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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그의 직업은 가수,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기타리스트, 음악감독, 악기 쇼호스트 등. 정치와 외교분야가 아닌 대중음악계에서 다재다능하게 그의 꿈과 재능을 펼치고 있는 만능 아티스트! 박인우와 함께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박인우입니다. 대표 직업으로 작곡가를 늘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있지만 음악감독, 프로듀서,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쇼호스트, 작가 등 음악에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일곱 살 때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면서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90년을 전후로 피아노 학원이 상당히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딱히 제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도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가족들이 괴롭다며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피아노를 잠가놓을 정도였으니 악기와 음악의 매력에 빠지는 계기로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여기저기 관심이 많은 유년기를 보낸 터라 또 갑자기 운동부를 하겠다며 3년 정도 다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악기를 다시 연주하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특별활동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음악 선생님께서는 다양한 악기에 능통하신 분이었는데, 어느 수업시간에 클래식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 연주하신 안토니오 루비라의 ‘사랑의 로망스’ (일명 ‘로망스’)의 아름다운 선율과 낭만적인 사운드에 완전히 마음을 뺏긴 저는 주저 없이 기타반에 가입하여 ‘로망스’ 완주를 목표로 클래식 기타를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집착이 강하고 한 가지에 쉽게 꽂혀 몰두하는 스타일인데, 당시 기타에 대한 저의 집착은 기존의 것들을 한 단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서 단기간 내에 상당한 실력 향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로망스’ 완주라는 기존 목표를 넘어 그해 동아리 연주회에서 독주를 따내며 기타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키웠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밴드 동아리에 가입해 일렉기타를 연주하며 클래식에서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영역의 음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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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느 날 우연히 Kenny G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음악 뿐 아니라 다른 것 또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으니. 그것은 색소폰이었다. Kenny G의 음악에 반해 색소폰을 들게 된 소년은 이젠 한국의 색소폰계를 이끄는 주류가 되어있다. 그런 색소포니스트 한기원과의 인터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색소폰 연주자 한기원 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처음 접하는데 어떻게 색소폰 전공을 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겠지만, 실제로 악기를 시작한 것은 7살 때 동네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치면서부터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음악을 기본소양으로 생각하시고 어린 아들을 학원에 보내셨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저는 어려서 도망을 많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피아노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배웠는데, 콩쿠르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입상했었습니다. 다만 의미를 모르고 배우던 것이라 그런지 흥미를 잃어 더 이어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인 Kenny G를 통해서였습니다. KBS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 ‘연예가중계’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게 되었는데요. 당시 방송에서는 마지막에 항상 외국 뮤직비디오가 한 편씩 나오곤 했었습니다. Kenny G가 영화 'Dying Young'의 OST를 연주하던 모습을 잠깐 이었지만, 너무나도 인상 깊게 보게 되었고 그 이후 동네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Kenny G 음반을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는데,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Kenny G 음반을 전집으로 모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었습니다. 음반과 콘서트 레이저 디스크를 한 장 한 장 구매해 가면서 너무나도 훌륭한 Kenny G의 연주에 매료되어 점점 깊은 감동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은 매섭고, 빠르다. 영상으로 사람들은 많은 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모든 것을 만드는 제작자가 있다. 한국 영상제작 분야의 손꼽히는 제작사인 파이크미디어 대표, 유동현과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영상제작과 강의를 동시에 하는 유동현입니다. 저한테는 두 분야 모두 매력이 있어서 욕심을 부리며 무리하는 중입니다. 언제부터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고교 시절 미대 입시를 준비했고,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딱히 어떤 분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첫 입시 시험이 멀티미디어 영상 (구: 영상디자인과) 과였고, 운이 좋게도 입학하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그때 저를 ‘얼떨이’라고 부르시곤 했어요. 결국,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 오히려 영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좋았지만, 사실 대학교 들어와서 학업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 작품에 감명을 받으면서 제 것에 대한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도 제작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다른 분들의 훌륭한 작품을 보면 감탄하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스스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수많은 영상제작을 하셨는데 영상제작을 하실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는 후배들과 영상제작사(파이크미디어)를 창업하게 된 계기를 언급할 수 있는데요, ‘어차피 만들 거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로, 우리 이름을 걸고 일을 하자‘였습니다.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스스로 창피하지 않은 영상을 만들자’ 입니다. 의뢰인도 만족 못 하고 저희도 만족을 못 하는 영상은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들이 저희를 성장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돌아보면 아쉬운 영상들이 많습니다. 남들이 주저한 길. 남들이 찾지 않은 길. 하지만 그는 알았다. '이 길은 나의 길'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의 불안감을 그는 자신감으로 바꿨다. 제4대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 김민호의 이야기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현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대한프로레슬링연맹 소속이자 제 4대 극동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프로레슬러 김민호입니다. 어떤 계기로 많고 많은 스포츠 종목 중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프로레슬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운동은 어릴 때부터 태권도, 합기도 등등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해왔습니다만 초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비디오가게에 붙은 프로레슬링 비디오 포스터를 보고 비디오가게에 들어가서 헐크 호건의 시합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빌려본 뒤로부터 프로레슬링의 판타지에 빠지게 되어 프로레슬러에 대한 동경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왕표 선수의 단체였던 WWA의 시합이 가까운 곳에서 하게 되어 직관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이왕표, 홍상진 선수 등등 한국프로레슬링 선배님들의 시합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해서 꼭 저분들처럼 링에서 멋진 시합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바로 찾아갔지만,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찾아오라 하셔서 그 후에 열심히 유도와 근력 운동 등을 열심히 하면서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에 찾아가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가 프로레슬러가 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가족들은 농담인 줄 알았다며 지금은 추억으로 웃어넘기시지만 제가 입문을 하고 나니 많은 걱정을 하시며 마음 졸이셨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힘들지만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로레슬링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에 단지 타종 목처럼 자신의 승리를 위해 훈련하고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링 위의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관중들과 “함께 소통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싸워나간다”라는 그 매력에 그 어떤 분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천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맛집 블로그 포스팅을 하는 ‘파워블로거’보다 더 파워 넘치는 블로거! 마케터로서의 열정을 끊임없이 불사르는 ㈜ 쿠잉비 대표이사 김학수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모바일 광고유통 융합플랫폼 레드QR을 런칭하고 있는 주식회사 쿠잉비 대표이사 김학수입니다. 저는 1982년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입학, 2학년 마치고 휴학,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 군복무를 하던 중 자신의 선택이 향후 인생항로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깨달음을 얻고 제대했습니다. 나의 선택으로 복학 후 경영학과 수강을 위주로 대학졸업, 해태제과 금강제화를 거치며 마케팅 실무에서 팀장까지 역임한 후, 지금껏 순수 열정의 마케터로 지내면서 매일 블로그 포스팅을 통해 소상공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하는 충청도 보령사람 김학수입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 시절, 금오공고 입학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의지로 남강고에 진학을 하시고 서울대에 진학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게 미래 진로의 '신의 한 수'가 아니었었을까 싶은데요.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난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가 전혀 필요없다는 금오공고에 추천을 받아서 진학하려 했지만, 아들들은 서울대에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만류로 일반 고등학교인 신림동 소재 남강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다행히 고교입학 자격시험인 연합고사 성적이 좋아서 남강고 특별반에 들어갈 수 있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과외는커녕 학원조차 다니기 힘들었던 저에게 양질의 국영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다니게 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새로운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된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점점 서울대 문턱에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저는 82년도 대입학력고사에서 뜻하지 않은 낮은 성적으로 중앙대의대와 서울농대 입학원서를 두고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의대를 원하던 저는 부모님의 권유와 집안형편으로 인해 서울농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전공학이라는 화두가 심화되던 시점이라서, 의대 못지않게 유전공학도 미래 인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만족을 이유로 식품공학을 전공하면 될 거라고 위안하면서 말이죠. 1학년 교양과목을 관악캠퍼스에서 마치고 2학년부터 식품공학과에 진학, 공부를 하던 중 거의 모든 커리큘럼이 화학으로 점철된 학교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중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짝사랑으로 끝난 2학년 생활을 마치고 휴학, 군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품공학과란 이유로 취사병과를 지목받은 저는 부산기술병과학교에서 취사병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 취사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와는 전혀 다른 집단, 수색대 전우들과 생활하면서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계층과 팔도에서 모인 전우들의 삶과 애환을 통해, “나의 작은 선택이 인생을 이렇게도 많이 변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품은 채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니 ‘정말 내가 원하던 유전공학을 통해 세상에 작은 변화를 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식품공학과 공부가 아닌 경영학과 과목 수강신청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의 제가 좋아하는 마케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식품공학과를 선택했던 것은 유전공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공부를 하려면 석사 박사를 마쳐야 비로소 작은 분야의 유전공학적인 일을 할 수 있는데 가정형편상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제일제당(지금의 CJ그룹) 인턴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마케팅업무를 할 수 있는 해태제과를 선택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해태제과에서는 껌마케팅 업무를 시작했고, 무설탕껌의 시장을 연 덴티큐를 기획 한국능률협회 본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군에서 배운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작은 성공의 시작이란 것을 깨닫게 된 첫 번째 쾌거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인물을 찾아가는 '세계 속의 한국인' 특집! 지난달, 오랫동안 염원했던 박사학위 과정을 졸업한 신경과학자 장성수를 만났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신경과학 (Neuroscience)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장성수’입니다. 2018년부터 미국 뇌전증 학회 (American Epilepsy Society)의 정회원이자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뇌전증의 발병원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7년 뇌전증 이야기 (Epilepsy Story)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그룹 (링크: https://www.facebook.com/groups/284859028671184)을 신설하고, 현재 운영하며, 뇌전증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을 돕고 있습니다. 발레를 좋아하고, 발레를 사랑해서, 발레를 바라보며 30년의 세월을 달려온 발레리노. 그의 자녀인 박민아 양도 DNA를 물려받아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도약하고 있다. 인천시티발레단의 단장이자 예술감독, 박태희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인천시티발레단 단장, 박태희입니다. 1980년 후반, 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는 아직 남자 발레 무용수의 인식이 자리 잡혀 있지 않아서 발레를 전공하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발레를 전공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17세,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을 했습니다. 의외로 당시 사회적인 편견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발레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20대 때 국립발레단 시절에 가르쳤던 학생 전소연의 어머니가 저희 발레 인생이 있어 전환점을 가지게 해 주신 분이 십니다. 이유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셨는데 발레단 이후 직업 전환에 있어 저에게 많은 이야기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발레를 배우면서 좋았던 시기는 국립발레단 시절입니다. 그 시절은 제가 많은 가르침과 숙제와 공부를 많이 한 시절입니다. 세계적인 안무가이자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 유리 그리가로비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인형)를 비롯하여 몬테카를로발레단 안무 가장인 크리스토 마이오(로미오 앤 줄리엣), 볼쇼이발레단 안무가 콘트라체바 돈키호테 그 외 많은 안무가와 땀을 흘리고 그곳에서 열정과 온 힘을 기울인 그 시절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무용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그 시절도 역시 발레를 배우면서 가장 좋았던 시기처럼 국립발레단 시절인 1993년~1998년 10월까지 6년 동안입니다 국립발레단 신입 단원으로써 많은 공연 작품과 병력문제로 동아 무용 무용콩쿠르/한국무용협회 신인 무용콩쿠르 일 년에 두 번만 있는 콩쿠르 결과를 위해서 낯에 국립발레단에서 연습실 공연 작품을 연습하고 저녁에는 콩쿠르 연습을 병행하면서 하루에 10시간을 정도를 강도 높게 연습했습니다. 연습에 연습 만을 지독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콩쿠르 결과 동아무용콩쿠르 93년 은상, 95년 동상, 96년 은상, 그리고 한국무용협회 신인 무용콩쿠르에서 94년 수석상, 97년 수석상, 드디어 98년 특상(1위)으로 군 면제를 받았습니다. 어느 옛어른은 이런 말을 했었다. '유학을 하고 돌아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여라'. 유학의 목적은 '나라 발전을 위한 인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만 서른의 청년이 있다. 그는 시의원이다. 자신의 지역 발전을 위해 열일하는 청년 의원, 김우겸을 만났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2018년 7월부터 통합 3대 창원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우겸 창원시 의원입니다. 저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있는 UC Davis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시의회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정치학 전공자로서 초선의원이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정치학을 어떻게 지역 정치와 지역 의회(local politics)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소속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경남도당 청년자치 시대 특별위원장과 창원시 의창구 지역위원회의 디지털 소통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어떤 계기와 경로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젊은 나이에 정치계 입문을 하게 되는 것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리한 점은 ‘패기’였고 불리했던 점은 ‘돈’과 ‘인맥‧정보의 한계’ 문제였습니다. 인맥과 정보가 기성 정치인들보다 약하다 보니 부딪치는 한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젊음과 패기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16년 12월 즈음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 캠프에 영입이 되어 부산, 울산, 경남, 제주도 등 여러 지역을 돌며 홍보팀장직을 했습니다. 광범위한 지역들을 돌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이후 청년을 대변하는 정치인은 어디 있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생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생활 정치에 가장 밀접한 게 기초의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정치 1번가라고 하면 ‘종로’라고 생각합니다. 경남에서의 정치 1번가는 ‘창원’이라고 생각해서 창원시 의창구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특집! 8세에 우연히 네 발 자전거를 타고 출전한 어린이 트라이애슬론 대회는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이 되었다. 오늘도 올림픽을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고 있는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김지연 선수와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광역시체육회 소속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김지연입니다. 많은 스포츠 종목이 있지만 어떻게 트라이애슬론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1997년 5월, 8살에 어린이 트라이애슬론대회에 네발자전거를 타고 첫 출전을 했었는데요. 물에 빠져 큰 사고를 당할 뻔했던 오빠를 따라 수영과 함께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운동 종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트라이애슬론에도 출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트라이애슬론대회에만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는 1997년 5월 25일에 트라이애슬론대회에 데뷔하여 올해로 22주년을 맞이했고, 23년 차 선수로 활동 중입니다. 지나가고 있는 암호화폐, 블록체인의 열풍.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크립토 펀드. 그리고 한 사람이 크립토 펀드의 새바람에 서있다. 바로 블록워터 매니지먼트의 조상수 대표이다. 그와 함께 크립토 펀드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블록워터 매니지먼트의 대표 조상수 입니다. 블록워터 매니지먼트는 암호화폐, 블록체인 회사의 자본 등 연관 산업에 투자하고 자문하는 크립토 헤지펀드 회사입니다. 외부 LP 없이 파트너 자금만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현재 10명이 재직 중입니다. 올해부터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주류금융의 자본을 받기 위한 LP Fundraising 을 계획하고 있고, 이에 맞추어 뉴욕과 케이먼 군도에 펀드 및 투자사 법인 설립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저는 2012년부터 여러 IT 스타트업에 엔젤투자를 하고, 주식, 매크로 투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정 대표 (현 코인힐스 CEO)와 비트코인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고, 뜻이 맞아 함께 코인힐스를 창업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Mining을 병행하며 코인힐스를 계속해서 운영해 왔고, 평소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따로 독립하여 2018년 1월에 블록워터 캐피탈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대로 법제화된 크립토펀드는 북미를 제외하곤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아시아 크립토펀드는 일반 법인 설립 후 월렛만으로 거래를 하는 초기 단계입니다. 자신들이 펀드라고 하지만, 사실 펀드가 아닌 일반 법인 혹은 벤처캐피털에 불과합니다. 북미에서 규제가 점차 구체화 되고 있고, 크립토 산업 기반도 빠르게 정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빠르면 올해부터 막대한 주류금융의 자본이 크립토 산업으로 흘러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자본을 유치하려면 완전히 합법화되어야만 자금을 수탁받을 수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다가오는 큰 물결에 대비해 기존 금융 산업의 규제에 따르는 회사 경영과 전략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계로는 최초로 현재 케이먼에 펀드 및 자산운용사 셋업이 완료되었고, 미국에도 마찬가지로 법인 셋업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IT 스타트업 엔젤투자, 주식, 매크로 투자, 마이닝, 이제는 크립토 헤지펀드까지 여러 금융 분야에 종사하셨는데 그 중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금융업에 종사하는 게 아닌 일개 개인 투자자로서 그동안 해왔던 거라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워낙 투자 쪽이 적성에 잘 맞아 그쪽 분야를 공부를 혼자 해왔고,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IT 스타트업 엔젤투자는 아쉽게도 성공해 본 적이 아직 없습니다. 이미 파산한 때도 있고, 아직 진행 중인 회사도 있습니다. 금융 투자로 다행히 좋은 레코드를 거두게 되었고, 그 부분이 크립토 투자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라고 하면, 업계에 워낙 초창기에 진입했다가 보니 이더리움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비탈릭 부테린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천재 소년에 관한 관심이 많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이더리움을 극초기에 투자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평단 1불대에 사서 3불대에 매도하고, 많은 수익을 냈다고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가격은 아시다시피 250불 근처이고, 한때 1300불도 넘었었죠. '동네변호사'로서,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정당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변환봉 변호사는 오늘도 '내가 노력한 만큼 내 꿈이 이루어 지는 그날'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가 변호사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지금껏 걸어온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 합니다.
안녕하세요, ‘동네 변호사’ 변환봉입니다. 주민들이 문턱 없이 쉽게 찾아와 주고 계시죠. 예전에는 금융, 회사 사건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동네 변호사로 온갖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 드리고 있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다 사회생활로 점차 보폭을 넓혀간 이력이 보이십니다. 원래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요? 어려서부터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왜 우리 주변에는 고통과 슬픔, 부조리가 많은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할 일이라고 깨달았고, 잘못된 일들을 하나하나 바로 잡아가면서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심이 커졌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