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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경험과 상상' 대표 <류성>

7/3/2019

 
국립대 법학대학을 졸업했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대학로에 입성해, 현재는 극단 '경험과 상상'의 대표로서,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고, 직접 극작을 하며, 연기도 하는, 다재다능한 연극인! 류성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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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을 하는 류성입니다.
 
류성이란 이름은 연극을 하면서 쓰는 필명이자, 예명입니다.
동생이 취미로 사주를 공부했는데, 제가 木의 기운이 너무 강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동생은 처음에는 ‘개명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저는 예명을 선택했습니다.
 
직업을 얘기할 때는, ‘연극을 한다’라고 소개합니다.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극작도 합니다. 때때로, 조명이나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전문적인 건 없고, 다 조금씩 합니다.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그런 제가 좋습니다.
 
현재 ‘경험과 상상’이란 극단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올해로 5년이 되었네요. 처음 극단 일 말고 부업도 종종 했는데, 최근 2년은 오로지 극단 관련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극단이 점차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아빠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중학생, 둘째는 초등학생이에요. 첫째는 어릴 때 제가 많이 돌봐줬는데, 둘째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어느새 아이들이 부쩍 커버렸는데, 속상하더라고요. 점점 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알아서들 하니까.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부 입시를 준비하여, 수많은 유명 배우와 연예계 종사자들을 배출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2년 만에 중퇴하고, 11년 후, 극단 경험과 상상을 창단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해 뭔가 비판적인 생각이 많았나 봐요.
고등학교 시절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법대를 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싶었어요. ‘악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법대에 진학하니, 제가 기대했던 학업과 많이 달랐기에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니까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법조계에 대한 환상도 자꾸 깨져 갔어요.
제가 동경했던 ‘검사’에 대한 꿈이 너무 순진하고 유치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렇다 보니 고통스러운 사법고시 공부에 뛰어들 자신도 없었습니다.
 
대신, 풍물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동적인 타악을 치고 있으면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좋았어요.
게다가 멋진 선배들이 많았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품성도 다른, 소위 ‘운동권’ 선배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개념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어요.
풍물을 하다 보니, 마당극을 할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저는 마당극이 풍물보다 더 좋았습니다.
풍물이나 무용과는 달리, 연극은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극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고, 구체적인 인물이 있고, 그를 대변하는 대사가 있잖아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던 저는, 그런 마당극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한참 연극의 매력에 빠져있다가, 입대하게 되었는데,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대부분 연극에 관한 책들이었어요. 책마다 손때가 탈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연극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 후, ‘앞으로 연극을 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니, 부모님은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도 너무 죄송하지만, 당시엔 매일 부모님과 싸웠고, 부모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꼭 해야겠더라고요.
대신, 일단 법대를 졸업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시생으로 신분으로 돌아가서 준비 기간을 거쳐, 연극영화과에 시험을 봤습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지만, 얼마 다니진 못했어요. 학교에 다니며 배우는 것도 좋지만, 연극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며 배우는 것이 더 좋았거든요. 몸도, 마음도, 뜨거웠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나중엔 아예 등록하지 않았고, 결국 미등록으로 제적되었어요.
아쉽게도 같은 과 사람들과 맺은 인연이 없습니다. 그때는 ‘그게 맞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후회가 됐어요.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거든요. 그러나, 그때는 결혼도 했고, 첫째도 태어났어요.
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시험 전날, 첫째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어요. 시험 내내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시험 도중 퇴실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젠 정말 되돌릴 수 없는구나’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후부터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학로 외, 여기저기를 다니며 ‘떠돌이’처럼 연극을 했어요. 실로, 대부분의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작품하면서 만나고, 끝나면 또 헤어지고. 다시, 다른 작품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러면서 오래 알고 지내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이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 사는 얘기도 하고, 회포도 풀고. 그 모임이 ‘경험과 상상 파티’였어요. ‘서로의 경험도 나누고, 뭔가 상상도 해보자’ 이런 뜻이죠. 근데 술도 여러 번 먹으면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가끔 세미나도 하고 연기 워크샵, 극작 워크샵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것도 여러 번 하면 지겨워지거든요. 그러다가 ‘차라리 우리끼리 공연을 해보자’라는 의견을 내게 되었어요. 다들 인지도가 높은 연기자들이 아니니까, ‘우리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라는 취지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편, 세 편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식 극단을 만들자’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땐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제가 겁이 났어요. 처음 술 마시는 모임을 제가 만들었으니까, 제가 대표를 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몰아져 갔는데, 대표라는 일을 잘할 자신도 없고, 맡으면 뭐가 고생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싫다고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과 기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떠밀려’ 저는 극단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극단의 대표가 된 것은 ‘장남 콤플렉스’와 같은 것과도 관련되는 것 같아요. 동생이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어릴 때부터, ‘첫째 노릇을 잘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강박을 가지고 자라왔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나이보다 어른스러워야 하는’, 그런 강박에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별달리 사고를 친 적도 없어요. 그리고 누군가 저한테 어떤 부탁이나 기대를 하면, 그것에 대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거절은 잘 못 했습니다. 일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잘 해내야 한다’라는 자신의 압박이 심한 것 같아요. 이런 제 모습에 대해, 저는 잘 몰랐는데, 오래 지내본 동료들은 다들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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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을 창단하고, 지난 5년 간 대표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과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30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극단 식구들이 60명에 가까워요.
50대부터 20대까지 나이도 다양하죠. 우리는 자주성, 자립성, 수평적 관계에 기초해서 운영하려고 해요.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도저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계속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맞는 것 같기에, 그걸 보고 가는 거죠. 대신, 그에 반해서 추구하는 작품의 색깔이나 예술적 특징 같은 건 없어요. 그것은 예정해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10년쯤 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과 예술적 특징에 대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게 항상 고민이고, 지금도,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극단만의 공간’이 없었어요.
연습실을 빌려서 작업하고, 극장을 빌려서 공연하고, 그렇게 3년을 보냈습니다.
공연 하나 끝나면, 다음 공연할 때까지 흩어져 있게 되니까, 응집력이 강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공연도 자꾸 많아지면서,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작업을 자주 하게 되니까, 더 절실해진 거죠. 기왕이면, ‘극장을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로는 너무 비싸기도 하고, 살아가는 리듬이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외각을 찾게 되었습니다. 영등포구 당산동에 괜찮은 지하 공간이 있었어요.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상가였는데, 넓고 저렴했어요. 건물주와 마찰도 없을 것 같았고요. 특히 제가 좋았던 건, 주변이 조용하고 한산하다는 거였어요. 보증금과 공사대금을 마련해야 하니까, 저랑 단원들 다섯 명이 각각 1천만 원씩 대출을 받았어요. 그 돈, 아마 돌려받기 힘들 거에요. 돌려받을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요.
 
‘극단만의 공간’인 극장을 2년 남짓 운영했는데, 정말 좋아요.
상시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공간이 있으니까 작업하기가 너무 편하고, 쉽습니다.
공간이 극장이니까,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것도 편해졌어요. 대학로가 아니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걸 상쇄하는 장점이 훨씬 더 많으니까. 일단 전문 연극인이 아닌 관객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전에는 ‘내 마음의 관객이 전문 연극인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엔, 그런 관객들한테 인정받는 게 목표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연극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날까’하는 고민으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느슨한 네트워크 모임이었던 우리 극단이, 이젠 자기 공간을 기반으로 단단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어요. 함께 작업하는 동료에서 이젠 점점 한 식구가 되어 가는 느낌. 그래서 더 깊어지고, 더 오래갈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겨요.
 
바로 직전, 극단의 전용 극장을 마련하며 생기는 장점을 말씀드렸지만, 실은 항상 살얼음을 걷는 느낌이에요.
물론 돈 때문이죠. 연극을 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간이 있으므로, 매월 고정적으로 꽤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극장 대관을 자주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작업하는 공간으로 자주 쓰기도 하고, 대관을 주면 우리 단원들이 오지 못하기 때문이죠. 다행히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는 있는데, 극단 통장 잔액에 빨간불이 들어올 때도 종종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극장에 대해 장점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많아요. 시설을 관리해야 하니까. 행여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불이 나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은 물론이고, 건물이 낡아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하는 일도 자주 생기고. 잠깐씩 빌려 쓸 때는 알지 못했던 수고가 낯설 때도 많아요.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극단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작품의 연출을 맡기도 하고, 극본을 직접 쓰기도 하고, 연기하면서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대표, 연출, 작가, 배우 중 '류성'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하고, 돋보이게 하는 직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처음엔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연출할만한 작품이 없는 거예요. 기존 희곡들이 재미도 있고 좋지만, 저는 경험이 없으니까 자신이 없고, 잘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어요. 최소한 내가 쓴 거니까 그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곧, ‘배우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연출도 못하겠구나’, ‘직접 연기를 해보지 않고서는 좋은 문장을 못 쓰겠구나’라는 생각에 연기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이것저것 다 하게 된 거죠. 객관적인 조건들도 있었습니다. 연극은 산업화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고도로 분업화되기 어려워요. 그러므로, 저처럼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전문가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라고. ‘총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전문성’,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에 대한 경고죠. 저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해요. 연극은 특히 ‘협업’이 중요한 분야입니다. 사람마다 특기는 있지만, 협업을 위해서는 다른 작업에 대해 이해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협업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어요.
 
우리 극단은 특별히 창작극을 주로 하고, 그래서 저도 극작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극단의 공연을 위해 대본을 쓰는 거죠. 외부 의뢰를 받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본을 쓸 때 다른 작가와 비교해, 시간 대비, 빨리 쓰는 편인 것 같아요. 대신, 구상하는 기간은 길고, 관련된 자료를 정말 많이 찾아보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후다닥’ 쓰죠. 장기간에 걸쳐 쓰니까 완성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끝까지 써내려고 해요. 그리고 써놓고 나면 잘 고치지도 않아요. 여러 번 고쳐본 적도 있는데, 점점 더 나빠지더라고요. 제가 쓴 대본을 스스로 평가하자면, 공연성은 있지만, 문학성은 떨어진달까요? 애초에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라 그렇고, 또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기에, 문장이 좋은 작가들을 보면 정말 대단해 보이고, 또, 아주 부러워요. 하지만 흉내를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 만의 장점’이 사라질 수 있으니깐요.
 
많은 일을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할 때 제일 좋아요.
연기할 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가장 많은 걸 배우고, 느낍니다.
아무리 제가 쓰고, 제가 연출한 작품이라도, 제가 직접 연기를 할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돼요.
​할 수만 있다면, 연기만 공부하고, 배우의 직업만 집중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도 알거든요. 연기가 정말 어려운 예술이라는 걸. 그렇기에, 만약 정말 배우만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해야 하잖아요. 연기라는 예술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배워서 잘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분명히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이 필요해요. 저는 그 재능과 감각의 벽에서 좌절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법대 그만두고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취미로 남겨둬라. 직업이 되면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라고. 그리고 이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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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를 캐스팅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극단 작업만 하니까 특별히 오디션에 관여하지는 않아요.
극단내부에서 단원들끼리 오디션을 보는 경우도 잘 없어요. 사실 무엇을 기준으로 봐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우리끼리는 서로의 재능을 잘 아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잘 어울릴법한 역할로 캐스팅하는 편이에요. 소위 말하는 이미지 캐스팅이죠. 제 딴에는 배우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을 적어내 보라고 하기도하고.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서 우리 배우들의 목마름 같은 게 있어요. 누구나 남들이 모르는 숨은 매력이 있는데, 그걸 보여줄 기회가 차단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극단내부 오디션을 보자는 이야기도 종종 나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기회라는 긍정성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는데, ‘제가 누구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라는 데에서는 막막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첫째, 사회에 대한 철학이 있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는 배우들.
기본적으로 연기에는 그 배우의 모든 것이 묻어납니다. 자연스럽게 지성과 인품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소위 연기의 깊이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에서 좌우되는 것 같아요.
둘째, 작업하기 좋은 배우들이 좋아요.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던가, 동료 배우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집단 작업인 연극과 극단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술 버릇이 안좋은 것도 그 중 하나예요.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연습하면서 상호 간에 그 믿음을 키워가야 해요. 나는 내 동료가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창조적인 배우들. 연기는 일단 자연스러워야 해요. 그러다 보니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연기로 빠지기도 쉽거든요.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예술이란 반드시 의외성과 논리성이 함께 결합하여야 해요. 그걸 결합하는 능력이 바로 창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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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작품을 대학로 무대에 올렸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15년 소극장에서 초연한 뮤지컬 <화순1946>이에요.
1946년, 화순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초연 공연 때, 무려 50명이 출연했어요.
앙코르, 재 앙코르를 거듭하면서 점점 큰 공연장에서 했죠. 광주와 제주에 초청공연을 하러 가기도 했고요.
그러다 꼭 1년 후, 광화문 광장에서 공연했어요. 100명의 배우가 출연했고, 약 4천 명의 관객들이 오셔서 관람했습니다. 우리 극단이 한 작품 중에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했나?’ 싶어요.
그때는 박근혜 정권 말기였어요.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의견이 팽배했습니다.
국가에 대해 질문하고, 분노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연극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연극은 근본적으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니까요.
그런 시대적 배경이 뮤지컬 <화순1946>을 1년 동안 이어가게 만들었던 힘이었을 거에요.
 
우리는 1년 동안 공연을 했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더 감동적입니다.
사실 ‘화순탄광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거든요. 그런데 우리 공연을 계기로 ‘역사연구모임’들이 만들어졌어요. 우리 공연을 보고 감동하였던 어느 방송국 기자님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어요. 상부의 허락이 안 떨어져서 수년이 걸렸지만, 결국 만들어졌고, 공중파를 통해 전국방송도 했고, 현재는 여러 영화제에 초청도 받아 상영 되고 있습니다. 묻혀있던 역사가 한 작은 극단의 뮤지컬 공연으로 인해, 새롭게 조명되었고, 이젠 많은 국민이 알게 됐어요. 참 뿌듯하죠.
 
뮤지컬 <화순1946>의 공연을 통해 크게 배운 게 있어요.
당시, 극단의 제작비도 없었어요.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만들어 갔어요.
각계각층의 응원도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이 마음이 맞고 뜻이 맞으니까 못할 일이 없구나’ 싶었어요.
우리 극단의 신조가, ‘우리가 돈이 없지 투지가 없냐’였거든요. 좋은 환경에서 한 공연들이 아니니까,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고생을 한 만큼 우리 서로가 보람찼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웠거든요.
그때 맺은 인연과 그때 느꼈던 힘이 동력이 되어 극단이 한 단계 도약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원들이 대거 늘어났고, 극단의 이름도 좀 알려졌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사고를 치니까’, 뭔가 용감해지더라고요. 그런 경험 때문에 극장을 만들 때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 극단의 분위기나 기풍은 그 공연을 하면서 만들어진 게 많아요.
 

연극과 뮤지컬 등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였는데, 드라마나 영화 등 상업 영상 분야로 진출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요?
 
꽤 많은 작품을 쓰고 연출했지만, 저는 여전히 ‘무명’이에요.
하지만 그런 ‘무명’이란 말이 싫지 않아요. 무슨 상을 받아본 적도 없어요.
당연한 일이죠. 그런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어릴 땐 유명한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하고, 저도 ‘유명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연극을 하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연극판에도 ‘등급’이 있더라고요. 저는 ‘E등급’ 쯤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이 등급 간의 벽이 대단히 높아요. 한국 사회구조와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노력한다고 C, B, A로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러니 쓸데없이 힘쓰고 좌절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은 극단 식구들과 온종일 어울려 같이 밥 먹고, 같이 연극 만들어 올리면서…. 그렇게 사는 게 좋습니다.
저도 그렇고, 극단 식구들도 그렇고, 아무도 ‘유명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 극단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고,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연극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진짜. 얼핏 보기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에요. 누구 하나가 아주 유명해지는 것보다, 하나의 공동체가 오래도록 유지된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정신적인 가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제적으로도 그게 더 효율적이에요.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성공하고 유명해진다고 해서 몇 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제 성공은 얼마나 오래 유지될까요? 그러나 공동체에서의 모두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고, 서로를 보호해줄 수 있어요. 함께 감당하고, 함께 헤쳐 나가고, 함께 풀어갈 수 있고요. 그러면 인생이 덜 외롭고, 덜 무섭잖아요. 예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저는 그게 더 낫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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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은 제 삶의 90%를 차지하는 게 극단이라, 개인적인 계획은 없어요.
‘극단의 계획이 곧 제 계획’인 셈이죠. 극단이 이제 5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고민이 많아요. 더 발전해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과연 무엇을 ‘발전’으로 볼 것인지 그 내용을 찾고 있어요.
 
최근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연극계의 풍토도 굉장히 많이 바뀌고 있어요.
기존의 악습과 구태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연극인들이 많아요. 우리 극단도 그중의 하나고요.
​새로운 길을 찾는데 본보기란 없어요. 그러니 다들 ‘과정의 건강함’에 창안하게 되는 것 같아요. 너무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게 첫 번째 계획이에요.
 
두 번째 계획은, 극단의 대표직을 내려두는 겁니다.
이건 계획이 아니라 어쩌면 그냥 개인적인 소망 같은 거예요. 어쩌다가 몇 년째 리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저는 리더를 오래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군대로 비유하면, 저는 ‘신중한 지휘관’보다, ‘소총 들고 뛰어다니는 병사’가 체질이에요. 지금도 극단의 대표라고 많은 책임을 지고 있지는 않아요. 우리는 같이 논의하고 같이 책임지니까. 그래도 심적으로는 항상 부담이 있습니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또한, 개인적인 부담을 떠나서, 극단을 위해서도, 제가 대표를 그만두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지금은 제가 대표에, 연출에, 극작까지 겸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제 상태가 극단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거든요. 이건 바람직한 그림이 아니죠.
 
그 외엔 무언가 특별한 것은 없어요.
공연을 찾는 관객분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잘 컸으면 좋겠고, 그런 소소한 것들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별로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고. 그런 거 잘 못 해요. 그건 성격 탓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연극이라 그런 것 같아요. 연극은 혼자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모여져야 진행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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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 누아르> 공연 상세정보 및 예매예약 링크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류성, 극단 '경험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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