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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김현철> - 2편 [인터뷰]

2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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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부산대 치의예과 학부생으로 발을 들인지 30년 만에 그는 모교 치의학전문대학원(치과대학)의 원장(학장)이 되었다. 80여 편의 SCI급 논문을 포함한 16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치의학계 국내 교수 중 해외 강연을 자주 하는 그는 치과계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치과대학의 학장으로서 행정가,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이자 모범적인 지도력을 펼치고 있는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김현철 원장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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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당시
[학력]
1988 창원고등학교 졸업
1995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2004 부산대학교 치의학박사 (보존 및 보철학 전공)

[경력]
2004년~現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2012년~2018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과보존학교실 주임교수
2015년~2017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과 학과장
2018년 9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첨단치과의료기기사업화센터 초대 센터장
2017년 3월~2019년 2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부원장
2019년 3월~現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

2008년~2009년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 생체공학연구실 방문교수 
2007년~2010년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 치과의료전문평가위원 
2011년~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청 신개발의료기기분과위원
2019년 7월~2021년 7월 부산광역시 치의학산업지원위원회 부위원장

2011년~2014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교육연구실장
2013년~2015년 부산대학교치과병원 초대 치의학연구소장 

[직능단체 경력]
2010년~2014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7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공보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치과근관치료학회 부회장 

2005년~200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섭외이사
2009년~2011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기획이사
2011년~2013년 대한치과보존학회 국제이사
2015년~2017년 대한치과보존학회 수련고시이사
2017년~2019년 대한치과보존학회 학술이사
2019년~ 現 총무이사

2014년~2016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학술이사
2016년~2018년 대한현미경치과학회 총무이사
2019년~現 대한현미경치과학회 부회장

2015년~2017년 Asian Pacific Endodontic Confederation (아시아태평양근관치료학회연맹) Council (이사)
2017년~2019년 APEC Secretary (총무이사)
2019년~現 APEC President-elect (차기회장)

2016년~2018년 11회 세계근관치료학회 조직위원회 학술분과 위원장

現 European Endodontic Journal (유럽근관치료학저널) Associate Editor (부편집장)
現 Journal of Endodontics (근관치료학저널) Scientific advisory board (학술자문위원)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School of Dentistry)원장 김현철입니다. 전문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이 한국에서 특이하게 운용되고 있어 무엇인가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치과대학(College of Dentistry)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의 교수인 만큼 저는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치과의사자격을 가진 임상교수이니 치과병원 치과 보존과(Department of Conservative Dentistry)에서 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으니 행정업무도 상당 부분 겸하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강의, 연구, 임상, 행정 등 여러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치과의사들에게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치아 신경치료에 관한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알려져 있고, 연구자들 사회에서의 저는 신경치료에 사용하는 기구와 재료를 평가 연구 개발하는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와 관련하여 국외로는 “Henry Kim”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름이 불릴 일이 별로 없는데, 외국 친구들은 여전히 이름을 부르니 영어 예명이 더 익숙한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 수묵화에 깊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돌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에 가족관계도 들어가는 것이 한국적인 소개인 듯하여 덧붙인다면, 최근 군 복무를 마친 아들과 2월 군 복무를 앞둔 아들. 그리고 두 아들과 저보다 더 많이 가장 역할을 하는 아내. 이렇게 4인 가족의 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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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ProEndo Conference에서 그는 7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했다. 
치과대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진학하게 되셨는지 대학 입학 이전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엔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선망하는 직업 없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어요. 초등학교(창원 양곡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와 집을 오가며 8비트 게임 흑백 게임을 하러 오락실도 갔던 기억도 있고, 어릴 때부터 서예/묵화 화실을 다니며 먹물을 가까이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당시 교과목인 특활로 서예를 시작하여, 5학년부터는 묵화를 하게 되었고,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였는지 그 후로 중학교(창원 양곡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방학 때마다 방학 기간 내내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니며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고등학교(창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너무 취미생활을 너무 깊이 있게 하지 말라고 하였던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잠시 멈추었어요.
 
하지만 공부는 안 하고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수험생이 된 3학년이 되었어도, 카메라를 들고 철새 도래지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원인이었는지, 재수하게 되었고, 1년 후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만 해라’고 압박을 하시거나, 사교육을 위해 학원에 보내시지 않았으니 정말 평범한 학창 생활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선두권 성적이었어요. 고등학교 진학 후, 노력형(Effort-Type)이었다고 해야 할지, 1학년 초반, 전교 중위권에 머물렀던 성적은 매 학년, 학기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제도였어요. 타 대학교 치의학과에 지원하였는데 평상시보다 시험을 잘 본 듯하였습니다만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진 찍으러 다닌 시간이 아니었으면 합격하였을까요? (웃음)
 
재수생 시절, 학원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두 번 꼭 일어나야만 할 때 외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더 오르긴 했지만, 재수하고도 늘 여유롭지 못한 것이 입시 성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잠시 산업디자인학과로 진로를 고려했었으니 예술적인 꿈은 늘 내재하여 있었나 봅니다.
 
아주 특별한 계기나 깊은 고민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그림 등으로 표현되던 예술적 감성을 포함한 치의학과(치의예과)로 지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산대 치과대학에 입학하여, 현재까지 30년간 모교와 연결 고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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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학교에 설치된 최신 실습장비(Virtual Reality Haptic Device)를 이용한 실습 지도.
대학 졸업 후 개원 의사이셨지만 학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대학교수로서 치과의사, 교육자, 연구자의 길을 겸하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 합격으로 바로 개원하여 치과의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치과 전문의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지만 저는 치과보존학 수련과정을 지원하며 3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공의 과정 중에는 진료와 함께 전문 영역의 공부도 깊게 하지만 학생들의 교육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즉, 후배들의 학습 도우미를 하는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본인이 더 공부하게 된다고 하는데 저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학습의 깊이를 직접 대면하였습니다. 또한, 진료하면서 ‘가르침의 기쁨’도 깨닫게 된 것은 후에 교직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공의 과정 중에 새로운 기구나 재료 사용에 관심을 두고,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던 그런 ‘도전적’ 성향들이 지금 연구자로서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해군에서 군의관 생활을 하였습니다. 3년동안 해병대 부대에서도 장병들을 보살피고 해군 함대에서도 일하였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1998년 당시, 육해공군에서 사용하던 치과기구재료의 목록이 한국전쟁 이후로 이어져 온 미군 부대 장비목록이었는데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구할 수도 없는 사용할 수도 없는 목록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록을 보며 저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 목록들을 현대화하기 위해 작업을 주도하여 시작했습니다. 물론 뒤를 이어 마무리하신 많은 분의 노고가 있으셨겠지만, 그 결과로 지금의 리스트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성향도 교직하면서 행정도 하는데 기초적인 경험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군의관 입대 훈련 입소 하루 전 첫아들이 태어나고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이름도 없던 아기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서른 살 아빠로 입대했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군의관 복무 동안 둘째도 태어나고, 군의 규율 속에서 3년을 보낸 후에 흔히 말하는 '개인 치과 원장님'으로 3년 반가량을 보냈습니다. 개원 당시부터 교직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에 개원 여건 조건 등을 정할 때 이직 가능성을 고려하였습니다.
 
개원 치과의사로서의 경험은 현실의 삶이던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를 기다리고 환자의 불편감을 해결해드리고 경영을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 현실은 변화나 발전 등의 미래 지향적인 용어와는 연결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재정적인 풍족한 삶’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평생 사는 ‘개체로서의 삶’의 의미를 담기에는 제한성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개원하여 진료하고 봉사를 하는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개원가 원장님이 세상을 등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생의 끝에 그간 관계를 가져왔던 환자들에게 전해지는 아쉬움은 소위 '반려동물'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수치상으로 표현한다면, 평소 구강건강관리를 하는 담당 환자가 2천여 명일 때 그분들로부터 아쉬움의 위로를 듣는 그런 존재와 삶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보다는 좀 더 크고 넓게 의미 있고 가치를 높이는 ‘사람’의 삶을 갖고자 교직을 택하였다면, 직업 선택의 계기로 적절할까요?
 
학교에 일하면서 받는 인사말 중에 가장 잘못된 질문이 ‘방학이라 쉴 수 있어 좋겠다’는 말입니다. 대학의 교원은 교육, 연구, 진료, 행정 등 다양한 키워드로 업무를 나누어 보게 됩니다.
 
결국 개인 진료 생활을 접고 2004년 처음 대학으로 올 때는 강의와 진료가 거의 다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행정업무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수치로 정량화하기는 어렵지만, 학원장을 맡은 지금은 행정 업무가 가장 많은 업무를 차지하는 듯하고, 오히려 교육이 뒷순위로 밀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방학은 수업만 없을 뿐인데 “수업의 없음(방학)”이 결코 시간적인 여유는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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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갈라 디너 당시.
학술분과위원장으로서 인사 및 학회 경과 보고를 하고 있다. 

원장님께서는 한 해에만 열 건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의 학회에 참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연구와 학술활동을 이어가는 계기나 배경이 있었는지요?
 

저는 교직을 택하고 학교에 오기까지 연구를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전혀 모르던 임상 치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임교원이 되기 전에는 외래교수로 강의를 해왔고, 진료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 착각하였다가, 의미도 알 수 없었던 SCI급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가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현재는 근관치료학(endodontics) 연구분야에서 Top 0.14%로, 특히 제가 중점으로 연구하는 니켈티타늄 기구를 포함한 치과기구(Dental Instruments) 영역에서는 Top 0.065% (Asia 1위, 세계 7위)에 자리매김할 정도로 해당 분야에서는 나름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2004년 대학에 임용된 후 2007년까지는 국내 논문 발표에 머물렀지만, 2007년부터 SCI급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런 변화에는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처음 SCI급 논문에 게재된 것은 연구방법으로 유한요소분석법을 이용한 것인데, 이 연구를 하게 된 배경도 특별한 호기심을 혼자 혹은 측근들에게만 제한하여 나누지 않고 직접 다른 분야의 연구자를 찾아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 큰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당시 공과대학 기계공학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뵙고, ‘이런저런 내용의 연구를 하고자 하는 데 도움을 주십사’ 부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관련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원생을 소개해 주시고 관심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셨습니다.
 
즉, 치의학계에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방법론적인 부분을 공과대학에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그 계기였던 것이고, 그야말로 치의학과 공학 융합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공대와의 협업으로 만든 결과물을 발표하는데 또 다른 큰 조력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작성한 논문을 해외 우수 저널에 발표하려면 영어 교정도 상당히 중요한데, 이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 홍콩대학교의 Gary SP Cheung 교수님이십니다.
 
영어 교정 회사를 통한 교정은 전문성의 결여로 인해 그 교정 효과가 미비한데, 같은 전공분야의 Cheung 교수님은 제가 원하는 바 문맥 구성(plot)을 잘 유지하면서도 매끄러운 흐름의 문체로 교정을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전까지 단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하던 SCI 논문을 수정도 없이 바로 게재 수락을 받았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충격과 같은 경험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후로도 많은 연구에 대해 조언과 영문 교정 등의 도움을 주셔서 저에게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멘토이십니다.
 
Cheung 교수님은 3~4년간 메일을 통해 도움을 주신 후, 어느 메일 회신에선가 이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그냥 도움 요청 없이 진행하라는 조언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멘토-멘티의 관계가 아닌 '동료연구자'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제게는 참 고마운 분입니다.
 
Cheung 교수님과는 매년 한 번 정도는 해외학회 등에서 뵙기도 하고 서로를 방문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 교류 및 global collaboration이 연구자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제가 Cheung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제가 외국 교수나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공동 연구를 제안받는 위치에 와 있으니 새삼 Cheung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연구가 이어지면서 해외 학회에서 강의 요청이 오게 되는데, 사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한국인으로서 상당히 부담이 느껴지는 활동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이고 사양하였지만, ‘연구자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고, 학교와 한국을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여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영어 강의를 할 때는 강의자료를 일찌감치 만들어 수차례 연습을 반복하고, 발언 내용을 적어 반복해서 읽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사이사이 참고할 메모를 적어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강의는 한국어 강의와 마찬가지로 강의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외강의 초보 시절 모스크바에서 강의할 때, 제 영어 강의를 러시아어로 동시통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강의 당시 흥분하고 긴장했던 상태였는데, 동시통역자가 말이 빠르니 천천히 하라고 팔을 마구 휘저어서 제 시선을 끌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최근에는 동남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인도 등)를 넘어 중동(이집트, UAE, 요르단 등)에서 강의 기회를 많이 얻게 되면서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중동의 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를 통한 다양한 소통은 더 많은 연구 주제를 생산하고, 제 학생들도 더 많은 연구 주제를 공유하게 되면서 개인 연구 주제를 찾는 가능성을 높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석, 박사과정의 제 학생 중, 연구 주제가 없어서 고민하는 학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결과들에 대해 제가 검토하고 지도하여 논문 작성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제 바쁜 일정 때문에 논문작성 지도가 지연되거나 논문 수정이 지연되는 일들이 지속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간혹 해외 연구자들의 논문 작성을 도와주는 작업이 6개월에서 1년씩 지연되기도 하여 독촉을 받는 것에 비교하면, 대부분의 국내 학생들이 좋은 내용으로 권위가 있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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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학회 차 이집트 방문 당시.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느냐?` `한국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으실 정도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바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쁘신 와중에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는지 소개 부탁합니다.
 
비교적 잦은 빈도로 해외 출장을 가다 보니, 간혹 외국에 있어도 계속 ‘외국에 있는지 국내인지’ 농담 반 진담 반의 짓궂은 말씀들을 하십니다. 작년부터는 원장직을 수행하느라 해외출장 기회를 몇 건 줄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 해외출장 일정을 다녀오면 환자 진료를 포함하여 밀려있는 일들로 인해 저 자신이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구 관련 강의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비행시간 동안이라도 충분히 쉬는 장점을 누리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로 나가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반가운 조우도 있으며,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찍을 일도 더 많으니, 약간의 휴식과도 같은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얕아서 역사 깊은 유적지나 건축물에 대한 배경은 잘 알지 못하고, 들어도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구조를 건축했는지’, ‘어떤 자재를 이용하였는지’, ‘어떤 예술적인 건축 방식이 응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세계 불가사의로 거론되는, 이집트 피라미드, 인도 타지마할, 요르단 페트라, 로마 콜로세움 등. 그리고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이나, 스페인 성가족성당 등이 제가 눈으로 보고 즐긴 예술과 과학이 접목된 건축물들입니다.
 
사실 제 취미는 앞서 말씀드린 수묵화(ink-and-wash painting, 水墨畫)입니다. 그러나 취미라고 하기엔 지금은 좀 애매하게 취미생활을 일 년에 한 번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선지에 먹을 갈고 농담(light and shade, 濃淡)을 조절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5년 전입니다.
 
그 5년 전의 그림 작업조차 10년을 넘게 벼르고 별러 정교수로 승진하던 날 한 점(painting), 그리고 같은 달 한 점, 그다음 달 한 점을 더 그리고는 지금까지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한두 시간 혹은 두세 시간이면 한 점을 그릴 수 있을 만한데 지금은 그런 여유를 갖기조차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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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0년에 한 번을 즐기기 어려운 취미생활인 수묵화 작품과 함께.
평소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침이면 잠을 깨기 위해 휴대전화로 밤새 들어온 이메일 리스트를 확인하고, 출근 후 이메일 답을 쓰는 것으로 업무가 시작됩니다. 진료가 있는 날은 진료하면서 진료 틈틈이 결재 등 학교업무를 해야 합니다. 진료가 없는 날은 학교 원장실에서 업무를 봅니다.
 
40년이나 된 학교지만 계속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 맞는 교육연구 환경 개선 사업을 비롯하여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의 제반 업무, 국내의 세 가지 학회 업무 그리고 국제 학회 활동을 위해 수시로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하여 업무를 진행합니다.
 
점심시간은 거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계속 회의를 진행하고 삼십 분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밀려있던 일 중 논문 심사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해외 저널에 연구 논문이 많이 실리는 만큼, 해외 저널에 투고되는 논문의 심사 의뢰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은, 심사하지 못한다고 거절을 하지만, 제가 주로 투고하고 게재하는 해외 저널의 경우엔 심사를 거절할 수가 없어 틈틈이 심사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하루 ‘1부’의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이 됩니다. 간단한 저녁 식사 후 ‘2부’가 이어지는데, ‘2부’는 보통 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는데 효율이 높은 시간입니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거나 논문 첨삭 지도를 하고, 진행 중인 실험 내용에 대해 점검을 하는 것 역시 외부로부터 가장 방해요소가 적은 저녁 시간에 진행합니다.
 
보통 밤 9시에서 10시경 귀가를 하는데,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시간이 제겐 쉬는 시간 겸 가장 여유를 갖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퇴근길에는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시차가 있는 외국 분들과의 업무도 간혹 퇴근길 차에서 이루어집니다. 데이터 통신과 통신 애플리케이션이 발전되어 전화통화가 많이 편리해진 것이 도움됩니다. 집에 와서는 이제 ‘3부’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이 시간에는 주로 개원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부 강의와 해외 강의 자료를 만들고 보완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보통 자정이 넘어가고 다음 날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정해진 근무시간에 일하고 나머지 시간이 자유롭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등 원하는 취미 생활을 더 할 수 있을 텐데, 교직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일을 하기에 따라서는 활동 범위와 영역이 광범위하기에 바삐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교직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조만간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해보고 싶은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하얀 화선지를 펼쳐두고 담묵과 농묵의 먹색을 즐기고 싶습니다. 유화와는 달리 덧칠이 되지 않고 화선지가 젖어있을 때와 먹물이 다 말랐을 때가 색이 달라지기도 하는 먹색의 특징과 여백을 남겨두고 마무리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는 수묵화는 참 매력적입니다. 여백 한 자락에 석향(石香)이라는 호(nom de plume)를 적고 낙관(seal)을 찍는 날을 매일 매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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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연구실에서 실험 중 연구 장비들과.
`중이 제 머리를 목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치의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이신 교수님은 누구에게 치과 치료를 받으시나요? 또한, 치아 건강을 위해 독자분들께 조언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 받아보는 질문 같습니다만, 저도 치료나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면 당연히 치료를 받습니다. 가까운 병원에 동료 교수에게 받기도 하고 제자인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치과의사인 아내에게 진료를 받기도 합니다만 근무시간과 퇴근 시간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진료가 더 현실적인 선택 방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치료할 내용이 없으니,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약 칫솔의 선택에 특별한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칫솔은 너무 크지 않은 것을 선택하시라 권하는 정도이고, 전동 칫솔이 더 좋은지 물어보시는 분들께도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치약도 정말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시중의 어느 치약을 쓰셔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간혹 시린 치아에 사용하면 완화 효과가 있는 치약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치과의사가 소개해주실 겁니다. 치약 칫솔의 종류나 방법보다는 식후에 그리고 가능하다면 취침 전에 칫솔질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치아 질환이나 구강 내 질환은 미생물과 입속의 잔여 음식물에 의해 발생하므로 칫솔질로 이를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잘 제거가 되지 않는 점착성이 높은 음식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양치질을 자주 잘한다면 음식이나 간식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올바른 가이드인 것 같습니다.
 

아내분도 치과의사이십니다. 이미 전 질문에서 집안에 `가장`으로서 많은 공백을 아내분이 대신 채워주고 계시다고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부부가 같은 분야 종사자로서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치과의사 아내의 장점은 믿고 치료를 받을 데가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직자로서 그 어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치과 방문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다행히 저도 근본적으로 치과 치료가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이 없으니 그다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장이 생계를 담당하는 것과는 달리 개인 치과를 운영하는 아내가 조금은 더 많이 살림을 관리하게 되는 상황이라 저보다는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 중 임상 실습을 참여하는 후배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래 직업으로 교수를 꿈꾸던 제게는 동종 직업인 배우자를 갖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으로 생각하던 차 저를 만났던 아내의 처지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정을 갖게 되었기에, 즐거운 청춘을 남들보다는 조금 짧게 즐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제가 학교에서 퇴근이 늦으니, “우리는 아빠 왜 못 봐?” 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들과의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일에 집중하여 숨 가쁘게 달려왔던 제 생활 방식에 아내가 아이들 양육을 도맡아 한 부분이 크니 고맙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내로서 그 어떤 내조보다 저를 이해해주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장점인데, 반대의 관점인 아내로서 저는 과연 장점이 있을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2008년, 1년간,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파견 근무를 가서 가족들이 같이 해외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해외 생활을 체험한 것이 가족들에게는 장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시절 방학 기간일 때마다 제가 해외 출장이 있어 아이들만을 데리고 해외를 같이 나갔던 적도 두세 번 있었습니다.
 
가장 대학 입시에 혈안이 되어야 할 시기인 고3이 되던 겨울방학에도 같이 해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재수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해외 체험을 하고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갖게 만드는 기회를 줄 수 있었던 게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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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원장은 작년 3월 모교의 원장으로 취임했다. 52세로 부산대학교 전체 학장 원장 중 최연소 원장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따른 보직자 선출이 아닌 것은 그 집단의 발전적인 모습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실력과 겸손까지 갖춘 존경스런 인물이었다. 
89년도에 학사과정에 입학하셔서 2019년 3월, 모교의 치의학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오르시기까지 지난 30년을 부산대에서 보내셨습니다. 교수님께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1989년 치과대학(치의예과)에 입학하고 6년의 학부생활, 전공의 과정 3년, 군의관 3년과 그리고 3년여 짧은 개원의 생활을 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9년은 제가 모교와 함께 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고, 학교는 개교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개략적으로, 대학을 입학하고 30년 한 세대의 기간을 모교와 함께하였습니다. 30년 중 15년은 학부생으로 배우고, 전공의로 배우고, 군과 사회에서 조금 더 폭넓은 경험으로 배운 시기였고, 교수로 대학으로 돌아온 2004년부터 지난 15년 간은 배우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쪽에 더 가까이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지역 치과의사분들께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것 또한 저에게 새로운 학습의 과정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기술이 이끌어가는 치의학계에서, 새로운 것을 평가하고 올바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즐겁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구나 재료가 개발되어 치과 임상에 사용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더 보람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배움과 지식 나눔의 과정을 거칠 수 있고, 연구 개발을 통한 국제사회와 소통을 할 수 있는 대학 교원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그 기관이 모교인지라 더욱 다행스럽습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데는 가족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고, 주변의 많은 일을 차질없이 진행하는 데는 학교와 학회의 동료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도 가장 고마운 분을 꼽으라면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좋은 환경에서 바른 생각과 큰 꿈을 갖도록 해주셨고, 최소한은 유전적으로 지금 제가 하는 일과 생활이 가능하도록 역량을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학교는 공적인 기관으로, 큰 조직이기도 하면서, 제게는 어쩌면 집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으로 소중한 공간입니다. 학교가 잘되어야 제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고, 저를 포함한 각 교수가 더 뛰어난 업적과 역량을 가질수록 학교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와 저 자신을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동등하게 생각하며 일하는 것이 즐겁고, 학교의 발전을 개인의 성취로 여기며 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족에 한정된 발전을 추구하였다면, 개원가 원장의 자리를 유지하면 오히려 더 풍요롭게 여유롭게 즐겁게 일과를 보내고, 개인적인 성취감도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큰 나를 포함한 조직의 발전을 위해 발을 들였으니 그 바람에 맞는 방향의 일이라면 늘 반갑고, 모든 학교 업무가 직장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내 몸처럼 아끼고 집안일처럼 생각하는 학교의 원장이 되었으니 더욱 애정을 갖고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학과장 보직을 시작으로 부원장으로 2년, 그리고 원장까지 연속으로 5년간 보직을 맡고 있습니다.
 
두 분의 전임 원장님을 보좌하며 학교의 미래를 같이 설계하고 그 방향을 유지하면서 보직을 수행하고 있어,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발전하는 대학이 느껴질 때 보람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은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 영상을 제작하였다.
앞으로 원장으로서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은 어떤 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이 있으신가요?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은 1979년 치의예과의 설치와 함께 역사가 시작되어, 제가 원장으로 취임한 작년 2019년이 불혹인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취임하면서 강조한 대학의 발전 방향이 ‘국제화 및 특성화’입니다.
 
지금까지는 치과대학이 그 학문적 지향점이 분명하였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육연구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4차산업 혁명시대에 그리고 직업관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학령인구의 감소가 눈앞에 닥쳐온 오늘날, 지금까지의 같은 학교의 역할만으로는 장기적인 퇴보의 기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히 ‘치과의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지속적 성장 발전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혹을 맞은 대학이 사람의 인생처럼 변화하기 어려워 점점 퇴보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해서는, 미래 지향적으로 선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안으로 작년부터 디지털 치의학교육 특성화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치과의료에서 도입이 활발히 되는 디지털 장비의 사용에 대해 학부과정에 실질적으로 교육하고 실습과정도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산대 치과대학’이라고 하면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강점으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경쟁력을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 외국 치과대학생이나 대학원생 등의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치과의사들도 우리 대학을 방문하여 배우고 체험하고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제치의학교육센터 등의 실질적 운용이 되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외국으로의 직접 홍보를 통해 외국인을 유치하고자 세부 수행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대학이 명실상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선도치의학교육기관으로 변모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라 생각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제화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실용성을 얻고자 전국 최초로 영어 홍보영상을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Pusan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Dentistry의 약자 ‘PNUD’를 이용하여 “Passion N(and) Ur(Your) Dream”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만들고 내부 역량 집중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화 특성화를 주제로 한 변화와 발전 과정을 통해 학교가 세계적인 기관으로서 인정받는 꿈을 꾸고, 학생과 교직원은 물론 동문과 지역주민 역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품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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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4일은 구정이다. 국내 최대 명절인 이날,
​김현철 원장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범아랍 근관치료학회에 초청되어 연사로 강연을 한다.
공식 질문) 새해 2020년 해외일정을 포함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이라는 숫자가 생소하지만, 벌써 6개월 이상의 일정이 계획된 상태입니다. 학원장으로서는 다양한 학교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부담됩니다만,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행사 준비는 그나마 부담이 적은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는 학원장 임기 첫해로 해외 일정을 최소화하였는데 2년 차인 2020년에는 해외 일정이 작년보다는 많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1월, 모로코 PanArab Endodontic Conference (http://www.paec2020.com)에 초청 연사로 참석예정이며, 4월 초에는 테네시주 Nashville에서 열리는 미국근관치료학회(American Association of Endodontists) AAE 2020 annual meeting에 참석하여 논문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5월에는 요르단대학에 학생
 평가를 위해 방문이 예정되어 있고, 6월에는 말레이시아 학회, 9월에는 인도 Chennai에서 열리는 제12회 세계근관치료학회(IFEA WE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Endodontic Associations World Endodontic Congress)에 Keynote speaker로 참여하여 강의할 계획입니다. 10월에는 한일보존학회가 일본에서 열리는데 대한치과보존학회의 총무이사로 참석할 계획이 있습니다.
 
대략 6건의 해외일정인데 한두 건은 못 가게 될 수도 있고, 안 가는 것이 저에게도 오히려 편안함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가 더 먼 훗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면 은퇴를 즈음한 시기의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60대의 삶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그때 적당한 활동과 계획한 대로 보람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아직은 대학교원 정년(만65세)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어 지금까지의 활동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후배 교수님들의 연구 환경 개선과 대학의 장기 발전 계획을 잘 수립하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기반 조성에 조력하는 것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의 일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연구 발표는 꾸준히 이어가면서 학교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이루어지고 있지만, 해외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거나 때로는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해외 강의도 체력이 되는 한 기회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기회가 된다면, 저는 기회를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 합니다. 은퇴를 즈음해서는 그간 발표한 논문들의 해석과 주요점을 담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 제가 그린 그림들을 넣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앞으로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과 국내 치의학계의 발전에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현철 ProEndo 부산대학교 IFEA PAEC
영상 제공: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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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이혜정
23/1/2020 04:46:32 pm

기자님 덕분에 좋은 분을 소개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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