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에서의 '신화는 없다'는 존재한다! 국영 무역진흥기관으로서, 현재 전세계 약 130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국내 가장 국제화된 조직,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지 27년 만에 상임이사로, 단 다섯 명 뿐인 임원 자리까지 승진한 인물!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것은 '자신감'이었다는, 부산경제진흥원 박기식 원장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 4대 부산경제 진흥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인 박기식입니다. 작년 10월, 현 직책에 부임하기까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약 30년을 근무한 것이 오늘날 저를 있게 한 가장 큰 경력입니다. 그 이후, 저는 작년 현직에 도전하여 최종 선택을 받기 전까지는 상장 대기업인 ‘한미약품’(6개월), ‘도화엔지니어링’(4년) 경력을 비롯한 중견기업 ‘평화엔지니어링’(1년) 에서 해외 담당 부사장과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GSM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직접 창업해서 1년간 영세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해외시장 개척 활동을 직접 전개한 바도 있습니다. 그 외, 전략기술 경영연구원(STEMI), 무역투자연구소 등 민간 연구원에서 부원장 혹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미얀마 무역진흥기관 설립 자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항공기부품 투자 유망 기업 조사 등 컨설팅 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KOTRA 출신 임원들로 구성된 글로벌 비즈니스 리서치 센타 (GBRC)라는 산업부 산하 연구법인 (사단)의 등기임원으로 참여하여, 외국의 방한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한 강의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KOTRA에 입사 전, 학창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경남 양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의 부모님은 농부이셨습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9년간을 전교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 면에서는 우수했습니다만, 고교평준화 이전, 당시 부산 명문인 부산고교에 낙방하면서 인생 최초의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재수의 길도 없이, 동아고교로 진학했습니다. 일류고는 아니지만, 부산고, 경남고 낙방생들이 많이 진학하던 이류고 중에서는 이름이 있던 학교였는데, 거기에서 저는 입학 당시만 해도 전교생 600명 중 약 120명이 포함된 특별반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 끝에, 특별반에 진학할 수 있었고, 1학년 수료 시에는 전체 607명 중 5등의 우수한 성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에 힘입어, 저는 2학년 및 3학년 때에도 우수한 성적을 지속할 수 있었고 특히 졸업하던 해에는 서울대 반이라 할 수 있는 3학년 특별반에 속했는데, 졸업 시에는 최우수 졸업생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초등 및 중등학교에 이어 고교에서도 저는 교육감 상을 받았으므로 수석 졸업의 연속이었습니다. 전교 수석인 데다, 서울대 특별반 출신이기에, 저는 처음엔 서울대 법과대학 진학을 고려했는데, 그때까지 동아고교에서 서울법대를 진학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혹여나 서울법대에 낙방하게 되면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집안 사정상 그럴 상황도 못 되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백부님 집에 기숙하며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사촌 형이 넌지시 건넨 ‘부산대에 진학해서 행정고시를 준비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저는 국립대이자 부산의 명문인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부산상대에 진학한 이후, 청년기의 방황이 시작되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상아탑의 학문에서 새로운 탐닉을 하는 것보다, 학교 바깥에서 같은 또래이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원했던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부모님의 과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운 것도 크게 한몫했었습니다. 대학교 3년을 마치기까지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철학 서적을 탐닉하는 한편, 저는 학교를 한 달 이상 그만두고 산사에 들어가 저 자신을 되돌아보던 때도 있었고, 여느 청춘과 같이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전투경찰에 입대해서, 2년 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방황기도 끝났습니다. 저는 부산과 울산을 잇는 해안초소에서 군 복무를 하였는데, 제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였기 때문에, 저보다 나이가 어린 상사들도 많았고, 그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분초소 9명의 밥 짓는 일을 혼자 하는 등, 군 생활의 규율에 점차 저를 단련시키면서, 제대 마지막 가까워서는 양산경찰서 경비부서로 옮겨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제대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 평생의 파트너이자,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아내는 친구의 사촌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 중 연애를 하던 저희 부부는, 제가 제대함과 동시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아내는 서울 출신이었기에 직업까지 그만두며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저는 결혼 후,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대학 옆의 신혼방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공부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LG, 현대 중공업 등 대기업 입사시험에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신혼인 데다가,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제가 입사를 선택한 곳은, 민간기업이 아닌, 안전성 높은 공공기업, KOTRA였습니다. 또한, KOTRA의 입사시험에서 수석이었다는 것은 입사 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KOTRA 입사는, 제게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 세계를 누비는 또 다른 도전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도 직장을 다니면서 이루어낸 자기연마의 과정이었다는 점에 있어, 2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 퇴임 때까지,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대상이었습니다. KOTRA 재직 중, 런던, 동경, 멜버른, 후쿠오카 등, 4개의 해외무역관에서 약 13년간의 해외 생활을 경험하였고, 세계 경제 무대에서의 우리 한국 기업의 수출과 투자유치 등 국익 차원의 진흥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입사 당시, 저는 기획관리실장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입사 25년만인 2006년에 이 꿈을 이루어냈고, 상임이사로 승진하여, KOTRA의 신기능 사업을 주도하는 ‘전략사업 본부장’으로서 본분을 마치고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석사는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다른 분야의 경영학을,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경제학/지식경영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애초 저는 서울대 법과대학 진학이 목표였으나, 가정 사정으로 포기한 이후, 사촌 형의 권유로 취업전선도 생각하면서, 행정고시 준비도 할 수 있는 경제학과로 진학하였습니다. 제가 두 개의 석사, 그리고 한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별도의 진학 과정이 아니라, KOTRA 재임 중, 회사 측의 인재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가 지원하여 이룩한 성과들입니다. 별도로 유학을 가거나 한 것은 아니고, 주말, 야간과정 등의 형태로 학업을 진행한 것으로, 업무의 연장 선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차원에서 학교에 진학했고, 그런 과정에서 학위는 자연적으로 취득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영을 전공한 것은, 제가 영국 런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당시 ‘소련 동구의 구상무역’을 보다 이론적으로 해부해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실무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관련 논문은 실제로 실무자 시절 업계 지침서로 활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석사학위인, ‘정보기술 경영’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의 국내 1년 인텐시브 과정이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비즈니스를 KOTRA에 도입하는 업무의 연장 선상이었습니다. 연세대 석사과정과 마찬가지로 직장을 다니면서 주경야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 과정은 영어로 강의가 진행되었으며,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대학 본교에서는 약 한 달간의 현지 연수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박사학위는 일본 후쿠오카 무역관장으로 발령받고 난 다음, 큐슈대학에서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보임 직전, 본사 최초의 지식경영 팀장을 맡아 KOTRA 지식경영을 실천하는 역할을 했는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식경영 사이트 KMS (Knowledge Management System)를 그룹웨어와 통합하고, 지식승인 및 업데이트 등, 나름의 기초는 마련했지만, 이를 전 조직에서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실망스러웠던 차에 지식경영에 성공적인 일본에서 그 원인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보고자’하는 차원에서 박사학위의 논제 목표를 경제학으로 정했습니다. 당시 DJ 정권 시절, 통치 철학 차원에서 지식경영이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의 경영 대가인 지식경영 대가 ‘노나카 이쿠지로’ 선생의 책도 제가 많이 읽고 있었는데, 그 선생의 수제자가 마침 큐슈대학의 강사로 부임해 있어서, 그와 담론을 주고받으며 세미나 토론 위주의 면학을 통해 신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구 끝에 저는 ‘지식경영 통합 모델’이라는 제목의 영문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큐슈대학 경제학부 교수 2/3의 인준을 얻게 되면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박사학위는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고 통상 6년 정도의 연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KOTRA 지식경영 팀장으로서 제가 쌓은 경력은 물론이고, 그를 위해 당시 국제적 논문과 이론 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던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연구를 통해, 저는 ‘지식경영이란, 단순한 정보인프라 차원뿐 아니라, 조직문화와 제도를 위해, 지식의 창조-> 가공-> 공유-> 관리라고 하는 지식 프로세스 측면도 동시에 고려되야 하는 프레임워크라는 것’을 제시했으며, 이를 토대로 ‘통합 모델’을 처음으로 발표함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논문은 한국전문가 대상 설문조사는 물론, 사례조사도 겸비하여 상관관계와 회귀 계수를 사용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지식경영을 위한 실천 지침서로써도 활용이 많이 되었으며, 한국의 후학들에게 논문이 많이 읽히면서, 제게 문의해 오는 석·박사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1991년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영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후,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의 정보기술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셨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10년 만에 다시 석사학위 과정을 선택한 이유는 런던무역관 근무 귀국 직후, 제가 헝가리 등 구 동구 사회주의국가와의 교류 창구를 담당하던 부서, 즉 ‘특수사업부’에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구 국가들과의 구상무역도 업무를 하게 되었었습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과정을 통해 발표한 내용은, 책자로 발간하여 업계에 널리 배포, 활용되었고, 박사학위 생들에게도 인기리에 탐독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2001년의 정보기술 경영은, 제가 e-KOTRA 팀장과 지식경영팀장을 역임하면서, ‘KOTRA의 정보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면서 정보기술을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하는 관점을 구상하던 중,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에서 당시 한국 IT 기업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국내 과정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등록을 한 것이 또 다른 석사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의 선진 IT 역량과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되었고, Michael Porter 교수의 ‘다이아몬드 이론’을 활용하여 한국의 정보기술 서비스 기업 간의 경쟁력을 비교하고, 모델을 분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이 과정을 수행한 지 1년 만에, 저는 전 세계 최초로 ‘화상상담 시스템’을 구현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3월, 제가 기획하고, 한국산업기술대학 및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실무적으로 구현한 이 시스템은 바이어와 셀러, 통역 등이 인터넷상에서 만나 시공을 떠난 상담을 자유롭게 수행하고 문자와 음성까지 녹음할 수 있는 획기적 시스템으로서 종래 오프라인 전시회에 의존하는 상담 관행을 인터넷 베이스로 개선한 최초의 케이스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주목한 일본 큐슈 산업대학의 디자인 학부장은 그의 저서에 ‘세계적인 창조혁신 사례’로 제 연구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뉴욕주립대의 석사과정은 국내 인텐시브 코스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과정은 2001년 1월, 과정을 시작하여 12월 말, 학위논문 집필을 마친 후, 여름 1개월간의 뉴욕 현장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의 업무를 하면서, 주말에 8시간 내내 영어로 강의를 듣고, 과제를 영어로 써내면서,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는 것은 일반 회사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버겁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IT 기업 실무자들과는 달리, 영국 런던에서 3년간 근무한 바 있고, 특수사업부에서 동유럽을 누비며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뉴욕주립대 석사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뭐든지 도전하려고 하는 자세 때문인지, 저는 즐겁게 학업에 임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어로 석사학위를 진행하고, 일본 대학에 재학 중이었지만 박사 논문을 영어로 작성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이미 직장에서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던 데다, 관련 레퍼런스 논문이나 자료가 영어로 된 게 많았으므로,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의 경우 벨기에 친구가 제 영어 초록을 감수해 주기도 했고, 일본어 발표 시에는 일본 지인이 감수를 해 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박사학위의 경우 학회 발표는 일본어로 진행했어야 하였습니다. 저는 과거, 91년~94년, 3년간 동경에서 근무하면서 일본어를 익혔기 때문에, 논문 발표를 현지어로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제가 외국의 세 개 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진행하면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도전정신과 성취감, 그리고 자신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아니지만, 초교에서부터 고교까지 내리 수석을 해 왔고, KOTRA 입사에서 수석 입사를 해 왔던 제 이력에서 볼 수 있듯, 지적 호기심과 도전정신은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가치 있는 덕목인 것 같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통해 새롭게 습득한 지식과 이론을 KOTRA의 현장 업무에 다시 적용하면서, 저는 업무에 대한 성취감은 물론, 자기실현에서 오는 자신감을 더욱 성숙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KOTRA에서 퇴임 이후, 8년간 제가 다른 기업체와 연구기관에 종사하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언제나 ‘자신감’은 늘 저를 지탱해 주는 자양분이었고, 석사와 박사학위 자체도 다른 담당 업무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보직을 거치셨는데 그중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저의 도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라, ‘성공기’를 언급하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KOTRA에서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5명 밖에 없는 임원진의 한 사람으로 승진하였고, ‘전략사업 본부장’으로서 KOTRA의 ‘신기능 신사업 업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제 이름인 ‘기식’이 ‘터(基)에다 나무를 심는다(植)’라는 의미인데, 우리 한국의 무역업계 혹은 젊은이들에게 세계 시장을 향해 진출하는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 KOTRA가 그 방향과 사업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저는 제 이름의 의미대로 충실한 삶은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 웃음 ) KOTRA는 아시다시피 국영 무역진흥기관으로서, 현재 전 세계 약 130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국내 가장 국제화된 조직의 하나입니다. 조직에서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수출시장을 개척하고, 무역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전시회 참가, 세미나개최, 무역사절단 교류 등 무역진흥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1962년도, 故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입국을 위해 직접 주도해서 만든 것이 이 기관으로, 제가 입사했던 1981년도에는 정책 종합상사 고려무역을 인수 운영했고, 적자에 허덕이던 KOEX(현 COEX, 코엑스)도 한때 경영을 맡아 정상화하는 등, 다방면적으로 사업을 하였습니다. 한때, 입사시험 경쟁률이 100:1에 이를 정도로, 많은 청년이 취업을 선망하던 직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KOTRA에 수석 입사해서, 누구보다도 한발 앞서 생각하고, 한발 앞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등, 창의적으로 일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한 예로, 1988년 중반, 제가 영국 런던무역관에서 귀국했던 시기는, 마침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헝가리 등 동구공산권 국가에서 한국과의 경제 관계 개선에 대해 물밀 듯이 제의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그에 관한 실무부서에서 근무하면서 미수교 상태의 동구공산권 국가들을 오가며 많은 현장지식과 교류경험을 쌓았습니다. 제가 연세대학에서 소동구 구상무역을 연구하여, 나중에 대북한 청산결제의 한 시범 사례를 제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현장경험에 바탕을 둔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90년대 초반, 저는 남들이 가기를 꺼리는 일본 근무를 자청하여, 동경무역관에서 조사 담당으로 근무하면서 ‘가깝고도 먼 ’일본을 배웠습니다. 그 탐구생활의 와중에서 저는 일본의 광학기기 회사인 니콘 등, 주요 기업들의 성공기를 책자화하여 공저 형태로 발간하는 한편, 조총련계 간부와의 교류, 금강산 그룹과의 접촉 등, 대북 교류를 위한 지원 활동도 관계기관과 함께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1994년 10월에는 인터넷 초창기, 일본경제신문의 해설 등을 번역해서, KOTRA 직원들에게 인터넷 활용이 용이할 수 있도록 앞장섰었고, 정보기획부장의 담당 업무를 맡아, 인터넷 수출거래알선 시스템인 ‘Digital KOTRA’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정보화에 앞장서는 새로운 도전을 지속하였습니다. 그 후, 멜버른 무역관에 부임하여, 현지 ‘UN Trade Point Development Center’이라는 유엔기관과 협업하여 KOTRA 정보화 수준의 업그레이드에 노력하였습니다. 1999년 귀국 후, e-KOTRA 팀장을 맡아 KOTRA의 지식경영 및 정보화 역량 보강의 ‘책임을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각종 정보화 관련 역사와 향후 방향 등을 ‘KOTRA 40년사’(2002년 발간)에 대거 포함되도록 기고하여, 같은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도록 하였으며, 지식경영시스템, CRM 시스템 외, 앞서 설명한 사이버 상담시스템 등도, 제 손을 거쳐 탄생하여, 현재도 KOTRA 정보시스템의 바탕을 이루도록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남보다 한발 앞서, 정보화를 위해 앞장선 것에 대한 기여로, 2001년 ‘무역의 날’에 총리 표창을 받았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나중에 임원 생활을 끝내면서 산업포장이나 훈장을 받아가기도 했지만, 저는 퇴임 9년 전에 받은 총리 표창이 저의 KOTRA 생활 중 받은 최고의 영예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KOTRA 퇴임 이후에도 제가 쌓은 정보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지금까지 많은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을 STRONG이라는 첫 글자를 따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저는 Spirit for Dream and Challenge/ Target / Relationship/Only/ Network & Ground의 앞 자를 따서, STRONG을 후배들에게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선, ‘STRONG’이라는 단어 자체가 강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기에, 자기 자신에게 ‘강해야 한다’라는 점 자체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약해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 시선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말하고 싶네요. 생존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강한 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는, 1) 꿈과 도전정신 2) 목표의식 3) 상호적인 관계 형성 4) 유일의 전문가 정신 5) 네트워크와 기본기 구축 이렇게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꿈을 정해서 도전하는 정신’은 기본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상호적인 관계 형성’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서 ‘나를 잘 알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고객이든, 직원이든, 가족이든 간에, 일방적인 관계가, 서로 간의 친밀한 관계로서,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쌍방향 소통이 기본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유일의 전문가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generalist’보다 ‘expert’ 즉, 전문영역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존의 무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학문이든, 업계현장의 실무이든 간에, 자기 혼자만의 전문가 영역을 갖고 이를 지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리더가 될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트워크와 기본기’는 자신의 ‘know-how’나 ‘know-where’를 보유한 다른 전문가 그룹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전문성’이라는 기본기도 가져야 하는데, 인간으로서의 ‘신뢰성’과 ‘인격’도 아울러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자질은 정신적인 태도와 사고방식도 포함하여, 기본적 소양의 토대가 됩니다. 저의 경우, 이런 여정을 KOTRA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견지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처음 덕목인 ‘꿈과 도전’ 부분은 다섯 항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저의 경우를 들어 좀 부연 드릴까 합니다.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저도 비록 자주 바뀌기는 했지만 꿈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사회과 지리부도를 보면서, 세계 100여 개국의 지도와 각국의 수도 이름을 외운 것이 저의 꿈과 도전적 적응력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외운 이름 중, ‘온두라스’의 수도가 ‘테구시갈파라’는 것도 제 뇌리에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세계 지도를 보면서, ‘지구 저 끝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동경심이 어린 저의 동심을 자극했었는데, 성인이 된 후, 저는 다른 어떤 기업 중에도, 한국 무역을 책임지며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는 직장인, ‘KOTRA’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꿈은 항상 새롭게 구체화해 나가야 합니다. 저의 경우, KOTRA 입사 초기에는 ‘기획관리실장’이 되는 것을 꿈으로 정하고, 달성했습니다. 그 후, 상임이사까지 승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대로 꿈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란, 환경여건의 산물로서, 자주 바뀌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주변 여건을 도전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봅니다. 저의 경우, 첫 해외파견부터 네 번째까지 선망의 대상인 미국파견을 희망했지만, 한 번도 보임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해외파견기회는 뉴욕으로 거의 굳어지던 상황이었지만 다른 경쟁자가 갑자기 내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선으로 가게 된 영국의 ‘해외무역관’의 보직에서, 제 목표를 수정하고, 도전적으로 꿈을 일구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영국 파견을 계기로 정통 영어습득과 현대문명의 요람인 유럽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영국 현장 속에서 대처리즘을 이해하고, 아일랜드와의 통상투자 관련 교류를 통해 수교로 이르도록 지원하는 등, 나름대로 성공적인 무역관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해외파견 기회에도 처음에는 미국을 지망했으나 경영진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제게 많은 보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 외에도,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현상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한일 경제 관계를 재인식하고, 한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본 사회에 대해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비록 경영진의 권유를 수락하는 형태였기는 하나, 제 삶의 귀중한 경험이자, 현재까지 제 지식과 경험의 원천으로서, 제 사고체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해외파견 역시 미국을 지망하였지만, 저는 호주 멜버른의 무역관을 재개방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1인 무역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는 호주 제조업의 본거지이자, 연방 초대 수도인 멜버른에서 IT 전시회 참가기획, 유엔 산하 거래알선 기구와의 협업, 투자유치 등, 의욕적이고 정열적인 업무수행으로 직원 3~4명의 시드니 무역관에 못지않은 실적으로 거양할수 있었습니다. DJ 정권 말기, 전 세계 최대 인력진출회사 ‘Adecco’사의 한국 진출을 실현한 것도 이 지역에 설치된 ‘아주지역본부’를 제가 접촉하면서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해외무역관 파견도 저의 강력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대신, 일본 후쿠오카 보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조직의 명령이므로 이를 수용하고, 인구 150만의 이 중소도시에서 제가 할 일을 생각하던 끝에, 큐슈대학의 사회인 박사과정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Knock(Kyshu Network of Collaborating with Korea/큐슈 일한 경제교류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큐슈의 경제인들과 한국 기업 간의 활발한 온라인 네트워크를 마련하는 한편, OKTA(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을 창립하는 등 후쿠오카 무역관의 기능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해외파견’이라는 지역선정에서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결코 실의에 빠지지 않고, 대안으로 가게 된 지역들에서 저 스스로 좌표와 실천적 도전 과제를 찾아, 무엇이든 이루어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데, 새로운 지역들에서도, 도전적으로 적응(adaptive challenging)하면서, 제 영역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청년 여러분들도, 주어진 목표나 희망이 어떠한 환경여건으로 인해 좌절된다 해도 결코 실의에 빠지지 말고, 차선이라도 온 지혜와 용기로 극복하면, 처음 목표보다 더 바람직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현재 부산경제진흥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신 지 약 9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어떤 곳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지난 2001년 설립된 부산시 산하 재단법인으로, 광역자치단체 산하에 대구와 경남을 제외하고 15개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자금, 마케팅, R&D 등을 지원하는 기구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저희 BEPA(Busan Economic Promotion Agency)는 직원 수 약 150명 규모로, 서울, 경기, 인천에 이어 조직 규모로서는 4번째로 큽니다. 제가 KOTRA 등에서 지난 38년간 여러 나라를 누비며, 현장에서 통상, 투자진흥, 연구업무 등을 맡은 바 있기에, 저는 국제 통상 분야에서 가장 깊이 있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작년 10월 10일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저는 내부 조직정비에 이어, 조직원들의 혁신역량 향상에 힘을 쏟으며, 현장도 자주 챙기고 있습니다. 부산시의 신남방, 및 북방 교류의 최일선에서 시장님과 함께 이들 지역의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원장은 조직과 사업관리의 ‘Top Management’로서 주요의사 결정의 주체입니다. 저는 조직의 관리방식과 경영 세팅 변화를 주도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외, 적재적소 인재를 발굴, 배치하는 일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탁한 세 명의 팀장은, 지금도 조직 혁신의 기수로 일을 잘해 주고 있어서, 저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 그간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통합하여, 승진 및 전보 인사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의 주요 공공기관장으로서, 부산시를 비롯해 유관기관에서 행하는 각종 모임에 대표로 참석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즉석연설도 해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해야 합니다. 특히 시의회에는 연 2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여, 업무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질의에 답변하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부산시 공무원 인력개발원 등에서 외부강연을 갖는 기회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관의 업무를 관련 공무원이나 업계 인사들을 상대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일 또한 수장으로서의 업무이기도 합니다. 또한, SNS시대에 발맞추어, 개인 페이스북을 활용해, 제가 하는 일을 거의 매일 업데이트해서 발신하는 역할도 스스로 챙겨서 하고 있습니다. 그 외, 지역 TV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언론 기고 활동 등의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행하는 일상업무 중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항은 윤리경영 중, 투명경영 활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KOTRA 재직시절의 경험을 살려, 부산경제진흥원에서도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를 맺도록 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산하는 주체로서도 관심을 두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월 급여 자투리 돈을 모아 장애인 유아원에 기증한다든지, 환경미화 캠페인과 함께 관광지 쓰레기 줍기 행사를 진행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주도하는 것도 저의 책무 중 하나입니다. 부산경제진흥원에서는 스타트업 창업지원과 일자리 알선,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추천, 산업단지 관리 운영, 금융 도시 추진센터 운영, 신발산업 진흥 센터 등 여러 가지 기능들을 종합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산시 소재 기업들과 소상공인들에게는 현장 밀착적으로 성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원장으로서 많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부산은 제가 대학과 군대 등 청년기 10년을 보낸 제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38년의 세계경험을 토대로, 이 지역 소재 기업들을 직접 고객사로서 지원하는 일이 매일같이 신나고,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부산경제 진흥원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내외의 평가도 많이 접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만하지 않고, 진흥원의 업무를 개선 시키면서, 동시에 직원들의 역량도 개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가 부임한 지 1개월이 되는 날, 직원들이 저를 환영해 주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게 남습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여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풍선으로 바닥에 꽃길을 만들어 놓고, 그 사이를 제가 걷도록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제 사무실 입구 즈음에서 축하 케이크를 자르도록 해 놓았더라고요. 저도 순간 뭉클했습니다만, 직원들이 저를 이렇게 환대해주는 것은 38년 조직 생활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접점으로, 세계 물류 5대 도시에, 기업이 자리를 잡기 좋은 도시로 향후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부산시와 함께 부산시 소재 기업의 국제화와 신성장 동력 창출을 통해 부산경제가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만전의 지원을 다 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임 8개월 2주째를 맡고 있습니다만 지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정말 바쁘게 지냈습니다. 초기 6개월은, 사내 경영혁신의 기반을 만드는 데 온 역량을 할애했습니다. 저의 결재를 받기 위해 녹산청사에서 일부러 연산동까지 사람이 왔다 가야 할 정도로 권위주의 문화와 습관적 반복문화에 젖어있는 현실을 보고, 과감한 수술에 착수했습니다. 위임전결 규정을 전면 개편하여, 권한을 하부에 위임하되, 부서장 책임을 강화하고, 명목뿐인 기구였던, ‘북방도시교류 협의회 사무국’을 ‘글로벌 사업본부’로 흡수, 통합하는 한편, ‘산단 관리센터’를 ‘일자리본부’에서 분리하여, 고객 접점 역할을 맡도록 확대 개편하는 등, 조직개편도 단행했습니다. 또한, 취임일성으로, 직원 개개인의 역량 강화가 부산경제진흥원 경쟁력의 원천인 점을 들어, ‘SMART’를 조직운영 캐치프레이즈로 도입해서, 직원들이 일상생활하면서 유념하도록 했습니다. ‘SMART’란 ‘Strategic Standpoint(전략적 관점)’, ‘Meticulous Mindset(세심한 마음가짐)’, ‘Ardent Attitude(열정적 태도)’, ‘Right and Relevant(올바르고 적절하며 Transparent & Trustworthy(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부산경제진흥원인이 되자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스마트 폰처럼 유연한 조직을 지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글자를 두 개씩 알파벳으로 연결하여, 조직운영의 원리로 삼기로 하고, 이를 22개 시설물 어디에도 부착해 놓고 실천을 다짐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구호는 제가 CEO 후보로서 임원면접 당시에 제시한 내용이었는데, 취임 후, 실제로 업무에 반영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KOTRA 재직 시절, 최장수 기획조정 실장으로서, 조직 및 사업관리, 예산과 정보화 관리 등, 조직관리 경험을 활용해서 부산경제진흥원의 경영에도 참고하고 있습니다. 부산경제진흥원 소속 직원들은, 저에게는 최대 고객으로서, 이들이 행복해야 고객들에게도 행복한 지원을 해 줄 수 있으므로,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Playing manager’형 리더십으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하는 노력을 현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팀장 역량 강화 교육에서, 저는 ‘Knowledge’, ‘Skill’, ‘Attitude’ 등의 덕목을 제시하면서, 특히 ‘Knowledge’의 경우, ‘know-how’ 외, ‘know-where’의 중요성을 소개하는, 한편 sharing(공유), unlearning(학습 해소)의 노력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팀장들에 의한 ‘middle up-down’ 경영 실천에 나서주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우리 진흥원은 올해 19년째 되는 해인데, 내년이면 성년 나이 20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년 부산경제진흥원이 더욱 역동적이고 활력있는 공공기관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우리 진흥원의 변화와 혁신은 지속할 것입니다. 경제와 경영 분야의 실무를 일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부산경제진흥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이십니다. 평생을 경제학자로 걸어오신 원장님에게 '경제'와 '경영'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선 저는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도’로서, ‘경영학’도 섭렵해온 실천가, 즉 ‘Practitioner’라고 정의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경제학은 순수학문으로서 미시, 거시를 막론하고 시장 구조와 정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경제 행위를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경영은 기업을 염두에 두고 조직의 전략이나 재무 회계, 생산 및 마케팅 등 실천적 이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경제와 경영을 함께 전공해 왔는데, 무역학도 부전공으로 대학 때 수학한 바 있고, MIS나 ERP 등, 전산 운영 분야도 KOTRA에서 실무를 익힌 바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섭렵한 것이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는 ‘뉴노멀’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론적 지식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문이든지 진화하고 발전해야만 그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 아직 노벨상을 하나도 변변히 타지 못한 것은 한국인인 저부터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경제, 경영이든, 물리, 화학이든, 학문에서는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 등, 인류사회에 이바지해야만 ‘합목적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저는 한때 ‘지식경영’을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대학의 교수나 강사들이야말로 가장 혁신하고 변화해야 할 대상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존경받는 교수들도 많지만, 학생들 취업을 챙기고, 정부의 과제나 타내서 연구비로 충당코자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경제는 경세제민의 약자로서 세상을 구하는 학문인데, 이론에만 함몰하다 보니 현실적인 적용에서는 커다란 약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을 두고 이를 케케묵은 정책, 혹은 임금 주도 성장으로 폄훼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 잣대는 뭐가 되어야 하는지, 진솔하게 반성하는 바탕 위에서 논의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영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경영학을 열심히 잘 가르친다고 그 교수가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영은 기업이라는 조직 내 의사결정을 최적화하는 ‘방법론’이므로, 개별기업별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업 특유의 경쟁우위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가져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경영의 관점이지요. 그렇기에 경영은 개별기업마다 접근방법과 강조 포인트가 달라져야 하므로 학문적인 깊이 면에서는 경제학에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부산경제진흥원장으로서 임기 초반이라 당분간은 진흥원의 기능과 역할을 향상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이기도 하고요. 부산경제진흥원은 부산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기관인 만큼, 부산시의 경제 담당 실무 창구로서, 부산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현재 조선 및 자동차 등 전통 주력산업이 세계적 경제불황과 미·중 무역갈등 등으로 인해 경쟁력 약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발, 섬유 등 경공업 제품의 경우 역시, 최근 B2C 온라인 거래 등, 마케팅 분야에서의 변화가 일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라인의 해외이전 등으로 인해 국제 밸류체인에서 부산이 집중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저는 부산경제의 지식산업화가 가장 큰 과제라고 보고 있으며, ‘스마트 팩토리’, ‘공장 자동화’ 등, 제조혁신에서 우리 진흥원이 자금, 연구·개발 지원 등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산업의 소프트화, 서비스화에 부응하여, 산업간 융복합이라든가 협업 등의 문화를 시급하게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은 세계적인 항만으로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요충지입니다. 진흥원은 현재 담당하고 있는 북방도시교류협의회를 더욱 내실화하여, 중국, 일본, 러시아와 한국의 많은 도시를, 이 협의회에 동참시키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원산, 청진 등도 이러한 협의회에 가입도록 하여, 부산이 동해안 물류와 북방 교류의 최대 수혜지로 정착되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부산에서 철도를 타고 한반도 횡단철도를 통해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날이 언제가 오겠지만, 그 전에 동해안 선박을 통해, 북한의 원산과 나진, 청진항을 오가며 물자와 인력을 수송할 날이 곧 오리라 확신합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북방 도시교류협의회를 통해, 관계 및 당사 국간의 실천적 의제 설정 논의를 주도하여, 그런 날을 앞당기는데 노력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신남방 지역의 경우, 인도와 아세안 10개국, 서남아시아도 포괄하여 부산의 경제영토를 확장하는 의미에서 통상 투자 교류를 활성화하고, 부산과의 실리적 경제교류를 확장하는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및 일본과의 교류는 주요 수출대상국이자 투자유치 대상국으로, 그 중요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최근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향후 교역과 투자 양면에서 성장 가속도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그 관건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경제진흥원은 기존의 오프라인 프로모션 수단인 전시회, 사절단, 상담회뿐 아니라, ‘B2B marketplace’ 등의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여 국제 전자상거래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부산진흥원의 원장으로서 2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끝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을 국내 지자체 산하 최우수 공공기관으로 역할 및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고 싶습니다. 저의 청년기를 키워주고, 세계를 향한 저의 꿈을 품게 해 준 이 고향 도시에서, 저는 퇴임 이후에도, 후진 양성과 기업컨설팅 등으로 저의 미래를 계속 열어가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해 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실천하는 리더십을 통해 제가 속한 기관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해 왔다고 봅니다. KOTRA에서 재직했던 30년이 그랬고, 한미약품, 도화엔지니어링, 평화엔지니어링 등에서도 저는 연봉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해외 진출을 위한 개척자의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선배, 동료, 후배, 그리고 독자분들에게 지금의 제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느 조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창의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리더’로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기식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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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법학대학을 졸업했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대학로에 입성해, 현재는 극단 '경험과 상상'의 대표로서,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고, 직접 극작을 하며, 연기도 하는, 다재다능한 연극인! 류성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을 하는 류성입니다. 류성이란 이름은 연극을 하면서 쓰는 필명이자, 예명입니다. 동생이 취미로 사주를 공부했는데, 제가 木의 기운이 너무 강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동생은 처음에는 ‘개명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저는 예명을 선택했습니다. 직업을 얘기할 때는, ‘연극을 한다’라고 소개합니다.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극작도 합니다. 때때로, 조명이나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전문적인 건 없고, 다 조금씩 합니다.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그런 제가 좋습니다. 현재 ‘경험과 상상’이란 극단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올해로 5년이 되었네요. 처음 극단 일 말고 부업도 종종 했는데, 최근 2년은 오로지 극단 관련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극단이 점차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아빠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중학생, 둘째는 초등학생이에요. 첫째는 어릴 때 제가 많이 돌봐줬는데, 둘째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어느새 아이들이 부쩍 커버렸는데, 속상하더라고요. 점점 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알아서들 하니까.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부 입시를 준비하여, 수많은 유명 배우와 연예계 종사자들을 배출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2년 만에 중퇴하고, 11년 후, 극단 경험과 상상을 창단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해 뭔가 비판적인 생각이 많았나 봐요. 고등학교 시절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법대를 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싶었어요. ‘악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법대에 진학하니, 제가 기대했던 학업과 많이 달랐기에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니까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법조계에 대한 환상도 자꾸 깨져 갔어요. 제가 동경했던 ‘검사’에 대한 꿈이 너무 순진하고 유치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렇다 보니 고통스러운 사법고시 공부에 뛰어들 자신도 없었습니다. 대신, 풍물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동적인 타악을 치고 있으면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좋았어요. 게다가 멋진 선배들이 많았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품성도 다른, 소위 ‘운동권’ 선배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개념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어요. 풍물을 하다 보니, 마당극을 할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저는 마당극이 풍물보다 더 좋았습니다. 풍물이나 무용과는 달리, 연극은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극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고, 구체적인 인물이 있고, 그를 대변하는 대사가 있잖아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던 저는, 그런 마당극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한참 연극의 매력에 빠져있다가, 입대하게 되었는데,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대부분 연극에 관한 책들이었어요. 책마다 손때가 탈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연극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 후, ‘앞으로 연극을 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니, 부모님은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도 너무 죄송하지만, 당시엔 매일 부모님과 싸웠고, 부모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꼭 해야겠더라고요. 대신, 일단 법대를 졸업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시생으로 신분으로 돌아가서 준비 기간을 거쳐, 연극영화과에 시험을 봤습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지만, 얼마 다니진 못했어요. 학교에 다니며 배우는 것도 좋지만, 연극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며 배우는 것이 더 좋았거든요. 몸도, 마음도, 뜨거웠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나중엔 아예 등록하지 않았고, 결국 미등록으로 제적되었어요. 아쉽게도 같은 과 사람들과 맺은 인연이 없습니다. 그때는 ‘그게 맞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후회가 됐어요.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거든요. 그러나, 그때는 결혼도 했고, 첫째도 태어났어요. 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시험 전날, 첫째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어요. 시험 내내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시험 도중 퇴실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젠 정말 되돌릴 수 없는구나’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후부터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학로 외, 여기저기를 다니며 ‘떠돌이’처럼 연극을 했어요. 실로, 대부분의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작품하면서 만나고, 끝나면 또 헤어지고. 다시, 다른 작품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러면서 오래 알고 지내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이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 사는 얘기도 하고, 회포도 풀고. 그 모임이 ‘경험과 상상 파티’였어요. ‘서로의 경험도 나누고, 뭔가 상상도 해보자’ 이런 뜻이죠. 근데 술도 여러 번 먹으면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가끔 세미나도 하고 연기 워크샵, 극작 워크샵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것도 여러 번 하면 지겨워지거든요. 그러다가 ‘차라리 우리끼리 공연을 해보자’라는 의견을 내게 되었어요. 다들 인지도가 높은 연기자들이 아니니까, ‘우리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라는 취지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편, 세 편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식 극단을 만들자’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땐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제가 겁이 났어요. 처음 술 마시는 모임을 제가 만들었으니까, 제가 대표를 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몰아져 갔는데, 대표라는 일을 잘할 자신도 없고, 맡으면 뭐가 고생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싫다고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과 기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떠밀려’ 저는 극단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극단의 대표가 된 것은 ‘장남 콤플렉스’와 같은 것과도 관련되는 것 같아요. 동생이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어릴 때부터, ‘첫째 노릇을 잘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강박을 가지고 자라왔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나이보다 어른스러워야 하는’, 그런 강박에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별달리 사고를 친 적도 없어요. 그리고 누군가 저한테 어떤 부탁이나 기대를 하면, 그것에 대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거절은 잘 못 했습니다. 일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잘 해내야 한다’라는 자신의 압박이 심한 것 같아요. 이런 제 모습에 대해, 저는 잘 몰랐는데, 오래 지내본 동료들은 다들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극단을 창단하고, 지난 5년 간 대표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과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30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극단 식구들이 60명에 가까워요. 50대부터 20대까지 나이도 다양하죠. 우리는 자주성, 자립성, 수평적 관계에 기초해서 운영하려고 해요.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도저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계속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맞는 것 같기에, 그걸 보고 가는 거죠. 대신, 그에 반해서 추구하는 작품의 색깔이나 예술적 특징 같은 건 없어요. 그것은 예정해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10년쯤 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과 예술적 특징에 대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게 항상 고민이고, 지금도,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극단만의 공간’이 없었어요. 연습실을 빌려서 작업하고, 극장을 빌려서 공연하고, 그렇게 3년을 보냈습니다. 공연 하나 끝나면, 다음 공연할 때까지 흩어져 있게 되니까, 응집력이 강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공연도 자꾸 많아지면서,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작업을 자주 하게 되니까, 더 절실해진 거죠. 기왕이면, ‘극장을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로는 너무 비싸기도 하고, 살아가는 리듬이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외각을 찾게 되었습니다. 영등포구 당산동에 괜찮은 지하 공간이 있었어요.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상가였는데, 넓고 저렴했어요. 건물주와 마찰도 없을 것 같았고요. 특히 제가 좋았던 건, 주변이 조용하고 한산하다는 거였어요. 보증금과 공사대금을 마련해야 하니까, 저랑 단원들 다섯 명이 각각 1천만 원씩 대출을 받았어요. 그 돈, 아마 돌려받기 힘들 거에요. 돌려받을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요. ‘극단만의 공간’인 극장을 2년 남짓 운영했는데, 정말 좋아요. 상시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공간이 있으니까 작업하기가 너무 편하고, 쉽습니다. 공간이 극장이니까,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것도 편해졌어요. 대학로가 아니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걸 상쇄하는 장점이 훨씬 더 많으니까. 일단 전문 연극인이 아닌 관객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전에는 ‘내 마음의 관객이 전문 연극인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엔, 그런 관객들한테 인정받는 게 목표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연극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날까’하는 고민으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느슨한 네트워크 모임이었던 우리 극단이, 이젠 자기 공간을 기반으로 단단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어요. 함께 작업하는 동료에서 이젠 점점 한 식구가 되어 가는 느낌. 그래서 더 깊어지고, 더 오래갈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겨요. 바로 직전, 극단의 전용 극장을 마련하며 생기는 장점을 말씀드렸지만, 실은 항상 살얼음을 걷는 느낌이에요. 물론 돈 때문이죠. 연극을 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간이 있으므로, 매월 고정적으로 꽤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극장 대관을 자주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작업하는 공간으로 자주 쓰기도 하고, 대관을 주면 우리 단원들이 오지 못하기 때문이죠. 다행히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는 있는데, 극단 통장 잔액에 빨간불이 들어올 때도 종종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극장에 대해 장점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많아요. 시설을 관리해야 하니까. 행여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불이 나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은 물론이고, 건물이 낡아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하는 일도 자주 생기고. 잠깐씩 빌려 쓸 때는 알지 못했던 수고가 낯설 때도 많아요.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극단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작품의 연출을 맡기도 하고, 극본을 직접 쓰기도 하고, 연기하면서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대표, 연출, 작가, 배우 중 '류성'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하고, 돋보이게 하는 직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처음엔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연출할만한 작품이 없는 거예요. 기존 희곡들이 재미도 있고 좋지만, 저는 경험이 없으니까 자신이 없고, 잘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어요. 최소한 내가 쓴 거니까 그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곧, ‘배우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연출도 못하겠구나’, ‘직접 연기를 해보지 않고서는 좋은 문장을 못 쓰겠구나’라는 생각에 연기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이것저것 다 하게 된 거죠. 객관적인 조건들도 있었습니다. 연극은 산업화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고도로 분업화되기 어려워요. 그러므로, 저처럼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전문가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라고. ‘총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전문성’,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에 대한 경고죠. 저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해요. 연극은 특히 ‘협업’이 중요한 분야입니다. 사람마다 특기는 있지만, 협업을 위해서는 다른 작업에 대해 이해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협업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어요. 우리 극단은 특별히 창작극을 주로 하고, 그래서 저도 극작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극단의 공연을 위해 대본을 쓰는 거죠. 외부 의뢰를 받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본을 쓸 때 다른 작가와 비교해, 시간 대비, 빨리 쓰는 편인 것 같아요. 대신, 구상하는 기간은 길고, 관련된 자료를 정말 많이 찾아보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후다닥’ 쓰죠. 장기간에 걸쳐 쓰니까 완성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끝까지 써내려고 해요. 그리고 써놓고 나면 잘 고치지도 않아요. 여러 번 고쳐본 적도 있는데, 점점 더 나빠지더라고요. 제가 쓴 대본을 스스로 평가하자면, 공연성은 있지만, 문학성은 떨어진달까요? 애초에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라 그렇고, 또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기에, 문장이 좋은 작가들을 보면 정말 대단해 보이고, 또, 아주 부러워요. 하지만 흉내를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 만의 장점’이 사라질 수 있으니깐요. 많은 일을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할 때 제일 좋아요. 연기할 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가장 많은 걸 배우고, 느낍니다. 아무리 제가 쓰고, 제가 연출한 작품이라도, 제가 직접 연기를 할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돼요. 할 수만 있다면, 연기만 공부하고, 배우의 직업만 집중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도 알거든요. 연기가 정말 어려운 예술이라는 걸. 그렇기에, 만약 정말 배우만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해야 하잖아요. 연기라는 예술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배워서 잘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분명히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이 필요해요. 저는 그 재능과 감각의 벽에서 좌절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법대 그만두고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취미로 남겨둬라. 직업이 되면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라고. 그리고 이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를 캐스팅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극단 작업만 하니까 특별히 오디션에 관여하지는 않아요. 극단내부에서 단원들끼리 오디션을 보는 경우도 잘 없어요. 사실 무엇을 기준으로 봐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우리끼리는 서로의 재능을 잘 아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잘 어울릴법한 역할로 캐스팅하는 편이에요. 소위 말하는 이미지 캐스팅이죠. 제 딴에는 배우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을 적어내 보라고 하기도하고.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서 우리 배우들의 목마름 같은 게 있어요. 누구나 남들이 모르는 숨은 매력이 있는데, 그걸 보여줄 기회가 차단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극단내부 오디션을 보자는 이야기도 종종 나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기회라는 긍정성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는데, ‘제가 누구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라는 데에서는 막막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첫째, 사회에 대한 철학이 있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는 배우들. 기본적으로 연기에는 그 배우의 모든 것이 묻어납니다. 자연스럽게 지성과 인품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소위 연기의 깊이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에서 좌우되는 것 같아요. 둘째, 작업하기 좋은 배우들이 좋아요.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던가, 동료 배우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집단 작업인 연극과 극단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술 버릇이 안좋은 것도 그 중 하나예요.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연습하면서 상호 간에 그 믿음을 키워가야 해요. 나는 내 동료가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창조적인 배우들. 연기는 일단 자연스러워야 해요. 그러다 보니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연기로 빠지기도 쉽거든요.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예술이란 반드시 의외성과 논리성이 함께 결합하여야 해요. 그걸 결합하는 능력이 바로 창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은 작품을 대학로 무대에 올렸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15년 소극장에서 초연한 뮤지컬 <화순1946>이에요. 1946년, 화순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초연 공연 때, 무려 50명이 출연했어요. 앙코르, 재 앙코르를 거듭하면서 점점 큰 공연장에서 했죠. 광주와 제주에 초청공연을 하러 가기도 했고요. 그러다 꼭 1년 후, 광화문 광장에서 공연했어요. 100명의 배우가 출연했고, 약 4천 명의 관객들이 오셔서 관람했습니다. 우리 극단이 한 작품 중에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했나?’ 싶어요. 그때는 박근혜 정권 말기였어요.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의견이 팽배했습니다. 국가에 대해 질문하고, 분노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연극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연극은 근본적으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니까요. 그런 시대적 배경이 뮤지컬 <화순1946>을 1년 동안 이어가게 만들었던 힘이었을 거에요. 우리는 1년 동안 공연을 했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더 감동적입니다. 사실 ‘화순탄광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거든요. 그런데 우리 공연을 계기로 ‘역사연구모임’들이 만들어졌어요. 우리 공연을 보고 감동하였던 어느 방송국 기자님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어요. 상부의 허락이 안 떨어져서 수년이 걸렸지만, 결국 만들어졌고, 공중파를 통해 전국방송도 했고, 현재는 여러 영화제에 초청도 받아 상영 되고 있습니다. 묻혀있던 역사가 한 작은 극단의 뮤지컬 공연으로 인해, 새롭게 조명되었고, 이젠 많은 국민이 알게 됐어요. 참 뿌듯하죠. 뮤지컬 <화순1946>의 공연을 통해 크게 배운 게 있어요. 당시, 극단의 제작비도 없었어요.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만들어 갔어요. 각계각층의 응원도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이 마음이 맞고 뜻이 맞으니까 못할 일이 없구나’ 싶었어요. 우리 극단의 신조가, ‘우리가 돈이 없지 투지가 없냐’였거든요. 좋은 환경에서 한 공연들이 아니니까,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고생을 한 만큼 우리 서로가 보람찼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웠거든요. 그때 맺은 인연과 그때 느꼈던 힘이 동력이 되어 극단이 한 단계 도약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원들이 대거 늘어났고, 극단의 이름도 좀 알려졌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사고를 치니까’, 뭔가 용감해지더라고요. 그런 경험 때문에 극장을 만들 때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 극단의 분위기나 기풍은 그 공연을 하면서 만들어진 게 많아요. 연극과 뮤지컬 등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였는데, 드라마나 영화 등 상업 영상 분야로 진출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요? 꽤 많은 작품을 쓰고 연출했지만, 저는 여전히 ‘무명’이에요. 하지만 그런 ‘무명’이란 말이 싫지 않아요. 무슨 상을 받아본 적도 없어요. 당연한 일이죠. 그런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어릴 땐 유명한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하고, 저도 ‘유명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연극을 하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연극판에도 ‘등급’이 있더라고요. 저는 ‘E등급’ 쯤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이 등급 간의 벽이 대단히 높아요. 한국 사회구조와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노력한다고 C, B, A로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러니 쓸데없이 힘쓰고 좌절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은 극단 식구들과 온종일 어울려 같이 밥 먹고, 같이 연극 만들어 올리면서…. 그렇게 사는 게 좋습니다. 저도 그렇고, 극단 식구들도 그렇고, 아무도 ‘유명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 극단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고,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연극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진짜. 얼핏 보기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에요. 누구 하나가 아주 유명해지는 것보다, 하나의 공동체가 오래도록 유지된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정신적인 가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제적으로도 그게 더 효율적이에요.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성공하고 유명해진다고 해서 몇 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제 성공은 얼마나 오래 유지될까요? 그러나 공동체에서의 모두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고, 서로를 보호해줄 수 있어요. 함께 감당하고, 함께 헤쳐 나가고, 함께 풀어갈 수 있고요. 그러면 인생이 덜 외롭고, 덜 무섭잖아요. 예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저는 그게 더 낫다고 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은 제 삶의 90%를 차지하는 게 극단이라, 개인적인 계획은 없어요. ‘극단의 계획이 곧 제 계획’인 셈이죠. 극단이 이제 5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고민이 많아요. 더 발전해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과연 무엇을 ‘발전’으로 볼 것인지 그 내용을 찾고 있어요. 최근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연극계의 풍토도 굉장히 많이 바뀌고 있어요. 기존의 악습과 구태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연극인들이 많아요. 우리 극단도 그중의 하나고요. 새로운 길을 찾는데 본보기란 없어요. 그러니 다들 ‘과정의 건강함’에 창안하게 되는 것 같아요. 너무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게 첫 번째 계획이에요. 두 번째 계획은, 극단의 대표직을 내려두는 겁니다. 이건 계획이 아니라 어쩌면 그냥 개인적인 소망 같은 거예요. 어쩌다가 몇 년째 리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저는 리더를 오래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군대로 비유하면, 저는 ‘신중한 지휘관’보다, ‘소총 들고 뛰어다니는 병사’가 체질이에요. 지금도 극단의 대표라고 많은 책임을 지고 있지는 않아요. 우리는 같이 논의하고 같이 책임지니까. 그래도 심적으로는 항상 부담이 있습니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또한, 개인적인 부담을 떠나서, 극단을 위해서도, 제가 대표를 그만두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지금은 제가 대표에, 연출에, 극작까지 겸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제 상태가 극단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거든요. 이건 바람직한 그림이 아니죠. 그 외엔 무언가 특별한 것은 없어요. 공연을 찾는 관객분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잘 컸으면 좋겠고, 그런 소소한 것들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별로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고. 그런 거 잘 못 해요. 그건 성격 탓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연극이라 그런 것 같아요. 연극은 혼자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모여져야 진행되는 일이니까요. 세상에서 '노동'이야 말로 어쩌면 가장 정직하지 않을까? '노력한 만큼' 그리고 '그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 그리고 노동장에서의 '산재'란 가장 '공정'해야 한다.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것'. 이 간단한 이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찾을 수 없는 쟁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쟁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과 '산재' 분야의 변호사인 손익찬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노동자의 권리와 건강을 지키는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의 손익찬 변호사입니다. ‘일과사람’은 노동사건과 노조자문, 그리고 산재 사건을 합니다. 이런 사건에서 전혀 회사 측을 대리하지 않고, 오로지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하고 생각한다는 점이 우리 사무실의 강점이자 특징입니다. 저는 2013년도에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2016년도까지는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했습니다. 후에, 첫 직장으로 경기도청에서 임기제 공무원으로 잠깐 있다가, 2017년 3월부터는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에서 노동사건, 노동조합 자문, 산업재해 사건을 담당했습니다. 2019년 2월부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회 회원이면서, 노동자건강권팀의 팀장을 하고 있고,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비상근)으로 위촉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개를 하자면, 2014년, 교회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다섯 살과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습니다. 막간을 이용해 홍보하자면 제 아내는 용인 수지에서 ‘언니들 방앗간’이라는 이름으로 떡케이크 가게를 하면서 앙금플라워 케이크, 백일 떡, 돌떡, 답례 떡을 만듭니다. 많은 진로 중 왜 '법대' 진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법대 재학 시절, 사법시험이 없어지고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시험 합격 전, 학창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파트 숲속의 신도시에서 자랐고, 큰 고민 없이 살아서, 직업적인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무언가를 하면서 살고 싶긴 한데, 뭐가 하고 싶은 것인지,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살면서 큰 계기가 없었고 롤모델도 딱히 찾기 어려웠다고 말씀드리면 정확하겠습니다. 고등학생 때 그런 고민을 저의 친형님한테 털어놓았습니다. 저의 형님이 저보다 두 살이 많고 공부도 잘하셨거든요. 저의 형님께서는 저에게 우선 성적을 잘 얻고 그 좋은 성적으로 대학진학에서의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일리 있는 말씀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성적이 잘 나와놓고 보니까, 대학도 성적에 맞춰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인이 이상이나, 생각이 없으면, 성적이 잘 나와서 학과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도, 주변의 기대대로 선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당시 법조인이 될 생각이 없이 법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대 신입생 때는 외무고시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제2외국어도 전문가 수준이어야 하고, 제3외국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하여야 한다기에, 외무고시는 빨리 포기했습니다. 사실 대학교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딱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 없이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수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고, 책을 깊이 있게 보고, 생각하고, 빠져들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도서관 가서 정말 여러 가지 책을 접했습니다. 법학 서적을 보더라도 수험서를 안 보고, 교수님들이 쓰신 법학 서적도 밑줄 그어가면서 거기에 저 혼자서 교수님 생각도 비판하는 견해도 쓰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면 법대생으로서는 자격 미달로 살았던 셈입니다. 동아리나 이념서클, 종교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것도 아니어서,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대신, 저는 도서관에 가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7년, 저는 동문 다 하는 사법고시 공부도 해봤지만 1차 시험에 떨어지고, 바로 봄학기에 복학한 다음에는, 정말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늦게나마 고민했습니다. 앞으로 3학기만 다니면 졸업이어서 군대를 가야 했습니다. 제겐 시간이 없어 보였어요. 그때가 2008년이었는데, 한창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 한반도 대운하, 의료민영화 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1년 만에 나라가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에 ‘2MB’나 ‘쥐박이’같이 대통령을 욕하는 댓글만 달아도 경찰서에 불려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 시절 때는 그런 면에서 덜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문재앙’이라고 댓글 달았는데 경찰서 불려간다고 상상해본다면 그때 사회 분위기의 느낌이 오시겠죠. 법대생으로서 시국을 바라보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헌법 수업에서,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뽑아놓은 사람’이고, ‘명예직인 국가원수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불과한 국민의 한 사람’인 거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나은 답이 도출되는 거’라고 배웠는데, 모든 게 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살아본 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사는 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2008년, 그 한해,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혼자 외롭게 나갔습니다. 경찰들이 집회 나온 시민들을 때리고, ‘닭장차’에 연행하고, 전경들이나, 경찰들은 역시 밤새우면서 고생하고, 시위대는 경찰차 때려 부수고,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결국, 우리는 다 별 볼 일 없는 국민인데, 정치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진 ‘어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뭘 했나?’ 싶은 거죠. 저는 그때 대학교 졸업도 앞두고 있고, 남들이 보면 명문대 법과대학 출신으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여길 텐데, ‘나는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도대체 뭘 했나?’ 돌아봤는데, 정말 ‘하나도’ 없는 겁니다. 대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시위한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남들 고시 공부할 때, 공부하고 '위닝 일레븐' 할 때, 같이 '위닝 일레븐'하고, 혼자 도서관 가서 책보고 그게 전부인 거에요. 그때부턴 ‘누굴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몇 년이 지나면 결국 똑같은 어른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에 법과대학에 개설된 박경신 교수님 수업을 듣고, 교수님이 주도하신 ‘리걸 클리닉’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리걸 클리닉’이라는 것이 미국제도로서 로스쿨 내부기구인데, 비교하자면 인턴십이 로스쿨 학생들이 외부의 기관에 나가서 실무가들에게 일을 배우는 것이라면, 클리닉은 실무가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실무도 알려주고 교육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고려대가 2009년 개원할 로스쿨 시대를 대비해서 학부생들 대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했는데 저도 구성원이 된 것이지요. 박경신 교수님의 지도하에 소위 말하는 인권변호사들, 공익변호사들을 만나고, 또한, 언론노조나 외국인노조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2008년을 지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변호사 중에서도 공익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꽤 있고, 보람차게 사는 모습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롤모델로 삼을만한 분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과 상관없이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어요. 사회 전체를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보수는 정치, 재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가 지금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방식으로 굴러가는 게 보였거든요. 하지만, 진보,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쪽은, 모든 면에서 자원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나’ 보니까, 그나마 잘 하는 게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론적인 연구를 더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로스쿨 체계가 도입된 이후여서, 앞으로 법과대학에서 학문하는 사람을 뽑더라도 실무가 출신을 선호할 거라는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 초에 법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다행히 부모님의 지지 아래, 2010년,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바로, ‘인권법학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때가 2010년도였는데, 사회 분위기가 ‘새벽이 오기 전’의 2시, 3시 같았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해가 뜨긴 뜨겠지만 언제 뜰지, 해가 정말 다시 뜰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질식해버릴 것 같은 시기였지요. ‘용산 참사’나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도파업’ 같은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는데, 뭐 하나 잘 되는 게 없고, 파업하면 업무방해죄로 끌려가는 등, 민사 손해배상이 줄줄이 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 시대를 지나며 저는 자연스럽게 노동문제와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모든 사람의 출발선이 공평할 수는 없습니다. 출발선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한 만큼 공정한 대가가 주어져 정의로운 사회겠지요. 말하자면 부모의 출신이나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한 개인을 존엄하게 여기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아야겠지요. 현실은 잔혹하더라도 목표는 그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사회문제 중에서도, 특히 ‘노동문제’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가장 왜곡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업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이 너무도 달라지는 것이죠. '얼마나 육체적인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하느냐', '월급은 얼마를 받느냐', '고용불안이 있느냐 없느냐' 등. 사회에 좋은 일자리가 너무 없으니까, 어떻게든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하고, 사교육에 과도한 비용이 들어가고, 온 국민이 줄 세우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기 전에는 그냥 모든 국민이 줄을 서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까 결국은 ‘돈 앞에 국민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걸 ‘자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념적인 공부를 한 게 아니어서 그게 적절한 표현인지를 알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표현하진 않겠습니다. 이제는 정치 권력보다도 경제적인 부, 돈을 가진 자가, 사회적인 자원, 문화적인 자원, 미적인 우위까지 모두 독점하고 있는데, 거기에 잘못 보이면,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힘듭니다. 그만한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객관식 답을 열심히 찍어왔고, 제 생각을 마음껏 펼치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왔던 것입니다. 제 생각대로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기는 사는데, 적극적으로 ‘남을 위한’ 인생을 사는 방법만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노동문제’ 중에서도 ‘산업재해’ 문제는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노동문제야 살면서 어떻게 싸워나가면서 노조도 만들고, 모순도 해결하고, 투쟁하며, 개선해나갈 여지가 있지만, 산재는 죽으면 그거로 끝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남은 자들은 괴롭고 슬퍼할 여지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이 세상이 너무도 무관심한 게 눈에 보였습니다. 오로지 비용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노동자도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저렇게까지 대우할까 싶을 정도였어요. ‘자기 부모나 자식이 죽었더라도 저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는 겁니다. 고용자들이 노동자를 자기 이웃으로,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당사자가 권리를 찾기 위해서, ‘싸우기로 했으면 끝까지 함께 싸워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를 돕는 단체인 <반올림>에 가서 유가족분들, 노동 안전 활동가분들 외, 노무사와 변호사님들을 만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마침 또, 제가 <반올림>으로 실무수습을 갔던 때에 산재 사건 중 역사적이었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1심 판결 선고도 있었고, 그때 당시 저를 지도해주셨던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조지훈 변호사님, 그리고 ‘민주노총 법률원’의 임선아 변호사님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봤던 사건들이 대법원에서 산재로 인정받았습니다. (대법원 2015두3867-다발성 경화증, 대법원 2016두1066-뇌종양) 또, 사건인터뷰를 했던 ‘매그나칩 반도체 엔지니어 산재 사건’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관여한 위 사건들에서 제가 법률적으로 한 것은 없고, 그야말로 변호사님이나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님 쫓아다니고, 노동 안전 활동가분들 따라다니는 정도만 하고 관련 판례 공부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우연히 한 사건 원고 분을 부산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제 또래였습니다. 제가 빠른 87년생인데, 그 원고분은 84년생 여성이셨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것 없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좋은 성적 덕택에,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남들과 다르지 않게 일했고, 일하다 보니 병에 걸렸다.’ ‘안전교육은 받은 것이 없고, 안전병에 대해 들은 바도 없다. 그저, 물량을 많이 빼야 해서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했다.’ ‘그러다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걸렸다.’ 이게 끝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서 이 분이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삼성반도체 최초 피해제보자인 故 황유미 씨는 85년생입니다. 故 박지연 씨는 87년생이었고요. 꽃다운 청춘이지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고 언제부턴 저보다 어린 피해자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삼성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을 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나 저와 같은 가장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보면서, 이 ‘노동 안전 문제’만큼은, 앞으로 어떤 분야의 변호사가 되든지, ‘관여해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전업’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영화 '재심'에서 정우(이준영 역)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대사를 합니다. '비싼 돈 들여 어렵게 공부한 이유가 뭐예요? 돈 많이 벌고 싶어서 아니었나?' 변호사의 분야도 다양하지만, 특히나 '노동 관련 변호사'라고 하면, '노동인권', '노동자', '프로보노' 등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금전적인 소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분야에 대한 분명한 소신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신혼집은 투룸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술집이 많고, 다방도 많고, 모텔도 많은 동네에 신혼집 차렸는데, 거기서 첫째가 태어났습니다. 밤에 창문 열어놓으면, 술병 깨지고, 사람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종종 들리는 동네여서, 밤에 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가는 것도 무서운 동네였습니다. 지금은 용인 수지에 살고 있습니다. 제 취미가 달리기인데, 수지지역을 달리다 보면 원룸, 투룸부터 작은 아파트, 고급아파트에 고급 주택까지 다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있다 보니 돈 많으면 애들이 해주고 싶은 대로 다 해주고, 미국유학도 보내주고, 여러모로 편리하겠지요. ‘노동 관련 변호사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못 버는가?’ 이렇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열심히 일하면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아무리 의미 있는 사건이어도 웬만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수임료를 받습니다. 대개, 해고사건이나 임금사건, 산재 사건을 맡기는 의뢰인이나 유족분들은 그렇게 수임료를 아끼진 않으십니다. 그만큼 의뢰인분들께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많은 분야 중에서도 하필 노동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앞선 질문에서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사회의 모순에 메스를 대자면 남북문제, 교육, 공정거래법 등이 있겠지만, 제가 직업을 선택할 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분야가 노동과 산재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그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저에게는 ‘티핑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왜 노동사건을 하면서 노동자, 노조 측만 대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자면, 양심적인 기업인을 대리하고 자문하는 역할은 저 외에 다른 훌륭한 분들이 많이 해주고 계십니다. 굳이 저까지 거기에 힘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물어보시는 말이,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해서, 사 측 사건은 아예 안 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이나 개별 단체의 도덕성을 떠나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편에서 사건을 하는 일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힘이 센 노조나, 힘이 센 개별 노동자는 우리 사무실에 사건을 맡기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영향력 있는 큰 법무법인에 사건을 맡기는 때도 있습니다. 노동문제에 있어서 회사자문을 주로 하는 법무법인도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노조나 노동자 대리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은 좋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의 자문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사회에서 ‘노조’, ‘노동조합’이라는 말은 상당히 불온하게 여겨지지요. 과거에는 노조원들이 ‘빨갱이’로 매도되면서 북한과 연결성이 있다고 생각된 적이 있고, 타당하지 않은 지점까지 비난해가면서, 경영인들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로 비치기도 합니다. 80년대 MBC 문화방송에서는 노동조합이 촛불을 켜놓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연출되어 방영된 적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노조가 조직된 회사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대부분, 임금이나 노동환경 면에서 다닐만한 회사인데 그래도 불만 사항이 있는 경우입니다. 단 그 업계가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이 철저하게 이뤄진다고 구성원들이 ‘여기면’ 노조가 조직화하기는 어려운데, 보상이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실리콘밸리나 변호사, 의사업계에 노동조합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면, 같은 업종의 노동환경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로 열악하여서 이 회사에서 한번 뿌리박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환경을 좋게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조직된 노조도 꽤 있습니다.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니까 더는 도망 다니지 말고 이 회사를 좋게 만들어보잔 거죠. (다만 일 자체가 오래 못할 일이라고 여겨지면, 예컨대 지나친 저임금에 과도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는 곳이면, 다들 짧게 일하고 직종을 옮길 생각을 하므로, 노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낮습니다) 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기업가 쪽에서는 생산성을 깎아 먹는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반대로,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노조가 있는 회사나 없는 회사나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은 별반 달라질 게 없는데, 노조가 잘 굴러가는 회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동환경이 나아서 욕먹는 것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는, 비정규직 소속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몫을 뺏어간다’라고 여기고 공격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장마다 논박하지는 않겠습니다. 상황마다 비판이 맞는 일도 있고 틀린 일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어용노조, 즉 회사의 편에 서서 조합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노조도 꽤 있고, 비정규직 문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정규직 노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사람 사는 곳은 결국 정치투쟁의 연속이고, 혼란스럽더라도 이걸 허용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라는 점입니다. 그런 혼란을 국가권력이 인위적으로 억압해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이 독점되었던 시기의 부작용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는 다원주의 사회를 용인하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노동조합 문제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한데, 개별 노동자들의 힘이 너무 약하니까, 노동자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그걸 국가와 회사가 억눌렀을 때의 부작용이, 허용했을 때의 혼란보다 더 컸다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그 성질상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강경투쟁만 할 수는 없고, 끊임없이 조합원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노조는 주식회사와는 달리 한 사람이 한 표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강성노조가 들어와서 조합원 민심을 사지 못하고 정치를 못 하면, 탄핵당합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유약한 노조가 들어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이제는 복수노조 시대여서, 과거에 노조원이 많은 다수노조였어도 회사내에서 노조활동을 똑바로 못하면, 소수노조와 다수노조가 역전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경영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자문한 공기업이나 금융권 노동조합의 사례를 보면 노동조합이 경영의 감시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항상 주주와 경영자의 불일치로 인한 대리인 비용이 문제가 됩니다. 경영자가 단기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지, 혹은 회사의 이익이 아닌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가 감시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노조와 주주는 이해관계를 같이 합니다. 회사가 지속해서 오래 성장하고, 이익을 많이 남겨야, 조합원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노조자문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자문하게 됩니다. 노조자문은 우리 사무실의 정승균 노무사님이 전문이십니다. 노조 설립부터, 조직화 전략, 규약 검토, 회사와의 교섭, 교섭 외에 공문 보내는 것, 회사의 비리 잡아내기, 파업, 해고, 소송 등 모든 분야를 자문합니다. 일반적인 회사자문 하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노조는 노사관계를 좋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싸우려고 노조를 설립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오면 또 싸워주는 게 노조의 역할입니다. 싸울 일이 없으면 다시 잘 지내고요. 그 모든 과정, 언제 싸울지, 언제 화해할지 등 법률적이지 않은 부분도 조언해줍니다. 노동조합 자문 외에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노조 외의 ‘단체법’ 분야입니다.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제가 기독교인이다 보니 교회, 종중,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회의 등 민주적으로 의사결정 해서 조직원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단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정해야 하는 분야가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NGO나 NPO 내의 법률자문 필요성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노조자문의 한 우물만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노동 관련 외에 산업재해, 산업 안전 관련 변호도 하고 계십니다. 변호를 맡았던 소송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제가 지금 맡은 사건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이 없고 진행 중인 사건이 많아서 구체적인 사건을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산업재해에 관한 관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산업재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삼성전자 직업병> 투쟁, <반올림>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동기 부여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운 싸움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지만, 혹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내 뒤에 올 사람은, 내가 실패한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니까’, 길게 보면 ‘노동 안전’이 더 좋아지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반복해왔고요. <반올림> 투쟁을 보며 그런 점을 배웠고, 저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 하나 보태는 심정입니다. <산업재해의 탄생>이라는 책을 봤습니다. 19~20세기 영국의 노동 안전 분야의 발전사를 압축한 책입니다. 예전에는 굴뚝 청소를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맡겼는데, 그때도 똑같이 인과관계를 따졌어요. 지금 반도체공장 산재 사건에서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굴뚝 청소하는 어린이들이 온갖 병에 다 걸렸는데, 그건 작업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주거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그렇다는 논변입니다. 일리 있는 부분도 있지요. 또 굴뚝 청소에 직업병을 이유로 아동노동을 금지하거나 규제를 하게 되면, 아동이 들어가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으므로, 청소가 제대로 되지 못해서 건물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논변도 있었습니다. 방직공장에서의 노동도 그렇고, 탄광이나 철도 산업,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교적 원인이 명백한 사고의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직업병의 경우에는 대개 인과관계를 문제 삼거나, 인과관계를 연구할만한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그때에는 전체 경제에 미칠 영향을 언급하면서 규제가 타당하지 않다는 논변이지요. 그런데도 지금 영국은 어째서 대한민국보다 산업재해 ‘만인율이 압도적으로 적은’ 나라인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긴 어렵지만, 노동조합의 투쟁도 있었고, 인도주의적인 의사나 정치인들, 학자의 도움도 있었고, 그런 사회의 여론화 과정을 통해서 입법을 통하여 안전규제를 강화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국이 우리나라보다 더 안전한 나라인데, ‘그 나라는 규제가 많아서 나라가 망했는가?’ 아닙니다. 영국에서 산업 안전 규제가 처음 생겼을 때의 내용 중 하나가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면 방어 울타리를 세워서 노동자의 신체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안화력의 故 김용균 씨는 그 방어 울타리 역할을 하는 뚜껑을 열고 귀를 대고 소음이 어떤지를 들어보고 이상 여부를 확인하는 업무를 하다가 옷가지가 말려 들어가서 컨베이어 때문에 온몸이 갈라지고 터져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영국과 똑같은 규제가 있는데도 아주 기초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이게 제 요즘 생각입니다. 추가로, 산업재해 개별 사건에 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업재해 사건 대부분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이 질병이나 죽음이 업무와 관련된 것임을 다퉈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도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이미 공단에서 산재를 승인받고 추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죠.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의 내용이 무엇인지, 무엇이 위험한지, 왜 질병이나 죽음이 업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의뢰받는 사건 대다수가 당사자가 이미 죽어버려서 얘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법원을 설득하려면 업무를 객관화시켜서 보여주어야 하는데 문서나 CCTV 같은 증거를 얻기도 어렵고, 얻게 되어도 그 의미를 밝혀내는 것도 어려워요. 회사도 협조를 잘 안 해줍니다. 과로사 사건을 예로 들어볼까요.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사망하기 12주 동안 1주 평균에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하고,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1가지 이상이 있으면 산재로 인정받기가 쉬워집니다. 이런 업무부담 가중요인은 교대제 근무나 휴일 부족, 정신적인 긴장, 육체적 부담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 처지에선 사망하기 12주 동안의 업무시간을 입증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힘듭니다. 산재 인정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싸움이고, 산재로 인정되어도 사업주가 입는 불이익이 거의 없는데도 협조를 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사업주에게 묻게 되는 민사책임을 경감시켜주는 게 산재보험인데도 말입니다. 사업주들은 굉장히 불명예스럽게 여기고, 또 ‘다른 사람은 안 죽었는데 유독 그 사람만 문제가 있고 그것은 개인적인 게 아닌가?’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렇게 사업주가 근태명세를 안 보여주면 결국 교통카드 내역이나 하이패스 내역 같은 것이라도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과로사가 이런데, 사업장 내에서 물리적 화학적인 요인에 노출되어 사망한 직업병 사건의 경우에는 증거를 얻기란 훨씬 어렵습니다. 사업주가 직접 내놓은 일은 기대할 수가 없어서, 사업주 측에서 관련법에 따라 측정한 작업환경 측정자료 등을 공공기관을 통해서 입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위험을 키우는 일이지요. 그 대신 임금을 받는 겁니다. 위험을 부담하지 않으려면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 게 가장 안전한데 그러면 굶어 죽게 됩니다. 결국, 성경에 나온 대로 ‘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종신토록 수고해야만 땅의 소산을 먹는 것’입니다. 일해야지요. 일해서 가족도 부양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개별 노동자나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재해 보험이라는 게 있는 것인데, 자료수집부터 만만치 않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시는 것 외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노동자건강권 팀장,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이십니다. 각각의 기관에서는 어떠한 업무를 맡고 계시는가요? 민변 노동위원회에서는 노동자건강권팀의 팀장을 하고 있습니다. 팀장을 맡은 지 한 달이 막 지났습니다. 노동자건강권팀은 민변 노동위원회 내에서 산업재해나 산업 안전 문제를 연구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한 소모임인데,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변을 통해서는 주로 공익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들을 하게 됩니다. 개업이 자리가 잡히면 민변 활동 비율을 더 늘려갈 생각입니다. 또한,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비상근 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있는데, 대략 분기에 1회꼴로 위원회에 참석해서 안건을 심의하고 의견을 냅니다. 제가 주로 하는 산업재해 사건 중에서 직업병 사건은 모두 질 판 위의 심의를 거치게 되는데 그 위원회의 위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라는 노동자 안전보건 단체의 회원으로 있습니다. 최근엔, 유튜브에서 <당장멈춰 TV>라는 채널의 패널로도 가끔 출연하고 있습니다. <당장멈춰 TV>는 국내 유일의 노동 안전 채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맡는 소송들이 짧게 끝나는 단순 사건이 아닌 만큼 감정 소모도 굉장할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와 피로도도 많이 쌓일 것 같은데, 시간은 없고, 이런 것들을 한 번에 해소하는 특별한 취미가 있나요? 가장 확실한 것은 잠과 운동입니다. 문제는 일이 많으면 잠을 못 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주중에는 잠을 줄이고 대신에는 주말 중에 하루만큼은 확실하게 잠도 많이 자고 일 생각을 안 하고 쉬려고 합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잠을 자는 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아직은 사업 초기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늦잠을 잘 때는 자고, 깨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과 놀려고 노력합니다. 일과 가정을 양립시키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사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지요. 자다가도 생각납니다. 그래서 찾은 다른 취미가 달리기입니다. 여러 운동을 찾고, 달리기를 선택한 다음에도 여러 방법을 찾아봤는데, 지금은 주말에 딱 하루, 1시간 반 정도를 달립니다. 달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기분이 좋습니다. 또, 일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는 달리면서 일 생각을 하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일주일에 이 정도 달리기하고, 주말에 하루 정도 잠을 많이 자면, 주중에 체력적으로 힘든 일은 크게 없습니다. 한 줄 요약을 하면 스트레스라는 것도 결국 몸이 버텨주지 못할 때 오는 현상인 것 같아서 체력관리에 우선을 두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올해 초에 개업한 법률사무소를 안정화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저를 포함해서 변호사 2명과 노무사 2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공동대표인 최종연 변호사는, 저의 법과대학 학부 동기이자 법학전문대학원 선배로 저와 함께 여러 노동 사건을 수행하고 있는 동시에, 제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참 고마운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외, 산업재해 문제의 대가이신 권동희 노무사님, 그리고 노조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정승균 노무사님이 계십니다. 각자 전문성이 확고하면서도 팀워크도 좋으므로 금방 자리를 잡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이상은 이 분야에서 일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이 노동조합/노동자 측 사건만 전문적으로 하면서, 지속해서 고용을 만드는 ‘기업’으로서,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저도 법학전문대학원을 재학할 때, 그런 갈증이 있었는데, 이 분야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질적으로 전문성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고용을 매년 늘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북한 관련 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일전에 개성공단 노사관계에 관련된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습니다. 몇 가지 꼽자면, 개성공단에서는 남측의 경영진에 대응해서 북측에서도 ‘노동자기구를 만들어서 협상했다’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권 지원을 받는 강력한 ‘노조’가 있는 셈입니다. 물론 북한 내부의 노사관계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개성공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북한 정권이 세팅한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고 경협을 하게 된다면, 결국 남한 기업들은 그런 노동자기구와 상대를 해야 합니다. 반면에 북한 정권이 급속도로 붕괴한다면, 그야말로 노동자 측에 불리한, 아비규환의 무법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산업안전도 최악으로 치닫게 될 수 있겠지요. 어느 경우가 오든지 남한에서 노동과 산업재해를 다뤄본 경험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은퇴를 언제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은퇴할 때가 되면 피아노가 있는 라이브 바를 차리고 싶습니다. 이제 사무실을 개업한 처지에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제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한 것 같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또 합주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바빠지면서 그 즐거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 아닌데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야구팬인데, 양준혁 선수가 언젠가, ‘1루까지 늘 최선을 다해서 뛰는 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꿈이 있다면, ‘맡은 사건에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산업재해/노동조합 문제에 전력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변호사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손익찬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독서를 사랑하고, 때로는 고독하게 혼자서 하는 운동을 즐기는,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동시대의 고민과 불안에 대해 꾸준히 사고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영상 콘텐츠 스타트업 기업인 '노티크' 김시현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영상 콘텐츠 신생기업 노티크의 대표 김시현입니다. 글이나 이미지를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 창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있어서 시작하는 일보다 시작하고 무너지는 일이 많지만, 아직 무언갈 시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노티크의 대표로 신생기업 4개월 차입니다. 노티크는 어떤 회사인가요? 현재는 1인 법인으로 2명의 팀원과 2명의 영상 제작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4개월 정도 되었고 자본 규모는 2,000만 원입니다. 성공한 프로젝트라고 할만한 건 아직 없고 현재 인터뷰 영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알리는 일인데요. 가장 가까운 목표는 지식 콘텐츠 미디어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창한 성공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어요. 2006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5년 만에 학부에 입학하게 됩니다. 공백기가 있었는데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교를 졸업 후 부산에 있는 국립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2학년까지 다녔지만 아무래도 즐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마냥 좋아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살기엔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향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군대에 입대했는데 군 생활을 하면서 방향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군대 생활은 저에게 지극히 심심한 시간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100여 권가량 읽었거든요. 너무나 무료해서 시작한 독서였는데 책의 재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일기나 에세이 등을 쓰기 시작하면서 공부나 배우는 행위 자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고 수능을 다시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평생 부산에서만 살았는데 조금 더 큰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었어요.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기기도 했고,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너는 집에서 멀어져야 잘 된다’고 하셨던 게 떠오르기도 했던 것 같아요. 큰 결심은 아니었고 서울로 가기 위한 단계로 수능을 선택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처음엔 대학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다니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반드시 대학을 가야 하나’라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퇴를 하고 어머니께 자퇴 사실을 알리면서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어요. 원래라면 불같이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한동안 기운 없이 계시더라고요. 어머니는 자식이 고졸로 남는다는 게 많이 슬프셨나 봐요. 그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는데 어느 날, ‘대학은 나오면 안 되겠니? 그 이후에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나지막이 말씀하셨어요.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조금은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모습을 자주 보여준 아들은 아니었거든요. 군대 전역 후 6개월 동안 수능을 준비했고, 경희대 원예 생명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엔 어떤 전공이든 상관없었어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식물은 제가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했습니다. 문예창작이나 어문학계열은 이상하게도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너무 본격적으로 배우는 느낌이라 부담스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관찰의 방법 중 최고는 ‘드로잉’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시각디자인과의 1학년 필수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디자인이라는 방법론 자체에 매료되어 복수전공을 신청해 졸업했습니다. 직장에 소속된다는 것은 안정성을 가져오지만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창업하면 도전의 가치만큼 위험 요소도 많습니다. 창업 이후 무엇이 가장 바뀌었나요? 창업하면서 일을 대하는 태도에 가장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적당히 검증된 시스템에 그에 맞는 교육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란 저절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에 미리 세팅된 값을 뱉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일은 사람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실 텐데요. 달리 표현하면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수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동료의 기분과 취향, 일을 대하는 방식과 사고하는 과정 등 모든 것이 변수가 되어 다른 방향의 일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일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찾으면 좋고 못 찾으면 그대로 만족스러운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성향에 따라 어떤 일이든 쉽게 좋아할 수 있고, 어떤 일은 싫지만 잘해낼 수 있는 일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이 저에게는 무책임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모습’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할 때 빛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임을 할 때, 운동할 때도 그렇지요. 본인이 스스로 즐기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 같아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아도 즐거운 일.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창업의 장점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일을 해야 해서 그때마다 조언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됩니다. 반면 그만큼 훈련이 되기 때문에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만들어내는 일은 창업이 아니면 쉽게 해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면, ‘지속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창업하는 이유는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일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그런 일은 누가 쥐여주지도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본인이 만들어 나가야만 합니다. 매 순간 즐겁거나 힘들지 않은 일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찾아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를 꾸준히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업하면서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식 강의를 찍고 싶다고 연락을 돌릴 때였습니다.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콜드콜을 보냈죠. 20번 정도의 거절을 당한 것 같아요.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강의를 찍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 레퍼런스도 없는 업체에 일을 맡기기엔 위험이 크니까요. 거절은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서도 힘이 많이 빠졌습니다. 그때 어느 한 지식 공유 모임에서 의뢰를 받았습니다. 팀원들이 사기가 저하될 시점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좋은 시점에 첫 촬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어요. 굉장히 기뻤고 지금까지 그 촬영을 매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나 수익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리고 스트레스 조절을 위한 건강한 취미 생활이 있다면? 모든 것을 제가 결정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아무것도 내 손을 거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지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능동적으로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적과 상관없는 인터넷 강의를 듣기도 했어요.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묘하게 힐링이 되었습니다. 매우 쉬운 문제를 푼다거나 하는 방식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제가 해보진 않았습니다. 글을 쓴다거나 책을 읽는 건 생각보다 의지력이 많이 필요해서 좋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본다거나, 텔레비전과 음악, 스마트폰 없이 달리기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력을 쓰지 않는 환경과 주변의 자극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생기업 창업주로서 같은 분야 CEO 중 롤모델이 있나요? 이 부분은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롤모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테슬라모터스의 일론 머스크나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 그리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의 글이나 생각을 좋아하지만 롤모델은 아닌 것 같아요. 사업하면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 하면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왜 일을 하는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그의 사상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좋은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서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해주고 싶습니다. 일종의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 지금의 목표입니다. 인생은 늘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버티는 것만으로 힘든 시기가 올 때가 있지만 분명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동시대의 고민과 불안에 대해 꾸준히 사고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노티크’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시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미세먼지의 심각한 공포! 내 피부는 괜찮은 걸까? 수많은 임상경험을 배경으로 환자들의 피부 건강을 생각해, 직접 (주)두노함을 창업하여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피부 개선을 추구하는 전혜찬 원장! 그의 피부과 원장, (주)두노함 창업자로서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이의 아빠이고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부모님께 말썽만 부리는 아들인 전혜찬이라고 합니다. 부가적으로 피부과학 연구그룹인 ㈜두노함의 창업자이자 더서울피부과의원의 대표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셨던 부친에 이어 의과대학에 진학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만큼 어릴 적부터 `의사`라는 직종에 대해 괴리감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도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나요? 어릴 때 꿈은 의사긴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의사를, 아버지를 전혀 이해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 나이 마흔에 태어난 늦둥이로, 아버지와 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소아·청소년과 개원의로 30년 넘게 일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진료 보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저를 데리고 산에 자주 오르셨습니다. 그때는 따라가기 싫다고 투정만 부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운동시키느라 친구분들도 안 만나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 친구분들과 잦은 모임을 가지시는 것을 보면 ‘저렇게 좋아하셨는데 나 때문에 많이 희생하셨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 의사란 직업이 ‘많이 지치고 자기 시간이 적은 직업 중의 하나였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의사로서의 일이 힘들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만연했던 항생제 처방도 최소한으로 하셨고 아무 처방이 필요하지 않으면 그냥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환자에게는 고지식하고 인기가 없어 보였을 수도 있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처방 건당 약 품목 수 평가등급이 계산되어 나왔는데 1등급으로 저도 최소한의 필요한 약만 처방하고 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버지 외에도 누나들도 같은 직업을 갖고 계시고 ‘EBS 명의’에도 출연하시고, 저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라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습니다. 공부의 비법은 딱히 없었고 지금도 저의 가장 친한 친구를 학창시절에 만나서 같이 경쟁하면서 공부했던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잘되었을 때 시기, 질투하지 않고 나를 반성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경험을 못 해봤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른 복은 별로 없어도 사람 복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경합 끝에 학생회장이 되어 저항적인 성격의 학생회를 구성했다가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를 전교 회장으로 만들어 주고 학생회를 같이 운영하던 친구들은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합격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 맞은 등이 아직도 얼얼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재수하던 당시 학원에 모의고사를 보러 몇 번 가긴 했지만, 대부분을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한 방에 그게 다 풀리셨으면 했고, 저에게 재수의 의미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마음과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었기에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궁금해하셨는데 아버지는 무던한 반응이셨습니다. 아버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위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올라와 고생을 많이 하셨던 터라 도리어 아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턴을 마치고 전공 선택에 있어 고민이 많았습니다. 인턴 동안 흉부외과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마지막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과 성격과 진로가 확연하게 다른 두 과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대학 시절 비슷한 고민을 하며 같이 사람을 살리자고 다짐했던 친한 친구가 삼성병원 피부과로 간 것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뜨던 시기이기도 했고, 일단 정점에 올라보고 싶은 생각에 저도 피부과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입국을 하고 나서 사람을 살리는 ‘메이저과’의 의식을 가지고 삶의 질을 다루는 ‘마이너과’를 가게 되어 교수님께 정신 교육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디테일에 집중을 해야 하고 환자의 입장이 되어 하나하나 불편하지 않을까를 살펴야 하는 의식이 없이는 삶의 질을 다루는 과는 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소위 ‘마이너과’ 의사가 되었지만, 가슴 속에 큰 열정을 가진 저랑 비슷한 몇몇 전공의 선생님들과 새벽까지 의국에 남아서 연구하고 논문도 쓰고 서로 의지하면서 4년을 보냈습니다. 근무시간 제한이 있는 요즘엔 불가능하겠지만, 그때는 자취방보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선후배가 있던 의국에 있을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부과 전공의 동안 다양한 연구에 참여하였고, 당시의 경험이 현재 진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에 저는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서울대를 가지 않았어도, 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피부과를 가지 않았어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그 삶에 적응하고, 행복하려고 끝없이 노력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꼼꼼하고 섬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기에 지금의 피부과 의원 개원은 잘 맞는 것 같긴 합니다. 아직 개원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저를 믿고 꾸준히 따라와 주시는 환자분들이 꽤 되시고, 그분들이 저로 인해, 저의 치료로 인해 함께 삶의 질이 높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제겐 행복한 일입니다. 서울대학교의 피부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된 후 2015년부터 개원하여, 성형외과, 가정의학과와의 동업을 했습니다. 지금의 독립적인 피부과의원의 개원의로 자리 잡기까지, 지난 5년간의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Castle’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고민하고 있자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I just want you to be sure, whatever decision you make, it`s because it`s what you want. Not because you`re afraid.’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두려워서가 아니라 너가 원해서 하는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 처음 개원을 결정할 때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고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보였기에 압구정에서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수없이 다르고 많은 의학적 견해들이 검증을 받으면서 의학은 발전해 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의견의 교류가 일어납니다. 개원 당시에 미용 진료의 대표적인 과가 피부과, 성형외과, 가정의학과가 있다고 들어왔었고, 고인 물은 썩기 쉽기에 다른 과 선생님들과 경영철학 및 지식, 기술에 대한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회에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동업해서 저의 지식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상대의 지식과 노하우로 보완하면서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정답은 없겠지만, 그 과에 오는 환자군이 다르고, 과마다 다른 과에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마케팅 및 경영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동업을 통해 제가 느낀 것은 결국 '제일 저다운, 제일 피부과다운 방법이 저의 강점이고 최선이지 않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개원을 한 결과물이 현재의 ‘더서울피부과의원’입니다. 화려하지만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보다 가장 저에게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매력적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 경영 관련 고전에서도 시기와 땅과 사람이 맞아야 일이 순조로워진다고들 합니다. 입지조건도 중요하고, 개원 시기도 중요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완벽해도 ‘사람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을까?’ 바꿔 생각해보면, [AVEC G]도 해외에 기반을 두고 있고, 좋은 시기에 맞추어, 뜻과 사람으로 변화를 꿈꾸시듯, 저 또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원 면접 볼 때도 본인들의 꿈을 물어보고 있고 본인의 꿈을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같은 방향을 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압구정 중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준비되어 있을 때' 할 수 있다면, 언제든 어디든 큰 상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병원의 대표적인 시술은 소위 복합치료(Combination therapy)입니다. 서울대 피부과 전공의 때 은사님께서 치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쳐주셨던 개념이고 적절한 몇 가지 치료를 조합하게 되면, 각각의 치료를 부작용이 생기는 범위까지 올릴 필요가 없어서 안전성이 보장되고 각각의 치료의 장점은 시너지로 올라가게 됩니다. 시술이 복합치료가 될 때의 단점은 시술자가 함께 힘들고 시간이 함께 걸린다는 것 외에는 크게 없습니다. 시술 시간이 오래 걸리면 연고 마취가 서서히 풀릴 수 있어, 이때의 통증을 잡기 위해 마취통증의학과를 전공한 아내가 여러 조언을 해주면서 통증도 많이 줄어들어 덜 불편하고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초와 나노초 요즘엔 피코초 레이저들의 장단이 있고 적절한 조합이 되면 함께 안전하고 빠르게 색소 등이 치료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약과 시술이 합쳐지면 양성종양 같은 경우에는 크기를 줄여서 레이저로 제거할 수 있어서 흉터를 줄일 수 있습니다. 광역동요법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도 광원을 LED 판에서 레이저로 바꾸면 함께 다양한 치료들을 할 수 있어서 손이 많이 가도, 검증되어있고 안전성이 보장된 범위 내에서 함께 나은 치료가 될 수 있게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로 복합 레이저 치료, 복합 리프팅 치료, 광역동요법, 주사(rosacea) 환자 치료 및 다크서클 치료 등을 합니다. 시술이라는 표현보다 치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시술이 필요 없는 케이스, 악화인자를 찾아서 해결해드리거나, 경구약, 도포제 등이 필요한 분들이 꽤 있어서 그걸 판단하고 분류하고 득실을 설명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하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게 의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현재 더서울피부과의원의 대표원장이면서 동시에 `두노함`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두노함`은 어떤 회사인가요? 두노함은 말 그대로 ‘Do No Harm’의 생각을 공유했던 동기들이 모여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을 함께 모아서 만든 회사입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줄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거창한 생각에서 시작되었고, 앞으로는 그렇게 가야겠지만, 당장 첫발은 화장품 사업으로 디딘 올해로 3년 된 기업입니다. 실제로 개원을 하면서 관리실에서 사용하고 혹은 사용하려는 화장품에 대해 알아보던 중 생각보다 피부에 해로운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피부과 전문의들이 주축이 되어 제가 쓰고, 제 가족들이 쓰고, 제 환자에게 쓸 화장품을 만들려고 환자분들께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모여 ‘두노함’이라는 회사가 창립되게 되었습니다. 처음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업체와 미팅을 해보았을 때 어떤 화장품을 카피해서 만들지 다들 물어보았습니다. 그만큼 카피하여 만들기 쉬운 게 화장품이고 결국 우리가 원하는 화장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필요한 성분들을 정하고 이것을 전달하기에 가장 좋은 형태를 찾아가는 식으로 수차례의 시행착오 학습을 반복하였습니다. 의견이 모여서 시작을 한 것은 2015년도였고, 2년이 넘는 시행착오 학습 끝에, 2017년 11월, 두노함의 첫 작품, ‘두리페어크림’이 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6월, 이네이처와 협업으로 만든 ‘서울 더마 선스크린’이 출시되었습니다. 제작 기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불필요한 유통과정과 마케팅 과정을 빼 버리고 오로지 병원을 찾는 환자분들께 드리고자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리페어크림’은 화상 연고, 상처 연고, 표피생장 인자, 피부 장벽 대체재 등의 장점을 다 담으려고 노력한 작품입니다. 피부과 시술 과정에서 레이저는 빛을 열로 바꾸고, 고주파는 전기를 열로 바꾸고, 초음파기계는 초음파를 열로 바꾸는, 즉 열이 동반되는 시술들이 많고 상처를 내고 낫게 만드는 시술들이 많은데 시술 후 피부 진정 및 재생에 중점을 두고 만들었습니다. 써보신 분들이 일광 자극 후 사용하였을 때도 진정이 잘 되고, 애프터쉐이브 후 문제 생겼을 때도 잘 가라앉혀 준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모기에 물릴 때나 아이들 가려움증이 있을 때 잘 바르고 있을 정도로 여러 상황에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안 어르신께서 처음 만들 때 호랑이 크림을 만들어달라고 한 게 무의식 중에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호랑이 크림이라 하나의 특색이 없고 마케팅 포인트가 없다는 큰 단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병원에서 쓰려고 만든 제품이다 꾸준히 관리실 및 두노함 관련 병원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주로 애용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나온 것은 선크림이었는데 5월 말에 출시되었습니다. 작은 기업보다는 좀 크고 오래된 기업과 협업을 해서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였고, 이번에는 좀 더 많은 분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협업 업체를 물색하던 중 ‘두노함’이라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이네이처와 협업을 하게 되었고 2015년부터 미팅을 하다가 작년에 협업이 성사되어 선크림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 제품에는 없었던 콘셉트를 먼저 정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이네이처 측에서 먼저 블루레이를 막을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이에 푸른 빛이 눈에는 나쁘지만, 과연 피부에 나쁠지를 따져보던 중 푸른 빛을 생성하는 LED로 여드름균을 줄일 수 있다고 알려졌기도 해서 블루레이를 막는 것은 좀 애매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신 레이저 치료와 광역동요법에서 사용되는 흡광도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되었고 결국 광역동요법을 이용한 선크림을 만들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수년 전, 광역동요법이 처음 나왔을 때는 자극이 아주 심한 치료였지만, 최근 외국에서는 일광을 이용한 광역동요법(Day light PDT)도 하고 있을 정도로 흔하고 편한 치료가 되었습니다. 이번 화장품에 광역동요법을 위해 넣은 물질도 이미 기존 화장품 성분으로 몇 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써온 물질이었기에, 믿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화장품은 혼합물로 지용성 성분과 수용성 성분이 섞여 있습니다. 화장품을 바르면, 지용성 물질 중 분자량이 500달 톤 이하의 물질은 쉽게 들어가고, 그 외 큰 분자 물질과 극성을 띄는 물질, 수용성 물질은 장벽이 망가지지 않은 곳은 잘 통과를 못 하게 됩니다. 지용성인 엽록소는 피지샘까지 통과하게 되고 수용성인 비타민C와 글루타싸이온(Glutathione)은 겉에 머물게 되어 빛을 받은 엽록소에서 발생한 활성산소를 두 개의 강력한 항산화제 고리가 제거해 주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피지샘은 전분비샘(Holocrine gland)이라서 피지를 만드는 공장 자체가 통째로 분비됩니다. 바꿔 생각해보면 피지가 많이 만들어지면 공장도 큰 상태가 되고 광과민제도 많이 흡수되게 됩니다. 정상보다 커진 피지샘은 광과민제가 더 흡수되며, 일광이라는 광원에 의해서 광과민제에서 활성산소가 나와 커진 피지샘을 줄어들게 합니다. 광과민제 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각질층 등 얕은 층에서 발생한 활성산소는 비타민C가 스캐빈져로 작동해서 해결해줍니다. 이때 산화된 비타민C를 글루타치온이 다시 환원시켜서 다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구조로 불필요한 활성산소에 의한 공격을 막습니다. 즉, 성분의 지용성 수용성의 차이와 피지샘의 물리적 크기 차이에 따른 선택성을 높여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을 사전에 차단하고 효과는 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안전성이 검증된 물질에 한 번 더 안전장치를 걸어서 콘셉트 성분의 조합을 만든 셈입니다. 선크림이 정식 출시되기 전, ‘와디즈 펀딩 사이트’에 올라온 여러 질문과 걱정들을 살펴보던 중 특히 민감성 피부를 가지신 분들이 질문을 많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엔 민감성 피부에 맞는 선크림을 만들어 내년 봄에 출시해보고자 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라 급변하는 의료 시장에 대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4차 산업 혁명으로 급변하는 의료 시장에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여러 정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취합하고 진료 및 경영에 적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용은 의료 시장을 뛰어넘어 하나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대하는 수준을 넘어 그 가치를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이를 병원의 철학에 맞추어 가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또한, 진료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진료 및 관리 시 환자에게 사용되는 시술 기계 및 관리용품의 품질 관리가 함께 가야 하므로 연관 분야에 관한 관심 및 연구가 지속하여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다른 직업이 아닌 `피부과 전문의`이기에 보람 있었던 순간이 있다면?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예민한 피부로 인해 생활에 지장을 받고 계시는 분들을 자주 봅니다. 여러 시술을 해보고도 효과를 크게 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피부과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원칙대로 미용 치료를 하다 보면 이런 고민에 조금은 해결점을 찾아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환자분이 고마움을 이야기해주시면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병원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후천성 양측 오타모반 모양 반점(ABNOM)으로 오셨던 환자분이 있었습니다. 후천성 양측 오타모반 모양 반점은 제거하기 힘든 피부질환으로 환자분들의 만족도가 낮은 편인데 1년 정도 보면서 거의 안 올라오게 하여드려 환자분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고맙다고 해주셨던 게 생각납니다. 이후 그분의 친구와 지인들께서 병원을 찾아주시면서 서울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저의 피부과가 압구정에서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소설가, 방송작가를 꿈꾸던 그분은 지금은 미국에서 본인의 벤처기업을 준비하며 제가 운영하는 두노함의 창업지원 컨설팅도 해주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으신 분들도 병원을 찾아주시는데 그분들의 한결같이 겸손하시고 점잖으신 모습을 보며 진정한 성공에는 올곧은 인성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확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의료 환경에서 피부과 시술은 목표가 미용상의 부분이라 만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진료를 받고 그분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시는 걸 보면 이전에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됨을 느낍니다. 병원을 찾아주시는 모든 환자분이 웃고 나갈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은 만족하시고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맞지만, 제 일을 해서 부가적으로 대가를 받는 것이지, '돈이 먼저 목표가 되지는 말자'는 원칙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SNS를 보면 유달리 가족의 사랑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변하면서 결혼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는 사회인들이 많습니다. 원장님께 가족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인 아내와 만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전공의 때 만나서 퇴국할 시점에 결혼하고 결혼하자마자 군 복무 때문에 훈련소에 들어가버렸죠.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만, 이후 부분은 아내의 검열을 받았습니다. 결혼과 육아가 인생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이로 인해 본인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족은 무엇과도 비교하지 못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주말 휴식시간을 아이들의 육아로 반납하는 상황에서도 제가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는 이유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그 영향이 실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평생 같이 갈 마음이 생길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요소들로 결혼 및 출산을 망설이게 되는데 이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SKY 캐슬’을 직접 시청하지는 않았고 애청자인 아내와 드라마 내용에 관해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SKY 캐슬’에서 인상 깊었던 인물은 배우 정준호 씨가 했던 역할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소위 엘리트로 칭해졌던 정준호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 고민 없이 부모나 현실이 정해주는 꿈은 진정한 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찾아주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기들이 돌잡이 때 청진기를 잡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엔 돌잡이를 여러 번 하던데 첫 번째로는 안 잡아서 안도했던 것 같습니다. 자식이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후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저의 아버지께서 제게 한 번도 뭐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듯이, 저 또한 제 자식이기는 하지만 다른 심장을 가지고 다른 인생을 사는 하나의 개체에게 열심히 해보라고 말을 해주지 않을까요? 의사란 직업을 쉽게 선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예전에는 다시 한 번 고민하라고 했는데, 지금은 의사가 되고 나서도 진료만 보는 의사가 아닌 여러 방향으로 나갈 길이 많아지고 있고 본인의 꿈이 거기에 있다면 잘한 선택이라고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행복은 직업에서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습니다. 재수했고, 만약 처음 수능을 통해, 서울대 수의대에 진행했다면, 또 다른 행복을 찾으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은퇴하면 다음 직업으로는 수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을 정도로 가지 못한 길에 대해 아쉬움은 항상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미세먼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하면서 자연스럽게 피부 건강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피부질환 관련된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어떤 것이 있나요? 유난히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피부관리를 위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이것도 얘기가 긴 질문인데 가능한 한 간략하게 줄여보면, 먼저 미세먼지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어떤 위해를 줄 수 있고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세먼지는 크기에 따라서 PM (particulate matter) 10 (≤ 10μm)을 미세먼지라 부르고 PM2.5 (≤ 2.5μm) 초미세먼지라 부릅니다. 미세먼지 관련 연구들이 크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호흡기의 보호막들이 크기가 작으면 정상 기능을 못 해서 바로 폐포를 통해 혈액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전달되기에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게 만드는지 구성성분을 알아보면 황산염, 질산염, 탄소류, 광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PM2.5가 더 크기가 작고 성분 금속의 수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극적인 성분과 금속 성분이 피부 세포 깊숙이 침투하여 유전자, 단백질, 세포 수준의 손상과 미토콘드리아와 관련된 세포자멸사를 일으켜서, 결과적으로 피부에서는 급성으로 알레르기, 습진 등의 염증 질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아토피 피부염과 관련성은 메타분석에서도 잘 알려졌으며, 초미세먼지가 더 작고 금속 성분이 많아서 미세먼지보다 피부염과 더 관련성이 높다고 알려졌습니다. 급성 피부염 외에 만성적인 노출이 되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흡연에서 연구된 것을 미루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즉, 탈모, 색소침착, 노화 등이 생길 수 있는데, 미세먼지가 피부에서 섬모의 형성을 억제함이 그 기전중 하나로 최근 밝혀지고 있습니다. 섬모(cilia) 즉, 미세한 털로 세포 표면에서 세포 간의 정보전달의 주축을 이루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구조물이고, 모낭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에 관여하고, 멜라닌 세포에서 색소를 만드는 것을 억제하고, 각질 세포의 분화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런 섬모의 형성을 억제하게 되면 모낭과 색소, 피부두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미세먼지의 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의 첫 번째 정답은 ‘노출을 줄인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번 노출이 되면 중금속류는 잘 배출이 안 된다고 알려졌으므로 외출을 삼가든지 외출 시 보호도구를 활용해서 가능한 노출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노출되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면,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만, 장벽이 망가져 있으면 흡수도가 증가할 수 있으므로 피부 장벽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자극을 줄이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러운 것에 노출되었다는 생각에 심한 자극을 줘서 세안하고 자극성 접촉 피부염으로 병원에 오시는 분이 미세먼지에 의해 급성으로 피부염이 악화되어 오시는 분보다 올해는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장벽이 망가지지 않은 상태면 미세먼지 중 수용성의 물질은 각질층을 통과하기 어렵고 자극이 되어도 각질층 위에서 자극을 일으킬 것이므로 보습제 도포 정도로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극성을 띄지 않는 지용성 물질 중 분자량이 작은 중금속류는 통과를 해서 기저층의 깊은 각질 세포나 진피층까지도 이론적으로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아주 적은 양이고 이미 들어가고 나면 각질 세포는 턴오버를 하며 밀려나와 떨어져 나갈 것이고 혈액으로 들어간 부분은 밖에서 무엇인가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안 들어가게 하는 것과 들어갔을 때 염증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보면 뭔가를 바르면 도리어 ‘미세먼지가 붙어서 더 안 좋다’는 얘기도 나와 있을 만큼 괴담이 많은 듯합니다. 미세먼지를 혼합물이라고 생각하면 내 피부가 보습제로 코팅되어있으면 땀만 나는 것보다는 보습제에 희석되어서 직접 피부에 닿는 미세먼지의 양은 줄어들 것이므로 보습제를 바르는 게 바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집에 오면 내 피부를 코팅하고 있던 보습제를 부드럽게 닦아내서 자극을 안 주면 미세먼지에 닿는 양이 줄어들고 들어오기에는 장벽이 어느 정도는 막아서 흡수량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극을 많이 줘서 세안하면 도리어 장벽이 망가져서 더 흡수량이 증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미 들어온 미세먼지는 염증과 관련성이 가장 많고 염증이 산화스트레스를 발생하므로, 항염증제 및 항산화제 성분이 들어있는 물질의 도포와 복용이 추천되며 항산화 성분이 많은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것도 필요할 듯합니다. 요약하면 미세먼지는 노출이 안 되게 하는 게 제일이고, 그 다음으로 노출된다면 내가 인공적으로 보호막을 바르고 있던가 스스로 가진 보호막이 망가지지 않게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미 흡수가 된 상황이면 급성으로는 염증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키므로 항염과 항산화 성분이 도움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공의 시절부터 이례적으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연구에 참여하셨습니다. 혹시 현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계신 내용이 있나요? 개원하고 나서 대한피부과학회에 발표했던 것은 ‘피지샘질환 광역동요법’과 ‘다크서클’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 중 ‘비수술적 다크서클 치료’는 약 200명 정도의 대규모 후향적 연구로 서울대 피부과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셔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IRB 책임연구자가 되어서 ‘더서울피부과의원’을 찾아주신 환자분들의 경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이며 거의 막바지 단계이긴 하지만, 아직 논문이 나온 상태는 아니어서 나오면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열심히 살아야지요. 저를 스쳐 가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했으면 하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그러나 가능한 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하면서 사는 방법이 제게는 두노함(Do no harm)이었고 아빠, 남편, 아들, 의사 또는 기업인으로서도 두노함을 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를 어떤 모습으로 평가하고, 생각하는 지는 제 손을 떠난 문제가 아닐까요?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분들이 보고 느낀 그 모습으로 저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인터뷰를 다 거절하고 지내다가, [AVEC G]가 건넨 ‘힘든 시대에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한마디에 바로 응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미생(未生)이라 큰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기가 잘하는 것을 찾아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주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전혜찬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1990년 부터 시사, 탐사보도를 맡고 있는 MBC 장수 프로그램인 <PD수첩> 그리고 그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취재를 수십 년간 해온 그는 말한다. '해야 할 일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시사, 탐사 프로그램 <PD수첩>의 부장, 박건식 PD와의 인터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MBC PD수첩 부장을 맡고 있는 박건식 PD입니다. 또한, PD들의 모임인 한국PD연합회장과 PD들을 교육하는 한국PD교육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졸업하셨습니다. 관련 학과가 아닌 만큼 다른 진로도 생각해보셨을 법도 한데 어떻게 방송 분야의 진로를 택하셨나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저의 희망대학 1순위 진로는 국문학과였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국어’ 과목 점수가 잘 나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국문과에 입학한 뒤에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소설이나 시 등의 문예 창작을 준비해왔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론 분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고 싶었습니다. 국문학으로 대학을 진학한 시절, 전공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국어학, 고전문학, 한문학이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과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오던 언론사에 입사하는 두 가지 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언론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공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학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1987년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강의실 안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 저는,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정보가 너무나 없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군대 제대 후, 1년간 구소련 우즈베키스탄으로 타슈켄트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다가 귀국해, 언론사 입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다가, 1991년 MBC의 시사교양 PD의 공채 시험을 봤습니다. 당시는 시험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신문만 열심히 보면 합격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첫 시험에 쓴잔을 마셨습니다. 1992년 다시 MBC PD를 지망했지만, 그해에는 아예 PD 분야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습니다. 1993년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 해에는 시험도 보지 못하고 서류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계속되는 입사 시험의 낙방으로 지쳤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동아일보에도 응시했는데, 최종심사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해 세계일보 시험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고,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현재는 PD이시지만 첫 언론계 입문은 기자이셨습니다. 어떻게 기자에서 PD로 보직을 옮기게 되셨나요? 기자와 PD를 모두 해보셨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기자직은 꿈꾸던 자리였습니다. 1993년, 세계일보에 입사 후, 사회부에서 근무했는데, 조계사 분쟁, 성수대교 붕괴, 지존파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고 저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2년 후, 1995년 11월, MBC의 PD로 입사했습니다. 기자에서 PD로 옮기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 매체에서 방송 매체로 간 것이기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부터 MBC PD를 지망했습니다. 1995년 다시 MBC PD 모집에 응시했습니다. 나이 제한을 보니, 시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해 운 좋게 합격했습니다. 과거, 기자 생활은 재미있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경찰서에 배치됐는데, 그동안 겪지 못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지존파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사고들도 있었고, 교육개혁, 사법개혁 같은 의미 있는 정책변화도 현장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부 기자, 특히 경찰기자만 하다 보니 재충전이 안 되고, 소진돼 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랬던 제게, MBC 교양 PD 합격은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프로듀서로서 분야도 많은데 어떻게 내후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하는 MBC의 대표 시사, 그것도 고소, 고발 전문 장수 프로그램인 'PD수첩'의 부장 프로듀서로 자리 잡게 되셨는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모르는 제작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려주세요. 처음 MBC PD로 입사하자마자, PD수첩을 맡을 뻔했습니다. 처음 교양제작국 사회교양부에 배속됐는데, 당시 사회교양부에는 <PD수첩>과 <경찰청 사람들> 두 개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부장님께서 처음에 <PD수첩>을 하라고 하셨다가 다음날 “너 참 신문사에서 경찰기자 하다가 왔지?”‘하면서 <경찰청 사람들>팀에 배속시켰습니다. 옆에서 <PD수첩>팀을 지켜보면서, <생방송 화제집중>, <피자의 아침>, <성공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프로그램을 거친 후, 2002년 말에 ><PD수첩>으로 발령받아서 2~3년간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2004년에 노동조합에 파견됐다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거친 후, 2005년 7월부터 다시 <PD수첩>으로 발령받았습니다. 2007년 말까지 <PD수첩>을 제작하다가 ‘정책기획팀’으로 가서 일했습니다. 이후, 2008년부터 1년간 미국 미주리대학에 있는 ‘탐사보도협회(IRE)’에서 탐사보도를 공부했고, 2009년 8월부터 다시 <PD수첩>에서 제작했습니다. 이때 최승호 PD(현 MBC 사장)와 한 조를 이뤄서 ‘검사와 스폰서’, ‘4대강과 민생예산’ 등의 문제를 제작했습니다. 그러다 2010년, 김재철 사장이 부임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011년 3월, 갑자기 <PD수첩> PD들 6명이 다른 곳으로 강제 발령을 받았고, 저도 신설된 ‘경인지사’에 배속돼 아예 서울시 내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6~7년간 인천, 고양 등 경기도 지역에서 근무하며 지역 축제나 지방자치단체 행사 등을 유치하는 영업 노력을 했습니다. 그 후, 촛불집회 등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MBC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2017년, MBC 사원들은 다시 파업에 들어갔고, 저도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MBC는 정상화됐고, 2017년 11월부터 다시 <PD수첩>에 복귀해서 바로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몇 편을 제작하다가 2018년 ‘팩트체크 및 SNS팀장’을 맡았고, 2018년 11월부터 지금까지 <PD수첩>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PD수첩>을 제작하면서, 취재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른바 ‘앰부시(Ambush)’ 취재라고 불리는 ‘잠복취재’가 가장 어렵습니다. 언제 나타날지 어디에서 올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씩 허탕을 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별별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막상 취재 당사자를 운 좋게 마주치는 경우가 있어도 대부분은 인터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인터뷰하는데 강한 저항을 받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끌려 나오기도 하고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권침해’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말을 꼭 들어야 하는데, 상당수의 경우, 당사자들은 인터뷰를 극단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반론을 펴기보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자는 심리가 강한 듯합니다. 당사자들이 한사코 인터뷰를 피하다 보니 제작진은 ‘엠부시(잠복취재)’를 할 수밖에 없는데, 기약 없는 기다림에 몸도 괴롭지만, 마음도 무거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동안 제작했던 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7년 12월 19일 제작했던 <방송장악 10년, KBS를 지키러 왔습니다?>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상대사인 KBS를 다룬다는 것도 이례적이었는데, 한국의 공영방송 문제를 꼭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KBS의 경우, 조합원들의 방송 정상화를 위한 시위장면을 취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청경들이 워낙 강경하게 조합원 집회장면 촬영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조합원 집회를 촬영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사장 선임권을 지닌 이사회 이사들을 인터뷰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은 집회를 마치고 퇴근했고, 이사회는 저녁 늦게 끝났습니다. 이사회를 마치고 내려오는 KBS 이사들을 인터뷰하려는데, 몰려든 청경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취재현장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당시, KBS 고대영 사장을 인터뷰하는 것은 KBS 이사들을 인터뷰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었습니다. 새벽 6시에 고대영 사장 집에 갔는데, 그곳에는 KBS 청경과 KBS 차량이 여러 대가 층마다 분산돼 있었습니다. 도무지 어느 차에 탈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차량이 움직이면 제작진은 따라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차를 따라잡다 보면 다른 차를 놓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고대영 사장을 인터뷰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사장 개인의 출근에 KBS 청경과 차량을 사적으로 동원해도 되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형 논쟁거리와 거악에 대한 비판 보도를 하다 보니, 소송만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PD수첩>과 소송을 벌였거나, 벌이는 상대는 ‘포스코’, ‘조계종’, ‘조선일보’, ‘국기원 원장’, ‘영화감독 김기덕’ 등 실로 다양합니다. 특히, 방송 전에 제기되는 ‘방송금지가처분’ 소송은 제작진의 피를 마르게 합니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소송이 아니어도 분초를 다투며 아슬아슬하게 방송준비를 하고 있는데, 소송이 걸리면 재판부에 답변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고, 또 법원에 출두하여 상대방과 치열하게 다퉈야 합니다. 그 사이에 시간은 분초를 다투는 편집시간은 재깍재깍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만약 재판부에서 수정지시를 하면 그야말로 날벼락입니다. 법원에 가 있는 동안 PD들의 가슴은 타들어 갑니다. ‘조계종’을 취재할 때, <PD수첩> 제작진 중 한 명이 심각한 위협을 당했습니다. 또, ‘쓰레기 대란’을 취재할 때, ‘IS’와 전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여성 PD 한 명을 취재 보냈을 때는 조마조마했습니다. 모든 취재는 늘 위험을 동반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이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러나, 제작하고 방송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보람 있고 행복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한 <PD수첩>의 많은 구성원이 지난 6~7년간 이른바 ‘유배지’에 보내져서 방송할 수 없었습니다. 즉,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방송이 현실적인 변화를 끌어냈을 때입니다. <쓰레기 대란> 2부작 방송 후, 많은 시청자가 함부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뻤습니다. 또한, 군납 비리를 고발해 군인들이 불량 야간투시경을 사용하지 않게 되고, 국가 예산을 절약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도 뿌듯한 순간이었습니다. 시사 고발프로그램, 그리고 탐사보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탐사보도 저널리스트는 댐이 무너지거나 불이 났을 때 그것을 신고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댐이 붕괴되었다고 해도, 외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외면하면 이 사회는 무너집니다. 모든 조직은 자기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검찰이나 대법원은 견제를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비판하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합니다. 양승태 사법부가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고 비판하면, 적어도 다음 사법부는 조심하지 않을까요? 꾸준한 비판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견제받지 않는 고인 물은 썩게 됩니다.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게 만드는 것이 탐사보도의 역할입니다. 종편 방송사들이 출범한 뒤, 수많은 지상파 소속 아나운서와 PD 등의 제작진들도 거취를 옮기는 것으로 모자라, 우후죽순 1인 콘텐츠들도 생겨나면서, 지상파 방송국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지상파 방송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다채널 시대에 지상파는 독보적 지위보다 많은 채널 중의 하나가 될 겁니다. 공익성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의 역할도 하게 될 겁니다. 공원의 역할을 하려면 공원을 유지할 재원이 필요합니다. 재원 구조가 확립되지 않으면 지상파, 공영방송은 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재원은 2가지입니다. KBS 수신료도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MBC와 SBS의 관점에서, 광고 재원의 핵심은 중간광고입니다. 중간광고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중간광고 시행이 미뤄질수록 지상파의 생존은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PD수첩>은 내용상으로 거대 담론만 하는 것보다는 생활밀착형 아이템과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아이템과 형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 여성 등의 고민을 담아내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유통 면에서는 유튜브 등에서 젊은 층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 후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PD들이 대담하면서 정리하는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유튜브 <PD수첩> 공식 계정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PD수첩>을 검색하면 <PD수첩> 계정이 나오는데, 다양한 실험적인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MBC PD 협회를 비롯해 한국PD연합회, PD 교육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PD님을 멘토로 여기고 따라가며, 미래에 프로듀서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PD가 되고자 한다면 왕성한 호기심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틀을 깨는 파격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기법적으로는 연극을 꼭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PD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 ‘안주’하는 것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일신우일신 해서 내 안의 한계를 뛰어넘고 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PD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 안의 ‘품’을 최대한 넉넉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탐사보도를 계속하거나 후학들에게 탐사보도 기법을 전수하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한 책도 몇 권 쓰고 싶습니다. 지금 50대 중반인데, 미래의 꿈과 모습을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저 자신과 동료들에게 말할 수 있다면, 저의 미래는 훨씬 알찰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선배나 동료, 후배들에게 이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탐사보도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두서없는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읽어주신 시간이 헛되지 않게 좋은 <PD수첩> 방송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건식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호른 연주가로서는, 연주를 들으러 오는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최고의 목표로, 호른 지도자로서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최고로 여긴다는, 호르니스트 이석준 교수. 지난 35여 년간 다사다난했던, 하지만 '호른'과 함께였기에 든든하고, 행복했던, 이석준 교수의 '호른 인생' 이야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호른 연주가 이석준입니다. 초등학교 때, 호른을 시작하셨습니다. 음악 배경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의 금관 악기를 책에서만 보는 나이인데 어떻게 입문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의 사립초등학교인 영훈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특별활동으로 관악부가 있었습니다. 아침 조회 시간에 형, 누나들이 예쁜 단복을 입고 연주하는 게 근사해 보였는데 3학년 때 단원 모집을 하더라고요. 지원했는데 처음에 트럼펫을 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코치 선생님께서 저한테는 ‘유포니움’이라는 악기가 어울릴 거 같다고 권유하셔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포니움’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월간음악’이라는 잡지사에서 하는 콩쿨에 유포니움을 들고 나갔는데 1등을 했습니다. 그때 심사위원 중에 한 분이 故 신홍균 선생님(당시 KBS교향악단 수석)이셨는데 ‘악기 부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음악 전공을 하고 싶다면 유포니움은 클래식에 잘 쓰이지 않는 악기니, 호른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악기 시작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집안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립초등학교에 진학하여, 친척 어르신들의 반대도 많았었는데, 더욱이 음악을 한다니 난리가 났었습니다. 특히 아버님은 과거, 운동하셨었는데,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 운동선수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음악에 대한 열망이 깊었던 저와 제 어머님의 뜻을 꺾지 못했고, 저 또한 호른이라는 악기가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와 무조건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중고 악기가 아주 싼 값에 나와 시작 할 수 있게 되었고, 신홍균 선생님께서 저의 집안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중학교 2학년부터는 레슨비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웠어서,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음악을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호른이란 악기는 기네스북에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로 등재됐을 만큼, 몹시 어려운 악기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불기에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도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호흡이 짧은 걸 제외하고는 이상하리만치 악기가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또래보다 체격이 좋았던 것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음악가들에게는 엘리트 코스라는 예원학교-서울예고-서울대 코스를 밟고 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유학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대학 졸업반이 될 때까지 군대에 안 갔었습니다. 그 당시, 동아콩쿨에서 1등을 하면 군대를 면제받았는데, 2학년 때 나갔다가 3등을 했습니다. 3학년 돼서, 캠프도 다니고, 오케스트라 객원으로도 참가하고, 연애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니 군대 갈 시기를 놓친 것이죠. 4학년이 되어, 졸업을 얼마 안 남겨두고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졌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학교 관악합주 수업을 하시던 김종덕 선생님께서 ‘해병대 군악대 장교’ 자리가 났다고 추천을 해 주셨는데, ‘입대하면 관악합주 지휘도 할 수 있으니, 경력을 쌓아 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었습니다. 또 다른 선택 중 하나는, 당시 서울대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시던 임헌정 선생님의 권유였는데, 그 당시 선생님께서 부천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겸직을 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단 부천시향 오디션이 있으니 지원해보고, 만약 합격하면, 이듬해 동아콩쿨에 한 번 더 도전해서 군대 면제를 받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주셨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꽤 오랜 시간 갈등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임헌정 선생님의 권유를 택했고, 동아콩쿨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렇게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신 김영률 교수님과의 만남이, 제 인생에서의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하시고 귀국하신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제게 큰 경험을 하게 해 주셨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열린 International Horn Society (IHS) 캠프의 참가였습니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서 번갈아서 열리던 IHS 캠프가, 처음 아시아에서, 그것도 일본에서 열리게 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가깝기도 하고, 캠프 참가 비용도 저렴한 데다가, 막상 가보니 전 세계의 저명한 호른 연주자들이 일주일 동안 매일 매일 연주회를 하는데, 너무 좋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한테는 엄청난 신세계였고, 정말 겸손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세계적인 호른 연주자 중 특히 영국의 ‘Frank Lloyd’라는 연주자의 리사이틀을 접하고, 그분께 꼭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알아보니 그 당시 잉글리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길드 홀 교수를 겸직하고 계셨습니다. 아쉽게도 당시 제 형편으로는 도저히 영국에 유학 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포기하고, 몇 년 더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도 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대학원 입학생을 발탁하는 시험이 처음 생겼습니다.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직장에서 갈등도 생기고, 여러 가지 여건상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에 대한 갈증이 커저갈 때 쯤, 그나마 당시 학비가 저렴하면서 좋은 교수법을 가진 선생님들이 많은 독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원서를 내야 해서, 마침 미리 독일 현지에서 유학 중인 친구에게 부탁했고, 이 친구가 쾰른, 에센, 베를린. 이렇게 세 학교에 지원서를 넣어주었는데, 베를린은 원서가 늦게 도착해 다시 돌아왔고, 쾰른은 그해 졸업생이 없어서 호른 학생의 입학 정원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결국, 제겐 에센국립음대 밖에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에센국립음대에는 ’헤르만 바우만’이라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주가가 교수로 계셨지만, 쾰른음대에는 ’팬젤‘이라는 교수님의 제자들이 취직도 잘하고, 교수법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에센국립음대에 합격하더라도, 이미 마음속에는 편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보기 이틀 전에 독일에 도착해서, 친구를 통해 바우만 선생님 연락처를 찾아보던 중, 바우만 선생님께서 은퇴하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국인 선배로부터 이번 학기부터 교수가 바뀐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학교로 찾아가 호른 교수실에 찾아갔습니다. 마침 레슨 중이셔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끝날 즈음 노크하고 문을 열었는데, 제가 처음 유학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던 IHS에서 만난, Frank Lloyd 선생님이 계신 광경에 전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제 소개를 했고, 이번 시험에 등록해서 시험을 보기 전에 테스트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시험이 이틀밖에 안 남았고, 전부터 시험을 위해 개인지도를 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 ’미안하다. 하지만 시험을 잘 보면 발탁할 수 있으니 행운을 빈다‘고 하셨습니다. 이틀 뒤, 시험이 끝나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제게 악수를 청하시며, 합격 축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4년이 채 못 되는 유학 생활 동안 선생님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님처럼 챙겨주셨고, 지금도 선생님께서는 제가 ’수많은 제자 중 자랑스러운 제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해주신다고 듣고 있습니다. Frank Lloyd 선생님은 IHS 회장도 두 번이나 연임하셨고, 연주가 너무 많으셔서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제가 연주를 위해 베를린을 방문할 때마다, 멀리서 직접 연주도 보러 와주시고,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특별히 잘 대해 주신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유학하는 동안 로이드 선생님의 배려로 디플로마 과정이 끝나고 2년이 걸리는 ‘Konzert Examen’(최고연주자) 과정을 1년 반 만에 졸업 할 수 있었고, 정식 오케스트라는 아니지만, 사립 오케스트라에서 수석을 맡아, 연주 수당도 꽤 많이 받으면서, 유학 생활도 나름 여유롭게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악기를 존경하는 선생님과 공부 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 시기 사랑하는 첫째 아들도 태어났고, 무엇보다 저의 집사람도 음악을 했는데 같이 공부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주위의 음악하는 선후배들과 주말에 축구시합도 하고, 야외에서 고기 구우며 가족 단위의 모임도 하는 등, 제 인생에 있어서 유학 생활은 손에 꼽을 만큼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금관 악기 분야의 대가들이 많고 특히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있는 도시는 금관 악기 수준이 높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쫓아 유학을 가는 경우도 많지만, 좋은 오케스트라 연주가들의 연주나 마스터 클래스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그중 독일은 금관 악기를 전공하기에 ‘적합하다’라는 표현보다는 ‘최고’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세계적으로 미국을 제외하고 음악가들에게 가장 대우를 잘해주는 나라가 독일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음대가 있고 가장 좋은 선생님들이 많으며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많습니다. 그만큼 일을 하거나 배움에 있어서 기회가 많다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언어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유학을 가서 처음에 선생님과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께 저의 유학 생활 초반에 대해 ’언어소통이 불가한데 어떻게 레슨을 진행했었냐?’라고 물어보면, ‘석준은 다른 학생들보다 레슨시간이 길었어, 시범을 보여주면, 그대로 따라 불어야 해서 시간이 두 배로 걸렸지’라며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언어라는 건 대화의 의미도 있지만, 문화나 생활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력이 높아지려면 많은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줄 알아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중요한 만큼 악기 실력이나 선생님과의 유대관계도 중요합니다. 입시에 도전하고자 하는 학교나 배우고자 하는 선생님과 자신의 스타일이 다르면, 시험에 실패하기 쉽고, 선생님이 원하는 방향을 잘 이해 못 하면 서로 고생합니다. 외국 교수님 대부분은 오디션 전에, 혹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따라오는지 아닌지, 개인지도를 통해 확인하는 절차를 갖기도 합니다. 물론 시험에서 잘 하는 게 매우 중요하지만, 가능성을 보고 뽑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하던 때, 제 뒤로 들어온 나이 어린 외국 학생 중, ‘저 학생은 어떻게 들어왔을까?’ 했던 학생들이 졸업해서 오케스트라에 취직을 많이 했습니다. 또한, 교수 본인들이 뽑고 싶은 학생이 가능성이 있는데, 조금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6개월 동안 개인적인 교습 과정을 거친 후, 입학시키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런 시간까지 절약하기를 원한다면, 미리 유학을 원하는 학교의 소속 교수나 강사들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은 그런 시스템이 부족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수가 학교의 영역을 떠나, 개인지도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영재원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재주 있는 어린 학생들을 발굴하여, 지도해, 대학에 들어와 연주자로서의 경험을 일찍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교수의 ‘합법적인 개인레슨’입니다. 수업료도 나라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면제입니다. 오랫동안 가르쳐서인지 학생과 교수 간의 신뢰도나 유대관계도 좋고, 스타일에 대한 혼돈이 오지 않으니 연습하는 과정이 힘들지 않고, 특히 요즘 졸업생들은 굳이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취직을 잘하고, 국제 콩쿨 우승도 자주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등학교까지 다른 선생님께 배우다가 대학에 들어와서 다른 선생님을 만나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니, 혼돈도 오고, 적응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취직 준비도 해야 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경우에는 유학을 가야 하는데, 또 다른 스타일의 선생님을 만나면 고생의 연장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실력이 뛰어난 양심적인 젊은 교수들이 많으십니다.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속된 학교에서만 고립되어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라도 개인지도를 허락함으로써, 어려서부터 재주 있는 학생이 배우고자 하는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단체인‘ TIMF앙상블’의 연주자 겸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 많은 부분 현대음악에 관한 연주를 하고 있는데, 기법상 많은 부분이 옛날 악기 부는 방식과 다른 게 많습니다. 그런 부분에 관한 연구와 학생들과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윤이상 선생님의 곡을 많이 연주해봤는데, 서양악기의 연주기법에 한국적인 색채를 씌우는 작업이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다르고, 특이한 점이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유학을 끝내고 2001년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수많은 교향악단과의 협연, 리사이틀, 독주회의 무대를 올랐습니다. 그동안 연주한 작품 중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슈만의 ‘Adagio and Allegro’입니다. 많은 분이 원래 첼로를 위한 곡이라고 알고 계신데, 이 작품은 원래 호른을 위해 쓰인 곡이고, 첼로, 비올라, 오보에 등 많은 다른 악기들에 의해 연주되기도 합니다. 아주 서정적인 느린 부분과 격렬하면서 화려한 빠른 부분이 대비를 이루는 어려운 곡입니다. 호른을 위해 쓰였지만 호른으로 연주하기가 가장 어려운 곡입니다. Christoph Förster라는 작곡자의 협주곡 1번도 좋아하는데, 이 곡은 바로크 스타일의 곡으로 고음의 화려한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곡입니다. 일반적으로는 W.A.Mozart의 호른 콘체르토 4곡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궁정 지휘자 시절, 친구이자 수석 호른 연주가를 위해 쓴 곡으로, 원래 사냥 악기였던 호른의 역할을 잘 반영한 곡이기도 하고, 연주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른데, 비교하여 감상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모차르트 음반에서는 ‘Radek Baborák’라는 연주자와 ‘Radovan Vlatković‘이라는 두 분의 연주를 추천해 드립니다. 아주 깔끔하면서도 호른의 부드러움과 포용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호른의 부드러운 부분을 좋아하면서도 호른도 다른 악기처럼 화려한 면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른 곡 중 어려운 곡을 연주하기를 좋아하는데, G.Rossini의 ’Prelude, Theme and variation‘이나 P.M.Davis의 ’Sea Eagle’이라는 곡을 즐겨 연주합니다. 또한, 다른 악기 곡을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하는데, Arban의 ‘Carnival of Venice’나 Allan Borodin의 소품들도 좋아합니다. 많은 활동 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지난달, 해군 군악대의 '명예 군악대장'으로 위촉되신 것인데요? 7~8년 전, 선임이신 오광호 명예 교수님 재임 시절, 해군 군악대와 당시 제가 지휘자로 활동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윈드 오케스트라가 합동연주를 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한예종 졸업생 중 몇몇이 직업 군인으로 해군 군악대 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연이 깊어졌습니다. 현재, 해군 군악대 교관이신 김연근 교수님은, 전공은 다르지만, 오랜 시간 연주자로서, 또한 제자로서,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또한, 제가 해군 군악대 행사에 몇 번 초대되어 지휘도 하고, 대원들과 친분도 쌓으면서, 좋은 이미지를 축적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명예 군악대장’이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에 위촉된 것 같습니다. 아직은 ‘명예 군악대장’으로 위촉된 지 한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아, 그 사이 특별한 행사는 없었지만, 앞으로 재직 중인 학교와 군악대의 합동연주, 해군 군악대 위문연주 등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갈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 전,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이화여대, 상명대, 경원대, 동덕여대에 출강하며 제자 양성에 힘쓰셨습니다. 만났던 제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나요? 또한, 제자들에게 예술가의 자질로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동안 만난 모든 제자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고, 특별하지만, 제가 처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교수로 정식 부임했을 때 발탁했던 세 명의 남학생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이 세 남학생은 현재 각각 인천시립교향악단 수석, 청주시립교향악단 수석, 그리고 독일 빌레펠트 오케스트라의 수석을 역임하고, 대전시립교향악단 수석으로 스카우트 되어, 다음 달부터 활동 예정입니다. 같은 학년의 동기 세 명이 각각 다른 오케스트라의 리더가 된 것이죠. 이 친구들도 앞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텐데 기대가 아주 큽니다. 제가 스물세 살에 만났던 고3 학생도, 지금까지 저와 같이 음악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랑 다섯 살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저를 아버지처럼, 형처럼, 정말 가족으로 여기고, 현재 수원시립교향악단 수석으로 활동 중입니다. 상명대 출강 당시 가르쳤던 두 제자는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로 거취를 옮기자, 한예종 대학원까지 따라와, 한 친구는 동아콩쿨에 입상하여 춘천시립교향악단 수석이 되었고, 다른 한 친구는 KBS교향악단 단원으로 입단하였습니다. 상명대 개교이래 처음이라더군요. 안타까운 친구들도 있습니다. 독일에 유학 가서 장래가 촉망되지만, 군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해 있는 제자들도 있는데, 빨리 군 복무 마치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활동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제자가 유학도 가 있고, 국내외에서 연주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너무 성과 좋은 제자들만 나열한 것 같지만, 저의 모든 훌륭한 제자들이 이렇게 활동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예술가로서의 정직함과 성실함, 그리고 순수한 봉사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연주를 들으러 오는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가르침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정직함’과 ‘성실함’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력과 인성이 바탕이 된 연주자가로서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르면, 물질적인 면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욕심내지 않고, 음악가가 지녀야 할 자존심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교수님께 35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호른'은 어떤 의미인가요? 호른은 제 ‘신체의 일부분’ 같습니다. 없어지거나 버릴 수 있는 물건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제 감정을 고스란히 다 받아주는 항상 ‘고마운 존재’입니다. 호른 덕분에 이만큼 성장했고, 제가 하고자 했던 목표를 이루게 해 줬으니, 이젠 제가 존중해줘야 할 대상이겠죠? (웃음)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솔리스트 연주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음반을 갖고 싶어 합니다. 참 어려운 작업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 중 음반회사와 계약을 하여 음반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 금전적 걱정이 없는 연주자도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는 더 나이가 들고, 실력이 줄기 전, 제가 할 수 있는 역량 안에서, 개인적인 음반 두 장 정도 발매하고 싶습니다. 교수로서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니, 좋은 제자들을 꾸준히 양성하는 것도 제가 할 본분 중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선, 후배, 동료 음악가분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한, 그리고 실력 좋은 음악가이자 교육자’라는 평을 듣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클래식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에게, ’호른’이라는 악기를 통해 감동과 즐거움을 드리는 연주가로 남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석준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12년과 2017년, 시리즈로 출간된 국내 최초 프레젠테이션 총론서인 '퍼펙트 프리젠테이션'은 현재 수도권 대학들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의 프레젠테이션의 대표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저자가 평범한, 그러나 결코 '그저 평범하지 만은 않은' 회사원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 김재성의 이야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김재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직업으로 먼저 소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현재 광고 회사에서 디지털 미디어 전략 업무를 맡고 있고요 경영 컨설턴트 출신이자, 사업가를 거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입니다. 또한, 자기 계발서 `행동의 완결`이라는 책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프레젠테이션 전문가로서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니 해당 주제에 대해서 간단히 더 소개를 드리면, 2012년, 프레젠테이션 총론서인 `퍼펙트 프리젠테이션`(부제: 기획에서 디자인, 발표까지 경영 컨설턴트의 프리젠테이션 비법)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2017년에는, 이 책을 개정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즌 2(부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에 매직을 담다)라는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독자와의 접점을 더 넓히고 국내 프레젠테이션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2018년, 삼성 멀티 캠퍼스와 협업하여 VR을 활용한 프레젠테이션 온라인 과정인, `기획에서 리허설까지 3일만에 끝내는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떻게 처음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확히는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 `리더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스피치`가 생각났습니다. 위대한 일이 일어나는 데 있어 감동적인 스피치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연설이 그랬고, 시대를 사로잡았던 오바마의 연설이 그랬듯이요. 다만 단순히 `스피치`라는 관점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추세와 접목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위 말해, 스피치가 현재에는 어떤 식으로 `힙하게` 활용되는지를 생각해 본 것이죠. 그러다 보니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활동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학교에 프레젠테이션 연구회 CISL(Club for Improving Social skills and leadership)을 만들게 된 것은 2007년인데, 지금이야 많은 분들이 프레젠테이션의 고수가 되었지만, 당시 `웰메이드` 프레젠테이션은 막 뜨고 있는 분야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발표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분야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현재 이뤄지고 있는 프레젠테이션 기본 골격은 2007~2008년경 태동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방식의 프레젠테이션은 저에게도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피치에 + 슬라이드를 결합하여 새롭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활동으로 당시에 뜨거웠던 프레젠테이션을 택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CISL에는 ‘Leadership’이라는 약어가 있지만, ‘Presentation’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프레젠테이션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타인의 앞에서 발표하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려서는 웅변대회에 열심히 나갔고, 나이가 들고서는 가수가 되고 싶어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른 경험도 많았거든요. 연구회를 만들고 함께 활동하는 분들에게 참 많이 배우며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스피치아카데미`, `아나운서아카데미` 등에서도 전, 현직 아나운서나 CS 전문 강사가 프레젠테이션을 가르치며, 포털사이트를 검색하면 프레젠테이션 강의는 정말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프레젠테이션 스킬이 그 어떤 강사가 범접할 수 없이 차별화되는 부분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사설 스피치 학원의 강사분들의 프레젠테이션은 그분들의 역량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즉, 발표할 때 자세나, 발표할 때의 목소리 톤, 제스처, 아이컨택 등은 훌륭하게 가르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레젠테이션은 단지 무대 앞에 서서 남에게 발표하는 영역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회사원들의 프레젠테이션은 대부분 기획과 문서작성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스피치 학원 강사분들은 프레젠테이션 일부분을 가르치시는 역량은 탁월할지 몰라도, 프레젠테이션의 모든 부분을 가르치실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영업이나, 광고 회사 등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익히신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대다수 사무직이 필요로 하는 프레젠테이션과는 동떨어진 내용을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페이지에 그림 하나와 한문장만 넣으라`는 말은 사장님들이 제품 발표회나 서비스 발표회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슬라이드입니다. (이런 슬라이드를 젠(Zen) 형식의 슬라이드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료를 준비해 가면 백 퍼센트 직장 상사에게 야단을 맞을 뿐입니다. ‘이걸 준비라고 한 거야?’라는 말과 함께요. 직장인 중에서 문서 작성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집단이 모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컨설팅 업계 사람들일 텐데, 이 사람들은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직접 하시지는 않아요. 그리고 재밌게도, 이분들은 광고 업계에서 하는 젠 형식의 슬라이드는 또 잘 작성하시지 않아서 익숙해 하시지 않습니다. 직급이 올라가서 대중 상대로 제품 발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런 형식의 슬라이드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이런 슬라이드를 뒤에 놓고 발표를 해본 적도 없으니 적지 않은 어려움을 토로하십니다. 프레젠테이션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많은 경우,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훌륭한 전문가이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초심자에 가까운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 많습니다. 수려한 말솜씨를 가지신 분들이 프레젠테이션을 가르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배경으로 등장하는 슬라이드는 형편없는 경우가 많고, 젠 형식의 슬라이드는 정말 잘 다루시지만, 회사원들이 작성하는 `문서` 형식의 슬라이드는 다루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계십니다. 또한,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을 말씀드리면, `이렇게 하는 게 좋은 프레젠테이션이다` 라고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왜`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작정 하면 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왜 필요하고, 왜 그렇게 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움직여야 다양한 상황에 응용해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분, 부분, 끊어두면, 분명 저보다 뛰어난 솜씨를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저보다 기획력이 좋으신 분도 계시고, 저보다 슬라이드를 뛰어나게 잘 만드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도 무대에서 발표하는 다양한 기술에는 상당히 자신 있지만, 아나운서 출신 분들이 저보다 이 방면에서는 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레젠테이션 전 과정을 꿰뚫어 보고, 모든 분야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즉, 각론 측면에서는 저보다 나은 분들이 많으시지만, 저처럼 총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에 대해서 `왜 그런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몇 되지 않습니다.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로서 저의 최강점을 꼽으라면, ‘전체를 명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2012년, 국내 최초 프레젠테이션 총론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을 출간하십니다. 그리고 이 책은 수도권 5개 대학의 프레젠테이션 주 교재로 채택되는 등 학문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 김재성`이라는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2012년 책을 낸 일은 2007년부터 있었던 일이 차곡차곡 축적되면서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처음으로 학교에 연구회를 만들고, 부족한 실력을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향상해 나가다 보니, ‘우리 학교에서 가장 발표를 잘하는 집단에 가도 내가 1등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생각한 대상은 경영대학이었습니다. 저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경영 복수전공이나, 부전공한 적이 없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과였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경영대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다만, 기말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수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요? 저희 팀이 강좌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또다시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내가 만든 지식에 대해, 비용을 내고도 들으려 할까?` 그래서 모임 공간 사이트 등을 통해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개설하고 한 사람당 5만 원의 비용을 받아가며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뜻밖에 열 다섯 명이 넘는 분들이 강의를 신청하셨고, 강의에 대한 평도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화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08년 ‘프레젠테이션 컴퍼니’라는 회사를 만들고 다양한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는, 모교인 서울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디자인에 대해 강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유명인이 와서 강의한다고 해도 보통 150명 정도가 모이면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제가 했던 강의에는 200명 강의실이 가득 차서 앉을 자리가 없는 분들이 계단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진풍경을 만들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같은 신분인 학생이던 제가, 대학생 수백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는 강사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도 했고요. 또한, 당일 수강했던 서울대 학생들의 반응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후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회사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프레젠테이션에 대해서는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다.`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오다가, 컨설팅 회사에 들어오니,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신입사원으로 돌아가 연신 혼나가며 자료를 작성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내 방법이 더 좋은데 내 방법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하며 참 괴로웠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지금껏 해 온 프레젠테이션과 컨설팅사의 프레젠테이션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구나….‘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머리를 울리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작 발표회에 특화되어 있던, 제 연구 결과와 컨설팅 회사에서 다루는 슬라이드 만드는 방식을 결합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통용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구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컨설팅사에 재직하던 시기가 3년째 되던 시절, 저의 첫 번째 책이자, 국내 최초의 프레젠테이션 총론서인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출간하는 과정은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분야의 종사자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경영 컨설턴트들의 삶은 늘 새벽같이 밤낮없이 일하면서, 주말 근무도 잦습니다. 그렇기에 일을 하면서, 책을 집필하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말도 없고, 휴가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휴가를 내면, 집에 앉아서 책을 집필하는 일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여행을 갔어도 좋았겠지만, 아직도 뿌듯한 저의 결과물이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시 제가 노력했기에 얻은 수확이니까요. 책을 내고 나니 주변에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할 일이 없는 직종에서 근무하는 지인들도 선뜻 서적을 구매해 주고, 주변에 추천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주변 분들의 저를 많이 생각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더욱 기뻤습니다. 대부분의 기술서가 대단한 마케팅을 진행하지는 않습니다. 서평과 입소문을 통해 책이 알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판업계에 최초로 데뷔했던 터라, 인지도가 없던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책을 알아봐 주신 많은 분 덕분에 좋은 평점과 서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 포털 사이트에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을 검색하면 서평이 20여 건 올라와 있는데, 평점이 ‘9.82’입니다. 어떤 책이든 9점 후반대의 평가를 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다 보니, 대학교에서도 가르칠 일이 많은 프레젠테이션 참고 서적으로 많이 인용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수도권에서 대학 교재로 채택되며 어느 정도 학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기뻤습니다. 또한, 대학 교재로 채택된 학과도 경영학과, IT 관련 학과, 시각디자인과 등 다양한 학과인 점도 뿌듯했습니다. 같은 책을 보더라도 시각디자인과와 경영학과가 책을 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포대학교에서 입학하는 전교 신입생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 중, 프레젠테이션 강의가 있었는데, 제 책이 주교재로 채택되었던 일이었습니다. 매년 1,500명 넘는 학생들이 제 책으로 수업을 듣는다고 하니, 감개무량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이제는 졸업해서,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텐데, 배웠던 지식을 잘 활용하고 있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습니다. 책이 출간된 이후 가장 인상적인 평론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지금 소개해드릴 평론을 꼽고 싶습니다. 학생 때부터 꾸준히 프레젠테이션을 연마하면서 느꼈던 갈증을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며, 반드시 수업의 주 교재로 쓰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후에, 제 저자 직강 소식을 듣고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까지 오로지 강의를 듣기 위해 오셨다는 이야길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을 통해 지식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었다는 경험은 정말이지 짜릿했습니다. 서평: 왜 표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서적 출간 이후로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기보다는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편입니다. 가끔은 제 책을 주제로 직접 강의를 진행하고자 하는데, 수강생들에게 선물로 줄 수 있도록 사인 본을 구매하고 싶단 말씀도 있으시고요. 책을 출간한 부담감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기울여서 책을 펴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께 단순한 기술이 아닌 명확한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자 노력했으니 책을 통해 실제로 많은 분들에게 진짜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연구하고, 집필활동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집필했던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리즈 (시즌 I, 시즌 II)는 국내 프레젠테이션 서적 중 최초이자, 아직도 유일한 프레젠테이션 ‘총론서’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소개를 하자면? 프레젠테이션은 4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순서대로 기획단계, 슬라이드 디자인 단계, 준비/연습 단계 그리고 실전 발표 단계입니다. 각 단계를 자세하게 다룬 책이 ‘각론서'라면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리즈는 이 모든 단계를 순서대로 담고 있는 총론서입니다. 각론서는 한 가지 주제만 다루므로, 아주 세부적인 내용까지 짚어주지만, 각론서의 한계는 각 단계에서 단계로 넘어갈 때, 앞 단계에서 배운 내용을 연결해주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즉, 분명 시간상으로는 구분될 수 있지만, 앞 단계에서 익힌 내용을 뒤의 단계에서 활용해야 할 때가 있는데, 각론서는 매끄러운 연결을 이야기하기에 부적합합니다. 예를 들어, 슬라이드 디자인 단계에서 등장하는 개념 중, ‘SIT (Single Information a Time) 원칙’이 있습니다. 사람은 각각 다른 감각기관에 정보가 들어올 때 한가지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법칙인데, 이 법칙에 따라 슬라이드를 디자인하여야, 슬라이드의 내용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실제 발표장에서 발표자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때도 적용됩니다. 슬라이드가 처음 청중에게 공개될 때는, 발표자가 화면 바깥에 서 있다가, 청중이 어느정도 슬라이드를 보았다고 판단될 경우 화면 안쪽으로 들어와 설명을 이어갑니다. 이 역시, 시각 정보인 슬라이드를 먼저 청중에게 노출한 뒤, 음성 정보를 통해 발표를 이어간다는 방식입니다. 각론서는 이런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총론서로 책을 기획한 것입니다. 기획, 슬라이드 디자인, 준비와 연습, 발표, 모두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대주제에 속한 소주제입니다. 우리가 파워포인트 책을 사서 보는 이유가 파워포인트’만’ 잘하고 싶어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프레젠테이션 전체를 이해해야 하므로 총론서로 책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시즌 1은 여러 대학교의, 시즌2는 여러 기업체의 교재로 활용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책을 시리즈로 기획한 의도는 앞서 말씀드린 ‘총론’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책의 추세가 지난 예시, 바뀌어서 빠져야 하는 내용 등은 분명 존재합니다. 새로운 책을 내면서 새로운 법칙과 트렌드를 소개할 수도 있지만, 총론서가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원칙은 바로 ‘기본 개념과 정의’ 설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2012년에 출간한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즌 1에서 나오는 기본 개념은 수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정의들이 많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는 이상 말이죠. 드라마가 시즌을 바꾸어 가면서 진행되더라도 주요 인물들은 바뀌지 않고 등장하는 원리를 비교하면 쉽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 시리즈를 시즌제로 내고 싶습니다. 이미 예전의 서적을 읽으신 분은 ‘새로운 법칙’ 그리고 ‘더 발전된 방법론’에 집중하며 읽으시면 되고, 새로 읽으신 분들은 전 책을 읽지 않으시더라도 그 한 권으로 완벽한 총론서를 가지실 수 있게끔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첫 책을 집필하는 데는, 1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2007년 학내 연구회를 만들면서 시작한 여정의 결과물이 2012년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업할 때도, 그리고 컨설팅사를 취업하여 다닐 때도 모든 휴가나 여유 시간엔 늘 책을 붙잡고 책을 썼습니다. 제가 사업 할 때야 그렇다 치고, 제아무리 바쁜 직장이라지만 휴가는 갈 수 있었는데, 책을 내기 전까지 기간 동안 해외여행은 한 차례도 나간 적이 없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 밤늦게, 새벽 늦게까지 책을 쓰고 나서야 처음으로 책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개정판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실행에 옮길 때 즈음, 맥킨지를 퇴사했습니다. 그 이후,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기까지 약 4달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굉장히 여유롭게 책을 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몇 가지만 수정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돌입해보니 원고 업데이트는 약 200회가 넘게 이뤄졌고, 3개월 동안 아침 10시부터 자정까지 거의 매일 책을 쓰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탈고하고, 책 원고를 보니 약 25만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만찮은 작업은 아니지만, 저는 제 책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게 심혈을 쏟고, 온 정성을 기울였기에 대학과 유수의 기업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프레젠테이션 종합 컨설팅 기업을 창립하고, 여러 기관과 부처에서 컨설팅을 수백 명의 강의를 수차례 진행하며 승승장구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이 사업성을 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지요. 그런데 2010년, 창업한 회사를 뒤로하고, 돌연 컨설팅사 액센츄어에 입사를 선택합니다. 이후, 이직은 하셨지만, 꾸준히 소속이 있는 회사원이신데 이유가 있나요? 사실 승승장구라는 말을 하기엔 조금 과한 감이 있습니다. 그제야 자리를 조금씩 잡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표였고, 함께 일하던 친구들은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었기에, 사회의 편견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면, 적당한 수 이상의 직원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었으리란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취업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결정적인 사항은 함께 일하던 핵심 구성원이 다시 학교로 복귀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직 학부생 신분으로 휴학하며 일을 도와주었던 친구인데, 회사 차원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3학기나 남은 상황에서, 그 친구가 계속 일만 하게끔 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사업 특성상 프로젝트가 생기면 지방 어디든 바로 달려가 전혀 여유 없이 일해야 하는 여건이었기에,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의 논의 끝에, 사업을 잠정적으로 멈추어 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현재 프레젠테이션 컴퍼니의 대표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사업을 접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와 그 세계의 프레젠테이션 방법론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저는 제 사업을 다시 영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 역시, 사업을 청중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필요할 텐데, 그때 당시부터 갈고 닦은 역량이 도움되리라 생각합니다. 프레젠테이션 컴퍼니는, 제가 만들고 있는 여러 가지 콘텐츠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전면으로 나설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만약 저와 뜻이 같다면, 당시 함께 일했던 구성원들도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서 함께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프레젠테이션 전문가이자, 회사원, 그리고 자기계발서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지금껏 갈고 닦은 프레젠테이션 스킬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요? 첫째로, 저를 위해 쓰입니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프레젠테이션 스킬과 서적 덕분에 강의 의뢰나 협업 의뢰가 종종 들어옵니다. 회사에서 규정을 준수해야 하기에 모든 강의에 대해서는 수락하지 못하지만, 이는 저의 지식과 서적의 내용이 ‘들을만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사에 다니지만 꾸준히 ‘개인별 전문성’를 쌓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단 한 명의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를 꼽으라면 제가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입니다. 외부 초청 강연도 있지만, 2018년 제일기획 직원들을 대상으로 총 세 차례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두 번은 기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번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퍼팩트 프리젠테이션’은 제일기획 신입사원 PT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미래의 저를 위해 쓰이게 될 겁니다. 언젠가는 다시 사업하며 제 주변과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아왔지만, 앞으로도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입니다. 나중에 제가 직접 진행한 제품 발표회가 스티브 잡스의 발표만큼이나 반향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날까지, 열심히 노력과 연구를 하겠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꾸준하게 책을 집필할 예정입니다.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프리젠테이션’에서는 프레젠테이션의 전반적인 사항을 다루고 있지만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다루는 내용에 대해서는 미흡한 편입니다. 이에 대한 갈증을 피력하시는 독자분들이 많이 계셔서 현재 파워포인트를 중점적으로 한 책을 집필 중입니다. 단, 이 책은 단순히 파워포인트의 기능을 소개하는 책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껏 시중에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꾸며 볼 예정입니다. 또한, 자기계발이나, 인간의 사고 근본에 관한 책, 직장 생활이든 사업이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한, ‘자기계발서 ‘등을 집필할 계획에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책’이라기보단,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2019년 1월에 출간한 ‘행동의 완결’도 단순한 사례 몇 개를 가져오거나, 편협한 자신의 경험해 쓴 책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쪼개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원론과 방법론을 담았습니다. 앞으로 집필할 책들 역시, 자서전을 제외하고는 이런 형식을 따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술을 알려주는 책보다는 본질을 건드리는 책, 핵심을 찌르는 책입니다. 앞으로 출간 예정인 책들은, 단순히 ‘저런 책을 쓰고 싶다’의 수준이 아니라, 벌써 목차를 정했으며, 출판사와 논의 중입니다. 물리적 시간은 필요하기에, 올해, 내년, 바로 뚝딱뚝딱 나오지는 않겠지만, 차차 한 권씩 출간하며 독자분들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도 [Avec G]을 통해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언제나 제 꿈을 말할 때, ‘세계 최고의 기업, 세계 시가 총액 1위의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이 목표가 워낙 크고, 원대해서,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별것 아닌 지금의 제 모습도,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손쉽게 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입학한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을 때,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고, 책을 집필하겠다고 할 때도,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 헛된 망상이 아닌, 진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친구와 선후배로, 인연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과 같은 꿈을 꾸며, 멋진 팀을 만든다면 과연 제 희망이 마냥 불가능으로만 끝날까요? 여전히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저는 이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포기하는 순간 영영 불가능해지는 꿈이 될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어떤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은지를 말씀드린다면, 저는 제가 21살 때부터 꾸준히 사용해 왔던 닉네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듯합니다. 세 잎 클로버는 ‘행복’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라는 꽃말을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바랍니다. 건강하고, 목표하는 바를 이루길 바라죠. 저는 제가 만들었던, 그리고 앞으로 만들 콘텐츠, 제품, 서비스 등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행운의 티켓’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작게는 지역 사회와 독자들을 돕고, 제가 성장하여, 나중에 만들게 될 회사의 크기가 커진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제가 오랜 시간 사용해온 닉네임은 ‘Plusclov’인데요. ‘세 잎 클로버’에서 1장의 잎을 ‘더‘(Plus)하여 ’Plusclover’입니다. 그런데 ‘Plusclover’에서 ‘er ‘은 왜 뺐느냐고요? 저는 ‘명사형 인간’이 아닌 ‘동사형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ㅇㅇ를 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영어 단어에서 끝에 er을 넣습니다. ‘Player', ‘Owner', ‘Buyer' 등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명사는 멈춘 존재고, 동사는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활동하는 한, 저는 계속 사방에 ‘선한 영향력’을 건네면서 다니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Plusclover’에서 ‘er’을 뺀, ‘Plusclov’가 저의 닉네임입니다. 언제까지나 저의 주변 사람들과 책 또는 서비스 등으로 앞으로 만나 뵙게 될 많은 분께, 그분들이 목표하신 바를 이룰 수 있게끔 돕는 존재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점차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와, 콘텐츠를 만들게 된다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세계 최고의 기업을 일구는 것도 마냥 허황한 꿈이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껏 긴 인터뷰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서면으로든, 강의로든, 혹은 실제로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재성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1990년도 부터,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소신대로 연극 무대를 지켜오며, 언젠가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웃고, 울고, 연기로 관객을 치유하고, 자신도 치유 받는 그 날을 꿈꾼다'는 배우 정충구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평생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은 정충구입니다. 저는 항상 대본을 만났을 때, 역할을 만났을 때, 이런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안 보이는 데까지 보라. 보여 줄 땐 최선을 다해 보여줘라.’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아직도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연극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마음을, 평생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는 말씀들을 연기하면 할수록 더더욱 느끼는 부족한 배우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저 자신에게 욕하고, 마음속으로 ‘멍청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래도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대본을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새로운 것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사인 ‘연기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소설과 시를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결국 배우의 길로 접어들어, 1991년 연극 `넛츠 `로 공식 데뷔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학창시절에는 꿈이 없었습니다. 꿈을 꾸기보다는 하루하루를 흘러가는 데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시와 소설을 접하게 됐고 시인과 소설가를 꿈꾸게 됐고 윤동주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문학과를 지망해 더욱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목표가 생기니 안 하던 공부를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저만의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서 부족한 저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고, 재수했지만 또 실패했습니다. 같은 대학. 같은 과. 제가 대학 입시에 도전할 시기에는 전기대와 후기대로만 나뉘어 있어서, 다른 대학에 국문학이 아닌 다른 과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합격 소식을 접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때에, 우연히 신문에서 대학로에 있는 `극단 로뎀 `이라는 단체에서 워크숍 1기 단원을 뽑는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고, 중학교 때 연극반 - 정확히는 연극을 보러 다니는 반 - 활동을 한 것도 생각이 나고, 그렇게 엉뚱한 마음이었는지, 운명이었는, 합격통지서랑 기사를 번갈아 보다가, ‘더 큰 곳에 가겠다’는 마음에 ‘대학’이 아닌, ‘대학로’에 첫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저의 진로 변경에 대해 지인 중에는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까지는 아직도 연극활동에 대해서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대부분의 사람이 했습니다 . 그런데 그 생각들을 보기 좋게 이겨내고, 내년이면 연극 무대에 오른 지 30년이네요. 처음 극단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금전적인 부분을 말할 것도 없었고 가장 힘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배워야 하는 상태였으니까요. 연기에 대한 것부터 선배 후배와의 인간관계 또 연극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배울 것이 너무 나 많았습니다. 전문적으로 배경이 있거나,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모든 걸 처음부터 배워야 했었습니다. 연기에 대한 것도 특별히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깨닫고, 대본에 흰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저의 연극생활, 극단 생활이 처음은 쓰고, 지우고, 혼나고, 쓰고, 지우고, 혼나는 것의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것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무대는 ‘준비된 자’ 그리고 ‘만들어진 자’가 올라가야 한다는 극단 대표님의 확고한 생각에 무대에 올라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여 년의 시간이 지나, 1991년에 ‘넛츠 ’라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고, 단 두 마디 대사를 수천 , 수만 번의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법정드라마여서, 저는 법정을 지키는 정리 역으로 , 영광스럽게도 단 두 마디였지만, 공연 내내 무대 위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무대의 조명은 생각보다 뜨겁고, 관객의 시선은 무섭고, 두렵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제 모습은 행복했습니다. 공연 마지막 날 커튼콜을 하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날 밤새 울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첫 무대에 올랐다는 감동, 오르기까지 과정 등, 그냥 복잡한 마음들이 눈물로 다 나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장난처럼 자신의 현실을 탓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난 똑같은 사람이기에 어느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도 연극배우의 길을 택한 저의 선택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배우 정충구`가 있도록 연기에 도움을 가장 많이 준 평생의 스승님이 있나요? 모든 선배님과 선생님들 후배들이 다 스승이었습니다 . 희곡이, 무대가, 함께한 사람들이, 다 스승이었습니다 . 제 주변엔 언제나 배울 사람들과, 배울 희곡과, 배울 무대와, 배울 책들이 있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내년이면 벌써 연기 인생 30년입니다 . 대학로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돌아보면 잊지 못할 추억과 인연도 많을 것 같습니다.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과 대학로에서 만났던 특별한 인연이 있나요? 무대에 올랐던 많은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특별히 극단 실험극장에서 공연했던 2002년 ‘검정고무신’이라는 작품과 2012년 ‘로베르토 쥬코 ’, 그리고 2012년 ‘환장지경 ’이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검정고무신’이라는 작품은 배우들과 연출도 좋았지만, 제가 지금껏 숙제로 가지고 있는 ‘비우자' 그리고 ‘버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 ‘나를 비울 수 있어야 더 많이 채울 수 있고 , 나를 버려야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든 작품이고, 지금도 그 숙제를 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버리고, 무대에 올라, 커튼콜 때까지 집중의 끈을 놓지 않고, 관객의 박수로 채우고 나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로베르토 쥬코 ’에서는 주인공인 ‘쥬코 ‘역을 했는데 , 무대라는 것이 ‘작품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배우 , 스태프들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 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배우들의 스태프들의 시선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장지경 ’은 사극 작품인데 양녕대군의 이야기입니다. 작품에 평이 좋아서 몇 번의 앙코르를 거쳐 몇 년간 공연되었는데 , 좋은 작가를 만난 것과 함께 매번 새로운 것이 대본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작가도 모르는 새로운 느낌과 호흡을 배우가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입니다. 제가 지금껏 만났던 모든 배우와, 연출들 , 제작진들과의 인연은 늘 감사하고, 소중합니다. 시작할 때는 작품 욕심에 싸우기도 하고, 오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이 끝나고 헤어질 때는 이산가족처럼 아쉬워하고, 슬피 우는 게 , 연극을 하면 만나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몇 개월에서 길면은 몇 년을 함께 하니 항상 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특별하지만 ‘검정고무신’ 때 만난 김성노 연출님, 손규홍 연출, 손혜선 연출과 ‘환장지경 ’ 때 만난 홍석진 작가와 김정근 연출은 마음 깊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 네 분의 연출은 ‘연출이 배우를 믿어주면 이렇게 힘이 되는구나’하는 걸 느끼게 해준 고마운 연출들이고, 홍석진 작가는 지금도 나의 연극에 함께 하는 동료이면서, 작가로서 ‘나’라는 배우를 생각하고 작품을 쓰는 고마운 작가입니다. 저는 사람을 사귀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아, 주변의 외향적인 사람들처럼 많은 지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소중하게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가는 스타일이라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 지인들, 연극동료들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의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작년, 포항바다국제연극제 최우수남자연기상을 받으셨습니다 . 데뷔 이래 첫 수상이십니다. 연극을 하면서 상을 탄다는 것에 많은 배우가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몇 번의 연기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지만, 상복은 없는 편이라, 처음으로 ‘포항바다국제연극제 ’에서 최우수남자연기상을 수상하였는데 , 일단은 큰상이고, 작은 상이고를 떠나 기분이 매우 좋고, 삶의 전환과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로 인해, ‘상은 타볼 만 하다는 것’, 그리고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궁전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으로 수상하였는데, 연극의 내용은 1999년,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궁전다방’이라는 한 다방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재미와 감동, 사람 사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내용의 작품입니다. 대한민국에 많은 연극제가 있지만 ‘국제’라는 말이 붙는 연극제가 좀 더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상을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수상 당시, 저는 다른 작품의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수상식에 참가하지 못해, 대리수상을 하였는데, ‘너 상 처음 탄 거냐 ?’ ‘전에 타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들이 정말 연기를 못했나 보다 .’ ‘술 사라.’ 등, 주변의 반응은 장난스러운 사람도 있었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인들은 제가 오랜 시간 힘들게 연극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술 한잔 사면서 제 손을 잡고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제 연극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자녀가 아버지를 따라 배우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 만약, 제 아이가 배우의 길을 걷는다면, 도움을 주거나, 지원해주는 것은 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은 본인이 한 것이기 때문에, 제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일은, 뒤에서 묵묵히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선택을 자신이 했으니, 후회하거나 , 행복을 찾는 것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지만, 그 삶까지 제 것은 아니니까요. 배우의 길은 평생을 연기에 대한 고민과 생활에 대한 고민의 연속입니다. 연기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도 있지만, 살아가는 생활의 고민도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가’의 문제인 듯합니다 . 배우는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서 금전적으로는 절대로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기에, 많은 배우는 가정을 꾸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얘기와 비현실적인 마음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면 배우의 벌이로는 생활이 힘듭니다. 언젠가 국민연금을 내는 과정에서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30년을 배우로 연극 무대에 서온 저였기에 당연히 저는 ‘연극배우 ’라고 직업을 소개했는데, 국민연금공단에서는 저를 무직으로 보더라고요. 정말 슬프지만, 아직도 이것이 연극계의 현실입니다. `배우 정충구`에게 `연기`란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연기를 하면서 점점 생활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하는 것이죠. 무대에 올라가는 연기에 임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연기는 네게 현실이고, 관객에게는 감동이어야 한다. 네가 관객에게 감동을 강요하지 마라.’ 제가 날 것 같은, 살아있는 모습들을 관객에게 보여 주는 것이 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연기를 잘하기 위해 안 보이는 데까지 보려고 노력하고, 보여 줄 땐 최선을 다해 보여 주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배우가 다 노력하고, 고민하고, 대본을 보고, 책을 읽고,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연습하고 , 무대에 오릅니다. 전 무대에 오르기 전에, 그동안 연습하고, 고민한 저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 그리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비우자’,‘버리자’라고 되뇌며 , 마인드 컨트롤을 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앞으로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연극무대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 연기하려고 준비 중이고 실행 중입니다. 언제나 희망하고 꿈꾸는 세상은 연기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직접 연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언젠가 연기하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과 만나고, 느껴보고 싶습니다. 함께 웃고, 울고, 연기로 관객들을 치유하고, 저도 치유받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은 이름 앞에 또 다른 이름이 붙을 때가 많습니다. 작가 누구, 공작 누구, 백작 누구, 축구선수 누구, 대통령 누구 등. 배우 누구인, ‘배우 정충구’라는 이름이 앞에 붙고,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겁니다. 저는 오늘도 그렇게 연극만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연기자로서 하나의 장르만을 고집하면서 영화나 드라마 등의 다른 매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다른 장르에서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해 많은 배우가 금전적인 부분 때문에 연극 무대를 떠나 다른 장르를 찾고, 다른 직군을 택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다양한 장르에서, 좋은 모습에 연기를 보여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혹여,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지 못하더라도 후배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배우!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답다.’라고 인식 받는 세상에서요. 마지막으로 제가 죽었을 때, 묘비명에 ‘배우! 정충구. 이곳에 잠들다.’라고 쓰인다면,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정충구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8년 간의 경찰, 그리고 24년 간의 과학수사요원과 프로파일러로서 1천 5백 여건이 넘는 현장을 다니고, 1천 명에 이르는 범죄자들을 분석했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서 그는 우리나라 프로파일링계의 산증인이고, 걸어다니는 역사다. 현재는 현역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는 권일용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권일용입니다. 저는 만 28년간 경찰 CSI와 프로파일러로 근무하고 지난 2017년 퇴직하였습니다. 현재는 ㈜융합사회안전연구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광운대학교 범죄학과 대학원 겸임교수입니다. 인터뷰를 통해 소중한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마 정말 많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으셨고, 독자들 역시 궁금해하실 것 같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명예퇴직을 결정하셨습니다. 1989년 8월, 경찰학교를 졸업하면서 경찰관으로 임명된 이후, 2017년 4월, 퇴직할 때까지 강력수사,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면 과학수사요원(CSI)과 범죄분석요원(프로파일러)로 근무한 기간이 만 24년입니다. 1993년 7월부터 과학수사요원(CSI)으로 시작하여, 2000년 2월 한국경찰 최초로 프로파일링 팀이 만들어지면서 그 팀에 유일하게 혼자 발령이 난 이후 퇴직 시까지 약 1,500건 정도의 사건 현장과 1,000명에 이르는 범죄자들을 분석하였습니다. 뜨겁고 치열한 범죄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과학수사 대상을 받았고, 2016년에는 한국에서 발생한 여러 연쇄살인범 검거와 강력사건 프로파일링을 한 유공으로 영예로운 국민훈장 옥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습니다. 2017년 어느 봄날, 정년퇴직이 몇 년 남은 저는 스스로 퇴직을 결심하였습니다. 충분히 소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였고 문득 앞으로의 삶에서는 나만의 모습으로 한 번은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프로파일러는 때때로 범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의 머릿속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 범죄자 화(化)’ 되어야 그들을 분석하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만나서 분석을 한 범죄자가 거의 1,000명입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범죄자들과의 삶에서 벗어나 내 생각과 내 의지로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많은 사람과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물론, 범죄와 범죄자들 속에서 살아온 지난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소임을 다했고 제복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퇴직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자 조직 내에서 많은 분이 만류하였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제복을 입은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주어진 소임을 다 하는 것이 국민과 한 약속이겠지만 스트레스가 심해져 어금니가 빠지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후배들에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저는 후배들을 믿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하게 국민을 위해 주어진 자신의 소임을 다 해 줄 것입니다. 현역시절, 범죄현장에는 어느 정도 투입되었었고, 그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였었는지 궁금합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범죄현장에 과학수사요원들이 투입됩니다. 이때 프로파일러도 함께 투입됩니다. 과학수사요원들은 물리적 증거를 수집하는 역할을 하지만 프로파일러는 심리적 증거와 분석을 하게 됩니다. 현장에 나타난 DNA와 지문 등은 그 사건에 관련된 자들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지만 프로파일러는 그 사건이 발생한 동기와 목적, 용의자의 유형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현장에 범인의 발자국이 남아있을 때 과학수사요원들은 그 발자국의 문양을 채취하여 어떤 신발인지를 찾아내지만 프로파일러는 그 발자국이 어디에서 가장 많이 머물렀는가, 어디로 이동하였는가를 통해 범인이 범죄현장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지를 추론하는 일을 합니다. 과학적인 현장 재구성과 행동분석이 필요하고 CSI의 여러 분야와 긴밀한 협업이 필요합니다. 늘 참혹한 시신을 마주하고 그 상처를 들여다보고 범행도구를 추론하고 범인 상을 구축하는 일들…. 1,500여 건의 현장에 나갔지만 잔혹한 현장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물론, 냉정하고 단호하게 범죄현장을 분석하지만 늘 가슴이 아프고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을 옆에서 함께 보고 느끼는 것은 익숙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2000년 2월, 한국경찰에 프로파일링 팀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프로파일러를 경력 채용한 것은 2005년부터입니다. 15명의 심리학, 사회학 전공자를 경장으로 채용하여 중앙 경찰학교에서 기본 교육한 후, 2006년 1월, 각 지방청 수요에 맞춰 발령을 낸 것이 공식 프로파일러 1기입니다. 매년 선발하는 것이 아니어서 현재 7기까지, 공식 프로파일러가 선발되었습니다. 혼자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등 여러 강력사건을 수년간 분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저는 드디어 팀에 함께 일할 동료들이 생겼습니다. 함께 현장에 나가고 함께 시신을 수습하고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제가 그 범죄현장에서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후배이자 동료 프로파일러 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한 사건에 팀장으로 프로파일러들과 함께 며칠 투입되고 나면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가 됩니다. 이때 저는 동료들과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합니다. 그 시간에는 일체 사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잠시나마 서로 조용히 위로합니다. 말을 하면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용히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우리가 함께 어려운 일을 겪어나가고 있다는 무언의 대화들을 나눕니다. 이때 서로를 의지하고, 고맙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결 같은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 고맙고, 행복하다는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 어느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가 같이 겪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서로 간의 믿음과 고마움입니다. 이것이 제가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견디어낸 힘이 되었습니다. 프로파일러들은 앞으로도 그런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일반 수사관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 못지않게 큰 고통을 겪습니다. 어쩌면 한 달에 2, 3건의 살인 현장에 나가야 하는 것이 과학수사요원과 프로파일러들입니다. 그동안 투입된 한건 한건의 사건이 모두 트라우마입니다. 다행히 현재는 트라우마로 인한 어려움을 크게 겪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퇴직 후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지방에 여행이나 강의가 있어서 갈 때면 ‘예전에 어떤 사건으로 이곳에 왔었지….’라는 생각들이 문득문득 되살아납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사건을 분석하였으니, 제 청춘의 기억에는 곳곳이 사건이 일어났고, 며칠씩 밤을 새웠던 그런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마 세월이 더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겠지요. '국내 1호 프로파일러'이십니다. 현재 국내 프로파일러의 현황은 어떻게 되며, 정식 프로파일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전국 지방경찰청에 2~3명씩 치안 수요에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프로파일링하는 인원은 35명 정도 됩니다. 인원이 매우 적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광역 분석 체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청과 인근 지방청 프로파일러, 또 인근 지방청이 아니더라도 해당 사건을 분석한 경험이 있는 프로파일러 등이 모여서 함께 분석을 진행합니다. 한국경찰에서 프로파일러가 되는 것은 경력 채용에 합격하여 경찰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 경찰이 되어서 프로파일링 팀에 근무하는 때도 있지만, 부서별 인원이 책정되어 있어서 쉽게 이동하기 어렵습니다. 심리학, 사회학, 범죄학 석사 이상의 경력을 기본 경력으로 하여 면접과 구술시험 등을 통해 선발하고 있습니다. 범죄심리학자는 살인, 강도, 성범죄자 등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심리적 원인, 예방 등에 대해 연구를 하는 학자들을 의미합니다. 프로파일러는 그 연구된 자료들을 현장에 여러모로 적용하고 응용하여 범인을 검거하는데 활용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범죄심리학자와 프로파일러는 역할이 다릅니다. 범죄심리학자가 범죄현장에 나가서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을 재구성하고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프로파일러는 심리학과 사회학 등을 전공하고 많은 현장 자료들을 분석하여 연구논문과 학술적 연구를 병행하지만 본질적으로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연구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많은 데이터가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범죄에도 응용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갖는 여러 감정,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분노, 시기와 같은 감정들은 범죄가 동기화되는데 큰 영향을 주지만 데이터로 분석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데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프로파일러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므로 앞으로도 프로파일러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경찰 공무원으로서는 은퇴하셨지만, 각종 단체의 프로파일링 자문위원, 강사, 그리고 ㈜융합사회안전연구교육센터 대표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융합사회안전연구교육센터는 제가 퇴직 후 1년여가 지난 시점에 만든 법인입니다. 국가의 범죄 관련 연구 용역도 진행하고 있고 현장의 경험을 통해 사회 안전망 구축을 하는 연구들을 진행하는 곳입니다. 자문위원을 하는 곳은 오직 경찰청입니다. (사) KCSI(한국 과학수사학회)는 경찰청과 몇몇 대학의 실무 연구교수들이 함께 운영하는 단체인데 이 단체에서는 법심리분과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법심리분과에는 현직 프로파일러들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경찰청 자문의 경우 중요사건이 나면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 합동 분석을 하는 등 실무적 자문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미제사건(Cold Case) 사건 분석에도 일부 참여합니다. 평생의 일이 범죄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퇴직을 하여서도 범죄와 관련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와 역할 수행을 통해, 범죄자들의 심리를 대중에게 전달하고 그 사건들의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사회에 전달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범죄 예방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장에서 경험한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함께 아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9월, 고나무 기자와 함께 연쇄살인 추적기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출간하고,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어떤 계기로 발간이 되었나요? 저는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마치 퇴직한 경찰관의 무용담처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더욱 객관적인 입장에서 프로파일러와 범죄, 사회적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고자 노력하기 위해 고나무 기자와 공저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프로파일러의 역할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반응을 비롯해,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통해 우리 사회 범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에 대해 무관심하였다는 것.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 피해를 보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많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으로 책을 위해 노력을 한 결실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한국에는 프로파일링에 대한 다소 모호한 개념 때문에 쉽게 대학에서 강의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외국 이론들을 번역하여 강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퇴직을 하면서 교재 한 권 없이 강의하는 현실을 고민하던 중에 후배 프로파일러들이 ‘이제 선배님께서 기본 이론 정리를 해 주시면 그 이후 저희가 그 위에 또 탑을 쌓듯이 경험과 이론을 만들어 가겠다’라고 하여 용기 내어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의 집필을 결심하였습니다. 이 책은 후배들과 함께 한 현장의 기록입니다. 실제 사례도 들어있습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집필되는 과정에서도 개인적으로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는 발간을 위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년 6개월 정도가 소요된 것 같습니다. 이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는 저 혼자 분석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프로파일러들과 함께 한 사례들을 선정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지면을 빌려, 흔쾌히 제작과 출판을 함께 해 주신 박영사 출판사 이영조, 배근하 선생님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프로파일링 이론과 실제’는 앞으로 프로파일러들의 토대가 될 교과서로 쓰이게 될 가능성이 있기에 용기도 필요했었고, 지금도 무한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프로파일링의 이론과 실제’가 초석이 되어 후배 프로파일러들이 이 책 위에 그야말로 대한민국 프로파일링이라는 탑을 하나씩 쌓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은 ‘범인을 검거하는 방법’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프로파일링의 ‘개념과 역사’는 무엇이고, ‘어떠한 방법’이 있으며, ‘현장에 이렇게 적용되었다’라는 내용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지휘관들과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종 사직서에 결재를 받았습니다. 그날 인사과에 그 사직서를 제출하러 가는 길은 제가 평생 걸어본 길 중에 가장 긴 길이였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거의 2시간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떠나는 것은 만나는 일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이제 퇴직을 하고 나니 멀고 길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입니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국민이 믿고 계시는 제복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후배들에게 남겨두고 떠난 것도 한없이 미안합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을 찾아내고 전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직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방식보다는 더 자연스럽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분께 전달하고 또 함께 고민하는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역할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죄는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결코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권일용, SBS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의사와 환자들의 더 나은 복지와 정책을 위해 SNS를 통해 정부와 의사협회의 기울린 의정에 쓴소리를 마다치 않는 의사! 그리고 어떤 것보다 대표로 있는 회사를 통해 '젊은 의사들에게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여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기동훈 교수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메디스태프 대표이자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진료교수로 재직 중인 기동훈입니다.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피부과의 전공의 과정을 시작한 지 3달 만에 그만두고, 이듬해 응급의학과로 전공을 바꾸어,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응급의학과로 진로를 택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인턴을 하면서 응급의학과에서 두달 동안 일하면서 재밌고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과 지원에 있어서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했기에 고민 끝에 피부과에 지원했습니다. 피부과는 아름다움과 질병을 같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과였지만 일을 할수록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 내 분위기도 잘 맞지 않아서 결국 3개월 후 그만두게 되었고 같이 시작했던 동기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피부과 전공의를 그만두고는 모 대학병원 안과에서 전공의결원이 생겨 두 달간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응급의학과 지원을 마음속으로 결정한 상태였지만 안과적 응급질환을 배우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즐겁게 일했습니다. 응급의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응급실로 내원하는 급성기 질환 환자들에게 빠른 판단과 처치를 통해 호전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정신없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와 경증환자를 구별하고 중환자 처치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피부과를 그만두고 응급의학과에 지원하기로 했을 때 친구들 가족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말렸지만, 응급의학과를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슬퍼하셨던 것이 제게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편한 길을 마다하고 힘든 길을 선택하는 자식을 보며 들게 된,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응급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주취자에게 폭행을 당한 적도 있고 무례한 보호자들에게 불편한 일을 겪을 때 가끔 '응급의학과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진단, 처치로 환자들이 호전되고 환자나 보호자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할 때 역시 '응급의학과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공중보건의로서 군 복무를 이행하게 되면 36개월간 처음 배정받은 부대나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전역하게 되는데, 교수님은 강릉교도소에 계시다가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근무지를 발령받아 전혀 다른 두 곳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두 곳의 군 생활은 어떠했었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공중보건의사들은 시골 보건지소에 근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연한 기회에 교도소로 배치가 되어 첫 의사 생활의 시작을 교도소 의사로 시작했습니다. 교도소 의사로 일하면서 보건지소에서 일하는 것보다 다양한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진료하게 되었고,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교도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지역사회에서의 교정 의료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고, 그렇다 보니 몸이 안 좋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결핵 등의 감염성 질환,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앓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추후 건강하게 지역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어, 교도소 공중보건의들과 합심하여 WHO에 나온 ’교정시설 의료지침’을 번역하는 일도 했습니다. 얼마 전 종영한 KBS 드라마 ‘닥터프리즈너’처럼 재소자들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도 있고, 상습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수형생활을 마치고 ‘그동안 고마웠다’라고 인사는 재소자들 보면서 힘들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1년 근무하고, 교도소와 특수기관 공중보건의사 대표를 맡으면서, 서울중앙지검으로 근무지를 옮겼습니다. 서울중앙지검에서 하는 일은 드라마 ‘닥터프리즈너’처럼 재소자들의 형집행정지 신청이 들어오면 검사님과 함께 해당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이 과정을 ‘임검’이라고 합니다. 저는 교도소 생활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중앙지검 관할에서 사체가 발견되면 검안을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의료기록 자문, 검찰청 내 환자 발생 시 응급처치를 담당했습니다. 교도소 중앙지검에서 일하면서 일반 환자들보다 거칠고 때로는 부딪친 적이 많았지만, 사회를 보는 눈이 넓어졌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런 공중보건의과정 없이 바로 수련의 과정과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면, 지금 사회를 바라보고, 대하는 제 시야가 더 좁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힘들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교도소 공중보건의사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전문의 시험 직후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에 최연소로 출마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대한의사협회는 의료법에 명시된 법정 단체로 전체 의사들을 대표하는 단체입니다. 2000년 의약분업 이후 의사들의 처우 진료환경은 악화하였으나. 의협은 난관을 해결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 젊은 의사단체 대표를 역임하면서, 의사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제 후배 동료 선배들, 젊은 의사들과 모여서 토론하고, 직역 단체들을 통해 공중보건의사, 전공의들, 그리고 전체 의료계의 불합리함을 개선해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성 의사들은 후배들의 앞날이 어두워지는데도, 해결책 없이 내부분열을 하고 있었기에, 이대로 후배들에게 불합리한 의료환경을 넘겨준다면 ‘우리도 부끄러운 선배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인 의사협회를 개혁하고, 젊은 의사들의 목소리를 담아 새로운 의협을 만들고 싶어서 출마했었습니다. 응급의학과 교수로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기에, 일명 '전공의법'에서 보장하는 주 80시간 (추가시간 88시간)의 근무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환경에서 주 120시간 이상 일하다가 결국 과로로 유명을 달리한 故윤한덕 중앙응급의료 센터장님이 떠오릅니다. 故윤 센터장님이 돌아가신 지 4개월이 지난 현재,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근무 환경은 바뀐 것이 있나요? 질문의 내용은 비단 응급의학과 만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응급의학과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필수 과들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등 사람을 살리는 필수 과들은 지방에서부터 경험 많은 의사들이 과도한 근무 시간, 규제, 비현실적인 보상으로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향후 10년이 지나면 정말 응급질환에 대처할 수 있는 의료진이 없어 많은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도래할 것은 자명합니다. 모두가 ‘돈보다 생명’이라 말하지만,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지 않으면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현재 정부의 재정 운용은 필수의료에 대한 투자보다 선심성, 포퓰리즘 투자에 치우쳐 있습니다. 필수 과가 몰락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대책은 없습니다.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필수 과는 비가역적으로 회생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故윤한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4개월이 지났지만, 현장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본인의 생명을 갈아 넣어 다른 생명을 살리다가 돌아가신 일이 생겼지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현실입니다. 응급의학의로서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매우 급한 상황 속의 격한 일들도 많이 겪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기억에 남는 환자나 일화가 있나요? 첫 내원 시 독감 진단을 받고 퇴원했던 환자가 갑자기 숨쉬기 불편하다고 다시 내원했었습니다. 산소포화도도 정상인데 갑자기 목을 잡고 숨이 막힌다고 힘들어했습니다. 드물지만 감기가 후두개염이라 부르는 질병으로 발전한 것인데, 기도가 막히기 때문에 빨리 기관삽관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질환입니다. 급격하게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상태에서 기도를 덮는 후두개가 너무 부어 기도확보가 어려웠습니다. 기관삽관에 실패하면 목을 열어 기관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도삽관에 성공하였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언젠가 여성 환자가 남편과 함께 응급실에 내원했는데 넘어져서 다쳤다고 제게 얘기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환자의 모습에 저는 검사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편과 분리하고 환자에게 다시 다친 이유를 물어보았고, 환자는 남편에게 폭행 당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원하고 있었기에, 직접 경찰에 신고하여, 그렇게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환자를 도와드렸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 응급의학과로 일하고 계신 와중에, '메디스태프'라는 기업의 대표로 활발히 활동 중이십니다. 창업을 생각하고 시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스타트업 창업은 전공의 때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무형의 가치를 창출하고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는 일은,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고 정책에 참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세계의사회 산하 젊은의사네트워크를 통해 만난 외국의 젊은 의사들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창업에 관하여 얘기했을 때, 적극적으로 창업에 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도전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디스태프’는 의사 그리고 환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진료를 위한 ‘환자 정보 공유 시 보안 메신저 기반 플랫폼 서비스’를 통해 안전하게 환자 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추후 확장을 통해 의사들의 삶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려 합니다. 메디스태프는 현재 저 포함 6명의 직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계획은 국내 보건의료지역의 대표 플랫폼 서비스로 자리 잡은 후, 동남아로 시작한 해외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하버드의대 졸업생의 절반 이상은 창업을 한다고 합니다. 디지털 건강관리 영역에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궁무진합니다. 임상보다는 다른 도전을 하고 싶다면 용기 있게 도전해보길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돕고 싶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대표로 있는 메디스태프를 의료계의 대표 모바일 플랫폼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고 싶습니다. 의사들의 대표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후, 치과의사, 간호사용 플랫폼 출시를 통해 보건의료계를 건강하게 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메디스태프를 통해 젊은 의사들에게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여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젊은 의사들이 정책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준비되고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데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처음엔 길이 아니었지만, 제가 걸어가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제 발걸음을 따라 여러 사람이 오다 보면, 그게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에게 의사로서 임상뿐 아니라, 스타트업, 정책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후배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긍정적인 눈으로 다른 사회, 다른 집단과 소통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환자를 위한 진료를 함에 있어 많은 불합리한 환경들이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자신을 태우는 뜨거운 분노가 아닌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저 역시 젊은 의사, 후배님들의 미래를 위해 부족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기동훈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정부부처의 프로젝트 디자인, 대기업 디자인 등을 비롯한 작품 활동 외 대학의 교수로서 국내의 손꼽히는 시각디자이너로 활발히 활동하는 박승배 교수는, 2년 전부터, 인공지능디자인 회사인 '브랜드뉴테크'를 창업하여 '디자인 소외계층이 없는 세상'을 목표로 오늘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프로그램 부교수 박승배 입니다. 2017년 9월, 인공지능 디자인회사인 ‘브랜뉴테크’를 창업하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지, 디자인계에 입문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뜻대로 의대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때는 이과생이었지만, 재수할 때, 진로를 미술로 바꾸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친누나의 권유는 제가 미술로 진로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디자인분야 자체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순수미술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요. 디자인분야를 알게 된후부터는 예술적 작품보다는 구성원들과 함께 커뮤니케이션하며 디자인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컸었던 것 같습니다. 분야는 미술이지만 대학 학사와 석사, 박사를 모두 다른 전공으로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학부에서는 시각디자인을, 한국에서 석사는 광고디자인, 미국에서는 뉴미디어, 그리고 박사는 영상학으로 받았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전혀 다른 분야는 아닙니다. 시각디자인은 디자인 분류에서 가장 큰 카테고리중의 하나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안에 광고, 타이포, 편집, 일러스트레이션, 디지털미디어, 영상등 시각적인 디자인을 총칭하는것인데요. 제일기획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하며 야간 대학원을 다니면서 석사과정을 수학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광고디자인을 전공 했습니다. 대학원 시절, 한참 ‘닷컴붐’이 일어날때였고, 교수님의 권유로 영국의 박사과정과 미국의 석사과정의 유학을 두고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의 디자인 박사과정이 거의 없었던 때였기에, 졸업후 실무를 경험해보고자 미국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뉴미디어를 전공하였고, 광고도 그 시절부터는 디지털과의 결합이 많아지는 시기여서 자연스레 뉴미디어와 광고를 함께 다루는 것이 저의 토픽이었습니다. 박사과정에서도 영상학과였고, 저의 연구주제는 영상과, 뉴미디어, 광고 이런 키워드 속에서 혁신적인 광고였습니다. 논문 다음으로 출판한 도서도 ‘이노베이티브 광고’였습니다. 어떤 학문을 다루는데에 학부에서는 개괄적인 것을, 석사에서는 더 심층적인 것을, 박사에서는 아주 세부적인 것을 주제로 삼는 것이 주로인것처럼, 저도 그렇게 된것입니다. 디자이너로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20년이 넘는 동안 광고부터, 신용카드디자인, 브랜드디자인, 서비스디자인 정말 많은 디자인을 해왔는데 그 중 딱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정말 쉽지 않네요. 광고 중 휴대전화인 ‘애니콜’과 ’또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전자 캠페인, 그리고 KB 국민카드 디자인을 했을 때는 앙드레김 선생님과 함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한것과 가죽카드를 만든 것이 대표작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쯤 접하게 되는 현재의 정부상징 디자인을 자문하며 함께 만들었는데 아쉬움도 있지만 큰성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서비스디자인을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응급실 폭력예방 서비스디자인‘을 몇 년전 프로젝트로 진행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응급실에서 빈번이 일어나는 폭력은 정보의 부족이나 오류에서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을 과제를 조사하며 알게되었습니다. 지금껏 정량적인 부분에만 주목하였기 때문에 그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오류가 있었다고 당시 저희 팀은 생각했습니다. 고려대학교안암병원을 테스트 삼아 응급실에서 환자들, 의료진, 보호자들을 관찰하고 인터뷰 하며 원인과 결과를 들여다 보는 과정을 반복하며 분석하고 솔루션을 만들어 냈고 그 이후로 그것을 적용해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이 솔루션을 보건복지부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확산을 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관련 기사 링크 브랜뉴테크의 비비빅닷컴을 창업하셨습니다. 비비빅닷컴을 창업하게 된 배경, 그리고 비비빅닷컴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설명해주세요. 2015년에 제가 교수로 재직 중인 서울 과학기술대학교의 창업보육센터장과 창업교육센터장의 보직을 맡게되었습니다. 많은 창업자들을 만나다 보니 디자인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목말라 하는 디자인 소외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저는 그들에게서 디자이너나 디자인 회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끊임없이 받았었습니다. 전세계의 디자이너 중 8~90%는 대기업이나 글로벌회사를 위해 디자인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돈이 없는 자영업이나 소규모 회사는 역량있는 디자인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디자인을 해서 공급하면 그 소외된 분들에게도 ’디자인을 활용한 비즈니스의 결실을 맺을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하게되었습니다. 이 땅에 ’디자인 소외계층이 없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 저의 꿈입니다. 저는 연구만 했던 교수가 아니고 이번이 세번째 창업입니다. 그래서 나름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창업은 쉬운일은 아닙니다. 사실 어려운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언제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게 사업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과 현재의 구성원들이 있어서 함께 극복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9일에 법인이 설립되었고, 인포뱅크, 엔텔스, 비티씨아이. 이렇게 세곳의 회사에서 프리시리즈A단계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였으며, 중소벤쳐기업부에서 하는 TIPS프로그램을 통과하여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아, 현재 인공지능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등 15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비빅닷컴 사이트를 통해 원하는 디자인을 구매할수 있고, 디자인 되어진 템플릿 등을 이용해 인쇄물을 주문하고 상표등록 및 온라인 마케팅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위한 디자인 플랫폼입니다. 현재 회사의 대표이면서 모교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대학의 디자인학과 교수로 후배이자 제자를 육성하고 계십니다. 본인이 신조로 여기는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요?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비즈니스맨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을 다른이들과 단절되어 동떨어져 무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고, 사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의미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디자이너는 예쁜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제는 디자이너는 전문적인 고도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에어비앤비‘ 최고경영자인 브라이언 체스키, 우리나라의 ’배달의 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대표도 디자인전공자인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그 누구보다 관찰을 많이하고, 호기심을 많이 가지며, 또한 자신이 가진 역량에 더불어 그것을 적용하는 실천력을 가질 때, 그 큰 힘은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직업이 아니라 '디자이너'여서 보람차고 뿌듯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내가 만든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사회에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보람과 자부심입니다. 광고디자인으로, 브랜드디자인으로, 디지털디자인으로, 서비스디자인으로 형식만 다를뿐, 많은 부분에서 기여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디자인을 전공으로 삼고 일을 해오며,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고, 삶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앞으로도 그럴것이라고 믿습니다.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디자이너는 스펙트럼을 넓게 가져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장을 즐겨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바지에 로퍼를 신고, 오렌지색의 티셔츠를 입기도 합니다. 일반 직장인들과 제 또래의 친구들은 파격적인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직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디자이너‘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디자인 생태계의 프로세스를 바꾸고 싶습니다. 현 시대는, 모든 분야에 인공지능이 접목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의료, 법률, 언론 등 분야를 막론하여,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디자인과 교수가 디자이너 직업을 없애는 인공지능디자인을 개발한다고 욕하는 분들도 계실겁니다만, 인공지능은 직업을 없애는 것이 아닌, 디자이너가 더욱 편리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누군가가 국내에서 개발하지 않으면, 외국에서 누군가는 결국 개발하게 됩니다. 새로운 발전이 된다면, 시대에 맞게 산업의 생태계나 교육은 빠르게 대처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디자인계의 취약점이나, 단점을 보완하고 업그레이드 할수 있는, 해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바른 생태계를 만드는 걸 위해 앞장서고 싶습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저는 디자인 소외계층이 없는 세상을 만들도록, 브랜뉴테크의 비비빅닷컴을 통해 많은 분들과 소통하고 싶고, 그런 제 모습이, 제가 가르치는 제자이자, 후배인, 학생들에게 산 교육으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한국 디자인계의 발전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승배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기대하지 않고 공연을 본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고 자리를 뜨며 한마디씩 하거나, 바로 검색을 해본다. '그 배우 대체 누구야? 연기도 잘하면서, 춤도 잘추던...' 바로,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멀티남'으로 1인 8역을 소화하고 있는 대학로의 대세배우! 김일강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 김일강입니다. 현재 대학로에서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연극 ‘오마이갓’이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서고 있으면서,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는지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B-boying을 했습니다. 춤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걸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대회도 나가면서 춤을 추고 다녔는데, 문득 미래에 대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뭘 하지?’라는 생각하던 중, 어머니의 권유로 드라마 작가분을 통해 ‘김지수 연기아카데미’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던 중, 어떤 학생이 ‘선생님~’하면서 수업을 하러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배우 권상우 선배님이었습니다. 그걸 보고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이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면서 배우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 연기학원 다니면서 만난 인연들 중, 지금은 대성한 연기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표적으로 구혜선 누나랑 (유)아인이랑은 같은 시기에 연기공부를 했던 동료입니다. 처음에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연기야?’라는 말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정말 친한 친구들은 저를 지지해 줬고 심지어 미리 자랑까지 해줬어요. ‘나중에 큰 배우가 될 거라고’ 그리고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던 건 가족이에요. 한번은 배우를 하면서 ‘진로를 바꿔볼 생각이 없냐’라는 권유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지지하고 응원해 주고 있어요. 당시 연기학원은 입시 전문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대학 입시반’이 생겨났고, 그때, 입시를 위해 관련 학과가 있는 많은 대학교를 알아봤습니다. 대학교를 알아보다가 명지대학교 문화 예술학부 공연예술전공 학과가 생긴다는 정보를 듣고 지원하게 됐었습니다. 교수님이 송승환 교수님과 이태원 교수님이란 소식만 듣고 지원을 했었어요. 다른 대학의 경우, 즉흥연기, 자유연기, 지정연기, 장면연기(지정된 희곡 중 한 장면을 실연), 특기 등 여러 가지가 입시 요강에 포함되어 있는데 명지대는 처음 생긴 신생학과다 보니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이 그저 ‘면접’이라는 두 글자만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실기시험을 위해 말 그대로 ‘모든 걸’ 준비했었습니다. 실기시험을 치르러 학교에 가니 송승환 교수님과 이태원 교수님 외에 몇몇 분이 앉아계셨고 정말 ‘모든 걸’ 다 시키셨어요. 지정연기, 자유연기, 노래, 춤을 다 하고 나왔는데 뭔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합격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나중에 합격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온다’라는 걸 몸소 배운 귀한 기회였습니다. ‘연극영화과’인 줄 알고 입학을 했는데, 학기 중간에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그 사이에 ‘뮤지컬공연’으로 과 자체가 이름을 바뀌었더라고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뮤지컬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명지대 뮤지컬공연 전공 1기로, 제 동기는 가수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그리고 역시 동방신기의 전 멤버이자 현재 JYJ 멤버인 김준수, 가수 슈퍼쥬니어의 동해, 그리고 1년 후배는 배우 김지철, 5기 후배는 가수 씨스타 보라까지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일면식은 없지만, 배우 박보검 역시 8기로 후배입니다. 자랑스럽게도 모교는 전도 유망한 연예인의 등용문이 되어가고 있으며, 지원 경쟁률은 매년 올라가는 추세입니다. 배우의 진로를 택한 미련은 늘 하게 됩니다. 힘들 때마다. 작품이 없을 때마다. 오디션이 떨어질 때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같습니다. 직장인들도 힘들 때 ‘하~! 퇴사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한 번쯤 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는 다르죠. 공연하면서 사람들의 박수나 웃음소리를 보고 있으면, 또 ‘이 맛에 배우 하는 거지’라는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미련은 싹 사라집니다. '배우 김일강'의 첫 무대, 첫 촬영은 어땠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 스승이신 차태호 교수님께서 극단 ‘지구연극연구소’의 연출님으로 활동하고 계셨어요. 당시 ‘복어’라는 연극 작품을 하고 계셨는데 문화 소외지역 공연을 가야 한다고 저에게 함께 하자는 말에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합류했습니다. 제 역할은 처음에 잠깐 나오고 죽는 것이었어요. 역할 이름이 ‘골룸’이였는데 그때가 저의 첫 무대였습니다.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제작진, 배우분들과 함께 스타렉스 타고 다니면서, 언제 한 번은 타이어가 터져서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고, 펑크 난 타이어는 끌어안고, 차 안에 낑겨서 지방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지방 돌면서 그 지방의 특산물도 먹고, 그때는 매일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배우들이 술을 정말 잘 마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마지막 공연은 ‘거창국제연극제’에서 했었는데, 그때는 진짜 많은 사람이 공연을 보러왔고 많은 박수를 받았었습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2학년 1학기 방학 한 달 내내 문화 소외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는데, 그때 받았던 보수가 단돈 5만 원이었어요. 하지만 그땐 교수님도 사비 털어서 했던 공연이었고, 저도 첫 데뷔무대였으니까 돈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경험을 얻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것 같아요. (웃음) 첫 영상촬영은 대학교 2학년 때 같은 학부 영화과 교수님 중에 황규덕 교수님이 계셨는데 당시 ‘별빛 속으로’라는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저희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을 영화에 출연을 시킬 계획으로 오디션을 보셨었고요. 사실 오디션은 형식뿐이었고, 어느 장면에 쓸 건지 고르는 이미지 오디션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현재 학생’ 역으로 캐스팅되어 배우 정진영 님과 함께 ‘영화’라는걸 처음 촬영하게 되었죠. 영화 촬영을 위해 그렇게 많은 제작진 인원이 동원되는지 처음 알았어요. 한 장면, 한 장면마다 조명, 음향, 카메라 등 모든 게 합이 맞아야 하고... 영화는 정말 힘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첫 영화, ‘별빛 속으로’는 아쉽게도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찾아보세요. 제가 대사도 칩니다. (웃음) 현재 무대에 오르고 있는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어떤 작품인가요? 연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2013년 방영된 이종석, 이보영 주연의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비슷한 소재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라요. 거짓말을 전혀 못 하는 ‘수지’라는 여자와 ‘민준’이라는 남자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감전으로 인해 ‘민준’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생기는 우여곡절을 코믹과 감동, 그리고 약간의 스릴러를 가미한 연극입니다. 연출을 맡으신 김완수 감독님이 직접 대본도 쓰셨는데 대학로에서 연극 ‘핫식스’, ‘오마이갓’, 그리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까지 세 작품을 모두 연출하고 극본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한 설앤수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하십니다. 제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맡은 배역은 ‘멀티남’인데 ‘멀티’라는 단어 그대로 여러 가지 배역을 연기합니다. 사장부터 시작해, 사장 딸인 체리, 꼬마, 건물주, 소개팅남, 센 캐릭터, 힙합 남, 도깨비. 이렇게 1인 8역을 합니며. 저도 인터뷰하면서 처음 세어보네요. 이렇게 많은 역할을 하다니…. (웃음) 제가 연극을 하기 전에는 뮤지컬만 하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고 나서, 대학로를 처음 나오게 됐고, 연극이 하고 싶어서 무작정 오디션을 봤어요. 그때 첫 작품에서 함께했던 연출을 맡은 감독님을 비롯한 모든 제작진, 배우분들과 정말 즐겁게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4년 뒤에 저를 연극 ‘핫식스’를 위해 다시 불러주셨고, 다음 작품이었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오디션 없이 캐스팅해주셨습니다. 한 달간의 연습 기간 후, 작품을 본 관객들의 반응과 후기를 반영하여, 조금씩 씬을 바꿔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2018년 12월, 첫 공연이 시작되었으며, 유료관객 객석 점유율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유지되는 한 공연은 이어집니다. 장소는 대학로 봄날아트홀 2관이고, 평일 (월, 화, 목, 금)은 오후 7시, 주말 (토, 일)은 오후 5시 30분에 공연이 있고, 수요일에는 공연이 없습니다. 저는 8월까지 공연하니, 연극을 아직 접하지 않은 분들은 보러오세요. 지금까지 많은 활동 중 단연 연극에 집중을 많이 했는데, 연극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연극은 컷 없이 한 번에 쭈-욱 간다는 게 매력입니다. NG에 대한 부담감은 엄청나요. 공연을 하다 보면 매일 하던 대사였는데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블랙아웃이 될 때도 있어요. 그 상황에 필요한 것이 ‘애드리브’ 입니다. 물론 재미를 위해 쓰는 애드리브도 있지만, NG가 났을 때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위해서도 애드리브는 필요합니다. 블랙아웃이 되면 생각지도 못한 애드리브가 저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어요. 그건 말 그대로 배우들 안에 숨겨져 있는 잠재능력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끼리 웃죠. 관객분들은 모르는 출연 배우들의 소소한 일상이기도 합니다. 연극은 뮤지컬과 달리 연기 하나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뮤지컬은 극적인 상황이나 즐거운 상황 등을 노래나 춤으로 풀어내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상과 다른 점은 관객 앞에서 직접 연기하며, 관객을 만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관객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참여형 연극을 만들 수 있어요. 또한, 연극의 묘미는 커튼콜이죠. 마지막에 사람들이 쳐주는 박수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시간으로 터지는 웃음, 관객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연기, 모든 게 연극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연극 작품은 따로 없지만 특별한 배역이 있다면, 핑크빛 기류의 여자주인공과 썸타는 남자 주인공 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항상 멀티만 시키네요. 감독님! 다음 작품에서는 꼭 참고해주세요! 사랑합니다! (웃음) ’배우‘가 되어서 가장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장 좋을 때는 사람들이 길에서 알아볼 때랑 SNS를 통해 ’작품 너무 잘 봤다‘는 감사 인사 메시지를 받거나 댓글을 접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저는 사실 맨 처음에 인기 높은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한번 사는 인생, ’김일강이라는 배우가 있었다‘라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사람들이 길에서 알아봐 주시면 참 좋아요. 특히 요즘 들어 많이 알아봐 주시는데,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한 번은, 동네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있는데, 간호사분이 ’어? 배우 아니세요? 공연 봤어요!’라고 하셔서, 누운 상태로 ’어유, 감사합니다!’라고 서로 인사하면서 민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기분 좋았어요. 반대로 배우로서 가장 힘들 때를 이야기하자면, 연극배우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선입견과 인식이 가장 힘듭니다. 힘들다기보다는 제가 ’연극배우‘, ’뮤지컬배우‘, ’영화배우‘ 같이 분야를 구분되게 나누는 호칭을 싫어합니다. 연기하면 그냥 ’배우‘지 분야에 대한 선을 긋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장르 하나에 집중하는 배우는 극히 적습니다. 저 같은 경우, 연극을 주로 하지만, 기회가 되면 드라마, 영화도 찍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칠 때도 있습니다. 프리랜서는 뛰면 뛰는 만큼 일하는 직업인데, 왜 배고픈 직업이라고 인식하는지 모르겠어요.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배우도 이젠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회의 인식은 사라졌으면 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인가요? 설경구 선배님을 가장 좋아합니다. ’공공의 적’을 우연히 보게 된 후로, ’저 배우처럼 연기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되었고, 그때부터 설경구 선배님은 저의 롤모델이 된 것 같아요. 저는 연기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형, 말투, 걸음걸이 등 그 모든 것을 배역에 맞추고, 흡수하여 연기하는 설경구 선배님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 정동극장으로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관람하러 갔는데, 우연히 같은 공연을 관람하러 오셨던 설경구 선배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뵈었을 때의 기품은 잊을 수가 없네요.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7월부터 올라가는 연극 ’오마이갓‘을 연습 중입니다. 저의 꿈은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모든 분야의 가름없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실력만 있는 배우‘가 아니라 ’실력도 있고, 인성도 바른 배우’로 미래에 남고 싶습니다. 그런 제 미래를 위해,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제가 하는 작품 많이 보러 와주세요!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일강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출시된 지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된 비디오게임, '배틀그라운드 PUBG:비켄디'의 메인타이틀 음악! 듣기만 해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며 게임의 전조를 알리는 이 음악의 작곡가! 학부에서는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클래식과 국악, 영화음악,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방면에서 작곡가로 활약 중인 장석진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장석진입니다. 작곡가로서는 순수예술에서 대중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전통예술원에 작곡과에 출강 중이며 장신대, 가천대 작곡과 겸임교수 재직 중입니다. 작곡을 시작한 계기, 그리고 작곡가로서 발표한 가장 첫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클래식을 좋아하셨고, 부모님께서 두 분 모두 기타를 반주로 팝송을 부르시거나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저 역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저는 혼자 공상하는 시간이 아주 많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하는 건 많이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알려지긴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별로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늘 뭔가 끄적이거나 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무렵, 교회에 다니면서, 기타 연주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고, 화음의 기초적인 개념을 기타를 통해 알게 되어, 그 개념을 가지고 피아노를 독학으로 치기 시작했었습니다. 물론, 대학 입시 등을 위해, 피아노와 작곡 개인지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만에 쇼팽 에튀드를 입시 곡으로 아주 잘 연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내내 한 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6시간씩 연습했었으니까요. 이외에도 입시와는 상관없는 현대음악(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등 다양한 음악들을 열심히 듣고, 전자기타도 치고 여러 종류의 곡들도 써보곤 했습니다. 하루가 모자랐지요.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기보다는 그냥 음악에 빨려들어 갔던 것 같습니다. 이걸 해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안에 어떤 울림이 있는데 그걸 적고 싶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 말고는 당시에 저를 믿어 준 사람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작곡을 전공하겠다는 것에 대해, 다들 ‘뭐래?’하는 반응 같은 것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작곡을 공부한다는 건, ‘영혼과 마음속에 소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제대로 적어내는 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확히 적어내어야 그게 연주자들에게 전달되고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 될지를 깨닫는 과정. 물론, 그 이전에 자신 안에 그러한 의미 있는 소리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느끼고 있다면 말입니다. 저의 첫 작곡 선생님은, 서울대 작곡과 출신 작곡가로, 저의 입시를 맡아 가르쳐 주신 전순희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무렵의 학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일찍부터 작곡 관련 이론들을 배우는 친구들이 많았고, 저처럼 늦게 피아노를 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를 받아주셔서, 작곡과 화성학 그리고 나중에는 피아노까지 직접 지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선생님께선 저처럼 열심히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음악을 배우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고, 음악을 배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놀이였는데 말입니다. 처음 노래를 썼던 건 중학교 1학년이었고, 처음 기악곡을 작곡해서 연주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곡이었습니다. 그때쯤, ‘내 안에 있는 소리를 잘 적을 수 있을 거라’는 정도의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는 저 같은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꽤 괜찮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러나 16살 소년의 영혼으로 쓰인 엉성함이 묻어있는 곡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곡을 잘 쓰고 잘 연주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누가 와서 좋다고 해주면 기뻐하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네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에 가게 되었고 현대음악 작업과 영국 TV와 독립영화 그리고 무용음악 작품들을 위주로 작업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일을 해오다가, 2012년에는 여수 엑스포의 음악 감독 겸 작곡가, 오케스트레이터로 참여하였고, 이때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께서 주제곡을 부르셨는데, 마침 조수미 선생님 측 에이전시에서 데모를 들어보시고 음악이 좋다고 함께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 할 것을 제의하셨습니다. 그게 저의 첫 오케스트라 녹음 작업이었습니다. 세계 최대 PC게임 플랫폼인 스팀을 통해 얼리 어세스로 출시된 지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된 비디오게임, '배틀그라운드 PUBG:비켄디'의 메인타이틀 음악을 작곡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국 작곡가로는 최초였지요? 우선, 저는 게임을 안 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가끔 말씀하시는 일화가 있는데, 어릴 때 제가 집에 안 와서 온 동네를 찾아다니시다가 동네 오락실에 갔더니, 게임 오버 상태인데도 계속 화면에서 비행기가 총을 쏘고 있으니 제가 게임이 끝난 건 줄도 모르고 계속하고 있더랍니다. 워낙 오락실 같은 델 가보지도 않았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10여 년 전에 플레이 스테이션을 샀었는데, 며칠간 게임만 하게 되더군요. 흥미를 느끼게 되는 일은 ‘안되면 될 때까지’ 하게 되어서 지금도 아예 시작하지 않습니다. 게임 음악은 작년 2018년 초여름 무렵 의뢰가 와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유튜브에 제 음악을 올려 놓은 게 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런 음악을 쓰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게임 음악이라고 해서 특별히 일반적인 흥행성 영화음악과 스타일이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 많은 다양성을 가지려고 노력해 왔는데, 그 중, 스트레스를 푸는 마음으로 이런 부류의 음악을 쓰는 편입니다. 때려 부수고 리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몰아가다가 어느새 창공 위를 질주하는 기분 같은 것을 느낍니다. 클래식 작품에서의 큰 스케일을 쓸 때와 비교해본다면, 이런 부류의 음악은 드럼에 맞춰 헤비메탈을 마음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클래식을 작곡할 때는 어느 음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므로 작품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음악을 작곡 할 때도 전체 스토리와 수많은 디테일들이 연관성을 가져야 하므로 게임 음악처럼, 하나의 장면이나 분위기만 생각하는 작업은 그래도 부담감이 덜 한 편입니다. 제가 작곡한 비켄디의 메인 타이틀은 타이틀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의 진행과 구조를 제가 결정 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동안 나오는 음악의 경우에는 특정 구조를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관건은 그 구조 안에서 이미 크게 시작하는 음악이, 점점 더 웅장해지고 커져야 한다는 점이고, 그게 일반적인 음악 구조와 달라서 처음 작업 할 때는 다소 황당하다고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작년부터 테라(TERA)와 배틀그라운드(PUBG)등을 작업했고, 올해 출시되는 게임들도 몇 개 있는데, 요즈음은 거의 ‘게임과 게임 중간에 나오는 영상’에 대한 음악 작업이 많아서, 사실,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보자면, 영화음악 작곡과 차이가 없습니다. 영상의 경우는 레퍼런스 음악 없이 그냥 제가 생각하는 대로 쓰는 경우가 많고,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참고 음악을 보내주면, 최소한의 수준으로 참고 정도만 하고 작곡하는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참고할 음악이 너무 특징적이면, 그 특징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너무 분위기가 참고 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렇다고 그 특징을 멀리하려고 하면, 참고 음악과 너무 다르다는 반응이 오기 때문에 가끔 애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배틀그라운드 비켄디 타이틀 음악의 경우, 기밀 유지가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라, 한두 장의 사진과 글로 되어있는 설명, 그리고 몇 개의 레퍼런스 음악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던, 웅장하되 희망적인 부분이 필수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요구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피날레가 되는 부분의 진행을 먼저 작업하였습니다. 작곡 자체는 서너 시간 필요하였고, 이후로는 계속해서 조금 더 웅장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어서, 일반적인 음악이 가져야 할 음향 균형이 계속 초과하는 상태에서, 다시 또 몇 번의 초과 상태 끝에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리가 너무 큰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사실 들고요. 주변 분들께서 좋아해 주셔서 처음엔 저도’와~’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사실, 음악이 남는 것이지, 자신이 남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페라, 게임 음악, 영화음악, 뮤지컬, 클래식, 국악관현악, 현대음악, TV 드라마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크로스오버'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것이 작곡가의 처지에서는 한 장르에 몰두하기도 굉장히 힘든데 각종 장르를 넘나들며 작곡하는 것이 힘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대학교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이전의 예술가들은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림 중에서도 유화도 하고, 수채화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는데, 현대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조각가, 설치 미술가, 화가, 그리고 화가 중에도 유화 그리는 사람, 수채화, 수묵화 다 따로따로일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서 작곡과에 입학했습니다. 각자 자기 입장이 있겠지만, 저는 제가 들어간 대학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제 더 입시를 위한 음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내 음악이라는 걸 시작해 볼 수 있다는 마음이었고, 그때 결심했던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을 섭렵하고 ‘나만의 음악으로 만들자’ 였습니다. 그중에 즉흥 연주를 기반으로 하는 장르인 국악과 재즈는 나름대로 제외 대상이었지만, 영화음악을 하다 보니, 재즈라기보다는 Jazzy 한 수준의 음악들은 쓰게 되었고, 국악마저도,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신동일 선생님의 소개로 서울시 국악관현악단과 재작년부터 처음 국악 곡을 작업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쓰는 국악 곡이 관현악 작품이라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를 다루는데 익숙한 편이어서, 국악 관련 서적 등 자료를 찾아 생각보다 즐겁게 작업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원 여러분들이 한분 한분 따뜻하게 조언해주셔서 정말 행복한 첫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하고 싶은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저 자신이 정말 다양한 음악에서 감동하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브람스를 온종일 들으며 감동하는 날도 있지만, 어느 날은 슬픈 가요를 들으며 눈물 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힙합을 들으며 리듬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고, 메탈리카를 귀에 꽂고 머리를 흔들고 싶은 날도, 또 어떤 날엔 클래식 피아노가, 어떤 날엔 뉴에이지 피아노 음악을 듣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중국, 일본의 전통 음악, 또는 동유럽의 민요 같은 것이 듣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 음악들은 각기 다른 감성을 표현하거나, 같은 감성을 ‘때로는 크게, 때로는 미묘한 차이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제게는 크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 내가 듣는 여러 음악에서 개인적으로 만족하지 않는 무언가를 채우고 비우고 하면서, 내가 듣고 싶은 무언가를 써 나가기 위한 열망 같은 것인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 다양한 음악들을 통해 각각 나의 이야기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각각의 장르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음악을 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현대 시대에는 다양한 음악이 공존합니다. 단순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아니라, 온 시대의 음악이 일시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없던 현상입니다. 고전이나 낭만, 근대음악의 작곡가들은 각각 ‘자신이 속한 시대가 추구하는 새로운 음악’을 쓰면 되었고, 자신이 속한 시대의 작곡가들과 경쟁하였습니다. 지금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중세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작곡가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경쟁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어쨌든 청중은 이 시대에 만들어지는 음악에만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요즘, 70, 80 심지어는 90년대 가요도 사람들이 열심히 찾아 듣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다양한 음악을 쓰는 것은 제 생각에는 숙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많은 음악을 통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사는 음악가라면, 무언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꼭 한 가지 수단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쩐지 하나의 틀에 매여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쓴다는 것은 ‘각각의 장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화음악 작업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요. 단적인 예로, 굉장히 섬세한 장면에서 커다랗고 웅장한 음악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자주 그런 일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율동적이고 웅장한 음악보다는 섬세한 음악이 훨씬 더 정교한 작업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그보다는 더욱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음악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오래 가슴에 남겨지는 음악은 그런 깊음과 미묘함을 보여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장르를 대할 때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 어떤 것을 진정시킬 것인지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흘러나오는 대로 모든 것을 쓰는 것은 작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버리고 고치고 잘라내고 다시 붙여 보는 것은 소설 작업과도 같고, 영상작업과도 같습니다.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지금 하는 작업이나 작품에 적절한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합니다. 작곡하고 발표한 많은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지난해 발표한 가곡 앨범, ‘별 헤는 밤’이 아무 군더더기 없이 저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그냥 나 자신 인 거야’ 하고는 왠지 벌거벗은 느낌이 들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영국에서부터 친하게 된 바리톤 임창한 이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깊은 울림을 마음으로 표현할 줄 아는 성악가이고, 제 음악을 사랑해주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재작년 가을 무렵에, 그 친구가 제게 어떤 이유로 꼭 가곡을 써 보라고 해서 그때 여러 곡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써야 해서 쓴 곡들이 있었고 그렇게 한 두 곡을 연습 삼아 쓰다 보니,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야겠다 하면서 제 안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음악이 ‘별 헤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과 겨울에는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 버젼으로 연주가 됩니다.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해서 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영국 합창단원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번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요? 이제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오페라 소서노의 공연과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작업한 일레트로닉스 협주곡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입니다. 소서노의 경우, 저의 첫 오페라 작품이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소서노 대본을 위한 오페라 작곡 공모에 작곡가로 당선된 작품이었습니다. 5년 전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쓴 작품이었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했던 작품이었고, 함께 준비했던 성악가 선생님들과 너무나 행복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준비했던 작품입니다. 일렉트로닉스 협주곡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제가 일렉트로닉스 파트를 협연하였는데, 25분 길이의 대곡이었고, 제가 늘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통합된 음악 형태의 작품이었습니다. 늘 생각하던 것이, 국악관현악과 서양 오케스트라 그리고 전자음악(표본, EDM, IDM) 등 다양한 소리 들을 각각의 악기가 가지는 개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작품을 써보는 것이었고, 연주자로서도 무대에 서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은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의 점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무절제한 개발과 자연에 대한 훼손’ 그리고 ‘우리가 되돌려 받게 될 그에 관한 결과’를 음악을 통해 말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음악가는 음악만으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음악가로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음악을 통해 말하는 것이, 저 자신의 의무라는 생각이 40대에 들어서서 제 안에 자리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 졸업 후, 영국으로 떠나셔서 현지에서 무려 12년간 학업과 작곡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본인에게 영국은 어떤 의미가 있는 나라인가요? 저는 교육 시스템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만, 영국이 한국보다는 훨씬 자유롭겠죠. 본인이 좋아하는 과목들을 선택할 수 있다든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사실, 저는 한국에서 이미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에 간 것이기 때문에 영국 교육 시스템과는 별로 큰 연관이 없습니다. 석, 박사 과정은 혼자 공부하는 기간이니까 더욱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의 삶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피아노를 치고 소리를 찾아가는데 온종일 보내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과 공유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자칫 허무맹랑한 꿈을 마음에 품고, 그냥 그날그날 음악만 생각하고, 품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많은 일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학생들은, 당시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 부모, 가족, 친구 그리고 생업 등을 감당하기 위한 어려움이 늘 있습니다. 그런 일상의 일들을 감당하되,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고 가능한 한 자주 일상을 벗어나 그 자리로 늘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영국에서의 12년은 굉장히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성경적으로 12년이라는 기간은 단련의 기간이더군요. 제게 있어서는 제가 상상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그대로 적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을 땐, (12년간, 한국에 들른 시간이 모두 합쳐도 두세 달 정도였고, 귀국하기 전에도 7년 동안 한 번도 와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알던 영화 하던 사람들이라던가 모두 연락처도 모두 바뀌고) 그야말로 혼자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2년 무렵엔 페이스북 같은 것도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019, 018, 011로 시작하는 번호들을 사용했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고생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고, 곧 오페라 공모에도 당선되고, KBS교향악단 신진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국악관현악 작품도 여러 번 위촉되어 공연했고, 게임이나 드라마 작업, ‘수심가’ 같은 실험적인 음악들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기게 되고…. 영국에서의 12년은 그런 것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다음 달부터 방영하는 tvN 정치 드라마, MBC 문화방송의 사극 등 세 편의 드라마 음악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8월에는 제주국제관악제에서 위촉 작품이 연주되고, 10월에는 남한산성에서 백제에 관련된 오페라 쇼케이스를 공연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가을, 겨울 두 차례, 앞서 말씀드린,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 연주되고요. 또한, 가야금 연주자 이수은 씨와 앨범을 준비 중이고, 몇몇 국악 앙상블 위촉을 받은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렉트로 어쿠스틱 앨범을 준비 중인데, 지금까지 저는 실험 음악이라는 장르들이 너무 실험에만 치중해 있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소리의 실험이 실험 그 자체에 치중하지 않는, 음악 안에서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그런 음악을 그려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을 생각해본다면, 매일 그때그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음악을 쓰고 자주 작품을 연주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화도, 오페라도, 국악이나 클래식, 실험 음악 등도 계속해서 할 수 있고, 음악을 통해 저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음악가로서, 사람으로서,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장석진 개인 유튜브 채널: 바로가기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장석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증권가 애널리스트에서 공중파 방송국 아나운서, 그 다음은 청와대, 이젠 새로지음발전소에서 현 세대의 청년들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한준호 이사장과의 인터뷰!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한준호입니다. 저는 오랜 노동조합 활동으로 방송 활동은 많이 하지 못했고, 2018년 MBC 문화방송국을 퇴사한 후에,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올해 초부터 새로지음발전소를 창립하면서, 그간 관심 가지고 있던 콘텐츠 중심의 도시 재생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이사장으로 있는 새로지음발전소의 역할에 대해 '상업적인 재건을 할 때 발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하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끼’ 넘치는 청년들이 마음껏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의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었습니다. 현재의 새로지음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정확하게는 도시 재생을 통해 청년들의 일자리와 원도심(구도심)의 환경 개선을 통해 생활의 질을 바꾸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 재생이라고 하면 재건축사업이냐고 물어보시고는 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재건과 재생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이 재건이고, 있는 것에 다시 생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재생입니다. 이러한 재생을 위해서 저희는 하드웨어적 접근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적 접근을 하고 있는데요. 즉, 콘텐츠를 통한 도시 재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콘텐츠 기반의 도시 재생을 위해서는 넓은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현재 저희와 함께 하는 기업은 유수의 문화 콘텐츠 회사들을 비롯해 중견기업까지 약 80여 개의 회사가 함께 하고 있고, 성남시를 필두로 지자체와의 협력도 넓혀가고 있습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사례로는 성남시의 원도심인 은행동의 공영주차장에 메이커스 페이스 및 인근 학교와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이 지역에는 4개의 대학이 있지만, 정작 학교 간의 교류나 학교를 벗어나 청년들이 자기 꿈을 넓힐만한 창의적 공간이 부족합니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예산을 성남시에 매칭시키고, 성남시가 보유한 공간에 창업 혁신공간을 만들어 이곳에서 교류 및 창업준비를 할 수 있도록 진행할 예정입니다. 청년들이 오가고 이곳에서 창업과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면, 자연스레 그 주변에 활기가 돌고, 상권도 조금씩 활성화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새로지음발전소는 20~30대의 청년층들을 향하고 있고, 지자체의 빈 곳을 활용해 이들의 성장을 돕는 일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창업이었던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에서 코스닥증권시장 애널리스트를 거쳐 2003년, 모든 이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로 입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8년, 최승호 사장이 부임 후, 가장 먼저 퇴사하셨을 정도로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셨습니다. MBC 문화방송이 이사장님께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MBC는 저의 20대와 30대, 40대를 담고 있는 앨범입니다. 또한, 그 안에서 겪은 15년을 통해 현재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9살에 지원했던 MBC에 덜컥 합격하며, 분수에 맞지 않는 집중도 받아봤고, 35이라는 나이에 MBC 노동조합 집행부로 들어가 교육문화국장을 맡으며 파업을 이끌고 연단에서 마이크를 수없이 잡으며,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두 번의 징계와 더불어 그 이후 9년간 아나운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으로 흘러가던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고, 저희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다시 섰습니다. 그런데, 무엇인지 모를 회의감과 이미 10년 가까이 방송을 떠났던 입장에서 다시 돌아가 방송을 한다는 것에 큰 부담감도 느꼈고, 너무 오래 떨어져 있던 선후배들과도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렇게 떠나 있지만, 마음속에는 ‘MBC맨’ 이라는 자부심은 늘 담고 살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대경대학교의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시면서 ‘제자 양성’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지평을 열고 계십니다. 대경대학교 측으로부터는 작년부터 제안이 있었지만, 대통령비서실 근무와 맞물려 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연락이 와서 초빙교수로서의 부임이 결정 되었습니다. 현재는 다섯 개의 학과를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정확한 과목명은 ‘대인관계 능력’)에 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연기가 전공인 학생들로, 그들에게 무엇을 하든 ‘자신도 옳을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라', 대학기간 동안 앞으로 끝없이 벌어질 선택들 속에서 ‘자신만의 선택의 기준을 세워라',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과 타협하지 말아라’는 세 가지 메시지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랜 사회생활과 경험으로 대인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믿습니다. 요즘 말로 ‘꼰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상대를 대할 때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학생들에게 언어의 전달은 ‘Deliver’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언어의 전달은 배달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자신을 알리고, 자기 생각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눈과 귀로 듣고, 상대의 피드백을 경청하는 것이죠. 이때도 중요한 것은 ‘잘 전달하겠다’는 태도입니다. SNS를 곳곳에서 가족을 유독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가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진을 올리십니다. 이사장님께 '가족'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쭤보고 싶네요.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아내를 만나,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햇수로 20년이 되었는데요. 제가 전기차라면 가족은 제게 충전소이자 주차장 같은 곳입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저는 가족 안으로 들어가면 없던 용기도 생기고, 큰 위로도 받고는 합니다. 제가 통신회사에서 금융 관계기관으로 다시 MBC로 옮겼던 가장 큰 이유도 가족의 구성원 중 아빠와 남편으로서 제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어렵게 자란 이야기가 많이 공개되었었습니다. 잦은 이사와 전학, 그리고 오랜 기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저의 어린 시절이 많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현재 자신의 가진 능력을 비추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는데, 닮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저는 인생에 롤모델이 없습니다. 다만 존경하는 사람은 '아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 아내는 의지가 강하고,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며, 정직한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아내에게 청혼했던 이유도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아내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돌아갈 방법보다 그 사안을 직시하고 자신의 손해가 예상되어도 인정을 하고 받아들입니다. 저는 어렵게 자랐기에 늘 쉬운 방법들을 고민하고, 상황에 순응을 해왔으며, 늘 안에 화가 많았는데, 이런 아내를 만나 늘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제 인생의 좌우명은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입니다. 아나운서 시절 ‘어떤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지금 역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현재는 새로지음발전소의 일 외에도 청년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마흔 중반을 넘어선 저에게는 제 아이들을 비롯해 청년들이 꿈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데요.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저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우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이들의 삶을 청년들의 시각에서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생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새로지음발전소와 같은 활동을 넓히는 것과 언론 및 정부, 국회와 연계하여 필요한 제도와 요구들을 지속해나갈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제 활동들에 정치 활동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의견에 대해 부정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란 사회적 희소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라고 배워왔는데요. 이제는 정치란 ‘사회적 가치를 함께 만들고, 이를 서비스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새로지음발전소를 통해 하는 것이 작은 정치의 실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랍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한준호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10대 청소년들을 사회는 흔히 '사춘기', '질풍노도', '풍운아', '외톨이' 등으로 표현하며 선입견 속에 가둔다. 하지만 그런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청소년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는 최준호 청소년지도사를 만나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가고 싶은 최준호입니다. 현재 ‘새벽이슬’이라는 청소년 관련 NPO 단체에서 사무처장을 맡는 동시에, 익산시청년희망네트워크 위원장, 전라북도청년정책포럼 복지분과 위원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년위원회 위원 등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다양한 활동 등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스페인 어학/철학 학부를 졸업하시자마자 바로 다시 대학 학부과정을 입학하셨습니다. 사회복지와 청소년학을 전공하셨는데,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전북대학교에서 스페인 중남미 어문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복수전공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저는 수능성적에 맞춰서 학과를 들어간 경우였는데요 그래서 대학 초기에 자퇴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려다 보니 성적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졸업할 때 학점 채우느라 고생 좀 했죠. (웃음) 1학기 휴학을 하면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었고요. 하지만, ‘이왕 대학에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 하면서 복수전공을 고민하다가 철학이라는 학문이 너무나 재미있고 제 생각에는 ‘나에게 맞다’라는 확신이 있어서 철학을 복수전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인문학 전공자는 다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제 친구 중에는 스페인어 전공을 살려서 취업한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전공을 살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졸업 학기에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당시 멘토였던 목사님께서 우연한 기회에 ‘익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를 소개해주셨고,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새벽이슬’ 단체와 사무실을 같이 사용했는데요. 자연스럽게 '새벽이슬' 단체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도움도 받기도 하면서 청소년 쪽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자 생각을 하고 다시 사이버대학을 통해서 청소년 관련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이다 보니 일반 대학에서 정해진 강의 시간에 출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대학을 통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요. 덕분에 학자금 대출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웃음) 그리고 올해 겨우 다 갚았습니다. 만약 다시 고3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저는 청소년학을 목표로 공부했을 거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에 많은 보람과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뿐 아니라,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하고 일하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현재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가 되셨습니다. 이 분야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나이대를 불문한 모든 사람에게 조언하자면? 예전에는 몇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각 대학에 청소년 관련 학과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급수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고 학점은행 같은 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설명하자면,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는 청소년 관련 학과를 졸업 후, 공인 시험에 합격하고 관련 연수를 받으면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지도사 같은 경우는 필수과목을 이수하면 필기가 면제되고, 면접시험만 보면 됩니다. 청소년상담사는 청소년 상담과 관련된 국내 유일 국가자격증이기에 청소년지도사보다는 자격증을 따기가 조금은 어렵습니다. 관련 자격 기준도 청소년지도사보다는 조금 까다로우며, 연수 기간도 깁니다. 사회복지사도 급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자면 사회복지 관련 학과를 공부하고 졸업하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지도사나 청소년상담사는 청소년시설(청소년수련원, 청소년수련관, 청소년문화의 집 등), 청소년단체와 같은 청소년 관련 기관에서 종사합니다.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시설(사회복지관, 장애인 복지 시설 등)에서 종사합니다. 청소년 쪽이나 사회복지 쪽을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조언은 본인의 신념,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복지 관련 일은 상대적으로 많은 급여를 받는 쪽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업무 강도가 적은 것도 아니고요. 청소년과 복지는 결국에는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 소명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에 공부를 하면서 ‘정말 내가 이 직업을 할 수 있는가?’ 충분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사)새벽이슬, 익산시 청년희망네트워트, 전북 청년정책포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년위원회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각각 무슨 단체이며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가요? 새벽이슬은 전북 익산에 있는 청소년 관련 비영리법인(NPO) 단체로 청소년수련 활동, 청소년 인권, 청소년 보호 등 청소년에 관련하여 다양한 사업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청소년들을 위해 민주역사탐방, 수요집회, 진로캠프 등을 주최하고, 청소년단체들과 함께 연대해서 청소년 선거권 운동도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익산시청소년수련관을 익산시에서 수탁받아 2017년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다함께돌봄센터 공모에 선정되어 올해 말부터 초등학생 대상 돌봄센터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저는 이 기관의 사무처장으로 법인 업무총괄과 프로그램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청소년들이 함께하는 ‘주민참여 예산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 중입니다. 제가 위원장을 맡은 익산시청년희망네트워크는 익산시에서 청년 정책을 발굴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입니다. 30여 명의 지역 내 청년들과 함께 위원회에서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청년정책포럼도 익산시청년희망네트워크처럼 마찬가지로 전라북도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전라북도 청년 정책들을 만들고 건의하는 포럼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기독교 관련 NGO 단체입니다. 제가 일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운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년위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교회 청년들이 현재를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민이나 힘든 것들을 함께 나누고 다양한 해결방안을 모색을 해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상근으로 사무처장을 맡은 새벽이슬은 400여 분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갈수록 후원금이 줄어드는 것도 법인업무총괄을 하는 저에게는 많은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봉사, 혹은 후원으로 동참하여 함께 청소년들을 위해 뜻을 모아주시는 것을 언제나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달리 청소년을 위한 운동을 활발히 하며 청소년이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하셨을 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18세 청소년 선거권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청소년 선거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리자면 인터넷에 여러분들이 조금만 시간을 내서 검색하시면 왜 청소년 선거권이 보장되어야 하는지 금방 찾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만 17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옵니다. 만 18세가 되면 공무원도 될 수 있고 운전면허도 딸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투표는 못 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선거연령이 만 19세입니다. 청소년 투표권 반대를 하시는 분들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만 18세의 청소년들이 무엇을 알고 하냐’, ‘청소년들이 미성숙해서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입니다. 이 선입견을 조금 더 뚫어보면, 만 18세는 주민등록증도, 결혼도, 공무원도, 운전면허도 딸 수가 없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한복판에는 청소년들이 있었습니다.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5·18 민주묘지에 한번 가보시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청소년들이 미성숙해서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순전히 ‘억지 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들이 선거권이 생기면 정치권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청소년 관련 예산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청소년 스스로가 방법들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회복지사뿐 아니라 청소년지도사 그리고 청소년상담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청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보람 있을 때는 언제인가요? 청소년들을 만나다 보면 고민이나 아픔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청소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교우관계로 힘들어했던 청소년인데 저와 함께 이야기하며 응원해줬던 청소년이었습니다. 나중에 청소년이 고3 생활이 끝날 때 저에게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선생님이 계셔서 큰 힘이 되었다’고 문자를 보내주더라고요.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잘 해내 준 그 청소년이 고마워서 남몰래 눈물 좀 흘렸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 '술 한잔 같이하자'고 연락도 옵니다. 인터뷰 상에는 말씀드리기는 못하지만 정말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청소년들 만나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요. 화도 나기도 하고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처음에는 저희가 가까이 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기도 하고 잠적하여버리고 안 나타나기도 하고 합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가다 보면 나중에는 마음 문을 조금씩 열면서 함께 해 나가지요. 그럴 때가 제게는 정말 가슴 벅찬 순간입니다. 반대로 청소년지도사나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의 선입견 때문에 애로사항을 겪은 적이 있나요? 청소년 분야가 다른 복지 분야보다 소외되는 때도 있으므로 종사자에 대한 처우가 열약합니다. 이직률도 높고 상대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일반 시민분들도 이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에 간혹 사업을 하다 보면 몇몇 분들께서 저희를 자원봉사자로 보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지금 인터뷰를 읽고 계시는 독자분들도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은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는 아마 생소하실 분들이 많을 실 거에요. 하지만 이런 부분들도 세대가 달라지면서 앞으로 많이 개선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올해 크게는 청소년 선거권이 확대와 청소년 참여 예산제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청소년들이 직접 투표하고 우리 사는 지역의 예산운영에 참여하면서 청소년들이 만들어가는 우리 지역, 우리나라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순간부터 청소년들이 나이를 먹어서 청년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청년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작년부터 원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회적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통해서 청소년, 청년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안 금융, 사회적 금융 분야에 관해서 관심이 있어서 그 부분을 좀 더 공부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저 스스로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 이름이 드러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욕심인지라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었네요. (웃음) 무언가를 할 때 특히 성공했을 때 저보다는 청소년들이, 다른 청년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저는 뒤에서 지지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서 구절 중에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이사야 6:13)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그루터기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최준호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금융 투자는 날로 발전하여 과학을 접목한 퀀트는 주목받는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퀀트가 지금처럼 대중화 되기 이전 부터 일찍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해, 직접 회사를 창업하여 지금의 '인텔리퀀트'를 키워온 이종권 대표에게서 '퀀트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알고리즘 투자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 스타트업 ‘인텔리퀀트’의 대표인 이종권입니다. 제 원래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였고, 컴퓨터가 흔하지 않았던 1980년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컴퓨터와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기과학고를 거쳐 KAIST에서 전자공학으로 학/석/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진로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과학/공학도의 코스를 쭉 밟게 되었지요. 제가 금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3년경 미국의 일리노이대학교에 포스트닥터(박사후과정)로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저랑 비슷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월가에서 퀀트라는 이름으로 활약을 한다는 얘기를 거기서 처음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숫자에 대한 감각도 좋았던데다 데이터 분석에 흥미와 소질이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관심이 많이 생겼고, 귀국하여 한국IBM 연구소에서 일하면서도 퀀트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당시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드디어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다양한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투자 운용의 실전 노하우도 익히는 등 IT와 투자가 결합한 분야에서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잠깐의 우여곡절을 거쳐, 인텔리퀀트 창업 전까지 투자자문사에서 퀀트 운용총괄을 하면서 정식으로 금융권에서 펀드매니저 자격으로 고객의 자산관리서비스를 수행하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에이서투자자문의 퀀트 주식 운용총괄을 맡다가 4년 전 직접 퀀트 투자회사인 '인텔리퀀트'(IntelliQuant)를 설립하셨습니다. 회사의 소개를 해주세요. 인텔리퀀트는 인텔리전트(Intelligent)와 퀀트(Quant)의 결합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공지능 기술과 퀀트 투자를 접목하여 더욱 고도화된 투자 알고리즘과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를 꿈꾸며 저 포함 5명이 함께 2015년 11월에 창업을 했습니다. 창업 초기였던 2016년 3월, 구글의 알파고가 전 세계에 인공지능 쇼크를 안겨다 준 직후에 한국경제TV에서 인공지능 대 인간의 3대3 투자 대결 대회를 3개월간 진행했는데, 저희가 인공지능팀 대표선수 중의 하나로 출전하여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종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해 연말에는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미래인간 AI’ 편에서 다시 한번 투자전문가와의 투자 대결을 통해 퀀트 투자의 특색을 대중에게 자세히 알릴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몇몇 증권사들과 제휴하여 저희가 개발한 투자 알고리즘으로 포트폴리오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웹페이지를 통해서는 ‘인텔리퀀트 스튜디오’라고 하는 DIY 퀀트 투자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양한 투자 알고리즘을 직접 코딩하여 과거 20년간의 국내 증시 데이터로 성과를 검증하고, 완성된 투자 알고리즘은 자신의 실전 투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외국에는 비슷한 서비스들이 몇 개 있지만, 국내에서는 저희가 유일하게 웹 기반으로 퀀트 투자에 최적화되어 코딩 환경까지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최근에는 국내 주식 중심이었던 투자플랫폼을 암호화폐 영역까지 확장하여 서비스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개발된 시스템과 투자 알고리즘으로 실전 투자를 1년 넘게 해 오면서 향후 알고리즘 기반 크립토 헤지펀드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텔리퀀트 스튜디오’처럼 암호화폐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개인들이 마음껏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는 웹 기반 서비스도 공개하기 위해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직원 10명 내외의 작은 신생 창업 기업이지만,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서 벤처투자도 받았고 정부의 창업지원 사업도 수행하면서, 더 큰 도약을 위해 저희가 가진 기술로 투기가 아닌 합리적인 투자를 원하는 모든 사용자를 위한 서비스 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일단 현대 사회에서 금융이라는 영역은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비효율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투자자문사에서 퀀트 운용총괄을 하면서 자산관리 업무를 직접 겪어 보니, IT 기술로 훨씬 효율적이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라고 불리는 온라인 자산관리 서비스가 등장하여 핀테크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핀테크(FinTech)라는 용어도 그때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금융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용어 자체가 제 경험과 이력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내가 경험하고 공부한 모든 것들이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생각까지도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창업까지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합리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일반 중산층 이하 서민들은 쉽게 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산관리 서비스라 하면 오프라인 영업을 통해 진행되는, 대략 현금 1억 원 이상 투자할 수 있는 고액자산가들을 위한 서비스였기 때문에, 제 주변의 친구들처럼 월급쟁이 중산층들은 쉽게 접해 볼 수 없었던 금융 서비스였습니다. 이렇게 자산규모의 장벽 때문에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접하지 못했던 중산층을 위해 IT 기술로 문턱을 낮춘 금융 서비스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제가 그동안 공부하고 일하며 경험한 모든 것들이 밑거름되어 이러한 서비스를 잘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 결국 창업에 도전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생 창업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창업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끌고 온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역시 자금조달 문제였습니다. 초기에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투자도 받고 정부 창업과제도 수행하며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넉넉한 자금은 아니라서 서비스 개발을 하고 사업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면서 후속 투자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장 상황의 변화로 후속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급기야 창업 2년을 채워 가던 2017년 가을에 자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창업 초기부터 함께 했던 구성원 중 2명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직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해 보았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 정부 기관인 KIC 실리콘밸리에서 지원하는 글로벌 핀테크 액셀러레이션 프로그램에도 지원하여 선발되었는데, 현지 멘토로부터 저희가 원래 추진하려는 서비스에 블록체인을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고, 마지막 날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 앞에서 진행된 데모데이 발표에서도 좋은 평을 듣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자 디지털 자산으로서 암호화폐의 발전될 가능성을 높이 보고, 사업영역을 암호화폐 분야까지 확장하게 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된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버티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노력하다 보니, 대학 때 함께 동아리 활동했던 선배와 20년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되었고, 기적처럼 정확히 필요한 시점에 자금 위기를 해결해 주시면서 엔젤투자자로서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해서 사업전략에 대한 자문을 해 주시는 역할을 해 주고 계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끝까지 이루고자 했던 뜻이 있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특히 사업은) 노력한 결과대로 나오는 경우보다 흔히들 말하는 ‘운’이라는 것이 더 많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운’이라는 것도 노력하며 준비한 사람에게 기회로서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희가 자금이 부족했던 시기에 쉽게 포기했다면 아직 생존해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업적으로는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입니다만, 저는 희망을 놓지 않고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고자 합니다. 부동산, 주식, 펀드, 암호화폐, 벤처 등 여러 분야의 투자 중에도 '퀀트'에 집중하셨습니다. '퀀트'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미래의 투자 가치는 어떻게 보시는지? 퀀트(Quant)는 원래 계량적인(Quantitative) 투자를 수행하는 전문가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자산이 되었건 관련된 데이터를 계량적으로 분석하여 투자의사 결정을 내리면 모두 퀀트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퀀트라는 말이 퀀트 투자라는 의미로 혼용되며, 비교적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단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전략도 사실은 퀀트 투자의 시초로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만,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1970년대 전후로 미국에서 월가에 조용히 등장한 수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금융에 IT가 점점 더 많이 접목되면서 2000년대 이후에는 월가에서 알고리즘에 의한 매매 비중이 50%를 훨씬 넘게 되었다고 합니다. 퀀트 투자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투자 기법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도전해 보는 방법은 몇 가지 평가지표를 기준으로 주식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주기적인 점검을 하면서 투자를 지속해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만 공부하고 익히면 종목 한두 개의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것에 조바심내지 않고 비교적 냉정하게 주식투자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퀀트입니다. 저희가 처음에는 주식 중심의 퀀트 투자플랫폼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암호화폐를 대상으로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하는 퀀트 플랫폼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암호화폐가 디지털 자산이라는 지위를 확고히 가지고 정식으로 금융 자산의 하나로 인정받게 될 때가 올 것으로 봅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투자에 있어서 인공지능, 빅데이터 분석 등 알고리즘이나 계량적 분석을 기반으로 하는 투자 기법들이 더욱 중심에 서게 될 것으로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금융 투자전문가로서 자신의 롤모델이 있다면? 제임스 사이먼스입니다. 아마 퀀트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그는, 약 70조 원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퀀트 헤지펀드 중의 하나인 르네상스테크놀로지스의 설립자이자 명예회장이지요. 제임스 사이먼스는 원래 저명한 수학자였는데, 대학교수로 있던 1980년대 초에 퀀트 헤지펀드를 시작하였고, 30년 넘게 연평균 30%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하며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헤지펀드 매니저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현재 소유 자산규모만 해도 17조 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재산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재단을 설립하여 수학,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뿐 아니라, 교육, 보건 등에까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이룬 부를 세상에 나누고 사는 자선가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고 있어서, 제가 닮고 싶은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과학고 조기 졸업, 카이스트 학, 석, 박, UIUC 박사후과정까지 쭉 전자, 전산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고, 현재도 과학이 접목된 분야의 투자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혹시 과거로 돌아가 다른 진로를 택할 수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희한하게도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제 결정이 조금 잘못되었거나 실수해서 후회되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는데도, 조금 지나고 나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잘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고, 또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경험할 일들에 대한 기대를 더 많이 갖고 살아가는 편입니다. 그래도 한 번 고민해 본다면, 사회 경험 없이 박사까지 계속 공부만 하기 보다는 조금 더 일찍 사회에 진출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창업을 해서 젊은 직원들을 채용해 같이 일해 보면서 느낀 점은, 공부를 많이 하여 쌓은 지식도 귀중한 가치가 있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해 본 경험은 그 이상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With every experience, you alone are painting your own canvas, thought by thought, choice by choice.” (모든 경험으로, 당신은 혼자서 당신의 캔버스를 채워 넣습니다. 생각과 생각으로, 선택과 선택으로) 저도 동감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저는 제가 생각하고 제가 선택한 모든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 인텔리퀀트를 통해 사람들이 퀀트 투자를 더 쉽게 시도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계속 업그레이드할 계획입니다. 최근의 저금리 시대와 같은 경제적인 상황에 자산을 어떻게 관리할지 몰라 수동적으로 대응하거나 반대로 무리한 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서비스를 함께 만들면서 직원들이 정말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일한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으며, 각자의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회사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개인의 경제적 자유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투자자들에게는 자산관리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도록 하고, 저와 함께 그 일을 하는 직원들에게는 회사 운영을 잘하여 충분한 보상을 통해 경제적 자유를 달성할 수 있게 돕는 것 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다음 세대를 돕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종권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뿌리치는 대신 세계의 흐름을 읽었다! 제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추어 적절한 시기에 로봇사업을 시작해,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임상빈 박사의 '로봇라이프'!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보라이즌 대표 임상빈입니다. 저는 로봇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교육 분야에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았으며,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로봇 '핑퐁'을 발명하고 개발하였습니다. 학부는 정밀 공학, 석사와 박사는 기계공학으로 로봇 분야를 전공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전공한 분야와 관련이 없는 교육 분야로 창업하게 되었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원 과정을 다니던 시기에 한국에는 벤처 1세대가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JAVA라는 언어를 국내에서 제대로 공부하고 활용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었기에 많은 벤처 기업들의 인터넷 채팅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사업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KAIST 로봇 '휴보연구소'에서 학위를 위해 연구를 하면서, 지인들과 함께 몇 개의 IT분야 벤처기업을 창업하여 사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미국 MIT 미디어랩의 스크래치를 개발한 연구실을 방문하여 교수님, 연구원들과 미팅도 하고 미국, 캐나다에서 혁신적인 IT 교육을 하는 몇 곳의 학교들의 교육현장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학생들의 표현할 수 없이 밝은 표정,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도 입시와 성적에서 벗어나 저렇게 마음껏 자신의 창의력과 씨름하며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학과 소프트웨어 교육에 뼈를 묻겠다’라는 각오를 하고 귀국하였고, 2008년 캠프사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야코리아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입시와 교과를 벗어난 교육사업회사가 살아남기에 얼마나 척박한지를 잘 알고 있어 각오하고 사업을 시작했고 교육사업 기초를 다지기 위해 10년이 필요하다고 예상했고 10년의 계획을 세우고 창업했습니다만 역시나 초기 2~3년간 기억하기도 싫은 어렵고 외로운 시간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고 사업도 조금씩 열매가 맺어지며 안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 ㈜새로운교육을 설립하여 공학과 소프트웨어 관련 방대한 교육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소프트웨어 코딩교육이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태동하던 시기라 초기 3년간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며 고전하였습니다. 다행히 3년에 걸쳐 콘텐츠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한국에도 공교육에서부터 코딩교육 바람이 불게 되면서 ㈜새로운교육에서 개발한 다양한 코딩교육, 공학교육 교구 재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2,000개(누적) 학교에 우리의 교구가 공급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정보 교과서에도 우리의 교구가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교육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가던 2017년 여름은 저에게 뜻깊은 시절이었습니다. 로봇공학을 전공하였지만, 거리가 있는 교육 분야에서 오랜 시간 보내면서 놓치고 있던 10여 년 동안 늘 고민해 오던 그 로봇을 개발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들고 싶던 그 로봇은 한마디로 ‘그럴싸한 로봇’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스마트토이 로봇, 학교에서 학생들이 소프트웨어 교육시간에 사용하는 코딩교육용 로봇, 동아리/대학생/성인들이 창작활동에 사용하는 Maker 용 로봇이 전체 소형로봇 시장에서 사용되는 많은 로봇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 수백 개의 회사 수백~수천 종류의 로봇들의 동영상을 모두 살펴보면서 소형로봇 시장에 대해 근본적인 2가지 질문(요구)을 던져보았습니다. ‘이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 수 있다면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로봇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쉽고 재미있고 저렴한데 생각할 수 있는 로봇 대부분을 만들 수 있는 로봇 프레임이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은 ‘스마트토이로도 잘 팔리고 학교 코딩교육용으로 잘 팔리는데 대학생/성인까지 멋지게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로봇 플랫폼이 있을까?’였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오랜 시간 연구하며 고민하면서 기존의 로봇회사들과 로봇들의 형태, 걸어왔던 역사, 한계점, 장단점 등 모든 것을 비교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로봇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봇의 본질은 '움직임'이며 '핑퐁'은 가장 쉽고 빠르게 다양하게 확장하여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경쟁력 있는 로봇 플랫폼입니다. 지금의 회사가 자리 잡기까지 세 번의 창업을 하셨습니다. 배경과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이야코리아는 캠프사업을 하는 교육 서비스 사업에 초점을 두고 있고 ㈜새로운교육은 교육 콘텐츠 개발에 초점을 두고 있는 콘텐츠 사업 회사입니다. ㈜로보라이즌의 사업은 로봇 개발과 제조에 초점을 둔 IT 연구 및 제조업이 주 사업이 되는 회사입니다. 앞서 2개의 회사를 창업할 때 가장 힘들 때는 창업 후 2~3년 시절이었는데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겪게 되는 지출과 수입의 격차가 초반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지나면 회사가 살아남거나 망하거나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자금의 어려움도 크지만, 인력의 변동이 많다 보니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아픔들도 사업을 하며 맞게 되는 숙명의 일 같습니다. 마지막 회사 로보라이즌은 그동안의 창업경험을 가지고 일반적인 벤처기업의 2~3배가량의 개발 속도로 제품이 개발되었고 사업화의 속도로 매우 빠르게 진행 중입니다. 개발 사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핵심이 있기에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한 기획, 시뮬레이션을 문서화시키고 문서로 만들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예측되는 사업으로 풀어가면 되는 원리입니다. 현재는 로보라이즌의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대한 독특한 도전을 눈여겨보아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져 밝은 미래를 꿈꾸며 공개되지 않은 많은 제품군을 추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급 교육청의 학부모 교원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공학' 분야의 진로에 대해 100회에 넘는 특강을 하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특강이 있나요? 저는 주로 이공계 관련된 진로에 대한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습니다. 주로 교사와 학부모 대상의 강연이었습니다. 여러 기관의 특강요청을 받아오고 있지만, 경영과 연구업무에 바쁘다 보니 웬만하면 특강을 거절하지만, 회사 행사와 관련된 특강은 진행해야 하다 보니 100여 회의 특강을 진행한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전형적인 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한 사람들이 청소년 교육 분야에 업을 두는 경우는 많이 없고 주로 대기업, 연구소, 대학에서 직업을 두고 살게 됩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늘 곁에서 지켜보았고 교육도 해보았고 그들의 진로도 지켜보며 벤처기업을 통해 사업 경험을 가지고 또 수십 년간 공학 분야 연구를 하다 보니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이공계 진로 특히 공대 진로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던 내용이 많았습니다. KBS 방송국에서 주최했던 제주도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천명 가까운 학부모님들이 끝까지 경청해주시고 특강 후, 수십 명의 학부모님과 토론을 했던 기억이 가장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대표로 있는 로보라이즌은 어떤 회사인가요? 로보라이즌은 '핑퐁로봇'을 개발하고 제조하고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입니다. 2017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설립되어 이제 1년 5개월 남짓 된 극 초기 기업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수십 종류의 '핑퐁로봇'을 개발하고 핑퐁 전용 App, 전용 Scratch, 교육용 콘텐츠도 개발하고 KC, CE, FCC도 획득된 상태입니다. '핑퐁로봇'의 3D 프린팅 상태의 1차 모델은 2018년 9월에 개발이 완료되었고 판매 가능한 상태는 2019년 1월에 출시되었습니다. 출시되자마자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교육기기 전시회 2019 BETT show와 세계 최대 완구박람회 뉴렌버그 박람회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국제 IT 기업들, 각국의 바이어들로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받았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로봇회사가 로보라이즌 부스에 방문하여 ‘너희들은 우리 로봇과 다르다.’, ‘Unique 하다’, ‘최고다’, ‘우리의 많은 고민을 해결했다’라는 말을 남겨주어 큰 힘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로봇이 되도록 힘을 다하려 합니다. 로보라이즌의 대표 제품인 '핑퐁로봇'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핑퐁로봇'은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제가 전 세계 로봇을 연구 분석하여 기획하고 설계하여 만든 로봇으로 로보라이즌의 연구팀과 함께 계속해서 업데이트 하는 로봇입니다. '핑퐁로봇'은 단 한 종류의 모듈을 사용한 단일 모듈형 로봇으로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종류의 모듈을 사용하고 다양한 링크를 조립하여 YouTube에서 볼 수 있는 로봇 대부분을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로봇 대부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핑퐁로봇'은 대부분의 로봇 모델이 1분 이내에 조립과 분리가 되고 빠르고 쉽게 창의적 변형이 가능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탁월한 확장성을 가진 독특한 로봇 프레임입니다. App으로는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 수 있고 학교에서는 Scratch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코딩교육으로 활용하여 교육하고 '핑퐁로봇'의 프로토콜을 공개하여 대학생/성인들도 Python, JAVA, C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도록 지원됩니다. '핑퐁로봇'의 주요 링크는 3D 프린팅 데이터를 공개하여 누구나 자기만의 로봇을 쉽게 만들 수 있고 전용 App으로 즉시 테스트를 할 수 있는 로봇 플랫폼입니다. '핑퐁 로봇'은 한 개의 스마트폰으로 수십~수백 개의 핑퐁 모듈을 동시 제어, 개별제어 할 수 있어 로봇을 넘어 수십, 수백 개의 모듈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수십~수백 개의 모듈을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충전방식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로봇'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1차 산업혁명은 기계를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 2차와 3차 산업혁명은 전자와 정보(인터넷)를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이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기계, 전자, 정보 3가지 분야가 융합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고 다양한 분야를 묶어주는 기능으로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의 기술이 향상하고 있습니다. 1차~3차 산업 혁명 동안 사람 대신 일해주는 기계과 소프트웨어들이 사람에게 육체적 잉여시간을 가져다주었고 그 시간 동안 사람은 다른 직업과 서비스를 만들어 누리게 되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 사람에게 정신적 잉여시간을 주어 사람들이 좀 더 창의적인 생각과 가치를 만들어 낼 기회를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단지 기계에 불과했던 로봇에도 AI, 감성 빅데이터 등의 기술과 융합되어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로봇들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핑퐁 로봇을 활용한 다양한 활동 자료들도 빅데이터를 이용해 구축되어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제공되며 청소년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창의적인 교육콘텐츠를 만들고 보급하는 사업을 하다 보니 지난 10여 년간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보며 평소보다 밝은 그들을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은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인문계열은 말과 글로 이공계는 물리적인 대상을 만들어가며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로봇은 우리 공학에서 한 분야이고 저는 이 로봇을 생각해내고 구현하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창업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인내의 깊이만큼 큰 감사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박을 위해 창업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고 가치를 느끼며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삶으로서의 사업을 누리는 사업가도 있음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소형로봇 사업 전체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로봇의 본질을 찾고자 '핑퐁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이 로봇이 전 세계 소형로봇 시장에서 어린이로부터 성인까지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는 ‘Lifelong robot friend, ’PingPong‘’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임상빈, 로보라이즌 영상 제공: 로보라이즌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인이 아닌 정치인이다'. 대체 무슨 뜻일까. 현 정권의 민감한 대북문제에 대해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통한 젊은 북한학자이면서 청년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정국진과 진솔한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정국진입니다. 제 한자 이름을 풀어쓰면 ‘참된 나라 일꾼’이 되는데요.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 참된 나라가 되기 위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 청년입니다. 북한학 석사를 전공하고 민주당에서 청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참된 나라’를 위해서는 저 자신이 ‘참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8년 10월, 민주당 전국청년위원장 선거에서도 21%의 득표로 아쉽게 낙선되었습니다. 올해, 2월 민주당 평택갑 지역위원장직에 최연소자로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선했습니다. 일정한 권한이나 직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자신을 '청년 정치인'으로 자처하는 이유가 있나요? 정치인은 특권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권층인 정치인은 특권층을 대변하게 됩니다. 정치는 우리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해 그들이 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재산도 배경도 학벌도 높은 직위도 없는 저는, 한국 사회의 30%이지만 정치적으로 소외된 평범한 청년들을 대변하기에 가장 알맞은 청년 정치인입니다. 철저한 무명이었던 제가 두 달 만에 당내에서 21%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소외된 평범한 청년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평가받은 덕입니다. 여당이 지방선거를 압승한 이후 한동안 큰 선거가 없던 지난 몇 달간은 당내 개혁을 이루기에 가장 좋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도덕성과 준법정신을 가벼이 여긴 기성 정치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들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매우 높았습니다. 공정성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 덕에 촛불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처럼요. 다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방법이 부족했기에 저는 청년 정치인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많은 청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자부심입니다. 평범한 청년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정희연 서울대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124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대졸 취업준비생 10명 중 4명은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15%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국진 위원님 역시 낙선이라는 실패의 경험이 있습니다. 위원님에게 실패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정계에 입문한 이후만으로도 제게는 네다섯 차례의 낙선과 실패가 반복됐습니다.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훨씬 더 높은 학벌 대신 4년 장학금 학교를 선택한 것이 그랬습니다. 전국청년위원장 선거에서 특정 당 대표 후보와 연합하는 손쉬운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별의별 생각이 들면서 저는 한동안 홀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울해지고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청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패의 경험은 제가 더 나은 정치인이 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실패는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암만 실패가 많은 사람이라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터입니다. 반대로 성공만 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제까지 실패만 거듭했어도 분명 삶의 어딘가에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성공의 순간을 놓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청년의 사회 진입은 그 자체가 도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프런티어(개척자) 정신과 벤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사회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청년입니다. 청년이 프런티어 정신을 잃은 사회는 스스로 소멸해 버릴 겁니다. ‘아프니까 청년이다’가 아닙니다. ‘개척자이기에 청년이다’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제 삶도 개척자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개척하다 보면 아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청년들이 아파야만 한다고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아프니까 청년이다’라는 말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아프면 적절한 치료가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청년이 아픈 상황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제대로 치료해주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아플 일이 없게 살피고 아프다면 정책을 동원해 치료해주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입니다. 청년 정치인들이 그간 제대로 역할을 해 주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설령 자신이 선택한 것이 의도치 않게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선택이었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 어느 순간에도 청년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 ‘실패한 청년들을 위한 정치’를 위해서라도 ‘실패한 청년 정치인’인 제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모태신앙', '개신교자', '정치와 교회' 등. 이런 것들은 정국진 위원님을 묘사할 때 언제나 습관처럼 서술되는 표현 같습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특정 종교를 지지하면 자연스럽게 선입견과 활동의 제약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개신교 정당인'이라고 당당히 밝히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저는 종교의 자유를 지지합니다. 이 말은 사회 질서에 반하는 사이비성을 띠고 있지 않은 이상,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떠한 편견이나 억압의 원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서거한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 장로이기도 했는데요. 그가 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 여권 신장에 바칠 수 있었던 건 그의 기독교 철학이 이 가치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한 덕입니다. 또한, 그의 기독교 신앙은 ‘인동초’ 김대중의 곁에서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현실 참여는 유관순 열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가게 됐던 제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교인 스스로가 자정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이희호 여사, 유관순 열사 같은 신앙인이 더 많아져야겠지요. 저는 성 추문을 저지르고도 반성 없이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고, ‘교회 세습’에도 반대해 왔습니다. ‘빤스 목사’ ‘막말 목사’ 전광훈 같은 자로 기독교가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3.1운동과 반독재 운동 등 한국 사회의 진전을 선도했던 기독교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앞서 이희호 여사 얘기를 했는데요.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인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님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종교와 공존하는 것이 ‘종교 왕국’ 아닌 ‘민주 공화국(共和國)’인 대한민국의 미덕입니다. 부처님오신날 은해사를 찾았던 자유한국당 황교안 당대표는 다른 종교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민주 공화국의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인사를 하러 절에 찾아간 것이 아니었나요? 헌법 1조 1항이기도 한 민주 공화국이라는 규정은 어느 종교를 갖건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적용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기에, 동성애에 대한 특정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설령 주장할 순 있어도 절대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청와대에 청년비서관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셨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안은 이제 실현되어 곧 청년비서관 임명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청년비서관의 직무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청년층은 촛불혁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주역이었고, 그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했습니다. 문 정부가 청년들로부터 큰 반발을 산 건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쟁거리가 불거지면서입니다. 문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 기간 ‘공정성’을 앞에 내걸었고 청년들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었습니다. 잘해나가고 있던 와중에 단일팀 논쟁거리는 신뢰를 일정 부분 무너뜨렸습니다. 선수들에게 충분한 이해와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더해지면서 청년 세대를 억압하는 ‘꼰대’를 청년들이 떠올린 것 같습니다. 저는 강력한 반대 여론에 맞서 단일팀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청년비서관 아이디어를 생각한 건 이때였습니다. 청년층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면 정부가 그렇게 심각한 곤경을 겪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전에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배려가 있었다면, 기본적으로 좋은 정책이기에 더 높은 지지를 받았을 겁니다. 따라서 단일팀뿐 아니라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청년 감수성’이 반영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기 위한 ‘여성주의 감수성’이 현 정부 국정 철학에 반영된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 청년 세대는 정치적으로는 약자이지만, 한국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주체입니다. 정치는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지금부터 소외된다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겠습니까? 선진국에서 20대 청년 장관, 30대 청년 총리, 40대 대통령은 어색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유난히 인색합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여성 할당제나 장애인할당제 등이 익숙한 얘기가 되었죠. 하지만 그것도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같은 식으로 ‘여자는 미숙하다.’ ‘장애인은 한계가 있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때 만약 그런 이유로 그들의 사회‧정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무산되었다면 지금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들이나 장애인 지도자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청년들의 역할이 없다면 행정 조직이든 회사든 굴러가기 어려운 곳이 태반입니다. 청년들이 미숙하기만 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청년비서관은 대통령의 참모로서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청년들의 입장과 시각을 전달해야 합니다. 청년 정책 그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요. 대통령의 참모이기에 확고한 충성심은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다소 거칠더라도 적극적으로 평범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들의 권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성세대를 향해 쓴소리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여주기식 직위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년이면 2020년 도쿄 올림픽입니다. 올림픽 메달을 따게 되면 체육요원으로 편입되는 '군 면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야구, 축구 등의 구기 종목에서는 누가 선발될지 벌써 화두에 오르고 있습니다. 반면 올림픽 메달리스트와의 국위선양을 비례하면 '그래미 어워드'를 비롯한 미국 3대 시상식을 섭렵함을 비롯해 지난 2일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며, 영국 BBC에서는 '21세기의 비틀즈'라고 표현한 가수 '방탄소년단'에게 예술 요원으로 편입되는 혜택을 줘야 한다는 누리꾼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공군 학사 장교 출신 예비역 대위로서 '대중음악 가수가 일정 선의 국위선양을 함으로 군 면제의 혜택을 주는 방안'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세계적 축구 스타로 발돋움한 손흥민 선수의 군 면제가 확정되지 않았을 때, 손흥민을 대신해 수백 명이 하루씩 군 생활을 나눠서 더 할 ‘손흥민 군 면제 계’를 만들자는 농담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군 면제 문제에 민감한 미필이나 현역들 사이에서 먼저 나온 얘기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 손흥민이 국위선양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군 복무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비역 대위이든 예비역 병장이든 혹은 이등병이든, 청년의 때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우리 공동체를 지키고 튼튼하게 하는 데 보낸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사회에 나와서 우리 대한민국 공동체의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손흥민 선수든, 방탄소년단이든,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나이대가 국가의 공동체 발전을 위해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나이대에 군 복무를 해서 우리 공동체를 지키는 것보다 공동체 발전에 이바지하는 편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그들이 현업을 은퇴한 이후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면 좋겠습니다. 30대 중반 이후에 군 복무하는 것이죠. 물론 그 여건은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의 메달 획득으로 인한 스포츠 메달리스트들이 매달 최대 1백만 원의 연금을 평생 수령 받는 제도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연금 제도의 개혁과 맞물려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깊지 않기에 여론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Ⅴ)'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조사 참가자 3천 8백여 명 중 절반이 넘는 55.9%가 '반드시 통일할 필요 없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북한대학원에서 북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후,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자문위원, (사)평화통일연대의 청년위원으로서 남, 북 통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저는 현 여당의 통일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한국은 인접해 있는 북한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평화번영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군사적 선택도 한때 강구되었지만, 미국마저도 두 번 이상 포기한 방안입니다. 군사적으로 북한 문제를 풀려고 드는 것은 전쟁으로 이어져 수많은 인명‧재산 피해를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북한과의 대화뿐입니다. 마침 우리 정부는 김정은의 북한과도 신뢰를 쌓았고 트럼프의 미국과도 관계가 돈독합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정상 간의 대화가 재개될 겁니다. 이를 통해 현재는 잠시 조정기에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더 굳건해지리라 확신합니다. 독일이 그랬듯 남북이 어느 순간 완벽한 하나의 나라가 되는 순간도 오겠죠. 하지만 그때가 빨리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시점을 정해놓고 하나의 나라로 만들려 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고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한 주민들 다수로부터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겠다는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자연스럽게 진행하면 될 일입니다. 따라서 통일은 ‘하나의 나라로 된 결과’ 아닌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으면 합니다. 북한을 비핵화하고 상호 간에 군비를 축소하는 등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통일입니다. 남북이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함께 번영해 나가는 그 자체가 통일입니다. 그러면 북한 인권과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2050년에는 통일 한국이 미국에 이은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전망도 있습니다. 통일비용보다는 분단비용이 더 많이 들고, 이들보다도 통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 ‘통일 편익’이 압도적으로 더 큽니다. 우리 청년 세대는 그러한 통일 시대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증조부모 세대는 독립, 조부모 세대는 산업화, 부모 세대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 현재의 대한민국을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가 우리 세대와 후세대를 위해 통일 대한민국을 건설한 뒤 물려줄 차례입니다. ‘통일 세대’인 우리 청년 세대가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윗세대 선배들께서도 많이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청년 정치인으로서 노력하겠습니다. '청년 정치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전국청년위원장 선거에 나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헌신하는 청년 정치인들을 만났는데요. 그분들 한분 한분이 다 존경스럽고 닮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니 민주당에서 활동하는 청년 정치인 모두의 롤모델인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세 분의 대통령님과 김근태 의장님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은 청년의 때부터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 투사였습니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두 분은 청년의 때에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습니다. 김근태 의장님을 비롯한 선배 학생운동 정치인들은 고문도 감수한 열정적인 청년들이었습니다.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물려준 선배 정치인들이 이제는 우리 세대의 과제가 될 통일·평화를 위한 길을 닦아주고 계십니다. 저도 그런 선배 정치인들처럼 시대의 모순과 맞서 싸우며 후세대에 더 나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네요. 그래서 저는 ‘민주당키즈’입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제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도 감수한 채 평범한 청년을 대변하고자 애썼습니다. 불이익을 걱정해서 청년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정치인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없다고 봤거든요. 제 모든 면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도 프런티어 정신을 가진 청년 정치인이자, 약자를 위해 진실한 자세로 헌신한 청년 정치인으로 기억된다면 영광이겠습니다. 평범한 청년을 대변하고자 한 것은 제게 자부심이었지만 충분한 힘이 없어서 실패가 이어졌습니다. 제가 대변해 드리고 싶었던 분들에게 더 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해야 힘을 기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통일·평화를 강의하는 한편, ‘청년 이슈’에 대한 제 생각을 한 매체에 매일 꾸준히 기고하고 있습니다. 청년위원장이 된다면 민주당에 험지로 분류된 지역에서 수구 야당 중진 의원과 격돌하고 싶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계획을 이루기 버겁지만, 그렇다고 내년 총선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년 총선은 ‘개헌 총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0년 넘게 묵은 헌법은 청년을 비롯한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알맞게 수정되어야 합니다. 작년 제출된 대통령 개헌안을 중심으로 청년들의 목소리가 더 폭넓게 반영된 헌법을 연구하는 ‘청년개헌모임(가칭)’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개헌에 동의하는 분들이 더 많이 당선될 수 있도록 해야겠고요. 이것이 청년 정치인으로서 현재 저의 목표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정국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환자의 증상을 마주하다 연구를 통해 자신이 만든 치료제를 개발해 특허를 취득하고, 올해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하여 관절과 근육 통증을 위한 패치를 출시한 (주)비메디컬의 대표이자 한의사인 안상원 박사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에 있는 청담인한의원 원장이자, ㈜비메디컬 대표이사 안상원입니다. 한의사가 되기까지 학창시절 우여곡절이 많으셨다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모범생 스타일의 저에게 찾아온 크나큰 시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 어느 날부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고, 1주일씩 등교를 못 하면서 잠만 자는 증상이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과도 수면증상이 1달에 주기적으로 1주일씩 발생하여 중학교 3학년 체력장 기간에는 가수면 상태로 학교에서 누워 있던 기억도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들에서도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지 못하던 중 당신 고려대학교 부속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이셨던 의사 선생님에게 “클라인레빈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양약을 계속해서 복용하였으나 병의 원인도 모르는 상태라는 말과 함께 증상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잠에 빠져들어 3년 내내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중학교 때 본다는 잠자는 날이 줄어들어 어렵게 학업을 이어나며 당시 의대 입학 점수와 비슷한 서울 모 사립대 공대에 지망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인생의 첫 실패라고 할까요? 그렇게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준비하던 중 주위 분들의 권유로 1988년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과 지인 중 의사, 한의사가 없었고 인터넷이나 정보를 얻을 매체도 부족하여 4년제라고 생각하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학업을 위해 내려갔다가, 신입생환영회에서 한의과대학도 6년제라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제가 벌써 임상 26년 차 한의사가 되었네요. 한의사가 된 후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1994년 한의사 면허 취득 후 1년간의 부원장 생활, 그리고 1995년 부천에서 고려한의원 개업, 1997년 일산에서 서광 한의원을 개업하여 평범한 동네 한의원 원장으로 찾아와주시는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진료했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1999년 모교에서 한방재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2년에는 일산 국립암센터 최고연구자 과정도 수료하고 진료와 학회일을 열정적으로 하던 시절의 기억도 잊지 못합니다. 사실 중·고등학교와 한의과대학시절 정도는 아니지만 약한 강도의 졸음과 멍한 느낌의 증상들이 가끔 발생하여 한의학적 치료와 서울 삼성의료원 진료도 받아보았지만, 특별히 증상 개선이 잘 안 되어 수소문 끝에 목포에 기치료를 하는 선생님을 만나 기공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우연인지 기치료 효과인지 증상이 완치되어 현재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기수련, 기치료를 공부하여 한의원에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의료기공 요법을 병행 치료하게 되었으며 2007~2012년 6년간은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기공학을 겸임교수 자격으로 6년간 강의도 하였습니다. 2016년 12월, 우연히 대학 동기의 소개로 매일경제 TV 대표이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매일경제 TV 대표님이 건강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시하면서 매일 생방송으로 한의사 토론자를 찾으셨고, 제 친구와 저에게 연락이 와서 첫 미팅 일주일 만에 '건강한의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도 매일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처음 한동안은 한의원 진료 후, 매일 저녁 충무로 매일경제신문 방송국으로 가서 생방송으로 시청자들의 전화 상담을 진행하였으며, 2017년 9월부터는 매주 한 번 직접 생방송 진행자로서 출연하였습니다. 그 당시 방송 출연과 생방송 진행을 하면서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이 현재의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의원에서 남성 질환 치료를 해오다가 직접 치료제를 개발하여 특허를 내셨습니다. 제가 원장으로 있는 한의원에서 남성 질환을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한 게 벌써 7~8년 되었습니다. 제가 한방재활의학으로 석사, 박사를 취득하면서 통증 질환에 관심이 많아 1995년부터 봉침치료를 시행해오고 있으며, 1996년에는 대한추나학회(현 척추신경추나의학회) 2기 수료를 하고 추나요법으로 통증 질환 환자들을 치료해오다 봉독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분과 효과를 연구하여 봉약침 치료법을 남성 질환(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조루, 발기부전)에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남성 질환을 봉 약침 치료와 다양한 한의학적 치료법으로 치료를 해오면서 연구, 개발한 봉침크림이 2017년 12월, ‘정제 봉독을 이용한 조루 치료 또는 발기부전 치료 외용제’로 특허를 받게 된 것이 2018년 1월 ㈜비메디컬을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허받는 과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었습니다. 처음엔 한의원에서 조제 처방하던 봉침크림을 특허청에 특허 신청을 했을 때, 특허청 심사관으로부터 거절이유서가 날라왔습니다. 이유는 2200년 전 기록된 중국의 ‘마왕퇴의서’라는 고대 의서에 이미 벌에서 독 성분을 추출하는 방법과 남성 성 기능 개선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거론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희는 ‘마왕퇴의서에서는 채집된 봉독을 헝겊 등을 이용하여 남자 허리와 발바닥에 부착하는 방식이었으나, 특허 출원된 방식은 남성 성기와 회음부 위에 바르는 개념이라 다르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여 최종 특허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설립된 ㈜비메디컬을 통하여 2018년 4월 ‘위너크림’, 같은 해 10월, ‘위너크림파워’라는 남성 제품을 출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달,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한 관절과 근육에 붙이는 ‘프로패치’와 남성과 여성의 성 기능 개선, 그리고 헤르페스 물집에 붙이는 ‘위너패치’를 개발하여 출시하였습니다. 남성 제품인 ‘위너크림’, ‘위너크림파워’는 중국에서 의약품 또는 의약외품으로 허가를 받아 약국 유통을 준비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다국제 회사인 P&G 사의 자회사인 P&G벤처스와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한 ‘Global Startup Meet-up’에 선정되어 남성 성기능개선 크림과 ‘프로패치’, ‘위너패치’의 특허, 장점, 가능성, 시장성에 대해 발표 후,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남성이 남성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 3명 중 1명이 조루로 고민하며, 10명 중 1명은 발기부전으로, 50대 이상 남자의 2명 중 1명은 전립선비대증으로 힘들어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물론 서양의학의 다양한 치료법과 약들이 나와 있지만, 여전히 치료가 잘 안 되는 증상과 수술, 양약의 부작용 문제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이 한의원으로 내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세계적인 기업들이 남성 성 기능 개선 시장과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한 관절, 근육, 성 기능 분야의 새로운 패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야에서는 생소한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하여 관절과 근육을 위한 패치를 개발하셨습니다. 마이크로니들 기술은 미국 조지아텍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몇몇 업체에서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한 특허와 함께 제조공장을 보유하고 있는데 화장품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는 대한민국이 화장 소품 개념의 마이크로니들 패치 역시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기본 화장품은 분자량의 크기 문제로 과학적으로는 얼굴에 사용 시 5% 미만의 유효성분만 흡수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머리카락보다 작은 용해성 바늘에 화장품 성분들을 탑재하여 미세하게 피부를 뚫고 들어가 서서히 바늘의 성분들이 녹아 흡수되게 만든 제품이 미용 목적의 마이크로니들 패치입니다. 앞으로는 피부에 붙이는 주사제 등 의료용으로도 개발·출시를 위해 준비 중인 업체들이 많습니다. ㈜비메디컬에서는 이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이용하여 관절 통증, 근육 통증에 사용하는 ‘프로패치’와 남녀 성기능개선, 헤르페스 물집 등에 사용하는 ‘위너패치’를 개발하고 출시하였으며 현재 특허출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파스, 크림 등과 ‘프로패치’, ‘위너패치’의 차이점을 설명하자면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과 미용 패치의 차이와 유사하게 근육, 관절에 붙이는 ‘프로패치’와 성 기능 개선 및 헤르페스 물집에 사용하는 ‘위너패치’는 피부 각질을 뚫고 용해성 바늘이 들어가 서서히 흡수되는 개념입니다. ‘프로패치’의 바늘은 70%가 히알루론산 성분입니다. 히알루론산은 안면에 시술되는 충전물의 주성분이기도 하며 무릎관절에 시술하는 연골주사의 성분입니다. 즉, 관절의 윤활유 역할과 영양공급 효과를 발휘하는 성분이 바늘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천연 항생제라 불리는 프로폴리스, 그리고 한의학에서 관절 통증에 다빈도로 사용되는 두충, 오가피, 모과 추출물과 온열 성분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통증 부위에 붙이면 온열작용과 더불어 바늘이 2~4시간에 걸쳐 녹아 흡수되면서 여러 가지 유효성분이 피부 아래 근육, 관절에 작용하는 제품입니다. 또한, 기존의 크림이나 젤 등을 바른 후 패치를 붙이게 되면 피부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유효성분이 더 효과적으로 흡수되는 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특히 이 ‘프로패치’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주목받는 제품으로 떠 오르고 있습니다. 2019 전국 종별 선수권대회 200m 허들 경기에 출전한 손경미 선수가 종아리 통증으로 출전 자체를 포기할 상황에 아는 지인이 마침 '프로패치'를 가지고 계셔서 선수의 종아리에 부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기적인지 손경미 선수가 경기에 출전하여 1등을 했고, 그 지인이 바로 저에겐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프로패치'는 한국 여자마라톤 신기록 보유자 김도연 선수와 서울체육고등학교 육상 꿈나무들, jtbc 골프체널 송경서 해설위원과 유명 프로골퍼들이 사용 중이며, 앞으로도 다양한 스포츠 스타들에게 '프로패치'를 제공하고 마케팅할 예정이 있습니다 ‘위너패치’는 정제 봉독 성분과 유사한 소염, 면역력 개선, 혈액순환,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는 프로폴리스와 복분자, 토사자 추출물로 이루어진 바늘 성분이라 남녀 성 기능 개선에는 남자 회음 부위, 성기 보디 부위, 여성 하복부 경혈 자리에 부착하여 효과를 발휘하며, 헤르페스 물집에 붙이면 전염 예방 및 빠른 물집 치유에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식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비메디컬에서 출시된 ‘위너크림’, ‘위너크림파워’, ‘프로패치’, ‘위너패치’ 제품들을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을 통하여 의약품, 의약외품, 의료기기로 인증을 받아 대한민국의 우수한 한의학과 정제 봉독 및 봉산물 제품 그리고 마이크로니들 기술 등을 접목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한의사로서, 저는 유명 대학병원에서도 치료가 실패했던 난치병들에 대해 한의학적 치료로 호전이 되는 경우를 접할 때와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상황에는 한의사라는 진로를 택해서 의미 있고 보람차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조그만 신생 기업의 대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에는 회사에서 개발한 제품들을 전 세계인들에게 상용화될 수 있도록 연구, 마케팅, 외판에 더욱 집중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임상 26년 한의사. 그리고 창업 초기 기업 2년 차 대표. 그동안은 한의원에 내원하는 환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진료하는 한의사로 사는 삶을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신생 창업 기업의 대표로서 그동안의 임상 경험을 살려 새로운 기술과의 접목과 융합을 통해 다양한 제품 개발과 판매를 하고, 수많은 동료, 후배 한의사들, 그리고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업인이 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안상원, 양평군청 육상팀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학창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수학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알았다. 좋아했기에 의심없이 믿어왔던 '수학'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막연하게 꿈꿔왔었던 아나운서로 진로를 틀었고, 꿈을 이루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방송, 행사, 광고, 드라마, 영화, 강의, 심지어 유튜브 방송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용경빈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용경빈입니다. 현재 EBS 저녁 뉴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방송MC쇼호스트 전공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15년 차 아나운서가 됐네요. 2011년 tbs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한국아나운서연합회에서 나오면서, 지금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중앙선관위 대선, 총선, 지방선거 방송을 비롯해 의료, 경제 방송프로그램 진행, 정부와 기업 행사, 광고, 드라마/영화, 강의 등 다양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순수과학인 ‘수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아나운서’의 진로를 걷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중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제가 수학을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적성이 아니라는 걸 대학 입학한 첫 학기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졸업준비는 성실히 하되, 다른 내 꿈을 찾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전공과 연관성 있는 일들 범주에서 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전하고 부딪칠수록 ‘난 계속 어떤 틀 안에 머물러 있는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면접도 번번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답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 스스로 목표를 전공의 범주에 가두지 말고, 이 틀을 벗어나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마음 깊은 곳의 꿈을 좇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날 이후, 막연한 꿈이었던 아나운서를 찾을 수 있었고 도전하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건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였어요. 남들보다 늦은 만큼 더 독하게 덤볐던 것 같습니다. 전공도 무관해서 부족한 게 많았던 만큼, 더 읽고, 더 보고, 더 느끼고, 더 소리 내어 봤습니다. 13년의 성가대 생활이 저의 소리를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고등학교 시절 교지편집부 활동도 사고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아나운서 시험! 정말 무수히 떨어져 봤어요. 지상파 3사는 물론, 지방에 있는 방송사부터 각종 케이블의 작은 자리들까지. 그러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역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쌓여갔죠. 그러면서 든 생각이, ‘이렇게 방송 한 번 해보기가 쉽지 않은 거구나,’였어요.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On Air’ 의 맛을 보고 싶었죠. 스터디로 묵묵히 준비한 1년의 세월이 지날 즈음, 드디어 생방송을 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GS홈쇼핑 건강기능식품 부분의 MD와 PD, 업체 담당자가 면접을 본 결과, 제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죠. 첫 방송 날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잊을 수 없는 신고식을 치렀어요. 그 시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진행 노하우, 시청자와의 교감, 순발력. 아무 경력이 없던 저에겐 정말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1년 후, 저는 ‘RTN’이라는 부동산 전문 방송사의 정식 직원으로, ‘아나운서’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방송계 입문은 2005년 홈쇼핑 전문 게스트로, 이듬해부터 케이블 채널 RTN의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지난 십여 년간 tbs, 채널A, YTN 등 여러 종편과 SBS, MBC, EBS 등의 공중파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방송을 하면서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2008년 tbs 아나운서 공채로 입사해서 보냈던 4년간의 세월이 제가 지금의 아나운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밑거름이 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매주 선배 아나운서들과의 합평회를 통해 모니터하고, 연습도 하고, 많이 혼나기도 했죠. 그러나 즐거웠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유능한 선배들이 많이 계셨고, 그분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게,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하지만 저에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아마 방송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더 많은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랐고, 더 많은 사람과 방송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하고 싶었으니까. 그 기회가 너무나도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서도 지상파 3사 공채를 계속 보러 다녔고, 제가 서 있던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았던 것. 그것 또한 절 계속해서 성장시킨 것 같아요. 최종면접까지 함께 올라갔던, 지금은 3사 아나운서가 된 몇몇 동료들에게 약속했었어요. 비록 지금은 내가 3사에 최종 합격하진 못했지만 어디서, 어떤 방송을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방송을 하겠다고. 지켜봐달라고. 가끔 힘이 들 땐, 그 약속을 떠올리곤 합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가끔 3사 아나운서로 합격하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날 때도 있답니다.) 방송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365일, ‘all day, stand by’라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로서, 방송인으로서, 언제나,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파서도 안 되고, 마음껏 먹고 마시기도 불안하고. 새벽방송일 경우는 잠도 편히 잘 수 없죠. 한 번은 생방송을 50여 분 남기고 졸음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 알람을 부탁하고 차에 가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아내도 바쁜 상황에 깨워주는 걸 깜빡했다가 펑크를 낸 적이 있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아찔합니다. 이후로는 알람이 가능한 장치를 최소한 2가지 이상은 꼭 준비합니다. 아나운서로서 또 다른 고충의 한 가지는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항상 친절해야 할 것 같고, 항상 바른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고. 늘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자리관리’, ‘책임감’, 그리고 ‘시청자와의 약속’. 하지만, 그런 절제의식을 배워가며 또,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저는 100세는 되어야 조금이라도 어른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도 ‘어른이’라서 매일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최근 용경빈 아나운서의 SNS를 보면 진행하고 있는 YouTube 채널에 관련된 글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용경빈 아나운서가 YouTube 채널을 시작을 한 계기가 있나요? ‘안 시켜주면, 내가 만들어서 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전에는 섭외가 되어야만 진행이든 출연이든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1인 크리에이터들이 넘쳐 납니다. 즉, 나를 찾아오게끔 하는 경로로 바뀐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더 다양한 일들로 더 많은 사람과 방송으로 소통하고 싶은데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나 이런 것도 잘해!’라고 생각만 하고 있지 않고, 직접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방송 일을 하다 보면, 개편이나 종방, 진행자 교체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몰라요. 그러나 유튜브에선 적어도 ‘잘릴’ 위험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만의 방송을 하고 싶었죠. 제 이야기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이야길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콘텐츠와 함께. 채널 소개를 좀 드리면, 음악치료라는 틀에서 치유를 얻는 곳이에요. 요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가 치유잖아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위로와 음악 성장 팁을 주는 <우리 아이 음악으로 토닥토닥>, 음악교육전문가 남승연 킨더뮤직코리아 대표의 추천곡 <이럴 땐 이런 음악>, 그리고 부모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든 오늘 하루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연주하는 피아노로 치유하는 <피아노 치는 아나운서> 코너로 구분해서 운용하고 있어요. 다만, 구독자 1,000명이 넘어야 모바일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어서, 그때까지는 <피아노 치는 아나운서>는 <피아노 스케치북>으로 좋은 곡들을 피아노 커버하고 있습니다. 음악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체적으로도 치유의 기능이 강하죠. 하지만 자신의 정확한 감정 읽기가 우선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 채널을 통해 나누고 싶어요. 그 소중한 뜻을 남승연 선생님과 교육콘텐츠 전문제작사 나무엘, 그리고 제가 뜻을 모아 공동제작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지요. 저 또한 아나운서에서 내려와 ‘인간 용경빈’으로 여러분을 만날 겁니다. 또한, 저는 두 아이 아빠로서 육아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제가 EBS 아나운서로 근무한다는 것 자체도 큰 축복이죠. 평범한 육아 대디가 여러분과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편안하게 육아 지혜도 얻어 가시고, 음악치료도 누려보세요. 저는 현재 음악치료사 자격증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고, 대학원 공부도 이어갈 계획입니다. 아나운서 용경빈 만의 경청법으로 여러분을 토닥토닥해드리고 싶습니다. ‘피아노 치는 아나운서’의 유튜브 ‘음악으로토닥TV’ 많은 관심으로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구독도 꼭 부탁드려요! 본인의 방송을 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음악적 콘텐츠, 힐링 콘텐츠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여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피아노를 잘 치기보단, 어떤 노래를 듣고는 악보 없이 들은 대로 치는 걸 더 좋아했어요. 절대음감이라고 하는데, 친구들이 신기 해했죠. 당시 ‘천사들의 합창’처럼 TV에 나오는 드라마, 만화 주제곡들을 친구들 앞에서 연주하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었죠. 아마 아나운서가 되지 않았다면 음악 분야에서 뭐라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 듣고 치는 정도였지만, 중학교 시절엔 즉흥 연주나 짧은 작곡을 했었어요. 화성학을 배운 적이 없지만, 왼손 화음이 바뀌는 것에 따라 곡이 완전히 다른 곡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재미에 푹 빠졌었죠. 이런저런 곡의 색을 바꿔보고, 제 나름의 멜로디도 추가해보고 하며 여가를 보냈답니다. 음악이 참 좋았어요. 음악이 계속하고 싶어서 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격하게 반대하셨고 저를 저지하셨죠. 당시 저에겐 용기가 부족했어요. 포기하고 말았죠. 나중에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다시 하자며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다른 꿈을 찾게 됐는데, 아나운서가 되어서도 음악에 대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화성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작곡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쓴 곡으로 CBS의 창작 CCM 경연대회에 나가 예선을 통과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YTN 등 일이 바빠지면서 저는 음악을 또 뒷전으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유튜브라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이번에는 절대로 미루지 않을 겁니다. 음악을 이해하고, 음악성을 지닌 아나운서가 드리는 힐링!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주식회사, 이선미 스피치랩, 한국아나운서아카데미, 스피치리움, 모아아카데미, MBC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비롯해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까지 아나운서의 진로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명성이 알려진 아나운서 아카데미의 강사와 교수로 강단에 서고 계십니다. 지금도 혹시 아나운서의 진로를 택할지 고민하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면 이런 각오는 꼭 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한다면? 일단 방송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하라는 대로, 배우는 기교만 습득하면 아나운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물론, 진행력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요.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명분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방송에 대해 거창하지 않게 시선을 달리 보세요. 방송은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아나운서는 그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하죠. 그러려면 내가 먼저 세상과 호흡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세상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죠. 그래서 가장 민첩한 소통 창구인 신문을 보는 것이고, 가장 효율적인 간접 경험, 독서를 하는 겁니다. 세상과 호흡할 준비가 됐다면 이제 사람들과 소통할 준비를 해야겠죠? 발성과 발음 연습을 하고, 표준어와 바른 어법을 공부합니다. 그래야만 단절되지 않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전달을 해야 합니다. 가끔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발성, 발음 연습을 한다는 학생들을 봅니다. 틀린 얘긴 아니지만, 더 중요한 건 전달력입니다. 명색이 아나운서인데 내 말을 누구 하나라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아나운서로서 말을 하는 이유가 상실되는 경우죠. 같은 이유로 표준어와 어법을 공부하는 겁니다. 약속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못 알아듣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학원에 가면 이것부터 배우는데, 형식적으로 하라니까 하는 게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모니터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니터와 선배들에 대한 모니터. 이를 통해 이제 사람들 앞에 프로로서 설 준비를 하는 것이죠. 화법, 눈빛, 표정, 몸짓이 모여 시청자들과의 교감을 도와줍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모니터는 정말 중요한데요. 연습이나 예독을 했을 경우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내가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반드시 비교·분석해야 합니다. 더불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죠? 선배들의 방송은 하나하나의 좋은 교재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렇게 방송할 준비를 해봤는데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방송‘할’ 준비라고 말씀드렸다시피 이젠 아나운서가 되고 난 후에는 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가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오히려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될 겁니다. 신문과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준비를 늦추지 않고, 혹시라도 잘못된 말을 사용했다가 게시판에 항의하는 글이 올라올까 봐 미리미리 복습, 공부하고, 오늘 방송 잘했나, 틀린 건 없나 찾아보고, 혹시라도 배울 건 없나 하며 선배 방송도 찾아보게 됩니다. 이상하죠? 분명 방송‘할’ 준비였는데 방송 '후'의 모습과 왜 차이가 없는 걸까요? 이 모든 게 방송인이자 아나운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갖춰지는 부분이 결코 아니기도 하고요. 준비하는 과정부터 여러분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성실하게 지켜져 나갈 때 비로소 신뢰받는 아나운서가 될 겁니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을 유일한 비책이기도 할 겁니다. 기본을 지키는 아나운서의 삶을 위해 저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할 겁니다. 도전도 멈추지 않을 거고요. 특히, 방송 일이라는 게 계획한다고 이뤄지는 일은 더욱 아니라는 걸 이젠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런데도 바라는 모습이 있다면 그윽한 향기를 낼 수 있는 작은 꽃이면 좋겠어요. 7년째 진행하고 있는 EBS 뉴스도 끝까지 최선을 다 할거고요, 강단에서 꿈을 가진 모든 분과의 교감도 놓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하는 새터민 교육도 조금씩 범위를 넓혀나가 볼 계획입니다.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겠네요. 피아노 치는 아나운서가 운용하는 유튜브 채널 ‘음악으로토닥TV’에 오시면 하루의 노고를 말끔히 씻어드릴게요. 즐거웠던 일, 가슴 아팠던 일, 속상한 일, 다 토닥토닥 해 드릴 겁니다. 전문성을 위해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음악치료사 공부도 계속해나갈 겁니다. 인터뷰를 끝맺기 전,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일정이 있는데요. 유튜브 채널 ‘음악으로토닥TV’의 ‘우리아이 음악으로 토닥토닥’이 10월경 토크콘서트를 열 계획이에요. 서울문화재단과 유능한 공연기획자 분께서 그동안 채널을 관심 두고 지켜봐 주시다가 이런 멋진 제안을 해주셨어요. 가족을 위한 작은 음악회와 함께 피아노치는 아나운서 용경빈과 음악교육전문가 남승연 선생님이 부모와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드릴 겁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오셔서 편안하게 즐겨보실 수 있게 추후 구체적인 일정은 SNS를 통해 홍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용경빈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언론고시 준비 중이라면 한 번쯤은 입사시험을 생각해봤을 신문사 '스포츠조선'과 종편방송국 'MBN'의 기자였던 그는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 기회'를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영원한 학원액션로망, '이소룡'의 절권도를 수련하는 노경열 수석교련과의 인터뷰!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뵤~’라는 기합 소리와 쌍절곤 하면 떠오르는 사람, 70년대 액션 스타로 유명했던 이소룡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이소룡이 만든 무술 ‘절권도’를 한국에서 수련하며 지도하고 있는 노경열이라고 합니다. 현재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부총교련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부총교련이시지만 ‘스포츠조선’ 신문사와 ‘MBN’ 방송국의 기자라는 예상치 못한 전직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떠한 계기로 기자가 되어 나중에는 퇴사 후, 현재의 절권도 도장을 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절권도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기자 생활은 2006년 스포츠조선에 취재기자로 입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이미 2003년부터 절권도 코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한 곳에서 가만히 있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만큼 2006년 당시 뭔가 많이 돌아다니는 일을 문득 하고 싶어졌었습니다. 게다가 스포츠를 좋아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포츠신문 기자에 도전하게 되었었습니다. 사실 제 대학 전공이 공학 쪽이라 학생 때만 해도 언론 쪽으로 직업을 가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었습니다. 그렇게 2006년부터 스포츠기자로 현장을 누비다가 2011년 MBN에 있던 동료 기자를 통해서 입사를 권유받게 됐습니다. 당시 종편 출범을 앞두고 있었던 만큼 경력 기자들에 대한 스카우트 제의가 꽤 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저에게도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고요. 신문 기자와 방송 기자는 취재방법부터 기사를 쓰는 방법까지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한동안 적응 기간이 필요했지만, 정치부 특히 통일부와 외교부에 출입하며 취재를 하고 나중에는 산업부에서 IT 산업 전반에 대해 취재를 하면서 세상을 읽는 법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질문의 답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런 경험은 절권도 수련과 지도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들 많이 궁금해합니다. 왜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 그것도 기자라는 - 남들이 보기엔 꽤 괜찮은 - 직업을 그만두고 무술 도관을 하는지. 무술이 현시대에서 크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궁금해할 만합니다. 때때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투리 시간을 만들어 소소하게 수련모임을 이끌고 있었던 만큼, ‘굳이 퇴사할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나’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건 일단 공부에 대한 욕심이 컸습니다. 절권도의 수련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인간의 ‘심리’와 ‘신체’에 대한 공부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수련 시간에 수련생들에게 ‘싸움 혹은 격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소통이다. 무조건 제압하고 이기려 하지 말고,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다’라고 자주 얘기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 역시 상대의 심리, 즉 인간의 심리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동양에서는 ‘무의동원(武醫同原)’이라 해서 무술과 의술은 그 뿌리가 같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절권도를 통해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신체를 부수는 방법을 익힐수록 신체를 치료하는 방법에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어졌었습니다. 그랬기에 도관을 오픈해 좀 더 본격적으로 지도를 시작하고 체육 심리와 운동생리학, 운동 처방 쪽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뜻한바, 수련과 지도, 그리고 공부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무술이라는 주제 혹은 공통관심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절권도를 제외하고도 세상에는 수많은 무술이 있습니다. 무술이라는 건 사람의 몸으로 하는 것인 만큼 그 기본 원리를 보면 똑같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머리 하나, 몸통 하나, 팔 둘, 다리 둘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 때문인데요, 그 유사한 기본 원리에서 시작해 이제 개개인의 경험과 성별의 차이, 신장, 체중 등 신체조건의 차이, 상황에 대한 분석의 차이, 심리의 차이, 어떤 결정이나 행동을 할 때 개인의 성향 차이 등이 반영돼 수많은 무술이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절권도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으면서 만날 수 있는 다른 무술 수련자분들은 모두 이러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느껴지는 분들이고 이러한 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간에 대해 배우고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절권도를 수련하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절권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인기는 어느 정도인가요? 한국에서는 절권도가 인기가 있다기보다는 이소룡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상징물로써 큰 인기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중장년층은 이소룡의 영화를 직접 극장에서 보고 자란 세대이니만큼 여전히 향수를 가지고 있고, 청소년층은 SNS 등을 통해 재생산된, 특히 이소룡이 연기한 영화 속 인물을 활용한 풍자물이 인기를 얻으며 이소룡에 대한 정보를 새롭게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소룡이라는 이름을 떼고 보면 무술을 수련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절권도’라는 무술이 충분히 인식돼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생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에 몇몇 배우분들에 의해 각종 매체에서 절권도가 소개되며 일반인들의 관심이 조금씩 오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도관은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본관이며, 저는 치프코치로서 일반 수련생들을 포함하여 사범급들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절권도 수련 시스템 특성상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지도하기는 힘든 만큼 한 분, 한 분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맞춤형 수련을 진행하고 있고, 절권도 이론을 바탕으로 한 스포츠 퍼포먼스 향상 프로그램 등을 함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술을 수련하시다가 원포인트 레슨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자주 있어서 꾸준히 다른 무술 단체와의 교류 및 공부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프로 복싱이 큰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종합격투기 대회인 UFC가 큰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격투기 사랑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치안이 아주 좋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이나 폭행 사건이 꽤 발생하는 만큼 호신 개념으로 무술을 배우려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각 무술이 실제 싸움에서 얼마나 유용하냐’는 주제로 서로 언쟁을 벌일 수도 있을 정도로 관심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그래서인지, 한국은 ‘전 세계 무술의 백화점’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무술이 다 수입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 한국의 전통무술까지 포함하면 정말 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하죠. 절권도는 이 속에서 작은 자리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절권도의 과학적 원리와 유용성, 그리고 재미를 알려가고 있는 만큼 그 자리가 조금씩 넓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21세기 현시대에 무술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요? 무술이라고 하면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 또는 물리적인 위협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호신의 방법이라고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여전히 유용한 무술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질문에 대한 답으로도 얘기했지만, 한국은 치안이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폭행 등의 사건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죠. 가끔 칼 같은 흉기에 의한 상해나 살인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이니까 무술이 호신술로서 가치를 보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미국의 예를 들면, 범죄자들이 총을 쉽게 사용하고 일반인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쉽게 총기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총기가 일반화되어있는 곳에서 무술이 호신술로서 가치를 가질까요? 호신술을 배우는 데 노력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 총 한 자루를 사는 것이 더 안전하고 쉬운데 과연 누가 호신술을 익힐까요. 따라서 미국과 같이 일반인의 총기 구매가 허락된 나라들 같은 경우, 일반인들이 무술을 단순히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신체 단련과 정신적인 단련, 그리고 소통의 장으로써 받아들이고 수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접근법이지만 조금 더 격렬하게 움직이고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승부를 즐길 수 있다는 차이점이 무술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구요. 이런 맥락에서 제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싸움의 기술로써, 자신을 지키는 기술로써 무술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폭력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이런 무술의 가치는 빛을 잃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보면 현대인은 매일매일을 전장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항상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잡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싸움, 격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소통입니다. 따라서 무술은 ‘어떻게 타인과 소통하는가?’ 즉, 교류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상대를 빨리 파악하고 나에게 공격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방어, 회유, 혹은 반격을 할지,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빨리 내 친구 혹은 내 편으로 만들지에 대한 심리적인 방법이 모두 녹아있죠. 따라서 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무술을 통해 육체적으로 강인한 내구성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구축하며, 주변인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고 경쟁자가 있을 땐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를 수련한다고 보실 수 있습니다. 절권도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자세를 요구하거나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연함이 수련자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며, 이를 바탕으로 상황의 신속한 판단과 해결 방법의 신속한 선택을 끌어냅니다. 또한, 파워펀치라는 특별한 수련 과정을 통해서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시 좌절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닌 곧바로 반응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합니다. 영화, 드라마, CF 등 촬영을 위한 절권도 자문을 맡으신 경험도 많으신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배우들을 지도하게 되면 항상 놀라는 부분이 상당히 빨리 습득한다는 점입니다. 보통 배우들은 곧 시작할 작품을 위해 배우거나, 작품과 작품 사이에 잠시 짬이 나는 동안 관심이 있어서 배우는 정도가 대부분이라 어떤 식으로든 장기간 수련을 이어가는 경우는 개인 일정상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절권도를 지도할 때도 절권도 그대로가 아닌 액션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부분을 수정해서 전달하는데, 배우 대부분은 금방 따라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냅니다. 특히 몇몇은 어떤 부분에서 효과가 들어가야 하고 이 부분은 카메라 앵글 상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다 정도의 조언만 해줘도 금방 동작을 수정할 정도로 감각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연기를 통해 여러 인물의 삶을 표현하는데 익숙한 만큼 무술도 그 핵심을 파악하고 특유의 ‘맛’을 잘 살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꽤 다양한 분들을 경험했지만, 방송에서 절권도를 자주 언급하시는 배우 장혁 씨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 저희 본관에서 수련 중인 여러 배우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또 한 뮤지컬에서 액션 구성을 맡았을 때의 경험도 굉장히 소중했습니다. 그 전에 드라마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뮤지컬인 만큼 음악에 맞춰서 액션을 구성했어야 했는데, 첫 도전이었던 만큼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정도면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위대한 쇼맨’의 액션 구성을 보고 대 좌절을 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죠. ‘위대한 쇼맨’ 안무가가 존경스러웠고, 앞으로 어설프게 자문을 맡으면 안 되겠다는 각오도 다지게 됐습니다. (웃음) 현 시국에 안타깝게도 매일 같이 뉴스에서는 길거리에서, 밤에, 그리고 여성을 상대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접하게 됩니다. 여성에게 호신술로 절권도는 적합한 무술일까요? 호신술에 적합한 무술인가…. 호신술에 적합하지 않은 무술은 없습니다. 모든 무술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그리고 물리적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익힌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호신술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일단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 무술 배우는 친구에게 ‘야, 나 호신술 기술 하나 가르쳐줘’라고 물어보는 것. 그럼 그 친구는 ‘이럴 땐 이렇게 하면 돼’라며 기술을 가르쳐 줄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직접 몇 번 해보고 ‘오, 된다. 신기하다’라고 할 테죠. 보통은 여기서 끝입니다. 그러나 무술의 기술은 단순히 몇 번 해본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올림픽 유도 선수가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를 위해 같은 기술을 수도 없이 반복 연습하듯이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야 성공 확률을 올릴 수 있는, 100% 된다고 보장할 수 없고, 그나마 성공 확률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대한 변수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예 중 하나인데, 만약 멱살을 잡힌 상황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꺾고 때리면 멱살 잡은 손을 풀고 상대를 오히려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방법을 알았으니 반복 연습을 해야겠지요. 보통 기술을 연마할 때는 지도자들이 서로 비슷한 체격조건을 가진 사람들끼리 동반자를 붙여줍니다. 신체조건이 비슷하면 힘을 운용하게 될 몇 가지 기본 조건들이 같아지기 때문에 연습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연습하고 그걸 매일 반복해서 한 달을 진행했습니다. 이제 그 기술에 꽤 익숙해졌겠죠? 그동안 함께 연습했던 동반자가 홱 홱 넘어가고 아프다 하고 하면 이제 슬슬 자신감도 생깁니다. 이제 누가 와서 멱살을 잡아도 난 그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죠. 하지만 지도자들은 압니다. 바로 이렇게 자신감이 생겼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하나만 바꿔보겠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많이 큰 상대로요. 일단 팔이 길고, 키도 커서 중심도 높습니다. 덩치가 큰 만큼 힘도 좋아서 멱살이 아주 제대로 단단히 잡혔습니다. 힘도 좋은데 키도 크니 멱살 잡힌 순간 그 전과 다르게 본인의 몸이 위로 살짝 들려버립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동반자는 멱살을 잡고 가만히 있었는데 새로 바뀐 동반자는 멱살을 잡고 본인을 앞뒤로 흔들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달 동안 연습한 기술이 과연 통할까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술 연습은 상황, 환경, 상대 등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연습을 해야 하고 그 속에서 해결 방법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언제 어디서든 적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기술이 10개만 있어도 아마 1, 2년 수련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기에 호신술 몇 동작 배워서 몇 번 연습해보고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실 예정이었다면 바로 그 생각부터 고치셔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무술로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절권도를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얼마나 익혀야 하는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호신술을 배우러 온 여성분들에게 가르치는 것 한가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절권도를 깊이 있게 수련하고 싶다가 아닌 호신술을 배워서 내 몸을 지키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여성분들에게 제가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달리기입니다. 그냥 달리기가 아닙니다. ‘저 꽤 잘 달려요’라고 자신을 보이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럼 전 하이힐을 신고 달려보라 합니다. 백이면 백 잘 못 달리시죠. 그 순간 힐을 벗어 던지고 뛰시는 분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제가 ‘마놀로 블라닉이나 지미추를 신고 있어도 위기 상황에서는 벗어던지고 뛰어야 한다’라고 하면 아까워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계셨습니다. 그 힐이 정말 아깝고 본인 목숨도 구해야겠다면 어쩌겠습니까. 힐 신고 뛰어야죠. 뒤에서 편한 신발 신고 쫓아오는 괴한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요. 하이힐 신고 뛰기, 낮은 굽 구두 신고 뛰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다음은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가기입니다. 물론 운동화를 신고, 그다음은 구두를 신고, 그다음은 힐을 신고. 괴한이 넓은 평지에서만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때로는 아파트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혹은 뛰어 올라가서 괴한을 피해야 할 상황이 있을 겁니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에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으니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방향 전환을 빨리하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때도 있으니 그것도 연습해야 하고 달리다 넘어질 수도 있으니 넘어진 뒤 빨리 일어나 다시 뛰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달리는 것만으로도 연습해야 할 것이 많죠? 이걸 모두 잘하실 수 있게 되면 그 여성분은 그다음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먼저 아시게 됩니다. 호신술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기 시작한 것이지요. 저 역시 이 이후부터 여러 상황을 상정한 여러 탈출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공식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진행형인 계획이 하나 있는데 절권도 이론을 베이스로 해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절권도는 이제 태어난 지 50년도 안 되는 아주 어린 무술이라 학계에서 인정할 정도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권도가 생리학적으로, 역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얼마나 과학적이고 유용한지 연구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계획입니다. 절권도 수련과 지도는 아마 제가 이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무술수련은 끝이 없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를 알고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이 무술의 진정한 의미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수련해도 그 끝을 알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좀 더 노력해서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절권도를 알리고 또 그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고 느끼며 저 자신을 완성해 나아가겠죠. 전 세계를 떠돌면서 절권도를 수련하고 지도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것. 어느 한가로운 오후에 문득문득 떠올리는 제 미래의 모습입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노경열 영상 제공: MBCentertainment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는 신기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책' 혹은 '음악', '영화' 등 문화와 예술이 그들의 삶에 접목해 있다는 점이다. 김현섭은 청소년기에 다른 것이 아닌 국악에 빠졌고, K-POP 가수 방탄소년단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하는 한류의 정점을 찍은 오늘 날에도 만 스물 여덟인 이 청년은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의 전통 음악'인 국악의 길을 걷고 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삶을 통해 악(樂)을 배우는 작곡가 김현섭입니다. “악(樂)은 삶을 반영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저에게 악(樂)은 악(樂) 만들기는 들리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며, 눈으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귀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의 실체는 지금껏 경험한 일 들이였습니다. 이후 전 악(樂) 만들기 전 가장 먼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살피게 되었고,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경험은 가장 솔직한 악(樂)의 씨앗이 되기도 하며, 나만이 지닐 수 있는 음악적 언어가 됩니다. 앞으로의 삶을 통해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름 아닌 작곡, 그것도 '국악 작곡'을 진로로 정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앞집 누나(임지영)의 동요 '나비야' 연주를 듣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하였으며, 악보를 찾아 연주하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주하기를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때 서울시 영재로 발탁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가 여러 번 수상하기도 하였고, 피아노 전공으로 진로를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피아노과 진학의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음악 선생님(백나미,정성숙 선생님)의 권유로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피아노과 진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을 통해 처음 들어보는 음악적 호흡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정수년 선생님의 연주한 슬기둥의 '그 저녁 무렵부터 해질녘까지'입니다. 새로운 음색과 만남 이후로 저의 진로는 방향성이 전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항상 피아노를 치며 나만의 음악 세계관을 구축하고 싶다 하는 마음과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된 국악기의 진한 소리의 합은 저를 작곡+국악=국악 작곡으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임에도 불구하고 국악에 대한 사람들의 인기 층이 높지 않고, 인식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국악'을 한다는 이유로 저변을 넓혀가는데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요? '국악은 느리고, 지루하다. 고루하며 옛것이다?' '국악은 촌스럽고, 클래식은 고급스럽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나물 반찬을 해주시면 ‘왜 이 맛없는 것을 먹으라고 하시지?’라는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습니다. (웃음) 더불어 건강에도 좋다는 걸 알게 되었죠. 누구든지 각자만의 삶의 방법과 철칙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그 속에서 자리 잡은 선입견 역시 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는 경험해보지 못하였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 음악 시간에 배운 음악은 클래식 음악이 주류였으며,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아주 짧은 시간 국악에 대해 공부를 하고 넘어가곤 했을 뿐, 국악을 접할 기회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 전공 선생님들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의 본래의 뿌리이기에, 지켜야 할 음악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좋은 음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국악에 대하여 하나씩 모르던 것들을 알아가게 되면서부터, 그 속에서 선조들의 숨과 우리정서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가장 좋아하고 즐겨듣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누군가에게도 한번이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저의 지인들은 저의 음악을 사랑해주면서, 동시에 국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이 많습니다. ‘다시 국악을 들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그 한번이 없었다면 편견으로 인해서 얻지 못했을 감사함 일 거야’라고 생각하며 말이죠. 음악의 장르와 경계가 무너진 지금, ‘국악은 우리 음악이니 들으세요. 좋은 음악이니 들으세요!’라며 말하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에 대한 문화/언어적 폭력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국악인이 수많은 시도와 방향을 도모함으로써, 전과 다른 방향을 꾀하고 있으며, 대중매체에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간 듯합니다. 우리 것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닌, 언젠가는 저만의 음악 속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있었을 겁니다. 국가의 민속 음악을 기반으로 세계적 현대음악으로 꽃피운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1881~1945)과 같이, 장르와 경계를 넘어, 우리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계적인 문화인으로서 세대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음악은 가장 솔직한 예술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인으로서 가장 솔직하게 향유 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있음에 자랑스럽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이 ‘한 번’이라는 기회를 꼭 얻어보시길 말뿐만이 아닌 진심으로 소망해봅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작곡과 수석 졸업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을 진학한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였음에도 결국 '예술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군 면제'의 장벽은 넘지 못하셨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예술가로서의 2년간의 공백기는 경력 단절은 물론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집중도를 100%, 그 이상 발휘할 수 없기에 큰 타격임이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저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습니다. 군 생활을 38년을 하셨고, 지금은 명에 퇴직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거처는 군부대였으며, 군대 지형을 이용하여 친구들과 재밌게 놀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보니, 우리나라 사나이라면 당연히 가야 할 군대에 간다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가장 예쁜 나이이기도 하며,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임에는 틀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악계에는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대회가 최소 3개 이상이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상을 받는다는 조건입니다. 저 역시 대학 시절 군 면제를 위하여 열심히 대회 준비를 하였지만, 3번 중 2번은 2등, 한번은 예선에서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며 좌절하기도 하였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4학년에 대회에서 2등을 한 저는 ‘입시와 같은 입대시험을 거쳐 ’군악대 작곡병‘으로 입대했습니다. 훈련소 시절, 걷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원망이 더 커지기도 하였으며, ’한 번만 더 해볼 걸‘이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군대를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거쳐 갔습니다. ’과연 나는 내 삶에서 2등인 사람일까?‘ ’그렇다면 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은 2등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일까?‘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예술과 음악을 등수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등의 깊이 있는 고민은 어린 나이에 많은 수상과 경험을 하며 겸손함을 잃어버린 나를 다시 본래의 나의 모습으로 돌려놓게 되었습니다. 군악대 자대로 가서, 많은 인연을 만나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보게 되었으며, 미국 버지니아 국제 타투에도 대한민국을 알리는 음악을 편 작곡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더불어 병장 때 국립국악원 온나라 국악 경연대회에서 작곡부문 금상을 받았습니다. 저만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오히려 대회의 1등 수상으로 인해 군 면제 혜택을 받은 분들이 군 생활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안타까운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나이에 군대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겸손함보다 자만함이 앞섰을 것이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통하여 배운 삶의 지혜는 얻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제자가 군 면제를 위해 저를 찾아와 수업을 부탁하였을 때도, '네가 군대에 간다는 약속을 한다면 도와주겠다. 군 면제가 없는 년도에 대회를 나가자‘라는 제안하였고, 그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제자는 그 대회에서 일등을 하였고, 곧 입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부합니다. 제자는 큰 성장을 하게 될 것이며,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음악이 성숙해질 것을 말입니다. 어쩌면 ’군대를 다녀온다면 내 음악이 망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핑계를 두고 싶은 건 아닐까요? 뭐든 맞서보면, 지혜를 얻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대회에서, 무대를 통해서 많은 작품을 선보이셨습니다. '작곡가 김현섭'의 음악의 특색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가장 간단한 질문이면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사람은 저겠지만, 또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웃음) 김현섭의 음악은 '현섭답다'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작곡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며, 이를 소리 언어로서 표현해내며 시대와 함께 소통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좋은 경치를 보며 영감을 얻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 속에서 영감을 얻듯, 각자만의 영감을 얻는 방법과 기로는 다르겠지만, 저는 저만의 삶의 방식을 통해 얻은 경험과 가슴속 멍으로부터 음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녹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김현섭의 음악은, '나 자신에게 솔직하려 노력하며, 진심을 담아내는 음악'입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였을 때 생명력을 얻기에, 현시대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 내보고자 합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협업했었습니다. 특별히 앞으로 협업을 해보고 싶은 연예인이나 다른 예술가가 있나요?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며, 사교성이 굉장히 좋습니다. 첫인상이 좋지 않을지언정, 알고 보면 참 여리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제 입으로 민망하지만 말하겠습니다. (웃음) 그렇기에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의 소리 언어를 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분야와 장르를 나누지 않고, 어떤 작업이던지, 김현섭이 필요하다면 달려가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해보지 않을래요? (웃음) 국악 작곡가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먼저 우리 선조들은 자신만의 가락을 통하여 시간이 흘러도 '지지 않는 꽃'을 피우고 싶은 바람이 지금의 우리 음악으로 남은 듯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현섭도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옛날 우륵이 가야금으로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었듯, 전통음악 속에 있는 미학을 자신만의 창의적 언어로 풀어 아름답고 지지 않는 꽃을 피워내는 작곡가가 되고 싶습니다. 더불어 창작을 하시는 모든 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음악의 고귀함을 일깨워 주신 박승률 선생님. 넓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신 원일 선생님. 좋은 음악을 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해주신 신동일 선생님. 장인정신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해주신 故강준일 선생님. 어머니처럼 항상 어려운 점이 있을 때마다 품어주신 임준희 선생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곁에서 힘이 되어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이귀숙 선생님.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달래 주셨던 김성진 선생님.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소리화 시켜야 한다고 알려 주신 이명숙 선생님. 인간의 삶은 목련과도 같다고 가르침 주신 김해숙 선생님. 지금의 김현섭을 있게 해주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하나님. 저와 함께 소통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모든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고 싶습니다. 현 월간뮤직리뷰 에디터 “김현섭의 Art x 인(人)”을 통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많은 문제점과 현실에 부딪혀보고 있습니다. 표면으로 드러나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라는 자리가 아닌, 악(樂)으로서 우리 국민과 지구촌 많은 친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가치관을 실현 할 수 있는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많은 계획표 속에서 지치지 않고, 웃으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로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라는 꿈은 큰 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헐뜯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를 발전시키고 융성시키는 것은 그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꼭 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앞으로의 작곡가 김현섭 역시 “인간 김현섭” 이고 싶습니다. 좋은 향을 낼 수 있는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힘껏 공부하고 열심히 살아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현섭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2010년 하이서울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마이끌레르 영화제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 콘서트, 인천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행사들에서 사진작가로 참가한 그는 사실 직장이 있는 GMTCK의 차장님이라는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길러 활발한 활약을 하고 있는 조준일을 만났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공연 사진 전문 사진작가 조준일입니다. 공연 현장의 그 화려한 퍼포먼스가 좋아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공연자의 열정을 사진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려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정리하여 의뢰하신 분들에게 보내고 나면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처럼 쓸쓸함이 엄습하지만, 슈퍼맨의 클라크처럼 아무로 모르는 비밀같이 또 다른 역할이 있는 직장(GMTCK)으로 돌아가서 완벽한 직장인으로 변신을 합니다. 조 작가님, 조 차장님 어느 호칭도 낯설지 않은데 아직도 제가 직장을 다닌다고 하면 놀라는 분들도 계시고 또 직장에서는 화려한 사진작가가 동료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의 아들, 그리고 4가족의 가장 역할을 포함하여 그 어느 역할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 욕심 많은 공연 전문 사진작가입니다. 어떻게 사진작가가 되었는지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나 취업을 해야 할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언론사가 아닌, 사진과는 무관한 자동차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원으로 묵묵히 생활하면서 가장이 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 역할에 충실하게 지내는 동안 사진에 대해서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서울시에서 시민작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후배를 통해서 듣게 되었고, 사진 분야에 지원하고 발탁되어, 서울시 시민작가가 된 게 시작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업무를 하고 주말에는 공연 현장을 다니다 보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여 미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중에도 특별히 공연 사진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0년 하이서울페스티벌 등 멋진 공연을 보면서 그 공연에 빠져들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정동극장에서 춘향전을 각색한 “미소”라는 공연을 촬영하면서 하나의 공연장에서 너무도 다양한 모습과 열정이 있다는 것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멋진 순간을 기록하는 그 역할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제가 하고 싶었습니다. 공연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하게 된 것은 제가 처한 상황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직장인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야 하기에 주중에는 거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습니다. 공연은 대부분 주말에 있었고 주중에는 자주 있지 않았기에 휴가를 활용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촬영한 후 보내준 사진을 의뢰하신 분들을 포함하여 공연을 직접 하신 분들이 뭔가 더 특별하고 멋지다고 하는 칭찬에 아직도 공연장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을 촬영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공연하신 분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직접 사인 CD를 받을 기회는 없었겠지요. 공연 사진 전문가로서 많은 공연에 참여하고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공연하는 분들을 사진에 담으셨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나요? 얼마 전 NHK OSAKA HALL에서 촬영했던 “G20 OSAKA SUMMIT 2019 개최기념 특별공연 WITH 조수미” 공연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이면 리허설은 생략하고 본 공연에 나와서 가볍게 노래 부르고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있었던 리허설도 참가하시고 또 본 공연 전날의 리허설에서도 엄청나게 긴 시간 철저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세계적인 소프라노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 무대 뒤에서 사진을 같이 찍고 싶은데 망설이고 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일이 불러서 함께 사진을 촬영해주는 모습을 보니 넓은 아량을 가진 인간적인 선생님의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또 다른 행사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입니다. 인천아시안게임은 제가 사진작가로 생활하는데 많은 기회가 되기도 했고, 많은 일화도 겪었습니다. 예를 들면, 손연재 선수,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등을 비롯한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제가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촬영한 사진 중 나중에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된 인물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마장마술경기에 출전한 청담고 정유연 선수의 경기 장면이었습니다. 경기에 출전할 당시에는 분명 청담고 정유연 선수였는데 훗날 최순실의 딸 ‘정유라’로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고, 제 블로그에는 욕을 하시는 분들과 사진을 달라는 기자의 메일까지 받는 등 지대한 관심이 쏠렸습니다. 사진을 달라는 기자의 메일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저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분명 그 기자는 그 사진을 좋지 않은 기사에 쓸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정유라와 개인적으로 일체의 친분도 없었고, 사진을 보내주면 당장은 저도 관심을 받고 좋았었겠지만, 저는 제가 촬영한 취재원에 대한 애정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진작가로서 예술적 사진을 촬영하고 싶은 생각은 하지 않나요? 공연 사진을 주로 촬영하는 작가로서 다른 분야에 관한 관심도 당연히 있습니다. 사진은 여러 분야가 있는데 제가 주로 촬영하는 공연 사진을 촬영하면 여러 장점도 있지만, 개인 전시회를 하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얼마 전부터 예술사진을 배워 보고 싶어서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예술사진은 지금까지 제가 촬영했던 분야와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많은 생각을 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 수료 후 전시회를 했는데, 사진탐구 팟캐스트 운영자님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님이 응원해 주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작가의 길을 진로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대학에서 순수 사진학과가 없어지고 있고 사진기자를 뽑지 않는 시대입니다. 또 AI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온다고 사람들은 예측합니다. 그러나 과거 컬러TV가 나올 때 당시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라디오 방송은 진화를 거듭하며 지금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준초이‘ 작가의 특강에서 한 청중이 ’자신의 어린아이에게 카메라를 쥐여 주고 사진작가를 만들려고 사진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이 좋은 방법인가’라며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준초이 작가는 ’지금 사진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책을 더 읽게 하는 것이 향후 작가로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을 하셨습니다. 지금 그 말이 지금 사진작가를 하고 싶은 이에게 제가 전해드리고 싶은 조언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회식을 갈 때, 공연자들과 기획자들은 홀가분하고 즐거운데, 회식 가자고 하면서 보도 자료 용도로 공연 사진 몇 장 보내줘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삼각김밥 먹으며 사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사진작가로서의 힘든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카메라가 좋아서 사진 잘 찍었다는 무지한 의뢰인들의 황당한 반응을 모델이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고 여유 있게 반응할 수 있는 맷집을 가진 훌륭한 사진작가가 되길 바랍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조금은 특별한 사진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깨끗하고 잘 찍은 공연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겠지만 나만의 독자성이 있는 공연 사진을 촬영하고 싶습니다. 촬영을 의뢰한 클라이언트에게도, 무대에 올라가는 공연자도, 그리고 사진을 촬영하는 작가까지 모두가 만족하는 사진을 촬영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오사카 공연에서 함께한 단장님과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살짝 말씀드리자면, 현장에서 펼쳐지는 공연 사진이 아닌 또 다른 공연 사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디어를 내고 경기도의 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조금은 특별한 사진을 촬영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공연팀 프로필 사진과는 다른, 스토리가 있는 1년여 시간을 둔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저의 또 다른 작품을 소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조준일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그의 직업은 가수,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기타리스트, 음악감독, 악기 쇼호스트 등. 정치와 외교분야가 아닌 대중음악계에서 다재다능하게 그의 꿈과 재능을 펼치고 있는 만능 아티스트! 박인우와 함께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박인우입니다. 대표 직업으로 작곡가를 늘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있지만 음악감독, 프로듀서,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쇼호스트, 작가 등 음악에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일곱 살 때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면서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90년을 전후로 피아노 학원이 상당히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딱히 제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도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가족들이 괴롭다며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피아노를 잠가놓을 정도였으니 악기와 음악의 매력에 빠지는 계기로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여기저기 관심이 많은 유년기를 보낸 터라 또 갑자기 운동부를 하겠다며 3년 정도 다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악기를 다시 연주하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특별활동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음악 선생님께서는 다양한 악기에 능통하신 분이었는데, 어느 수업시간에 클래식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 연주하신 안토니오 루비라의 ‘사랑의 로망스’ (일명 ‘로망스’)의 아름다운 선율과 낭만적인 사운드에 완전히 마음을 뺏긴 저는 주저 없이 기타반에 가입하여 ‘로망스’ 완주를 목표로 클래식 기타를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집착이 강하고 한 가지에 쉽게 꽂혀 몰두하는 스타일인데, 당시 기타에 대한 저의 집착은 기존의 것들을 한 단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서 단기간 내에 상당한 실력 향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로망스’ 완주라는 기존 목표를 넘어 그해 동아리 연주회에서 독주를 따내며 기타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키웠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밴드 동아리에 가입해 일렉기타를 연주하며 클래식에서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영역의 음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한국가요제'에 출전하여 동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어떤 계기로 이 가요제에 출전을 하게 되었나요? 한국가요제는 한국 전통가요의 정체성 확립과 활성화에 기여하고 우리의 선율과 리듬을 대중화할 수 있는 가수를 발굴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음악경연대회로, 2004년 1회를 시작으로 국립극장에서 직접 주최하고 매년 KBS를 통해 중계되며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교 교양수업으로 ‘한국전통음악의 이해’를 듣고 있었는데, 당시 수업 교수님이자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맡고 계셨던 황병기 선생님께서 가요제의 취지와 참여방법을 알려주셔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해서 기본적으로 국악과 대중음악의 접목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국악’이라는 아이템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가요제에 저의 이러한 경험과 고민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필봉 사물놀이의 리듬 구성을 근간으로 그 위에 밴드 사운드를 얹은 ‘신새벽’이라는 곡을 만들고 실제 경연에서 풍물패와 협연하여 동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당시 물론 너무 기쁘고 뿌듯했고, 이제부터 직업 음악인이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수년 넘게 많은 유명 뮤지션들과 협업하고 함께 작업을 해왔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과 서적도 발매하시고요. 그 와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실수와 해프닝은 늘 데뷔하거나 분야를 옮긴 초기에 몰리는 것 같습니다. 20대 후반 싱어송라이터로 개인 활동을 하다가 30대에 접어들며 대중음악 작곡가로 분야를 옮기게 되었었습니다. 처음으로 TV에서만 보던 유명 걸그룹 멤버들과 녹음실에서 만난 날, 녹음에 필요한 데이터가 들어있는 USB를 놓고 왔다는 걸 녹음실에 도착해서 깨닫게 됐습니다. 동료가 다시 자료를 가지러 간 동안 사과는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소위 ‘멘붕’ 상태로 아무말 대잔치를 벌였던 흑역사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도 특히 아이돌 그룹들과 작업할 때는 작곡가로서 너무 긴장한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리 속으로 반갑고 좋아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럽게 경력이 쌓이면서 친한 아티스트들도 많이 생기고 이제는 긴장하고 당황할 일도 잘 없지만, 여전히 일상적으로 유명인들을 볼 기회가 생기는 것은 작곡가가 된 큰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작품활동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건 2015년 부터 시작한 영상음악 활동인데요. 영상음악의 범주에서 '음악 감독'이 실제로 하게 되는 업무의 범위와 역할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음악감독의 업무영역은 방송의 장르에 따라서 그 개념이 조금씩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예능이나 방송 회차가 많은 시사 교양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빠른 제작과 연속성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에 배경음악 작업이 주로 ‘선곡’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해당 프로그램의 음악감독은 영상에 잘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고 편집하여 배치하는 일을 하는 ‘선곡 감독’으로서의 역할이 주된 업무영역입니다. 작업자 본인의 역량이 중요한 개인적인 영역이죠. 반면,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음악감독의 역할은 ‘제작 총괄’입니다. 의도가 분명할 때 기존 기성곡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작품에 들어가는 전곡이 O.S.T. 즉, 이 작품을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어야 합니다. 물론 본인이 전곡을 쓰고 연주해서 준비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죠. 따라서 타 장르에 비해 준비 기간이 길고 제작비도 높으며 제작과정에서 많은 인원이 투입됩니다.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장르에서도 오리지널 트랙에 대한 수요가 점점 커지고 있으며, 전곡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제작되는 다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리지널리티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개인을 넘어 시스템의 영역으로 확장되며 음악감독의 책임 범위도 더 넓어집니다. 과거에는 드라마와 영화 장르에도 곡을 본인이 쓰지 않고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모아서 편집 배치를 하는 오퍼레이터 성향의 감독들도 많았으나, 최근들어 스스로 작편곡이 가능한 작곡가 출신 감독들의 비율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음악감독의 역할론에 대한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결국 이러한 흐름이 전체적인 음악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음악감독을 맡은 작품에서 실제로 작품에 들어갈 곡을 쓰는 ‘작곡가’로서의 역할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의외의 학벌을 가지고 계신데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부모님의 지원은 어떠신가요? 수험생 시절 실용음악과 진학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 인문계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예술 분야는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우선 보험을 든다 생각하고 노선 변경의 옵션 좀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조언이었고, 저는 그 조언을 적극 받아들여 연세대 사회계열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후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늘 이것을 꼽습니다. 결국 너무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 ‘하고 싶은 일’ 이외에 ‘해야할 일’, ‘잘하는 일’ 등 좀 더 많은 영역을 경험하고 고민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무슨 일을 선택하더라도 더 큰 자산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쌓은 인문학적인 소양이 현재의 직업정신과 저의 음악가로서의 마인드에 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과정을 경험하고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팁을 주신 건 부모님이었으니 이후의 반대가 없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 관련 전공을 하지 않았는데 비전공자로서의 애로사항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비전공자로서의 기본적인 애로사항은 실제로 물리적인 ‘공부의 기회’ 자체가 적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전공이라는 것은 자의와 타의를 합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비전공자가 전공자와의 경쟁에서 순수하게 ‘공부’의 범주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타의의 영역까지 자의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하기 전 제 마음속에는 항상 어떤 핑계 같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비전공자치고 이 정도면 잘하는 것 아닐까?’, ‘어차피 음악은 공부보다 재능 아닌가?’ 이런 핑계가 정말 위험한 것은 결국 자기합리화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음악인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잘해서 더더욱 좋은 음악을 만들면 됩니다. 어느 분야에서도 그렇듯 제가 속해있는 이 분야에서도 아무도 비전공자라는 핸디캡을 경쟁에 적용해주지 않을뿐더러, 재능이 있다 해도 기술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재능을 쉽게 받아줄 만큼 직업전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냥 저는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비전공자치고’라는 핸디캡은 본인 스스로 떼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핸디캡은 그냥 두면 콤플렉스가 되고, 콤플렉스는 극복하지 못하면 히스테리가 됩니다. ‘전공으로서의 음악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것을 핑계 삼아 숨을 작정이라면 당당히 맞서서 이겨내는 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리고 충분한 공부를 하면 더 좋은 음악을 만들게 될 ‘확률’은 반드시 올라갑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업무 분야를 소화하고 있는데 업무량 자체가 버겁거나 정체성의 혼란이 오지는 않나요? 작사/작곡/연주 등 기본적인 음악 업무 이외에도 악기 관련 인터넷 방송의 쇼호스트를 맡거나 교본을 쓰는 등 다양한 업무 분야를 소화하고 있다 보니, 일하며 만나게 되는 주변 분들이 저의 정체성을 처음 볼 때의 한가지로 인지하셨다가 다음에 역할이 바뀐 상태에서 만나면 헷갈리거나 당황하는 반응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 작곡가 아니셨어요?’, ‘어? 기타도 치세요?’ ‘혹시 무슨 인터넷 방송 같은 것도 하지 않으세요?’ 제가 자주 듣는 말들입니다. 매주 정해진 일정이 있는 촬영 관련 업무들을 제외하고는 늘 그때그때 가장 바쁜 업무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 덕분에 시간표와 동선은 매일 제각각입니다. 쇼호스트로 홍대에서 촬영을 마치고 기타 세션으로 신사동의 스튜디오에 연주하러 갔다가 보컬 디렉팅을 하러 성수동 녹음실까지 하루 안에 다녀와야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음악을 맡은 작품의 마감을 맞추기 위해 작업실에서 쪽잠 자며 2~3일씩 두문불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 때도 많지만 오히려 더 다채롭고 알찬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어서 저는 전반적으로 이런 삶의 방식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우 – 토끼와 거북이 (Narr. 김희철, 윤태진, 슬리피) Official M/V 일러스트 임현진, 영상 안지훈. 2019.5.20 발매. 지난 달 싱글앨범 '토끼와 거북이'를 발매하셨습니다. 김희철, 윤태진, 슬리피가 참가한 화려한 피처링진으로 주목을 받았는데요. 탄생 비화를 설명해주신다면.
제가 음모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뻔한 이야기를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거나 말장난으로 의미부여 하거나 하는 짓들을 매우 즐겨합니다. 토끼와 거북이도 어느 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혹시 거북이가 실제로는 아주 나쁜 놈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거북이의 실체를 감추고 토끼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거라면?’이라는 황당한 음모론이 나오면서 시작된 이야기였죠. 처음에는 이솝우화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 별주부전까지 이어붙이며 현재의 스토리라인을 갖게 됩니다. 피처링에 참가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인입니다. 주인공인 거북이 역할을 맡아준 슈퍼주니어의 김희철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어느덧 햇수로 24년 차 오랜 친구로, 바쁜 스케줄을 쪼개 큰 도움 주었습니다. 래퍼 슬리피는 제가 대중가요가 주업무였던 시기에 같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동료이자 친구이고, 토끼 친구들 거북이 친구들 모두 음악계와 연예계의 친한 지인들입니다. 딱 한 분, 윤태진 아나운서는 원래 친분이 없었는데 제가 적극 섭외요청을 드려 수락해주신 케이스입니다. 섭외에는 당연히 개인적인 팬심도 있었지만 극중 토끼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드린 요청이었고, 결과적으로는 가장 최적의 토끼 캐릭터가 탄생한 거 같아 작품자로서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노래의 특성상 수많은 내레이터들이 따로 작업실을 방문해야 해서 노래 녹음보다 연기를 녹음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다들 본업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녹음이다 보니 좌충우돌 실수도 많고 재미있는 장면들이 영상으로 많이 남았습니다. 앞으로 순차적으로 각 배우별 메이킹도 공개할 예정이니 오랫동안 재미있게 지켜봐 주시고 즐겁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다음 달, 지상파와 종편 포함 총 세 편의 드라마의 음악을 준비 중이고, 9월까지 지상파 3사의 다큐멘터리 스페셜 및 예능 파일럿 작업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즐겁게 방송 보시면서 가끔 한 번씩 음악에 귀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토끼와 거북이가 포함된 8~9곡짜리 개인 정규 앨범도 올해 안에 발매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제가 사람들에게 들으면 가장 기분이 좋은 평가로 늘 꼽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너 참 재미있게 산다.'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저에게 참 재미있어서 행복하고 행복해서 더 재미있습니다. 언제가 먼 훗날에 제가 음악 참 잘했던 음악가로, 늘 재미있게 사는 괜찮은 인간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인터뷰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전하며. 늘 음악이 함께 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인우 영상 제공: YouTube 'PARKINOO' 공식 채널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