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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7/24/2019 실업률은 2000년 이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실업자 수는 IMF 때보다 2배라고 한다. 문화계의 청년 실업자 역시 날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도 아닌 외국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독일의 교향악단에서 10년 간 활동하며,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제3악장에 임명되어 오는 시즌 부터 부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과의 인터뷰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 후, 독일 오케스트라에 적을 두고, 실내악과 독주 등 다양한 연주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입니다. ‘Avec G’와 인터뷰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예체능 전공 특성상 진로를 일찌감치 정하게 됩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일곱 살 때, 가까운 이웃 한 분이 음악학원 원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운영하신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함께 배웠는데요. 1년 정도 후에는, 당시 학원의 바이올린 선생님이셨던, 김희송 선생님의 권유로 개인지도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취미로 바이올린을 하던 중,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진로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학업에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할 것인가’에 대한 갈림길에 서서 고민을 오래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예술고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 전공자 중에도, 기악 전공자들은, 훨씬 더 일찍 예술중학교를 진학하여,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예고에 응시해보고, ‘붙으면 음악의 길로, 떨어지면 인문계로’라는 마음을 먹고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사실 실기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중학교 내신이 괜찮았던 덕에 붙게 된 것이었는데, 저는 이것이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예술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다른 고민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전공해야 하니, 저를 잘 이끌어줄 좋은 강사 선생님을 찾아야 했는데, 저도, 어머니도,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무작정 교내 현악 부장 선생님께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만난 우정은 선생님 밑에서 2년간 공부하며, 바이올린의 기초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전공생들이 익혀야 할 레퍼토리들도 많이 익혔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예고에 잘 적응하여, 입학 후 있었던 첫 실기시험에서 1등을 하고, 2학년 때는 교내 오케스트라 악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김대환 선생님을 만나 고3이 되었을 때, 여러 콩쿠르의 출전과 입상 경험을 쌓으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였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6년의 세월 사이,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와 뷔르츠부룩 국립음대에서 디플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서울대 재학시절 다양하고 많은 앙상블 활동을 했습니다. 크고 작은 앙상블 단체부터, 프로 오케스트라, 그리고 선후배, 동기들과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 연주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큰 흥미를 느꼈고, 그렇게 실내악과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 일원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유학 이전, 독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클래식 음악의 전통이 깊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 클래식 음악가를 비롯해 일반인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작곡가들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고요. 무엇보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필하모닉을 비롯하여 역사와 전통이 깊은 오페라극장과 오케스트라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저는 그런 독일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떠났던 2009년은 독일 대학 학제 제도가, 디플롬(학·석사통합과정)에서 학사와 석사로 바뀌는 과도기였습니다. 제가 진학했던 라이프치히 국립음대는 아직 바뀌기 전이었기 때문에 디플롬과정에 입학한 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디플롬을 마친 후, 바로 동 대학의 새롭게 바뀐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였는데, 이때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정단원으로 입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를 휴학하게 되었고, 다시 복학할 즈음, 현지 교수님께 독일의 정통한 클래식 음악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뷔르츠부룩 음악대학의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는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Meisterkalsse’라는 박사학위에 준하는 독일의 학위는 총 4학기로, 2년 과정입니다. 졸업시험의 부담이나, 오디션, 콩쿠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학기를 연장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연장하지 않고 2년 만에 졸업하였습니다. 독일에 와서 처음 만난 Aitzol Iturriagagoitia 교수님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Zakhar Bron에게 사사하신 스페인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셨습니다. 솔리스트로서, 그리고 현악 4중주단의 리더로서 종횡무진 활동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신 시기라 열정이 대단하셨죠. 3시간을 쉬지 않고 지도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보잉과 자세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훈련 시켜주셨고, 새로운 곡들을 익히는데 생각해야 할 것들, 연주 전반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뷔르츠부룩 음대에서 사사한 Herwig Zack 교수님은 슈투트가르트 체임버오케스트라에서 10년 이상 악장으로 활동하신 분이셨습니다. 많은 제자가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것은 물론,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과 함께한 3년간의 기간 동안, 많은 바이올린 솔로 레퍼토리들을 익혔고, 오케스트라 엑섭들, 악장으로서 익혀야 할 곡들도 이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바흐와 베토벤 등, 독일 음악의 해석과 연주에 대해 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유학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목표 설정이 중요할 것 입니다. 유학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또 ‘발전시키고 싶은지’, 유학 후에는 ‘어떤 음악 활동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목표하는 학업 후의 진로에 따라, 어떤 선생님께 배워야 할지, 교수님의 배경과 성향을 파악하여, 꼼꼼히 알아본 다음, 외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이후에도 현지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은 다름 아닌 교향악단의 단원으로서의 활동이신데요. 박사 과정을 끝낸 이듬해부터 독일 중부방송교향악단의 객원 단원으로 시작해, 이직을 거치셨지만 꾸준히 교향악단의 일원이셨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교향악단 체계를 비교해서 설명해주세요. 저는 라이프치히에서 디플롬을 마치고,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011년,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오디션에 합격하여 2018/19시즌까지 정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프로 오케스트라 경험은 대학 시절 객원 단원으로서 참여했던 것이 전부이기에 구체적인 시스템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한국 오케스트라의 유럽투어도 많아지고, 세계적인 레이블과의 음반 작업 등, 국내 오케스트라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한국과 비교하면 오케스트라의 역사가 아주 깊고, 그 긴 세월 동안 정립된 독일만의 시스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원선발과정이 있습니다. 단원들이 오디션에 직접 참여하여 투표하여 선발하고, 또 수습 기간 역시 단원들의 최종투표로 수습 단원의 종신 여부를 결정합니다.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출 동료를, 동료들이 ‘직접’ 선발하여 결정하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거쳐 단원이 되면,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게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동반 상승효과를 내는 것 같습니다.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특성 때문에 한국과 독일의 오케스트라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음악가들의 실력은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발전과 클래식 문화의 활성화를 이야기한다면, 연주자보다는 행정과 기획에 더 큰 비중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오케스트라들은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관객과의 거리를 점점 좁혀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덕에 클래식 공연을 찾는 관객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고요. 한국 특성상, 세계적인 지휘자나 솔리스트가 참여하는 공연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바로 이런 특성을 잘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에 단원으로 계시면서, 또, 실내악과 독주자로 활동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의 활동을 오케스트라에서 적극 지지해주고, 홍보한다면, 결국 오케스트라도 동반 홍보 효과를 보면서 더 많은 관객분이 오케스트라 공연에 찾아와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개개인이 오케스트라의 자산이라 여기고, 이들의 특성과 연주 활동에 맞게, 여러 연령층을 타겟으로 하는 홍보전략을 기획하고, 활용한다면, 관객확보에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 예측합니다. 제 경험을 빌려 독일 오케스트라의 입단 오디션을 준비하는 분들께 조언을 드리자면, 독일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음색을 중요시합니다. 보통 오디션의 첫 번째 라운드에서 고전협주곡을 연주하게 되는데, 많은 오케스트라가 막을 치고 진행(블라인드 오디션)합니다. 서류심사 혹은 데모 등 1차를 통과하여, 현지 오디션에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의 실력의 편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음색과 스타일로 한번 거르고, 다음 라운드는 낭만 협주곡,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 엑섭을 보게 됩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주를 추구하기보다는, 입단하고 싶은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들으면서 분석해보고, 본인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곡을 연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연주를 듣고도, 10명이면 10명, 100명이면 100명의 의견이 다 다릅니다. 음악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오디션에 떨어져도 낙담할 필요가 없고, 본인이 ‘어떤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주했는지’, 또 ‘얼마나 잘 표현하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결국엔 좋은 결과도 따라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8년간 활동했던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의 종신 단원 직을 내려놓고,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제3악장으로서 새 출발을 앞두고 계십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요. 데사우 극장에서 활동한 8년간 많은 오페라와 심포니들을 연주했지만, 그중에서도, Antony Hermus 가 상임 지휘자로 재임 중에 펼쳤던, 바그너의 ‘니벨룽엔의 반지’ 전곡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연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었는데, 반지 시리즈 전곡 연주를 통해 바그너의 스펙타클하고도 깊은 음악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었기에, 큰 여운이 남습니다. 과연, 독일인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여러 실내악 연주 가운데, 재작년에 있었던 ‘윤이상 탄생 100주기 기념음악회’가 생각이 납니다, 이는 같은 오케스트라 오보이스트 동료의 제안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현지 동료들이 한국인인 저보다 더 윤이상의 음악을 깊이 알고, 이미 많은 작품을 연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느끼는 한편, ‘윤이상의 음악을 더 공부해야겠다’라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기념음악회는 연주 전, 인터뷰가 지역 신문에 실리기도 하였고,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에 제1 바이올린으로서 많은 새로운 곡들을 익히고, 동료들과 실내악 연주도 하면서, 즐겁게 음악 활동을 했었는데요. 8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새로운 무언가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데사우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악장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악장으로서 전 오케스트라를 끌고 가면서 연주를 해보니 너무나 짜릿하고, 재미있어서, 다시 열정이 조금씩 살아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일반 단원이 아닌, ‘악장’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하고, 마침 공석이었던,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니의 오디션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제 상태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운이 좋게도 제3악장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의 ‘종신 단원’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정말 큰 결정이었습니다. 저희 부부 모두 라이프치히에 유학을 와서, 학업을 마친 이후, 10년을 자리 잡고 살고 있었고, 큰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이도 유치원에 잘 적응하여 다니고 있었기에, 저의 ‘악장’이라는 개인적인 소망 때문에,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종신을 보장받은 직장을 나와 새롭게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심적인 압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가 전적으로 지지해주었고, ‘지금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단원으로 있었던 데사우 극장 오케스트라는 극장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심포니콘서트, 실내악 등 클래식 음악의 모든 장르를 전용 홀에서 연주합니다. 이에 반해, 제가 이번에 제3악장으로 임명된 주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닉은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오페라는 하지 않고, 주로 심포니콘서트만 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립오케스트라로서 지겐 도시를 중심으로 그 주의 남부지방 여러 도시에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 투어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20 시즌부터 베를린필 수석 베이시스트를 역임한 새로운 음악 감독 Nabil Shehata가 함께하게 되는데요. 그와 만들어갈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유학을 끝낸 예술계 종사자들이 영구 귀국하는 반면, 이제 독일에서 영구히 자리 잡으셨다고 볼 수 있는데요. 국내 활동에 대한 미련은 없나요? 처음 독일에 유학을 왔을 때는, 학업을 마치면 바로 귀국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 둘을 낳고, 또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벌써 세월이 훌쩍 지나 10년째 독일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 종신 단원이 되니, 그것을 내려놓고 귀국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가족이 생겨, 두 아이가 모두 다 독일에서 태어나, 잘 적응하면서 커가고 있기에, 계속 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계신 가족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켠에 미안함이 있습니다. 멀리 살고 있어 자주 못 보니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저희 부부 둘 다 음악을 하기 때문에, 음악가로서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인 독일에서 사는 것에 대해 이해해 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독일 모든 오케스트라와 극장은 여름에 한 달 남짓 휴식기를 갖게 됩니다. 이 기간에는 언제나 한국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독일 환경에 대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크고 작은 음악회에도 늘 연주회장을 채워주시는 관객분들입니다. 작은도시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열리는 음악회에도 항상 많은 관객분이 찾아주십니다. 나이대는 주로 장년층, 노년층인 분들이 많으신데요. 노부부가 한껏 멋을 내고 연주회장에 오셔서 음악도 감상하시고, 중간 휴식시간엔 샴페인이나 포도주를 곁들이며 즐기시는 모습들도 참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아내이신 바이올리니스트 김유선 님과 함께 활동하는 '부부 바이올리니스트 듀오'를 비롯해 같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도 유명합니다. 아내 분과의 첫 만남을 소개해주신다면? 아내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윤이상 국제 음악제 실내악 아카데미’에서 입니다. 함께 연주했던 현악 앙상블에서 옆에 앉아 연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대구 출신으로 당시 대학원생이었고, 저는 서울대학교 졸업을 막 하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멀리 떠날 것을 아는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이끌리어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계획한 것에 맞추어 저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1년 후, 아내도 제가 있는 라이프치히로 독일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원래 유학 생각이 없었었는데, 제가 설득을 하기도 했고, 본인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유학 와서 치른 첫 시험이자,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석사과정 입학에 합격하면서, 저희는 나란히 함께 라이프치히 음대를 다니게 되었고, 그해 여름 결혼을 했습니다. 같은 전공이라, 서로의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부분들이 많은 것은 큰 장점입니다. 그와 동시에, 함께 작업할 때, 서로 예민해서 생기는 긴장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긴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는, 지혜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둘째를 낳고, 아내는 유학 전 꿈꿨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독일에 유학하여 석사 공부를 마쳤는데, 육아 때문에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어서,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생각한 것이 바로 유튜브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연주를 할 수 있고,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많은 인원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집에서 취미 삼아 연주하여 올린 영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독자가 늘어나고, 꾸준히 좋아해 주는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유튜브 연주 활동을 해보자고 결심한 후, 재미있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참신하고 재미있는 편곡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치유를 선사할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최근 독일로 연주 투어를 온 한국 앙상블 단체의 연주를 갈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가서 연주도 보고, 한국의 동료들도 만나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었지만, 무엇보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말로 편하게 소통하며 연주하는 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는 매년 여름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늘 한국에서 지냈는데요 그동안은 아이들도 어렸기에 연주 활동할 생각을 거의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 방문할 때뿐만 아니라 시즌 중에 짧은 휴가 때라도 연주 기회가 있다면 활발히 나서서 해볼 생각입니다. 현재는 독일에서 영주권자로 자리 잡고 살아가고 있지만, 늘 마음 한편엔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들이, 훗날 어떠한 형태로는 한국 클래식 문화 발전에 유용하게 쓰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연주이든, 행정이든, 한국 클래식 문화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동할 계획이 있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어 악장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배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연주 활동을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바이올리니스트 박상민을 기억하여주시고,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상민 영상 제공: YouTube 채널 ‘부부바이올린 부부의 힐링연주bubuviolin’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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