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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보도국 기자 <염규현>7/16/2019 과학자가 꿈이었던 고교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라디오 DJ를 꿈꾸던 청년시절엔 외무고시를 준비하다가 기자가 되었다. 뉴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MBC <뉴스데스크>의 뉴스 속 뉴스, <로드맨>!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MBC 보도국 <뉴스데스크> 편집팀 기자 염규현 기자. 그와 함께 '취재진담'을 나누어보았다! 공식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MBC 문화방송의 기자 염규현입니다. 지금은 MBC '뉴스데스크'의 <로드맨>이라는 코너에서 ‘로드맨’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독자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MBC 보도국 기자로 입사한 지 년 수로 10년째이십니다. 만 29세에 입사하셨는데요. 의외로 늦은 나이에 언론고시를 준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기자가 꿈은 아니었습니다. 엉뚱하게도 저는 언론고시 이전, 외무고시를 3년간 준비했었습니다. 사연이 꽤 길죠. 그런데 올해로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었으니, 사람 운명이라는 게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로에 대한 방황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사도 늦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과학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과학부장도 지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과학실로 항상 갔죠. 동아리방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검법남녀> 같은 드라마 범죄 수사물에 가끔 나오는 혈흔 반응 실험인 ‘루미놀 실험’, ‘아스피린 합성’ 같은 실험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과학실에서 친구들과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개인적 흥미 때문에 공부보단 과학부 활동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입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학원 가는 시간 외에는 과학실에서 살다시피 했었거든요. 이렇게 화학실험에 흥미를 느껴 자연스럽게 이과로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이렇게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도 과학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요. 고3 때, 연세대학교 화학과 수시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지금 기억에도 저는 다른 지원자들과는 차별점이 확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다른 지원자들은 화학 경시대회 같은 것을 준비하는 특목고 출신 과학 특기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그런 수상 경험은 전혀 없었고, 그저 과학 동아리에서 취미생활 일부로 주로 화학실험을 즐겼다고 원서에 적어냈으니, 교수님들이 볼 때는 생소한 지원자였을 겁니다. 어찌 보면 아마 수시모집 도입 취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하지만, 저는 면접에서 학부 수준의 화학 이론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선행학습’이 전혀 안 된 상태였습니다. 반면, 실험과 관련된 질문은 술술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했던 실제 경험을 털어놓는 거니 너무 쉬운 일이었죠. 그렇게 저는 수능 성적 상위 10%의 성적을 받아오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가받았습니다. 조건부 합격이어도 할 건 다했었습니다. 수능 응시도 전에, 등록금도 냈고, 오리엔테이션도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 제가 고등학교 시절 생각했던 화학 공부와 대학에서 배우는 화학 공부는 천지 차이였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화학이란, ‘재미있게 실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학 학부의 ‘일반화학’만 비교해도, 복잡한 ‘수학’은 물론이고, 방대한 ‘이론’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 산더미였습니다. 저에겐 큰 부담이었죠. 게다가 교재는 죄다 원서로, 모두 영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땐 정말 숨이 ‘턱’ 막혔습니다. ‘취미와 전공은 완전히 다른 거구나’라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속이 답답하고, 소화도 잘 안 됐습니다. ‘이걸 평생 할 수는 없겠구나’ 직감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2001년, 역대 최저 난이도의 수능시험 문제가 출제되면서, 전국 응시생들의 평균 점수가 급상승했습니다. 만점자도 수십 명 속출했었죠. 반면, 고3 때부터 이미 대학 캠퍼스를 기웃거리던 제 점수는 제자리였습니다. 10.2%가 나왔습니다. 실수로 틀린 문제 한, 두 개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더군요. 그렇다고 변명이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결과는 결과대로 받아들여야 했죠. 바로 불합격 처리됐고, 가을에 미리 냈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도 바로 환불됐습니다. 며칠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건 뭔가 하늘의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잘못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떨어질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런 식으로요. ‘자기합리화’ 내지, ‘인지 부조화’일 수도 있었지만, 재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문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길이 막히면 근처를 서성거리기보다 새길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운명을 맞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과에 있다가 문과로 가니 수능 준비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삼각함수 미적분’ 같은 수학과 과학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목표는 자연스럽게 지난해 입학이 좌절된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등록금을 환불받았던 계좌에 다시 등록금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친척분 중에는 제가 이미 수시로 대학에 붙은 줄만 알고 계셨던 분들도 계셔서, 그냥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재수하면서 좋은 친구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서 도움을 받고, ‘제자리’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화학과가 아니라 문과 쪽이었죠. 처음에는 전공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학부제로 선발을 해서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회계열로 진학했습니다. 사회계열은 상경계와 사회과학 쪽에 모두 진학할 수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습니다. 저는 이과 출신이니 수학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상경계로 진학하면 도움이 될 거란 막연한 생각으로 경영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취업이 잘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기도 했고요. 또, 경영학과는 그 안에서도 진로가 다양하니까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경영학 또한, 전공으로 선택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 취업할 수 있다는 건 어디에서나 흔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영학과는 재무면 재무, 마케팅이면 마케팅, 이렇게 특정 분야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즉, 본인이 깊이를 만들지 않으면 알아서 지식이 따라오지는 않는 구조였습니다. 성격상 오지랖이 넓은 저로서는, 한 분야를 선택해서 깊이 파고든다는 것 자체가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경영학은 실용학문이어서 다른 학문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문학·사학·철학’과도 거리가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회계 같은 과목은 학점 따는 게 피로했습니다. 계산기 두들겨 가며 장부를 맞추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외교 통상학을 연계전공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2005년 군 복무 중, 우연한 계기로 KBS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대한민국>에 출연했는데 얼떨결에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시간은 40분이 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도 반향이 엄청났습니다. 지금이 인스타 시대라면, 그때는 ‘싸이월드’ 시대였는데, 당시 미니홈피 일일 방문자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이 ‘일촌 신청’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제가 군 복무 중이었던 소방서에 사인을 받겠다고 온 여중생도 있었고, 노량진 수산시장 생선가게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께서 제 방송을 보고 수백만 원 상당의 책을 제 앞으로 기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반향이라는 게 군 복무 중인 일개 대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의 파급력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 잠깐 나왔다는 데도 이 정도인데, ‘방송을 평생의 본업으로 삼으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일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방송을 만들면 그만큼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였습니다.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라디오 DJ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라디오 DJ는 일단 생방송을 진행하니까 청취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대중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매력을 느꼈습니다. 또한, 얼굴이 안 나오니까 편하게 떠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DJ가 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전국 DJ 전수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지상파에서 활동 중인 DJ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조사해보니 크게 네 부류로 나뉘더군요. 첫째는 주로 밤 10시에서 자정 사이에 많이 활동하는 연예인. 둘째는 주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등에 많이 출연하는 분야의 박사(전문가) 혹은 대학교수. 셋째는 새벽 시간이나 출근길, 심야 라디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그리고 방송기자였습니다. 방송기자는 드물긴 하지만 주로 라디오 뉴스를 진행했습니다. 결국, ‘이 네 직업 중 하나가 되어야 DJ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우개를 들고, 네 개의 직업 리스트에서 맨 처음 ‘방송기자’를 지웠습니다. 라디오 뉴스 진행은 DJ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기자는 ‘취재’라는 별도의 다른 업무가 있으니, 제 니즈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연예인’을 지웠습니다. 그냥 연예인이 되는 것도 힘든데, DJ 한번 해보기 위해, 전역한 복학생이 갑자기 노래나 연기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연예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상,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대학교수’나 ‘박사’는 그나마 무난해 보여서 좋아 보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DJ가 되려고 지금부터 십수 년을 공부에 투자하기엔 시간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니 한 개의 직업이 남았습니다. 바로 ‘아나운서’였지요. 그래서 처음엔 아나운서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가진 여러 현실적인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아나운서가 되는 게 그나마 라디오 DJ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같았어요. 망설이지 않고, 그해에 바로 MBC 아나운서 시험을 봤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은 필기와 서류심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1차에서 카메라테스트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저도 가서 한번 경쟁자들을 만나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참가하여, 카메라 앞에 서본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올림픽 정신’으로 참가했습니다. 시험 봤던 감독관이 당시 초년병 아나운서였던 오상진 선배였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장에 가보고 두 가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일단, 미남미녀가 정말 많았었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정말 주눅이 들 정도로. 어찌나 다들 잘 생기고, 키도 큰지, 풀 메이크업에 다들 차려입고 오니, 아무 준비 없이 간 저는 더욱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저에게 좌절을 안겨준 것은 아나운서 시험 지원자들의 상당수가 이미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이거나 과거 어느 경로로든 아나운서 활동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지역 방송사의 현직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 분들이 시험에 참여하셨었습니다. 현업에 계신 분들이다 보니 방송 능력이 출중한 것은 당연했고요. 옆에서 연습하는 모습만 봐도, 아무런 연습 없이 온 제가 그분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만에 하나라도 아무런 노력 없이 저분들을 제치고 아나운서가 된다면, 그것이 ‘사회 부조리’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1차 시험장을 나서면서 깨끗하게 ‘아나운서’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도 내가 붙으면 안 된다고. 당연히 결과도 불합격이었고요.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데, 라디오에서 노정렬 씨가 하는 방송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어라? 저 사람 누구지? 내가 못 들어본 사람인데….’ 하며 검색을 해보니, MBC 공채 개그맨이더라고요. 제가 분류한 네 가지 유형의 DJ에 속하는 직업군인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연예인이었어’라는 생각을 했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제가 접했던 라디오 DJ들은 대개 유명 연예인인 경우가 많았었는데, 노정렬 씨는 개그맨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뭐랄까…. 톱스타는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전혀 없는 신인은 아닌, 좀 애매한 느낌? 그래서 다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사람이길래 DJ를 하는 거지?’ 그런데 알고 보니 노정렬 씨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다가 개그맨 시험을 봐서 합격하셨더라고요. ‘와…. 역시 고시 합격자라는 후광이 영향을 줬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거다’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쟁쟁한 경쟁자들과 사이에 서 있어 어렵지만, 만약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아나운서 시험을 본다면, 아마도 노정렬 씨처럼 차별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공법으론 어려우니 돌아가기로 한 거죠. 그렇게 이번에도 정반대의 길로 돌아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날로 ‘외무고시반’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인생이 180도 달라졌죠. 화려한 방송국 입사를 꿈꾸다가 속세와 연을 끊고, 돌연 ‘고시촌’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고시가 최종목표가 아니라 중간 거점이 된 이상 이번엔 무슨 고시를 볼지가 고민거리였습니다. 어차피 고시는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사법시험은 단번에 포기했습니다. 공부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 보였어요. 두 번째로, 행정고시를 살펴봤는데 재경직은 경쟁률이 너무 세 보였고, 일반행정 직렬은 필수과목인 행정학 같은 학문이 좀 재미도 없고 답답하게 느껴져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건, 외무고시뿐이었습니다. 외무고시를 공부하면,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외국어는 남겠구나’하는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외무고시의 수험과목이 시사영어나 국제법과 같이, 현실문제 관여도가 높은 과목이어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시류를 흐름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외무고시반은 들어갈 때도 시험을 봅니다. 그쪽에서도 처음엔 황당해 했습니다. 경영학과에서 온 수험생은 저 하나였고, 고시는 거점일 뿐, 목표가 ‘방송국 입사’라니. 가까운 선후배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재미있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고시 합격이 최종목표가 아니다 보니, 더욱 공부가 즐겁고, 수월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시와 인연을 맺고, 외무고시반에서 국제통상 직렬 2차 시험을 세 번 치렀습니다. 3년을 보낸 거죠. 특히, 두 번째 시험은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근소한 차이로 낙방이라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연세대 화학과 수시에 떨어졌을 때랑 느낌이 비슷했습니다. 원래는 2년 안에 고시에 합격하고,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려고 했던 건데,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대가 얼추 다 지나간 상태라, 제겐 시간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일단 한 해 더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째 고시 2차 시험을 치르면서 이번엔 MBC에 동시에 지원했습니다. 단,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기자로 지원을 했죠. 이번에도 방향을 살짝 틀었던 거죠. 아나운서 시험은 고시에 붙고 보려고 했는데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니, 차선책으로 필기시험을 거치는 방송기자 직에 직렬을 선택해서 한번 부딪혀 보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지금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3년간 준비했던 고시는 결국 낙방했고, 도리어 한 번도 준비하지 않았던 방송기자는 합격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방송기자’로서 인생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외무고시는 다른 고시와 다르게 현재 발생하는 현안들을 꾸준히 분석하고,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외신 기사들을 많이 번역하고, 비판적으로 작문해보는 공부를 통해 준비하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자연스럽게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가 병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침 그해에 출제된 MBC 논술 주제도 제가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였습니다. 운도 따랐던 거죠. 표면적으로 언론고시는 한 번도 준비한 적이 없었지만, 언론사에 입사하게 된 사연입니다. 길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3년간의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생활이 사실상 간접적인 언론사 입사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랑 한 교실에서 같이 공부했던 고시반 동료 중에 저 말고도 조선일보, SBS, KBS 기자도 함께 배출돼, 지금도 현직에 같이 있으니 외무고시반에서 했던 공부가 언론사 입사 준비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MBC 입사 후 바뀐 점은 무엇인가요? MBC에 합격하니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제가 방송 쪽에 관심이 있던 것을 알던 지인들은 결국 가긴 갔다면서 축하를 건넸고, 그걸 잘 모르고 고시반 생활만 알고 있는 분들은 완전히 다른 진로로 간 것에 대해 의아해하기도 했죠. 수습기자 시절, 군대만큼 엄격한 조직문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MBC 자체에 대한 충격이라기보다는 기자 사회 전반에 관한 충격이었죠. 미리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업계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다른 동기들은 비교적 잘 적응해 나간 것 같았는데,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사실 기자 사회의 생리를 전혀 모른 채로 입사한 것이라서 처음에 적응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제가 그때 왜 그랬나 싶은데, 수습기자 시절 선배한테 혼나다가 감정 소모로 울기도 했습니다. 기자 사회가 보고와 지시, 취재보고와 데스킹을 통한 수직적 구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가 높을 줄은 몰랐었습니다. 지금은 주 52시간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습기자들의 업무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는데, 당시의 저는 꽤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입사하자마자 선배들이 기사를 써보라고 지시를 하는 통에 당황한 적도 있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능숙하게 기사체로 써나가는 것 같은데, 저는 10장짜리 ‘빽빽이’ 고시 답안만 쓰다가 방송기사를 쓰려니 자꾸만 만연체가 되어서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언론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기자들은 ‘그냥 어디서 고급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정말 그 ‘고급정보’를 위해, 모두 발로 뛰어야 하고, 고집스럽게 매달려야 하고, 자기를 희생해야 얻어지는 성과물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자 생활에 대해 실망보다는 만족감이 더 컸습니다. 방송기자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항상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므로,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습니다. 방송의 특성상 압축적인 경험이 휘발성은 강하지만, 지나고 나면 기억에 하나하나 각인되는 느낌이 드는 데, 그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보통 술자리의 ‘무용담’이 되는 일들이죠. 공연 예술처럼 온종일 준비한 결과물을 뉴스에 쏟아내고, ‘툭’ 털어버리는 것이, 무덤덤한 매력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쏟아 내리고 나면 허무할 때도 있지만, 또 타고 싶은 롤러코스터 같은 일상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신문기사가 ‘산문’이라면, 방송기사는 ‘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문장에 본질을 압축해, ‘여운을 어떻게 남겨야 하나?’ 하는 고민도 시상을 떠올리는 것만큼 진땀 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입사 이후, 저는 다행히 한 번도 같은 부서에 두 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성 차원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작년에는 선거방송기획단에서 선거방송 경험도 해보았고, 이후에는 <로드맨>이라는 코너 개발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함께 해오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을 오늘도 쌓고 있습니다. 특히, <로드맨>을 제작하며, 새로운 뉴스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많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인터뷰 요청까지 올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MBC 입사 3년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셔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셨습니다. 외무고시반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UN 정본 언어 중 하나인 프랑스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저는 외교부가 아닌 통상교섭본부 쪽 직렬을 준비했습니다. 외무고시반 생활을 하면서 방송국 입사라는 다른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상 제2외국어의 공부를 시작할 엄두를 못내, 외무고시를 못 보고, 통상직렬을 선택했었거든요. 외무고시는 제2외국어가 필수지만, 통상직렬은 필수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외교관이 꿈인 고시반 다른 선후배들은 다들 제2외국어를 하나씩 꼭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프랑스어랑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때 풀지 못한 숙제 같은 부분으로 남아 있었고요. ‘언젠가는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마침 2012년 MBC 최장기 파업과 맞물려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파업 말미에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방송통신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함께 입학했습니다. 언어의 저변을 넓혀두면 나중에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연구 범위도 그만큼 넓어져서 취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방송통신대는 일하면서 공부하기에도 좋았죠. 입학 당시 목표는 원대했습니다. 다름 아닌, ‘레미제라블’의 프랑스어 원본을 읽는 것이었는데, 아직 그 수준까지 실력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졸업한 뒤, 다른 것들을 하느라 손을 놔버려서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또다시 프랑스어 실력 복원이라는 새로운 숙제가 남은 셈입니다. 방송통신대 불어불문학에 이어, 현재 연세대학교 법학대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십니다. 보통 언론학이나, 국문학 등 '기자' 활동이나 배경에 도움이 될 법한 전공을 택해서 공부할 듯한데, 어떻게 법, 그것도 전공을 '국제법'으로 선택하게 되신 것인지 의외인데요? 기자라는 직업은 첫 직업으로는 참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계와 벽이 명확해졌습니다. 바로 ‘메신저’라는 한계인데요. 기자가 아무리 그 사안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기자는 ‘관찰자’와 ‘메신저’에 그쳐야 하고, 메시지를 낼 수 있는 건 별도의 전문가가 항상 필요하다는 게 기자가 갖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기 분야에 독보적인 전문성을 쌓은 전문기자들도 지금은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제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별도의 공부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로 생각했고요. 사내에 석사과정 지원 프로그램이 있지만, 언론 분야 등 일부 관련된 전공에 한정해서 지원하기 때문에 연세대학교 국제법 석사과정은 자비로 밟고 있습니다. 국제법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재 진행 중인 논쟁거리와 관련이 깊습니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관계, 독도 영유권, 심지어 미세먼지 문제마저도. 우리가 만나는 국제적인 논점이 대부분 국제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고요.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역시 국제법의 한 분야인 국제통상법 관련 쟁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법의 재료는 매우 국제적이지만, 그 연구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국내적입니다. 쉽게 말해, 국제법의 실체적 근원은 국제 관계나 국가 간의 협의, 다양한 국제적 사건의 배경을 통해 이해하게 되지만, 그 법규를 적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국제법규를 ‘자국 이익의 관점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통찰하는, 연구가 따르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국제적인 주제를 국내적인 관점에서 국내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히 법리만 따진다면 이목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왜 우리 땅일 것인가?’ 따져봐야 국내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습니다. 일본 학자는 왜 일본 땅인지 연구하고, 우리 학자는 왜 우리 땅인지 연구하게 됩니다. 국제법은 학계에서도 학자들 수가 다른 전공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드문 데다, 앞서 말씀드린 국내적 성격도 있다 보니, 국제법 학자들은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국가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법은 ‘기자와 잘 맞는 학문 분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자들도 현재 벌어지는 어떤 논쟁거리를 자국 이익의 관점이나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일을 하니까요. 국제법규나 국제 질서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꾸준히 현재 벌어지는 논쟁거리를 따라잡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자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제가 학부를 마친 모교이기도 하지만, 국제법 교과서의 ‘대명사’인 ‘국제법론’의 저자, 김대순 교수님 등 훌륭하신 은사님들이 많이 계셨고, 통상법을 전공하신 박덕영 교수님께서는 제 결혼식 주례를 봐주시기도 하실 만큼, 제가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맺은 인연들이 있기에, 다른 학교는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조건 중, 학교가 회사에서 가까워, 퇴근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기에도 최적이기도 했습니다. 로스쿨이 도입된 이후, 법과대학 일반대학원 수업이 대개 밤 시간대로 많이 옮겨지면서, 일하면서 학업도 병행하는 것이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업 학자는 아닙니다. 이 때문에 제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선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제법 분야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공부를 놓는 순간 시류를 놓치고, 전문성을 이어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학위와 무관하게라도, 관련 분야 논문은 꾸준히 읽어보면서, 연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부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현시대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기자는 정보를 생산해 내는 것보다, 발 빠르게 ‘정보의 가치’를 판단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 정보’인지 골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성을 키운다는 것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밖의 분야에 대한 사각지대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관점에 너무 깊게 빠지면 다른 관점이 잘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 전공 두루 접해본 경험은 기자 생활의 자양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판단 기준을 제공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위 과정은 그 자체로 ‘지식의 증거’가 아니라, 지식을 ‘지속해서 쌓게 만드는 자극제’의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동기부여의 동인으로서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최근 MBC '뉴스데스크'의 '로드맨' 콘텐츠에 대한 반응을 실감하는지? 예전과 달라진 점을 체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 로드맨이다!’ 지난해 말, 서울 잠실역 어귀에서 누군가 저를 알아봤습니다. 생면부지의 젊은 남자였습니다. TV에 나간 <로드맨> 방송분(‘순한 맛’)을 유튜브용 예능 콘텐츠(‘매운 맛’)로 각색해 올린 지 보름 정도 됐을 무렵이었습니다. 연락이 끊어졌던 동창, 뜸한 친척한테도 잘 봤다는 문자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2010년 수습기자 시절, 뉴스에 출연하면 간혹 동네 아주머니가 알아보곤 했었는데요. 그때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사라졌던 경험이 유튜브 업로드와 함께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도 멋쩍게 인사를 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저를 봤다고도 했습니다. 저희가 올해 신년 기획으로 수도권 집중화 현상의 문제점을 조명한, ‘서울 공화국’ 편을 제작했는데, 초등학교 사회 수업시간에 이걸 선생님들께서 틀어주셨던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세 곳에서 <로드맨>을 봤다고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은 베트남에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휴대용 와이파이 장비를 반납하려는 데 근무 중인 직원분께서, ‘베트남 취재 잘 마치셨어요? 로드맨 잘 보고 있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네시더라고요. 유튜브 업로드 이전엔 없었던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쌓이다 보니, 문득, ‘그나마 이런 분들은 저한테 말이라도 걸어주셨지만, 말을 건네지 않고 어디선가 저를 슬그머니 알아보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고치게 되고, 거울도 전보다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약간의 MSG를 보태서, 이른바 ‘연예인 병’이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 일상의 변화 말고, 공적인 외출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AVEC G]를 비롯해서 ‘미디어오늘’ 등 여러 언론매체에서 저희 <로드맨> 팀을 인터뷰를 해주셨고, 각종 발표에도 초청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구글뉴스이니셔티브2019’에 초청을 받아 국내 업계 관계자들과 <로드맨> 형식을 공유할 기회를 얻었고, 교육부 산하기관에 추진하는 중고생 영상멘토링 멘토로 위촉되어, 동영상으로 지역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오는 7월 말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글로벌뉴스포럼(GNF)’에 초청받아, 각국의 보도 관계자들을 만나, <로드맨> 양식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어쩔 땐, 이런 경험이 좋다기보다는 두렵다는 느낌이 더 클 때도 있었습니다. 마치 ‘TV 시대는 끝났다’라고,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 제작팀은 ‘TV용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인데, ‘TV 밖의 채널’을 통해서 반응을 얻는다는 게 회사의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로드맨>이라고 하면 NBA 농구 선수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유튜브에서 <로드맨>을 치면 ‘데니스 로드맨’ 보다 먼저 나옵니다. 로드맨 첫 방송 이후, TV 본방송인 ‘로드맨 순한 맛’과 유튜브 <엠빅뉴스> 채널의 ‘로드맨 매운맛’ 콘텐츠를 합쳐, 100일 만에 누적 조회 수 100만 뷰를 넘겼고요. 다시 한 달 만인 2월 중순에는 150만 뷰, 2019년 7월 1일 현재는 320만 뷰를 넘어섰습니다. 정석 책에서 본 지수함수 그래프의 모습입니다. 이 중 80% 가까이는 유튜브용 콘텐츠인 ‘로드맨 매운맛’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저희 팀이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 공력을 더 들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처음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니 배꼽이 배가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입니다. <로드맨>에 최초의 '예능 뉴스'라는 타이틀이 붙었습니다. 혹시 원래부터 예능 쪽에 관심이 있었나요? 대학 시절, 무대에 서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군 입대 전에는 재즈댄스 동아리를 하면서 춤 공연을 해볼 수 있었고, 제대한 후에는 단과대학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수백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행사를 진행해보기도 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고 방송사 입사를 생각했기 때문에 대외 경험을 쌓기 위해 고시 공부를 하면서 학교 홍보대사라든지 학회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입사 후, 노래패 활동을 하며 또다시 무대에 서게 됐어요. 작년에는 우연한 계기로 예능 프로그램인 ‘구내식당’에 고정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요. 뜻하지 않게 예능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제 취미이자 특기가, ‘농담 따먹기’일 정도로, ‘말장난’을 참 좋아했습니다. 로드맨 PD를 맡은, 동기 남형석 기자가 저의 이런 캐릭터를 뉴스에 써먹자고 제안하기 전까지, 저도 이런 형태의 ‘드립’이 뉴스에 나갈 것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사실 제가 방송에서 건네는 농담 같은 발언들은 평상시에 일반 뉴스를 제작할 때도 늘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인터뷰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인터뷰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일상적으로 하던 말들이었습니다. 다만, 과거 뉴스를 제작할 때는 그런 부분을 촬영하지도 않고, 촬영되었더라도 편집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로드맨>에서는 대놓고 그런 모습을 담기로 하면서 인터뷰의 전과 후를 가감 없이 담아서 재미있는 부분을 포착해내게 된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제작하면서 힘들어진 것은 저희 팀의 김태효 카메라 기자입니다. 예전 같으면 필요한 인터뷰만 촬영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인터뷰의 섭외과정과 그 후의 만담까지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촬영 시간 자체도 길어졌습니다. 아마 인터뷰하는 모습 촬영할 때, 팔과 어깨가 정말 많이 아프셨을 겁니다. 처음 저희 <로드맨> 팀의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뉴스’를 해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기획을 시작했었어요. 기존 ‘뉴스판’에 작은 균열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앵커 발언으로 시작해 기자가 넘겨받는 기존 리포트 형식엔 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뭘 해도 기존 뉴스와 차별화가 어려웠었지요. 그래서 완전히 뒤집어 생각해 보니, ‘앵커와 기자가 심각한 얼굴로 멧돼지 뉴스를 전하는 연성뉴스는 하지 말자고 했었지?’라는 게 떠올랐어요. 실제로 파업 기간 뉴스 개선 방안을 논의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반성이 있었거든요. 그럼 반대로 ‘멧돼지처럼 활짝 웃으면서 심각한 뉴스를 전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뒤집어 생각해 본 거죠. ‘꼭 필요한 이야기를 웃기면서 전해보자’라는 식으로, ‘예능 형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식을 흔드니 그제야 작은 틈이 보였습니다. ‘예능형 심층 뉴스‘인 <로드맨>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처음엔 사내에서도 크고 작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것을 다 바꾸기로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죠. ‘저게 뉴스인가?‘ ’뉴스가 맞나?‘ ’뉴스 자막을 저렇게 써도 되나? ‘초기엔 저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선배들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해 주신 덕분에 다양한 실험이 가능했습니다. 일단, 몇 차례 방송 기회를 얻게 되었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의 형태를 차차 갖추게 되었습니다. 애초 2주에 한 번 편성하던 것을, 이제 매주 하나씩으로 방영하는 것으로 편성을 늘렸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안착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로드맨>의 슬로건이 '길 위에 답이 있다'인데, 그렇게 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얼마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당 대표와 유시민 작가가 차례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죠. 두 분 다 구독자 수도 많고, 인기도 많습니다. 이 두 달변가들의 ‘정책 토크’는 영향력이 상당하지만 여기서 중간이윤을 챙기는 방송사는 없습니다. 다 본인들이 스스로 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중립 지대도 없습니다. 이들뿐이 아니죠. 국회의원, 교수, 심지어 청와대도 자체 방송을 하는 시대입니다. 터치 한 번이면 뉴욕타임스 기사가 바로 번역되고, ‘트위터 눈칫밥’만으로 가동되는 이른바 ‘지진희 알림’이 기상청보다 한발 앞서 지진 속보를 전합니다. 이제 전문성과 정보 접근성 모두, 기자들이 누리던 특권은 소멸했습니다. 전화 몇 통 돌리고 ‘다 아는 척’해야 했던 기자들의 호시절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죠. 대신, 그 자리에는 ‘기레기 담론’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달랐습니다. 틈이 보였죠. 일단, ‘누구나’ 가볼 수 없습니다. 다들 바쁘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가본 사람은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본 곳에 대해서는 가본 사람이 ‘아는 척’할 자격이 조금이나마 생기는 거죠. 춥든, 덥든, 미세먼지가 많든 우린 ‘가봤으니까’.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까’. 현장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본대로, 들은 대로만 말하면 되니까요. 따지고 보면 언론의 본령인 거죠. 우리의 슬로건은 자연스럽게 ‘길 위에 답이 있다’로 정해졌습니다. 일종의 시대적 소명 같은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코너명은 <로드맨>(Roadman)이 되었습니다. 데니스 로드맨(Rodman)과는 스펠링이 다릅니다. 직역하면 ‘길+사람’입니다. 콩글리시죠. ‘로드맨’이라는 작명 아이디어는 저희 팀 동기 곽승규 기자가 냈던 거로 기억합니다. 로드맨이 기획된 문제의식 자체는 위와 같이 공유한 상태였어요. <로드맨>이 취재하며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위치 기록으로 다 측정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대략 2만 킬로 정도 다녔더라고요. 베트남, 베이징 출장까지 포함한 수치이긴 하지만 다 합치면 지구 반 바퀴 정도 돌아다닌 셈입니다. 최근에 기억에 남는 곳은 강원도 산불현장이었습니다. <로드맨> 형식의 특성상 슬픔을 다루기가 어려운 한계가 있음에도 용기를 내서 찾아갔던 현장이었는데, 생각보다 참상이 심각했습니다. 산 곳곳이 통째로 타버린 모습, 집과 지붕에 송두리째 녹아내린 모습 등이 충격적이었고요. 망연자실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로드맨>에 대해서는 '초 단위로 변하는 세상에 발맞춘 뉴스'라는 평이 많습니다. 심지어 '뉴스데스크에서 <로드맨>만 챙겨본다'라는 댓글도 있을 정도입니다. 새로운 뉴스를 찾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팩트’가 ‘마누라와 자식’입니다. 저희 유튜브 콘텐츠엔 이런 댓글이 많습니다. ‘예능인 줄 알았는데 뉴스네요’. 결국, 우리가 예능이 아니라 뉴스라는 걸 웅변해 주는 것은 ‘팩트’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능 형식의 뉴스에서 ‘팩트’를 자칫 부풀렸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거란 우려를 항상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통계 수치는 물론이고, 현장의 분위기나 인터뷰의 톤까지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전해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뉴스 형식을 깨고 나니, 오히려 정확한 ‘팩트’ 전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이템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이템 찾는 게 큰 스트레스죠. 일단 8분 전후의 분량이 나와야 하고,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므로 기존 언론 보도도 참고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는 논쟁거리는 없는지도 확인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생해서 만든 콘텐츠 조회 수가 잘 나오고, 재미있게 봤다는 댓글이 달리면 뿌듯합니다. 특히, ‘뉴스 원래 잘 안 보는 데 로드맨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같은 댓글이 가장 반갑습니다. 저희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맞는 경우인 것 같아서 더욱 뿌듯하더라고요. 저희 팀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맛집 탐방입니다. 어느 지역에 출장 가면, 그 지역에서 이름난 노포를 찾아갑니다. 재미도 있지만, 맛있는 것 먹으면, 스트레스도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로드맨>이 워낙 전국단위의 출장이 잦다 보니 가능한 일 같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들른 맛집에 가면 항상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관련 해시태그를 달아 올리는데, 이걸 보고 유입되는 팔로워들도 꽤 됩니다. 그래서 당분간 이 방법은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로드맨> 홍보 목적으로라도 맛집들을 찾아다닐 생각이에요. 공식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 저는 처음 목표했던 라디오 DJ가 되겠다는 꿈을 사실상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DJ가 되겠다고 했던 건 스튜디오에서 마이크 앞에 앉겠다는 뜻이었다기보다,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과 교감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라는 의미였는데, <로드맨>이라는 코너를 하면서, 최근에 과분한 피드백을 많이 받으며, 재미있게 일하고 있어요. 빠듯한 제작 인원으로 매주 아이템을 찾다 보면 막힐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막히면 돌아가라’라는 제 인생 좌우명을 따라 우직하게 가려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인 꿈이 있다면, 지금처럼 좋은 아이템을 선보이면서, <로드맨>이 업로드 되는 유튜브 엠빅뉴스 채널의 구독자 수를 100만 명까지 늘리고 싶습니다.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기적인 꿈은, <로드맨> 형식이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할지, ‘매뉴얼’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로드맨>이 개인 캐릭터의 힘을 빌려 연명하는 ‘1인 방송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2대 로드맨’, ‘3대 로드맨’도 나올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잘 갖춰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의사분이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명의라는 말을 싫어한다’라고 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깊이 공감했습니다. ‘명의’라는 호칭이 나온다는 건, ‘1인 플레이어’ 중심의, 편중된 후진적 시스템의 다른 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은 지치지만, 시스템은 지치지 않는다’라는 의사분의 일갈과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지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아마 그렇게 되면 형식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질 겁니다. <로드맨>이 예능 뉴스를 표방하며, 다소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뉴스 형식 파괴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저희 제작팀도 확신은 없습니다. 지난 9개월 동안, 서른 번 가까운 방영을 했지만, 매 순간 신약 테스트를 하는 심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될까.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항상 고민하죠. 모두가 우리처럼 뉴스의 틀을 깨는 게 능사는 아닐 겁니다. 다만, 중립 지대가 사라진 시대, 정규 편성이 무의미해진 시대인 오늘날, 방송 뉴스가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을지, 방송 기자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한 우리의 실험이 의미 있는 임상 기록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엠빅뉴스 <로드맨>, ‘구독’ 꾹! ‘좋아요’ 꾹! 부탁드립니다! * 본 인터뷰 기사는 방송기자협회 3.4월호를 일부 발췌, 인용하였음을 알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염규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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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W
9/30/2021 10:18:13 pm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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