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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AVEC G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밀도 높은 대화, 그 안에 깃든 묵직한 삶의 철학"

[인간 서사의 결정체:
AVEC G 오리지널 컬렉션]


Experience in-depth conversations &
profound philosophies curated exclusively by Avec G


[The Essence of Human Narratives:
AVEC G Original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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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가/한복디자이너 <이서윤>

13/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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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을 사랑해서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복과 한국무용을 위해 달려온 '한국무용가 한복디자이너' 이서윤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의 '전수'와 '계승'의 필요성 그리고 '지적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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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복디자이너 이서윤입니다.
한국무용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한국무용가 한복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일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어떻게 호칭하시든,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

 
예체능 전공 특정상 진로를 어린 시절부터 정하게 됩니다.
부산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하셨는데 한국무용을 졸업하셨습니다. 언제 처음 '한국무용'에 입문하게 되셨나요?
 

저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동네에 당산나무 밑 굿 보는걸 하염없이 좋아했던 아이였습니다. 길 가다가 노랫소리에 이끌려 뜬금없이 ‘가야금병창을 하겠다’라고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요.
그러다 원장선생님의 권유로, 춤추는 남자(한국무용은 더더욱)가 없던 시절, 한량무(선비춤)를 배우게 되면서 무용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매일 걸어도, 밥을 먹어도, 무엇을 해도, 온통 생각은 춤에 빠져있는, 말 그대로, 춤에 ‘미쳐서 사는’ 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공부해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라’라는 부모님의 반대로 잠시 춤을 그만둔 적이 있었지만, 매일매일 춤을 못 춰서 병나는 아들을 지켜보시던 부모님이 결국 포기하시고, 허락하신 것이 전공자로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전통무용과 한국음악을 정말 좋아했기에, 예술고 주최 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고, 부상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하는 혜택을 받고, 한국무용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춤추면 손가락질받던 시절이라, 늘 놀림감이 됐던 기억은 중년이 된 지금도,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열정을 가지고 좋아했던 저의 일부분이었는데, 모두가 이해 못 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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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제진흥원 원장 <박기식>

4/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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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에서의 '신화는 없다'는 존재한다! 국영 무역진흥기관으로서, 현재 전세계 약 130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국내 가장 국제화된 조직,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지 27년 만에 상임이사로, 단 다섯 명 뿐인 임원 자리까지 승진한 인물!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것은 '자신감'이었다는, 부산경제진흥원 박기식 원장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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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 4대 부산경제 진흥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인 박기식입니다.

작년 10월, 현 직책에 부임하기까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약 30년을 근무한 것이 오늘날 저를 있게 한 가장 큰 경력입니다.

그 이후, 저는 작년 현직에 도전하여 최종 선택을 받기 전까지는 상장 대기업인 ‘한미약품’(6개월), ‘도화엔지니어링’(4년) 경력을 비롯한 중견기업 ‘평화엔지니어링’(1년) 에서 해외 담당 부사장과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GSM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직접 창업해서 1년간 영세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해외시장 개척 활동을 직접 전개한 바도 있습니다.

그 외, 전략기술 경영연구원(STEMI), 무역투자연구소 등 민간 연구원에서 부원장 혹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미얀마 무역진흥기관 설립 자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항공기부품 투자 유망 기업 조사 등 컨설팅 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KOTRA 출신 임원들로 구성된 글로벌 비즈니스 리서치 센타 (GBRC)라는 산업부 산하 연구법인 (사단)의 등기임원으로 참여하여, 외국의 방한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한 강의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KOTRA에 입사 전, 학창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경남 양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의 부모님은 농부이셨습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9년간을 전교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 면에서는 우수했습니다만, 고교평준화 이전, 당시 부산 명문인 부산고교에 낙방하면서 인생 최초의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재수의 길도 없이, 동아고교로 진학했습니다. 일류고는 아니지만, 부산고, 경남고 낙방생들이 많이 진학하던 이류고 중에서는 이름이 있던 학교였는데, 거기에서 저는 입학 당시만 해도 전교생 600명 중 약 120명이 포함된 특별반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 끝에, 특별반에 진학할 수 있었고, 1학년 수료 시에는 전체 607명 중 5등의 우수한 성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에 힘입어, 저는 2학년 및 3학년 때에도 우수한 성적을 지속할 수 있었고 특히 졸업하던 해에는 서울대 반이라 할 수 있는 3학년 특별반에 속했는데, 졸업 시에는 최우수 졸업생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초등 및 중등학교에 이어 고교에서도 저는 교육감 상을 받았으므로 수석 졸업의 연속이었습니다.

전교 수석인 데다, 서울대 특별반 출신이기에, 저는 처음엔 서울대 법과대학 진학을 고려했는데, 그때까지 동아고교에서 서울법대를 진학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혹여나 서울법대에 낙방하게 되면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집안 사정상 그럴 상황도 못 되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백부님 집에 기숙하며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사촌 형이 넌지시 건넨 ‘부산대에 진학해서 행정고시를 준비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저는 국립대이자 부산의 명문인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부산상대에 진학한 이후, 청년기의 방황이 시작되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상아탑의 학문에서 새로운 탐닉을 하는 것보다, 학교 바깥에서 같은 또래이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원했던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부모님의 과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운 것도 크게 한몫했었습니다.

대학교 3년을 마치기까지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철학 서적을 탐닉하는 한편, 저는 학교를 한 달 이상 그만두고 산사에 들어가 저 자신을 되돌아보던 때도 있었고, 여느 청춘과 같이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전투경찰에 입대해서, 2년 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방황기도 끝났습니다. 저는 부산과 울산을 잇는 해안초소에서 군 복무를 하였는데, 제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였기 때문에, 저보다 나이가 어린 상사들도 많았고, 그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분초소 9명의 밥 짓는 일을 혼자 하는 등, 군 생활의 규율에 점차 저를 단련시키면서, 제대 마지막 가까워서는 양산경찰서 경비부서로 옮겨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제대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 평생의 파트너이자,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아내는 친구의 사촌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 중 연애를 하던 저희 부부는, 제가 제대함과 동시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아내는 서울 출신이었기에 직업까지 그만두며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저는 결혼 후,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대학 옆의 신혼방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공부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LG, 현대 중공업 등 대기업 입사시험에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신혼인 데다가,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제가 입사를 선택한 곳은, 민간기업이 아닌, 안전성 높은 공공기업, KOTRA였습니다. 또한, KOTRA의 입사시험에서 수석이었다는 것은 입사 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KOTRA 입사는, 제게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 세계를 누비는 또 다른 도전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도 직장을 다니면서 이루어낸 자기연마의 과정이었다는 점에 있어, 2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 퇴임 때까지,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대상이었습니다.

KOTRA 재직 중, 런던, 동경, 멜버른, 후쿠오카 등, 4개의 해외무역관에서 약 13년간의 해외 생활을 경험하였고, 세계 경제 무대에서의 우리 한국 기업의 수출과 투자유치 등 국익 차원의 진흥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입사 당시, 저는 기획관리실장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입사 25년만인 2006년에 이 꿈을 이루어냈고, 상임이사로 승진하여, KOTRA의 신기능 사업을 주도하는 ‘전략사업 본부장’으로서 본분을 마치고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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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경험과 상상' 대표 <류성>

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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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법학대학을 졸업했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대학로에 입성해, 현재는 극단 '경험과 상상'의 대표로서,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고, 직접 극작을 하며, 연기도 하는, 다재다능한 연극인! 류성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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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을 하는 류성입니다.
 
류성이란 이름은 연극을 하면서 쓰는 필명이자, 예명입니다.
동생이 취미로 사주를 공부했는데, 제가 木의 기운이 너무 강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동생은 처음에는 ‘개명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저는 예명을 선택했습니다.
 
직업을 얘기할 때는, ‘연극을 한다’라고 소개합니다.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극작도 합니다. 때때로, 조명이나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전문적인 건 없고, 다 조금씩 합니다.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그런 제가 좋습니다.
 
현재 ‘경험과 상상’이란 극단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올해로 5년이 되었네요. 처음 극단 일 말고 부업도 종종 했는데, 최근 2년은 오로지 극단 관련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극단이 점차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아빠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중학생, 둘째는 초등학생이에요. 첫째는 어릴 때 제가 많이 돌봐줬는데, 둘째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어느새 아이들이 부쩍 커버렸는데, 속상하더라고요. 점점 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알아서들 하니까.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부 입시를 준비하여, 수많은 유명 배우와 연예계 종사자들을 배출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2년 만에 중퇴하고, 11년 후, 극단 경험과 상상을 창단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해 뭔가 비판적인 생각이 많았나 봐요.
고등학교 시절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법대를 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싶었어요. ‘악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법대에 진학하니, 제가 기대했던 학업과 많이 달랐기에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니까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법조계에 대한 환상도 자꾸 깨져 갔어요.
제가 동경했던 ‘검사’에 대한 꿈이 너무 순진하고 유치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렇다 보니 고통스러운 사법고시 공부에 뛰어들 자신도 없었습니다.
 
대신, 풍물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동적인 타악을 치고 있으면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좋았어요.
게다가 멋진 선배들이 많았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품성도 다른, 소위 ‘운동권’ 선배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개념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어요.
풍물을 하다 보니, 마당극을 할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저는 마당극이 풍물보다 더 좋았습니다.
풍물이나 무용과는 달리, 연극은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극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고, 구체적인 인물이 있고, 그를 대변하는 대사가 있잖아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던 저는, 그런 마당극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한참 연극의 매력에 빠져있다가, 입대하게 되었는데,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대부분 연극에 관한 책들이었어요. 책마다 손때가 탈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연극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 후, ‘앞으로 연극을 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니, 부모님은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도 너무 죄송하지만, 당시엔 매일 부모님과 싸웠고, 부모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꼭 해야겠더라고요.
대신, 일단 법대를 졸업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시생으로 신분으로 돌아가서 준비 기간을 거쳐, 연극영화과에 시험을 봤습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지만, 얼마 다니진 못했어요. 학교에 다니며 배우는 것도 좋지만, 연극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며 배우는 것이 더 좋았거든요. 몸도, 마음도, 뜨거웠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나중엔 아예 등록하지 않았고, 결국 미등록으로 제적되었어요.
아쉽게도 같은 과 사람들과 맺은 인연이 없습니다. 그때는 ‘그게 맞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후회가 됐어요.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거든요. 그러나, 그때는 결혼도 했고, 첫째도 태어났어요.
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시험 전날, 첫째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어요. 시험 내내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시험 도중 퇴실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젠 정말 되돌릴 수 없는구나’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후부터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학로 외, 여기저기를 다니며 ‘떠돌이’처럼 연극을 했어요. 실로, 대부분의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작품하면서 만나고, 끝나면 또 헤어지고. 다시, 다른 작품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러면서 오래 알고 지내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이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 사는 얘기도 하고, 회포도 풀고. 그 모임이 ‘경험과 상상 파티’였어요.
‘서로의 경험도 나누고, 뭔가 상상도 해보자’ 이런 뜻이죠. 근데 술도 여러 번 먹으면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가끔 세미나도 하고 연기 워크샵, 극작 워크샵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것도 여러 번 하면 지겨워지거든요.
그러다가 ‘차라리 우리끼리 공연을 해보자’라는 의견을 내게 되었어요. 다들 인지도가 높은 연기자들이 아니니까, ‘우리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라는 취지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편, 세 편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식 극단을 만들자’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땐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제가 겁이 났어요.

처음 술 마시는 모임을 제가 만들었으니까,
제가 대표를 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몰아져 갔는데, 대표라는 일을 잘할 자신도 없고, 맡으면 뭐가 고생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싫다고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과 기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떠밀려’ 저는 극단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극단의 대표가 된 것은 ‘장남 콤플렉스’와 같은 것과도 관련되는 것 같아요.
동생이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어릴 때부터, ‘첫째 노릇을 잘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강박을 가지고 자라왔지요.
‘공부도 잘해야 하고’, ‘나이보다 어른스러워야 하는’, 그런 강박에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별달리 사고를 친 적도 없어요.
누군가 저한테 어떤 부탁이나 기대를 하면, 그것에 대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거절은 잘 못 했습니다.
일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잘 해내야 한다’라는 자신의 압박이 심한 것 같아요.
​이런 제 모습에 대해, 저는 잘 몰랐는데, 오래 지내본 동료들은 다들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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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산재 분야 변호사 <손익찬>

30/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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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노동'이야 말로 어쩌면 가장 정직하지 않을까? '노력한 만큼' 그리고 '그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 그리고 노동장에서의 '산재'란 가장 '공정'해야 한다.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것'. 이 간단한 이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찾을 수 없는 쟁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쟁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과 '산재' 분야의 변호사인 손익찬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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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노동자의 권리와 건강을 지키는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의 손익찬 변호사입니다.
 
‘일과사람’은 노동사건과 노조자문, 그리고 산재 사건을 합니다.
 
이런 사건에서 전혀 회사 측을 대리하지 않고, 오로지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하고 생각한다는 점이 우리 사무실의 강점이자 특징입니다.
 
저는 2013년도에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2016년도까지는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했습니다.
 
후에, 첫 직장으로 경기도청에서 임기제 공무원으로 잠깐 있다가, 2017년 3월부터는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에서 노동사건, 노동조합 자문, 산업재해 사건을 담당했습니다.
 
2019년 2월부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회 회원이면서, 노동자건강권팀의 팀장을 하고 있고,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비상근)으로 위촉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개를 하자면, 2014년, 교회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다섯 살과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습니다.
 
막간을 이용해 홍보하자면 제 아내는 용인 수지에서 ‘언니들 방앗간’이라는 이름으로 떡케이크 가게를 하면서 앙금플라워 케이크, 백일 떡, 돌떡, 답례 떡을 만듭니다.

 
많은 진로 중 왜 '법대' 진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법대 재학 시절, 사법시험이 없어지고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시험 합격 전, 학창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파트 숲속의 신도시에서 자랐고, 큰 고민 없이 살아서, 직업적인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무언가를 하면서 살고 싶긴 한데, 뭐가 하고 싶은 것인지,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살면서 큰 계기가 없었고 롤모델도 딱히 찾기 어려웠다고 말씀드리면 정확하겠습니다.
 
고등학생 때 그런 고민을 저의 친형님한테 털어놓았습니다.
저의 형님이 저보다 두 살이 많고 공부도 잘하셨거든요.
저의 형님께서는 저에게 우선 성적을 잘 얻고 그 좋은 성적으로 대학진학에서의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일리 있는 말씀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성적이 잘 나와놓고 보니까, 대학도 성적에 맞춰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인이 이상이나, 생각이 없으면, 성적이 잘 나와서 학과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도, 주변의 기대대로 선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당시 법조인이 될 생각이 없이 법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대 신입생 때는 외무고시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제2외국어도 전문가 수준이어야 하고, 제3외국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하여야 한다기에, 외무고시는 빨리 포기했습니다. 
 
사실 대학교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딱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 없이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수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고, 책을 깊이 있게 보고, 생각하고, 빠져들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도서관 가서 정말 여러 가지 책을 접했습니다.
법학 서적을 보더라도 수험서를 안 보고, 교수님들이 쓰신 법학 서적도 밑줄 그어가면서 거기에 저 혼자서 교수님 생각도 비판하는 견해도 쓰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면 법대생으로서는 자격 미달로 살았던 셈입니다.
 
동아리나 이념서클, 종교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것도 아니어서,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대신, 저는 도서관에 가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7년, 저는 동문 다 하는 사법고시 공부도 해봤지만 1차 시험에 떨어지고, 바로 봄학기에 복학한 다음에는, 정말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늦게나마 고민했습니다.
 
앞으로 3학기만 다니면 졸업이어서 군대를 가야 했습니다. 제겐 시간이 없어 보였어요.
그때가 2008년이었는데, 한창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 한반도 대운하, 의료민영화 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1년 만에 나라가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에 ‘2MB’나 ‘쥐박이’같이 대통령을 욕하는 댓글만 달아도 경찰서에 불려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 시절 때는 그런 면에서 덜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문재앙’이라고 댓글 달았는데 경찰서 불려간다고 상상해본다면 그때 사회 분위기의 느낌이 오시겠죠.
 
법대생으로서 시국을 바라보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헌법 수업에서,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뽑아놓은 사람’이고, ‘명예직인 국가원수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불과한 국민의 한 사람’인 거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나은 답이 도출되는 거’라고 배웠는데, 모든 게 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살아본 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사는 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2008년, 그 한해,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혼자 외롭게 나갔습니다.
 
경찰들이 집회 나온 시민들을 때리고, ‘닭장차’에 연행하고, 전경들이나, 경찰들은 역시 밤새우면서 고생하고, 시위대는 경찰차 때려 부수고,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결국, 우리는 다 별 볼 일 없는 국민인데, 정치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진 ‘어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뭘 했나?’ 싶은 거죠.
 
저는 그때 대학교 졸업도 앞두고 있고, 남들이 보면 명문대 법과대학 출신으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여길 텐데, ‘나는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도대체 뭘 했나?’ 돌아봤는데, 정말 ‘하나도’ 없는 겁니다.
 
대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시위한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남들 고시 공부할 때, 공부하고 '위닝 일레븐' 할 때, 같이 '위닝 일레븐'하고, 혼자 도서관 가서 책보고 그게 전부인 거에요.
 
그때부턴 ‘누굴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몇 년이 지나면 결국 똑같은 어른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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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티크 대표 <김시현>

28/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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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사랑하고, 때로는 고독하게 혼자서 하는 운동을 즐기는,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동시대의 고민과 불안에 대해 꾸준히 사고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영상 콘텐츠 스타트업 기업인 '노티크' 김시현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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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영상 콘텐츠 신생기업 노티크의 대표 김시현입니다.
글이나 이미지를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 창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있어서 시작하는 일보다 시작하고 무너지는 일이 많지만, 아직 무언갈 시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노티크의 대표로 신생기업 4개월 차입니다. 노티크는 어떤 회사인가요?
 
현재는 1인 법인으로 2명의 팀원과 2명의 영상 제작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4개월 정도 되었고 자본 규모는 2,000만 원입니다.
 
성공한 프로젝트라고 할만한 건 아직 없고 현재 인터뷰 영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알리는 일인데요.
 
가장 가까운 목표는 지식 콘텐츠 미디어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창한 성공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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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두노함 창업자 <전혜찬>

28/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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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의 심각한 공포! 내 피부는 괜찮은 걸까? 수많은 임상경험을 배경으로 환자들의 피부 건강을 생각해, 직접 (주)두노함을 창업하여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피부 개선을 추구하는 전혜찬 원장! 그의 피부과 원장, (주)두노함 창업자로서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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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이의 아빠이고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부모님께 말썽만 부리는 아들인 전혜찬이라고 합니다. 부가적으로 피부과학 연구그룹인 ㈜두노함의 창업자이자 더서울피부과의원의 대표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셨던 부친에 이어 의과대학에 진학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만큼 어릴 적부터 `의사`라는 직종에 대해 괴리감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도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나요?
 
어릴 때 꿈은 의사긴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의사를, 아버지를 전혀 이해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 나이 마흔에 태어난 늦둥이로, 아버지와 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소아·청소년과 개원의로 30년 넘게 일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진료 보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저를 데리고 산에 자주 오르셨습니다.
그때는 따라가기 싫다고 투정만 부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운동시키느라 친구분들도 안 만나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 친구분들과 잦은 모임을 가지시는 것을 보면 ‘저렇게 좋아하셨는데 나 때문에 많이 희생하셨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 의사란 직업이 ‘많이 지치고 자기 시간이 적은 직업 중의 하나였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의사로서의 일이 힘들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만연했던 항생제 처방도 최소한으로 하셨고 아무 처방이 필요하지 않으면 그냥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환자에게는 고지식하고 인기가 없어 보였을 수도 있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처방 건당 약 품목 수 평가등급이 계산되어 나왔는데 1등급으로 저도 최소한의 필요한 약만 처방하고 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버지 외에도 누나들도 같은 직업을 갖고 계시고 ‘EBS 명의’에도 출연하시고, 저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라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습니다.
 
공부의 비법은 딱히 없었고 지금도 저의 가장 친한 친구를 학창시절에 만나서 같이 경쟁하면서 공부했던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잘되었을 때 시기, 질투하지 않고 나를 반성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경험을 못 해봤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른 복은 별로 없어도 사람 복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경합 끝에 학생회장이 되어 저항적인 성격의 학생회를 구성했다가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를 전교 회장으로 만들어 주고 학생회를 같이 운영하던 친구들은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합격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 맞은 등이 아직도 얼얼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재수하던 당시 학원에 모의고사를 보러 몇 번 가긴 했지만, 대부분을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한 방에 그게 다 풀리셨으면 했고, 저에게 재수의 의미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마음과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었기에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궁금해하셨는데 아버지는 무던한 반응이셨습니다.
아버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위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올라와 고생을 많이 하셨던 터라 도리어 아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턴을 마치고 전공 선택에 있어 고민이 많았습니다.
인턴 동안 흉부외과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마지막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과 성격과 진로가 확연하게 다른 두 과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대학 시절 비슷한 고민을 하며 같이 사람을 살리자고 다짐했던 친한 친구가 삼성병원 피부과로 간 것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뜨던 시기이기도 했고, 일단 정점에 올라보고 싶은 생각에 저도 피부과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입국을 하고 나서 사람을 살리는 ‘메이저과’의 의식을 가지고 삶의 질을 다루는 ‘마이너과’를 가게 되어 교수님께 정신 교육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디테일에 집중을 해야 하고 환자의 입장이 되어 하나하나 불편하지 않을까를 살펴야 하는 의식이 없이는 삶의 질을 다루는 과는 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소위 ‘마이너과’ 의사가 되었지만, 가슴 속에 큰 열정을 가진 저랑 비슷한 몇몇 전공의 선생님들과 새벽까지 의국에 남아서 연구하고 논문도 쓰고 서로 의지하면서 4년을 보냈습니다.

​근무시간 제한이 있는 요즘엔 불가능하겠지만, 그때는 자취방보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선후배가 있던 의국에 있을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부과 전공의 동안 다양한 연구에 참여하였고, 당시의 경험이 현재 진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에 저는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서울대를 가지 않았어도, 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피부과를 가지 않았어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그 삶에 적응하고, 행복하려고 끝없이 노력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꼼꼼하고 섬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기에 지금의 피부과 의원 개원은 잘 맞는 것 같긴 합니다.

아직 개원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저를 믿고 꾸준히 따라와 주시는 환자분들이 꽤 되시고, 그분들이 저로 인해, 저의 치료로 인해 함께 삶의 질이 높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제겐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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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PD수첩> 부장 PD <박건식>

27/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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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부터 시사, 탐사보도를 맡고 있는 MBC 장수 프로그램인 <PD수첩> 그리고 그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취재를 수십 년간 해온 그는 말한다. '해야 할 일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시사, 탐사 프로그램 <PD수첩>의 부장, 박건식 PD와의 인터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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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MBC PD수첩 부장을 맡고 있는 박건식 PD입니다.
또한, PD들의 모임인 한국PD연합회장과 PD들을 교육하는 한국PD교육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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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국문학을 졸업하셨습니다. 관련 학과가 아닌 만큼 다른 진로도 생각해보셨을 법도 한데 어떻게 방송 분야의 진로를 택하셨나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저의 희망대학 1순위 진로는 국문학과였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국어’ 과목 점수가 잘 나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국문과에 입학한 뒤에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소설이나 시 등의 문예 창작을 준비해왔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론 분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고 싶었습니다.
 
국문학으로 대학을 진학한 시절, 전공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국어학, 고전문학, 한문학이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과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오던 언론사에 입사하는 두 가지 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언론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공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학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1987년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강의실 안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 저는,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정보가 너무나 없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군대 제대 후, 1년간 구소련 우즈베키스탄으로 타슈켄트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다가 귀국해, 언론사 입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다가, 1991년 MBC의 시사교양 PD의 공채 시험을 봤습니다.
 
당시는 시험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신문만 열심히 보면 합격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첫 시험에 쓴잔을 마셨습니다.

1992년 다시 MBC PD를 지망했지만, 그해에는 아예 PD 분야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습니다.
 1993년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 해에는 시험도 보지 못하고 서류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계속되는 입사 시험의 낙방으로 지쳤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동아일보에도 응시했는데, 최종심사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해 세계일보 시험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고,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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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니스트 <이석준>

25/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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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연주가로서는, 연주를 들으러 오는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최고의 목표로, 호른 지도자로서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최고로 여긴다는, 호르니스트 이석준 교수. 지난 35여 년간 다사다난했던, 하지만 '호른'과 함께였기에 든든하고, 행복했던, 이석준 교수의 '호른 인생'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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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호른 연주가 이석준입니다.

 
초등학교 때, 호른을 시작하셨습니다. 음악 배경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의 금관 악기를 책에서만 보는 나이인데 어떻게 입문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의 사립초등학교인 영훈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특별활동으로 관악부가 있었습니다.
 
아침 조회 시간에 형, 누나들이 예쁜 단복을 입고 연주하는 게 근사해 보였는데 3학년 때 단원 모집을 하더라고요. 지원했는데 처음에 트럼펫을 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코치 선생님께서 저한테는 ‘유포니움’이라는 악기가 어울릴 거 같다고 권유하셔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포니움’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월간음악’이라는 잡지사에서 하는 콩쿨에 유포니움을 들고 나갔는데 1등을 했습니다.
그때 심사위원 중에 한 분이 故 신홍균 선생님(당시 KBS교향악단 수석)이셨는데 ‘악기 부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음악 전공을 하고 싶다면 유포니움은 클래식에 잘 쓰이지 않는 악기니, 호른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악기 시작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집안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립초등학교에 진학하여, 친척 어르신들의 반대도 많았었는데, 더욱이 음악을 한다니 난리가 났었습니다.
 
특히 아버님은 과거, 운동하셨었는데,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 운동선수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음악에 대한 열망이 깊었던 저와 제 어머님의 뜻을 꺾지 못했고, 저 또한 호른이라는 악기가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와 무조건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중고 악기가 아주 싼 값에 나와 시작 할 수 있게 되었고, 신홍균 선생님께서 저의 집안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중학교 2학년부터는 레슨비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웠어서,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음악을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호른이란 악기는 기네스북에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로 등재됐을 만큼, 몹시 어려운 악기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불기에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도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호흡이 짧은 걸 제외하고는 이상하리만치 악기가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또래보다 체격이 좋았던 것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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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 <김재성>

24/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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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과 2017년, 시리즈로 출간된 국내 최초 프레젠테이션 총론서인 '퍼펙트 프리젠테이션'은 현재 수도권 대학들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의 프레젠테이션의 대표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저자가 평범한, 그러나 결코 '그저 평범하지 만은 않은' 회사원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 김재성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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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김재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직업으로 먼저 소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현재 광고 회사에서 디지털 미디어 전략 업무를 맡고 있고요
경영 컨설턴트 출신이자, 사업가를 거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입니다.
또한, 자기 계발서 `행동의 완결`이라는 책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프레젠테이션 전문가로서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니 해당 주제에 대해서 간단히 더 소개를 드리면, 2012년, 프레젠테이션 총론서인 `퍼펙트 프리젠테이션`(부제: 기획에서 디자인, 발표까지 경영 컨설턴트의 프리젠테이션 비법)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2017년에는, 이 책을 개정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즌 2(부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에 매직을 담다)라는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독자와의 접점을 더 넓히고 국내 프레젠테이션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2018년, 삼성 멀티 캠퍼스와 협업하여 VR을 활용한 프레젠테이션 온라인 과정인,
`기획에서 리허설까지 3일만에 끝내는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떻게 처음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확히는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 `리더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스피치`가 생각났습니다.
 
위대한 일이 일어나는 데 있어 감동적인 스피치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연설이 그랬고, 시대를 사로잡았던 오바마의 연설이 그랬듯이요.
다만 단순히 `스피치`라는 관점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추세와 접목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위 말해, 스피치가 현재에는 어떤 식으로 `힙하게` 활용되는지를 생각해 본 것이죠.
그러다 보니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활동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학교에 프레젠테이션 연구회 CISL(Club for Improving Social skills and leadership)을 만들게 된 것은 2007년인데, 지금이야 많은 분들이 프레젠테이션의 고수가 되었지만, 당시 `웰메이드` 프레젠테이션은 막 뜨고 있는 분야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발표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분야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현재 이뤄지고 있는 프레젠테이션 기본 골격은 2007~2008년경 태동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방식의 프레젠테이션은 저에게도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피치에 + 슬라이드를 결합하여 새롭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활동으로 당시에 뜨거웠던 프레젠테이션을 택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CISL에는 ‘Leadership’이라는 약어가 있지만, ‘Presentation’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프레젠테이션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타인의 앞에서 발표하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려서는 웅변대회에 열심히 나갔고, 나이가 들고서는 가수가 되고 싶어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른 경험도 많았거든요. 연구회를 만들고 함께 활동하는 분들에게 참 많이 배우며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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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정충구>

23/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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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도 부터,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소신대로 연극 무대를 지켜오며, 언젠가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웃고, 울고, 연기로 관객을 치유하고, 자신도 치유 받는 그 날을 꿈꾼다'는 배우 정충구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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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평생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은 정충구입니다. 

저는 항상 대본을 만났을 때, 역할을 만났을 때, 이런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안 보이는 데까지 보라. 보여 줄 땐 최선을 다해 보여줘라.’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아직도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연극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마음을, 평생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는 말씀들을 연기하면 할수록 더더욱 느끼는 부족한 배우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저 자신에게 욕하고, 마음속으로 ‘멍청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래도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대본을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새로운 것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사인 ‘연기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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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2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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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간의 경찰, 그리고 24년 간의 과학수사요원과 프로파일러로서 1천 5백 여건이 넘는 현장을 다니고, 1천 명에 이르는 범죄자들을 분석했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서 그는 우리나라 프로파일링계의 산증인이고, 걸어다니는 역사다. 현재는 현역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는 권일용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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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권일용입니다.
 
저는 만 28년간 경찰 CSI와 프로파일러로 근무하고 지난 2017년 퇴직하였습니다.
현재는 ㈜융합사회안전연구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광운대학교 범죄학과 대학원 겸임교수입니다.
인터뷰를 통해 소중한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마 정말 많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으셨고, 독자들 역시 궁금해하실 것 같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명예퇴직을 결정하셨습니다.
 
1989년 8월, 경찰학교를 졸업하면서 경찰관으로 임명된 이후, 2017년 4월, 퇴직할 때까지 강력수사,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면 과학수사요원(CSI)과 범죄분석요원(프로파일러)로 근무한 기간이 만 24년입니다.
 
1993년 7월부터 과학수사요원(CSI)으로 시작하여, 2000년 2월 한국경찰 최초로 프로파일링 팀이 만들어지면서 그 팀에 유일하게 혼자 발령이 난 이후 퇴직 시까지 약 1,500건 정도의 사건 현장과 1,000명에 이르는 범죄자들을 분석하였습니다.
뜨겁고 치열한 범죄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과학수사 대상을 받았고, 2016년에는 한국에서 발생한 여러 연쇄살인범 검거와 강력사건 프로파일링을 한 유공으로 영예로운 국민훈장 옥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습니다.
 
2017년 어느 봄날, 정년퇴직이 몇 년 남은 저는 스스로 퇴직을 결심하였습니다.
충분히 소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였고 문득 앞으로의 삶에서는 나만의 모습으로 한 번은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프로파일러는 때때로 범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의 머릿속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 범죄자 화(化)’ 되어야 그들을 분석하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만나서 분석을 한 범죄자가 거의 1,000명입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범죄자들과의 삶에서 벗어나 내 생각과 내 의지로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많은 사람과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물론, 범죄와 범죄자들 속에서 살아온 지난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소임을 다했고 제복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퇴직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자 조직 내에서 많은 분이 만류하였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제복을 입은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주어진 소임을 다 하는 것이 국민과 한 약속이겠지만 스트레스가 심해져 어금니가 빠지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후배들에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저는 후배들을 믿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하게 국민을 위해 주어진 자신의 소임을 다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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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메디스태프 대표 <기동훈>

21/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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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환자들의 더 나은 복지와 정책을 위해 SNS를 통해 정부와 의사협회의 기울린 의정에 쓴소리를 마다치 않는 의사! 그리고 어떤 것보다 대표로 있는 회사를 통해 '젊은 의사들에게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여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기동훈 교수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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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메디스태프 대표이자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진료교수로 재직 중인 기동훈입니다.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피부과의 전공의 과정을 시작한 지 3달 만에 그만두고, 이듬해 응급의학과로 전공을 바꾸어,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응급의학과로 진로를 택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인턴을 하면서 응급의학과에서 두달 동안 일하면서 재밌고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과 지원에 있어서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했기에 고민 끝에 피부과에 지원했습니다.

피부과는 아름다움과 질병을 같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과였지만 일을 할수록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 내 분위기도 잘 맞지 않아서 결국 3개월 후 그만두게 되었고 같이 시작했던 동기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피부과 전공의를 그만두고는 모 대학병원 안과에서 전공의결원이 생겨 두 달간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응급의학과 지원을 마음속으로 결정한 상태였지만 안과적 응급질환을 배우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즐겁게 일했습니다.

응급의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응급실로 내원하는 급성기 질환 환자들에게 빠른 판단과 처치를 통해 호전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정신없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와 경증환자를 구별하고 중환자 처치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피부과를 그만두고 응급의학과에 지원하기로 했을 때 친구들 가족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말렸지만, 응급의학과를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슬퍼하셨던 것이 제게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편한 길을 마다하고 힘든 길을 선택하는 자식을 보며 들게 된,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응급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주취자에게 폭행을 당한 적도 있고 무례한 보호자들에게 불편한 일을 겪을 때 가끔 '응급의학과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진단, 처치로 환자들이 호전되고 환자나 보호자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할 때 역시 '응급의학과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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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브랜뉴테크 대표 <박승배>

21/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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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처의 프로젝트 디자인, 대기업 디자인 등을 비롯한 작품 활동 외 대학의 교수로서 국내의 손꼽히는 시각디자이너로 활발히 활동하는 박승배 교수는, 2년 전부터, 인공지능디자인 회사인 '브랜드뉴테크'를 창업하여 '디자인 소외계층이 없는 세상'을 목표로 오늘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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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프로그램 부교수 박승배 입니다.
2017년 9월, 인공지능 디자인회사인 ‘브랜뉴테크’를 창업하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지, 디자인계에 입문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뜻대로 의대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때는 이과생이었지만, 재수할 때, 진로를 미술로 바꾸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친누나의 권유는 제가 
미술로 진로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디자인분야 자체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순수미술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요.

디자인분야를 알게 된후부터는 예술적 작품보다는 구성원들과 함께 커뮤니케이션하며 디자인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컸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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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는 미술이지만 대학 학사와 석사, 박사를 모두 다른 전공으로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학부에서는 시각디자인을, 한국에서 석사는 광고디자인, 미국에서는 뉴미디어, 그리고 박사는 영상학으로 받았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전혀 다른 분야는 아닙니다.
시각디자인은 디자인 분류에서 가장 큰 카테고리중의 하나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안에 광고, 타이포, 편집, 일러스트레이션, 디지털미디어, 영상등 시각적인 디자인을 총칭하는것인데요.
 
제일기획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하며 야간 대학원을 다니면서 석사과정을 수학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광고디자인을 전공 했습니다.
 
대학원 시절, 한참 ‘닷컴붐’이 일어날때였고, 교수님의 권유로 영국의 박사과정과 미국의 석사과정의 유학을 두고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의 디자인 박사과정이 거의 없었던 때였기에, 졸업후 실무를 경험해보고자 미국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뉴미디어를 전공하였고, 광고도 그 시절부터는 디지털과의 결합이 많아지는 시기여서 자연스레 뉴미디어와 광고를 함께 다루는 것이 저의 토픽이었습니다.
 
박사과정에서도 영상학과였고, 저의 연구주제는 영상과, 뉴미디어, 광고 이런 키워드 속에서 혁신적인 광고였습니다.
 
논문 다음으로 출판한 도서도 ‘이노베이티브 광고’였습니다.
 
어떤 학문을 다루는데에 학부에서는 개괄적인 것을, 석사에서는 더 심층적인 것을, 박사에서는 아주 세부적인 것을 주제로 삼는 것이 주로인것처럼, 저도 그렇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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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일강>

19/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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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고 공연을 본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고 자리를 뜨며 한마디씩 하거나, 바로 검색을 해본다. '그 배우 대체 누구야? 연기도 잘하면서, 춤도 잘추던...' 바로,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멀티남'으로 1인 8역을 소화하고 있는 대학로의 대세배우! 김일강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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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 김일강입니다.
현재 대학로에서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연극 ‘오마이갓’이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서고 있으면서,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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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는지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B-boying을 했습니다.
 
춤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걸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대회도 나가면서 춤을 추고 다녔는데, 문득 미래에 대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뭘 하지?’라는 생각하던 중, 어머니의 권유로 드라마 작가분을 통해 ‘김지수 연기아카데미’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던 중, 어떤 학생이 ‘선생님~’하면서 수업을 하러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배우 권상우 선배님이었습니다. 그걸 보고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이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면서 배우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 연기학원 다니면서 만난 인연들 중, 지금은 대성한 연기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표적으로 구혜선 누나랑 (유)아인이랑은 같은 시기에 연기공부를 했던 동료입니다.

처음에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연기야?’라는 말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정말 친한 친구들은 저를 지지해 줬고 심지어 미리 자랑까지 해줬어요.
‘나중에 큰 배우가 될 거라고’ 그리고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던 건 가족이에요.
 
한번은 배우를 하면서 ‘진로를 바꿔볼 생각이 없냐’라는 권유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지지하고 응원해 주고 있어요.
 
당시 연기학원은 입시 전문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대학 입시반’이 생겨났고, 그때, 입시를 위해 관련 학과가 있는 많은 대학교를 알아봤습니다.
 
대학교를 알아보다가 명지대학교 문화 예술학부 공연예술전공 학과가 생긴다는 정보를 듣고 지원하게 됐었습니다. 교수님이 송승환 교수님과 이태원 교수님이란 소식만 듣고 지원을 했었어요.
 
다른 대학의 경우, 즉흥연기, 자유연기, 지정연기, 장면연기(지정된 희곡 중 한 장면을 실연), 특기 등 여러 가지가 입시 요강에 포함되어 있는데 명지대는 처음 생긴 신생학과다 보니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이 그저 ‘면접’이라는 두 글자만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실기시험을 위해 말 그대로 ‘모든 걸’ 준비했었습니다.
실기시험을 치르러 학교에 가니 송승환 교수님과 이태원 교수님 외에 몇몇 분이 앉아계셨고 정말 ‘모든 걸’ 다 시키셨어요.
 
지정연기, 자유연기, 노래, 춤을 다 하고 나왔는데 뭔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합격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나중에 합격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온다’라는 걸 몸소 배운 귀한 기회였습니다.
 
‘연극영화과’인 줄 알고 입학을 했는데, 학기 중간에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그 사이에 ‘뮤지컬공연’으로 과 자체가 이름을 바뀌었더라고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뮤지컬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명지대 뮤지컬공연 전공 1기로, 제 동기는 가수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그리고 역시 동방신기의 전 멤버이자 현재 JYJ 멤버인 김준수, 가수 슈퍼쥬니어의 동해, 그리고 1년 후배는 배우 김지철, 5기 후배는 가수 씨스타 보라까지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일면식은 없지만, 배우 박보검 역시 8기로 후배입니다. 자랑스럽게도 모교는 전도 유망한 연예인의 등용문이 되어가고 있으며, 지원 경쟁률은 매년 올라가는 추세입니다.
 
배우의 진로를 택한 미련은 늘 하게 됩니다.
 
힘들 때마다.
작품이 없을 때마다.
오디션이 떨어질 때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같습니다.
직장인들도 힘들 때 ‘하~! 퇴사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한 번쯤 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는 다르죠.
공연하면서 사람들의 박수나 웃음소리를 보고 있으면, 또 ‘이 맛에 배우 하는 거지’라는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미련은 싹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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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음악 작곡가 <장석진>

17/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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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된 지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된 비디오게임, '배틀그라운드 PUBG:비켄디'의 메인타이틀 음악! 듣기만 해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며 게임의 전조를 알리는 이 음악의 작곡가! 학부에서는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클래식과 국악, 영화음악,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방면에서 작곡가로 활약 중인 장석진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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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장석진입니다.
작곡가로서는 순수예술에서 대중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전통예술원에 작곡과에 출강 중이며 장신대, 가천대 작곡과 겸임교수 재직 중입니다.

 
작곡을 시작한 계기, 그리고 작곡가로서 발표한 가장 첫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클래식을 좋아하셨고, 부모님께서 두 분 모두 기타를 반주로 팝송을 부르시거나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저 역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저는 혼자 공상하는 시간이 아주 많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하는 건 많이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알려지긴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별로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늘 뭔가 끄적이거나 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무렵, 교회에 다니면서, 기타 연주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고, 화음의 기초적인 개념을 기타를 통해 알게 되어, 그 개념을 가지고 피아노를 독학으로 치기 시작했었습니다. 물론, 대학 입시 등을 위해, 피아노와 작곡 개인지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만에 쇼팽 에튀드를 입시 곡으로 아주 잘 연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내내 한 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6시간씩 연습했었으니까요.
 
이외에도 입시와는 상관없는 현대음악(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등 다양한 음악들을 열심히 듣고, 전자기타도 치고 여러 종류의 곡들도 써보곤 했습니다. 하루가 모자랐지요.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기보다는 그냥 음악에 빨려들어 갔던 것 같습니다.
이걸 해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안에 어떤 울림이 있는데 그걸 적고 싶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 말고는 당시에 저를 믿어 준 사람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작곡을 전공하겠다는 것에 대해, 다들 ‘뭐래?’하는 반응 같은 것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작곡을 공부한다는 건, ‘영혼과 마음속에 소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제대로 적어내는 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확히 적어내어야 그게 연주자들에게 전달되고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 될지를 깨닫는 과정. 물론, 그 이전에 자신 안에 그러한 의미 있는 소리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느끼고 있다면 말입니다.
 
저의 첫 작곡 선생님은, 서울대 작곡과 출신 작곡가로, 저의 입시를 맡아 가르쳐 주신 전순희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무렵의 학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일찍부터 작곡 관련 이론들을 배우는 친구들이 많았고, 저처럼 늦게 피아노를 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를 받아주셔서, 작곡과 화성학 그리고 나중에는 피아노까지 직접 지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선생님께선 저처럼 열심히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음악을 배우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고, 음악을 배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놀이였는데 말입니다.
 
처음 노래를 썼던 건 중학교 1학년이었고, 처음 기악곡을 작곡해서 연주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곡이었습니다.
 
그때쯤, ‘내 안에 있는 소리를 잘 적을 수 있을 거라’는 정도의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는 저 같은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꽤 괜찮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러나 16살 소년의 영혼으로 쓰인 엉성함이 묻어있는 곡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곡을 잘 쓰고 잘 연주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누가 와서 좋다고 해주면 기뻐하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네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에 가게 되었고 현대음악 작업과 영국 TV와 독립영화 그리고 무용음악 작품들을 위주로 작업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일을 해오다가, 2012년에는 여수 엑스포의 음악 감독 겸 작곡가, 오케스트레이터로 참여하였고, 이때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께서 주제곡을 부르셨는데, 마침 조수미 선생님 측 에이전시에서 데모를 들어보시고 음악이 좋다고 함께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 할 것을 제의하셨습니다. 그게 저의 첫 오케스트라 녹음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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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지음발전소 이사장 <한준호>

17/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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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가 애널리스트에서 공중파 방송국 아나운서, 그 다음은 청와대, 이젠 새로지음발전소에서 현 세대의 청년들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한준호 이사장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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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한준호입니다.
저는 오랜 노동조합 활동으로 방송 활동은 많이 하지 못했고, 2018년 MBC 문화방송국을 퇴사한 후에,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올해 초부터 새로지음발전소를 창립하면서,
그간 관심 가지고 있던 콘텐츠 중심의 도시 재생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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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이사장으로 있는 새로지음발전소의 역할에 대해 '상업적인 재건을 할 때 발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하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끼’ 넘치는 청년들이 마음껏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의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었습니다. 현재의 새로지음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정확하게는 도시 재생을 통해 청년들의 일자리와 원도심(구도심)의 환경 개선을 통해 생활의 질을 바꾸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 재생이라고 하면 재건축사업이냐고 물어보시고는 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재건과 재생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이 재건이고, 있는 것에 다시 생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재생입니다. 이러한 재생을 위해서 저희는 하드웨어적 접근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적 접근을 하고 있는데요. 즉, 콘텐츠를 통한 도시 재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콘텐츠 기반의 도시 재생을 위해서는 넓은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현재 저희와 함께 하는 기업은 유수의 문화 콘텐츠 회사들을 비롯해 중견기업까지 약 80여 개의 회사가 함께 하고 있고, 성남시를 필두로 지자체와의 협력도 넓혀가고 있습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사례로는 성남시의 원도심인 은행동의 공영주차장에 메이커스 페이스 및 인근 학교와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이 지역에는 4개의 대학이 있지만, 정작 학교 간의 교류나 학교를 벗어나 청년들이 자기 꿈을 넓힐만한 창의적 공간이 부족합니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예산을 성남시에 매칭시키고, 성남시가 보유한 공간에 창업 혁신공간을 만들어 이곳에서 교류 및 창업준비를 할 수 있도록 진행할 예정입니다.
 
청년들이 오가고 이곳에서 창업과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면, 자연스레 그 주변에 활기가 돌고, 상권도 조금씩 활성화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새로지음발전소는 20~30대의 청년층들을 향하고 있고, 지자체의 빈 곳을 활용해 이들의 성장을 돕는 일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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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새벽이슬 사무처장 <최준호>

14/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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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들을 사회는 흔히 '사춘기', '질풍노도', '풍운아', '외톨이' 등으로 표현하며 선입견 속에 가둔다. 하지만 그런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청소년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는 최준호 청소년지도사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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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가고 싶은 최준호입니다.
현재 ‘새벽이슬’이라는 청소년 관련 NPO 단체에서 사무처장을 맡는 동시에, 익산시청년희망네트워크 위원장, 전라북도청년정책포럼 복지분과 위원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년위원회 위원 등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다양한 활동 등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스페인 어학/철학 학부를 졸업하시자마자 바로 다시 대학 학부과정을 입학하셨습니다. 사회복지와 청소년학을 전공하셨는데,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전북대학교에서 스페인 중남미 어문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복수전공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저는 수능성적에 맞춰서 학과를 들어간 경우였는데요
그래서 대학 초기에 자퇴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려다 보니 성적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졸업할 때 학점 채우느라 고생 좀 했죠. (웃음) 1학기 휴학을 하면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었고요.

 
하지만, ‘이왕 대학에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 하면서 복수전공을 고민하다가 철학이라는 학문이 너무나 재미있고 제 생각에는 ‘나에게 맞다’라는 확신이 있어서 철학을 복수전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인문학 전공자는 다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제 친구 중에는 스페인어 전공을 살려서 취업한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전공을 살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졸업 학기에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당시 멘토였던 목사님께서 우연한 기회에 ‘익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를 소개해주셨고,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새벽이슬’ 단체와 사무실을 같이 사용했는데요.

자연스럽게 '새벽이슬' 단체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도움도 받기도 하면서 청소년 쪽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자 생각을 하고 다시 사이버대학을 통해서 청소년 관련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이다 보니 일반 대학에서 정해진 강의 시간에 출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대학을 통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요. 덕분에 학자금 대출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웃음) 그리고 올해 겨우 다 갚았습니다.
 
만약 다시 고3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저는 청소년학을 목표로 공부했을 거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에 많은 보람과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뿐 아니라,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하고 일하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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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텔리퀀트 대표 <이종권>

13/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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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투자는 날로 발전하여 과학을 접목한 퀀트는 주목받는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퀀트가 지금처럼 대중화 되기 이전 부터 일찍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해, 직접 회사를 창업하여 지금의 '인텔리퀀트'를 키워온 이종권 대표에게서 '퀀트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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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알고리즘 투자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 스타트업 ‘인텔리퀀트’의 대표인 이종권입니다.

제 원래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였고, 컴퓨터가 흔하지 않았던 1980년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컴퓨터와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
경기과학고를 거쳐 KAIST에서 전자공학으로 학/석/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진로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과학/공학도의 코스를 쭉 밟게 되었지요.
 
제가 금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3년경 미국의 일리노이대학교에 포스트닥터(박사후과정)로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저랑 비슷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월가에서 퀀트라는 이름으로 활약을 한다는 얘기를 거기서 처음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숫자에 대한 감각도 좋았던데다 데이터 분석에 흥미와 소질이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관심이 많이 생겼고, 귀국하여 한국IBM 연구소에서 일하면서도 퀀트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당시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드디어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다양한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투자 운용의 실전 노하우도 익히는 등 IT와 투자가 결합한 분야에서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잠깐의 우여곡절을 거쳐, 인텔리퀀트 창업 전까지 투자자문사에서 퀀트 운용총괄을 하면서 정식으로 금융권에서 펀드매니저 자격으로 고객의 자산관리서비스를 수행하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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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서투자자문의 퀀트 주식 운용총괄을 맡다가 4년 전 직접 퀀트 투자회사인 '인텔리퀀트'(IntelliQuant)를 설립하셨습니다. 회사의 소개를 해주세요.
 
인텔리퀀트는 인텔리전트(Intelligent)와 퀀트(Quant)의 결합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공지능 기술과 퀀트 투자를 접목하여 더욱 고도화된 투자 알고리즘과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를 꿈꾸며 저 포함 5명이 함께 2015년 11월에 창업을 했습니다.
 
창업 초기였던 2016년 3월, 구글의 알파고가 전 세계에 인공지능 쇼크를 안겨다 준 직후에 한국경제TV에서 인공지능 대 인간의 3대3 투자 대결 대회를 3개월간 진행했는데, 저희가 인공지능팀 대표선수 중의 하나로 출전하여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종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해 연말에는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미래인간 AI’ 편에서 다시 한번 투자전문가와의 투자 대결을 통해 퀀트 투자의 특색을 대중에게 자세히 알릴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몇몇 증권사들과 제휴하여 저희가 개발한 투자 알고리즘으로 포트폴리오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웹페이지를 통해서는 ‘인텔리퀀트 스튜디오’라고 하는 DIY 퀀트 투자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양한 투자 알고리즘을 직접 코딩하여 과거 20년간의 국내 증시 데이터로 성과를 검증하고, 완성된 투자 알고리즘은 자신의 실전 투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외국에는 비슷한 서비스들이 몇 개 있지만, 국내에서는 저희가 유일하게 웹 기반으로 퀀트 투자에 최적화되어 코딩 환경까지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최근에는 국내 주식 중심이었던 투자플랫폼을 암호화폐 영역까지 확장하여 서비스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개발된 시스템과 투자 알고리즘으로 실전 투자를 1년 넘게 해 오면서 향후 알고리즘 기반 크립토 헤지펀드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텔리퀀트 스튜디오’처럼 암호화폐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개인들이 마음껏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는 웹 기반 서비스도 공개하기 위해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직원 10명 내외의 작은 신생 창업 기업이지만,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서 벤처투자도 받았고 정부의 창업지원 사업도 수행하면서, 더 큰 도약을 위해 저희가 가진 기술로 투기가 아닌 합리적인 투자를 원하는 모든 사용자를 위한 서비스 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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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보라이즌 대표 <임상빈>

1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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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뿌리치는 대신 세계의 흐름을 읽었다! 제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추어 적절한 시기에 로봇사업을 시작해,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임상빈 박사의 '로봇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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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보라이즌 대표 임상빈입니다.
저는 로봇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교육 분야에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았으며,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로봇 '핑퐁'을 발명하고 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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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는 정밀 공학, 석사와 박사는 기계공학으로 로봇 분야를 전공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전공한 분야와 관련이 없는 교육 분야로 창업하게 되었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원 과정을 다니던 시기에 한국에는 벤처 1세대가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JAVA라는 언어를 국내에서 제대로 공부하고 활용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었기에 많은 벤처 기업들의 인터넷 채팅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사업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KAIST 로봇 '휴보연구소'에서 학위를 위해 연구를 하면서, 지인들과 함께 몇 개의 IT분야 벤처기업을 창업하여 사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미국 MIT 미디어랩의 스크래치를 개발한 연구실을 방문하여 교수님, 연구원들과 미팅도 하고 미국, 캐나다에서 혁신적인 IT 교육을 하는 몇 곳의 학교들의 교육현장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학생들의 표현할 수 없이 밝은 표정,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도 입시와 성적에서 벗어나 저렇게 마음껏 자신의 창의력과 씨름하며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학과 소프트웨어 교육에 뼈를 묻겠다’라는 각오를 하고 귀국하였고, 2008년 캠프사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야코리아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입시와 교과를 벗어난 교육사업회사가 살아남기에 얼마나 척박한지를 잘 알고 있어 각오하고 사업을 시작했고 교육사업 기초를 다지기 위해 10년이 필요하다고 예상했고 10년의 계획을 세우고 창업했습니다만 역시나 초기 2~3년간 기억하기도 싫은 어렵고 외로운 시간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고 사업도 조금씩 열매가 맺어지며 안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 ㈜새로운교육을 설립하여 공학과 소프트웨어 관련 방대한 교육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소프트웨어 코딩교육이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태동하던 시기라 초기 3년간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며 고전하였습니다. 다행히 3년에 걸쳐 콘텐츠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한국에도 공교육에서부터 코딩교육 바람이 불게 되면서 ㈜새로운교육에서 개발한 다양한 코딩교육, 공학교육 교구 재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2,000개(누적) 학교에 우리의 교구가 공급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정보 교과서에도 우리의 교구가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교육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가던 2017년 여름은 저에게 뜻깊은 시절이었습니다.
로봇공학을 전공하였지만, 거리가 있는 교육 분야에서 오랜 시간 보내면서 놓치고 있던 10여 년 동안 늘 고민해 오던 그 로봇을 개발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들고 싶던 그 로봇은 한마디로 ‘그럴싸한 로봇’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스마트토이 로봇, 학교에서 학생들이 소프트웨어 교육시간에 사용하는 코딩교육용 로봇, 동아리/대학생/성인들이 창작활동에 사용하는 Maker 용 로봇이 전체 소형로봇 시장에서 사용되는 많은 로봇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 수백 개의 회사 수백~수천 종류의 로봇들의 동영상을 모두 살펴보면서 소형로봇 시장에 대해 근본적인 2가지 질문(요구)을 던져보았습니다. ‘이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 수 있다면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로봇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쉽고 재미있고 저렴한데 생각할 수 있는 로봇 대부분을 만들 수 있는 로봇 프레임이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은 ‘스마트토이로도 잘 팔리고 학교 코딩교육용으로 잘 팔리는데 대학생/성인까지 멋지게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로봇 플랫폼이 있을까?’였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오랜 시간 연구하며 고민하면서 기존의 로봇회사들과 로봇들의 형태, 걸어왔던 역사, 한계점, 장단점 등 모든 것을 비교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로봇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봇의 본질은 '움직임'이며 '핑퐁'은 가장 쉽고 빠르게 다양하게 확장하여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경쟁력 있는 로봇 플랫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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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인 북한학자 <정국진>

1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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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인이 아닌 정치인이다'. 대체 무슨 뜻일까. 현 정권의 민감한 대북문제에 대해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통한 젊은 북한학자이면서 청년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정국진과 진솔한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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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정국진입니다.
제 한자 이름을 풀어쓰면 ‘참된 나라 일꾼’이 되는데요.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 참된 나라가 되기 위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 청년입니다.

북한학 석사를 전공하고 민주당에서 청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참된 나라’를 위해서는 저 자신이 ‘참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8년 10월, 민주당 전국청년위원장 선거에서도 21%의 득표로 아쉽게 낙선되었습니다. 올해, 2월 민주당 평택갑 지역위원장직에 최연소자로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선했습니다. 일정한 권한이나 직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자신을 '청년 정치인'으로 자처하는 이유가 있나요?
 
정치인은 특권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권층인 정치인은 특권층을 대변하게 됩니다.

정치는 우리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해 그들이 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재산도 배경도 학벌도 높은 직위도 없는 저는, 한국 사회의 30%이지만 정치적으로 소외된 평범한 청년들을 대변하기에 가장 알맞은 청년 정치인입니다.
 
철저한 무명이었던 제가 두 달 만에 당내에서 21%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소외된 평범한 청년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평가받은 덕입니다. 여당이 지방선거를 압승한 이후 한동안 큰 선거가 없던 지난 몇 달간은 당내 개혁을 이루기에 가장 좋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도덕성과 준법정신을 가벼이 여긴 기성 정치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들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매우 높았습니다.
공정성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 덕에 촛불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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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방법이 부족했기에 저는 청년 정치인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많은 청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자부심입니다. 평범한 청년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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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비메디컬 대표&한의사<안상원>

12/6/2019

 
환자의 증상을 마주하다 연구를 통해 자신이 만든 치료제를 개발해 특허를 취득하고, 올해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하여 관절과 근육 통증을 위한 패치를 출시한 (주)비메디컬의 대표이자 한의사인 안상원 박사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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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에 있는 청담인한의원 원장이자, ㈜비메디컬 대표이사 안상원입니다.
 
한의사가 되기까지 학창시절 우여곡절이 많으셨다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모범생 스타일의 저에게 찾아온 크나큰 시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 어느 날부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고, 1주일씩 등교를 못 하면서 잠만 자는 증상이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과도 수면증상이 1달에 주기적으로 1주일씩 발생하여 중학교 3학년 체력장 기간에는 가수면 상태로 학교에서 누워 있던 기억도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들에서도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지 못하던 중 당신 고려대학교 부속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이셨던 의사 선생님에게 “클라인레빈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양약을 계속해서 복용하였으나 병의 원인도 모르는 상태라는 말과 함께 증상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잠에 빠져들어 3년 내내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중학교 때 본다는 잠자는 날이 줄어들어 어렵게 학업을 이어나며 당시 의대 입학 점수와 비슷한 서울 모 사립대 공대에 지망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인생의 첫 실패라고 할까요?
그렇게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준비하던 중 주위 분들의 권유로 1988년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과 지인 중 의사, 한의사가 없었고 인터넷이나 정보를 얻을 매체도 부족하여 4년제라고 생각하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학업을 위해 내려갔다가, 신입생환영회에서 한의과대학도 6년제라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제가 벌써 임상 26년 차 한의사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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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치는 아나운서 <용경빈>

9/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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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수학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알았다. 좋아했기에 의심없이 믿어왔던 '수학'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막연하게 꿈꿔왔었던 아나운서로 진로를 틀었고, 꿈을 이루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방송, 행사, 광고, 드라마, 영화, 강의, 심지어 유튜브 방송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용경빈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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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용경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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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EBS 저녁 뉴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방송MC쇼호스트 전공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15년 차 아나운서가 됐네요.

2011년 tbs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한국아나운서연합회에서 나오면서, 지금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중앙선관위 대선, 총선, 지방선거 방송을 비롯해 의료, 경제 방송프로그램 진행, 정부와 기업 행사, 광고, 드라마/영화, 강의 등 다양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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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는 순수과학인 ‘수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아나운서’의 진로를 걷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중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제가 수학을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적성이 아니라는 걸 대학 입학한 첫 학기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졸업준비는 성실히 하되, 다른 내 꿈을 찾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전공과 연관성 있는 일들 범주에서 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전하고 부딪칠수록 ‘난 계속 어떤 틀 안에 머물러 있는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면접도 번번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답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 스스로 목표를 전공의 범주에 가두지 말고, 이 틀을 벗어나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마음 깊은 곳의 꿈을 좇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날 이후, 막연한 꿈이었던 아나운서를 찾을 수 있었고 도전하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건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였어요. 남들보다 늦은 만큼 더 독하게 덤볐던 것 같습니다. 전공도 무관해서 부족한 게 많았던 만큼, 더 읽고, 더 보고, 더 느끼고, 더 소리 내어 봤습니다. 13년의 성가대 생활이 저의 소리를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고등학교 시절 교지편집부 활동도 사고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아나운서 시험!
정말 무수히 떨어져 봤어요.
지상파 3사는 물론, 지방에 있는 방송사부터 각종 케이블의 작은 자리들까지.
그러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역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쌓여갔죠. 그러면서 든 생각이, ‘이렇게 방송 한 번 해보기가 쉽지 않은 거구나,’였어요.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On Air’ 의 맛을 보고 싶었죠. 스터디로 묵묵히 준비한 1년의 세월이 지날 즈음, 드디어 생방송을 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GS홈쇼핑 건강기능식품 부분의 MD와 PD, 업체 담당자가 면접을 본 결과, 제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죠.
첫 방송 날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잊을 수 없는 신고식을 치렀어요.
 
그 시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진행 노하우, 시청자와의 교감, 순발력. 아무 경력이 없던 저에겐 정말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1년 후, 저는 ‘RTN’이라는 부동산 전문 방송사의 정식 직원으로, ‘아나운서’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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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절권도 수석교련 <노경열>

7/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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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고시 준비 중이라면 한 번쯤은 입사시험을 생각해봤을 신문사 '스포츠조선'과 종편방송국 'MBN'의 기자였던 그는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 기회'를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영원한 학원액션로망, '이소룡'의 절권도를 수련하는 노경열 수석교련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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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뵤~’라는 기합 소리와 쌍절곤 하면 떠오르는 사람, 70년대 액션 스타로 유명했던 이소룡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이소룡이 만든 무술 ‘절권도’를 한국에서 수련하며 지도하고 있는 노경열이라고 합니다.
현재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부총교련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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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작곡가 <김현섭>

6/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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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는 신기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책' 혹은 '음악', '영화' 등 문화와 예술이 그들의 삶에 접목해 있다는 점이다. 김현섭은 청소년기에 다른 것이 아닌 국악에 빠졌고, K-POP 가수 방탄소년단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하는 한류의 정점을 찍은 오늘 날에도 만 스물 여덟인 이 청년은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의 전통 음악'인 국악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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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삶을 통해 악(樂)을 배우는 작곡가 김현섭입니다.

“악(樂)은 삶을 반영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저에게 악(樂)은 악(樂) 만들기는 들리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며, 눈으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귀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의 실체는 지금껏 경험한 일 들이였습니다.

이후 전 악(樂) 만들기 전 가장 먼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살피게 되었고,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경험은 가장 솔직한 악(樂)의 씨앗이 되기도 하며, 나만이 지닐 수 있는 음악적 언어가 됩니다.
​앞으로의 삶을 통해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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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다름 아닌 작곡, 그것도 '국악 작곡'을 진로로 정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앞집 누나(임지영)의 동요 '나비야' 연주를 듣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하였으며, 악보를 찾아 연주하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주하기를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때 서울시 영재로 발탁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가 여러 번 수상하기도 하였고, 피아노 전공으로 진로를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피아노과 진학의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음악 선생님(백나미,정성숙 선생님)의 권유로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피아노과 진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을 통해 처음 들어보는 음악적 호흡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정수년 선생님의 연주한 슬기둥의 '그 저녁 무렵부터 해질녘까지'입니다.
 
새로운 음색과 만남 이후로 저의 진로는 방향성이 전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항상 피아노를 치며 나만의 음악 세계관을 구축하고 싶다 하는 마음과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된 국악기의 진한 소리의 합은 저를 작곡+국악=국악 작곡으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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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문 사진작가 <조준일>

6/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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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하이서울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마이끌레르 영화제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 콘서트, 인천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행사들에서 사진작가로 참가한 그는 사실 직장이 있는 GMTCK의 차장님이라는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길러 활발한 활약을 하고 있는 조준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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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공연 사진 전문 사진작가 조준일입니다.

공연 현장의 그 화려한 퍼포먼스가 좋아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공연자의 열정을 사진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려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정리하여 의뢰하신 분들에게 보내고 나면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처럼 쓸쓸함이 엄습하지만, 슈퍼맨의 클라크처럼 아무로 모르는 비밀같이 또 다른 역할이 있는 직장(GMTCK)으로 돌아가서 완벽한 직장인으로 변신을 합니다.

조 작가님, 조 차장님 어느 호칭도 낯설지 않은데 아직도 제가 직장을 다닌다고 하면 놀라는 분들도 계시고 또 직장에서는 화려한 사진작가가 동료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의 아들, 그리고 4가족의 가장 역할을 포함하여 그 어느 역할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 욕심 많은 공연 전문 사진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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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진작가가 되었는지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나 취업을 해야 할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언론사가 아닌, 사진과는 무관한 자동차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원으로 묵묵히 생활하면서 가장이 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 역할에 충실하게 지내는 동안 사진에 대해서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서울시에서 시민작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후배를 통해서 듣게 되었고, 사진 분야에 지원하고 발탁되어, 서울시 시민작가가 된 게 시작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업무를 하고 주말에는 공연 현장을 다니다 보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여 미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중에도 특별히 공연 사진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0년 하이서울페스티벌 등 멋진 공연을 보면서 그 공연에 빠져들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정동극장에서 춘향전을 각색한 “미소”라는 공연을 촬영하면서 하나의 공연장에서 너무도 다양한 모습과 열정이 있다는 것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멋진 순간을 기록하는 그 역할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제가 하고 싶었습니다.
 
공연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하게 된 것은 제가 처한 상황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직장인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야 하기에 주중에는 거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습니다. 공연은 대부분 주말에 있었고 주중에는 자주 있지 않았기에 휴가를 활용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촬영한 후 보내준 사진을 의뢰하신 분들을 포함하여 공연을 직접 하신 분들이 뭔가 더 특별하고 멋지다고 하는 칭찬에 아직도 공연장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을 촬영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공연하신 분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직접 사인 CD를 받을 기회는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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