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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AVEC G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밀도 높은 대화, 그 안에 깃든 묵직한 삶의 철학"

[인간 서사의 결정체:
AVEC G 오리지널 컬렉션]


Experience in-depth conversations &
profound philosophies curated exclusively by Avec G


[The Essence of Human Narratives:
AVEC G Original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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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전쟁], [멀티팩터] 저자 <김영준>

1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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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을 꾸준히 올린 10년 만인 2017넌 '골목의 전쟁'을 출간한 김영준 작가. '1만 시간의 법칙'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재까지 초판 10쇄가 재판되며 꾸준한 인기와 주목을 받고 있다. 무명작가로 시작하여 지난 2월 4일 그의 신간인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을 출간하기까지. 김영준 작가와의 솔직, 담백 가득한 인터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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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카페에서 일하던 중.
김영준 작가는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은 직장인과 다르기에 좋아 보일수 있으나
매일매일 카페에 출근을 하다보면 결국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라고 말한다.
[출생]
1983년 9월 9일

[학력]
성도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경력]
2007년~現 네이버 블로그 ‘Second Coming’ 운영
2010년~2012년 IBK 기업은행 잠실지점 외환/기업여신 계장
2017년 골목의 전쟁 (스마트북스) 저자
  •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선정
  • 2018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2019년 한국의 논점 (2018) 등저
  • 2019년 10월 기준 10쇄 발행
2020년 멀티팩터: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 (스마트북스) 저자

[미디어 출연 및 강연]
>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TBS 민생연구소
> 부산시 인재개발원 글로벌인재개발양성과정
> 서울신용보증재단
> 동서식품
> 현대홈쇼핑
> 흥국증권 리서치센터 외

[칼럼 연재]
> 허핑턴포스트
> 시사인
> 오마이뉴스
> 서울신문
> 비즈한국 외
現 서울신문, 미래에셋은퇴연구소 등에 기고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골목의 전쟁]의 저자 김영준이라고 합니다.
2007년부터 ‘김바비’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경제 및 사회현상에 대한 글을 써오고 있으며, 이번에 [멀티팩터 :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새로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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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부푼 꿈을 안고 입사 한 IBK 기업은행에서. 2011년 연수 당시 동기들과 함께.
학생 `김바비`는 학창시절에도 골목상권에 관심이 많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었나요?

제 첫 책 제목이 ‘골목의 전쟁’이어서 그런지 제가 원래부터 골목상권에 관심이 많은 줄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 재미와 흥미로움을 가지고 좋아했을 뿐이고 골목상권은 그런 제 흥미로움의 일부였을 뿐이지요.

제 부모님은 방임형으로 자식을 키우신 편이어서 저에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시던 분들이셨는데 그 덕분에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많이 했습니다. 책이 그저 재미있고 좋아서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축구하고, 축구게임을 하고. 제 어린 시절은 아마 책을 빼면 제 나이 또래의 다른 남자들과 별다르지 않을 거예요. 제가 제대로 읽은 첫 활자 책은 제 나이 또래의 아재들이 그렇듯이 삼국지였습니다. 읽으면서 그 글 속의 이미지를 상상하니까 정말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중 책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제 부모님께서 이혼하시면서부터였어요. 당시 동네 이웃 분들이 저만 보면 안타까운 눈빛을 짓거나 저희 부모님에 대해 수군수군 이야기하곤 했지요. 어떤 분은 ‘네가 나서서 엄마 아빠를 화해시켜야지 뭐 하고 있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요. 그 모든 게 다 듣기 싫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져 모든 것은 잊기 위해 독서에 몰두했던 이유도 있었어요. 그 당시 타인과의 대화도 제게는 스트레스였지만, 책은 저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독서 외에 게임도 아주 열심히 했어요.

독서란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던 게 가장 큽니다. 사람들은 주로 책을 읽을 때 ‘내가 여기서 무언가 인사이트를 얻어야 해! 배워야 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일단 ‘재미있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삼국지를 읽고 재미있으니까 초한지를 읽고, 초한지를 읽다 보니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고, 그러다 논어도 읽고,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도 읽고, 흥미에 흥미가 꼬리를 물고 무는 거지요. 또한, 손자병법이 재미있다 보니 동양 전서를 넘어 서양 군서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도 읽게 되고요. 재미있어서 이런 식으로 자꾸 확장되는 겁니다.

그렇게 책과 게임, 그리고 축구만 하면서 보냈던 게 저의 10대였습니다. 공부는 안 했어요.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4년 넘게 방황했는데 그 시기가 비교적 짧았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에서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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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 2편 [인터뷰]

2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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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부산대 치의예과 학부생으로 발을 들인지 30년 만에 그는 모교 치의학전문대학원(치과대학)의 원장(학장)이 되었다. 80여 편의 SCI급 논문을 포함한 16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치의학계 국내 교수 중 해외 강연을 자주 하는 그는 치과계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치과대학의 학장으로서 행정가,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이자 모범적인 지도력을 펼치고 있는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김현철 원장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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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당시
[학력]
1988 창원고등학교 졸업
1995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2004 부산대학교 치의학박사 (보존 및 보철학 전공)

[경력]
2004년~現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2012년~2018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과보존학교실 주임교수
2015년~2017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과 학과장
2018년 9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첨단치과의료기기사업화센터 초대 센터장
2017년 3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부원장
2019년 3월~現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2008년~2009년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 생체공학연구실 방문교수 
2007년~2010년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 치과의료전문평가위원 
2011년~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청 신개발의료기기분과위원
2019년 7월~2021년 7월 부산광역시 치의학산업지원위원회 부위원장

2011년~2014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교육연구실장
2013년~2015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치의학연구소장 

[직능단체 경력]
2010년~2014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7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공보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부회장 

2005년~200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섭외이사
2009년~2011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기획이사
2011년~2013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국제이사
2015년~201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수련고시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보존학회 학술이사
2019년~ 現 총무이사

2014년~2016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8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현미경치과학회 부회장

2015년~2017년 Asian Pacific Endodontic Confederation (아시아태평양근관치료학회연맹) Council (이사)
2017년~2019년 APEC Secretary (총무이사)
2019년~現 APEC President-elect (차기회장)

2016년~2018년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조직위원회 학술분과 위원장

現 European Endodontic Journal (유럽근관치료학저널) Associate Editor (부편집장)
現 Journal of Endodontics (근관치료학저널) Scientific advisory board (학술자문위원)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School of Dentistry)원장 김현철입니다. 전문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이 한국에서 특이하게 운용되고 있어 무엇인가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치과대학(College of Dentistry)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의 교수인 만큼 저는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치과의사자격을 가진 임상교수이니 치과병원 치과 보존과(Department of Conservative Dentistry)에서 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으니 행정업무도 상당 부분 겸하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강의, 연구, 임상, 행정 등 여러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치과의사들에게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치아 신경치료에 관한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알려져 있고, 연구자들 사회에서의 저는 신경치료에 사용하는 기구와 재료를 평가 연구 개발하는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와 관련하여 국외로는 “Henry Kim”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름이 불릴 일이 별로 없는데, 외국 친구들은 여전히 이름을 부르니 영어 예명이 더 익숙한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 수묵화에 깊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돌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에 가족관계도 들어가는 것이 한국적인 소개인 듯하여 덧붙인다면, 최근 군 복무를 마친 아들과 2월 군 복무를 앞둔 아들. 그리고 두 아들과 저보다 더 많이 가장 역할을 하는 아내. 이렇게 4인 가족의 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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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ProEndo Conference에서 그는 7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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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 1편 [기자수첩]

2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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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1편 [기자수첩] - 기자가 받은 한통의 편지.

나는 AVEC G 발행인이자 수석기자이다.
이번 김현철 원장을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뷰 과정을 담은 [기자수첩]을 기획하게 되었다.

김현철 원장의 인터뷰 과정은 그 어떤 인터뷰이의 인터뷰 과정보다 특별했다.
그 과정을 1편 [기자수첩] 그리고 [인터뷰]는 2편에 나누어 공개하는 바이다.

우선 AVEC G에 대해 소개하자면 공식 홈페이지는 보다시피 광고가 없다. 외부후원도 없다.
트래픽으로 돈을 버는 시스템도 아니다.
스폰서도 없고, 인터뷰 기사를 위해 어떠한 금전적 혜택도 받지 않는다.
100% 재능기부로 오히려 나의 사비로 홈페이지 제작과 운영을 위해 쓰이는 돈이 많다.
 
사람들은 내게 `왜 하냐?`라는 질문을 종종 하기도 한다.
나는 `청년들에겐 IMF보다 취업이 힘든 시기이지 않느냐. 최대한 많은 분야에서 청소년, 청년들의 멘토로 그들이 걸어온 길을 소개함으로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난 참 무거운 마음과 함께 AVEC G를 창간했다.
 
2019년 5월 AVEC G를 창간하고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 명망, 인품, 지위, 시국 등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가장 적절한 인물을 인터뷰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기사를 읽고, 10년이 훨씬 더 지난 방송을 찾아보는 등 1명의 인터뷰를 섭외하기까지 같은 분야 종사자 100여 명 이상을 꼼꼼히 선별했다.
 
나는 AVEC G의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가 인터뷰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쌍방의 열정은 시너지를 가져왔고, 심도 깊은 인터뷰가 모인 AVEC G의 인터뷰 기사가 차곡차곡 쌓여가며 AVEC G는 그렇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터뷰 전문 사이트`가 되어가고 있다.
 
김현철 원장과의 첫 인사는 2019년 6월 말 SNS를 통해 처음 이루어졌다. AVEC G가 창간된 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김현철 원장이 부산대신문에 기고한 `부산의 치의학 40년, 그리고 미래`를 읽은 후였다.
 
나는 김현철 원장에게 인터뷰 의뢰를 했다. 그는 검토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답장을 남겼다. 그는 원장직을 맡은 지 3개월 만이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바빴을 뿐더러 AVEC G 인터뷰 특성상 `현 위치까지 올라온 과정`에 대해 `과거`를 묻는 질문이 많은 만큼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고 있었던 그 시기에 외부 언사를 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8월, 빛나는 성과를 내고 있었던 그에게 다시 한 번 SNS를 통해 연락했다. 그는 나의 의뢰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쁜 일정에 그는 `다음 시기`를 기약했다.
 
나는 10월 다시 인터뷰 일정을 물었다. 그 사이 AVEC G는 `인터뷰 전문 언론사`로 시스템은 나름 삐꺽이던게 기름칠 되어 구축된 시기였다. 해외에서 오래 사는 내가 한국 문화에서 `생각해볼게요`, `다음에요`라는 답은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김현철 원장이 하는 `다음`, `보류`라는 단어를 쓴 답변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가 `거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역시 정말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이번엔 정말 삼고초려가 되겠네요.` 등의 부탁 어린 메세지를 보냈다.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시고:: 오류입니다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서요^^`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일정을 소개하며 양해를 구했다. 맞다. 지난 6월도 그렇고 8월도 그렇고. 10월에도. 그는 절대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인터뷰 협조 공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12월 중순까지 10분도 쪼깨야 하는 상황이라 12월 중 비행기 안이나 공항에서 답변을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답했다.
 
12월 말이 다가왔고, 나는 `옐로카펫` 창안자인 `옐로소사이어티` 이제복 대표, 배우 이재윤, 유상재, 춘천지방법원 류영재 판사, KB증권 이승종 앵커, 프로볼링 김승민 선수의 인터뷰 원고를 한꺼번에 윤문과 사진 편집과정에 거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리고 그중 유상재 배우와 류영재 판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기사가 2019년 안에 출고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도, 그리고 31일에서 2020년 1월 1일이 되던 그 순간에도 원고를 첨삭하고 있었다. 김현철 원장은 1월 1일 제야의 종소리의 메아리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며칠 되지 않아 내게 서면 인터뷰 원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별도로 편집팀에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울었다.
그리고 더 오래 울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업적이나 일에 대한 보상을 금전적인 것으로 받는 것에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겐 `입에 풀칠할`, `지금 당장 필요한`. 하지만 나는 독자의 반응에만 감사하며 `보람`만으로 걸어왔으나 내게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현실에 너무 지쳐있던 그때였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금전적인 보상을 원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애초에 AVEC G는 재능기부로 시작한 일이니.
 
그저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가?' `힘들게 일하는 걸 누가 알아주지?`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6개월이 지나 60여명의 인터뷰 기사를 출고하니 '이제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게 아닌데, 더 잘할 수 있는데...' 아쉬움을 곱씹으며 하루 12번 넘게 AVEC G의 존폐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김현철 원장이 보낸 편지는 결정적으로 내가 AVEC G를 통해 인터뷰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다.
 
난 김현철 원장과 어떻게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는지 기억을 하진 못한다. 그리고 우린 공통된 친구도 없다. 난 그 점이 굉장히 의아하다. 그러나 아마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 우연 또한 신의 뜻이겠지 생각해본다.
 
약속한다. AVEC G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사회에서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분들을 만나고, 좋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나는, 인터뷰어로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AVEC G 인터뷰이의 인터뷰를 기사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다면, 하늘에 두 손 모아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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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철 원장의 편지 전문: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저는 사실 AVEC G를 잘 모르고 (완전히 모르고)
더더군다나 박 기자님도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모릅니다.
 
우연히 SNS에 포스팅되는 글들을 통해 소신 있게 철학을 지키며
언론인, 준(?)공인으로서의 자세를 다듬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반복되는 인터뷰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연결고리 혹은 저와 통하는 철학은 Passion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삶이 동물의 생과 다른 것은
열정이 있는가 아닌가로 구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은 욕구에 따른 생명유지를 위한 필요에 따른 행동만 하지만,
사람은 철학과 소신이 있어 사회 속의 자아실현과 자아의 희생을 통한 무리 속의 존재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삶, 인생에서 문제가 되는 몇 가지가 “욕심” 혹은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어쩌면 동물들도 갖는 본능적인 행동양식이라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동물들이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잇감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 동물의 욕심은 사람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비교”에서 비롯되는데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의 환경과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결국 욕심이고 욕심의 끝은 개인의 행복감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간혹 제자들이 결혼을 즈음하여 예비 배우자와 함께 인사를 올 때면, 제가 축하의 말로 전하는 것이 비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처가와 본가의 비교 혹은 내 아이와 저 집 아이의 비교,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을 피폐하게 하므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삶의 지혜일 것이라 전해주고 있습니다.
 
AVEC G의 박 기자님도 욕심을 갖지 않았기에 남들과는 다르고 어쩌면 어려운 길을 지켜나가는 언론인으로 자아를 지켜나가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가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직업 정신이 뛰어나다, 남들과 비교하여 뛰어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뛰어난 존재가 되어 가는 삶을 사는 기자이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직업에 있어 간혹 혹은 자주 사회의 문제나 사람 간의 문제가 되는 것이 “권위”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 대해 느끼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권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타인이 인정해줄 때 그야말로 권위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권위는 약육강식의 서열을 말하는 것뿐입니다만, 사람에게 권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간의 예의가 권위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대학병원 환경미화 여사님과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십여 년 전,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이 독립법인으로 이전 개원을 하고 병원에는 너덧 분의 여사님들이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유지관리를 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보통 9시 진료 전에 8시경에 시작하는 아침, 세미나 일정 등으로 더 이른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세미나를 위해 복도를 걷는 중 이른 시간부터 출근하셔서 청소 업무 중인 여사님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쳐다보지 않으시고 바닥만 계속 닦으셨습니다. 약간의 무안함이 있었으나, '못 들으셨나 보다'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후로도 두세 번 그런 일이 반복되어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어느 날은, 제 인사에 주변을 둘러보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반갑게 인사말을 돌려 주셨습니다.
 
그제야 생각한 것이, 그 시간대가 환자들이 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대부분 의료진인 교수와 전공의 선생님들이 오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청소하시는 여사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지레짐작하시고 묵묵히 하시던 일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먼저 시선을 주시기도 하고,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직업의 차이는 있고, 당연히 업무의 난이도가 다릅니다만,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그 직업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존재감이나 권위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여 명의 의사직이 근무하는 병원에 서너 분의 여사님들이 일을 못 하거나 안 하시게 되면, 과연 병원이 제대로 운영이 될까요? 100여 명의 의사 중에 누군가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을 할까요? 의사 서너 분이 안 나오더라도 병원은 잘 운영이 될 것입니다만, 반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업의 귀천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보지 않은 일 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하는 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대의 직업을 존중하고 그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는 권위를 갖게 되나, '내가 의사이니 여사님께는 인사를 받아야지, 내가 먼저 하지는 않아도 되려니...' 생각하는 사람은 권위를 얻을 수가 없고, 스스로 주장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에 비교를 하고 욕심을 낼 수 있고 권위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동물의 생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 역할을 잘하여 주장이 아닌 주어진 삶의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하며, 지난 50년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생이 아닌 삶을 더욱 가치 있도록 그려 보고자 합니다.
 
인터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독자들께도 미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본편: 바로가기

글: 글렌다 박 발행인 및 수석기자, 김현철 원장
사진 제공: 김현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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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지방법원 판사 <류영재>

1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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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우연한 계기로 사법농단이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3천 명 판사들의 분노를 잠재우며 사태의 의미를 축소하고 무마하려는 정권에 류영재 판사는 진실을 알리는 SNS 포스팅을 꾸준히 올리며 맞섰다. 그리고 국민들이 알지 못했던 사법농단의 진실의 어둠 속에 불씨를 붙였다. 그 작은 불씨였던 그녀의 포스팅은 횃불이 되어 결국 사법농단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도 SNS를 통해 판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비법조인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류영재 판사는 올해로 임관 10년 차를 맞이하였다. 판사로서 걸어온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사법농단을 비롯해 검찰개혁, 사법고시 존폐 등 법조계의 여러 현안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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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9년 12월 12일 열린 제1회 메디치포럼 행사장에서 '평생의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이날 류영재 판사는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출생]
1983년 2월 27일 (대구)
  
[학력]
 1998년~2001년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졸업
2001년~2006년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경력] 
2009년 제50회 사법시험 합격
2011년 제40기 사법연수원 수료 (사법연수원장상 수상)
2011년~2013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013~2015년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2015~現 춘천지방법원 재직 중
 
[논문]
♠ 명예훼손죄에 대한 헌법합치적 해석론과 재판실무의 운용, 한국언론법학회, 언론과법 제15권 제1호(2016)
♠ 사법의 책무와 독립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실천적 제안: 사법행정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법과사회이론학회, 법과사회 60권(2019)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춘천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영재입니다. 춘천에 살면서 일과 시간에는 재판 업무를 하고 밤에는 야근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쉴 때는 SNS를 통해 비법조인 페이스북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기도 합니다. 판사 중 SNS를 하는 분들이 드물어 본의 아니게 그 방면으로 알려졌기도 합니다. 인권보장, 표현의 자유, 차별금지에 관심이 많고 요즘엔 법원개혁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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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 남동생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고등학교인 대원외고 출신으로 만화가를 꿈꾸며 미술대학 진학`, `디자인과 출신 판사`, `사법농단의 진실을 알린 판사` 등 개인의 배경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예능 출연, 야구경기 시구 등 판사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자주 보이셨어요. 사회적으로 그리고 대중에게 알려지다 보니 삶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제 경력이 판사치고는 특이하지만, 사람 자체는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경력만으로 제 삶이나 이미지가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이하다’, ‘화려하다’, ‘천재적이다.’ 등.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제 얘기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디자인과를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은 단순히 디자인이 제게는 너무 어려웠고, 디자인 외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그에 비교해 법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학문이었고,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도 제 성격과 맞아 비교적 수월하게 시험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법원에 와서도 재판부 구성원들이나 소수의 친구와 어울렸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주위에 법조인들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법조인들과만 어울리다 세상의 상식과 내 상식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SNS를 통해 비법조인들의 생각을 나눔 받고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SNS 시작 당시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진 않았는데, 2018년 사법농단을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 포스팅을 공개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은 제 성격과 거리가 먼 삶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포스팅 하나를 할 때도 자기검열이 강해지게 되었고요. 특히, 몇 번 특정 언론이 작정하고 저를 ‘정치판사’라고 낙인 찍으러 비난했을 때는 온 가족 친척들이 ‘괜찮으냐’고 연락이 온 적도 있었어요. 그러한 순간은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맷집이 길러져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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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엔터테이너' 배우 <이재윤>

23/1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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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렸던 그는 태평양을 건넜고, 성인이 그는 자신의 꿈을 찾아 다시 고향을 찾았다. 힘겨운 역경을 이겨내고 드라마, 영화, 예능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는 진정한 ‘멀티엔터테이너’ 배우 이재윤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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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재윤 (Jae Yoon Peter Lee)

[생년월일]
1984년 12월 15일

[학력]
여의도 초등학교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
University of Toronto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과 졸업
 
[경력]
드라마 출연 -
2004년 MBC《논스톱5》
2005년 DMB《얍》
2006년 MBC 《늑대》
2008년 SBS 《행복합니다》
2009년 MBC 《맨땅에 헤딩》 신풍철 역
2010년 MBC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박철 역
2010년 MBC 《폭풍의 연인》 이형철 역
2011년 SBS 《내 사랑 내 곁에》 이소룡 역
2011년 MBC 《오늘만 같아라》 장지완 역
2012년 SBS 《유령》 조재민 역
2012년 SBS 《야왕》 주양헌 역
2013년 JTBC 《무정도시》 지형민 역
2013년 MBC 《황금 무지개》 김만원 역
2014년 tvN 《마녀의 연애》 맞선남 역
2014년 MBC 《드라마 페스티벌 - 형영당 일기》 이철주 역
2015년 tvN 《하트 투 하트》 장두수 역
2015년 SBS 《애인 있어요》 민규석 역
2015년 MBC 《화려한 유혹》 홍명호(문선호) 역
2015년 UMAX & O'live 《나에게 건배》 이지혁 역
2016년 tvN 《또! 오해영》 한태진 역
2016년 다음 tv팟 《통 메모리즈》 백승화 역 (특별출연)
2016년 MBC 《역도요정 김복주》 정재이 역
2017년 tvN 《아르곤》 허훈 역 (특별출연)
2017년 tvN 《변혁의 사랑》 변우성 역
2018년 tvN 《마더》 정진홍 역
2018년 JTBC 《뷰티 인사이드》 영화 '나를 모르는 너에게' 남자주인공 역 (특별출연)
2018년 MBC 《나쁜 형사》 강우준 역
2019년 TV조선 《조선생존기》 정가익 역
2019년 OCN 《왓쳐》 김강욱 역 (특별출연)
 
영화 출연 -
2012년 《회사원》 신입남(영업2부) 역
2012년 《첫사랑 보관소》(단편 영화)  현우 역
2014년 《관능의 법칙》 황현승 역
2014년 《그댄 나의 뱀파이어》 이주형 역
2015년 《이스케이프》(단편 영화) 김 경위 역
2019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해골문신 역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최근에 영화 <나쁜 녀석들>로 찾아뵈었고, 현재 드라마와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배우 이재윤입니다. 반갑습니다.
 
초등학교 때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하셔서 대학교까지 10여 년간의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이재윤'이 아닌 '피터 리'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가게 되었어요. 나이 열 한 살 채 되지 않았던 제겐 모든 것이 낯설었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란 부모님께서도 그러셨겠지만, 제겐 더욱 쉽지 않았지요.
 
동생과 단둘이 서로 의지하며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입학했던 첫날이 기억나요. 첫 수업이 불어 수업이었는데, 영어도 못 하는 제게 불어가 얼마나 낯설고 생소했던지 첫날부터 수업 도중에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Peter’라는 제 영어 이름은 뒤늦게 성당에서 알게 된 분들이 지어주셨어요. 우리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제 세례명 ‘베드로’를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 덕에 토론토 소재의 가톨릭 학교인 Holy Family Elementary School에 이어 St. Elizabeth Catholic High School에 진학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캐나다는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나라이지요. 제 생각엔 다른 곳 들보다 비교적 인종차별이 적은 것 같아요. 다만, 각각 외모와 언어, 문화와 생각의 차이가 서로 부딪히다 보니 그것이 ‘인종차별’이라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다름을 약점으로 삼고 놀리거나, 무시하다 보니, 싸우기도 하고, 문제도 생기고 했지만, 그곳이 한국이었던, 캐나다였든, 제가 느끼는 것은 같았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그렇게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어요. 비교적 평범한 키에, 그리 용감하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마음 한편엔 저도 모르게 ‘나는 동양인을 대표한다’,라는 마음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 주변에 어울리던 동양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더욱 못 참았지요.
 
제가 ‘센 캐릭터’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약해서 학창시절엔 싸움이 나도 끼어들지 못했어요. 하지만 강해 보이고 싶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어요. 한국과는 시스템이 달라 엘리트 체육부가 아닌 생활체육이라고 해도 운동부에 들어가려면, ‘Try-out’이라 하여 일종의 오디션 같은 것을 통해 그해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뽑곤 했는데, 저는 모든 체육 종목부 ‘Try-out’에 참여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종목이 육상이었어요. 학교를 대표해서 100m 단거리 선수로 대회를 나갔고, 항상 1, 2등을 차지했어요.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강남구, 서울시, 도를 거쳐 올라가듯 온타리오주 대회 참가 자격을 받으며 제가 원했던 것처럼 ‘학교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육상을 통해 알게 된 특별한 지인이 바로 ‘벤 존슨’이에요. 대회가 열리던 대학가에 벤 존슨이 개인 훈련 사유로 와있었고 시합을 참관하고 있었어요. 저는 용기 내 다가가 사인을 받았죠. 그런데 존슨은 제가 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한 대화는 기억을 못 하지만, 함께 훈련하지 않겠냐고 했던 것이 어렴풋해요. 그렇게 해서 몇 달간 개인 훈련을 받았어요. 집에도 초대해 함께 식사도 하고, 부모님 세대의 유명한 운동선수라 특히 부모님께서 무척 신기해하셨어요. 정말 좋은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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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tvN 드라마 ‘마더’ 촬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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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소사이어티 대표 <이제복>

18/1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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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당시 9세였던 김민식 군이 사망했고, 이번 달 10일 ’민식이법‘이란 이름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3년부터 아동 인권 NGO 단체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제복 대표는 오늘도 기도한다. 그가 창안한 ’옐로카펫‘이 더 많은 어린이보호구역에 설치되어 앞으로는 더 이상의 아동이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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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옐로카펫 설치 전 기념촬영 (2015년 4월)
[출생]
1987년 4월 6일

[학력]
해운대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의용전자공학과 졸업

[경력]
2013년 9월~2016년 9월 (사) 국제아동인권센터 가치공유팀 팀장
2016년 10월~現 옐로소사이어티 (아동 안전/인권 NGO) 대표
2017년 12월~現 아동안전위원회 위원장

[주요성과]
♠ 옐로카펫 창안
- 어린이 횡단보도 안전지대 옐로카펫 창안 및 전국 어린이 보호구역 내 확산 설치
- 2016년 8월 국민안전처 ‘어린이보호구역 정비 표준모델’ 수록
- 2018년 6월 행정안전부 ‘옐로카펫제작 및 설치 가이드라인’ 수록
- 2018년 고등학교 통합사회 교과서 수록

♠ 옐로카드 개발
- 어린이 교통안전용품 옐로카드 개발 및 보행자 반사용품(反射用品) 안전기준 확립
- 전국 30만 이상 아동에게 배포

♠ 옐로키즈 교육
- 참여연극형 교통안전교육 옐로키즈 개발 및 전국 어린이 안전 박람회 공개 교육
- 서울, 경기도, 인천, 대전 등 어린이 안전 박람회 공개 교육

♠ 어린이 안전 법안 입법활동
-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조두순 접근금지법’ 발의
(2019년 11월 정은혜 의원실과 발의 및 기자회견)
-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제안 및 캠페인 추진
- 2019년 12월 호주어린이재단과 MOU 체결
- 2019년 12월 “당신은 이 아이가 보이나요?“ 아동학대 신고동참 캠페인 추진 및 개정안 제안
- 아동 친화적 주택정책 최저주거기준 개정안 제안
(주거기본법 제17조에 의한 국토교통부령 최저주거기준)

[수상]
2011년 5월 - 2013년 2월 연세대학교 창업동아리 Y-Media 회장
- 창업공모전 5회 수상 (중소기업청, 특허청장)
- 중소기업청 선정 전국 1위 창업동아리 수상, 실리콘밸리 기업탐방 및 창업 프로세스 체험
- 실용신안권 (자동으로 높이 조절이 가능한 목발)
2015년 '2015 Design for Asia Awards' 옐로카펫 NGO 최초 종합대상 수상 (홍콩디자인센터)
2019년' 2019 서울교통문화상 최우수상 수상' (옐로카드, 옐로키즈)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어린이 횡단보도 안전지대에서 익숙하게 보실 수 있는 ‘옐로카펫’을 최초로 창안해서 전국으로 확산시킨 ‘옐로소사이어티’ 대표 이제복입니다. 최근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어린이 안전 법안’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문 입법 활동을 하는 ‘아동안전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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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옐로카펫이 완성된 모습 (2015년 4월)
(사)국제아동인권센터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아동안전과 인권을 위해 앞장서고 있으신데요. 대학에서는 '아동', '인권', '안전'이라는 단어와는 먼 의공학부 출신이십니다. 현 분야에 몸담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저는 대학 시절, 의공학부를 전공하면서 또 창업동아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공모전 수상도 다섯 번을 했고, 국비 지원으로 실리콘밸리까지 다녀왔어요. 당시 세계 1위 다이어트 애플리케이션 회사 대표가 ‘한국 시장에 곧 진출할 계획인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지요. 고작 학부생인 제게 그렇게 대단한 제안을 받은 것에 감격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말 열정적으로 작업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왠지 모르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들면서 모든 것이 막연한 회의감이 들었어요.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온 거죠. 그래서 저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자 세계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쓴 여행일기를 다시 찾아보았어요. 제 초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서요. 여행일기를 보니 제가 여행 중 언젠가 쓴 한 일기 중 제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어요. “만약 나에게도 작은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누군가를 위해서 쓰며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다”라는 문장이었어요. 그 글을 보고 깊게 고민했어요.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요.
 
제가 당시 독일의 문호 괴테를 참 좋아했는데 고민하던 같은 순간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의 뜻은 행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많이 가져도 불행할 수 있고,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 전제는 ’희망만 있으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이 사회에서 이 ‘희망’조차 없는 사람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자라오며, 배우며,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가슴을 ‘쿵’ 치며 떠오는 건 다름 아닌 ‘아동’이었어요. 축복받지 못한 출생에 버림받은 아이들, 이유도 모른 채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 배고파서 굶주리는 아이들, 각종 사고와 범죄에 노출되는 아이들에게 저는 도저히 “아이야, 지금 네가 불행한 것은 너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질 거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다이어트 애플리케이션 사업을 바로 중단했고, ‘앞으로 내 삶은 이런 아동을 돕기 위해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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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감독/무용가/안무가 <성승정>

29/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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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이에 무용과 공연예술계에 각각 입문하여, 지난 3일 폐막한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된 성승정 감독.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 댄스필름계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댄스필름, 그리고 무용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열정에 대해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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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1월, artist GYU x 선인장베게 - 라이브페인팅 퍼포먼스 <Forever never> 공연 당시 (갤러리 '빈칸')
[출생]
1992년 4월 27일
 
[학력]
▶ 대전 삼천중 졸업
▶ 대전 충남고 졸업
▶ 서울대 사범대학 사회교육학/미술대학 영상매체예술 복수전공 학사 졸업
▶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 석사과정 수석입학 및 재학 중
 
[경력]
▶ 2011~2018 서울대 중앙 재즈댄스 동아리 ‘몰핀’ 안무가
▶ 2017~ 댄스필름&퍼포먼스팀 ‘선인장베게’(cactuspillow) 비디오그래퍼
▶ 2017년 12월 ‘선인장베게’ 첫 필름 <집 떠난 빛-눕고 싶은 어둠> 업로드, 이후 <Glass You>, <이런 저런>, <박효신-숨 댄스커버> 등 발표
▶ 2018년 7월 ‘선인장베게’ 공식 데뷔: Cactuspillow x Osisun-아트스페이스 ‘Osisun’ 개막공연 ‘오지선다’ 안무 (전석매진)
▶ 2018년 12월 ‘선인장베개’ 독자적 몸언어 <댄스어> 제작 - 서울대학교 영상매체예술 졸업전시에서 <초급 댄스어1> 발표
▶ 2018년 10월~2019년 6월 <99>, <자우림-샤이닝 댄스커버>, <창 · 살>, <이합의 춤> 등 댄스필름
▶ 2019년 8월 댄스필름 <왱> 제작
▶ 2019년 10월 무용가 김백봉 아카이브전 ‘2019 춤의 얼굴’ 영상감독
▶ 2019년 11월 artist GYU x 선인장베개-라이브페인팅 퍼포먼스 <Forever never>(갤러리 ‘빈칸’)
▶ 2019년 11월~12월 전시 ‘타임리얼리티’ 中 팀 ‘프로젝트 밴드스텝’ <다른 악보> 참여(코리아나 미술관)
▶ 2020년 2월 <초급 댄스어2> 공연 예정(Osisun x 지하극장)
 
[수상]
▶ 2019 선인장베게 댄스필름 ‘왱’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감독상 수상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영상매체예술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성승정 입니다. 저는 댄스크루 ‘선인장베개’에서 댄스필름과 무용공연, 퍼포먼스를 포함해 여러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선인장베개’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거나, 댄스필름을 제작하기도 하고, 다른 분야의 여러 예술가와 함께 협업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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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적벽강에서 촬영 당시 (2019년 11월)
점점 주목을 받는 분야이지만 ‘댄스필름’은 아직 생소합니다. 어떤 계기로 ‘댄스필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나요?
 
댄스필름은 말 그대로 댄스와 필름을 결합한 것으로, 어떤 형태로든 무용을 담은 영상물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좁게는 하나의 공연물처럼 무용만을 콘텐츠로 하는 경우(예: 스크린 댄스)를, 넓게는 음성과 인터뷰를 가미하여 댄서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뮤직비디오 등 춤이 소재로 등장하는 일체의 영상물 모두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통일된 용어로 정의되어 자리 잡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Dance film’이나 ‘Screen dance’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영상물이 제작 및 상영되고 있습니다.
 
결합이 되는 것이 댄스와 필름이다 보니, 무용에서 오는 독자적인 요소, 그리고 영화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법들이 모여 독자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장르이기도 합니다. 특히 피사체가 되는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점, 이인무나 군무 등에서는 대형이 있다는 점에서부터 일반 영화와는 또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로 시작했던 무용이 점차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고, 영상이라는 매체에 몰입하게 된 것도 공연 일부에 사용될 요소로서 시작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학부 때는 무용 따로, 영상 따로,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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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Notice] 기사의 댓글창을 엽니다/Welcome to Leave Comments

27/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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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Avec G'는 인터뷰 기사에 댓글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많은 독자 분들의 문의와 요청으로 댓글 창을 오픈하기로 하였습니다.

인터뷰 기사와 인터뷰이 대한 모든 댓글을 환영하나 해외에 거점을 둔 언론사이기에 욕설, 명예회손, 개인정보 유출, 허위사실 유포 등이 담긴 내용은 한국과는 달리 해외에서는 법적대응의 기준이 모호한 바,  바로 삭제 조치 할 것을 공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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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19/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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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삭막하고 흉흉하다. 그런 지금, 전혀 모르는 남이 도움을 청할 때, 그런데 거기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손을 뻗기는 망설여진다. 그런데 김예원 변호사는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어느 누군가 캄캄하고 깊은 곳에서 도움을 외치는 소리를 찾아 기꺼히 나선다. 그리고 그런 김예원 변호사의 마음 속의 작은 꿈은 자신이 장애인, 여성, 아동 등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되도록 오래 오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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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아이 셋 가운데 둘째 임신 중, 장애인권리보장법 연대활동 당시.
[출생]
1982년 11월 19일

[학력]
강원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

제51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41기 수료
前 법무법인 태평양이 설립한 공익재단법인 동천 공익전담변호사
前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상임변호사로 재직
現 장애인권법센터 대표 / 변호사
現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법률위원
現 재단법인 사랑샘 이사
現 사단법인 한국여성변호사회 비상임이사
現 사단법인 정신장애인인권연대 KAMI 이사
現 사단법인 장애인법연구회 교육국장
現 공익법률기금 사무국장
現 서울지방변호사회 국선변호특별위원회 위원
現 서울특별시 녹색시민위원회 위원
現 KBS 시청자위원
現 법무부 장애인차별시정심의위원회 위원
現 강원도 인권위원회위원
現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운영위원
現 대검찰청 검찰미래위원회 위원
現 한국장애인개발원 혁신자문단 위원
現 한국장애학회 감사
現 강원도 장애인권익옹호기관 법률자문단 위원
現 한국자원봉사센터 기록문화 추진위원
現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위원

[취득 자격]
• 변호사 (법무부)
• 사회복지사 (보건복지부),
• 성폭력 전문상담원 (여성가족부)

[수상]

• 공로상 (장애인 인권), 한국여성변호사회 (2015년 1월)
• 장관표창, 보건복지부 (2016년 12월)
• 청년변호사상, 대한변호사협회 (2017년 2월)
• 공로상 (아동 인권), 한국여성변호사회 (2018년 1월)
• 곽정숙 인권상, 곽정숙 기념사업회 (2018년 3월)
• 서울시 복지대상, 서울특별시 (2018년 4월)
• 청년 공익변호사 대상, 법조공익모임 나우 (2018년 12월)
• 우수변호사상, 대한변호사협회 (2018년 12월)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 김예원입니다. 장애인권법센터라는 비영리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장애인, 여성, 아동 등에 가해지는 폭력과 학대, 차별 이슈에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한쪽 눈이 없어져서 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시각장애인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 아이를 기르는 워킹맘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AVEC G]와 인터뷰를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금은 어엿한 변호사가 되셨지만, 당시엔 법과대학 입학이 사법고시 합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학창시절, 진로에 대해 겪었던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말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 의사표시를 분명히 해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하는 스타일이었지요.

자라나면서 따돌림과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유는 오로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시각장애가 제게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그랬기에 성적도 좋았습니다.
 
법조인이 무엇인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법’이라는 도구로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꼭 법조인이 되겠다’라고 일찍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은 법학으로 정했고, 입학 후에는,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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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사건당사자와 회의. 변호사는 언제나 당사자의 ‘needs’를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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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감독 및 프로듀서 <최영호>

18/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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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PD를 동경해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지만, 실용음악계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가 던진 '편곡도 잘할 것 같다'라는 한 마디는 그가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떠오르는 작,편곡가, 프로듀서,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생의 파장을 불러왔다. KBS 예능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의 편곡가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음악감독 최영호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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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중음악 작곡가와 편곡가, 그리고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최영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인지도 높은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지만,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항상 교회와 학교에만 왕래하던,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과 음악을 좋아했기에, 공부하는 시간을 빼면, 항상 농구나 수영 등, 운동과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직업의 선택이 넓어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을 뿐, 미래에 대한 대단한 포부나,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적성에 맞는 꿈보다는 ‘대학’을 목표로 달리는, 그래서 슬프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한, 현 대한민국 교육환경에 처한 고교 수험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고교 재학 당시, 이미 언급했듯, 적성보다는, 전형적인 교육환경에 맞춰진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보았던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 정도가 있었던 직업이 ‘외환딜러’와 ‘방송국 PD’였습니다.
 
1994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인 김민종(한현 역)이 외환딜러였는데, 제게는 그 역할이 매우 멋있어 보여서, 직업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아요. 방송국 PD 또한, 인터넷은 걸음마를 떼던 당시였고,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전화’의 기능만 하던 때라, 대한민국에서 TV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이 대단했기에, 그 영향력의 중심에 있던 방송국 PD직을 동경했습니다.
 
외환딜러가 되려면 경제학과에 진학해야 했고, PD가 되려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야 했는데, 응시했던 학교 중, 합격한 곳이 신문방송학과였습니다.
 
아쉽게도 동경을 가지고 입학한 신문방송학과는 저와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미리 상상하고, 기대했던 수업의 내용이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업들이 주를 이루니 흥미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미디어 직업군에 대한 실전적인 수업보다, 국내외 정치, 경제 등 시사 수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실습보다는 학문적인 접근이 많았던 커리큘럼이, 제게는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대학입학 후, 다행히 적성을 찾아, 프로음악가로 데뷔를 했기에,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 초년에 하게 됐습니다. 음악은 전혀 전공과 관련이 없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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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상담사 및 교육전문가 <김이준>

8/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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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가수 g.o.d의 '길'이라는 곡의 가사이다. 수많은 어린이들은 세상을 알아가며, 청소년이 되며, 성인이되며, 어제의 꿈은 오늘 바뀌고, 내일의 꿈은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뀐다. 진로는 평생이 걸려있기에 소중하고, 중요하다. 반평생을 '진로, 상담 연구'에 헌신한, 진로상담자 김이준 교수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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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로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 전문적인 조력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진로상담사 김이준입니다.
 
저는 진로 전문가로서, 진로와 관련된 상담, 교육, 연구, 개발 등을 통하여 생애발달 측면에서 진로와 관련된 주요 논점을 다루고,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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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로 분야 전문가이시고, 진로교육 관련 강의를 주로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본인 역시 학창 시절,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격동의 시기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매우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예술중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열여섯 살 될 때까지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학도였고, 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성적이 잘 나올 때면, ‘의대에 진학해볼까?’라는 순진한 생각도 하기도 했었을 만큼, 명확한 꿈은 없었습니다.
 
‘흥미’, ‘적성’, ‘가치’, ‘강점’ 같은 단어들은 생소했기 때문에, 성적이 높으면, ‘명성 있는 대학에 진학해야지’, ‘점수 맞는 학과에 가야겠다.’, ‘이런 소망이 다 이루어지면, 인생은 행복할 것이다’ 같은 무척 단순한 생각을 했었고, 딱 그 정도의 고민만 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기 때문에 맨 처음 진학한 과는 건축공학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공학의 공부를 깊게 하면 할수록, 저에게는 어렵게 다가왔고, 흥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전공이 결정된 상태였기에, 내적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대로 이어 나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돌고 돌아, 적성에 맞는 전공인 심리학을 공부하기까지 굉장히 고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심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심리학과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이 재미있었으니까요.

묘하게도 건축과 심리학, 이 두 학문이 매우 동떨어진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비슷한 부분도 많습니다.
 
건축은 예술과 과학적이 접목된 분야이고, 심리학도 예술적이며, 과학적인 분야라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은 엔지니어로서 갖춰야 할 기본기가 필요한데, 그런 부분이 저에겐 어려웠습니다. 심리학 역시 측정 및 연구방법이 어렵긴 하지만, 몇 개의 과목은 빨려들 듯 재밌기도 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상쇄시켰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과거의 모든 경험도, 미래의 디딤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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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우리' 대표 변호사 <김정철>

7/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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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형사 분야 변호사, 교수, 직능단체 위원, 스타트업 기업가... 수많은 변호사 준비생들은 그의 저서를 교과서 삼아 공부하고, 일반인들은 그가 만든 무료 앱으로 도움을 받는다. 그의 SNS은 법조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사이다처럼 터트리는 것으로 인기가 높다. 그는 바란다. 다른 어떤 것보다, ‘법조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김정철 변호사'로 기억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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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법무법인 우리 대표변호사 김정철입니다. 저는 2013년부터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고, 올해 2학기부터는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겸임교수로 부임하여 로스쿨 학생들에게 형사소송 실무를 강의할 예정입니다.
 
형사법 박사로, 변호사로서는 형사사건을 주로 담당하였고, 20여 년 가까이 학생들에게 형사법을 강의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사 전문변호사로 인지도가 조금씩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또 다른 직함은 ㈜ 로팡의 대표이사입니다. 저는 소송사건의 승소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후, 특허를 출원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이미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에서 각 특허취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미천한 수준이지만 향후 대한민국도 미국처럼 리걸테크 분야가 반드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스타트업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시작으로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법률 서식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안드로이드 앱을 개발하여 배포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변호사 차용증’ 앱입니다.
 
저는 법무법인을 설립하여 이끄는 대표변호사이기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면서, 스타트업 회사를 막 시작한 새내기 창업가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직책으로 여기는 것은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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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전기획 및 책과강연 대표기획자 <이정훈>

4/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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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경영자, VIP의 죽음 위기관리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실제 상황에서 실무를 관리하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기업인 중앙의전기획의 대표! 또한, 개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며, 기회와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책과강연'의 대표! 사람의 장례를 관장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꿈을 선사하는 이정훈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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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하는 기획자 이정훈입니다.
자기소개하면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선명한 사회적 정의가 될 수 있는 만큼 제 직업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 덕분에 인터뷰를 제안받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한다’라는 말을 쉽게 풀어 설명하며, 진로를 소개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시지만 대학에서는 사범대학의 일어교육과를 1996년에서 2005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다니셨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저는 학창시절에 진로를 고민해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X세대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97년의 IMF 금융위기가 대한민국을 휩쓸었습니다. 당시 전 스물한 살이었고, 매일 뉴스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서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옆집의 친근했던 아저씨로 불리던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딸린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고민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97년 이후 가족들의 단란하게 둘러앉아 먹던 저녁 식사의 풍경은 사라졌고, 불 꺼진 거실 식탁은 쓸쓸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 역시 그 시절의 중심에 있었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리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채업자들의 독촉을 피해 수년간 죽은 듯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그 빚으로부터 자식들을 지켜내느라 삶이 누더기가 될 지경까지 내몰렸었죠. 동생은 공장으로, 전 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게 99년 말즘이었어요. 학교를 10년 만에 졸업한 이유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체류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고교 시절, 제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생에게 진로를 묻는다는 것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대학)’을 묻는 거니까요. 고등학생에서 ‘진정 되고 싶은 것’이란 질문은 ‘이상적’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코 ‘이성적’인 질문은 아니죠. 저는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고, 대학이야 당시에도 갈 생각만 있으면 갈 곳은 많았었으니, 진로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여유가 있었어요. 사람들도 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다 적절한 시기에 결혼하는 것이 제가 봐온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목적이 행복을 담보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았던 세상은요. 
그랬었기에, 저 자신에게도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인식을 바꾼 것이 97년 금융위기입니다. 당시, 제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처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삶은 불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경제적인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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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동기부여가 <권혁탁>

2/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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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동기부여가'로 활발히 활동하는 권혁탁.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대다수가 경험하지 못하는 기적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을 부여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글과 이야기, 노래를 통하여 알리며,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치유하고, 공감하고, 변화 시키는 힘을 전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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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국내 1호 동기부여가이자, 매일 꿈을 쓰고, 노래하는, ‘꿈 쓰는 피터펜’(Pen) 권혁탁입니다. 저는 저의 삶을 담은 글, 이야기, 그리고 노래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연출 전공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십니다.
 
초, 중학교 시절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정말 잘 따르는, 더 없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결석 한번 하는 것도 무서워하고, 매번 반장을 도맡아 하며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수학, 과학 과목의 3년 성적 평균이 5%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는, 과학영재 시험에 응시하여 2차까지 붙기도 했습니다. 3차가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친구와 노느라 미처 제때 응시를 하지 못해 끝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또래보다 일찍 다가온 사춘기는 제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껏 부모님의 말씀,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이견 없이 순응하고, 따르던 제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삶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길 원했습니다. 그 무렵 한창 가수 비(정지훈)가 가요계에 데뷔하여, ‘안녕이란 말 대신’이라는 노래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제2의 비가 되겠다‘라며, 안양예술고등학교 (이하 안양예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거다‘ 싶어, 저도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사실 진로를 정하기에는 어린 나이었던 제가, ’연극영화과‘에 대한 큰 거부감이 없던 이유는, 중학교 1학년 즈음, 어머니께서 주부극단 소속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그때 몇 차례 공연을 보며 익숙한 얼굴들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직접 본 경험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제2의 비’를 꿈꾸며 안양예고 입학을 꿈꾸던 친구는 약 6개월간, 그리고 저는 2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입시 준비를 하고, 안양예고의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엔 경쟁률이 10:1 정도로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전국 각지에서 시험을 보러 온 재능 넘치는 학생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고, ’당연히 떨어졌겠지‘라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날, 함께 본 친구는 떨어지고, 제 이름만 올라와 있었습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하던 현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평생지기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며, 욕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다 같이 기뻐하고, 많은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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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꿈의지도' 대표 <김산환>

31/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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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텐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멘트 하나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 20년 간 여행전문기자와 작가로 활동하며 32개의 나라에서 천 일 넘게 머문 그는 오늘도 꿈꾼다.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들만 더 여행할 수 있겠다면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은 것'이라고... 꿈을 그리는 여행서 전문 출판사 <꿈의지도> 김산환 대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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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여행서 전문 출판사 '꿈의지도' 김산환 대표입니다.
 
예술대학 출신이신데 어떤 계기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했습니다. 지금이야 문예창작학과가 대학마다 있지만, 당시엔 4년제 대학 가운데 유일했습니다. 이처럼 생소한 학과를 선택했지만, 딱히, ‘시인이 되겠다’라는 큰 포부는 없었습니다. 그저, ‘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입학하고 나자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생운동입니다.
 
당시에 글을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모순을 직시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적 모순을 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많은 문예창작과의 선후배들이 들려줬습니다. 자연스럽게 문학을 하는 것은 모순에 맞서 싸우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출하는 방식은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휴학을 포함해 6년간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사이 문학은 점점 멀어졌고요. 단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운동권인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학교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사회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어요.
 
‘무엇을 하며 살까?’ 이 고민을 품고 48일간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남을 이 산행을 하는 동안 찾아낸 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이상도 다치지 않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찾자’라고 마음먹었고, 바로 ‘등산 잡지사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은 문학과 운동만큼 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등산 잡지 기자가 되겠다는 꿈은 1년 반 뒤 현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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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페터 <유재우>

30/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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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이라는 시골에서 트럼펫을 배우며, 서울대 음악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하고, '클래식 전공자는 유학이 필수'라는 불문율을 깬 순수한 국내파. 학벌이 클래식 음악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뛰어넘어, 현재 연주자로서 자신의 활동을 한정 시키지 않고, 강의, 지휘, 작,편곡, 행정, 그리고 포토그래퍼로서의 활동까지 하며 하루 하루를 숨가쁘게, 그리고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소중하게 쓰고 있는, 트럼페터 유재우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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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연천군 출신으로 현지에서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술전문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 트럼펫 연주자 유재우입니다. ‘Avec G’와 인터뷰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일반적으로 접하기 쉬운 악기가 아닌데, 어떤 과정으로 입문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성장기를 겪어왔는지 궁금합니다.

경기도 연천군 소재 연천노곡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요. 당시 전교생이 80명 정도로 작은 규모의 학교였지만 전국 마칭 밴드 경연대회에 출전해서 해마다 입상했을 정도로 전통 있는 학교입니다. 3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관악부 활동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내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 처음 트럼펫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악기에 배정되었지만 몽글몽글하면서도 밝으며 진취적인 소리를 가진 트럼펫을 연주하는 선배님들이 아주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며칠 지나지 않아 트럼펫 파트로 바꾸게 되었고요, 트럼펫을 시작한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악기를 처음 잡았을 때의 마음속 설렘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당시엔, 악기를 다루는데 있어서 재능은 또래 친구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펫에 대한 의욕이 너무 앞서서 그랬는지, 친구들 실력보다 늘 뒤처져 있었고, 그저 친구들처럼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어요. 항상 저음 파트를 연주했었는데, 빛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트럼펫 연주 하는 일이 제일 신나는 일이었고요. 주말마다 학교에서 악기를 빌려와서 연습할 정도로, 트럼펫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습니다.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 위기가 한 번 있었어요. 초등학생들 사이였지만, 관악부 규율이 굉장히 엄격했거든요. 가뜩이나 소심한 제가 이겨내기에는 너무 가혹해서, 어머니께 관악부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것도 극복하지 못하면 더 큰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어머니의 질책에 대한 원망이 많았지만, 그때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셨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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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소속 청년 정치인 <문준혁>

29/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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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모였을 때 개개인의 사상과 사고가 다르더라도, 오로지 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선택을 따라하는 것은 '군중심리'이다. '군중심리'는 정확하거나,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기에 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때때론 개인의 삶에서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거대 정당을 지지하는 현재, 야당 중에서도 국회의원이 최소수로 이루어진 '정의당'을 고교시절부터 본인 만의 소신과 확신을 가지고 지지하고 있다. 그는 바로 문준혁 정의당 경남대 학생위원회 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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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정의당 동물복지위원회 운영위원이자, 경남대학교 학생위원장으로서, ‘기본이 되는 세상을 원하는 시민’, 문준혁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하시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중퇴하고, 대학 입학 전까지 1년여 동안 어떤 삶을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저는 한마디로, ‘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학교생활에는 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학생 인권 관련 동아리도 만들고, 방송 동아리에서 기자도 하는 등, 교내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방송 관련해서 기자 활동을 주로 했었습니다.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는 규정이, 일정 규모의 학생이 모이면 동아리를 직접 개설할 수 있었는데, 저는 당시 ‘학생 인권동아리’를 만들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구해야 했는데, 선뜻 나서주시는 선생님도 없었고, 동아리 인원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 인권동아리’를 통해, 지역 청소년 단체를 만들고, 지역 사회 활동을 했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을 비롯한 많은 분께서 저를 아껴주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2학년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고, 대학 입학 전까지 저는, ‘꿈을 찾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정당에 가입한 후 이뤄진 정치 및 시민단체 활동 경험… 그리고 여행도 정말 자주 다녔습니다. 진로에 맞는 대학 학과도 자주 찾아봤는데요. 중퇴 이후의 삶이 저의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행하면서, 제가 서울에 산다고 착각할 정도로, 서울을 포함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많은 걸 보고, 배웠고, 경험을 쌓았습니다. 아마 그때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 역시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종영한 JTBC 드라마 'SKY캐슬'에서는, 오늘날 고교생들의 '입시지옥'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후반부에는 전교 1등인 예서와 우주가 나란히 고등학교 중퇴를 선택합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시공부에 그렇게 썩 관심이 없어서 예서와 우주의 입장에서 고교 시스템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승-전 명문대학 보내기’라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는 강남 8학군, 특목고 등 좋은 고등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면, SKY를 비롯한 카이스트 등 국립 특수대학교로 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좋은 고등학교가 해야 할 일은 학생 개개인의 적성에 맞는 꿈과 진로를 찾아주고,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기조의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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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정책학회장 <정재한>

26/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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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과 90년 대, '어른들은 몰라요!'를 외치던 그들은 오늘 날의 기성세대가 되어, 당시 그들이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질문을 청소년들에게 다시 던진다. '늬들이 뭘알아?'라고 말이다. 현 시대의 청소년들은 과연 정말 모를까? '청소년의 작은 움직임이 나라를 바꾼다'고 믿는, '고3 정치인', 정재한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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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의 시선에서 인권신장과 법적 및 제도적 개선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반영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정책학회장인 정재한 입니다. 반갑습니다.
 
청년 정치인, 젊은 정치인과의 인터뷰는 해보았지만, 본 기자도 ‘청소년 정치인’, '청소년 활동가'와의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청소년으로서 정치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뉴스와 신문을 즐기시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만화영화보다는, 뉴스와 신문 보는 것을 더 즐겼습니다. 이후 중,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어렸을 때부터 봐온 뉴스와 신문 덕에 사회현상에 관해 관심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사회 분야에 호감이 생기더니, 사회과목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문과 뉴스 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만 한정되어있었고, 여당과 야당의 구분도 잘 못 하는 등, 기초적인 지식도 없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나중에는 ‘정치는 내가 아닌 전문적인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관심도도 낮아졌습니다.
 
그러던 2016년, JTBC 방송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간의 유착관계와 정부 현안과 연설문이 담긴 태블릿 PC 발견과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비리가 보도된 이후, 당시 정부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보도가 연달아 터지면서, 내적으로만 간직하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고, 제가 거주하고 있는 부산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지속해서 참석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박근혜 탄핵’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는 걸 직접 바라보면서, ‘그동안 암울했던 시대를 시민의 손으로 끝냈다’라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후, 잘못된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사회적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알게 되면서, 적극적인 정치 참여로 이런 사태를 막겠다는 감정이 교차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정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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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

23/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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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은 2000년 이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실업자 수는 IMF 때보다 2배라고 한다. 문화계의 청년 실업자 역시 날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도 아닌 외국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독일의 교향악단에서 10년 간 활동하며,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제3악장에 임명되어 오는 시즌 부터 부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과의 인터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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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 후, 독일 오케스트라에 적을 두고, 실내악과 독주 등 다양한 연주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입니다. ‘Avec G’와 인터뷰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예체능 전공 특성상 진로를 일찌감치 정하게 됩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일곱 살 때, 가까운 이웃 한 분이 음악학원 원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운영하신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함께 배웠는데요. 1년 정도 후에는, 당시 학원의 바이올린 선생님이셨던, 김희송 선생님의 권유로 개인지도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취미로 바이올린을 하던 중,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진로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학업에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할 것인가’에 대한 갈림길에 서서 고민을 오래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예술고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 전공자 중에도, 기악 전공자들은, 훨씬 더 일찍 예술중학교를 진학하여,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예고에 응시해보고, ‘붙으면 음악의 길로, 떨어지면 인문계로’라는 마음을 먹고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사실 실기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중학교 내신이 괜찮았던 덕에 붙게 된 것이었는데, 저는 이것이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예술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다른 고민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전공해야 하니, 저를 잘 이끌어줄 좋은 강사 선생님을 찾아야 했는데, 저도, 어머니도,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무작정 교내 현악 부장 선생님께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만난 우정은 선생님 밑에서 2년간 공부하며, 바이올린의 기초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전공생들이 익혀야 할 레퍼토리들도 많이 익혔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예고에 잘 적응하여, 입학 후 있었던 첫 실기시험에서 1등을 하고, 2학년 때는 교내 오케스트라 악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김대환 선생님을 만나 고3이 되었을 때, 여러 콩쿠르의 출전과 입상 경험을 쌓으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였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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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홉킨스 의과대학 교수 <권형배>

2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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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은 누구에겐 도전이고, 다른 이에겐 미래이다. 어떤 이는 ’꿈’을 ’별‘에 비유해, ’멀어서, 닿을 수(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자신이 소원했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연구 기관이자, 미국 의과대학인 존스 홉킨스대 권형배 교수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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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부터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과학부에 부교수로 임용된 권형배라고 합니다.
 

현재는 신경과학자이자 저명한 대학의 교수로 활동 중이시지만 학사전공은 축산학이셨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신경과학을 전공하게 되신 건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생물학에 많은 흥미를 느꼈고, 고등학교에서도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계속 생물학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유전공학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유전공학은, ’미래의 식량이나, 의약품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며 뉴스에서 많이 다뤄졌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재미와 흥미를 느꼈던 생물학이었기에 대학도 생물학과에 지원했었는데, 크게 생각지도 않았던 2지망이 되는 바람에 축산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입학 후, 타전공 과목도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었고, 하고 싶었던 생물학과, 화학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을 생화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석사과정에 진학해보니, 생물학에 정말 많은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그중 ’신경생물학‘은, 당시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학부에 ’신경생물학’이라는 과목도 없었고, 신경생물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은 국내 전체에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당시, 미래에 ’뇌과학‘이 크게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미국 유학을 신경생물학으로 정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론 20년 가까이 신경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하면서, 다행히 적성에 맞으며, 만족할 만한 분야를 찾아서, 후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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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니제일교회 담임목사 <안성복>

21/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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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소명이란 어떤 것일까? 미주 장신대학교 교수이자 다우니제일교회에서 목회를 맡고 있는 안성복 목사와 함께, 그가 걸어온 목회자의 길, 목사로서의 소신을 비롯해, 국내 사회의 흔들리는 기독교의 입지 속 지켜야 할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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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독자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 다우니 시에 위치한 다우니 제일교회를 섬기고 있는 안성복 목사입니다.
 

‘부르심’이라고 표현할까요? 언제,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목회자로서의 진로를 택하게 되셨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이 ‘목사’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딸 셋을 낳은 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라는 서원 기도 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목회하셨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린 제 눈에 설교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을 모아두고 그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 놀이’를 할 정도로 목회를 좋아했었어요.
 
물론, 제 나름대로 방황했던 청소년기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결국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대학 재학 중에도 ‘이 길이 정말 내가 가야 하는 길인가?’라는 더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직후입니다. ‘신학대학에 복학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깊어져 갈 당시, 아버지의 권유로 기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날, ‘나를 지으시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분명한 소명감’을 가지고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 번도 망설이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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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바이로봇 CSO <홍세화>

20/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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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드론'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시기에 '드론 사업'에 뛰어들었고, 공동 창업한 드론 전문 (주) 바이로봇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주) 바이로봇의 공동 창업자이자 CSO인 홍세화 이사와 함께 드론 시장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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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천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술과 비즈니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홍세화입니다. 2011년, 주식회사 ‘바이로봇’을 공동창업한 이후, 전략담당이사(CSO, Chief Strategic Officer)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학부에서 기계공학을 졸업하신 후, 로봇공학을 석사로 진로를 택하셨습니다. 학창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어려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서 블럭 장난감을 몇 시간씩 가지고 놀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란에는 늘 ‘과학자’라고 적었습니다. 당시에는 ‘공학’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과학 과목이 제일 좋았었기에,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민 없이 이과를 선택했어요. 특히 물리 과목이 재미있었습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수능 응시 때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물리를 선택했습니다.
 
정확한 계기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대학전공은 이미 ‘기계공학’으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회사에 놀러 가 끊임없이 돌고 있는 생산 장비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기계와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품질 문제로 늘 고민하시던 아버지께, ‘자동으로 불량을 골라내는 기계를 만들겠다.’라고 천진난만하면서도, 당돌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어렴풋 납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쳤던 드럼이 너무 좋아서 고3 초반에 잠깐 드러머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지만, 대학전공은 큰 이변 없이, ‘기계공학’으로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대학 시절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도, 공학보다는, 창업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자라오면서 봐왔던, 아버지의 사업에 대한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더 큰 세상’과 ‘가치’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전공과목 외에도 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등 다양한 과목들을 수강했고, 휴학하면서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선배들과 동기들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를 만큼,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후, 복학하여 여전히 취업과 창업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로봇공학개론’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론적으로 배웠던 전공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의시간에 접했던 여러 로봇제품과,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인 로봇기술은, 제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학부 졸업논문도 로봇 관련 연구를 하게 되었고, ‘로봇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창업을 목표로, ‘로봇을 더 깊이 알고 싶다’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로봇 ‘기술’ 자체 보다, 로봇이 주는 ‘가치’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코스모스 졸업을 앞둔 7월, 로봇에 대한 실무경험도 하고, 사업을 준비할 생각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하 생기원)의 로봇연구그룹에 학생 연구원으로 선정되어, 로봇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기원에서의 경력은 대학원 진학과 바이로봇 창업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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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무명배우 <이지혁>

17/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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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호칭 중에도, '무명배우'를 자처하며 '무명배우'라는 일종의 캐릭터를 자신에게 접목시켰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무명배우'하면 '이지혁'을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번 달 초,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라는 책을 출간한, 배우 이지혁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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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배우라 불리기 가장 좋아하는 글도 쓰고 가끔 연출도 하는 사람 이지혁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단역으로 촬영을 하고 있고요. 함께 하는 영상팀과 영상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다행이다. 대단하지 않아서>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두레자연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 출신이십니다. 학교 특성상 다양한 활동을 하셨을 법한데요.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중학교 시절엔 노는 것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 제게 선생님들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셨죠. ‘학교 공부가 정말로 삶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였죠.
 
두레자연고등학교(이하 두자고)는 기독교재단 산하의 우리나라 1세대 대안학교이며, 제가 5기입니다.
지금은 대안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예전과는 교육방식이 다르고, 사회가 받아들이는 시선이 긍정적이지만, 제가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대안학교는 일반 학교에서 적응을 못 하고 방황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가는 학교였습니다. 전교생도 많지 않고, 그만큼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관계가 더 친밀했었습니다.

중3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하는 시기에 어머니가 두자고 진학을 추천해주셨어요. 하지만 당시엔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중했어요. 친구들과 떨어지기가 너무 싫었죠. 두자고는 입학시험 과정에서 내신을 보지 않고, 오직 면접과 특기만 봤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었어요. 면접 때, ‘왜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싶냐?’라는 질문에, ‘머리 기르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보기 좋게 낙방했죠.
 
그렇게 두자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너무 공부만 시키는 거예요.
엄청나게 답답했어요. 아침 일찍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밤 10시까지 빽빽한 학과목 수업 시간에 맞추어 학교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데, 쳇바퀴 굴리듯 매일 같이 공부에만 얽혀서 사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면서 미래를 한번 생각해봤어요. '이렇게 공부하면서, 모두가 목표로 하는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 후에는 전쟁 같다는 회사에 입사해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어요. 학교에 나가지 않고, 가출도 하고, 학창 시절이지만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러면서 선생님께 반항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결국 자퇴를 하게 되었고, 두자고에 재수를 통해 들어가게 되었어요.
 
대안학교 특성상 공부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시려고 노력하셨었습니다. 해외 이동수업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봉사활동도 가고, 문화생활이라고 해서 뮤지컬이나 영화도 보러 가고, 제주도 하이킹, 지리산 종주 등, 일반 고등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상상도 하기 힘들 법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학과 수업보다 더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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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문의 <김경훈>

16/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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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 되었던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문의 김경훈 교수! 그와 함께 100세 시대,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정형외과가 끼칠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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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대전 바로세움병원에서 관절센터장이자 진료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경훈입니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직장을 옮기면서 대전에 내려와 살고 있습니다.

대전에 내려온 지 만 5년이 좀 넘었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갑갑한 도시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살기 좋은 도시라 생각됩니다.
 

지난 2017년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지금은 실력 있는 의사가 되셨지만, 학창시절의 꿈은 의사가 아니셨었다고요?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장씩 그림과 만화를 척척 그렸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책을 친구들이 돌려보면서 재밌어하는 것을 보며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꼈었습니다. 만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반대하셨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락실을 자주 출입했다는 것 정도?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어서, 지금도 좋아하는 농구를 그때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는 만화를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부모님 직장문제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 삶을 바꾸는 일이 있어났습니다.
보통 전학을 가게 되면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누가 떠나게 되니 작별인사를 하자’라는 식으로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때 제 귀를 의심할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반에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경훈이지만, 전학을 간다고 하니 서로 인사를 나누렴.’

저는 어린 마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 나도 공부 한번 잘해보자. 그래서 인정받아보자.’
 
기본이 부족했던 상태였는데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중학생이 월화수목금토일을 영어 단어로도 몰랐습니다. 다행히 전학 간 학교에서 세 명의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저와 비슷하게 농구를 좋아하면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대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맘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학 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닥치는 대로 구매하여 매일 새벽 3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앞집 아파트에 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전학을 갔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둘 시기에는 상위권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난생처음 반장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면서는 학생회 부회장도 맡게 되었습니다. 성적은 계속 전교 1~3등을 유지했습니다. 성적이 나오면서 진학목표도 조금씩 높아졌습니다. 예전엔 의대는 꿈도 못 꾸는 성적이기도 하고, 그림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디자인과 관련된 학과를 갈까 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꿈이 ‘의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는 의대에 진학하길 바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대에 입학하는 것은 성적이 좋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굳이 의학 쪽으로 진학한다면 의사보다는 수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약사셨기 때문에 매일 약국에서 환자들을 응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입학원서를 접수하는데 부모님 뜻대로 한양대 의대에 하나, 제가 원하는 서울대 수의학과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 3차 지망으로 한림대 의대에 하나, 이렇게 세 곳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모든 곳에서 합격 통지가 왔고, 부모님께서는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면서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승낙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가족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고, TV로 뉴스를 시청하던 중, 세계뉴스 시간에 한 사건이 방송된 것입니다. 인도의 수의사 얘기였는데요, 인도의 수의사가 변비에 걸린 코끼리를 관장하다 똥이 터져 나와 똥에 깔려 질식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뉴스를 보자마자 어머니께서는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절대로 수의학과에 못 간다고, 수의사 되려면 어머니랑 연을 끊든지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의대 진학 결정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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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보도국 기자 <염규현>

15/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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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꿈이었던 고교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라디오 DJ를 꿈꾸던 청년시절엔 외무고시를 준비하다가 기자가 되었다. 뉴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MBC <뉴스데스크>의 뉴스 속  뉴스, <로드맨>!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MBC 보도국 <뉴스데스크> 편집팀 기자 염규현 기자. 그와 함께 '취재진담'을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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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MBC 문화방송의 기자 염규현입니다.
지금은 MBC '뉴스데스크'의 <로드맨>이라는 코너에서 ‘로드맨’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독자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MBC 보도국 기자로 입사한 지 년 수로 10년째이십니다. 만 29세에 입사하셨는데요. 의외로 늦은 나이에 언론고시를 준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기자가 꿈은 아니었습니다.
엉뚱하게도 저는 언론고시 이전, 외무고시를 3년간 준비했었습니다. 사연이 꽤 길죠. 그런데 올해로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었으니, 사람 운명이라는 게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로에 대한 방황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사도 늦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과학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과학부장도 지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과학실로 항상 갔죠. 동아리방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검법남녀> 같은 드라마 범죄 수사물에 가끔 나오는 혈흔 반응 실험인 ‘루미놀 실험’, ‘아스피린 합성’ 같은 실험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과학실에서 친구들과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개인적 흥미 때문에 공부보단 과학부 활동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입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학원 가는 시간 외에는 과학실에서 살다시피 했었거든요. 이렇게 화학실험에 흥미를 느껴 자연스럽게 이과로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이렇게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도 과학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요.
 
고3 때, 연세대학교 화학과 수시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지금 기억에도 저는 다른 지원자들과는 차별점이 확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다른 지원자들은 화학 경시대회 같은 것을 준비하는 특목고 출신 과학 특기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그런 수상 경험은 전혀 없었고, 그저 과학 동아리에서 취미생활 일부로 주로 화학실험을 즐겼다고 원서에 적어냈으니, 교수님들이 볼 때는 생소한 지원자였을 겁니다. 어찌 보면 아마 수시모집 도입 취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하지만, 저는 면접에서 학부 수준의 화학 이론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선행학습’이 전혀 안 된 상태였습니다. 반면, 실험과 관련된 질문은 술술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했던 실제 경험을 털어놓는 거니 너무 쉬운 일이었죠. 그렇게 저는 수능 성적 상위 10%의 성적을 받아오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가받았습니다.
 
조건부 합격이어도 할 건 다했었습니다. 수능 응시도 전에, 등록금도 냈고, 오리엔테이션도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 제가 고등학교 시절 생각했던 화학 공부와 대학에서 배우는 화학 공부는 천지 차이였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화학이란, ‘재미있게 실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학 학부의 ‘일반화학’만 비교해도, 복잡한 ‘수학’은 물론이고, 방대한 ‘이론’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 산더미였습니다. 저에겐 큰 부담이었죠. 게다가 교재는 죄다 원서로, 모두 영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땐 정말 숨이 ‘턱’ 막혔습니다. ‘취미와 전공은 완전히 다른 거구나’라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속이 답답하고, 소화도 잘 안 됐습니다.
‘이걸 평생 할 수는 없겠구나’ 직감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2001년, 역대 최저 난이도의 수능시험 문제가 출제되면서, 전국 응시생들의 평균 점수가 급상승했습니다. 만점자도 수십 명 속출했었죠. 반면, 고3 때부터 이미 대학 캠퍼스를 기웃거리던 제 점수는 제자리였습니다. 10.2%가 나왔습니다. 실수로 틀린 문제 한, 두 개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더군요. 그렇다고 변명이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결과는 결과대로 받아들여야 했죠. 바로 불합격 처리됐고, 가을에 미리 냈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도 바로 환불됐습니다.
 
며칠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건 뭔가 하늘의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잘못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떨어질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런 식으로요. ‘자기합리화’ 내지, ‘인지 부조화’일 수도 있었지만, 재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문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길이 막히면 근처를 서성거리기보다 새길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운명을 맞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과에 있다가 문과로 가니 수능 준비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삼각함수 미적분’ 같은 수학과 과학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목표는 자연스럽게 지난해 입학이 좌절된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등록금을 환불받았던 계좌에 다시 등록금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친척분 중에는 제가 이미 수시로 대학에 붙은 줄만 알고 계셨던 분들도 계셔서, 그냥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재수하면서 좋은 친구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서 도움을 받고, ‘제자리’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화학과가 아니라 문과 쪽이었죠. 처음에는 전공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학부제로 선발을 해서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회계열로 진학했습니다. 사회계열은 상경계와 사회과학 쪽에 모두 진학할 수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습니다. 저는 이과 출신이니 수학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상경계로 진학하면 도움이 될 거란 막연한 생각으로 경영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취업이 잘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기도 했고요. 또, 경영학과는 그 안에서도 진로가 다양하니까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경영학 또한, 전공으로 선택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 취업할 수 있다는 건 어디에서나 흔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영학과는 재무면 재무, 마케팅이면 마케팅, 이렇게 특정 분야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즉, 본인이 깊이를 만들지 않으면 알아서 지식이 따라오지는 않는 구조였습니다.
 
성격상 오지랖이 넓은 저로서는, 한 분야를 선택해서 깊이 파고든다는 것 자체가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경영학은 실용학문이어서 다른 학문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문학·사학·철학’과도 거리가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회계 같은 과목은 학점 따는 게 피로했습니다. 계산기 두들겨 가며 장부를 맞추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외교 통상학을 연계전공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2005년 군 복무 중, 우연한 계기로 KBS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대한민국>에 출연했는데 얼떨결에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시간은 40분이 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도 반향이 엄청났습니다. 지금이 인스타 시대라면, 그때는 ‘싸이월드’ 시대였는데, 당시 미니홈피 일일 방문자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이 ‘일촌 신청’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제가 군 복무 중이었던 소방서에 사인을 받겠다고 온 여중생도 있었고, 노량진 수산시장 생선가게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께서 제 방송을 보고 수백만 원 상당의 책을 제 앞으로 기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반향이라는 게 군 복무 중인 일개 대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의 파급력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 잠깐 나왔다는 데도 이 정도인데, ‘방송을 평생의 본업으로 삼으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일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방송을 만들면 그만큼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였습니다.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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