악 등 우리 인간의 다양한 분야를 통한 성경적 접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위과정을 마친 지 7년이 지났을 때, 약간은 무뎌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제가 자극되며, 발전될 만한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스스로 독학하고, 그것에 만족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나만의 만족’보다 학문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위과정 이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윌리엄캐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수학하고 있는데, 제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언어학 관련 분야입니다. 언어학의 ‘화용론’ 중에서도 ‘적합성 이론’을 중심으로 ‘적합성 이론을 중심으로 한 성서 해석과 설교’가 제가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저의 연구가 앞으로 펼치게 될 설교뿐 아니라 많은 분의 설교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 담임으로서 목회 활동을 하시는 것 외에도 미주장신대학교 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계십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 여름 성경학교 교사 교육 강사로 오신 어떤 목사님께서, ‘교회는 어제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내일이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그 말씀은 제게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는 정체에서 쇠퇴로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제 지인 중 한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혹한기를 준비해야 한다.’라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영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 회복’이 곧 ‘교회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은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할 ‘제자도’입니다. 목회자들은 먼저 이 ‘제자도’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도’가 없는 설교는 그 말이 유창할지언정, ‘능력’이 없습니다. 혹여 세상에 보이는 ‘수적인 능력’은 나타낼지라도, 결국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를 내지 못한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그 ‘무화과’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말라버렸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부인의 삶으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사회적 몇몇 유명인사들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기독교 전체의 위상과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자부심을 지니기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까요? 사회적 논쟁거리를 일으키며 소위 교회를 ‘욕되게’ 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외딴 농촌에서, 외진 섬에서, 나이 드신 어른들을 섬기시는, 또한 사회적 차별대우를 당하는 이주민 노동자들을 섬기시는 귀한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를 세습하시는 분이 계시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도 내지 않고 말없이 떠나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도를 성추행하는 도저히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청량리 미아리에서 살아가는 상처받은 여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해 가고 계시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에 머리 숙여 죄송하지만, 단면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 또한 성숙한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가운데 윤동주의 ‘서시’가 있습니다. ‘서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끊임없이 묵상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한 아이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승리하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용기란 무엇이지요?’ 아들은 아버지가 전쟁 무용담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것이 용기다!”라고 말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한 야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피어있는 꽃 하나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용기란 바로 저런 것이다. 누가 돌아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꽃’을 피우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향기’를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용기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독교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고서 말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 잘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가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꽃’을 피우는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바꾸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간다면, 분명 교회는 다시 세상의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부심은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복음성가 중.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마음에 와닿는 찬양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가 되어 그를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저도 내일 일은 모릅니다. 그저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분명한 것 하나는, 제 길을 함께 나아갈 그 '누군가'의 존재 입니다. 저는 제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제 손을 붙들고 가시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갑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목사로서의 ‘야망’이 아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vec G'에서 부족한 제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Avec G’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촉매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안성복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국내에서 '드론'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시기에 '드론 사업'에 뛰어들었고, 공동 창업한 드론 전문 (주) 바이로봇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주) 바이로봇의 공동 창업자이자 CSO인 홍세화 이사와 함께 드론 시장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천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술과 비즈니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홍세화입니다. 2011년, 주식회사 ‘바이로봇’을 공동창업한 이후, 전략담당이사(CSO, Chief Strategic Officer)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학부에서 기계공학을 졸업하신 후, 로봇공학을 석사로 진로를 택하셨습니다. 학창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어려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서 블럭 장난감을 몇 시간씩 가지고 놀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란에는 늘 ‘과학자’라고 적었습니다. 당시에는 ‘공학’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과학 과목이 제일 좋았었기에,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민 없이 이과를 선택했어요. 특히 물리 과목이 재미있었습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수능 응시 때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물리를 선택했습니다. 정확한 계기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대학전공은 이미 ‘기계공학’으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회사에 놀러 가 끊임없이 돌고 있는 생산 장비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기계와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품질 문제로 늘 고민하시던 아버지께, ‘자동으로 불량을 골라내는 기계를 만들겠다.’라고 천진난만하면서도, 당돌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어렴풋 납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쳤던 드럼이 너무 좋아서 고3 초반에 잠깐 드러머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지만, 대학전공은 큰 이변 없이, ‘기계공학’으로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대학 시절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도, 공학보다는, 창업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자라오면서 봐왔던, 아버지의 사업에 대한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더 큰 세상’과 ‘가치’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전공과목 외에도 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등 다양한 과목들을 수강했고, 휴학하면서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선배들과 동기들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를 만큼,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후, 복학하여 여전히 취업과 창업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로봇공학개론’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론적으로 배웠던 전공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의시간에 접했던 여러 로봇제품과,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인 로봇기술은, 제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학부 졸업논문도 로봇 관련 연구를 하게 되었고, ‘로봇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창업을 목표로, ‘로봇을 더 깊이 알고 싶다’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로봇 ‘기술’ 자체 보다, 로봇이 주는 ‘가치’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코스모스 졸업을 앞둔 7월, 로봇에 대한 실무경험도 하고, 사업을 준비할 생각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하 생기원)의 로봇연구그룹에 학생 연구원으로 선정되어, 로봇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기원에서의 경력은 대학원 진학과 바이로봇 창업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013년 석사 졸업 전인 2011년, ㈜ 바이로봇을 창업하셨습니다. 시기상, 이미 로봇공학으로 석사학위 진학 훨씬 전 자신의 로봇 체계를 확립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창업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당시 생기원의 로봇연구그룹에서는, ‘견마로봇’, ‘웨어러블로봇’, ‘무인자동차’, ‘비행로봇’ 팀이 있었습니다. 생기원에 들어간 목적 자체가 창업을 위한 실무경험이었기 때문에 저는 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분야를 찾았습니다. 그 중, 비행로봇팀의 기술은 이미 미디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고, 기업과 기관에 기술이전 논의도 있었기에 저는 더욱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당시 비행로봇팀의 제어부와 기구부를 담당하던 연구원이었던, ㈜ 바이로봇의 공동 창업자이면서, 현재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지상기 대표입니다. 2011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저는 ‘비행로봇’ 팀에 합류하여, 드론 연구와 창업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2011년 8월, 청년창업사관학교 1기로 선발되어, 창업지원금을 받게 되었고, 그 밑거름을 바탕으로 ㈜ 바이로봇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창업 전, 실제로 날아다니는 시제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술력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개발된 기술이, 고객들에게 시판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무인'이라는 것은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드론' 연구에 집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드론은, ‘하늘을 나는 로봇’입니다. 로봇기술과 비행 기술의 접점에 존재하지요.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다양한 드론 서비스의 상용화까지는 아직 개발하고 검증해야 할 기술, 정비하고 새로 만들어야 할 제도 부분이 아주 많은 초기 단계의 상품입니다. 아주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고, 영상촬영, 운송, 농업, 군사,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며 그 가능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상의 유닛들은 다양한 지형지물로 인해 이동에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 유닛들이 연결하지 못하거나, 연결이 어려운 지점들을 드론은 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드론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물리적인 공간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바이로봇의 주요 활동상을 소개해주세요. 바이로봇의 사업모델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완구용 드론입니다. 완구용 드론은 부담이 적은 가격으로 일반인들이 드론과 친숙해질 기회를 제공합니다. 제품은 이마트 벤더사로서 완구 브랜드인 ‘XTS’ 3종 제품을 전국 이마트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육용 드론입니다. 국내 방과 후 과목으로 드론 교육 과목이 개설되어 현재 매 학기 5,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드론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2016년, 세계 최초로 코딩교육이 가능한 드론 제품을 출시하여, 큰 주목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6~7세 유아 교육 시장에도 진출한 이 교육용 드론은, 미국, 태국, 일본 등 세계 각지의 나라에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창업 초기부터 해외 시장을 노리며, IFA(독일), CES(미국) 등 세계적인 전시회에 다수 참가하여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2018년에는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드론 교육 프로그램을 각색하여 단기 해외선교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첫 시범사업을 기반으로, 다른 국가로 퍼질 수 있게끔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바이로봇의 CSO(전략담당이사)로서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계시나요? 주요 업무는 기술과 사업 간의 ‘균형’을 잡는 역할입니다. 엔지니어 출신들이 창업한 회사 특성상 시장의 수요보다는 기술에 집중하는 오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예컨대, 시장에서 바라는 충분한 기술 수준은 ‘2’ 정도이고, 그 기술이 필요한 시기가 바로 ‘A’ 타임이라고 했을 때, 기술 수준을 ‘3’으로 높이느라, 필요한 타이밍 ‘A’를 놓쳐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시장에서는 기술의 수준보다는 출시 시기가 더욱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현재 시장을 분석하고 미래의 시장을 예측하여 기술과 상품의 단계별 이행안을 구상합니다.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상품과 기술을 파악하여, 상품 프로젝트와 R&D 프로젝트를 각각 기획하고, 상호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경쟁사의 제품과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른 분야의 기업을 탐색하는 것도 주 업무입니다. ㈜ 바이로봇 CSO의 시선에서 보는 과거와 비교한 현재 드론 시장은 어떠하며, 미래 드론 시장은 어떻게 예측하시나요? 2013년 말, 바이로봇이 첫 제품을 출시하고 2014년 한 해 동안만 30회가 넘는 국내외 전시회를 돌며 직접 고객을 만날 때만 해도, ‘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분을 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드론을 판매하는 곳이 드물었기에, 전시회 주최 측으로부터 초청받아 무상으로 장소를 지원받아, 드론 체험 행사와 판촉 행사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15년, CES에 처음 드론 전용관이 세워지고, 세계적으로 많은 드론 기업이 참가하는 중에 국내에서는 바이로봇이 유일하게 참가해서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2016년 CES에 참가했을 때는, 2015년에 나왔던 드론회사 중 절반 이상이 참가하지 않았고, 다른 새로운 기업들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참가하는 한국기업도 하나, 둘, 늘기 시작했습니다. 드론은 4차 산업혁명의 범주에 속해있는 다른 분야들처럼, 기술과 상품의 발전과 변화, 보급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이제는 어느 완구점에 가서도 다양한 드론을 만나볼 수 있고, 드론에 관련된 자격증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통제된 환경 사이 존재하는 다양한 산업 분야 상의 드론 활용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관련 제도들도 정비되어가고 있습니다. 드론 자체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보다, 유통이나 운송 등, 실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 회사에서 드론을 활용한 서비스로 기존 가치를 향상 시키는 사례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로 인해 드론 기반 기술이 더욱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날, 일반인들이 별다른 지식 없이 일반 가전제품을 사용하듯, 드론 또한, 사회에서 괴리감 없이 상업화되는 시대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20살 초반에 세웠던 세 가지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목표했던 첫 번째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기업을 세우는 것’. 마지막은, ‘말씀으로 양육하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목표가 어떠한 모습과 방법으로 이루실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 이전에 올바른 과정에 집중하며, 인생의 속력보다는 방향성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끝까지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과 부족한 저에게 인터뷰 기회를 주신 [AVEC G]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여, 이 기사를 보시고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email protected]로 이메일 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홍세화 영상 제공: ㈜ 바이로봇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다른 많은 호칭 중에도, '무명배우'를 자처하며 '무명배우'라는 일종의 캐릭터를 자신에게 접목시켰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무명배우'하면 '이지혁'을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번 달 초,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라는 책을 출간한, 배우 이지혁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배우라 불리기 가장 좋아하는 글도 쓰고 가끔 연출도 하는 사람 이지혁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단역으로 촬영을 하고 있고요. 함께 하는 영상팀과 영상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두레자연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 출신이십니다. 학교 특성상 다양한 활동을 하셨을 법한데요.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중학교 시절엔 노는 것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 제게 선생님들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셨죠. ‘학교 공부가 정말로 삶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였죠. 두레자연고등학교(이하 두자고)는 기독교재단 산하의 우리나라 1세대 대안학교이며, 제가 5기입니다. 지금은 대안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예전과는 교육방식이 다르고, 사회가 받아들이는 시선이 긍정적이지만, 제가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대안학교는 일반 학교에서 적응을 못 하고 방황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가는 학교였습니다. 전교생도 많지 않고, 그만큼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관계가 더 친밀했었습니다. 중3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하는 시기에 어머니가 두자고 진학을 추천해주셨어요. 하지만 당시엔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중했어요. 친구들과 떨어지기가 너무 싫었죠. 두자고는 입학시험 과정에서 내신을 보지 않고, 오직 면접과 특기만 봤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었어요. 면접 때, ‘왜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싶냐?’라는 질문에, ‘머리 기르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보기 좋게 낙방했죠. 그렇게 두자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너무 공부만 시키는 거예요. 엄청나게 답답했어요. 아침 일찍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밤 10시까지 빽빽한 학과목 수업 시간에 맞추어 학교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데, 쳇바퀴 굴리듯 매일 같이 공부에만 얽혀서 사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면서 미래를 한번 생각해봤어요. '이렇게 공부하면서, 모두가 목표로 하는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 후에는 전쟁 같다는 회사에 입사해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어요. 학교에 나가지 않고, 가출도 하고, 학창 시절이지만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러면서 선생님께 반항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결국 자퇴를 하게 되었고, 두자고에 재수를 통해 들어가게 되었어요. 대안학교 특성상 공부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시려고 노력하셨었습니다. 해외 이동수업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봉사활동도 가고, 문화생활이라고 해서 뮤지컬이나 영화도 보러 가고, 제주도 하이킹, 지리산 종주 등, 일반 고등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상상도 하기 힘들 법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학과 수업보다 더 많이 배웠습니다. 두자고 시절, 제주도 하이킹 당시 기억이 나요. 이때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온종일 자전거를 타니깐 엉덩이가 너무 아픈 거예요. 첫날은 괜찮았었는데, 둘째 날부터 많이 힘들었어요. 게다가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고, 왜 바람은 뒤에서 부는 게 아니라 맞바람만 부는 건지, 그렇게 바람과 사투하며,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서, 끝없는 오르막길을 올랐습니다. ‘이 오르막길이 끝나면 내리막길이 있겠지….’라는 기대감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오르막이 있었어요. 정말 ‘끝없는 오르막길’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오르막길이 많았어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내리막길은 제주도에 없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모든 기대를 접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리막길을 만났어요. 제가 올라간 만큼 내리막이 끝없이 있었습니다. 페달을 밟지도 않고, 오랫동안 ‘시원하게’ 내려온 거 같아요. 어린 나이었지만,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려움은 계속되지 않는다. 지나가는 수많은 시간 속에 한순간일 뿐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하고 말이에요. 중요한 건, 당시 상황을 맞이했던 저 자신과 그 시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배울 수 있었던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선배와 동기들과 극단을 창단하고 작품을 올렸어요. 그때 두자고 선생님들과 후배들이 관람하러 와주셨습니다. 공연 후, 두자고 연극동아리 담당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연극동아리를 맡아주면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모교의 연극동아리 강사로 출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연극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아르바이트보다는 시급이 높게 주신 것도 출강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라면…. 제가 너무 솔직한가요? (웃음) 그렇지만, 한 번도 인생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던 제게, 참 의미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첫 출강 때는 ‘내가 뭘 알아?’ 하는 마음으로 후배들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제 마음을 두드린, 가장 큰 마음가짐은 ‘내가 학창시절 만나고 싶었던 선생님이 되자.’라는 것이었어요. 가르치기보다는, ‘나눈다’라는 마음이 컸었고, 아이들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어요. 학교 입장에서는 어쩌면, 저 같은 선생의 존재가 곤란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출석부도 안 불렀거든요.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기 싫은 학생들은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깐요. 동아리까지 억지로 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저도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청소년 연극제에 제가 쓴 작품인, ‘Flower & Death’라는 작품을 올리기도 했고요. 저의 연차가 채워지면서 욕심이 생겼던 거 같아요. ‘이렇게 하면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오만함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부담을 느꼈고, 해가 바뀌면서 동아리 인원이 확 줄게 되면서, 결국, 저도 해임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3년 동안 짧고도, 임팩트있는 강사 생활을 역임했어요. 언제 배우의 길에 대한 확신을 두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게 되셨나요? 배우의 꿈은 다름 아닌 아이돌 가수 H.O.T.를 보면서, ‘연예인이 되고 싶다’라는 막연한 동경으로 출발했어요. 그러다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 저의 삶은 정말 엉망진창이었거든요. 군 생활하는데, ‘전역 후에도 그렇게 살면 내 인생이 망가지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일기를 쓰고, 독서를 시작했어요. 미래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신앙적인 이야기라 부담감을 느끼실 수도 있는데, 그래도 당시 겪은 사실이고, 제가 꿈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나가게 해주는 힘이라 이야기를 해볼게요. 군대에서 ‘일병’은 ‘일하라’고 일병이에요. 그만큼 일이 많고 소대를 비우면 안 되는 자리지요. 군대에는 전군이 다 모여서 하는, ‘구국성회’란 집회가 있어요. 모든 민머리의 군인들이 모여 찬양하는 신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일병 때, ‘구국성회’가 열렸는데요. 저는 당연히 일병이니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제가 소대에서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서 전, ‘내가 없으면 소대가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중대장님께서 부르시더니, ‘구국성회’를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군대는 ‘까라면 까’야 하잖아요. 그렇게 소대에 민폐를 끼치며 부담감을 느끼며 참여했었습니다. 그날 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일병이라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있지 못 하는 시기였는데도 말이죠. 배우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정하지도 않았는데, ‘배우는 절대로 못 될 거 같다’라는 생각이 막 몰려왔어요. 그 괴로운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런데 아침에 한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간증의 내용에 저 역시 희망을 느끼며, ‘배우를 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이 확 올라왔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주신 계시 같았어요. 그때 ‘난 배우가 될 거야’라고, 저의 미래를 확신했습니다. 전역하고, 수능을 위한 공부와 연기 교습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연기 관련 학과 진학을 목표로 한 입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가고, 오전에는 노량진에서 수능을 위해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뚝섬에 있는 연기 연습실을 갔어요.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입시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수능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초가 부족해서 그런지 수능점수가 정말 안 나왔어요. 응시한 학교 중, 수능 성적을 반영하는 학교는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했어요. 감사하게도, 세 학교에 합격했는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었기에, 합격한 학교 중, 유일하게 서울 소재에 있던 서일대학의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 생각하는 연기와 배우에 대한 직업상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저는 제가 연기를 잘할 줄 알았어요. 건방진 생각이고, 위험한 생각인데, 연기가 ‘쉬워’ 보였어요. ‘근자감’이죠. ‘근거 없는 자신감’. 그런데 연기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그런 것들이 처절하게 무너졌어요. 일단 경북 울진 출신이라 사투리도 고쳐지지 않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무대 위에서 제대로 걷지도, 서 있지도 못 하는 자신을 보면서, 많이 무너져 내렸어요. 그래도 희한하게, 그 안에서도 소소한 재미와 희열이 있었어요. 만약 ‘힘듦’과 ‘어려움’만 있고, ‘흥미’가 없었다면, 금방 포기했겠죠. 처음엔 연기에 대한 세계관이 확립되어있지 않았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했고, 난관들을 하나씩 돌파해나가면서, 엄청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고, 제가 모르는 것을 하나씩 찾아, 정복하는 맛이 있었어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변모했고, 자랐습니다. 얼마 전엔, ‘내가 왜 연기를 하고 싶은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봤어요. 연기 자체만으로는 힘들면서도, 재미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너무 제 인생이 ‘답’이 없는 거예요. 버텨야 하는데, 저 자신을 자극할만한 활력소가 필요했어요. ‘연기는 무엇이고? 배우는 무엇일까?’라는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연기는 캐릭터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에요. 더 나아가 생각한 것은, ‘캐릭터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삶을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 배우의 직업인데, 지금 당장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면서, ‘아. 이 정도 근거면 내가 충분히 연기해 내가고, 배우를 해나가는 이유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좋은 사람’이 다 ‘좋은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배우는 이기적이어야 하고, 날라리여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맞아요. 인성적으로 부족한 분 중 연기를 잘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하지만 저는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이고, 좋은 연기를 한다.’라고 굳게 믿고,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연기를 하고, 배우로서 사랑받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나온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드리고, 웃음을 드리고, 한 발짝 나아가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려는 배우로서의 과정이 반대라면, 그건 제 작품을 관람해주시는 분들을 ‘기만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상업 영상 작품을 비롯해 연극 무대에 오르셨고, 직접 프로듀서로 작품도 만드신 경험도 있지만, 본인을 '무명배우' 지칭할 만큼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 포기할 수 없는, 본인을 지탱해주는 힘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전 ‘무명배우’란 타이틀이 그렇게 싫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느끼고 있는 수많은 감정, 마음들, 다짐들을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나르시시즘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저는 제가 말하는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먼 훗날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고요. 제가 말한 기준들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 했을 땐, 아주 괴로워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봐요. 저는 저 자신 관리를 위해, 스스로 경계를 많이 합니다. 힘이 없어서 착한 것이 아니라, 무명이어서 친절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고 힘이 생겨도, 남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알고,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 철저하게 훈련해야죠. 배우의 길을 걷게 해주고 계속해서 도전하게 해주는 힘은, ‘연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편 영상을 연출하고, 다큐멘터리도 연출했었는데요. 이유는 잘해서가 아니라, 남이 시켜주지 않아서였습니다. 배우 대부분은, 출연에 목말라 있을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출연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겠지만, 그건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계속해서 신경 쓰면서 괴로워 할 것인가?’ 아니면, ‘내 길을 개척해나갈 것인가?’ 생각해보았을 때, 저는 후자를 선택했어요. 그전에는, ‘왜?’, ‘왜?’, ‘왜?’ 하면서, 자신을 많이 괴롭혔어요. 오디션 결과가 좋지 않고, 캐스팅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연출을 했었습니다. 누군가가 시켜주지 않더라도 연기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요. 저는 죽을 때까지 작업할 거예요. 부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연기는 계속할 겁니다. 재미있거든요. 연기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안전바가 있는 이상, 롤러코스터는 극한의 감정을 느끼지만 위험하지 않잖아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을 할 수 있어요. 미국의 유명한 연기코치, ‘마이즈너’라는 분이 한 말이 많이 와닿는데요. ‘연기는 가상의 상황 속에서 진실된 행동’이라고 해요.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연기할 때는 ’진짜로‘ 해야 정말 ’재미‘가 있어요. 연기에 몰입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상의 상황’이라는, ’안전대‘가 있기에 다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요. 언젠가 ’무명’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은 적이 있는데요. 이름이 없다 해서, ’무명‘이에요. 폐지 줍는 청년의 이야기인데요. 한 의사가 약을 개발하려고 임상시험을 하기 위해 불법으로 ’무명‘에게 돈을 주고 약을 먹여요. 그러면서 이 의사는 ’무명‘의 변화를 기록하는 이야기거든요. 매우 소심한 ’무명‘이 생체실험으로 인해 피폐해지다가, 결국에는 사람까지 죽이는 극한까지 벌이게 됩니다. 이 ’무명’이라는 캐릭터가 표현해야 하는 다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배우로서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쌓아온 경력만큼, 소중한 인연도 많을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 '평생의 스승님'이 있다면 어떤 분이 계실까요? 연기하면서 좋은 스승님도 만나고 그렇지 않은 스승님도 만났던 거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 오래간다고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첫 연기 선생님이 너무 좋은 분이셨어요. 현재는 극단 ’시공인간‘을 이끄는 수장이시면서 연기도 가르치시는 분이신데요. 기본적으로 연기도 잘 가르치셨지만, 배우로서 지녀야 할 소신과 태도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셨어요. 그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제 연기 인생에서 큰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초공사를 매우 튼튼하게 했기에, 어려움이 있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연기자로서 제 롤모델은 유해진 선배님이십니다. 연기 잘하시는 분들은 워낙 많고, 또 적정이상으로 넘어가면, 연기란 것도 취향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고 봐요. 그러나 저는 ’연기로 순위를 매길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거든요. 중요한 것은 ’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해진 선배님이 TV에 나오신 모습들을 뵈었을 때, 정말 인자하시고, 절로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에 ’시민군‘ 역할로 출연을 했었습니다. 대사가 딱히 있지는 않았지만, 연기력이 필요한 ’이미지 단역‘이었기에 현장감은 대단했습니다. 사실 영화 촬영에서 단역은, 언제 촬영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한없이 대기하다가, 언제라도 부르면 그제야 감독님의 연출을 듣고 촬영에 투입이 됩니다. 현장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있고, 배우분들께 다가가 직접 인사하기도 뻘쭘해요. 유해진 선배님은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가까이 있어도, 멀리 계신 느낌이었어요. 감히 말을 걸 수가 없었죠. 회사에 비교하면 인턴이 임원 중에서도 이사 혹은 사장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촬영이 끝나고, 숙소에서 나와서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편의점 앞에 유해진 선배님이 계시는 거예요. 얼떨결에 인사를 하니깐, ’우리 팀인가? ‘하시더니, 맥주를 사주신다는 거예요. 꿈인지 생시인지... 제게는 ’꿈과의 만남‘이었어요. 유해진 선배님께서는 정말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해주신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냥 그 버티는 시간을 잘 채워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또한, ’자신도 데뷔하고 나서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라고 하셨어요. 스스로 ’운이 좋았다‘라고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그때 촬영지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차로 20~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직접 뛰어오셨다고 하셨어요. 장시간 촬영하면 정말 많은 에너지가 요구되거든요. 그런데 촬영을 끝난 뒤 편히 쉴 수도 있는데 운동까지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라 생각이 들었어요. 유해진 선배님과의 만남은 제겐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저 역시 유명한 배우가 되어서, 아무 사심 없이, ’무명시절을 지나는 후배 배우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유해진 선배님처럼 진솔하면서도 따뜻한, 그러면서 연기도 정말 잘하는 그런 배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번 달 출간한,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는 어떤 책인가요? 앞서 소개했듯, 군 시절,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글을 써왔습니다. 2년 전부터는 블로그를 시작했고요.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책을 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현재 저는, 수입이 보장되지 않고, 배우로서도 인지도가 하나도 없는, 불안한 삶을 사는 것 같아요. 그랬기에 지금 책을 출간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고요. 보통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나 자서전 같은 책을 쓰잖아요. 그런데 성공하고 나서의 글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과정이 있었어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고 나서, 내려다보며 쓴 글이기에, 그만큼 덜 와닿는 거 같아요. 사람북닷컴이라는 휴먼브랜딩 기업이 있어요. ‘I love book 브랜딩스쿨’이라는 책 쓰기 과정을 통해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다섯 분의 저자님들과 함께 책을 쓰게 되었고요. 사람북닷컴의 대표님이신 박세인 대표님은 학교 선배님이세요. 제가 연극을 할 때 저희 공연을 보러오셨어요. 저는 더블캐스팅였는데, 다른 배우가 연극을 할 때 보러오셔서, 저는 선배님을 알지만, 선배님은 저를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러다 제가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지 1년 반이 되었어요. 선배님은 SNS나 블로그를 상당히 잘하시고 그렇게 점점 확장해가시고 계셨거든요. 저도 자신을 알려야겠단 마음에 배우는 마음으로 쫓아다녔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렇게 책을 출간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제 삶을 걸고, 꿈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에는, 저의 부족함과 어려움, 그리고 제가 보는 삶에 대한 태도, 관점, 노력 등의 생각을 기록했습니다. 배우로서의 ’성공‘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제가 성공했을 시점에, ’이 책이 성공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책을 내게 되었어요. 제가 전문 작가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과 솔직함을 담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족함으로 어려워하시는 분들께 희망을 드리고픈 마음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삶에서 연기만으로 먹고 살 수 없을 수도 있다.’라는 불안함이 책을 쓰게 만든 것도 있습니다. ‘막연한 긍정은 위험하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입시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연기만 해왔는데, 혹자는, ’한 분야에 10년간 몰두하면 자리를 잡는다‘고 하지만 저의 삶은 아직 너무나 불안하거든요.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책을 쓰게 되었고, 또 책을 통해서 어떤 삶이 연결될지 몰라서요. ‘꿈이 이뤄지지 않아도 내 삶은 괜찮아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곳에서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면, 삶이 조금은 안정화가 되고, 말씀드렸다시피 ’누군가가 시켜주지 않아도‘ 제가 원하는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책의 이야기를 토대로 유튜브 채널을 본격적으로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튜브 개인 채널을 진행했었는데,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힘에 부쳐 중단했었거든요. 배우로서 작품 계획 역시 아직은 없습니다. 다만, 작년에 천우희 배우님 주연의 영화 <버티고>라는 작품에 출연했어요. 대사는 많이 없지만 그래도 극 안에서 한 회사 직장동료 역할이었고, 지금껏 맡았던 역할 중 가장 비중이 큰 역할이었습니다. 그 영화가 오는 9월 개봉 예정이라고 알고 있어요. 누구나 한 번씩 인생의 고비가 찾아오잖아요. 정말 막막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되고, ’왜 내 삶만 이렇지?’라는 생각이 들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저도 그런 구간이 있었는데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죽을 때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겨줄까? 살아보니깐 인생은 너무나 막막하고 힘들고 어려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후회가 되더라’고 할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고 고비도 많이 찾아왔지만, 그런데도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다 보니, 삶이 조금씩은 나아지더라. 그래도 ‘살기에 꽤 괜찮은 삶이었다.’라고 말할 것인가?‘ 전 그래도 ‘살아보니 삶이 나아는지더라. 괜찮아지더라. 살아볼 만 했다.’라는 말을 남겨주고 싶더라고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말에 힘을 실리게 하기 위해서는, 제가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써 진짜가 되는 것이니까요. 정말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 없고, 막막한 거 같아요. 지금도 그 한 가운데 들어와 있고요. 이번에 출간된,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전 부모님을 잘 만났어요. 부유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게 자랐고,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고, 무엇보다 무한한 믿음과 지지를 받음으로써,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가운데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느리지만 하나씩 목표들을 이뤄내고 있어요. 책을 출간한 것 또한 제가 목표한 것 중의 하나였고요. 저에게 과거 누군가,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 질문할 때,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라고 했었거든요.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로 기억에 남고 싶어요. 그러면서 또, ‘많은 분이 기억해주는 배우’, ‘생각하면 기분 좋은 배우’, ‘어디에든 융화되는 배우’, ‘제작진에게 유연한 배우’, ‘유쾌한 배우’, 마지막으로 ‘에너지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전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지금 확실하게 정해진 건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제 삶의 시스템을 만들려고 구상 중입니다. 경제 안정화를 위한 ‘에어비앤비’와 ‘연기클래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연기를 통한 자기계발’이랄까요? 아직 구체적인 명칭은 정하지 못했는데요. 제가 연기를 통해서 성장하고, 변화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기가 삶에 끼치는 영향’을 전파하고 싶어서, 관련된 커리큘럼을 생각하고 있어요. 시기는 9월 전에 런칭할 계획입니다. 또한, 현재 제가 배우들로만 이뤄진 영상팀에 속해있는데 거기서 계속해서 영상작업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배우로서 도전은 산소처럼 계속해야겠지요. 프로필을 돌리고, 오디션에 참가하고, 기다리고, 그렇게 영상 및 연극 출연을 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해야 하는 거 같아요. 시간과 기회가 닿는다면 책도 더 출간하고 싶어요. 3권 정도 기획을 하고 있어요. 군시절, 일기를 쓰면서 일었던 변화가 컸었기 때문에, 그 당시 쓴 일기를 다듬어서 책을 내고 싶고, 또 언제나 삶에 존재했던 사랑이 중요했기에, 사랑에 관한 책도 내고 싶고, 마지막으로, 연기와 자기계발을 연결한 책 또한 내고 싶어요. 지금은 막연한 계획이에요. 그러나 꾸준히 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목표한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끝으로 저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도 저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저를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저도 제가 부족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도전하고, 분투하며, 달리다 보면 조금이나마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 제 삶을 가치 있다고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삶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모든 것에서 느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거 같아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바라보기’를 추천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지혁, tvN, ocn, 사람북닷컴, 맥도날드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17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 되었던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문의 김경훈 교수! 그와 함께 100세 시대,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정형외과가 끼칠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대전 바로세움병원에서 관절센터장이자 진료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경훈입니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직장을 옮기면서 대전에 내려와 살고 있습니다. 대전에 내려온 지 만 5년이 좀 넘었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갑갑한 도시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살기 좋은 도시라 생각됩니다. 지난 2017년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지금은 실력 있는 의사가 되셨지만, 학창시절의 꿈은 의사가 아니셨었다고요?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장씩 그림과 만화를 척척 그렸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책을 친구들이 돌려보면서 재밌어하는 것을 보며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꼈었습니다. 만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반대하셨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락실을 자주 출입했다는 것 정도?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어서, 지금도 좋아하는 농구를 그때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는 만화를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부모님 직장문제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 삶을 바꾸는 일이 있어났습니다. 보통 전학을 가게 되면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누가 떠나게 되니 작별인사를 하자’라는 식으로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때 제 귀를 의심할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반에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경훈이지만, 전학을 간다고 하니 서로 인사를 나누렴.’ 저는 어린 마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 나도 공부 한번 잘해보자. 그래서 인정받아보자.’ 기본이 부족했던 상태였는데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중학생이 월화수목금토일을 영어 단어로도 몰랐습니다. 다행히 전학 간 학교에서 세 명의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저와 비슷하게 농구를 좋아하면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대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맘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학 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닥치는 대로 구매하여 매일 새벽 3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앞집 아파트에 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전학을 갔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둘 시기에는 상위권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난생처음 반장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면서는 학생회 부회장도 맡게 되었습니다. 성적은 계속 전교 1~3등을 유지했습니다. 성적이 나오면서 진학목표도 조금씩 높아졌습니다. 예전엔 의대는 꿈도 못 꾸는 성적이기도 하고, 그림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디자인과 관련된 학과를 갈까 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꿈이 ‘의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는 의대에 진학하길 바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대에 입학하는 것은 성적이 좋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굳이 의학 쪽으로 진학한다면 의사보다는 수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약사셨기 때문에 매일 약국에서 환자들을 응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입학원서를 접수하는데 부모님 뜻대로 한양대 의대에 하나, 제가 원하는 서울대 수의학과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 3차 지망으로 한림대 의대에 하나, 이렇게 세 곳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모든 곳에서 합격 통지가 왔고, 부모님께서는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면서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승낙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가족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고, TV로 뉴스를 시청하던 중, 세계뉴스 시간에 한 사건이 방송된 것입니다. 인도의 수의사 얘기였는데요, 인도의 수의사가 변비에 걸린 코끼리를 관장하다 똥이 터져 나와 똥에 깔려 질식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뉴스를 보자마자 어머니께서는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절대로 수의학과에 못 간다고, 수의사 되려면 어머니랑 연을 끊든지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의대 진학 결정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과 중에서도 '정형외과'를 진로로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과 쪽보다는 외과 쪽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의대생 시절에는 외과 쪽 선생님들은 과를 불문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수술 가운을 입고 병원을 활보하고, 수술로 병을 치료하고, 상처를 돌보는 모습은 어렸을 때 상상해온 의사의 모습과 일치했습니다. 그중, 단연 제 마음을 빼앗은 과는 정형외과였습니다. 수술 전날은 아파서 서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다음 날 하루 만에 일어나 안 아프다면서 교수님께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랬듯, ‘일어나 걸으라!’ 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형외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렵게 정형외과 전공의가 된 후에는 힘들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외과 의사가 힘들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겁니다. 전공의 1년 차 때 소위, ‘백일당직’이라고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은 1년 차 전공의에게 100일 동안 당직을 세우며, 집중 트레이닝을 시킵니다. 당연히 백일 동안은 병원에서만 생활하며 집에 가지 못합니다. 온갖 정형외과 내 잡일을 맡아서 하고, 응급실 비상 전화도 독박으로 받게 됩니다. 백일당직이 끝나고 나면 꼴이 말이 아닙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습니다. 제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백일당직이 끝나는 날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둘러메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저를 쓱 보더니 따라오는 겁니다. 엘리베이터도 같이 따라 타시더니, 이상한 눈으로 계속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도 문을 닫지 않고 저를 지켜 보시기래, 저는 ‘뭐지?’ 하는 생각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경비아저씨가 저를 말리십니다. ‘저기! 그 집 얼마 전에 이사갔는데!?’, ‘이 집 아들이었구나, 행색이 하도 수상해서 도둑인 줄 알았지 뭐야.’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부모님께서는 제가 하도 집에 안 들어오니, 연락도 없이 이사를 가신 거였습니다. 그날 밤은 결국 차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둘러메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수련의 생활을 했던, 한일병원 정형외과 의국은 당시에 전공의 수가 감원되면서 업무량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약 70~80명의 입원환자를 보았는데 년 차마다 한 명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화상 전문병원이라 2~30명의 화상 환자가 항상 깔려 있었기 때문에 1년 차 주치의 때 전신 화상 환자분들이나 전기화상 환자들 상처 치료 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고는 했습니다. 못다 한 상처 치료는 새벽 3시가 되건 4시가 되건 자는 환자를 깨워가면서 했습니다. 시스템상, 1년 차는 입원 병동과 응급실을 맡고, 2년 차는 수술실 보조와 외래 보조를, 3년 차는 후반기부터 치프 역할을 하면서 수술실을 전담하게 됩니다. 대신 4년 차 졸업은 빠른 편이어서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치프 업무를 3년 차에게 인계하고 병원 일에선 대부분 손을 떼게 되고 전문의 시험을 대비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많고 의사 수는 부족하다 보니 스텝들도 그 많은 환자를 다 소화할 수가 없어서 전공의 앞으로 수술이 많이 떨어집니다. 3년 차 치프를 마칠 때쯤이면 웬만한 수술은 다 할 수 있는 수준이 됩니다. 그렇게 힘든 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고 할까요? 요즘은 전공의 선생님들이 수술을 받을 일이 없어, 전문의를 따더라도 수술을 배우기 위해서 전임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임의가 되어서도 수술보다는 논문 쓰느라 대부분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형외과 중에서도 전문 분야가 다름 아닌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이십니다. 일반 정형외과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정형외과가 영어 단어로는 ‘Orthopedics’입니다. 세부적으로 떼어서 보면, ‘Ortho’라는 말은 ‘곧게 하다’, ‘반듯하게 하다’라는 뜻이고, ‘Pedics’는 ‘소아’,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소아를 곧게’, ‘반듯하게’ 하는 학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과거, 소아마비, 뇌성마비, 측만증 등 여러 선천성 변형 및 기형 질환이 많았을 시절에 아이들을 곧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소아·청소년 정형외과라는 것은 정형외과의 시작이고 근본이 됩니다. 다만, 의학의 발달로 소아마비가 정복되면서 옛날만큼 소아 환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비중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그러나, 척추측만증, 뇌성마비나 그 외 선천성, 유전성 근골격계질환, 편평족이나 요족과 같은 족부질환, 팔다리가 휘는 각 변형이나 길이 차이가 나는 상하지부동증에서는 성인에서는 치료가 어려우므로 소아·청소년 정형외과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환자들은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몇몇 대학병원에서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집중현상이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정형외과 전문의라 하더라도 위와 같은 질환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소아·청소년 정형외과를 분과 전문으로 선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름 국가에서 인정한 전문의 자격증을 당당히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아 환자만 만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둘러대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소아·청소년 정형외과에 대해서 꼭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전공의 시절에 스텝으로 계셨던 선생님을 학회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임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병원에서 벗어나 현재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므로 주로 경증의 척추측만증, 평발, 내외반슬 환자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수술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무의미한 보조기나 깔창에 의지하다 수술 시기를 놓쳐서 오는 경우는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매우 안타깝고, 부모님들께 설명해 드리다 보면, 가끔은 원망 섞인 하소연을 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평발 수술을 받은 여학생의 경우, 근처 대학병원을 비롯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수술에 관한 설명은 들어본 적도 없고 무조건 깔창만 착용하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제 소문을 듣고 수술을 받기 위해 찾아온 환자였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학생이어서 교정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현재 재활치료 중입니다. 소아에서 시행하는 교정술은 대부분 잔여 성장을 이용한 수술이기 때문에, 성장판이 서서히 닫히는 시기, 즉 남아의 경우 (만) 15세, 여아의 경우 (만) 13세가 지나면 수술적 교정이 어렵습니다. 수술을 시행한 뒤에도 교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려면 몇 년간의 잔여 성장 시간이 필요하므로, 수술 대부분은 (만) 11세에서, (만) 13세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많은 환자분이 이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외래를 보다 보면 안타까운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자식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좋아할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근골격계 변형의 치료에서 운동요법과 보조기에만 의지한 채 수술적 치료를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인에서 휜 다리를 교정하려면 뼈를 잘라야 하는 절골술이 필요하고 뼈가 붙을 때까지 목발 보행이나 재활과정이 필요하지만, 소아에서 시행하는 편측성장판고정술의 경우 수술 후 다음날 퇴원이 가능할 정도로 수술이 간단하고 일상생활에 제한이 없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 자격 획득 후, 1년간 서울 아산병원의 전임의로 재직하시다가, 지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병원을 옮기셨지만, 계속 개원의가 아닌 봉직의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봉직의로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저도 이렇게까지 한 병원에서 오래 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개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현재 근무 중인 병원의 병원장님과 더불어 직원들이 좋아서 지금껏 함께하고 있습니다. 병원장님 역시 대전 출신은 아니십니다. 고향은 진주이시고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오셨으며, 서울 아산병원에서 수련을 마치시고,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셨고, 몇 해의 봉직의 생활 끝에 현재 병원을 개원하셨습니다. 병원을 훌륭하게 키우셨고 병원발전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고 계시며 여러 사회 분야에서 존경받으시는 분입니다. 제가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 일면식 없는 저에게 신뢰를 보여주시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저는 전임의를 마치고 첫 직장을 대학교 선배님이 개원하신 신생병원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환자를 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교적 환자 수가 적은 신생병원이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병원은 대학병원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철저히 환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과 같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생병원이 그렇지만 수익이 나지 않으면 병원이 버티기 힘들고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의료진 중에서는 제가 막내였기 때문에 병원이 힘들어지자 퇴사 조치가 되었고 첫 직장에서의 생활은 1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습니다. 실직 후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과정은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관절, 척추 전문병원이 많이 생겼지만 제가 개원가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의사에게는 스펙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문병원도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유명하고 실력 있는, 소위 스타급 의사를 모셔오고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직 시에 이전병원에서의 매출액이 의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 있었습니다. 며칠 간격으로 두 군데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한결같은 첫 질문은, ‘매출 얼마나 올려주실 수 있으세요?’였습니다. 저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제가 배운 의술은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의사가 매출경쟁을 하는 존재가 되었나….’ 싶었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학병원을 나오지 말걸….’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래도 교과서적으로 배운 대로 소신껏 진료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면접일 저녁, 병원 쪽에서 입사가 결정되었으니 언제부터 근무가 가능하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저는 그런 의사가 아니라고. 그다음 병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달 가까이 이 병원, 저 병원을 알아보면서 직장을 구하던 중, 우연히 지금 병원장님에게서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병원장님께서 말주변이 없으시다며 이메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메일의 내용은, ‘본인이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믿고 맡길만한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본인은 신경외과 의사라 정형외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또한, 본인도 지역 출신이 아니라 주변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다.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다. 매출은 신경 쓰지 말고 제대로 된 정형외과 진료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김경훈 선생의 이력서와 블로그 내용을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 낯선 곳이지만 내려와서 같이 일해주면 고맙겠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심신이 지쳐서였을까요? 저는 그 메일을 보고 드디어 제가 찾던 병원을 찾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병원장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언론조사에서는 대한민국 평균 수명을 82.5세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로 인해 그 수명은 점차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흔히 '100세 시대'라고 부르지요. '100세 시대'에 끼치는 정형외과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제게는 가장 부담되는 질문이네요. 제가 어떤 분야의 권위자이거나 해당 분야에서 금자탑을 쌓은 사람이 아니므로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정형외과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상당히 기대되는 것은 몇 가지 있습니다.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진단 장비에 의한 진단 정확도가 높아질 겁니다. 기존에는 영상진단 장비로 검사를 진행 후에 의사가 검사물을 판독해야 했다면, CT나 MRI 촬영 후 AI가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문제가 있는 부위를 알려주게 되겠지요. 의학계에서 이런 흐름은 반드시 정형외과 영역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암세포를 더 잘 찾아낸다든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희소한 질병의 발견 확률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블 코믹스에서 제작한 영화 ‘아이언맨’을 기억하시나요? 영화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본인이 착용할 아이언맨 수트를 디지털 영상화하여 이렇게도 만들어 보고, 저렇게도 만들어 보면서, 실제로 착용한 것처럼 시뮬레이션을 돌려 봅니다. 의학도 그렇게 발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술할 환자의 해부학적인 구조, 위치 등을 미리 디지털 영상화하여 수술 전에 시뮬레이션을 돌려 볼 수 있을 겁니다. 수술 시뮬레이터로 모의 수술을 미리 해봄으로써 더욱 안전하고 정확한 수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는 기증된 사체(카데버; Cadaver)를 이용하여 모의 수술이 유일한 수술 연습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체를 이용한 모의 수술기회는 흔치 않고, 반복해서 연습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술 시뮬레이터는 언제든지 데이터베이스에서 불러와 연습할 수 있으므로 교육용 프로그램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3D 프린터를 이용한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환자의 몸에 딱 맞는 인공관절이나 몸속에 삽입될 다양한 임플란트, 보형물 등을 3D 프린터로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환자의 몸에 딱 맞는 임플란트는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기성품보다 우수하므로 3D 프린터를 이용한 보형물 제작과 이를 이용한 수술은 성형외과 영역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외과 영역에서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인공관절술과 더불어, 3D 영상장비를 이용한 로봇 인공관절 수술이 대표적입니다. 로봇인공관절술을 이용하면 뼈의 절삭면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하지 정렬을 맞추는데 유리한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가 고령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더불어,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예전에는 난치병으로 여겨지던 질환들이, 현대의학의 발달로 하나하나 정복되어 가거나, 극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늘어난 평균 수명만큼 관절 수명이 늘어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외래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노인성 질환이 바로 퇴행성 관절염입니다. 사람의 대부분은 60대에 접어들면서 관절연골의 마모되기 시작하고, 뼈가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뼈가 부딪히게 되니 통증이 심해지고, 통증이 심해지니 육체적 활동이 힘들어집니다. 육체적 활동이 어려우면 직장생활이 곤란해져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운동량이 줄어들면 심폐기능이 떨어져 전신질환이 악화할 수도 있으며, 골다공증이 악화하여 척추골절이나 대퇴부골절의 위험성이 증가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환자는 우울해지기 쉽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게 되므로,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망가진 관절은 원래대로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자가연골이식술이나 줄기세포이식술을 이용하여 관절연골손상을 회복시킬 수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고 모든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며, 회복된 연골 역시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인공관절술에 의존해야 하나, 인공관절도 마모가 일어나고 수명이 있으므로, 이른 나이에 수술을 받게 되면 재수술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재수술은 아무래도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의 인공관절수술로 평생을 쓰려면 되도록 늦게 수술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 인공관절을 시행할 수술 시기도 늦어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과거, 65세 정도의 심한 퇴행성 관절염 환자라면 따질 것 없이 인공관절을 시행하였으나, 요즘은 65세도 이른 나이입니다. 그렇다고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무조건 버틸 수도 없습니다. 인공관절수술이 필요하면 해야죠.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런가요? 수술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요? 퇴행성 관절염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질환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질환의 특성을 이해하고 본인의 관절을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관절을 아껴 쓴다고 해서 마냥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체중조절은 필수이고, 적절한 운동을 통한 근육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육은 관절을 보호하고, 안정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합니다.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며 본인의 수준에 맞는 운동이 좋습니다. 추천할만한 운동으로는 걷기운동, 하이킹, 자전거, 수영 등이 있겠습니다. 생활습관을 바로잡음으로써 관절을 더 건강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활습관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병원을 이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간혹 관절염으로 오신 분들께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드리면 마치 통증만 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약을 안 드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관절염이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염증 물질, 이화 세포 등이 관절을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관절염의 진행을 늦출 수 있습니다. 외래에서, '연골주사'라고 불리는 하이알루로닉산(hyaluronic acid) 주사는 윤활유 역할을 하여 손상된 관절연골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얼마 전 일어났던 모 제약의 ‘인보사’ 관련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나, 4차산업 혁명 시대, 다가올 미래에는 유전자,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가 주를 이루게 될 것이고,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하여 관절 수명을 한층 증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임상 자문의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십니다. 의사들은 이미 출중한 재원임이 분명 합니다. 그 외에, 특별히 정형외과의로서 가장 필요한 재능은 무엇일까요?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영상장비, 검사장비들이 개발되면서 환자를 진단하기가 무척이나 용이해졌습니다. 의사들 자신도 환자를 직접 살펴보는 이학적 검사방법보다는 초음파, CT, MRI 같은 영상의학적 진단 장비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환자분이 진료를 보러 오셨습니다. 제가 진찰을 해보겠다고 진료실 침대에 누워보시라고 하였고,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진찰을 하고 있었는데, 환자분 말씀이, ‘여러 병원에 다녀봤지만, 이렇게 자세히 만지면서 진찰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라며 감격해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관절질환 환자를 진단하려면 영상장비를 이용한 검사도 중요하지만 직접 만져보고 움직여도 보고 해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검사상에서는 발견되는 소견이 환자의 증상과는 전혀 무관한 때도 있으므로, 무턱대고 검사결과만 믿고 치료를 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박리다매가 강제되는 대한민국 의료환경에서 환자 한분 한분을 꼼꼼히 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의사라면, ‘의술뿐만 아니라 인술을 펼쳐야 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환자분들의 아픈 부위를 한 번이라도 짚어보고 어루만져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소위 말하는 ‘인술의 시작’이라고 배웠고, 그 정신은 이어 나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는 지금 병원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같이 근무하고 있는 동료 의사분들 모두 훌륭하시고, 직원들 모두 가족 같습니다. 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하신 병원장님을 모시고 지금 병원을 훌륭한 병원으로 만드는 것도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의사입니다. 의사들이 가장 보람과 기쁨을 느낄 때는 환자들이 좋아졌다며 활짝 웃어 보이실 때입니다. 그 미소와 웃음을 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환자를 대하는 것이 무서웠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보다 ‘아픈 동물’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이없게도, 전에 설명한 인도 수의사 덕분에 제가 의사의 길을 가게 됐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타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일하니, 이보다 고귀하고 보람 있는 직업이 있을까요? 이 순간에도 환자의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의사 선후배님들께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경훈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과학자가 꿈이었던 고교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라디오 DJ를 꿈꾸던 청년시절엔 외무고시를 준비하다가 기자가 되었다. 뉴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MBC <뉴스데스크>의 뉴스 속 뉴스, <로드맨>!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MBC 보도국 <뉴스데스크> 편집팀 기자 염규현 기자. 그와 함께 '취재진담'을 나누어보았다!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MBC 문화방송의 기자 염규현입니다. 지금은 MBC '뉴스데스크'의 <로드맨>이라는 코너에서 ‘로드맨’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독자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MBC 보도국 기자로 입사한 지 년 수로 10년째이십니다. 만 29세에 입사하셨는데요. 의외로 늦은 나이에 언론고시를 준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기자가 꿈은 아니었습니다. 엉뚱하게도 저는 언론고시 이전, 외무고시를 3년간 준비했었습니다. 사연이 꽤 길죠. 그런데 올해로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었으니, 사람 운명이라는 게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로에 대한 방황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사도 늦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과학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과학부장도 지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과학실로 항상 갔죠. 동아리방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검법남녀> 같은 드라마 범죄 수사물에 가끔 나오는 혈흔 반응 실험인 ‘루미놀 실험’, ‘아스피린 합성’ 같은 실험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과학실에서 친구들과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개인적 흥미 때문에 공부보단 과학부 활동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입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학원 가는 시간 외에는 과학실에서 살다시피 했었거든요. 이렇게 화학실험에 흥미를 느껴 자연스럽게 이과로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이렇게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도 과학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요. 고3 때, 연세대학교 화학과 수시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지금 기억에도 저는 다른 지원자들과는 차별점이 확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다른 지원자들은 화학 경시대회 같은 것을 준비하는 특목고 출신 과학 특기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그런 수상 경험은 전혀 없었고, 그저 과학 동아리에서 취미생활 일부로 주로 화학실험을 즐겼다고 원서에 적어냈으니, 교수님들이 볼 때는 생소한 지원자였을 겁니다. 어찌 보면 아마 수시모집 도입 취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하지만, 저는 면접에서 학부 수준의 화학 이론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선행학습’이 전혀 안 된 상태였습니다. 반면, 실험과 관련된 질문은 술술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했던 실제 경험을 털어놓는 거니 너무 쉬운 일이었죠. 그렇게 저는 수능 성적 상위 10%의 성적을 받아오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가받았습니다. 조건부 합격이어도 할 건 다했었습니다. 수능 응시도 전에, 등록금도 냈고, 오리엔테이션도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 제가 고등학교 시절 생각했던 화학 공부와 대학에서 배우는 화학 공부는 천지 차이였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화학이란, ‘재미있게 실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학 학부의 ‘일반화학’만 비교해도, 복잡한 ‘수학’은 물론이고, 방대한 ‘이론’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 산더미였습니다. 저에겐 큰 부담이었죠. 게다가 교재는 죄다 원서로, 모두 영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땐 정말 숨이 ‘턱’ 막혔습니다. ‘취미와 전공은 완전히 다른 거구나’라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속이 답답하고, 소화도 잘 안 됐습니다. ‘이걸 평생 할 수는 없겠구나’ 직감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2001년, 역대 최저 난이도의 수능시험 문제가 출제되면서, 전국 응시생들의 평균 점수가 급상승했습니다. 만점자도 수십 명 속출했었죠. 반면, 고3 때부터 이미 대학 캠퍼스를 기웃거리던 제 점수는 제자리였습니다. 10.2%가 나왔습니다. 실수로 틀린 문제 한, 두 개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더군요. 그렇다고 변명이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결과는 결과대로 받아들여야 했죠. 바로 불합격 처리됐고, 가을에 미리 냈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도 바로 환불됐습니다. 며칠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건 뭔가 하늘의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잘못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떨어질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런 식으로요. ‘자기합리화’ 내지, ‘인지 부조화’일 수도 있었지만, 재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문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길이 막히면 근처를 서성거리기보다 새길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운명을 맞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과에 있다가 문과로 가니 수능 준비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삼각함수 미적분’ 같은 수학과 과학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목표는 자연스럽게 지난해 입학이 좌절된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등록금을 환불받았던 계좌에 다시 등록금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친척분 중에는 제가 이미 수시로 대학에 붙은 줄만 알고 계셨던 분들도 계셔서, 그냥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재수하면서 좋은 친구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서 도움을 받고, ‘제자리’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화학과가 아니라 문과 쪽이었죠. 처음에는 전공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학부제로 선발을 해서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회계열로 진학했습니다. 사회계열은 상경계와 사회과학 쪽에 모두 진학할 수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습니다. 저는 이과 출신이니 수학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상경계로 진학하면 도움이 될 거란 막연한 생각으로 경영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취업이 잘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기도 했고요. 또, 경영학과는 그 안에서도 진로가 다양하니까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경영학 또한, 전공으로 선택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 취업할 수 있다는 건 어디에서나 흔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영학과는 재무면 재무, 마케팅이면 마케팅, 이렇게 특정 분야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즉, 본인이 깊이를 만들지 않으면 알아서 지식이 따라오지는 않는 구조였습니다. 성격상 오지랖이 넓은 저로서는, 한 분야를 선택해서 깊이 파고든다는 것 자체가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경영학은 실용학문이어서 다른 학문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문학·사학·철학’과도 거리가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회계 같은 과목은 학점 따는 게 피로했습니다. 계산기 두들겨 가며 장부를 맞추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외교 통상학을 연계전공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2005년 군 복무 중, 우연한 계기로 KBS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대한민국>에 출연했는데 얼떨결에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시간은 40분이 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도 반향이 엄청났습니다. 지금이 인스타 시대라면, 그때는 ‘싸이월드’ 시대였는데, 당시 미니홈피 일일 방문자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이 ‘일촌 신청’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제가 군 복무 중이었던 소방서에 사인을 받겠다고 온 여중생도 있었고, 노량진 수산시장 생선가게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께서 제 방송을 보고 수백만 원 상당의 책을 제 앞으로 기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반향이라는 게 군 복무 중인 일개 대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의 파급력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 잠깐 나왔다는 데도 이 정도인데, ‘방송을 평생의 본업으로 삼으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일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방송을 만들면 그만큼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였습니다.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라디오 DJ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라디오 DJ는 일단 생방송을 진행하니까 청취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대중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매력을 느꼈습니다. 또한, 얼굴이 안 나오니까 편하게 떠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DJ가 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전국 DJ 전수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지상파에서 활동 중인 DJ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조사해보니 크게 네 부류로 나뉘더군요. 첫째는 주로 밤 10시에서 자정 사이에 많이 활동하는 연예인. 둘째는 주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등에 많이 출연하는 분야의 박사(전문가) 혹은 대학교수. 셋째는 새벽 시간이나 출근길, 심야 라디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그리고 방송기자였습니다. 방송기자는 드물긴 하지만 주로 라디오 뉴스를 진행했습니다. 결국, ‘이 네 직업 중 하나가 되어야 DJ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우개를 들고, 네 개의 직업 리스트에서 맨 처음 ‘방송기자’를 지웠습니다. 라디오 뉴스 진행은 DJ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기자는 ‘취재’라는 별도의 다른 업무가 있으니, 제 니즈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연예인’을 지웠습니다. 그냥 연예인이 되는 것도 힘든데, DJ 한번 해보기 위해, 전역한 복학생이 갑자기 노래나 연기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연예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상,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대학교수’나 ‘박사’는 그나마 무난해 보여서 좋아 보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DJ가 되려고 지금부터 십수 년을 공부에 투자하기엔 시간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니 한 개의 직업이 남았습니다. 바로 ‘아나운서’였지요. 그래서 처음엔 아나운서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가진 여러 현실적인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아나운서가 되는 게 그나마 라디오 DJ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같았어요. 망설이지 않고, 그해에 바로 MBC 아나운서 시험을 봤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은 필기와 서류심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1차에서 카메라테스트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저도 가서 한번 경쟁자들을 만나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참가하여, 카메라 앞에 서본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올림픽 정신’으로 참가했습니다. 시험 봤던 감독관이 당시 초년병 아나운서였던 오상진 선배였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장에 가보고 두 가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일단, 미남미녀가 정말 많았었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정말 주눅이 들 정도로. 어찌나 다들 잘 생기고, 키도 큰지, 풀 메이크업에 다들 차려입고 오니, 아무 준비 없이 간 저는 더욱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저에게 좌절을 안겨준 것은 아나운서 시험 지원자들의 상당수가 이미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이거나 과거 어느 경로로든 아나운서 활동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지역 방송사의 현직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 분들이 시험에 참여하셨었습니다. 현업에 계신 분들이다 보니 방송 능력이 출중한 것은 당연했고요. 옆에서 연습하는 모습만 봐도, 아무런 연습 없이 온 제가 그분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만에 하나라도 아무런 노력 없이 저분들을 제치고 아나운서가 된다면, 그것이 ‘사회 부조리’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1차 시험장을 나서면서 깨끗하게 ‘아나운서’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도 내가 붙으면 안 된다고. 당연히 결과도 불합격이었고요.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데, 라디오에서 노정렬 씨가 하는 방송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어라? 저 사람 누구지? 내가 못 들어본 사람인데….’ 하며 검색을 해보니, MBC 공채 개그맨이더라고요. 제가 분류한 네 가지 유형의 DJ에 속하는 직업군인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연예인이었어’라는 생각을 했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제가 접했던 라디오 DJ들은 대개 유명 연예인인 경우가 많았었는데, 노정렬 씨는 개그맨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뭐랄까…. 톱스타는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전혀 없는 신인은 아닌, 좀 애매한 느낌? 그래서 다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사람이길래 DJ를 하는 거지?’ 그런데 알고 보니 노정렬 씨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다가 개그맨 시험을 봐서 합격하셨더라고요. ‘와…. 역시 고시 합격자라는 후광이 영향을 줬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거다’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쟁쟁한 경쟁자들과 사이에 서 있어 어렵지만, 만약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아나운서 시험을 본다면, 아마도 노정렬 씨처럼 차별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공법으론 어려우니 돌아가기로 한 거죠. 그렇게 이번에도 정반대의 길로 돌아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날로 ‘외무고시반’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인생이 180도 달라졌죠. 화려한 방송국 입사를 꿈꾸다가 속세와 연을 끊고, 돌연 ‘고시촌’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고시가 최종목표가 아니라 중간 거점이 된 이상 이번엔 무슨 고시를 볼지가 고민거리였습니다. 어차피 고시는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사법시험은 단번에 포기했습니다. 공부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 보였어요. 두 번째로, 행정고시를 살펴봤는데 재경직은 경쟁률이 너무 세 보였고, 일반행정 직렬은 필수과목인 행정학 같은 학문이 좀 재미도 없고 답답하게 느껴져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건, 외무고시뿐이었습니다. 외무고시를 공부하면,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외국어는 남겠구나’하는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외무고시의 수험과목이 시사영어나 국제법과 같이, 현실문제 관여도가 높은 과목이어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시류를 흐름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외무고시반은 들어갈 때도 시험을 봅니다. 그쪽에서도 처음엔 황당해 했습니다. 경영학과에서 온 수험생은 저 하나였고, 고시는 거점일 뿐, 목표가 ‘방송국 입사’라니. 가까운 선후배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재미있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고시 합격이 최종목표가 아니다 보니, 더욱 공부가 즐겁고, 수월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시와 인연을 맺고, 외무고시반에서 국제통상 직렬 2차 시험을 세 번 치렀습니다. 3년을 보낸 거죠. 특히, 두 번째 시험은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근소한 차이로 낙방이라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연세대 화학과 수시에 떨어졌을 때랑 느낌이 비슷했습니다. 원래는 2년 안에 고시에 합격하고,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려고 했던 건데,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대가 얼추 다 지나간 상태라, 제겐 시간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일단 한 해 더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째 고시 2차 시험을 치르면서 이번엔 MBC에 동시에 지원했습니다. 단,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기자로 지원을 했죠. 이번에도 방향을 살짝 틀었던 거죠. 아나운서 시험은 고시에 붙고 보려고 했는데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니, 차선책으로 필기시험을 거치는 방송기자 직에 직렬을 선택해서 한번 부딪혀 보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지금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3년간 준비했던 고시는 결국 낙방했고, 도리어 한 번도 준비하지 않았던 방송기자는 합격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방송기자’로서 인생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외무고시는 다른 고시와 다르게 현재 발생하는 현안들을 꾸준히 분석하고,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외신 기사들을 많이 번역하고, 비판적으로 작문해보는 공부를 통해 준비하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자연스럽게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가 병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침 그해에 출제된 MBC 논술 주제도 제가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였습니다. 운도 따랐던 거죠. 표면적으로 언론고시는 한 번도 준비한 적이 없었지만, 언론사에 입사하게 된 사연입니다. 길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3년간의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생활이 사실상 간접적인 언론사 입사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랑 한 교실에서 같이 공부했던 고시반 동료 중에 저 말고도 조선일보, SBS, KBS 기자도 함께 배출돼, 지금도 현직에 같이 있으니 외무고시반에서 했던 공부가 언론사 입사 준비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MBC 입사 후 바뀐 점은 무엇인가요? MBC에 합격하니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제가 방송 쪽에 관심이 있던 것을 알던 지인들은 결국 가긴 갔다면서 축하를 건넸고, 그걸 잘 모르고 고시반 생활만 알고 있는 분들은 완전히 다른 진로로 간 것에 대해 의아해하기도 했죠. 수습기자 시절, 군대만큼 엄격한 조직문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MBC 자체에 대한 충격이라기보다는 기자 사회 전반에 관한 충격이었죠. 미리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업계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다른 동기들은 비교적 잘 적응해 나간 것 같았는데,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사실 기자 사회의 생리를 전혀 모른 채로 입사한 것이라서 처음에 적응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제가 그때 왜 그랬나 싶은데, 수습기자 시절 선배한테 혼나다가 감정 소모로 울기도 했습니다. 기자 사회가 보고와 지시, 취재보고와 데스킹을 통한 수직적 구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가 높을 줄은 몰랐었습니다. 지금은 주 52시간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습기자들의 업무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는데, 당시의 저는 꽤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입사하자마자 선배들이 기사를 써보라고 지시를 하는 통에 당황한 적도 있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능숙하게 기사체로 써나가는 것 같은데, 저는 10장짜리 ‘빽빽이’ 고시 답안만 쓰다가 방송기사를 쓰려니 자꾸만 만연체가 되어서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언론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기자들은 ‘그냥 어디서 고급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정말 그 ‘고급정보’를 위해, 모두 발로 뛰어야 하고, 고집스럽게 매달려야 하고, 자기를 희생해야 얻어지는 성과물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자 생활에 대해 실망보다는 만족감이 더 컸습니다. 방송기자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항상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므로,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습니다. 방송의 특성상 압축적인 경험이 휘발성은 강하지만, 지나고 나면 기억에 하나하나 각인되는 느낌이 드는 데, 그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보통 술자리의 ‘무용담’이 되는 일들이죠. 공연 예술처럼 온종일 준비한 결과물을 뉴스에 쏟아내고, ‘툭’ 털어버리는 것이, 무덤덤한 매력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쏟아 내리고 나면 허무할 때도 있지만, 또 타고 싶은 롤러코스터 같은 일상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신문기사가 ‘산문’이라면, 방송기사는 ‘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문장에 본질을 압축해, ‘여운을 어떻게 남겨야 하나?’ 하는 고민도 시상을 떠올리는 것만큼 진땀 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입사 이후, 저는 다행히 한 번도 같은 부서에 두 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성 차원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작년에는 선거방송기획단에서 선거방송 경험도 해보았고, 이후에는 <로드맨>이라는 코너 개발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함께 해오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을 오늘도 쌓고 있습니다. 특히, <로드맨>을 제작하며, 새로운 뉴스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많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인터뷰 요청까지 올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MBC 입사 3년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셔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셨습니다. 외무고시반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UN 정본 언어 중 하나인 프랑스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저는 외교부가 아닌 통상교섭본부 쪽 직렬을 준비했습니다. 외무고시반 생활을 하면서 방송국 입사라는 다른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상 제2외국어의 공부를 시작할 엄두를 못내, 외무고시를 못 보고, 통상직렬을 선택했었거든요. 외무고시는 제2외국어가 필수지만, 통상직렬은 필수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외교관이 꿈인 고시반 다른 선후배들은 다들 제2외국어를 하나씩 꼭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프랑스어랑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때 풀지 못한 숙제 같은 부분으로 남아 있었고요. ‘언젠가는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마침 2012년 MBC 최장기 파업과 맞물려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파업 말미에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방송통신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함께 입학했습니다. 언어의 저변을 넓혀두면 나중에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연구 범위도 그만큼 넓어져서 취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방송통신대는 일하면서 공부하기에도 좋았죠. 입학 당시 목표는 원대했습니다. 다름 아닌, ‘레미제라블’의 프랑스어 원본을 읽는 것이었는데, 아직 그 수준까지 실력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졸업한 뒤, 다른 것들을 하느라 손을 놔버려서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또다시 프랑스어 실력 복원이라는 새로운 숙제가 남은 셈입니다. 방송통신대 불어불문학에 이어, 현재 연세대학교 법학대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십니다. 보통 언론학이나, 국문학 등 '기자' 활동이나 배경에 도움이 될 법한 전공을 택해서 공부할 듯한데, 어떻게 법, 그것도 전공을 '국제법'으로 선택하게 되신 것인지 의외인데요? 기자라는 직업은 첫 직업으로는 참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계와 벽이 명확해졌습니다. 바로 ‘메신저’라는 한계인데요. 기자가 아무리 그 사안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기자는 ‘관찰자’와 ‘메신저’에 그쳐야 하고, 메시지를 낼 수 있는 건 별도의 전문가가 항상 필요하다는 게 기자가 갖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기 분야에 독보적인 전문성을 쌓은 전문기자들도 지금은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제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별도의 공부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로 생각했고요. 사내에 석사과정 지원 프로그램이 있지만, 언론 분야 등 일부 관련된 전공에 한정해서 지원하기 때문에 연세대학교 국제법 석사과정은 자비로 밟고 있습니다. 국제법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재 진행 중인 논쟁거리와 관련이 깊습니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관계, 독도 영유권, 심지어 미세먼지 문제마저도. 우리가 만나는 국제적인 논점이 대부분 국제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고요.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역시 국제법의 한 분야인 국제통상법 관련 쟁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법의 재료는 매우 국제적이지만, 그 연구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국내적입니다. 쉽게 말해, 국제법의 실체적 근원은 국제 관계나 국가 간의 협의, 다양한 국제적 사건의 배경을 통해 이해하게 되지만, 그 법규를 적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국제법규를 ‘자국 이익의 관점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통찰하는, 연구가 따르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국제적인 주제를 국내적인 관점에서 국내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히 법리만 따진다면 이목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왜 우리 땅일 것인가?’ 따져봐야 국내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습니다. 일본 학자는 왜 일본 땅인지 연구하고, 우리 학자는 왜 우리 땅인지 연구하게 됩니다. 국제법은 학계에서도 학자들 수가 다른 전공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드문 데다, 앞서 말씀드린 국내적 성격도 있다 보니, 국제법 학자들은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국가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법은 ‘기자와 잘 맞는 학문 분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자들도 현재 벌어지는 어떤 논쟁거리를 자국 이익의 관점이나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일을 하니까요. 국제법규나 국제 질서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꾸준히 현재 벌어지는 논쟁거리를 따라잡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자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제가 학부를 마친 모교이기도 하지만, 국제법 교과서의 ‘대명사’인 ‘국제법론’의 저자, 김대순 교수님 등 훌륭하신 은사님들이 많이 계셨고, 통상법을 전공하신 박덕영 교수님께서는 제 결혼식 주례를 봐주시기도 하실 만큼, 제가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맺은 인연들이 있기에, 다른 학교는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조건 중, 학교가 회사에서 가까워, 퇴근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기에도 최적이기도 했습니다. 로스쿨이 도입된 이후, 법과대학 일반대학원 수업이 대개 밤 시간대로 많이 옮겨지면서, 일하면서 학업도 병행하는 것이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업 학자는 아닙니다. 이 때문에 제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선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제법 분야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공부를 놓는 순간 시류를 놓치고, 전문성을 이어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학위와 무관하게라도, 관련 분야 논문은 꾸준히 읽어보면서, 연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부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현시대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기자는 정보를 생산해 내는 것보다, 발 빠르게 ‘정보의 가치’를 판단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 정보’인지 골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성을 키운다는 것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밖의 분야에 대한 사각지대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관점에 너무 깊게 빠지면 다른 관점이 잘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 전공 두루 접해본 경험은 기자 생활의 자양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판단 기준을 제공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위 과정은 그 자체로 ‘지식의 증거’가 아니라, 지식을 ‘지속해서 쌓게 만드는 자극제’의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동기부여의 동인으로서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최근 MBC '뉴스데스크'의 '로드맨' 콘텐츠에 대한 반응을 실감하는지? 예전과 달라진 점을 체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 로드맨이다!’ 지난해 말, 서울 잠실역 어귀에서 누군가 저를 알아봤습니다. 생면부지의 젊은 남자였습니다. TV에 나간 <로드맨> 방송분(‘순한 맛’)을 유튜브용 예능 콘텐츠(‘매운 맛’)로 각색해 올린 지 보름 정도 됐을 무렵이었습니다. 연락이 끊어졌던 동창, 뜸한 친척한테도 잘 봤다는 문자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2010년 수습기자 시절, 뉴스에 출연하면 간혹 동네 아주머니가 알아보곤 했었는데요. 그때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사라졌던 경험이 유튜브 업로드와 함께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도 멋쩍게 인사를 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저를 봤다고도 했습니다. 저희가 올해 신년 기획으로 수도권 집중화 현상의 문제점을 조명한, ‘서울 공화국’ 편을 제작했는데, 초등학교 사회 수업시간에 이걸 선생님들께서 틀어주셨던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세 곳에서 <로드맨>을 봤다고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은 베트남에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휴대용 와이파이 장비를 반납하려는 데 근무 중인 직원분께서, ‘베트남 취재 잘 마치셨어요? 로드맨 잘 보고 있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네시더라고요. 유튜브 업로드 이전엔 없었던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쌓이다 보니, 문득, ‘그나마 이런 분들은 저한테 말이라도 걸어주셨지만, 말을 건네지 않고 어디선가 저를 슬그머니 알아보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고치게 되고, 거울도 전보다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약간의 MSG를 보태서, 이른바 ‘연예인 병’이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 일상의 변화 말고, 공적인 외출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AVEC G]를 비롯해서 ‘미디어오늘’ 등 여러 언론매체에서 저희 <로드맨> 팀을 인터뷰를 해주셨고, 각종 발표에도 초청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구글뉴스이니셔티브2019’에 초청을 받아 국내 업계 관계자들과 <로드맨> 형식을 공유할 기회를 얻었고, 교육부 산하기관에 추진하는 중고생 영상멘토링 멘토로 위촉되어, 동영상으로 지역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오는 7월 말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글로벌뉴스포럼(GNF)’에 초청받아, 각국의 보도 관계자들을 만나, <로드맨> 양식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어쩔 땐, 이런 경험이 좋다기보다는 두렵다는 느낌이 더 클 때도 있었습니다. 마치 ‘TV 시대는 끝났다’라고,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 제작팀은 ‘TV용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인데, ‘TV 밖의 채널’을 통해서 반응을 얻는다는 게 회사의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로드맨>이라고 하면 NBA 농구 선수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유튜브에서 <로드맨>을 치면 ‘데니스 로드맨’ 보다 먼저 나옵니다. 로드맨 첫 방송 이후, TV 본방송인 ‘로드맨 순한 맛’과 유튜브 <엠빅뉴스> 채널의 ‘로드맨 매운맛’ 콘텐츠를 합쳐, 100일 만에 누적 조회 수 100만 뷰를 넘겼고요. 다시 한 달 만인 2월 중순에는 150만 뷰, 2019년 7월 1일 현재는 320만 뷰를 넘어섰습니다. 정석 책에서 본 지수함수 그래프의 모습입니다. 이 중 80% 가까이는 유튜브용 콘텐츠인 ‘로드맨 매운맛’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저희 팀이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 공력을 더 들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처음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니 배꼽이 배가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입니다. <로드맨>에 최초의 '예능 뉴스'라는 타이틀이 붙었습니다. 혹시 원래부터 예능 쪽에 관심이 있었나요? 대학 시절, 무대에 서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군 입대 전에는 재즈댄스 동아리를 하면서 춤 공연을 해볼 수 있었고, 제대한 후에는 단과대학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수백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행사를 진행해보기도 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고 방송사 입사를 생각했기 때문에 대외 경험을 쌓기 위해 고시 공부를 하면서 학교 홍보대사라든지 학회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입사 후, 노래패 활동을 하며 또다시 무대에 서게 됐어요. 작년에는 우연한 계기로 예능 프로그램인 ‘구내식당’에 고정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요. 뜻하지 않게 예능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제 취미이자 특기가, ‘농담 따먹기’일 정도로, ‘말장난’을 참 좋아했습니다. 로드맨 PD를 맡은, 동기 남형석 기자가 저의 이런 캐릭터를 뉴스에 써먹자고 제안하기 전까지, 저도 이런 형태의 ‘드립’이 뉴스에 나갈 것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사실 제가 방송에서 건네는 농담 같은 발언들은 평상시에 일반 뉴스를 제작할 때도 늘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인터뷰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인터뷰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일상적으로 하던 말들이었습니다. 다만, 과거 뉴스를 제작할 때는 그런 부분을 촬영하지도 않고, 촬영되었더라도 편집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로드맨>에서는 대놓고 그런 모습을 담기로 하면서 인터뷰의 전과 후를 가감 없이 담아서 재미있는 부분을 포착해내게 된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제작하면서 힘들어진 것은 저희 팀의 김태효 카메라 기자입니다. 예전 같으면 필요한 인터뷰만 촬영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인터뷰의 섭외과정과 그 후의 만담까지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촬영 시간 자체도 길어졌습니다. 아마 인터뷰하는 모습 촬영할 때, 팔과 어깨가 정말 많이 아프셨을 겁니다. 처음 저희 <로드맨> 팀의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뉴스’를 해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기획을 시작했었어요. 기존 ‘뉴스판’에 작은 균열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앵커 발언으로 시작해 기자가 넘겨받는 기존 리포트 형식엔 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뭘 해도 기존 뉴스와 차별화가 어려웠었지요. 그래서 완전히 뒤집어 생각해 보니, ‘앵커와 기자가 심각한 얼굴로 멧돼지 뉴스를 전하는 연성뉴스는 하지 말자고 했었지?’라는 게 떠올랐어요. 실제로 파업 기간 뉴스 개선 방안을 논의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반성이 있었거든요. 그럼 반대로 ‘멧돼지처럼 활짝 웃으면서 심각한 뉴스를 전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뒤집어 생각해 본 거죠. ‘꼭 필요한 이야기를 웃기면서 전해보자’라는 식으로, ‘예능 형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식을 흔드니 그제야 작은 틈이 보였습니다. ‘예능형 심층 뉴스‘인 <로드맨>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처음엔 사내에서도 크고 작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것을 다 바꾸기로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죠. ‘저게 뉴스인가?‘ ’뉴스가 맞나?‘ ’뉴스 자막을 저렇게 써도 되나? ‘초기엔 저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선배들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해 주신 덕분에 다양한 실험이 가능했습니다. 일단, 몇 차례 방송 기회를 얻게 되었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의 형태를 차차 갖추게 되었습니다. 애초 2주에 한 번 편성하던 것을, 이제 매주 하나씩으로 방영하는 것으로 편성을 늘렸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안착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로드맨>의 슬로건이 '길 위에 답이 있다'인데, 그렇게 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얼마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당 대표와 유시민 작가가 차례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죠. 두 분 다 구독자 수도 많고, 인기도 많습니다. 이 두 달변가들의 ‘정책 토크’는 영향력이 상당하지만 여기서 중간이윤을 챙기는 방송사는 없습니다. 다 본인들이 스스로 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중립 지대도 없습니다. 이들뿐이 아니죠. 국회의원, 교수, 심지어 청와대도 자체 방송을 하는 시대입니다. 터치 한 번이면 뉴욕타임스 기사가 바로 번역되고, ‘트위터 눈칫밥’만으로 가동되는 이른바 ‘지진희 알림’이 기상청보다 한발 앞서 지진 속보를 전합니다. 이제 전문성과 정보 접근성 모두, 기자들이 누리던 특권은 소멸했습니다. 전화 몇 통 돌리고 ‘다 아는 척’해야 했던 기자들의 호시절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죠. 대신, 그 자리에는 ‘기레기 담론’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달랐습니다. 틈이 보였죠. 일단, ‘누구나’ 가볼 수 없습니다. 다들 바쁘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가본 사람은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본 곳에 대해서는 가본 사람이 ‘아는 척’할 자격이 조금이나마 생기는 거죠. 춥든, 덥든, 미세먼지가 많든 우린 ‘가봤으니까’.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까’. 현장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본대로, 들은 대로만 말하면 되니까요. 따지고 보면 언론의 본령인 거죠. 우리의 슬로건은 자연스럽게 ‘길 위에 답이 있다’로 정해졌습니다. 일종의 시대적 소명 같은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코너명은 <로드맨>(Roadman)이 되었습니다. 데니스 로드맨(Rodman)과는 스펠링이 다릅니다. 직역하면 ‘길+사람’입니다. 콩글리시죠. ‘로드맨’이라는 작명 아이디어는 저희 팀 동기 곽승규 기자가 냈던 거로 기억합니다. 로드맨이 기획된 문제의식 자체는 위와 같이 공유한 상태였어요. <로드맨>이 취재하며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위치 기록으로 다 측정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대략 2만 킬로 정도 다녔더라고요. 베트남, 베이징 출장까지 포함한 수치이긴 하지만 다 합치면 지구 반 바퀴 정도 돌아다닌 셈입니다. 최근에 기억에 남는 곳은 강원도 산불현장이었습니다. <로드맨> 형식의 특성상 슬픔을 다루기가 어려운 한계가 있음에도 용기를 내서 찾아갔던 현장이었는데, 생각보다 참상이 심각했습니다. 산 곳곳이 통째로 타버린 모습, 집과 지붕에 송두리째 녹아내린 모습 등이 충격적이었고요. 망연자실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로드맨>에 대해서는 '초 단위로 변하는 세상에 발맞춘 뉴스'라는 평이 많습니다. 심지어 '뉴스데스크에서 <로드맨>만 챙겨본다'라는 댓글도 있을 정도입니다. 새로운 뉴스를 찾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팩트’가 ‘마누라와 자식’입니다. 저희 유튜브 콘텐츠엔 이런 댓글이 많습니다. ‘예능인 줄 알았는데 뉴스네요’. 결국, 우리가 예능이 아니라 뉴스라는 걸 웅변해 주는 것은 ‘팩트’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능 형식의 뉴스에서 ‘팩트’를 자칫 부풀렸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거란 우려를 항상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통계 수치는 물론이고, 현장의 분위기나 인터뷰의 톤까지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전해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뉴스 형식을 깨고 나니, 오히려 정확한 ‘팩트’ 전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이템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이템 찾는 게 큰 스트레스죠. 일단 8분 전후의 분량이 나와야 하고,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므로 기존 언론 보도도 참고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는 논쟁거리는 없는지도 확인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생해서 만든 콘텐츠 조회 수가 잘 나오고, 재미있게 봤다는 댓글이 달리면 뿌듯합니다. 특히, ‘뉴스 원래 잘 안 보는 데 로드맨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같은 댓글이 가장 반갑습니다. 저희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맞는 경우인 것 같아서 더욱 뿌듯하더라고요. 저희 팀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맛집 탐방입니다. 어느 지역에 출장 가면, 그 지역에서 이름난 노포를 찾아갑니다. 재미도 있지만, 맛있는 것 먹으면, 스트레스도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로드맨>이 워낙 전국단위의 출장이 잦다 보니 가능한 일 같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들른 맛집에 가면 항상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관련 해시태그를 달아 올리는데, 이걸 보고 유입되는 팔로워들도 꽤 됩니다. 그래서 당분간 이 방법은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로드맨> 홍보 목적으로라도 맛집들을 찾아다닐 생각이에요. 공식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 저는 처음 목표했던 라디오 DJ가 되겠다는 꿈을 사실상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DJ가 되겠다고 했던 건 스튜디오에서 마이크 앞에 앉겠다는 뜻이었다기보다,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과 교감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라는 의미였는데, <로드맨>이라는 코너를 하면서, 최근에 과분한 피드백을 많이 받으며, 재미있게 일하고 있어요. 빠듯한 제작 인원으로 매주 아이템을 찾다 보면 막힐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막히면 돌아가라’라는 제 인생 좌우명을 따라 우직하게 가려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인 꿈이 있다면, 지금처럼 좋은 아이템을 선보이면서, <로드맨>이 업로드 되는 유튜브 엠빅뉴스 채널의 구독자 수를 100만 명까지 늘리고 싶습니다.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기적인 꿈은, <로드맨> 형식이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할지, ‘매뉴얼’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로드맨>이 개인 캐릭터의 힘을 빌려 연명하는 ‘1인 방송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2대 로드맨’, ‘3대 로드맨’도 나올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잘 갖춰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의사분이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명의라는 말을 싫어한다’라고 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깊이 공감했습니다. ‘명의’라는 호칭이 나온다는 건, ‘1인 플레이어’ 중심의, 편중된 후진적 시스템의 다른 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은 지치지만, 시스템은 지치지 않는다’라는 의사분의 일갈과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지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아마 그렇게 되면 형식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질 겁니다. <로드맨>이 예능 뉴스를 표방하며, 다소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뉴스 형식 파괴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저희 제작팀도 확신은 없습니다. 지난 9개월 동안, 서른 번 가까운 방영을 했지만, 매 순간 신약 테스트를 하는 심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될까.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항상 고민하죠. 모두가 우리처럼 뉴스의 틀을 깨는 게 능사는 아닐 겁니다. 다만, 중립 지대가 사라진 시대, 정규 편성이 무의미해진 시대인 오늘날, 방송 뉴스가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을지, 방송 기자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한 우리의 실험이 의미 있는 임상 기록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엠빅뉴스 <로드맨>, ‘구독’ 꾹! ‘좋아요’ 꾹! 부탁드립니다! * 본 인터뷰 기사는 방송기자협회 3.4월호를 일부 발췌, 인용하였음을 알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염규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을 사랑해서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복과 한국무용을 위해 달려온 '한국무용가 한복디자이너' 이서윤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의 '전수'와 '계승'의 필요성 그리고 '지적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복디자이너 이서윤입니다. 한국무용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한국무용가 한복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일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어떻게 호칭하시든,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 예체능 전공 특정상 진로를 어린 시절부터 정하게 됩니다. 부산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하셨는데 한국무용을 졸업하셨습니다. 언제 처음 '한국무용'에 입문하게 되셨나요? 저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동네에 당산나무 밑 굿 보는걸 하염없이 좋아했던 아이였습니다. 길 가다가 노랫소리에 이끌려 뜬금없이 ‘가야금병창을 하겠다’라고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요. 그러다 원장선생님의 권유로, 춤추는 남자(한국무용은 더더욱)가 없던 시절, 한량무(선비춤)를 배우게 되면서 무용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매일 걸어도, 밥을 먹어도, 무엇을 해도, 온통 생각은 춤에 빠져있는, 말 그대로, 춤에 ‘미쳐서 사는’ 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공부해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라’라는 부모님의 반대로 잠시 춤을 그만둔 적이 있었지만, 매일매일 춤을 못 춰서 병나는 아들을 지켜보시던 부모님이 결국 포기하시고, 허락하신 것이 전공자로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전통무용과 한국음악을 정말 좋아했기에, 예술고 주최 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고, 부상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하는 혜택을 받고, 한국무용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춤추면 손가락질받던 시절이라, 늘 놀림감이 됐던 기억은 중년이 된 지금도,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열정을 가지고 좋아했던 저의 일부분이었는데, 모두가 이해 못 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요. 부산예술고 졸업 후, 한양대 무용과에 진학 후, 한예종을 거쳐 예원예술대 무용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세 대학을 거쳐, 10년이 걸려 학사를 취득하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한양대학교에 입학하고 집안의 어려움 때문에 춤이 아닌 아르바이트를 보며 달린 기억이 많습니다. 하지만 춤도 열심히 배우고, 연마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한양대에서는 전공담당 교수님들의 수업은 진행되었으나, 제게 전통무용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가끔 문화재 이수자 분들을 모신 특강 등이 있었으나, 기본기는 교수님이나 젊은 강사 선생님들의 클래스 위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그 와중,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이라는 곳에서, 최고의 명문, 문화재 이수자 선생님들과 수업하며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시험을 보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합격을 하면서 내적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학벌을 쟁취할 것인가?’, 아니면 ‘종합대학 학위는 포기하더라도, 내가 원하던 선생님들께 사사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요. 결국은 제가 갈구했던, 선생님들과의 인연을 맺고 싶은 마음에 한국종합예술대학교행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예종은 신생학교로 편입이 인정되지 않아서, 신입생으로 재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과 학생들보다 나이도 많고, 생활고를 해소하느라 시간도 없어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시기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낮에 학과 수업을 마친 후, 저녁에는 한복을 만들게 되었고, 그 무렵 주변 지인들의 권유와 격려로 혜화동 근처에 7평의 작은 공간을 임대하여 시작했던 ‘이서윤 한복’은, 지금의 한복 인생 20년을 걸어오게 한 지평선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일을 병행하면서, 또한 가끔은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기에, 개인적 삶이 너무 어려워졌고 학교에 다니는 것도 점점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술대학의 특성상 공연이 자주 있었고, 공연 몇 개월 전부터 공연 연습으로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연습을 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두, 세 가지일 병행해야 하는 저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연습에 불참하게 될 때마다, 동기들과 교수님들께 죄송한 마음에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한예종의 학업을 포기하였습니다. 이후, 모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예원예술대학에 편입을 하게 되었고, 10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상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았습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군 생활을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호흡기 문제로 인해 훈련소의 입소와 퇴소를 두세 차례 반복한 후, 결국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춤은 언제나 제가 사랑했고 어디서나 함께하기에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퇴근 후, 아르바이트와 무용연습이 가능했기에 춤을 추는데 시간상의 어려움 역시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예술가는 배고프고 간절함이 있어야 정도를 갈 수 있다’라는 말씀은 늘 저에게는 기운을 줬고, 훗날의 힘든 고비마다 되뇌는 주문처럼 다가왔었습니다. 10년이 걸려 학사를 취득한 후, 11년 만에, 무용이나 디자인 계열이 아닌, 한국음악학과의 석사과정에 입학하셨습니다. 전의 경력, 그리고 앞으로의 경력에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한국음악'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공이 무용과가 아닌 이유는 몇 가지가 됩니다. 일단 저는 한국무용은 생음악의 경우 동작과 시선 등, 음악과 동화되어야 감동을 줄 수 있는 무용 동작이 나올 수 있는 특성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음악과 무용은 박자, 음감, 음색 등,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 살부터 무용을 연마해온 제게, 한국무용 석사과정은 대학선택의 폭이 넓지 않으며, 대신, 한국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석사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학교의 지인들도 많으셨고, 불교적 의식이나 부처님의 철학적인 의미에 관심이 많았기에, ‘한국음악과’를 선택했습니다. 대학원 수업을 통해 음악적, 특히, ‘불교 무용학’적 학습이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음악과의 경험적 학업은 춤도, 한복에도 몰랐던 부분에서 다각적 방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공에만 치중하기보다, 더 넓은 학문의 예술적 응용은, 미래적인 디자인의 초석이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복디자이너'로서 KBS 드라마 '황진이', '성균관 스캔들', SBS '옥탑방의 왕세자', '별에서 온 그대' 등 한복 의상이 돋보였던 작품의 디자이너와 제작가로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고 계십니다. 20여 년 전에 전통한복을 시작하면서, 원래 하던 한국무용을 그만두고 한복디자인으로 직업을 전향하셨는데, 주변의 반응과 그에 따른 어떤 오해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제가 어린 시절은 보통 어머님들이 집안에서 바느질과 재봉을 하시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고 어머니를 도와서 바느질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고등학교를 예술고로 진학하고 나서, 어린 나이에 부모님께 부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를 못했습니다. 아르바이트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부모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살풀이 수건, 버선, 연습복 등을 만들어서 동기들에게 약간의 이윤만 남기고 용돈 벌이를 하였습니다. 꿈은 ‘한국무용가’였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제약이 있었기에, 꾸준히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남자무용수로서 어느 단체에 들어가기에는 키가 작았고, 혼자서 아무런 도움 없이, 지속적인 학습의 대가로 들어가는 돈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 대체 기간에는 시간적 제한으로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절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공익요원을 하면서 늦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 행복했고, 그 일로 외로움도 보람도 느꼈습니다. 저 자신의 적성을 이제야 찾아가는 순간이었달까요? 집에서 재봉하거나, 디자인 작업을 하기엔 여건이 되지 않아, 작업실 겸 가게를 시작하게 된 것이 1999년입니다. 많은 반대 속에서도 한순간 직업의 전향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직업 전향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계속 무용만을 배우며, 생활하기에는 수업료도 충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모 대회에 출전하였는데, 예선 탈락을 했습니다. 승승장구만 하다가 어린 나이에 미끄럼을 크게 탄 이후, 오래도록 그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대회의 경험은, ‘언제까지 무용수만으로 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해답이 된, 한복디자이너로 전향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용으로 저의 재기와 성공을 기대하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마음도 교차하는 시간이었기에, ‘춤이나 열심히 하지 무슨 옷 장사냐’며 다들 수군거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들 제가 ‘춤을 완전히 포기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셨던 듯합니다. 무용가로서 활동(개인 공연 등)을 안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항상 무대에 오르는 것을 원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는 ‘완전한 전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무용을 할 수 없을 만큼 한복을 디자인하는 일에 몰두했고, 이름 없는 저 자신이 너무 애처로워, 그렇게 간절하던 춤도 잊을 만큼 시간에 묻혀 살았습니다. 언제든 공연이라도 관람하면 밤새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운 순간들도 간간이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이런 갈증들이 모여, 제가 다시 일어나 무용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복디자인을 하면서도 틈틈이 춤사위를 틀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회출전을 하였고, 수상의 영광도 누립니다. 처음 한복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거의 10여 년은 무용수로서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무용에만 목숨을 걸었던 제게, 10여 년 동안 무용과의 단절은, 춤을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6~7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임이조 선생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공연무대에 서면서부터 다시 정식 무용수로서의 활동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제가 노력했다면 충분히 ‘한복디자이너인 한국무용가 이서윤’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인지도도 없고, 무용가로서의 명성, 둘 다 없는, 아무것도 아닌 제게 누가 관심이나 격려를 해줄 수 있었을까요? 현실에서 두 가지 직업을 함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무용을 택하면 춤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 다른 동료 무용수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제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한복을 택하면 가게 운영, 손님 응대,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해야 하며, 그에 걸맞은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고…. 일은 끊임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하루 중 어떻게 나누어서 해야 할까요? 오전, 오후로 나누어 할 수 있을까요? 저도 평생 지고 갈 두 직업의 가늠과 무용수로서의 복귀 시기 등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었습니다. ‘두 가지 직업을 누가 봐도 훌륭히 소화하고 있는구나’라고 생각이 들 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봅니다. 한복디자이너로 직업을 전향하셨지만, 또 작년 이맘때,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5호 이매방제 승무'를 이수 받으신 전수자가 되셨습니다. 한국무용가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인데, 한복디자이너로서의 직업의 갈림길에서 고민도 많으실 법합니다. 한복디자인 하면서 춤의 꿈을 펼쳐가는 시간에, 좋은 무대에도 설 수 있었지만, 이수자만이 설 수가 있는 무대가 따로 있었습니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이미 돌아가신 故 이매방 선생님에게는 배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95년도 인연을 맺었던, 법우스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법우스님은 대전시 이매방제 무형문화재 15호 승무 보유자이십니다. 故 이매방 선생님께 이수하시고, 현재 승무를 공부하시며, 꾸준히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수 받는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무형문화재는 ‘도제식 교육’, 즉,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기술을 전수하는 방식입니다. 무형문화재는 한 민족의 전통과 얼,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척도입니다. 한국무용은 오래전부터 전수가 돼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느 나라 전통춤도 마찬가지이지만, 전통무용을 할 때는, 그 나라 전통의상을 입습니다. 우리나라는 당연히 ‘한복’입니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이미 오랜 전통이 된 한복과 한국무용은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언제나 함께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또한 무형문화재의 이수자로서 훗날, 무용은 물론 한복 역시, 후세에게 전수하고, 미래에도 이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라면 모방과 창작 사이에서 많은 갈등, 그리고 또 다른 '창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어느 것을 '창작'이라고 부르고, 어디까지를 '모방'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많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이 처음 접하는 일이 ‘모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디자인이 만들어져서, 시판되면, ‘창작’과는 별개인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창작은 쉽지 않지만, 모방이나 카피는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통을 계승하고, 창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지적 재산을 지켜주고, 존중하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한복디자이너로서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문제점은 끊임없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모노, 베트남의 아오자이. 중국의 치파오, 한국의 한복 등 나라마다 그 나라에서만 입는 전통의상이 있는데요, 각 나라의 의상에는 그 나라만의 문화와 정서 등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각 나라의 문화적 재산입니다. 이에 혹자는 '전통의상이니 누구나 패턴, 문양 등을 도용하여 쓸 수 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문제는 전통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오는 착오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이란 물결처럼 한 시기를 팽배하게 되면, 전통이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해외명품 등은 각각 자기만의 패턴이나 문양 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특정 패턴이나 문양 등을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겠으나 똑같이 복제하는 것은 불법이겠지요. 음악의 표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표절 시비는 과거에도 있었고, 언제나 시끄럽습니다. ‘자신의 것’이라며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패턴이나 문양 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다만 누군가가 이미 창작해낸 패턴이나 문양을 자기 디자인에 그대로 가져다가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되면 전통의 계승이나 발전은 아예 없어지거나, 더디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옛것이 미래지향적인 이유, 유행이 돌고 도는 이유를 들어, 디자인은 창조적 이야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회자 되지만, 그것은 새롭게 회자 되는 것이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이 회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디자이너의 철학과 이야기가 없다면 또한 후자처럼 ‘발전 없는‘ 똑같은 회자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단기적인 계획은 두 달여 후로 계획된 저희 샵의 이전입니다. 혜화동에서 4년, 안국동에서 10년 동안 샵을 운영한 이후, 현재 샵은 광화문은 2층 창문 너머, 경복궁의 담이 보이는 곳에 4년 전, 개점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수많은 관광객과 정체성 잃은 한복대여점의 난입, 매일 벌어지는 각종 데모와 집회, 시위 등으로 지금은 개점 시기의 아름다운 매력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수동 서울숲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복디자인을 처음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동안,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20여 년의 세월 간 디자이너 생활을 하다 보니, ’최고‘보다는 ’전수’와 ’계승’이라는 미래지향적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복이 상용화되지 않아, 재료나, 원단을 직접 제작하는 장인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현재 한복업계에서 심각할 정도로 난제에 빠져있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전통문화는 입고, 쓰고, 먹지 않으면, 점점 사라질 것이며, 다시 대중들에게 그 명성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통문화는 지키고 계승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복은 한국의 옷으로 이미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학의 ’한국어학과‘, ’한국음악과‘, ’한국무용학과‘ 등이 존재하듯, 머지않은 미래에 ’한복학과‘가 개설됨으로, 누군가는 다른 전통문화처럼 ’전수‘하고, ’계승‘하고 그 계보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한국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에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묘선, 윤중강, 이서윤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