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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음악 작곡가 <장석진>6/18/2019 출시된 지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된 비디오게임, '배틀그라운드 PUBG:비켄디'의 메인타이틀 음악! 듣기만 해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며 게임의 전조를 알리는 이 음악의 작곡가! 학부에서는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클래식과 국악, 영화음악,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방면에서 작곡가로 활약 중인 장석진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장석진입니다. 작곡가로서는 순수예술에서 대중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전통예술원에 작곡과에 출강 중이며 장신대, 가천대 작곡과 겸임교수 재직 중입니다. 작곡을 시작한 계기, 그리고 작곡가로서 발표한 가장 첫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클래식을 좋아하셨고, 부모님께서 두 분 모두 기타를 반주로 팝송을 부르시거나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저 역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저는 혼자 공상하는 시간이 아주 많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하는 건 많이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알려지긴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별로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늘 뭔가 끄적이거나 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무렵, 교회에 다니면서, 기타 연주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고, 화음의 기초적인 개념을 기타를 통해 알게 되어, 그 개념을 가지고 피아노를 독학으로 치기 시작했었습니다. 물론, 대학 입시 등을 위해, 피아노와 작곡 개인지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만에 쇼팽 에튀드를 입시 곡으로 아주 잘 연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내내 한 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6시간씩 연습했었으니까요. 이외에도 입시와는 상관없는 현대음악(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등 다양한 음악들을 열심히 듣고, 전자기타도 치고 여러 종류의 곡들도 써보곤 했습니다. 하루가 모자랐지요.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기보다는 그냥 음악에 빨려들어 갔던 것 같습니다. 이걸 해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안에 어떤 울림이 있는데 그걸 적고 싶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 말고는 당시에 저를 믿어 준 사람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작곡을 전공하겠다는 것에 대해, 다들 ‘뭐래?’하는 반응 같은 것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작곡을 공부한다는 건, ‘영혼과 마음속에 소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제대로 적어내는 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확히 적어내어야 그게 연주자들에게 전달되고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 될지를 깨닫는 과정. 물론, 그 이전에 자신 안에 그러한 의미 있는 소리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느끼고 있다면 말입니다. 저의 첫 작곡 선생님은, 서울대 작곡과 출신 작곡가로, 저의 입시를 맡아 가르쳐 주신 전순희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무렵의 학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일찍부터 작곡 관련 이론들을 배우는 친구들이 많았고, 저처럼 늦게 피아노를 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를 받아주셔서, 작곡과 화성학 그리고 나중에는 피아노까지 직접 지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선생님께선 저처럼 열심히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음악을 배우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고, 음악을 배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놀이였는데 말입니다. 처음 노래를 썼던 건 중학교 1학년이었고, 처음 기악곡을 작곡해서 연주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곡이었습니다. 그때쯤, ‘내 안에 있는 소리를 잘 적을 수 있을 거라’는 정도의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는 저 같은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꽤 괜찮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러나 16살 소년의 영혼으로 쓰인 엉성함이 묻어있는 곡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곡을 잘 쓰고 잘 연주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누가 와서 좋다고 해주면 기뻐하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네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에 가게 되었고 현대음악 작업과 영국 TV와 독립영화 그리고 무용음악 작품들을 위주로 작업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일을 해오다가, 2012년에는 여수 엑스포의 음악 감독 겸 작곡가, 오케스트레이터로 참여하였고, 이때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께서 주제곡을 부르셨는데, 마침 조수미 선생님 측 에이전시에서 데모를 들어보시고 음악이 좋다고 함께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 할 것을 제의하셨습니다. 그게 저의 첫 오케스트라 녹음 작업이었습니다. 세계 최대 PC게임 플랫폼인 스팀을 통해 얼리 어세스로 출시된 지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된 비디오게임, '배틀그라운드 PUBG:비켄디'의 메인타이틀 음악을 작곡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국 작곡가로는 최초였지요? 우선, 저는 게임을 안 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가끔 말씀하시는 일화가 있는데, 어릴 때 제가 집에 안 와서 온 동네를 찾아다니시다가 동네 오락실에 갔더니, 게임 오버 상태인데도 계속 화면에서 비행기가 총을 쏘고 있으니 제가 게임이 끝난 건 줄도 모르고 계속하고 있더랍니다. 워낙 오락실 같은 델 가보지도 않았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10여 년 전에 플레이 스테이션을 샀었는데, 며칠간 게임만 하게 되더군요. 흥미를 느끼게 되는 일은 ‘안되면 될 때까지’ 하게 되어서 지금도 아예 시작하지 않습니다. 게임 음악은 작년 2018년 초여름 무렵 의뢰가 와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유튜브에 제 음악을 올려 놓은 게 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런 음악을 쓰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게임 음악이라고 해서 특별히 일반적인 흥행성 영화음악과 스타일이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 많은 다양성을 가지려고 노력해 왔는데, 그 중, 스트레스를 푸는 마음으로 이런 부류의 음악을 쓰는 편입니다. 때려 부수고 리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몰아가다가 어느새 창공 위를 질주하는 기분 같은 것을 느낍니다. 클래식 작품에서의 큰 스케일을 쓸 때와 비교해본다면, 이런 부류의 음악은 드럼에 맞춰 헤비메탈을 마음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클래식을 작곡할 때는 어느 음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므로 작품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음악을 작곡 할 때도 전체 스토리와 수많은 디테일들이 연관성을 가져야 하므로 게임 음악처럼, 하나의 장면이나 분위기만 생각하는 작업은 그래도 부담감이 덜 한 편입니다. 제가 작곡한 비켄디의 메인 타이틀은 타이틀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의 진행과 구조를 제가 결정 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동안 나오는 음악의 경우에는 특정 구조를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관건은 그 구조 안에서 이미 크게 시작하는 음악이, 점점 더 웅장해지고 커져야 한다는 점이고, 그게 일반적인 음악 구조와 달라서 처음 작업 할 때는 다소 황당하다고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작년부터 테라(TERA)와 배틀그라운드(PUBG)등을 작업했고, 올해 출시되는 게임들도 몇 개 있는데, 요즈음은 거의 ‘게임과 게임 중간에 나오는 영상’에 대한 음악 작업이 많아서, 사실,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보자면, 영화음악 작곡과 차이가 없습니다. 영상의 경우는 레퍼런스 음악 없이 그냥 제가 생각하는 대로 쓰는 경우가 많고,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참고 음악을 보내주면, 최소한의 수준으로 참고 정도만 하고 작곡하는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참고할 음악이 너무 특징적이면, 그 특징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너무 분위기가 참고 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렇다고 그 특징을 멀리하려고 하면, 참고 음악과 너무 다르다는 반응이 오기 때문에 가끔 애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배틀그라운드 비켄디 타이틀 음악의 경우, 기밀 유지가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라, 한두 장의 사진과 글로 되어있는 설명, 그리고 몇 개의 레퍼런스 음악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던, 웅장하되 희망적인 부분이 필수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요구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피날레가 되는 부분의 진행을 먼저 작업하였습니다. 작곡 자체는 서너 시간 필요하였고, 이후로는 계속해서 조금 더 웅장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어서, 일반적인 음악이 가져야 할 음향 균형이 계속 초과하는 상태에서, 다시 또 몇 번의 초과 상태 끝에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리가 너무 큰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사실 들고요. 주변 분들께서 좋아해 주셔서 처음엔 저도’와~’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사실, 음악이 남는 것이지, 자신이 남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페라, 게임 음악, 영화음악, 뮤지컬, 클래식, 국악관현악, 현대음악, TV 드라마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크로스오버'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것이 작곡가의 처지에서는 한 장르에 몰두하기도 굉장히 힘든데 각종 장르를 넘나들며 작곡하는 것이 힘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대학교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이전의 예술가들은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림 중에서도 유화도 하고, 수채화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는데, 현대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조각가, 설치 미술가, 화가, 그리고 화가 중에도 유화 그리는 사람, 수채화, 수묵화 다 따로따로일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서 작곡과에 입학했습니다. 각자 자기 입장이 있겠지만, 저는 제가 들어간 대학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제 더 입시를 위한 음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내 음악이라는 걸 시작해 볼 수 있다는 마음이었고, 그때 결심했던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을 섭렵하고 ‘나만의 음악으로 만들자’ 였습니다. 그중에 즉흥 연주를 기반으로 하는 장르인 국악과 재즈는 나름대로 제외 대상이었지만, 영화음악을 하다 보니, 재즈라기보다는 Jazzy 한 수준의 음악들은 쓰게 되었고, 국악마저도,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신동일 선생님의 소개로 서울시 국악관현악단과 재작년부터 처음 국악 곡을 작업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쓰는 국악 곡이 관현악 작품이라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를 다루는데 익숙한 편이어서, 국악 관련 서적 등 자료를 찾아 생각보다 즐겁게 작업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원 여러분들이 한분 한분 따뜻하게 조언해주셔서 정말 행복한 첫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하고 싶은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저 자신이 정말 다양한 음악에서 감동하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브람스를 온종일 들으며 감동하는 날도 있지만, 어느 날은 슬픈 가요를 들으며 눈물 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힙합을 들으며 리듬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고, 메탈리카를 귀에 꽂고 머리를 흔들고 싶은 날도, 또 어떤 날엔 클래식 피아노가, 어떤 날엔 뉴에이지 피아노 음악을 듣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중국, 일본의 전통 음악, 또는 동유럽의 민요 같은 것이 듣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 음악들은 각기 다른 감성을 표현하거나, 같은 감성을 ‘때로는 크게, 때로는 미묘한 차이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제게는 크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 내가 듣는 여러 음악에서 개인적으로 만족하지 않는 무언가를 채우고 비우고 하면서, 내가 듣고 싶은 무언가를 써 나가기 위한 열망 같은 것인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 다양한 음악들을 통해 각각 나의 이야기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각각의 장르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음악을 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현대 시대에는 다양한 음악이 공존합니다. 단순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아니라, 온 시대의 음악이 일시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없던 현상입니다. 고전이나 낭만, 근대음악의 작곡가들은 각각 ‘자신이 속한 시대가 추구하는 새로운 음악’을 쓰면 되었고, 자신이 속한 시대의 작곡가들과 경쟁하였습니다. 지금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중세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작곡가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경쟁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어쨌든 청중은 이 시대에 만들어지는 음악에만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요즘, 70, 80 심지어는 90년대 가요도 사람들이 열심히 찾아 듣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다양한 음악을 쓰는 것은 제 생각에는 숙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많은 음악을 통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사는 음악가라면, 무언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꼭 한 가지 수단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쩐지 하나의 틀에 매여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쓴다는 것은 ‘각각의 장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화음악 작업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요. 단적인 예로, 굉장히 섬세한 장면에서 커다랗고 웅장한 음악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자주 그런 일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율동적이고 웅장한 음악보다는 섬세한 음악이 훨씬 더 정교한 작업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그보다는 더욱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음악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오래 가슴에 남겨지는 음악은 그런 깊음과 미묘함을 보여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장르를 대할 때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 어떤 것을 진정시킬 것인지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흘러나오는 대로 모든 것을 쓰는 것은 작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버리고 고치고 잘라내고 다시 붙여 보는 것은 소설 작업과도 같고, 영상작업과도 같습니다.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지금 하는 작업이나 작품에 적절한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합니다. 작곡하고 발표한 많은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지난해 발표한 가곡 앨범, ‘별 헤는 밤’이 아무 군더더기 없이 저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그냥 나 자신 인 거야’ 하고는 왠지 벌거벗은 느낌이 들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영국에서부터 친하게 된 바리톤 임창한 이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깊은 울림을 마음으로 표현할 줄 아는 성악가이고, 제 음악을 사랑해주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재작년 가을 무렵에, 그 친구가 제게 어떤 이유로 꼭 가곡을 써 보라고 해서 그때 여러 곡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써야 해서 쓴 곡들이 있었고 그렇게 한 두 곡을 연습 삼아 쓰다 보니,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야겠다 하면서 제 안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음악이 ‘별 헤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과 겨울에는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 버젼으로 연주가 됩니다.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해서 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영국 합창단원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번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요? 이제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오페라 소서노의 공연과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작업한 일레트로닉스 협주곡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입니다. 소서노의 경우, 저의 첫 오페라 작품이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소서노 대본을 위한 오페라 작곡 공모에 작곡가로 당선된 작품이었습니다. 5년 전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쓴 작품이었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했던 작품이었고, 함께 준비했던 성악가 선생님들과 너무나 행복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준비했던 작품입니다. 일렉트로닉스 협주곡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제가 일렉트로닉스 파트를 협연하였는데, 25분 길이의 대곡이었고, 제가 늘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통합된 음악 형태의 작품이었습니다. 늘 생각하던 것이, 국악관현악과 서양 오케스트라 그리고 전자음악(표본, EDM, IDM) 등 다양한 소리 들을 각각의 악기가 가지는 개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작품을 써보는 것이었고, 연주자로서도 무대에 서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천지회귀단일점(天地回歸單一點)은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의 점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무절제한 개발과 자연에 대한 훼손’ 그리고 ‘우리가 되돌려 받게 될 그에 관한 결과’를 음악을 통해 말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음악가는 음악만으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음악가로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음악을 통해 말하는 것이, 저 자신의 의무라는 생각이 40대에 들어서서 제 안에 자리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 졸업 후, 영국으로 떠나셔서 현지에서 무려 12년간 학업과 작곡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본인에게 영국은 어떤 의미가 있는 나라인가요? 저는 교육 시스템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만, 영국이 한국보다는 훨씬 자유롭겠죠. 본인이 좋아하는 과목들을 선택할 수 있다든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사실, 저는 한국에서 이미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에 간 것이기 때문에 영국 교육 시스템과는 별로 큰 연관이 없습니다. 석, 박사 과정은 혼자 공부하는 기간이니까 더욱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의 삶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피아노를 치고 소리를 찾아가는데 온종일 보내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과 공유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자칫 허무맹랑한 꿈을 마음에 품고, 그냥 그날그날 음악만 생각하고, 품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많은 일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학생들은, 당시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 부모, 가족, 친구 그리고 생업 등을 감당하기 위한 어려움이 늘 있습니다. 그런 일상의 일들을 감당하되,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고 가능한 한 자주 일상을 벗어나 그 자리로 늘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영국에서의 12년은 굉장히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성경적으로 12년이라는 기간은 단련의 기간이더군요. 제게 있어서는 제가 상상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그대로 적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을 땐, (12년간, 한국에 들른 시간이 모두 합쳐도 두세 달 정도였고, 귀국하기 전에도 7년 동안 한 번도 와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알던 영화 하던 사람들이라던가 모두 연락처도 모두 바뀌고) 그야말로 혼자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2년 무렵엔 페이스북 같은 것도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019, 018, 011로 시작하는 번호들을 사용했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고생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고, 곧 오페라 공모에도 당선되고, KBS교향악단 신진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국악관현악 작품도 여러 번 위촉되어 공연했고, 게임이나 드라마 작업, ‘수심가’ 같은 실험적인 음악들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기게 되고…. 영국에서의 12년은 그런 것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다음 달부터 방영하는 tvN 정치 드라마, MBC 문화방송의 사극 등 세 편의 드라마 음악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8월에는 제주국제관악제에서 위촉 작품이 연주되고, 10월에는 남한산성에서 백제에 관련된 오페라 쇼케이스를 공연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가을, 겨울 두 차례, 앞서 말씀드린,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 연주되고요. 또한, 가야금 연주자 이수은 씨와 앨범을 준비 중이고, 몇몇 국악 앙상블 위촉을 받은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렉트로 어쿠스틱 앨범을 준비 중인데, 지금까지 저는 실험 음악이라는 장르들이 너무 실험에만 치중해 있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소리의 실험이 실험 그 자체에 치중하지 않는, 음악 안에서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그런 음악을 그려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을 생각해본다면, 매일 그때그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음악을 쓰고 자주 작품을 연주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화도, 오페라도, 국악이나 클래식, 실험 음악 등도 계속해서 할 수 있고, 음악을 통해 저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음악가로서, 사람으로서,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장석진 개인 유튜브 채널: 바로가기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장석진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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