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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홉킨스 의과대학 교수 <권형배>7/23/2019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은 누구에겐 도전이고, 다른 이에겐 미래이다. 어떤 이는 ’꿈’을 ’별‘에 비유해, ’멀어서, 닿을 수(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자신이 소원했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연구 기관이자, 미국 의과대학인 존스 홉킨스대 권형배 교수의 이야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부터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과학부에 부교수로 임용된 권형배라고 합니다. 현재는 신경과학자이자 저명한 대학의 교수로 활동 중이시지만 학사전공은 축산학이셨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신경과학을 전공하게 되신 건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생물학에 많은 흥미를 느꼈고, 고등학교에서도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계속 생물학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유전공학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유전공학은, ’미래의 식량이나, 의약품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며 뉴스에서 많이 다뤄졌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재미와 흥미를 느꼈던 생물학이었기에 대학도 생물학과에 지원했었는데, 크게 생각지도 않았던 2지망이 되는 바람에 축산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입학 후, 타전공 과목도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었고, 하고 싶었던 생물학과, 화학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을 생화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석사과정에 진학해보니, 생물학에 정말 많은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그중 ’신경생물학‘은, 당시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학부에 ’신경생물학’이라는 과목도 없었고, 신경생물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은 국내 전체에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당시, 미래에 ’뇌과학‘이 크게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미국 유학을 신경생물학으로 정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론 20년 가까이 신경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하면서, 다행히 적성에 맞으며, 만족할 만한 분야를 찾아서, 후회는 없습니다. 고려대에서 생화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의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박사 취득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셨는데요. 미국에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대는 뉴욕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미국의 의대와 비슷하게 의사도 양성하지만, 연구도 굉장히 왕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경생물학 분야는, 교수님 대부분과 학과가 의과대학에 있어서, 의대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특별히 의대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처음 신경생물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대부분 말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에서는 전공 선택이 자유로웠기에, 다른 분야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경 생물학을 전공으로 택해서 공부하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고, 유학생이 끝까지 졸업하는 비율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그랬기에 주변의 동료, 선배님은, 저보고, ’그곳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하고, 제가 전기 생리학을 하는 실험실로 간다고 할 때, 좀 과장되게 말해서, ’미쳤다‘라고도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전기 생리학 분야에 대해 전혀 접해 본 적이 없고, 신경 생물학 자체에 대한 지식도 없는 데다가, 영어도 못 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최악이라는 건 대충 감으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까지 온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면, ’무조건‘, 그리고 ’언젠가‘는,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 한 가지만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정말 ’인생을 걸고‘ 열심히 했으나, ’열정‘만 가지고 잘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라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의 제 모습만 보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경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박사과정 당시, 전공과목도 낙제하고, 자격시험도 낙제했었습니다. 두 번 낙제하면 곧, ’강제 추방‘이기 때문에,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말을 안 해도 상상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엔, 불안감과 중압감도 문제지만, 유일하게 시험을 통과를 못 한 유학생으로 낙인이 찍힌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다들 부모님들과 친구들 불러서 하는 졸업 논문 심사도 통과를 못 했고, 저보다 나중에 입학한 후배의 졸업 파티에 가서 축하를 해 줬던 ’웃픈‘ 기억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학업 중,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제가 어마어마한 양의 실험 자료를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수도 있지만, 박사 6년 과정 동안, 일 년에 360일 정도를 일했고, 그 과정 동안에 생겨난 데이터의 양은 정말 하늘을 솟구치듯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논문도 좋은 곳에 여러 편 낼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 학과에서 가장 바보 같았던 제가, 졸업할 때 수여되는, ’최우수 논문상‘ 같은 상도 받았습니다. 과정은 다른 친구들보다 절실하고, 힘들었지만, 그리고 학위를 끝내기까지의 기간도 조금 더 길었지만, 참고 인내한 결과는 더 큰 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사 후 과정에 지원할 때는, 거의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었고, 그 후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이뤄졌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학업 외에 배운 점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여서, 그 많은 에너지가 축적되면 될수록, 나중에 폭발하는 힘은 몇 배로 크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의 박사 후 과정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아이 셋을 키우면서 육아와 연구를 동시에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이는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직장을 못 찾고, 직장을 못 찾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얻게 될지,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연구로는 최고의 성과를 내는 시기였는데, 반대로 가족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시기였습니다. 그 짧지 않은 기간을 버텨주고 희생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많은 것들을 얻고, 또 배웠는데, 하버드대학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은, 제 사고방식과 연구에 대한 이해 자체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옛말에, ’성공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계속 보고, 부대끼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논문과 실험 이외, 은연중에,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어질 수 있는 배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이 나중에 랩을 꾸려나갈 때도 큰 도움이 됐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의 박사 후 과정을 마치신 후 6년간 미국 플로리다와 독일 뮌헨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국내외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많은 정보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독일의 연구소입니다. 노벨상 수상자도 많이 배출했고, 각 연구소에 자금이 충분히 제공되서, 연구 주제를 고를 때 위험 부담이 큰 내용도 연구비 걱정 없이 시도해 볼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 있는 연구소입니다. 제가 교수지원을 할 당시, 때마침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미국 플로리다에 최초로 설립되어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계획은, ’처음부터 연구비를 많이 투자해서 초반에 승부를 본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막스 플랑크가 가지는 큰 장점이고 그걸 최대로 활용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제 독립적인 실험실을 운영할 때, 어려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혼자 실험을 할 때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연구를 해 나가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연구비 부담은 적었지만, 좋은 인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실험실을 세팅하는 것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과학 특성상, 연구 분야도 빨리 바뀌어서,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되었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그룹 리더로서 전반적인 연구 방향을 잡을 때, 주어진 시간과 재원을 가지고,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인지‘, ’결승점은 어느 곳으로 정할 것인지‘, ’누구에게 달리게 할지‘, 이런 모든 것들이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제가 모든 것을 다 정해야 했기에, 결정의 순간에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연구 주제는 ’학습과 기억‘인데, 항상, ’무엇이 본질일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뇌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변화가 뭔지, 어떤 요소들이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뇌의 어디에 기억이 저장되는지, 그것을 안다면 실제로 그 기억을 바꾸거나, 없앨 수 있는지, 심지어 가짜 기억도 심어줄 수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으면, 기술 개발 실험도 같이 했습니다. 한국의 연구소와 비교해 볼 때, 미국은 확실히 장점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연구자의 풀이 아주 방대하고, 또 연구비의 규모가 월등히 높습니다. 둘째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재능을 가진 연구원들이 지원합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가지는 막연한 불안감, 정규직에 대한 압박 등, 스트레스받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가진 계획과, 삶에 대한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고려하고, 또한, 가족 배경에 따라서, 자리 잡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 한국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고, 미국이 더 잘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7년 동안 연구하면서 여러 논문도 내고 상도 몇 번 수상하였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걸 한가지 꼽는다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동물에서 빛을 이용하여, 행동과 감정에 관련된 신경 세포를 표지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입니다. 이 연구를 통하여 기존의 신경 생물학이 가지는 한계선을 바꿀 수 있었고, 다른 많은 사람의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 개발로 두 개의 논문을 ‘Nature Biotechnology’와 ‘Nature Methods’에 발표했고, NIH(국립보건원)에서 주는 Director’s Pioneer Award도 받게 됐습니다. 연구비의 규모도 커서, 연구실 운영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고, 좀 더 깊은 견해를 가지고 연구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국립보건원에서 받은 이 상은, 미국에서도 아주 받기 힘든 영예로운 상이라서, 제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0년 간의 박사/박사후과정, 그리고 6년 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올해,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임용되셨습니다. 또 다른 도전을 하는 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과학부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그룹 리더 포지션은 5~9년 사이에 떠나야만 하는 규정이 있어서, 가장 적정기라고 생각하는 시기에 원하는 여러 곳에 지원을 했고, 다행히 많은 학교에서 저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면접을 다녀온 학교 대부분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습니다. 그 중, 저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을 선택하여, 결정했습니다. 연구소에서 대학교로 옮기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보통 의대에서는 강의 부담이 많지 않고, 연구비에서 모든 실험 장비와 재료, 저와 연구원들의 월급을 대부분 충당합니다. 제 가장 큰 의무는, 연구비가 부족하지 않도록, 계속 받아오는 일이고, 자원 받은 돈으로 연구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많이 내는 것입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점은 국내 대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교수의 급여가 학교에서 지급되는 시스템이라, 연구비 충당에 대한 부담이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연구소에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특별한 압박은 없습니다. 올림픽에 비교해볼까요? 출전하는 선수들은 모두 시합 전, 각자 자신의 최고 기록과 상태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장단점을 본인과 다른 선수들이 다 알고 있고,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고, 최대한 집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빛을 발합니다. 연구도 비슷한 성향을 가집니다. 요즘 연구는, 우연히 뭔가 굉장한 걸 발견하는 확률은 거의 사라지고, 최신 장비와 기술을 가지고, 인력을 많이 동원해서, ‘블록버스터급’의 논문을 제출할 때, 분야의 명성 있는 잡지에도 실리면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말할 수 없이 좋아야 하고요. 현재의 저는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크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국내 대학, 연구소 등과 연계하여 분야의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한국의 여러 교수님과는 이미 친분도 많이 있고, 실제로 같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데로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과 2016년에 받은 상은 미국에서 연구하는 신경생물학자분들이 만드신, ‘Association of Korean Neuroscientists’(미국 한인 뇌과학자 협회)라는 단체에서 받은 상입니다. 매년, ‘Society of Neuroscience’(뇌신경학회)에서 모임을 갖고, 한국 과학자들의 모임을 주선하며, 각각의 한국 과학자들의 힘은 약할지 모르지만, 모였을 때, 큰 시너지와 힘을 내려는 취지의 모임입니다. 그 규모가 점점 커지는 만큼, 저도 힘을 집결시키고, 서로 공동 연구도 많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과학자들의 수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규모가 작습니다. 그만큼 목소리도 약하고, 힘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각각이, 뿔뿔이 흩어져서, 본인의 일만 한다면, 그나마 힘도 없을 것입니다. 작더라도 이런 모임이 계속 이어지면서 서로 도울 수 있다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는 단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국내 신경과학의 수준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종사하는 사람 수가 없고, 그렇기에 연구비의 지원과 환경이 절대적으로 열약합니다. 물론, 제가 한국을 떠나올 시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으며, 지금도 빠르게 성장 중입니다. 많은 과학자가 북미나 유럽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고, 또 귀국하여, 한국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후배도 이제는 유학을 떠나올 때, 이미 경쟁력과 정보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제가 한국 과학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골프의 박세리 선수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까지 가고 난 후, LPGA에 대한 도전의 장이 열렸고, 지금은 수많은 ‘세리키즈’ 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구선수 박찬호가 있었기에,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금의 추신수, 류현진 선수 등이 좀 더 활동하기 좋은 조건이 되었습니다. 제 목표는 일단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고, 좋은 선례를 남겨서, 나중에 도전하는 후배들이, ‘저 정도는 나도 해볼 만하다’라는 동기 부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과학 분야에도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나오고,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전체적인 한국 과학의 수준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입니다. 1992년에서 2012년까지 20년간 학업을 하고, 그 후,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또 다른 6년이 흘렀는데요. 만약, 중,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진로를 재선택 할 수 있다면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나요? 저는 다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다시 과학자가 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제게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도 하지만, 소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다양하게 많은 재능이 없는 것은 저의 장점입니다. 다행히 성격도 조용하고, 운동, 음악, 미술 등에 다 재능이 없는 제게 ‘과학자’란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처음 대학원에 지원하면서 가졌던 꿈은, ‘국내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이미 제 꿈을 이뤘습니다. 게다가 제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제가 처음 가졌던 꿈보다 더 큰 꿈을 이뤘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별 고민이 없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 배우, 가수 등이 가장 힘들었을 때가 평생 꿈꿨던 큰 상을 받거나, 히트작품을 하고 난 다음, 그다음 시즌과 작품을 준비할 때라고 합니다. 수많은 과학자는, ‘평생에 한 번쯤은 환경이나 과학 논문은 발표해봐야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정말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 그 기쁨은 반년 정도 지속됩니다. 그다음 논문 발표할 연구 과제가 마땅치 않으면, 그 부담감이 처음 목표했었던 논문 발표를 위해 노력했었던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해집니다. 어느 정도 논문 발표하는 수준이 되고, 어느 정도 연구비를 타게 되면,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이것을 충족하려면, 최소한 여태까지 한 정도를 하면, 그냥 본전이고, 그 이상의 성과를 내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어, 좀 하네!’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좋은 논문을 하나 발표하면, 어쩌다 ‘소 뒷걸음질하다가 쥐 잡은 격’이라는 인식밖에 주지 못 합니다. 본인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이제 언덕 하나를 넘은 경우인데, 그 정도의 노력을 쉬지 않고 계속했을 때 단지 같은 높이에 머물 수 있고, 그 이상을 해야 더 높은 산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 산을 넘으면, 그 뒤에도 또, 다음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루에 10시간 연구하던 사람은 이제 12시간, 14시간, 16시간 이렇게 시간을 늘려야 할까요? 이처럼 연구비와 논문을 잘 내도 아이러니하게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도, '위기'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럴 때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어쩌면, ‘이제 그만하면 됐다. 잘했다. 이제 산에서 내려가자.’라는 마음도 들지 모릅니다. 다음 산으로 갈지 말지, 그만 내려갈지, 올라가려면 어떻게 갈지, 이 모든 것은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 들어 올 때 노 저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는, 물이 들어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물이 들어오니,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막상 바다에 나가 보면, ‘뭘 해야 하지?’에 대한 고민이 쌓이며, 앞일은 더 막막해집니다. 지금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노를 조금 저어 보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다에 나갔던 윗세대들의 조언도 얻을 것이고, 저만의 새로운 길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기술 개발의 도움으로, 기존의 노를 젓는 방식은 안 먹힐 수도 있습니다. ‘더욱 열심히 일해서 네이처, 과학 논문을 백 개까지 발표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럼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노벨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르지만 아마 더 큰 부담감이 생기고, 삶이 더 피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뼈를 깎는 노력에, 운도 많이 따라 줬고, 시기상 바다로 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박사과정 시절, 나중의 목표가, ’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의 청년들에게 꿈을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교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쑥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져서,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되고는 싶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열쇠를 쥐어야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세포 배양 백 개 하던 것을 더 열심히 해서 이백 개를 하는 것이 답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배양하던 세포를 다 죽여서 자신만 살아남는 것이 답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세포 배양을 할 시간에 그것을 자동화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답일까요? 생각보다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납니다. 저도 아직 답은 모르지만, 더욱 많은 도전자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물길을 내는 것이, 기존의 길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나가는 것 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저만의 실험실을 시작할 때, 나이 많이 드신 교수님들이 여러 조언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한 우물을 파라‘, ’나만의 영역을 구축해라‘,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20년 전에는 우물을 팔 땅도 많았고, 우물만 파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물을 파면, 자기 식구들 정도만 마실 물만 나옵니다. 이미 어떤 사람들은 송수관으로 물을 자동으로 실어 나르고 있고, 사막에도 물을 끌어서 공장을 만듭니다. 그런데도 옛 방식으로 우물을 파고 있으면 그게 정답일까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쭉 시도해 왔던 일을 오히려 최소로 하고, 잘 모르면서 위험 부담이 큰, 애먼 짓을 계속 시도했습니다. 그 애먼 짓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크게 보면 그 노력이 언젠가는 새로운 물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남의 밥그릇을 뺏지 않고도, 많은 사람이 혜택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연구를 계속해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사진 제공: 권형배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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