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어느 날 우연히 Kenny G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음악 뿐 아니라 다른 것 또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으니. 그것은 색소폰이었다. Kenny G의 음악에 반해 색소폰을 들게 된 소년은 이젠 한국의 색소폰계를 이끄는 주류가 되어있다. 그런 색소포니스트 한기원과의 인터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색소폰 연주자 한기원 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처음 접하는데 어떻게 색소폰 전공을 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겠지만, 실제로 악기를 시작한 것은 7살 때 동네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치면서부터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음악을 기본소양으로 생각하시고 어린 아들을 학원에 보내셨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저는 어려서 도망을 많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피아노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배웠는데, 콩쿠르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입상했었습니다. 다만 의미를 모르고 배우던 것이라 그런지 흥미를 잃어 더 이어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인 Kenny G를 통해서였습니다. KBS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 ‘연예가중계’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게 되었는데요. 당시 방송에서는 마지막에 항상 외국 뮤직비디오가 한 편씩 나오곤 했었습니다. Kenny G가 영화 'Dying Young'의 OST를 연주하던 모습을 잠깐 이었지만, 너무나도 인상 깊게 보게 되었고 그 이후 동네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Kenny G 음반을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는데,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Kenny G 음반을 전집으로 모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었습니다. 음반과 콘서트 레이저 디스크를 한 장 한 장 구매해 가면서 너무나도 훌륭한 Kenny G의 연주에 매료되어 점점 깊은 감동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Dying Young OST “Theme From Dying Young” by Kenny G 그러다 우연히 중학교 같은 반 친구의 삼촌께서 색소폰을 연주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어머니를 설득해 취미로 그분께 색소폰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를 가르치시던 분은 아마추어 연주자였는데, 교습을 3개월 정도 하시더니 본인이 가르쳐본 사람 중에 제가 가장 배우는 것이 빠르다며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제 어머니께 아들이 전공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는 워낙 하고 싶었던 악기를 하면서 좋은 평가를 듣게 되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색소폰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공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만 하고 유순하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살아왔던 아들인 제가 6개월 가까이 색소폰을 전공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니 결국엔 ‘네가 그 정도 의지가 있다면 뭘 해도 안 되겠느냐?’며 아버지께서도 허락을 해주셨고, 결국 색소폰으로 진로를 돌려 전공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금전적인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결정한 길이니 선생님을 알아보고 진로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 등은 제가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저는 낙원동의 악기 상가에 가서 스스로 악기를 구매하고 선생님의 정보를 얻어서 서울시향 바순 주자이면서 색소폰 연주도 하시는 최중원 선생님을 뵙게 되고 전공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고등학교 1학년 5월이었습니다. 저는 아는 지인들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은 없었고 막연한 응원을 많이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 주위에 음악을 하시는 친척이나 지인이 있었다면, 제가 공부를 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로 별다른 생각 없이 연습에만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워낙 모범생 스타일이고 선생님이 뭔가를 가르쳐주시면 될 때까지 반복연습 하는 스타일이어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색소폰의 매력은 사실 제가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더라도 많은 분이 이미 공감하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색소폰을 좋아하시는 많은 분은 아마도 ‘소리’ 때문에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전문가 측면에서 본 장점이라면 색소폰은 많은 악기 중에 배우기에 가장 쉬운 편이고 연주의 장르 면에서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한국에서는 색소폰이 아주 인기 있는 악기로 주목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졸업 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색소폰 전공자를 처음으로 뽑기 시작한 것은 94년도부터였고 제가 입학한 것은 99년도였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는 학교에 정원이 딱 1명인 색소폰파트에 현역으로 합격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우쭐해져서 잠시 일종의 자만심에 취했었습니다.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기들의 연주 실력을 보게 되었는데, 다른 악기를 하는 제 관악과 동기들은 당시에 모두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제가 속해있는 목관전공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악기를 시작해서 예원학교-서울예고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친구들이었고 고1 때 시작해서 3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음대에 들어온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하나같이 실력이 훌륭했습니다. 저의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좋은 교육밖에는 없을 거란 판단하에 과감하게 1학년을 마치자마자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린 뒤 클래식 색소폰의 종주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엔 어렸기 때문에 유학 생활에 대해 무섭거나 걱정되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고, 제가 유학 떠나기 전부터 계획한 대로 어학을 준비하면서 파리에 있는 색소폰의 대가들을 찾아뵙고 개인지도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제가 만났던 선생님들은 세계적인 연주자인 동시에 훌륭한 교육자였기 때문에 저로서는 너무나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1년 정도만 어학연수를 하면서 색소폰 교습을 받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파리음악원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합격을 하게 되어 더 머무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클래식 음악계의 후배들이 유학을 위해 무엇을 고려해야 할 첫째는 무엇일까요? 색소폰은 아직 연주자 선배가 많지 않은 악기라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나라 입시제도의 특성상 아마 대학생 정도 되는 후배들은 미래에 본인이 어떤 연주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단순히 유학을 ‘색소폰을 좀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간다’라는 생각보다는 본인이 ‘무엇을 위해서 음악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비롯해 ‘좋은 음악을 위해서 본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배움의 방향을 정할 것인가?’ 등을 충분히 고민한 후에 유학을 떠나는 것을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저는 후배들이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되지 않으면 계속해나갈 수가 없다’라는 점을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프랑스의 유학 생활을 비교했을 때 어떠한 장, 단점이 있었나요? 한국의 음악교육은 개인을 빛나게 해주는 점에서 아주 강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를 많이 배출한 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프랑스를 포함해서 소위 음악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함께하는 것’이 목적인 음악의 특성을 더 잘 살려서 교육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음악공부를 한다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나’와 ‘너’, 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제가 보기에 오케스트라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확장해 보면 드넓은 우주의 놀라운 신비를 단 50명의 등장인물로 표현하기에 음악처럼 좋은 방법도 없을 거라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견은 저의 개인 소견일 뿐이지만, 서양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음악의 의미를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장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클래식은 서양음악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주국들이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음악을 가르치고, 배우고, 또한 즐기는 데도 많은 비결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이해하고 선진국의 장점을 빠르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악기별 교육프로그램과 실내악,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배울 점은 배우고 시행착오는 건너뛰는 식으로 발전시키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연주도 많지만, 실내악에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눈에 띄는 건 단연 '조아 색소폰 콰르텟'의 악장으로 활동하시고 계신 것인데요. 소개 부탁드릴게요. 클래식 음악에서 보통 4~10명 정도의 기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을 ‘실내악’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중에서 성부가 다른 색소폰 4대(성악 성부와 같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의 형태로 ‘조아 색소폰 콰르텟’이라는 팀에서 악장 겸 음악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서 콰르텟이란 4명의 연주자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조아 색소폰 콰르텟은’ 저의 제안으로 2015년 8월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색소폰을 통해 클래식의 모습을 대중들께 보여드리기 위한 4명의 마음이 한데 모여 지금까지 팀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조아’라는 이름은 우리 말 '좋아'와 프랑스어 'Joie'가 어우러진 단체명입니다. 프랑스어의 Joie는 사전적 의미로 1. 기쁨, 환희 2, 지겨움, 고통 3. 관능, 쾌락 등의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음악을 통해 관객과 함께 소통하고자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성원은 소프라노 색소폰 한기원, 알토 색소폰 이재영, 테너 색소폰 장호진, 바리톤 색소폰 이준호. 이렇게 4명입니다. 저희 팀은 보통 연주가 없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연주가 있는 경우는 완성도를 위해 더 자주 만나서 연습하고요. 한번 만나면 2시간씩 연습합니다. 저희 팀 연습의 목표는 보통 제가 제시를 많이 하는 편인데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 향상과 관객들이 좋아하는 레퍼토리를 발굴해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무대에 올라가면서 만난 관객 중 기억에 남는 특별한 팬이 있나요? 제가 2008년도에 경북 칠곡군 왜관수도원이라는 곳에서 오르간과 색소폰의 듀오로 연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관객분들과 인사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었는데요. 어떤 여성분이 저에게 ‘음악 하시는 분들은 본인이 어떤 일 하시는지 잘 모르시죠?’ ‘정말 감사히 잘 들었어요’ 하며 웃으면서 인사하고 가셨는데 이때 제 머리가 ‘띵’ 하고 종소리처럼 울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식의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제가 하는 연주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의미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항상 최선을 다해서 연주준비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관객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이후로는 더욱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연주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하고 또한 신체적인 상태를 최대한 좋게 유지하고, 악기 상태를 점검하고 제가 가진 리드를 모두 연주해 보고 가장 좋은 리드로 연주에 임합니다. 어찌 보면 음악가에겐 당연한 준비인데 ‘최선을 다하고 있나?’라고 스스로 자문할 때 아직도 항상 그분의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연주하면서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는 때가 있나요? 그럴 때마다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면? 제가 준비한 만큼의 결과가 무대에서 증명되는 것이기에 어떤 시기를 슬럼프라고 느낀 적은 없고 준비가 미흡한 연주들은 기억에 남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한계는 매 순간 느낍니다. 솔직히 인간이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지막 순간이 있기에 매 순간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고, 영원히 사는 신이 오히려 우리를 부러워한다’라는 말처럼 제가 완벽하지 않기에 노력이 있을 수 있고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완벽한 연주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극복할 방법은 없기에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연습할 때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연주를 하면서는 스트레스보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제게 가장 좋은 방법은 음악입니다. 연습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풉니다. 현 한국 클래식계는 K-POP이나 다른 장르에 비교해 마켓파워가 지고있는 태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래식 전공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가장 큰 숙제인 것 같습니다. 클래식 전공자의 숫자가 주는 것은 인구 감소로 인한 당연한 순서를 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든 예전보다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한국에서 음악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음악가의 숫자를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켓파워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저는 질문에 상술된 바와 생각이 다릅니다. 제 시선에서 대한민국에서 클래식의 인기는 오히려 상승세라고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과거에 오늘날처럼 인기가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른 장르와 비교하면 클래식의 시장이 보잘것없고 퇴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도 과거보다는 나아진 것이란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음악 전공을 안 하신 분들은 클래식 공연에서 객석에 자리가 얼마나 차 있느냐로 연주회의 흥행을 판단하실 수가 있는데, 이는 초대권에 의해서 채워지는 눈속임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는 그런 문화가 많이 사라져서 많은 분이 당연히 표를 구매해서 보러 갑니다. 그리고 점점 클래식 공연장을 찾은 팬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음악가에게 질문 하셔도 비슷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아직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클래식 공연이 잘 없고 만들어 내기가 힘든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서양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한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만약 모든 사람이 음악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한다면 초중고 의무교육 수준에서부터 음악교육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교과목이 아닙니다. 활동의 영역입니다. 체육을 책으로만 공부할 수 없듯이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서 개인적으로 악기를 1가지 이상은 다룰 수 있게 하고 그를 통해서 오케스트라, 윈드 앙상블, 재즈 밴드, 합창단 등의 음악 활동들을 통해서 사회성을 길러야 합니다. 수학만을 공부한 학생들보다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활동을 병행한 학생들이 수학과 관련한 뇌의 발달이 더 빠르다는 것은 이미 연구로서 입증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언어능력을 제외하고 오감 중에 청각을 발달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음악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해서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만족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음악회를 보는 것을 본인을 행복하게 하는 한 수단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저는 이런 변화가 어린아이들에게서부터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보라고 하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사람이 즐기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특히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과연 국·영·수와 같은 교과목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지 음악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지 한번 생각해 보고 무엇이 우리에게 이로운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한 번쯤은 있었으면 합니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음악과 함께한다는 것을 유흥의 한 종류 정도로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이 서양의 문물 중 많은 장점을 받아들여서 빠른 발전을 이룩해 왔는데 음악에 대한 인식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서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사실 한국에서 음악을 계속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연주자로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무대에서 여러분들과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저의 연주가 관객들께 어떠한 의미로 다가갈지 제가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음악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음악가로서 인사드리고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진정한 음악가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한기원 영상 제공: KennyGVovo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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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매섭고, 빠르다. 영상으로 사람들은 많은 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모든 것을 만드는 제작자가 있다. 한국 영상제작 분야의 손꼽히는 제작사인 파이크미디어 대표, 유동현과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영상제작과 강의를 동시에 하는 유동현입니다. 저한테는 두 분야 모두 매력이 있어서 욕심을 부리며 무리하는 중입니다. 언제부터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고교 시절 미대 입시를 준비했고,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딱히 어떤 분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첫 입시 시험이 멀티미디어 영상 (구: 영상디자인과) 과였고, 운이 좋게도 입학하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그때 저를 ‘얼떨이’라고 부르시곤 했어요. 결국,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 오히려 영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좋았지만, 사실 대학교 들어와서 학업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 작품에 감명을 받으면서 제 것에 대한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도 제작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다른 분들의 훌륭한 작품을 보면 감탄하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스스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수많은 영상제작을 하셨는데 영상제작을 하실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는 후배들과 영상제작사(파이크미디어)를 창업하게 된 계기를 언급할 수 있는데요, ‘어차피 만들 거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로, 우리 이름을 걸고 일을 하자‘였습니다.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스스로 창피하지 않은 영상을 만들자’ 입니다. 의뢰인도 만족 못 하고 저희도 만족을 못 하는 영상은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들이 저희를 성장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돌아보면 아쉬운 영상들이 많습니다. 영상제작 중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저희가 처음으로 해외에서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전시의 영상제작을 담당하게 되면서, 1960년대 활동했던 주요 인사들의 인터뷰를 담기 위해 뉴욕, 뉴저지를 방문했습니다. 회사를 시작할 때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였던 ‘해외 촬영’을 3년 차에 이루어서 내심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 저희가 지자체나 지방 공기관의 홍보영상 등을 진행하면서,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영상제작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수도권을 벗어나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는 체험적인 재미, 특히 촬영을 끝내고 맛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식당을 발견하면 마치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E.A.T. : Experiments in Arts and Technology :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 팝아트, 무용, 비디오 아트 등 다분야의 예술가, 공학자들이 협동하여 새로운 예술 분야를 개척하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술적 성취를 끌어냈다. 지금의 영상제작자인 본인을 만든 요소들은 무엇이 있었나요?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소중한 주변의 인연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인복이 좋아서 정말 좋은 분들을 지금까지 많이 만났습니다. 학사, 석사를 거쳐 학교에서 만난 모든 인연도, 현장에서 만난 인연도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해요. 고마우신 분들이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함께 이끄는 김민정 감독님께 특히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전공과 진로를 선택하셨을 것 같나요? 글쎄요, 아마 선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웃음) 영상은 매번 새로운 사업을 접하고,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했을 때의 보람이 있는 매력적인 분야인 건 사실이에요. 반면 만드는 제작진의 노고에 비교해 너무 쉽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아쉬웠거든요. 제가 만약 다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는 인문학을 깊게 공부할 수 있는 전공을 택하거나, 콘텐츠의 유통 및 배급을 담당하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짧게 국내의 우수한 영상콘텐츠를 해외에 배급하는 분야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제 적성에 잘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영상 분야 종사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면? 무슨 분야든 취미가 아닌 업으로 일을 하면 힘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제가 주변을 봐서는 영상 분야의 대우는 다른 분야에 비교해 크게 좋지는 않은 편이에요. 그래서 영상을 좋아하는 이유만으로 이 분야를 진로로 선택하는 것은 본인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은 방송, 영화, 광고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는 만큼, 제작자에게 많은 감각을 요구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프로젝트가 바뀔 때마다 기획을 시작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하고, 제작에 투입되는 인원이 많으므로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소통능력을 요구합니다. 제작에서는 글을 통해 이야기를 구축하고, 화면의 미적 감각을 구성하고, 연출을 위해 소통하거나 설득하고, 편집적인 감각과 음악적인 감각 등 꽤 복합적인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영상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를 충실하게 준비해도 소비자나 시청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대중적 소통에 실패한 영상이 되어버리지요. 꽤 피로도가 높은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종종 자신의 영상을 대중들이 반응하거나 호응하는 것을 목격할 때, 그때 느끼는 큰 보람이 있습니다. 이 느낌은 제작자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지요. 영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공부, 다양한 표현을 통해 대중과 소통을 하고 싶은 분들께 적절한 전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영상 전공 학생분들께 강의하고 있지만, 졸업 후 진로를 꼭 영상 관련 분야로 한정을 짓지 않도록 권장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여 말합니다. 영상을 전공하며 학습했던 요소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사실 제가 인생에서 가장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학부 졸업 후 바로 대학원을 가서 30대가 되기 전에 졸업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석사 졸업 후에 계획이 없어서 방황도 했습니다. (웃음) 그래도 하던 영상작업을 지속하면서 길을 찾다 보니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좋은 기회도 찾게 되었고 어느덧 강의는 6년 차, 회사 운영은 5년 차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제가 미래에 대해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사는 편은 아니라서 앞으로의 계획이 약간은 막연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지금 제게 맡은 소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후배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는데, 훗날 그분들 중에 저보다 멋진 영상제작자가 나오면 왠지 큰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미래에는 주변 분들로부터 따뜻한 영상을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네요. 그리고 그분들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유동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남들이 주저한 길. 남들이 찾지 않은 길. 하지만 그는 알았다. '이 길은 나의 길'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의 불안감을 그는 자신감으로 바꿨다. 제4대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 김민호의 이야기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현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대한프로레슬링연맹 소속이자 제 4대 극동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프로레슬러 김민호입니다. 어떤 계기로 많고 많은 스포츠 종목 중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프로레슬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운동은 어릴 때부터 태권도, 합기도 등등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해왔습니다만 초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비디오가게에 붙은 프로레슬링 비디오 포스터를 보고 비디오가게에 들어가서 헐크 호건의 시합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빌려본 뒤로부터 프로레슬링의 판타지에 빠지게 되어 프로레슬러에 대한 동경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왕표 선수의 단체였던 WWA의 시합이 가까운 곳에서 하게 되어 직관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이왕표, 홍상진 선수 등등 한국프로레슬링 선배님들의 시합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해서 꼭 저분들처럼 링에서 멋진 시합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바로 찾아갔지만,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찾아오라 하셔서 그 후에 열심히 유도와 근력 운동 등을 열심히 하면서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에 찾아가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가 프로레슬러가 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가족들은 농담인 줄 알았다며 지금은 추억으로 웃어넘기시지만 제가 입문을 하고 나니 많은 걱정을 하시며 마음 졸이셨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힘들지만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로레슬링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에 단지 타종 목처럼 자신의 승리를 위해 훈련하고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링 위의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관중들과 “함께 소통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싸워나간다”라는 그 매력에 그 어떤 분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저변은 어떠한가요? 현재 한국에서 현역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고 있는 선수는 모든 단체를 포함해서 약 30여 명 정도 됩니다. 나이대는 2~50대까지 다양한 층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역선수생활만 하는분은 안계시고 두가지이상 일을 병행하며 프로레슬링에 재투자를 하는 상황입니다. 이왕표 전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께서 타계하신 후로 홍상진 선배님께서 신임대표로 역임하시게 되면서 선수들과 여러 프로레슬링을 사랑하시는 분들께서 함께 힘이 되어주셔서 사무실과 체육관, 시합 등등 차근차근 진행하면 한발씩 기본부터 탄탄히 만들고 있습니다. 최대한 자주 찾아뵙기 위해 많은 시합을 계획 중이며 2019년 6월 2일 일산 능곡에서 첫 시합을 했고, 2019년 7월 7일 KBS 아레나 2 체육관에서 WWA 2회 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로레슬링은 싸움과 엔터테인먼트,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아직도 미국, 일본, 멕시코, 영국 그리고 최근엔 인도, 중국 등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종목입니다. 한국 역시 프로레슬링을 꾸준히 좋아해 주시는 기존 마니아 분들도 생각 이상으로 많으시고 미디어에서도 이전부터 꾸준히 프로레슬링에 관한 관심은 많았지만, 프로레슬링 기반이 국내에서 작았기 때문에 많이 노출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꾸준하고 넓은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단계이고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기도 다시 오를 거라 확신합니다. 프로레슬러로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요? '쇼'라는 인식이 한국에서 대부분 잡혀있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부분이 데뷔 직후에는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어렵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 내가 더 실력을 키워서 즐거움을 드리면 자연스럽게 좋아해 주실 거야'라는 확신이 들면서부터는 그런 점에서는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프로레슬링 현역선수이다 보니 시합 수가 적어 다른 분야의 회사에 취직해서 병행하며 지내는 현실이 어려웠던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사랑하는 프로레슬링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정답을 내었기 때문에 지금은 과정 하나하나가 즐겁고 앞으로의 발전될 프로레슬링에 하루하루가 설렙니다. 노력이라면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엔 프로레슬러로서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시합하는 목적에 들어맞았을 때가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프로레슬러는 '관중을 즐겁게 해주는 것' 그 하나의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인데요 제 찹 한발, 드롭킥 한방, 일격의 피니시에 환호가 터질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을 언제나 즐겁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참가했던 경기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요? 2018년 5월 5일 KBS 아레나 1 체육관에서 있었던 WWA 극동 헤비급 토너먼트 시합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대 챔피언이 '박치기왕' 김일 선생님이셨고, 2대 챔피언이 '슈퍼드레곤' 이왕표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한국프로레슬링의 정통성을 잇는 그런 뜻깊은 타이틀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10년간 승률이 높지도 않았었기에 챔피언 타이틀을 단 한 번도 갖지 못했었는데, 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10년 만에 처음으로 챔피언이 되었고 이왕표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던 순간이었기에 평생 잊지 못할, 잊을 수 없는 그런 시합이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프로레슬링 선수는 누구인가요? 지금의 제 프로레슬링 스타일의 롤모델인 두 분이 계십니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영웅이신 '박치기왕' 김일 선생님 그리고 일본의 전설인 '철인' 코바시켄타. 이 두 분은 늘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문제를 해결해서 극복해내는 과정을 대중분들에게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셨고, 온 마음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보여주셨습니다. 저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링에서 싸워나가는 김일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참을 인 ('忍')을 실천하며 닮아가고 싶습니다. '프로레슬러'라는 꿈을 이루었는데 목표하는 또 다른 꿈이 있다면?
선수로서 일차적인 목표였던 극동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젊기 때문에 더 큰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도 아직은 왕성합니다. 가진 것 없고 타고난 것 없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절실하고 노력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해낼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넘쳐 납니다. 현실적으로 저와 같은, 지금 현시대의 한국프로레슬링의 선수들과 같은 시스템의 부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런 미래의 프로레슬러 꿈나무들이 없도록 좋은 훈련환경과 꾸준한 시합, 그리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경영 시스템도 구축하고 싶습니다. 현재 대한프로레슬링연맹 홍상진 대표님을 필두로 김종왕 선배님과 조경호 선수와 함께한 걸음씩 진심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링 위의 선수들을 보며 이쁘고 소중한 꿈을 꾸었듯이 프로레슬링키즈들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그런 날이 단순히 꿈만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 중에 있습니다. 한국 프로레슬링이 그렇게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민호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천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맛집 블로그 포스팅을 하는 ‘파워블로거’보다 더 파워 넘치는 블로거! 마케터로서의 열정을 끊임없이 불사르는 ㈜ 쿠잉비 대표이사 김학수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모바일 광고유통 융합플랫폼 레드QR을 런칭하고 있는 주식회사 쿠잉비 대표이사 김학수입니다. 저는 1982년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입학, 2학년 마치고 휴학,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 군복무를 하던 중 자신의 선택이 향후 인생항로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깨달음을 얻고 제대했습니다. 나의 선택으로 복학 후 경영학과 수강을 위주로 대학졸업, 해태제과 금강제화를 거치며 마케팅 실무에서 팀장까지 역임한 후, 지금껏 순수 열정의 마케터로 지내면서 매일 블로그 포스팅을 통해 소상공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하는 충청도 보령사람 김학수입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 시절, 금오공고 입학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의지로 남강고에 진학을 하시고 서울대에 진학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게 미래 진로의 '신의 한 수'가 아니었었을까 싶은데요.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난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가 전혀 필요없다는 금오공고에 추천을 받아서 진학하려 했지만, 아들들은 서울대에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만류로 일반 고등학교인 신림동 소재 남강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다행히 고교입학 자격시험인 연합고사 성적이 좋아서 남강고 특별반에 들어갈 수 있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과외는커녕 학원조차 다니기 힘들었던 저에게 양질의 국영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다니게 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새로운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된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점점 서울대 문턱에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저는 82년도 대입학력고사에서 뜻하지 않은 낮은 성적으로 중앙대의대와 서울농대 입학원서를 두고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의대를 원하던 저는 부모님의 권유와 집안형편으로 인해 서울농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전공학이라는 화두가 심화되던 시점이라서, 의대 못지않게 유전공학도 미래 인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만족을 이유로 식품공학을 전공하면 될 거라고 위안하면서 말이죠. 1학년 교양과목을 관악캠퍼스에서 마치고 2학년부터 식품공학과에 진학, 공부를 하던 중 거의 모든 커리큘럼이 화학으로 점철된 학교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중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짝사랑으로 끝난 2학년 생활을 마치고 휴학, 군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품공학과란 이유로 취사병과를 지목받은 저는 부산기술병과학교에서 취사병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 취사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와는 전혀 다른 집단, 수색대 전우들과 생활하면서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계층과 팔도에서 모인 전우들의 삶과 애환을 통해, “나의 작은 선택이 인생을 이렇게도 많이 변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품은 채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니 ‘정말 내가 원하던 유전공학을 통해 세상에 작은 변화를 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식품공학과 공부가 아닌 경영학과 과목 수강신청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의 제가 좋아하는 마케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식품공학과를 선택했던 것은 유전공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공부를 하려면 석사 박사를 마쳐야 비로소 작은 분야의 유전공학적인 일을 할 수 있는데 가정형편상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제일제당(지금의 CJ그룹) 인턴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마케팅업무를 할 수 있는 해태제과를 선택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해태제과에서는 껌마케팅 업무를 시작했고, 무설탕껌의 시장을 연 덴티큐를 기획 한국능률협회 본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군에서 배운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작은 성공의 시작이란 것을 깨닫게 된 첫 번째 쾌거입니다. 창업 꿈나무의 알찬 도전이었던 (주)백만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가 처참히 망한 후, 현재는 쿠잉비 CEO 그리고 최근 레드QR을 런칭하셨습니다. 해태제과에서 마케터로서 승승장구 하던 중, 그룹사 전출을 통해 지금은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당시에는 무선통신망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해태텔레콤 마케팅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던 중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골드뱅크라는 회사의 비즈니스모델을 보고 과감히 사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본인이 클릭할때마다 1원씩 적립해주는 골드뱅크 방식을, 1원씩 적립해 나가다가 100만번째 백만원을 몰아준다는 컨셉으로 ㈜백만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한 옆지기의 응원과 ‘내 자신의 꿈을 선택하자’는 저의 의지로 선택한 첫 번째 사업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고, 사업에 대한 기본개념이 턱없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나름 인정받는 비즈니스모델이었지만... 일일 광고클릭수를 보장해 주어야했던 당시에,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으로 인터넷(PC)앞에 있는 절대적 시간이 엄청 줄어들고 그 여파로 보장클릭수를 채워주지 못하였고 첫 번째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같이 모바일 시대였다면, 오히려 그 반대인 경기시작전, 기다리는 시간동안 더 많은 광고클릭수를 채우는 성공으로 이어졌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장인어른 생신때 찾은 처가에서 장모님의 모진 질타를 들었고, 그 순간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께 소리쳤습니다. '내가 선택한 남자에게 엄마가 왜 뭐라고 말을 해? 나는 학수씨 믿어!' 전 이 말에 감명받고 언젠가는 나를 믿어주고 선택해준 이 여자에게 꼭 보답을 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러던 중 2010년을 전후로 인터넷 세상에서 모바일 세상으로 전환하고, 많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100만번째 광고를 보면 백만원을 준다는 컨셉이 다시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광고플랫폼을 먼저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의 몰을 모바일폰에 오픈해주고 이것을 각종 SNS로 주변지인들에게 공유해서 매출이 발생하면, 그 수익의 일부를 공유(Share)하는 방식의 모바일유통몰 쿠잉비를 먼저 오픈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지금의 모바일 신옥외광고매체 레드QR(레드큐알)을 런칭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백만엔터테인먼트처럼 ’백만번째 백만원‘ 현금경품은 물론 ’100번째 100원‘, ’1천만번째 1천만원’, ’광고를 보면 현금준다‘ 등의 컨셉을 유지 확장하는 개념의 모바일광고플랫폼입니다. 소비자가 기다리는 시간이 발생하는 공간, 예를들어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5분, 은행에서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시간, 지하철타고 출근하는 30분 정도의 시간 등등이 발생하는 모든 공간에 레드칼라의 QR코드를 부착해 놓는 방식입니다. 작동하는 방식은 지하철타고 출근할 때 지하철 천정에 붙어있는 레드큐알 스티커를 네이버스마트렌즈로 스캔하면, 15초 모바일동영상이 운행되고 광고가 끝나면 각 회차에 맞는 경품이 다양하게 터지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레드QR찍고 광고보고 경품타자~!‘ 라는 아주 간단한 광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왜 옥외매체인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당역사거리에 있는 10층짜리 건물 옥상에 LED옥외전광판광고가 있습니다. 10층건물을 가진 건물주는 이 광고비 수익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지만, 그 건물에 입주한 보쌈집 자영업자는 아무 수익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레드QR 스티커를 식탁에 붙여놓으면, 보쌈집을 찾은 고객들이 레드QR스캔하고 광고시청한 것에 대한 광고수익의 일부를 자영업자에게 공유하는 방식이라서 최근 시급상승에 따른 자영업자의 수익적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일부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000일 이상 맛집 위주의 포스팅을 하고 있는 중이신데요. 블로그 포스팅을 10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셨습니다. 대단한 기록인 것 같습니다. 블로그 무료교육을 시행하는 시점에, 블로그는 매일 꾸준히 포스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사가 얘기하길래, 매일 밥은 먹는거고 출근하는 5일은 맛집 소개하고 나머지 주말은 저의 일상을 포스팅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결국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저의 편의성 때문에 맛집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우연이었죠. 맛집을 고르는 철학이 있다면, 맛보다는 주인의 서비스 정신을 먼저 봅니다. 그리고 가성비가 좋은 집을 선택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가까운 곳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제가 ‘파워블로거’로서 나서지 않는 이유는 앞서도 말씀드린대로 저는 마케터로서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블로거는 SNS 마케팅 툴의 일부인 셈이죠. 파워블로거로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는 무설탕껌 시장의 선구자, 신옥외광고매체 레드QR의 창시자 등등의 명성을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블로그 포스팅을 10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는 이유는 저하고 약속한 것을 지키고자 (처음엔 100일) 시작하게 된 것이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 되었습니다. 매일 쓰다보니, 일기 쓰는것처럼 습관이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습관이 인생을 바꾸는 것을 알기에 좋은 습관은 나의 분신처럼 지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느 날 점심 먹으러 갔는데, 시키지도 않은 감자전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거 주문한 것 아니라고하자, 서빙하는 분이 사장님 서비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블로그 포스팅한 것 때문에 손님이 많이 늘었다고, 고마워서 서비스하는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또 한번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피자집이더라고요. 하시는 말씀이, 한번 들르시라고... 서비스로 피자 2판 드리겠다고... 이 역시 제 블로그포스팅 덕분에 오픈 초기에 고객이 많이 늘어서 감사하다고... 이럴 때 소상공인을 위한 광고유통 플랫폼을 추구하는 쿠잉비 대표로서, 취미로 시작한 블로그 포스팅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뭉파300'이라는 이름으로 SNS 마케팅 모임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제가 2000년 첫 번째 사업을 시작할때는 온라인으로만 런칭했습니다. 결국 2002년 월드컵때 오프라인으로 빠져나간 고객들 덕분에 접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결국 온오프가 결합되어야 성공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요. 온라인 광고플랫폼을 런칭하더라도 오프라인에 빅마우스 집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결과로 파워블로거 강사를 초대해서 오는 분들에게는 무료로 SNS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것이죠. 그렇게 무료교육을 진행하던 중, 이름 공모를 하였고 그 중에서 ‘뭉치면 파워블로거‘가 선정되었는데, 역사/영화 300(적은 규모지만, 세상에 울림을 주는 힘)에서 300을 따와서 뭉파300으로 정했습니다. 그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블로그교육 모임에 지명을 딴 뭉파300의 브랜치 개념으로 확대 커져나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초보블로거 탈출’을 목표로 10명 내외의 교육을 진행하였고, 그 이후 지역을 조금씩 넓혀나가다가 전국에 흩어져있는 소규모 단위의 SNS모임을 전국단위의 네트워크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향후에는 전국단위 모임을 대전을 중심으로 출범시킨후 서울과 부산 등으로 전국규모 모임까지 확산시킬 예정입니다. 성공한 CEO들의 옆에는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내조한 평생의 동반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김학수 대표님 역시 올해 결혼 27주년을 맞이해서 리마인드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조선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홍익병원이란 곳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던 중 저와 결혼한 저의 영원한 ‘옆지기’는 미모를 겸비한 결단력 있는 여성입니다. 아들 둘을 키우며 더욱 강단있는 모습으로 변화하던 중, 첫 번째 사업을 지지하였고 실패의 순간에도 자신의 선택을 지지하고 집중하는 태도로 저를 감동시킨 여자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두 번째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며 저의 가장 큰 지지자 중의 한명입니다. 두 아들에게 존경받는 이 시대의 엄마상인 우리 옆지기를 더 자랑하는 것은 팔불출일 듯 합니다. 아직 성공한 CEO는 아니지만, 우리 아들들에게 하는 말을 젊은 친구들에게도 전합니다. '첫 번째 결혼을 할 생각이 있다면,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 배우자 선택은 나와 생각의 방향이 같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예쁘고 멋진 몸을 가진 사람 선택이 아닌, 생각이 건강하고 그 생각이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함께하면 시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내가 선택한 배우자에게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상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서로를 위한 가족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생활에서 주는 안정감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인데, 서로를 존중하고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어떤 일을 하던지 시너지가 폭발하는 시점이 오는 법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샐러리맨이던 사업을 하던 안정감의 크기는 결혼전과 후는 100배이상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있다면?
새로운 직종의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기고 있긴하지만, 지금처럼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에 앞으로 AI까지 가세하면 점점 청년들의 입지는 어려워질 것이라는게 보편적 시각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인생 가치관에 맞는 것을 선택에 선택을 기울이다 보면, 분명히 나의 인생관에 맞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100세인생 시대가 도래합니다. 1년 늦게 간다고 아주 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집중하는 시행착오 시기를 겪는 것도 더 큰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과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마케터입니다. 마케터는 세상에 있던 것을 사람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하거나, 없는 시장을 만들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네트워크 세상을 지나 소셜(Social Being)네트워크 세상으로 진화된 현재, 쿠잉비는 신옥외매체 레드QR을 런칭중에 있습니다. 지금 런칭하고 있는 레드QR의 조기 정착(2019년내)을 목표로 내년에는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큰 결과를 이뤄내는 광고를 집행함으로써, 광고주는 물론 소상공인과 광고를 시청하는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을 공유하는 쿠잉비가 되고자 합니다. 아직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플랫폼을 활용해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2년후부터 우리가 만든 광고유통 융합플랫폼을 사용하는 사람이 천만명 이상이 되는 쿠잉비 달성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꿈이 있다면, 많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나눠 줄 수 있는 행복한 마케터, 그런 마케터 김학수를 참 좋은 플랫폼으로 우리에게 혜택을 나눠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어도 100만명이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인사 잘하고 예의바른 후배 동료 선배이지만, 3년 후에는 동문을 넘어 지인들에게 행운의 지갑을 활짝 열어 나누는 김학수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학수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자신의 분야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인물을 찾아가는 '세계 속의 한국인' 특집! 지난달, 오랫동안 염원했던 박사학위 과정을 졸업한 신경과학자 장성수를 만났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신경과학 (Neuroscience)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장성수’입니다. 2018년부터 미국 뇌전증 학회 (American Epilepsy Society)의 정회원이자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뇌전증의 발병원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7년 뇌전증 이야기 (Epilepsy Story)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그룹 (링크: https://www.facebook.com/groups/284859028671184)을 신설하고, 현재 운영하며, 뇌전증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을 돕고 있습니다. 많은 분야에서도 어떻게 신경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정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 처음으로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뇌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현재만큼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나름 블루오션이라는 기대와 함께 신경과학이라는 분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학부 4학년 때, 서울대학교 뇌과학 협동과정이라는 대학원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입학과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김상정 교수님 연구팀에 합류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석사학위 후에는 당대 최고의 기초과학자이셨던 신희섭 박사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연구실에서 1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연구 분야와 주제에 대해 더 확실히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학연구소에서 3년간의 전문연구 요원 (군 대체복무)으로 일하면서, 뇌 질환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군 대체복무와 유학준비라는 두 가지 일들을 감당하면서 다소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주변에 좋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신경과학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중,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과학관, 박물관에 자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라고 이야기하셨고,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사고 습관을 지니고 생각하고 행동해 왔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학부 졸업과 동시에 주저함 없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2007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게 있어 과학의 매력은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찾아내고 동료과학자나 대중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기존의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 검증된 가설을 동료과학자나 대중에게 알리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과학자로의 이 세상에서의 제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현실과 타협하여 변질되어가는 제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논문 조작, 대필 등의 사건들을 보면서 과학자로서 안타깝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적어도 저 자신만큼은 늘 학자로의 진실성(Integrity)과 정직함(honesty)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하고 있지 않은 일, 남들이 가고 있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해 가장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연구에 임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마음을 계속 간직하며 연구자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급속한 산업화와 기술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하여 인류의 의식주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통계에 따르면, 몇 년간 계속하여 정신질환들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 등)의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보고들을 접하게 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잘 먹고 풍요롭게 사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성경의 인물인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지만, 죽기 전에 전도서 1장 2절을 통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장 3-11절을 통해서도 '이 세상의 부와 명예, 풍요로움이 순간의 행복과 만족을 줄지는 모를지언정, 삶의 궁극적인 공허함은 채워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공허함과 삶의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병적인 상태까지 이르렀을 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신질환이 하나의 사회적 논쟁거리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신경과학 분야의 많은 과학자가, 이러한 정신질환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3조 5천억 원을 투자하여 뇌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뇌 질환의 치료법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투자와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또한, 인공지능 (AI) 산업의 발전에 발맞추어, 인간 뇌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도 '범용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Hippocampus)라는 뇌의 영역을 연구하고 있다'라고 밝힐 정도로, 뇌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가 향후 인공지능 시대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뇌과학은 전망은 매우 밝고, 열정이 넘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 이 분야 뛰어들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학사, 석사를 졸업하시고 이번 달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졸업하셨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교육과 연구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한국에 있을 때 감사하게도 좋은 환경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특별히 제 석사 지도교수님이셨던 서울대학교 김상정 교수님께서는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학생들을 대해주셨고,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원하는 연구나 공부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실, 연구실 분위기나 환경은 연구책임자인 담당 지도교수님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딱히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적어도 대학원생에 대한 처우와 지원 등은 미국이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속한 UIUC Neuroscience Program Ph. D 과정 같은 경우에는 연구 이외에 다양한 워크샵, 세미나 연사와의 만남, 사회봉사 활동, 강의 조교 등의 경험들을 통해 대학원생들이 독립된 연구자뿐만 아니라 교육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학과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stipend (용돈) 개념으로 매달 외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공함을 통해, 대학원생이 연구와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제2의 언어로 공부하고 토론한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잘 극복해낸다면 미국 대학원 유학은 자신을 학문적으로 더욱 성장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해, 지난 달 박사학위를 수여 받으셨습니다. 박사과정 중 연구 내용을 소개 부탁드릴게요. 박사과정 동안의 제 연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저는 STriatal Enriched Protein Phosphatase (STEP)라 불리는 효소의 기능과 해마에서의 역할들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특별히 이 효소는 뇌에만 존재하는 단백질로, 신경세포의 시냅스(synapse)라 불리는 곳에 주로 발현되어 신경전달과정을 억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 STEP이라는 효소가 시냅스의 안정화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고, 또한 발작(Seizure)을 유도한 동물모델에서 STEP의 변화를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향후 뇌전증(Epilepsy)의 기전연구에도 도움이 되는 연구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동물실험을 통해 STEP이라는 단백질이 결핍된 생쥐에서 발작 (Seizure)의 정도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고, 이러한 감소는 해마 내 CA2 지역에 있는 신경세포들의 활동성과도 연관되어있음을 예측하게 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향후, 약물실험을 통해 STEP이라는 단백질과 뇌전증(epilepsy)과의 상관관계를 밝혀냄을 통해, 뇌전증 치료제 개발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박사과정 이후에도 뇌전증(EPILEPSY)과 알츠하이머 질환 (Alzheimer’s disease) 연구를 계속해 나갈 계획입니다. 그동안 연구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또한 가장 보람 있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박사과정 1~2년 차 때였던 거 같습니다. 학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압박이 심했던 기간이었고, 마침 그 시기에 연구실 재정 상황도 좋지 못했었습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연구와 실험을 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스스로 굉장히 무기력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중간에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을 때는 우선, STEP이 결핍된 쥐에서 발작 (Seizure)의 정도가 줄어있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던 거 같습니다. 제 연구 관심사인 뇌전증(Epilepsy)과 STEP의 연관성을 직접 눈으로 발견하던 그 실험현장과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미국 뇌전증 학회 (American Epilepsy Society) 박사과정 장학생 최종 심사에서 받았던 2명의 검토위원의 심사평을 읽었을 때의 감동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해서 약 10여 년간 신경과학 연구에 집중하고 매진했던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받지 못한 장학금을 미국 전체에서 2등이라는 성적으로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혹시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해보고 싶은 직업이 있나요? 의사 혹은 목사를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의사 같은 경우는 육체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직업적으로나 선교적으로 굉장한 매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같은 경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한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고 의미 있는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박사 졸업 후, 포스닥 과정을 통해 뇌전증과 알츠하이머 질환의 기전연구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 한국 최고의 뇌전증과 알츠하이머 연구의 권위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연구 이외에도 미국의 CURE와 같은 단체 (링크: https://www.cureepilepsy.org)를 한국에 설립하여 뇌 질환을 앓고 고생하는 환우와 그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비영리법인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또한, 뇌 질환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되어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관련 연구자들을 배출해내고 치료제 개발 이외에 사회적 인식개선 등을 목표로 하여, 과학자가 세상에 나와 본인의 연구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드릴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장성수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발레를 좋아하고, 발레를 사랑해서, 발레를 바라보며 30년의 세월을 달려온 발레리노. 그의 자녀인 박민아 양도 DNA를 물려받아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도약하고 있다. 인천시티발레단의 단장이자 예술감독, 박태희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인천시티발레단 단장, 박태희입니다. 1980년 후반, 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는 아직 남자 발레 무용수의 인식이 자리 잡혀 있지 않아서 발레를 전공하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발레를 전공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17세,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을 했습니다. 의외로 당시 사회적인 편견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발레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20대 때 국립발레단 시절에 가르쳤던 학생 전소연의 어머니가 저희 발레 인생이 있어 전환점을 가지게 해 주신 분이 십니다. 이유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셨는데 발레단 이후 직업 전환에 있어 저에게 많은 이야기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발레를 배우면서 좋았던 시기는 국립발레단 시절입니다. 그 시절은 제가 많은 가르침과 숙제와 공부를 많이 한 시절입니다. 세계적인 안무가이자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 유리 그리가로비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인형)를 비롯하여 몬테카를로발레단 안무 가장인 크리스토 마이오(로미오 앤 줄리엣), 볼쇼이발레단 안무가 콘트라체바 돈키호테 그 외 많은 안무가와 땀을 흘리고 그곳에서 열정과 온 힘을 기울인 그 시절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무용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그 시절도 역시 발레를 배우면서 가장 좋았던 시기처럼 국립발레단 시절인 1993년~1998년 10월까지 6년 동안입니다 국립발레단 신입 단원으로써 많은 공연 작품과 병력문제로 동아 무용 무용콩쿠르/한국무용협회 신인 무용콩쿠르 일 년에 두 번만 있는 콩쿠르 결과를 위해서 낯에 국립발레단에서 연습실 공연 작품을 연습하고 저녁에는 콩쿠르 연습을 병행하면서 하루에 10시간을 정도를 강도 높게 연습했습니다. 연습에 연습 만을 지독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콩쿠르 결과 동아무용콩쿠르 93년 은상, 95년 동상, 96년 은상, 그리고 한국무용협회 신인 무용콩쿠르에서 94년 수석상, 97년 수석상, 드디어 98년 특상(1위)으로 군 면제를 받았습니다. 1994년~04년간 국립중앙극장/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등 발레리노 박태희로서 최고의 시기를 보내다가 은퇴하고 갑자기 새로운 경력을 구축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장 생활을 10년만 하고 그 이후는 국립발레단 시절의 경험으로 새로운 너의 세상을 만들라고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립발레단 재직 12년 4월 동안 직장 생활했습니다. 현재는 전국에서 14개 지방 단체 시티발레단 협동조합 2019코리아시티발레단 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2003년 창단되어 2017년에 전문예술법인단체로 지정되고 현재 인천문화재단 후원으로 6년 차로 부평아트센터에 창작 공연 및 상주단체로 현재 공연하고 있습니다. 지난 16년간 무용수가 아닌 행정가로서 가장 좋고, 힘들었던 점을 설명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호기심이 많아 처음 하는 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서 일벌레 또는 일 중독자라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도 좋아해서 그 사람 푹 파여 그 사람을 알고 나서 그다음부터 그 사람 이 뭐를 잘하는지 파악하고 그 일 맞춰서 일을 시작합니다. 저는 일에 있어 사람이 우선이고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해사는 일 다반사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점 없습니다. 제가 낙천주의자라 일을 하다가 아니면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행정가로서 역량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현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6월 3일 발표합니다. 이걸 읽고 계실 독자분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인천시티발레단이 2003년 창단과 동시에 대표 겸 예술감독으로 오랜 시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공연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2012년에서 2015년, 그리고 2015년에서 2017년까지 연달아 한국문화예술연합회 우수공연 레퍼토리로 선정된 뮤지컬 발레 '신데렐라'와 '빨간모자'의 연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동안 뮤지컬 발레 '호두까기인형', '신데렐라', '빨간모자', '미녀와 야수', '성냥팔이 소녀' 등을 연출 및 안무를 맡으셨습니다. 발레가 가지고 있는 평면적인 공연 예술로써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감정 표현에 있어 춤과 보컬이 더 한다면 보는 감동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발레에서 한 장을 뮤지컬 발레에서는 노래 한 곡으로 대신 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출이나 안무 때문에 기억 남는 해프닝은, '미녀와 야수'에서 첫 등장 신부분에서 노래를 먼저 시작할지, 춤을 시작할지, 그 시작점 연출 때문에 무려 보름 동안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인 박민아 (여, 14세)도 2015년 일본 도요타 국제발레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하여 2016년 한국 발레협회 콩쿠르 은상, 2017년 코리아 국제스칼러십 콩쿠르 금상, 2018년 코리아 국제발레 아카데미 콩쿠르 대상, 2018년 독일 베를린 국제 무용콩쿠르 1위 (부상으로 영국 로열 발레학교 18/19 여름 인턴십 장학금 수혜) 그리고 올해 일본 TWBT 도쿄 전체 그랑프리 수상은 물론 2018년 스위스 정도영 장학재단 발탁, 2019년 네덜란드 국립 발레학교,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 미국 오레곤 발레학교, 호주 퀸즐랜드 발레학교 장학생,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발레학교 장학생으로 발탁되는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발레리나로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민아는 처음에 4살 때 취미로 발레를 시작했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전공으로 전환했습니다. 6학년 때에 민아가 호두까기 인형에서 클라라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 배역에 집중하고 연기를 하는 모습과 무대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전공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레를 하는 것을 반대한 적은 없습니다. 민아가 발레를 통해서 친구들과 소통 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를 위해서 발레를 시켰습니다. 나와 발레를 통해서 같은 시각과 느낌을 공감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그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아버지로서 민아에게 저는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없다’라는 말을 제일 자주 하고 민아는 제일 듣기 싫어합니다. (하하) 딸이 가진 재능은 연기력과 기교로 그 부분은 누구보다 강점입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은 서정적인 부분이 약합니다. 아버지 전에 발레리노의 길을 걸었었던 선배의 관점으로서 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발레를 하면서 부상이 없었으면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제 걱정을 덜 듯 언제나 클래스 1시간 전에 와서 몸을 푸는 딸아이의 모습은 항상 듬직합니다. 박민아양은 2019년 무려 다섯 곳의 발레학교에서 입학제의를 받았음에도 그중 한 곳이 아닌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존 크랑코 발레학교 진학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는데 이유가 다름 아닌 '현대무용 수업'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아 양이 발레리나가 아닌 모던댄서가 되길 원하는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즘 유럽 발레단에서 클래식 발레작품과 현대발레작품이 함께 올려지고 있습니다. 무용수라면 어떤 역할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민아가 어느 발레단에 가든지 스스로 성장하며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한 춤을 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천시티발레단의 대표 겸 예술감독으로 바른 자세 교정, 신체 균형 발달을 위해 발레 기본동작 등을 소개하는 '인천시민의 건강 프로젝트'를 무료로 한 달간 개강하여 직접 강사로 나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올해로 9년 가까이 인천시티발레단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발레단 대표로써 인천시민들에게 발레의 향후 밑 그들에게 예술교육을 통해서 신체적 균형과 심신을 쉬어갈 수 있다면 앞으로도 이 사업은 계속 무료로 진행할 것입니다. 은퇴 후에는 중앙대, 단국대 등에서 교수로 지내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셨고,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립 발레단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고 계십니다. 후배들에게 무용수로서 강조하고 싶은 소양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직 누구한테 조언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로서 여기까지 올 때 여기가 나의 놀이터고, 내가 제일 좋아하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굳이 조언하자면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인천시티발레단의 활동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동아시아 국제 무용협회를 통해서 우리 발레단이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도쿄에서 또는 상하이에서 올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대되고 흥분됩니다. 지켜봐 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태희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어느 옛어른은 이런 말을 했었다. '유학을 하고 돌아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여라'. 유학의 목적은 '나라 발전을 위한 인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만 서른의 청년이 있다. 그는 시의원이다. 자신의 지역 발전을 위해 열일하는 청년 의원, 김우겸을 만났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2018년 7월부터 통합 3대 창원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우겸 창원시 의원입니다. 저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있는 UC Davis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시의회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정치학 전공자로서 초선의원이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정치학을 어떻게 지역 정치와 지역 의회(local politics)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소속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경남도당 청년자치 시대 특별위원장과 창원시 의창구 지역위원회의 디지털 소통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어떤 계기와 경로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젊은 나이에 정치계 입문을 하게 되는 것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리한 점은 ‘패기’였고 불리했던 점은 ‘돈’과 ‘인맥‧정보의 한계’ 문제였습니다. 인맥과 정보가 기성 정치인들보다 약하다 보니 부딪치는 한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젊음과 패기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16년 12월 즈음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 캠프에 영입이 되어 부산, 울산, 경남, 제주도 등 여러 지역을 돌며 홍보팀장직을 했습니다. 광범위한 지역들을 돌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이후 청년을 대변하는 정치인은 어디 있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생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생활 정치에 가장 밀접한 게 기초의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정치 1번가라고 하면 ‘종로’라고 생각합니다. 경남에서의 정치 1번가는 ‘창원’이라고 생각해서 창원시 의창구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정치계 입문을 결심했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아버지께서는 반대였고 어머니께서는 저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길 바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치계는 힘든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모험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해보라며 늘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셨습니다. 저희 부모님 모두 2018년 6월 13일 아침 6시경 현 의원 후보들을 제치며 1등 하는 걸 보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제가 출마를 할 때만 해도 경상남도 지방의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가져갈 것이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2010년 창원시‧마산시‧진해시 통합으로 만들어진 현 통합 창원시의회도 3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민주당이 처음으로 10석 이상을 가진 결과였습니다. (현재 44석 중 20석)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는 청년이 지방의회에 진출하고 지역을 바꿔내는 데 적합한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 현실적이라 봤습니다. 한국의 청년 나이 기준은 만 19세~만 34세인데 2018년 지방의원으로 선출된 청년의원 모두가 더불어민주당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장종하 경남도의원, 신상훈 경남도의원, 지상록 창원시의원, 이현우 밀양시의원, 김혜림 양산시의원 모두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선된 것으로 보여주듯이 경남에서 청년에게 지방의회 진출할 기회를 주고, 청년 정치의 저변을 넓힌 정당이 더불어민주당이란 점에서, 앞으로도 경남 청년 정치는 더불어민주당이 청년의 정치참여 기회를 더 확대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작년 6월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로 경남 창원시의원에 당선되신 이후 1년이 지났습니다. 청년 기초의원으로서 청년 기본조례 개정안 대표 발의 등 청년 문제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제가 대표로 발의하여 지난 연말 통과시켜 낸 ‘창원시 청년 기본조례 일부개정안’은 창원시의 청년 정책 기본계획 내용을 확대, 청년 정책위원회 확대를 통한 청년의 참여 보장 및 의견 반영 확대, 청년 공간 설치‧운영 근거 마련, 청년시설 설치‧운영 조항 신설, 청년 정책연구 시행 근거 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창원시의회 의원님들과 함께 여성 청년 시정연구회에서 회장을 맡으며 다양한 시각으로 청년의 문제와 여성의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연구회도 구성하였습니다. 조례라는 게 지역에 한정되지만, 모범사례로 잘 만들면 다른 지역의 의회에서도 벤치마킹해서 전파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청년 기본조례 일부개정안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무언가 활동을 하려면 활동비가 없어서 청년의 권익을 신장하는 일에 도모하기 어렵고, 학자금 대출 등으로 인해 부채가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조례에 담아 추진했지만 결국 수정가결 되면서 삭제됐었습니다. 앞으로 청년들의 권익과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는 조례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년의원이어서 장단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젊다’라는 단어로 평가받을 때 좋고 ‘어리다’는 단어로 평가받을 때 아쉽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노련미로 인해 집행부 공무원을 상대하기 쉽지 않지만 젊어서 제시할 수 있는 신선한 정책대안과 자료 분석에서의 날카로움을 무기로 활용합니다. 지역구에서는 종종 어리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는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는 모습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차별받더라도 저를 보고 찍어주신 지역주민들을 생각하면 어떤 힘듦이 있더라도 헤쳐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정치학 전공으로 가져온 사고(thought)가 ‘지역구 이익’과 ‘창원시 전체의 이익’에 있어 충돌할 수 있는 두 개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가지게 해주는 장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정치와 거리감이 큰 편인데 청년들의 정치참여 확대와 청년들의 요구가 정치권에 반영되기 위해 이뤄져야 할 것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여러 선결과제가 있고 그에 따라 이뤄져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는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반정치(anti politics) 적 사고가 기성정치권이 청년들의 요구 반영에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라 판단됩니다. 청년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여러 자발적 결사체(association)들이 정당 내부 차원과 정당 밖 차원 각각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 자발적 결사체들이 상시로 활동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재정구조로 되어 있다면 청년들의 정치참여와 정치권을 향한 요구사항들이 구체화하고 온전한 하나의 정책대안으로 완성되어 입법화‧제도화로 이어질 것이라 봅니다. 이를 위해 정당도 청년들을 이용하는 도구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입니다. 1년여간 의정활동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2018년 7월에 의회 등원하자마자 9월 초에 곧장 행정사무 감사에 돌입하는 것을 보면서 시 행정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감사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막막했습니다. 미국의 지방의회와 달리 한국의 지방의원은 보좌관 1명조차 없고 자신이 다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자료 제출요구도 매우 급하게 하고 다른 의원님이 1번 요구할 때 저는 3~4번씩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더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고민하면서 소속된 상임위원회에서 가장 많은 지적사항(40건)을 기록했습니다. 이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6월에 있을 행정사무 감사에서 무엇을 주로 다룰 것인지가 가장 고민됩니다. 등원하자마자 청년 기본조례 일부개정조례안과 동물보호 조례 전부개정안을 만들었지만, 시(행정부)와 수많은 협상과 의원들의 동조 여론을 받아 통과시키기 위해 6개월 이상의 시간을 투여하고 가슴 졸였던 일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송영길 국회의원님입니다. 제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정치적 멘토로 삼고 있습니다. 5개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데다 경영학·중어중문학·일본학을 전공하실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능하고 노동운동과 인권변호사까지 하셨으니 배울 게 많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러시아 특사가 된 게 기반이 되어 더불어민주당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도 하고 계시는데 여기서 북방은 중국과 러시아를 말합니다. 송 의원님의 넓은 영역에 걸친 공부와 경험이 빛나는 지점이라 봅니다. 4선 국회의원으로서 항상 낮은 자세로 국민과 함께하고 지속해서 공부하며 생각하는 자세도 저는 본보기로 삼고 싶은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에 동의한다면서도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고 소신 발언하시는 모습들은 제가 여러 번 봤었습니다. 송 의원님의 소신 발언에 동의 여부를 떠나 그 용기와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기반과 근거가 저를 더 공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떠나 항상 정치인으로서의 기본 소임인 입법자(lawmaker)의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다. 조례를 많이 발의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청년을 비롯하여 시민들의 생활에 정책을 수립‧변경하거나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직접 연결되는 ‘생활형 조례’에 초점을 둬서 만들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지자체에서는 어떻게 하는지를 자주 살펴보게 됩니다. 현재도 준비 중인 조례가 3건 이상 됩니다. 앞선 두 조례 통과를 위해 6개월 이상의 시간을 인내했듯 준비하고 있는 조례들도 시민들의 생활에 더 직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우겸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20년 도쿄 올림픽 특집! 8세에 우연히 네 발 자전거를 타고 출전한 어린이 트라이애슬론 대회는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이 되었다. 오늘도 올림픽을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고 있는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김지연 선수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광역시체육회 소속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김지연입니다. 많은 스포츠 종목이 있지만 어떻게 트라이애슬론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1997년 5월, 8살에 어린이 트라이애슬론대회에 네발자전거를 타고 첫 출전을 했었는데요. 물에 빠져 큰 사고를 당할 뻔했던 오빠를 따라 수영과 함께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운동 종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트라이애슬론에도 출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트라이애슬론대회에만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는 1997년 5월 25일에 트라이애슬론대회에 데뷔하여 올해로 22주년을 맞이했고, 23년 차 선수로 활동 중입니다. 올림픽 규칙인 국제표준으로는 수영 1.5km - 사이클 40km - 마라톤 10km를 연달아서 하는 종목인 트라이애슬론. 이 종목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트라이애슬론은 인간 한계에 도전하고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으로 알려져 힘들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는데 사실 그보다는 자연과 함께하고, 친구 동료들과 함께하며 즐길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느낌과 기분, 감정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아주 멋진 운동 종목이라고 자부합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조금 더 역동적이고 빠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박진감 넘치는 멋진 매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점차 입문하는 동호인의 수와 선수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트라이애슬론만의 매력을 느끼고, 느껴보고 싶은 분들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올림픽을 목표로 활동 중인 선수이기 때문에 장거리 아이언맨 코스의 경기는 아직 출전해보지 않았지만, 꼭 한번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수많은 국내·외 대회를 나갔는데 그중 가장 기억 나는 대회가 있나요? 2015년 강원도에서 열렸던 전국체전 경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경기 진행 중 제 부주의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골절되었는데, 골절된 상태로 사이클 40km와 달리기 10km를 끝까지 밀어내었습니다. 전국체전 경기에는 3명의 선수가 모두 빠른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기록을 합산하여 메달을 결정짓는 단체전 경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상이나 사고로 완주를 하지 못한다면 단체전 메달과 점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 경기로 개인적으로는 15위라는 높지 않은 기록을 랭크했지만 단체전 4위라는 성적과 많은 이들의 격려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제가 생각보다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껴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골절 이후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까지는 꽤 오래 고생을 했지만요. 20년 넘게 국가대표의 자리에 있으면서 슬럼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2011년 무릎 부상으로 2년이라는 시간의 공백기를 보내왔습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게 되었기에 은퇴를 생각할 정도로 선수로서 참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저를 믿고 도와주시며 기다려주시는 많은 분과 팀원들이 있었기에 잘 버텨내었고 이후로는 복귀할 수 있었고 국가대표라는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 그 시기가 지금의 저를 위한 성장통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 트라이애슬론 선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트라이애슬론은 신체조건이 뛰어나야, 타고나는 것이 있어야 잘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현재는 은퇴한, 한때는 최고였던 호주의 Emma Snowsill 이라는 선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들 사이에서 키가 작지만 아주 강했고, 훌륭한 경기 내용으로 늘 제 마음속의 헤로인이었습니다. 작은 선수도 해낼 수 있다는, 신체조건이 아닌 마음과 정신이 만들어내는 모습은 제게 도전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를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많은 것을 도와준 사람은 다름 아닌 오빠입니다. 오빠(김정호, 31)는 어릴 적부터 함께 선수 생활을 해왔고,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친구처럼 함께해왔습니다. 현재까지도 함께 선수로 생활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은퇴 후 선수일 때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고 계신 데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선수촌 내에서는 하루 3번 수영, 사이클, 달리기의 순환적인 운동 일정으로 휴일 없이 정말 기계처럼 훈련에만 집중하고 몰입합니다. 트라이애슬론 종목은 굉장히 솔직한 종목이기 때문에 누가 더 강한 훈련을, 더 많은 훈련을 잘 이겨내었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휴식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고 훈련시간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시간도 주어집니다. 선수 생활 중 많이 힘들고 지칠 때,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특별한 취미가 있나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제 겉모습을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흥이 많고 조금은 낙천적이라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지만 적은 편입니다. 음악 듣고 춤추는 걸 좋아해 즐기는 편입니다. 그외,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쇼핑 또한 좋아해서 스트레스가 있다면 자기보상을 핑계로 쇼핑이나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온 것 같네요. 공식 질문)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올림픽 무대를 저 또한 꿈꾸고 있고, 그를 위해 단계적으로 다가가는 중입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시작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주어지는 매일매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멋진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또한, 운동선수는 성적으로 모든 것이 보이지만 내면도 훌륭하고 자신에게 박수 쳐 줄 수 있는 키는 작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큰 선수로 남기 위해 노력 중이니 트라이애슬론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지연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지나가고 있는 암호화폐, 블록체인의 열풍.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크립토 펀드. 그리고 한 사람이 크립토 펀드의 새바람에 서있다. 바로 블록워터 매니지먼트의 조상수 대표이다. 그와 함께 크립토 펀드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블록워터 매니지먼트의 대표 조상수 입니다. 블록워터 매니지먼트는 암호화폐, 블록체인 회사의 자본 등 연관 산업에 투자하고 자문하는 크립토 헤지펀드 회사입니다. 외부 LP 없이 파트너 자금만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현재 10명이 재직 중입니다. 올해부터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주류금융의 자본을 받기 위한 LP Fundraising 을 계획하고 있고, 이에 맞추어 뉴욕과 케이먼 군도에 펀드 및 투자사 법인 설립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저는 2012년부터 여러 IT 스타트업에 엔젤투자를 하고, 주식, 매크로 투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정 대표 (현 코인힐스 CEO)와 비트코인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고, 뜻이 맞아 함께 코인힐스를 창업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Mining을 병행하며 코인힐스를 계속해서 운영해 왔고, 평소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따로 독립하여 2018년 1월에 블록워터 캐피탈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대로 법제화된 크립토펀드는 북미를 제외하곤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아시아 크립토펀드는 일반 법인 설립 후 월렛만으로 거래를 하는 초기 단계입니다. 자신들이 펀드라고 하지만, 사실 펀드가 아닌 일반 법인 혹은 벤처캐피털에 불과합니다. 북미에서 규제가 점차 구체화 되고 있고, 크립토 산업 기반도 빠르게 정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빠르면 올해부터 막대한 주류금융의 자본이 크립토 산업으로 흘러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자본을 유치하려면 완전히 합법화되어야만 자금을 수탁받을 수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다가오는 큰 물결에 대비해 기존 금융 산업의 규제에 따르는 회사 경영과 전략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계로는 최초로 현재 케이먼에 펀드 및 자산운용사 셋업이 완료되었고, 미국에도 마찬가지로 법인 셋업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IT 스타트업 엔젤투자, 주식, 매크로 투자, 마이닝, 이제는 크립토 헤지펀드까지 여러 금융 분야에 종사하셨는데 그 중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금융업에 종사하는 게 아닌 일개 개인 투자자로서 그동안 해왔던 거라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워낙 투자 쪽이 적성에 잘 맞아 그쪽 분야를 공부를 혼자 해왔고,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IT 스타트업 엔젤투자는 아쉽게도 성공해 본 적이 아직 없습니다. 이미 파산한 때도 있고, 아직 진행 중인 회사도 있습니다. 금융 투자로 다행히 좋은 레코드를 거두게 되었고, 그 부분이 크립토 투자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라고 하면, 업계에 워낙 초창기에 진입했다가 보니 이더리움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비탈릭 부테린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천재 소년에 관한 관심이 많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이더리움을 극초기에 투자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평단 1불대에 사서 3불대에 매도하고, 많은 수익을 냈다고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가격은 아시다시피 250불 근처이고, 한때 1300불도 넘었었죠. 현재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시장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16년 말부터 17년 말까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언론의 급격한 조명을 받으면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에 대한 투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현재 몇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첫째는 암호화폐가 대다수 사람에게 여전히 투기성이 높은 자산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이는 일정 부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때문에 암호화폐가 제도권 내로 편입하는 것이 늦춰져 투기성이 점점 짙어지는 악순환이 생기기도 하며, 진지하게 블록체인을 활용한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업가들에게도 그 피해가 미치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흔히 말씀하시는 조작 불가능한 원장 이외에도 P2P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만,일반 소비자들이 투기성 자산을 일상생활에 사용한다는 생각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분산 원장 기술의 도입이 늦춰지고 있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둘째는 첫째에서 파생되는 문제입니다. 제도권 편입이 늦어질수록 법의 망을 피하여 관련 사업을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점점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의 허점, 그리고 사업자와 사용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이 결합하여 그러한 사업을 하는 자들에게 막대한 수익이 돌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셋째는 투기와 별개로 기술적인 확장성 측면에서의 불편함입니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을 비롯한 대부분 자산이 계정 간 거래 소요시간이 지나치게 깁니다. 유명한 일화로 블록체인 게임 Crypto Kitties가 유행이었을 때, 며칠 동안 거래가 승인되는 데만 며칠이 걸렸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토콜들이 생겨나고, 기존의 프로토콜이 하드포크되는 등 큰 노력을 쏟고 있지만, 쉽지 않은 문제처럼 보입니다. 블록체인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들은 해당 자산 거래가 오래 걸리는 것에 대해 큰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장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블록체인의 대중적인 상용화는 아직은 요원해 보입니다.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의 한국 정부 규제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규제의 부재가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큰 기회를 정부는 묵과하고 있습니다. ICO 금지 조치, 거래소에 대한 빡빡한 규제, 블록체인 연계 산업에 대한 암묵적인 억압 등. 정부가 여태껏 해 온 조치들은 블록체인 산업을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간 어떤 산업군에서 이렇게 한국이 중심국가로 떠오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 한국은 블록체인 산업에서 글로벌 BIG 3안에 들어갈 정도로 중심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선제적인 규제, 법제화가 진행된다면 한국은 블록체인 산업을 계속해서 선도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급격한 시장 팽창으로 인해 그간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나쁜 요인들은 사전에 차단하고, 가치를 새로 마련할 수 있는 기반에는 국가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2019년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시장 전망은 어떻게 보시나요? 저는 블록체인에 대해서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크립토커렌시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회사의 입장이 아닌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처음 이 시장에 진입한 2012년부터 지금까지 쭉 크립토커렌시의 프라이싱은 몇 번의 상승을 거칠 것이라 믿어 왔습니다. 블록체인의 낙관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얼마나 블록체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블록체인의 가장 중요한 내재가치인 탈중앙화에 대해서도 아직 개인적 고찰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상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탈중앙화가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가치인지 기존 중앙화 시스템의 극도로 편리한 사용성을 이길 만큼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지 의문입니다. 블록체인이 표방하는 가치들은 분명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그리고 경험한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의 반발, 일상에서의 부재, 기술과 가격의 심각한 괴리 등등 헤쳐나가야 할 산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산업을 태동, 발전시키고,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모든 참여자의 노력을 응원합니다. 저도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 있어 보람도 느끼고요. 하지만 블록체인이 모든 것을 바꾸기엔, 인터넷만큼의 산업적 파급력을 가지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이런 부정적 견해와는 반대로 크립토커렌시 시장의 가치는 아주 크게 확대될 거로 생각합니다. 저는 크립토커렌시를 디지털 자산, 즉 새로운 자산의 출현으로 간주하고 있고, 이미 의미 있는 자본이 투하되었으며, 앞으로 전통 금융에서 자본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 기존의 전고점은 가볍게 뛰어넘을 거로 생각합니다. 아직 크립토커렌시의 마켓캡은 전체 금융 시장의 0.3%도 채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디지털 자산이 출현했고, 주류금융은 이 자산을 채택하기 직전에 와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는 별개로 시장은 또 한 번의 큰 상승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에는 점차 현실로 나리라 예상합니다. 북미에서의 규제가 확립되면 전통 금융에서의 막대한 자본이 들어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블록체인 혹은 탈중앙화라는 키워드보다는 디지털 자산, 즉 새로운 자산의 출현으로 인한 산업의 거대한 팽창 및 구조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 크립토는 하나의 자산 클래스로써 급격히 자리 잡을 것이며, 그 중심에는 비트코인의 구조화, 상품화가 수반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 발전이 더딘 블록체인의 기술보다는 주류금융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디지털 자산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프라이싱 측면에서 비트코인이 선제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으며, 규제를 잘 준수한 정제된 토큰들이 비트코인의 뒤를 쫓아오게 될 것으로 봅니다. "2019년 크립토 시장의 프라이싱은 점진적이고, 끈기 있게 상승할 것이고, 또한, 이전과 다르게 논리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표님의 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블록워터 캐피탈은 크립토 펀드에 대한 운용 능력을 갖춘 한국 최초의 회사인데 이 크립토 펀드가 한국에서 시장성을 가지고 가질 가치와 영향은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17년 하반기부터 18년 초까지 이어진 크립토 랠리는 다소 비이성적이었습니다. 모든 자산이 폭발할 때는 경제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이 수반되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지난 크립토 랠리는 기준 없이 크나큰 광기에 휩싸여 시장이 활성화했었습니다. 그 강도도 전례 없이 상당했습니다. 90년대 후반 IT 거품 현상보다 상승 폭이 컸었고, 심지어 튤립 거품 현상을 일시적으로 넘어서기도 했었죠. 모든 산업이 많이 성숙해진 21세기엔 일어날 확률이 너무나 희박한 광기의 시간이었던 거죠. 제가 위의 논평한 이유는, 광기와 비이성으로 점철된 랠리는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이제부터는 전통 금융에서의 크립토 자산 채택, 실제 블록체인 비즈니스 작동에 따른 산업화, 구조화로 인해 논리를 수반한 상승장이 올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 랠리가 천천히 이루어질지, 또 한 번 굉음을 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타 전통 자산군에 비교해선 그 상승의 기울기가 굉장히 가파를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한국 시장에 도달한다기보다는, 다 같이 움직일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시다시피 국제 블록체인 산업의 선도국가 중 하나이고, 정부 규제의 부재로 인해 힘든 시간을 겪어왔을 뿐입니다. 리테일의 참여는 여전히 세계 최고이고요. 크립토, 블록체인의 특성상 모든 프라이싱, 산업화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선제적으로 규제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미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산업을 주도할 것 같습니다. 금융 분야의 전문가인 만큼 투자 문의도 많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금융 투자자들이 수익을 위해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요? 과거와 같은 쉬운 자금 제공과 가격 상승을 경험하긴 어려울 겁니다. 앞으로 어떤 패러다임이 이 시장에 도래할지 계속해서 팀원들과 연구 중입니다. 기술 기반, 동시에 적절한 규모의 유저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디앱들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디앱들의 토큰에 사회적 가치 외에 어떤 자산적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토크 이코노미가 잘 작동하고, 그들이 설계한 인플레이션 요소들이 생태계에 얼마나 작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업 미팅을 진행하다 보면, 제품도 훌륭하고, 토큰 이코노미도 아주 잘 짜인 좋은 회사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해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 사업은 분명히 블록체인이 필요하고, 토큰 이코노미의 구조도 완벽해 보인다. 그런데 저 생태계에 저들의 토큰이 꼭 쓰여야만 하는가?’ ‘어답션 측면에서 규모가(혹은 유저 베이스가) 작은 회사의 토큰이 얼마나 그 생태계에 녹아들 수 있을까?’ ‘차라리 Fiat이나 범용적인 메이저 커렌시, 최근에 나오고 있는 라인, 카카오, 페이스북 엔터프라이즈 코인들이 Real use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등. 블록체인 사업들은 토큰 이코노미에 심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토크 이코노믹스의 설계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자신들의 토큰이 해당 생태계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인지는 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범용적인 거래 수단을 선택하고, 토큰 세일 대신에 에쿼티 세일에 나서도 됩니다. 리얼 어답션은 조금 더 범용적인 수단을 선택할 때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투자 사업을 선정할 때는 기본적으로 팀원 구성을 먼저 살펴봅니다. 무엇보다 블록체인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어떤 사람이 또 어떤 팀 구성이 이루어져 있는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어떤 전략적 투자자가 진입해 있는지도 주의 깊게 보고, 토큰 이코노미가 얼마나 생태계에서 작동 가능한지 기술, 산업과 연계한 신중한 실사를 진행합니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다양한 무대에 있는 기업들이 사업을 하고자 시도합니다. 아이디어 수준의 사업부터 수백억 원 이상의 매출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들까지요. 이같이 회사의 성숙도 차이에 따라 때로는 벤처투자처럼 팀원들의 역량에 큰 비중을 둘 때도 있고 매출증가율 또는 사용자 수 증가율에 더 큰 비중을 둘 때도 있습니다. ICO 특성상 초기 사업모델만 가진 경우가 많고 비즈니스 모델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경제적 가치 창출에 큰 중점을 두는 편입니다. 토큰은 경제학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습니다. 토큰의 필요 유무, 수요와 공급, 인플레이션 구조, 전통 산업과의 연계 등등의 요소를 반드시 고려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조상수 윤기선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동네변호사'로서,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정당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변환봉 변호사는 오늘도 '내가 노력한 만큼 내 꿈이 이루어 지는 그날'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가 변호사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지금껏 걸어온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 합니다. 안녕하세요, ‘동네 변호사’ 변환봉입니다. 주민들이 문턱 없이 쉽게 찾아와 주고 계시죠. 예전에는 금융, 회사 사건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동네 변호사로 온갖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 드리고 있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다 사회생활로 점차 보폭을 넓혀간 이력이 보이십니다. 원래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요? 어려서부터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왜 우리 주변에는 고통과 슬픔, 부조리가 많은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할 일이라고 깨달았고, 잘못된 일들을 하나하나 바로 잡아가면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심이 커졌네요. 변환봉 변호사는 광화문에서 법조인 양성문제와 관련해 사법시험 존치 캠페인에 참가했다. 법조인 양성문제와 사법시험 존치 캠페인에 동참하셨습니다. 사법시험 세대의 법조인으로서 현 법조인 양성문제와 로스쿨 체계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이상론에 빠져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게 된 실패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고시 낭인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변시 낭인이 등장하고 있고, 학벌 서열화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아졌고,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더 늦기 전에 실패를 자인하고 로스쿨 체계의 탈출구를 마련해야 합니다. 변호사님 SNS를 보면 태어나 큰 수술을 받은 딸에 대해 종종 언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정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딸 아이가 태어날 때 담관낭종이라고 담도가 부어있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대로 두면 나중에 췌장암으로 전이되는 무서운 병이죠. 태어난 지 40일이 지나 큰 수술을 받았고, 딸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수술이 잘 끝나고 저희가 아이를 안고 경과를 지켜보러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중 수녀님께서 아이를 안고 계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보육원에서 소아마비로 온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평생 누워서 지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보육원의 재정 여건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치료만 가능하고 재활치료 같은 것은 여건이 안된다고요. 그 날 집에 돌아와 집사람과 함께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부모 잘 만나 최고의 치료를 받는데,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다음 날 보육원에 전화해서 그 아이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재활치료비를 모두 저희가 부담하겠다고 했고, 몇 년 후 그 아이가 걷는 사진을 받았습니다. 딸 아이가 아팠었지만, 그 덕에 더 큰 사랑과 나눔을 깨달았습니다. 딸 아이가 유치원에서 자기는 왜 돌 사진이 없냐고 했을 때 그 돈으로 아픈 친구들 수술시켜줬다고 하니 딸 아이도 뿌듯해 하더라고요. 제 가족 모두 힘들었지만, 더 큰 것을 배웠습니다. MBC 'PD수첩' 출연 (2013년 3월). 금융소비자들을 대리해 거대 금융기관과 싸우고 소액주주운동을 하던 시절. 당시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론스타와 싸웠고, 파생상품 시장에서 외국의 대형 은행과 싸웠다. 변호사로서는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어릴 때부터 한 번씩은 꿈꾸는 직업인 '대통령'.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정치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흔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결국 사회를 바꾸는 힘은 제대로 된 법과 제도라고 생각했고, 정치야말로 눈물을 닦아 주고 필요한 곳에 도움을 전하는 큰 역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40년을 살아온 지역에서 총선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가장 잘 아는 곳이라 생각했거든요. 정당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현실에 대한 이해도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진보 정당의 경우 ‘있어야 할 현실’에 대해서 좋은 지향점을 제시해 주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기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음을 보아왔습니다. 그에 반해 보수 정당의 경우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점진적으로 바꿔 갈 수 있는지 고민을 하거든요. 총선에서 낙선한 후에는 성남시 수정구의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으로 있는데, 당협위원장은 한 지역의 책임자로서 지역 당원들의 교육 및 관리를 담당합니다. 아울러 중앙당에서는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자유한국당의 정책과 이념, 정부 정책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친박 정치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 같습니다. 제가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인재영입 1호로 소개되며 김무성 키즈로 불렸었습니다. 하지만 탄핵으로 김무성 의원이 탈당할 때 저는 남았었죠. 탄핵에 대해서도 저는 불가피한 결과였지만, 절차적으로 조급한 측면이 있었다는 견해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지지라거나 즉각 석방,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동안 젊고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분께서 아껴주셨지만, 특별히 ‘친박’이라고 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싶습니다. 현 시국에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갈등을 조정하거나 치유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그 갈등을 부추겨 서로에 대한 증오를 배가시켜 상대를 철저히 억압하려는 모습이 크게 걱정됩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무조건 악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의 반대되는 의견이 있기에 내 의견이 수정되고 그래서 사회가 절충하며 발전한다는 기본적인 인식만 갖춰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조건 틀렸고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다른 의견이 있기에 내가 한 번쯤 더 생각하고 수정할 수 있다.”라는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경. 진눈깨비가 날리던 어느날 골목길을 걸어가는 뒷모습. 혹시라도 유권자를 만나면 악수 하려고 오른손에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변환봉 변호사는 이 사진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 '1987'에서 연희는 말합니다. '그 날 같은 거 안 와요' 하지만 역사는 이루어지죠. 변호사님이 꿈꾸는 '그 날'은 어떤 모습입니까? 내가 노력한 만큼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모두가 잘산다는 이상이 아니라 노력한 만큼 이루어갈 수 있고, 그 노력의 대가가 존중받는 사회죠. 기회는 평등하지만, 노력의 결과에 대한 차이는 인정받고 존중받는 날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정치하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정치는 내가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만들어질 때 주저 없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 내가 그 길을 만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제게 그에 부합하는 소명이 있게 될 것이고, 저는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변환봉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