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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PD수첩> 부장 PD <박건식>

27/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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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부터 시사, 탐사보도를 맡고 있는 MBC 장수 프로그램인 <PD수첩> 그리고 그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취재를 수십 년간 해온 그는 말한다. '해야 할 일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시사, 탐사 프로그램 <PD수첩>의 부장, 박건식 PD와의 인터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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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MBC PD수첩 부장을 맡고 있는 박건식 PD입니다.
또한, PD들의 모임인 한국PD연합회장과 PD들을 교육하는 한국PD교육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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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국문학을 졸업하셨습니다. 관련 학과가 아닌 만큼 다른 진로도 생각해보셨을 법도 한데 어떻게 방송 분야의 진로를 택하셨나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저의 희망대학 1순위 진로는 국문학과였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국어’ 과목 점수가 잘 나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국문과에 입학한 뒤에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소설이나 시 등의 문예 창작을 준비해왔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론 분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고 싶었습니다.
 
국문학으로 대학을 진학한 시절, 전공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국어학, 고전문학, 한문학이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과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오던 언론사에 입사하는 두 가지 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언론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공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학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1987년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강의실 안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 저는,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정보가 너무나 없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군대 제대 후, 1년간 구소련 우즈베키스탄으로 타슈켄트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다가 귀국해, 언론사 입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다가, 1991년 MBC의 시사교양 PD의 공채 시험을 봤습니다.
 
당시는 시험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신문만 열심히 보면 합격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첫 시험에 쓴잔을 마셨습니다.

1992년 다시 MBC PD를 지망했지만, 그해에는 아예 PD 분야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습니다.
 1993년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 해에는 시험도 보지 못하고 서류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계속되는 입사 시험의 낙방으로 지쳤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동아일보에도 응시했는데, 최종심사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해 세계일보 시험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고,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현재는 PD이시지만 첫 언론계 입문은 기자이셨습니다. 어떻게 기자에서 PD로 보직을 옮기게 되셨나요? 기자와 PD를 모두 해보셨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기자직은 꿈꾸던 자리였습니다.
1993년, 세계일보에 입사 후, 사회부에서 근무했는데, 조계사 분쟁, 성수대교 붕괴, 지존파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고 저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2년 후, 1995년 11월, MBC의 PD로 입사했습니다.
기자에서 PD로 옮기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 매체에서 방송 매체로 간 것이기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부터 MBC PD를 지망했습니다.
 
1995년 다시 MBC PD 모집에 응시했습니다.
나이 제한을 보니, 시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해 운 좋게 합격했습니다.
 
과거, 기자 생활은 재미있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경찰서에 배치됐는데, 그동안 겪지 못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지존파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사고들도 있었고, 교육개혁, 사법개혁 같은 의미 있는 정책변화도 현장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부 기자, 특히 경찰기자만 하다 보니 재충전이 안 되고, 소진돼 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랬던 제게, MBC 교양 PD 합격은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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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로서 분야도 많은데 어떻게 내후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하는 MBC의 대표 시사, 그것도 고소, 고발 전문 장수 프로그램인 'PD수첩'의 부장 프로듀서로 자리 잡게 되셨는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모르는 제작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려주세요.
 
처음 MBC PD로 입사하자마자, PD수첩을 맡을 뻔했습니다.
처음 교양제작국 사회교양부에 배속됐는데, 당시 사회교양부에는 <PD수첩>과 <경찰청 사람들> 두 개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부장님께서 처음에 <PD수첩>을 하라고 하셨다가 다음날 “너 참 신문사에서 경찰기자 하다가 왔지?”‘하면서 <경찰청 사람들>팀에 배속시켰습니다.
 
옆에서 <PD수첩>팀을 지켜보면서, <생방송 화제집중>, <피자의 아침>, <성공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프로그램을 거친 후, 2002년 말에 ><PD수첩>으로 발령받아서 2~3년간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2004년에 노동조합에 파견됐다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거친 후, 2005년 7월부터 다시 <PD수첩>으로 발령받았습니다. 2007년 말까지 <PD수첩>을 제작하다가 ‘정책기획팀’으로 가서 일했습니다.
 
이후, 2008년부터 1년간 미국 미주리대학에 있는 ‘탐사보도협회(IRE)’에서 탐사보도를 공부했고, 2009년 8월부터 다시 <PD수첩>에서 제작했습니다. 이때 최승호 PD(현 MBC 사장)와 한 조를 이뤄서 ‘검사와 스폰서’, ‘4대강과 민생예산’ 등의 문제를 제작했습니다.
 
그러다 2010년, 김재철 사장이 부임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011년 3월, 갑자기 <PD수첩> PD들 6명이 다른 곳으로 강제 발령을 받았고, 저도 신설된 ‘경인지사’에 배속돼 아예 서울시 내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6~7년간 인천, 고양 등 경기도 지역에서 근무하며 지역 축제나 지방자치단체 행사 등을 유치하는 영업 노력을 했습니다.
 
그 후, 촛불집회 등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MBC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2017년, MBC 사원들은 다시 파업에 들어갔고, 저도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MBC는 정상화됐고, 2017년 11월부터 다시 <PD수첩>에 복귀해서 바로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몇 편을 제작하다가 2018년 ‘팩트체크 및 SNS팀장’을 맡았고, 2018년 11월부터 지금까지 <PD수첩>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PD수첩>을 제작하면서, 취재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른바 ‘앰부시(Ambush)’ 취재라고 불리는 ‘잠복취재’가 가장 어렵습니다. 언제 나타날지 어디에서 올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씩 허탕을 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별별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막상 취재 당사자를 운 좋게 마주치는 경우가 있어도 대부분은 인터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인터뷰하는데 강한 저항을 받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끌려 나오기도 하고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권침해’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말을 꼭 들어야 하는데, 상당수의 경우, 당사자들은 인터뷰를 극단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반론을 펴기보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자는 심리가 강한 듯합니다.
당사자들이 한사코 인터뷰를 피하다 보니 제작진은 ‘엠부시(잠복취재)’를 할 수밖에 없는데, 기약 없는 기다림에 몸도 괴롭지만, 마음도 무거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동안 제작했던 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7년 12월 19일 제작했던 <방송장악 10년, KBS를 지키러 왔습니다?>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상대사인 KBS를 다룬다는 것도 이례적이었는데, 한국의 공영방송 문제를 꼭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KBS의 경우, 조합원들의 방송 정상화를 위한 시위장면을 취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청경들이 워낙 강경하게 조합원 집회장면 촬영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조합원 집회를 촬영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사장 선임권을 지닌 이사회 이사들을 인터뷰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은 집회를 마치고 퇴근했고, 이사회는 저녁 늦게 끝났습니다.
이사회를 마치고 내려오는 KBS 이사들을 인터뷰하려는데, 몰려든 청경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취재현장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당시, KBS 고대영 사장을 인터뷰하는 것은 KBS 이사들을 인터뷰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었습니다.
새벽 6시에 고대영 사장 집에 갔는데, 그곳에는 KBS 청경과 KBS 차량이 여러 대가 층마다 분산돼 있었습니다. 도무지 어느 차에 탈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차량이 움직이면 제작진은 따라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차를 따라잡다 보면 다른 차를 놓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고대영 사장을 인터뷰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사장 개인의 출근에 KBS 청경과 차량을 사적으로 동원해도 되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형 논쟁거리와 거악에 대한 비판 보도를 하다 보니, 소송만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PD수첩>과 소송을 벌였거나, 벌이는 상대는 ‘포스코’, ‘조계종’, ‘조선일보’, ‘국기원 원장’, ‘영화감독 김기덕’ 등 실로 다양합니다.
 
특히, 방송 전에 제기되는 ‘방송금지가처분’ 소송은 제작진의 피를 마르게 합니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소송이 아니어도 분초를 다투며 아슬아슬하게 방송준비를 하고 있는데, 소송이 걸리면 재판부에 답변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고, 또 법원에 출두하여 상대방과 치열하게 다퉈야 합니다. 그 사이에 시간은 분초를 다투는 편집시간은 재깍재깍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만약 재판부에서 수정지시를 하면 그야말로 날벼락입니다.
법원에 가 있는 동안 PD들의 가슴은 타들어 갑니다. ‘조계종’을 취재할 때, <PD수첩> 제작진 중 한 명이 심각한 위협을 당했습니다.
 
또, ‘쓰레기 대란’을 취재할 때, ‘IS’와 전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여성 PD 한 명을 취재 보냈을 때는 조마조마했습니다.
 
모든 취재는 늘 위험을 동반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이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러나, 제작하고 방송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보람 있고 행복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한 <PD수첩>의 많은 구성원이 지난 6~7년간 이른바 ‘유배지’에 보내져서 방송할 수 없었습니다.
즉,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방송이 현실적인 변화를 끌어냈을 때입니다.
<쓰레기 대란> 2부작 방송 후, 많은 시청자가 함부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뻤습니다.
 
또한, 군납 비리를 고발해 군인들이 불량 야간투시경을 사용하지 않게 되고, 국가 예산을 절약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도 뿌듯한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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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고발프로그램, 그리고 탐사보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탐사보도 저널리스트는 댐이 무너지거나 불이 났을 때 그것을 신고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댐이 붕괴되었다고 해도, 외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외면하면 이 사회는 무너집니다.
 
모든 조직은 자기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검찰이나 대법원은 견제를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비판하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합니다.
양승태 사법부가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고 비판하면, 적어도 다음 사법부는 조심하지 않을까요?

꾸준한 비판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견제받지 않는 고인 물은 썩게 됩니다.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게 만드는 것이 탐사보도의 역할입니다.

 
종편 방송사들이 출범한 뒤, 수많은 지상파 소속 아나운서와 PD 등의 제작진들도 거취를 옮기는 것으로 모자라, 우후죽순 1인 콘텐츠들도 생겨나면서, 지상파 방송국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지상파 방송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다채널 시대에 지상파는 독보적 지위보다 많은 채널 중의 하나가 될 겁니다.
공익성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의 역할도 하게 될 겁니다.
 
공원의 역할을 하려면 공원을 유지할 재원이 필요합니다. 재원 구조가 확립되지 않으면 지상파, 공영방송은 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재원은 2가지입니다.
KBS 수신료도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MBC와 SBS의 관점에서, 광고 재원의 핵심은 중간광고입니다.
중간광고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중간광고 시행이 미뤄질수록 지상파의 생존은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PD수첩>은 내용상으로 거대 담론만 하는 것보다는 생활밀착형 아이템과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아이템과 형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 여성 등의 고민을 담아내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유통 면에서는 유튜브 등에서 젊은 층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 후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PD들이 대담하면서 정리하는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유튜브 <PD수첩> 공식 계정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PD수첩>을 검색하면 <PD수첩> 계정이 나오는데, 다양한 실험적인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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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PD 협회를 비롯해 한국PD연합회, PD 교육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PD님을 멘토로 여기고 따라가며, 미래에 프로듀서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PD가 되고자 한다면 왕성한 호기심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틀을 깨는 파격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기법적으로는 연극을 꼭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PD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 ‘안주’하는 것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일신우일신 해서 내 안의 한계를 뛰어넘고 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PD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 안의 ‘품’을 최대한 넉넉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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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탐사보도를 계속하거나 후학들에게 탐사보도 기법을 전수하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한 책도 몇 권 쓰고 싶습니다.
 
지금 50대 중반인데, 미래의 꿈과 모습을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저 자신과 동료들에게 말할 수 있다면, 저의 미래는 훨씬 알찰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선배나 동료, 후배들에게 이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탐사보도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두서없는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읽어주신 시간이 헛되지 않게 좋은 <PD수첩> 방송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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