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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감독 및 프로듀서 <최영호>9/19/2019 방송국 PD를 동경해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지만, 실용음악계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가 던진 '편곡도 잘할 것 같다'라는 한 마디는 그가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떠오르는 작,편곡가, 프로듀서,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생의 파장을 불러왔다. KBS 예능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의 편곡가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음악감독 최영호와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중음악 작곡가와 편곡가, 그리고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최영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인지도 높은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지만,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항상 교회와 학교에만 왕래하던,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과 음악을 좋아했기에, 공부하는 시간을 빼면, 항상 농구나 수영 등, 운동과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직업의 선택이 넓어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을 뿐, 미래에 대한 대단한 포부나,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적성에 맞는 꿈보다는 ‘대학’을 목표로 달리는, 그래서 슬프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한, 현 대한민국 교육환경에 처한 고교 수험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고교 재학 당시, 이미 언급했듯, 적성보다는, 전형적인 교육환경에 맞춰진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보았던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 정도가 있었던 직업이 ‘외환딜러’와 ‘방송국 PD’였습니다. 1994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인 김민종(한현 역)이 외환딜러였는데, 제게는 그 역할이 매우 멋있어 보여서, 직업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아요. 방송국 PD 또한, 인터넷은 걸음마를 떼던 당시였고,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전화’의 기능만 하던 때라, 대한민국에서 TV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이 대단했기에, 그 영향력의 중심에 있던 방송국 PD직을 동경했습니다. 외환딜러가 되려면 경제학과에 진학해야 했고, PD가 되려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야 했는데, 응시했던 학교 중, 합격한 곳이 신문방송학과였습니다. 아쉽게도 동경을 가지고 입학한 신문방송학과는 저와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미리 상상하고, 기대했던 수업의 내용이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업들이 주를 이루니 흥미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미디어 직업군에 대한 실전적인 수업보다, 국내외 정치, 경제 등 시사 수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실습보다는 학문적인 접근이 많았던 커리큘럼이, 제게는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대학입학 후, 다행히 적성을 찾아, 프로음악가로 데뷔를 했기에,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 초년에 하게 됐습니다. 음악은 전혀 전공과 관련이 없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대중음악계에 입문하게 되셨는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프로듀서로서 필요한 음악적 기술들을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많은 시간, 노력을 쏟은 만큼, 그에 들어맞는 기술과 노하우를 얻게 됩니다. 피아노 연주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취미 중 하나였고 성격상 무엇을 하든, 지독하게 해내는 편이었기에,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형교회의 반주자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대형교회는 피아노 전공자 혹은 그 이상의 경력자가 피아노 반주를 전담하며, 초등학생이 반주를 맡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제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남달랐던 음악 감성으로,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개최하는 대형 공연의 무대에 많이 올랐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 활동으로 시작하였지만, 활동을 지속하다 보니, 지역 내에서 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저는 교회 지인의 아르바이트 추천을 받게 되었는데, 모 대중가수의 건반 세션이었습니다. 그것이 첫 대중음악계에 처음 입문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학교의 수업 방향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 대학입학 후,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대중가수의 건반세션을 생각보다 자주 제의받았습니다. 저의 어릴 적 취미를 살리고, 좋아했던 연주를 통해 수입도 생기니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신문방송 분야에 남을 것인지, 음악 자체를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저 자신에게 질문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 시급이 2천 원가량 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연주 한번 하면 기본 40~50만 원씩 받았고, 그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문직으로 전환해도 되겠다’라는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과장님을 찾아가, 음악으로 진로를 정했으며, 앞으로 음악 일을 열심히 해야 하기에,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았고, 공중파 방송은 전국을 누리던 시절에, 저는 연주하면서 방송 출연도 많이 하고, 그때마다 주변 지인들의 부러움도 사니, 나름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20대 초반인 어린 나이에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축하해주는 분위기였는데, 부모님만은 약간의 반대를 하셨습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이신 저의 어머니께서는, 성공과 미래에 대한 보장보다, 제가 대중음악에 종사하는 것 자체에 불편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든지, 하지 못하게 막으시기보단, 기회의 길을 터주시고, 응원해주셨기에, 크게 반대를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대중음악계의 기독교인으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저의 굳건한 신앙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중음악계로 입문 후 처음 했던 작업 혹은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소개해 드렸던 대로, 교회 지인의 아르바이트 추천으로 하게 된 모 가수의 건반 세션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세션맨이라 불렸던 드럼의 강수호, 베이스 기타의 이태윤, 전자기타의 함춘호 님과 함께했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어서 그런지 제게 ‘첫 작업’이라는 게,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주거나 전환점을 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녹음실의 상황, 그리고 같이 연주했던 연주자들은 생각이 나는데, 아쉽게도 어떤 프로젝트였는지, 누구의 음반 관련된 녹음이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대학 초년이었으니 98~99년 사이였는데, 음반에서나 볼 수 있던 이름의 당대 최고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해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신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재의 '프로듀서 최영호' 하면 KBS 예능 중 여러 가수가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가 떠오릅니다. 처음 음악 편곡작업을 하게 된 그 시작은 어떤 무대였나요? 98년 프로연주자로 데뷔한 후. 연주를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명 작곡가 그리고 프로듀서와 인연을 쌓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고성진 작곡가가 2003년 즈음, 제게, ‘편곡도 잘할 것 같다’라고 하시며, 한 음반에 들어갈 곡의 편곡기회를 주셨습니다. 경험과 재미 삼아 했었던 편곡에 대한 대중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평가가 좋았고, 이후 편곡 의뢰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곡 의뢰를 비롯해 음반 제작에 대한 의뢰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맺게 된 가수들과의 인연은 방송편곡 작업으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인연이 인연을 부른다고 할까요? 첫 ’불후의 명곡‘ 편곡작업은, 방송이 처음 편성되었던 2011년, 시즌1 시절, SG워너비 이석훈 씨의 부탁을 받아서 하게 된, ‘봄날은 간다’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서는 매주 출연 가수가 바뀌듯, 편곡자도 바뀝니다. 저 역시 고정 편곡자가 아니지요. 출연이 확정된 가수의 해당 기획사는, 소속 가수의 무대를 맡아줄 편곡자를 직접 찾아 의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게 우연인지, 저와 인연 있는 가수들이 자주 출연하며 함께 무대를 꾸미다 보니, 제가 ‘고정 편곡자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한 가수가 일 년에 한 번 출연하게 되더라도, 제가 50명의 가수 작업을 해주다 보면, 매주 나가게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제가 작업한 무대를 보고, 의뢰가 또 들어와서 새로 작업하는 가수도 생기다 보니, 점차 의뢰 횟수가 늘어나, 한주에 두 팀 이상의 가수에게 의뢰가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작곡과 편곡의 경계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단순히, ‘가락을 만드는 사람’을 작곡자라 하고, ‘이미 존재하는 가락에 덧대 음악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편곡자라 했지요. 쉽게 말해, 음악을 전혀 할 줄 몰라도, 입으로 ‘흥얼흥얼’하며 만든 곡을 만든 사람을 ‘작곡가’라 칭했기에, 대중음악계에는 악보를 읽을 줄 모르고 화성학도 모르는 작곡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락’이라는 것에 음악을 입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편곡자들이 했었지요. 조금 진지한 얘기를 하자면, 그래서 과거엔, 음반 시장에서 작곡가보다 편곡가의 위상이 훨씬 더 컸고, 그에 비교해, 저작권 차원에선 작곡가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다툼의 여지도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가락만 만드는 사람을 작곡가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BTS의 ‘DNA’를 아무 반주 없는 상황에서 가락만 부른다거나, 혹은 통기타로 연주하며 누군가에게 들려준다 생각해보시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합니다. 현시대의 대중들은 이미 그 음악의 intro(전주)에 나오는 선율, 악기의 음색 등에서 곡에 대한 매력과 존재를 느끼기에, 가락뿐 아니라, 곡 전체를 만드는데 ‘기여’를 한 사람도 작곡가라고 칭합니다. 가락을 만들어 내는 능력과 그 가락에 얹힐 음악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을 작곡자라 하며, 그 두 가지의 역할 특화되어 나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코드나 비트 등, 음악만 만들어 내는 ‘트랙메이커’와 그 음악 위에 이제 가락을 작곡하는 ‘탑라이너’입니다. 국내의 SM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대형 기획사들을 통해 이미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송캠프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작곡자들과 국내 작곡자들을 한곳에 모아 일정 기간 작곡을 하고, 그 기간에 나온 곡들을 국내 유명 가수들과 기획사에 런칭하는 시스템입니다. 작곡가의 기준이 나누어지면서, 편곡의 개념 역시 과거와는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창작곡이 아닌, 바로 ‘재구성’라고 하여, 이미 존재하는 원곡을 새롭게 재해석 하는 것입니다. 리메이크 시에는, 가수마다 각자 지닌 개성이 다르므로 편곡작업을 할 때는 그 가수의 성향과 특징 파악이 매우 중요합니다. 동시에, 원곡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인지하고,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살리고, 바꿀지, 범위의 계산 등 멀리서 큰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원곡을 망쳤다는 원성과 비난을 살 경우가 많습니다. 작업 기간은 곡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일이 많을 땐 1주일에 4곡 이상도 해본 적도 있어요. 그러나 평균적으로 한 곡당 1주일 정도 걸립니다. KBS 예능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를 통해, 지난 몇 년간 출연하는 수많은 가수의 음악 편곡을 담당하시면서 '최다 연승기록', '최다득점기록', '왕중왕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기록을 세우고 계십니다. 매주 방영되는 만큼 매주 기분도 색다를 것 같습니다. 우선은, 이제껏 제 부족한 음악을 잘 표현해준 수많은 가수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인 시간과 음악적 노력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기쁘기도 합니다. 창작이란 ‘영감’(靈感) 을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게 그런 ‘영감’을 허락해주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통해 편곡한 많은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명곡은 소향 씨와 함께한 'you raise me up'입니다. 음악적으로 신경을 많이 썼기에 작업 시간도 오래 걸렸고, 그만큼 만족스럽게 나온 무대이기도 합니다. 소향 씨가 당시 폐렴으로 노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도로 의지하고, 독려하며 작업에 임했던 기억이 있어, 기독교인인 저에겐 더욱 의미가 있는 곡입니다. ‘불후의 명곡’은 예상치 않았던 훗날의 정말 많은 작업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고마운 방송입니다. 그동안 다수의 경연 방송에 참여했지만, 유독 ’불후의 명곡’을 통해 보여준 제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 연결되고, 파생 된 프로젝트들이 매우 많기에 정말 고마운 프로이지요. 특히, 제가 예전엔 음악적 기능에 집중했다면, 이 방송을 통해 관객, 혹은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중요함, 그리고 그 힘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프로그램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닌, 시선이 집중될 수 있게 구현해야 하는 음악의 형태이기에, 곡의 가사나 내용이 마치 생동감이 넘치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연습하고, 터득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의도치 않게 뮤지컬 작업도 하게 되었고, 다른 음악 작업 때도 듣는이들에게서 더 큰 공감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 작, 편곡, 프로듀서 외에 가수 테이와 함께 '핸섬피플'이라는 밴드 활동도 하고 계십니다. '핸섬피플'의 소개 부탁드릴게요. 2005년, 테이 3집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2곡에 참여했는데, 작업하는 동안 테이와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고, 좋아하는 음악적 성향도 잘 맞아, 매우 즐겁게 작업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만남이 이어져 테이 씨의 콘서트 밴드 마스터까지 맡게 되었고, 그렇게 더 많은 음악적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밴드 음악을 좋아했고, 테이 씨도 학창시절 록 밴드에서 활동했었기에, ’언제가 꼭 한번 같이 밴드를 해보자‘ 얘기를 했었는데, 실현 된 것이 바로 ’핸섬피플‘입니다. 밴드 이름을 처음 정할 때 후보가 둘이 있었는데 이름은 ‘브로큰보이즈’와 ‘세컨플로어’였습니다. 고장 난 소년들이란 뜻의 ‘브로큰보이즈’란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완해주며, 조금씩 완성되어 가자’라는 의미였고, ‘세컨플로어’는 실제 홍대에 있는 어떤 2층 카페 이름이었는데 그냥 어감이 좋아서 후보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적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부정적인 말이나 단어가,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배워왔고, 그게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았나 봅니다. 그래서 평소에 아무리 속상해도 스스로 자책하는 말이나, 자기 비하하는 말은 항상 인지하고 속으로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 저에게 ‘브로큰’이라는 단어와 ‘세컨’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에 와닿지 않고, 조금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테이 씨와 회사에서 아무리 설득해도 저는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그걸 답답해하던 테이 씨가 홧김에 ‘그럼 그렇게 긍정적인 단어로만 해야 하면 핸섬피플로 하던가!’라고 던진 말에 제가 바로 ‘오케이!’를 외친 게 팀명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긍정적인 이름이라 매우 마음에 들긴 하지만, 조금은 민망한 이름이라 추후 굳이 팀명에 대한 의미라는 게 외모가 잘생겨서 ‘핸섬’이 아닌 음악이 ‘핸섬’하다는 설명이네요. (웃음) 여러 다른 인터뷰 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테이 씨는 정말 성품과 인격이 잘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소위,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고 할까요? 어떤 이들은 서로 간의 윈-윈 하는 비즈니스를 위해 단기간 예우를 갖추고, 도움을 주는 등 잘할 수는 있으나, 삶에서 영향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오랜 기간 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옆에서 바라본 테이 씨는 항상 주위 지인들을 돕고 챙기는 사람입니다. 의리 차원에서 초창기 멤버들을 챙기고, 오랜 기간 큰 손해를 감수하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을 오랜 기간 지켜본 1인으로써 테이 씨는 정말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밴드 ‘핸섬피플’은 스타일리쉬한 음악을 하는 대표적인 밴드로 인식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마룬파이브 첫 내한공연 당시, 오프닝무대에 출연제의를 받았었고, 첫 싱글인 ‘shall we dance'를 발표했을 땐, 팝가수 에릭 베넷의 극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싱글앨범 3장과 정규앨범 1장을 발표했으며, 들국화 리메이크 프로젝트 음반에도 ’세계로 가는 기차‘로 참여했습니다. 또한, MBC ’나는 가수다‘의 방송에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고, 국내 최대 EDM페스티벌, ’UMF‘에도 초대받아 무대에 섰었습니다. 테이 씨의 군 복무로 인해, 2011~2012년까지 2년 동안만 활동했으며, 다시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성결대, 서경대, 백석예술대학에서 제자이자, 후배, 미래의 동료가 될 이들을 양성하고 계시는데요. 대중음악계의 종사자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현재 성결대 실용음악과에서는, 프로덕션에 관련된 전반적인 과정을 배우는 ‘세션레코딩’, 편곡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편곡법’, 앙상블에 대해 배우는 ‘라이브퍼포먼스’ 등의 수업을 맡고 있으며, 서경대 실용음악과는 학부와 콘서바토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학부 보컬과 작곡 전공자들의 전공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음악 감독 활동이 주 역할이지만, 연출 활동경력도 상당하여, 백석예술대에서는 음악 관련 과가 아닌 공연기획과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공연연출’ 수업을 맡아 방송 및 콘서트 PD 및 감독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3명의 제자가 실제 필드 연출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최근까지 ‘워너원’, ‘지창욱’, ‘GOT7', ’소리바다어워즈‘ 등의 큰 공연들에 연출을 맡아 활동 중입니다. 가수를 꿈꾸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기고, 대형 기획사에는 몇십 명, 몇백 명에 이르는 연습생들이 있습니다. 매년 연예계 관련 학과의 입학 경쟁률은 치열해져 갑니다. 그 사이, 대중음악계는 그 어느 곳보다 혹독합니다. 하지만, 무대의 크기, 장소, 모인 관객 수, 그 모든 것을 넘어 그저 노래하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면 가수를 해도 됩니다. 초반에는 누구나 잘 버틸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버팀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계 때문일 수도 있고, 본인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정신력 문제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땐 꿈이 어디에 있는지,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연예계에서는, 사람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을 소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특히, 음악계에서는 그것이 아주 오랜 기간 (수십 년이 될 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후발주자들이 먼저 대중의 인지도와 인기를 얻는 성공을 이루었을 때 받는 상대적 박탈감은 매우 큽니다. 그러나, 큰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그게 평생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지요. 아이돌을 포함해 아무리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탑가수들도 대부분 수십 년이 지나면 찾아주는 이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그때도 음악 자체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며, 그 외적인 것에 집착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하게 됩니다. 주위에 보면 소위 ’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지요. 음악도 충분히 취미처럼, 혹은 그 이상 준 전문가처럼 활동하거나,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 결정인 만큼, 가수가 되고 싶거나,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본인이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시기를 조언합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꼭 대중음악계라고 지칭하기보단 삶에서의 자세를 항상 강조합니다. 혼자가 아닌 여러 분야의 기술을 가진 사람과 동조하는 만큼,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같은 동종업계에서 특출나는 실력과 영향력을 갖추어 특별한 권한과 혜택을 누리고 싶다면, 그만큼 특별하게 노력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인들과의 경쟁이 아닌, 같은 재능과 감각을 가진 특정인들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졸릴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여가도 적절히 즐기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매우 당연하며, 20대가 더욱 즐겁게 누릴 수 있는, 그 시절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했듯,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평범한 또래들이 다 하고 있는데 본인 또한, 이런 것들을 다 누리면서, 특별한 지위와 특권까지 얻으려 하는 것은, 그 발상 자체부터 잘못됐다고 봅니다. 돈도 많이 벌고, 또래 집단에서 흔하게 얘기하는 ’넘사벽‘ 실력을 갖추어, 프로세계에서 활동하며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명예를 누리고 싶다면, 저는 ’그만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밤새며 도전하는 사람보다는, 매일 밤새는 사람이 더 좋은 실력을 갖출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은 경쟁에서 살아남아, 많은 곳에서 찾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스타 작곡가들 인터뷰 영상이 꽤 많은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핵심 내용은 비슷합니다. ‘실력을 갖추는데 지름길은 없다.’, ‘지하작업실에서 수년간 나와 본 적이 없다.’, ‘죽기 살기로 하는 방법밖엔 없다.’ 등등 인터뷰 중 실력향상 방법에 대한 대답들과 저의 생각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된 길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방향성을 알려만 주는 거지요. 그저 음악을 자체만으로 즐기며 할 사람과, 특별하게 탁월한 실력을 갖추기 원하고, 특별한 혜택을 누리길 원하는 사람에 관해서요. SNS를 통해 성실한 남편, 그리고 육아대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행사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참가하는 등, 가족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는데요. 가족은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현재의 아내와의 첫 만남은 교회에서였습니다. ‘교회 오빠’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당시 아내는 제게 ‘교회 누나’였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제가 꿈꿔오던 이상형을 만났고, 정말 열심히 따라다녔죠. 그러나 당시 아내는 매우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에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1년여의 구애 끝에 겨우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 복무는커녕,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사회초년생인 저를 애인으로 받아준 게 고마워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아내가 깼습니다. 아내 덕에 저의 성품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저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연애의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상대방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어요. 또한, 저는 매우 차갑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성향을 지녔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바람만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만큼 감성적이고, 따뜻하며,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예요. 그런 아내 입장에서는 저와의 만남이 매우 힘들었을겁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저를 오랜 기간 참고 기다려주며, 서로 배려하고,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몸소 보여주고, 실천했습니다. 특별히 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대부분 제게 맞춰줬어요. 제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처음엔 아내를 위해서 했던 노력인데, 결국, 그런 노력이 동료들과 함께 협업해야 하고, 대부분 공동체나, 조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저에게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어요. 저는 그렇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고, 잡아주고, 이끌어준 아내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유전자가 아이들에게는 전혀 없는 듯합니다. 두 아들 모두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잘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나마 첫째는 음감이 좋은지 한번 들은 노래를 곧잘 따라 하며, 둘째는 음악이 나오면 리듬을 타긴 하는데 보통 평범한 아이들의 수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어떤 직업이든 원하는 것이 사회적이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저는 자녀들이 솔직히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그저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대부분 부모님이라면 같은 생각이실 것 같습니다. 저는 삶에 대해서는 교육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녀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의에 대해 강조하는 편입니다. 추가로 정직에 대한 부분도 엄중히 가르칩니다. 이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덕적 삶을 강요하는 차원의 접근이 아닌, 한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관련된 방향성이기에, 반대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본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람에 있습니다. 가족이 삶에서 부여하는 의미는 제 유일한 안식처, 영원한 제 편, 제 삶의 목적 등, 결국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2018년 5월 12일 방영된 KBS '불후의 명곡'에서 소향이 부른 'You Raise Me Up'은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최영호 또한, 본인이 프로그램을 통해 편곡한 수많은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으로 꼽는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이제껏 그동안 음악 인생계획에 없었던, ‘음악 감독’이란 역할을 최근 몇 년간 부쩍 많이 맡게 되었습니다. 연주자,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와는 또 다른 포지션인데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꿈은 언젠가 꼭 한번은 모든 국민이 한 번쯤은 듣고, 부를 만한 ‘국민히트곡’을 써서 ‘히트 작곡가’ 타이틀을 달아보고 싶습니다. 그 전에, 어떤 역할이 맡겨지더라도, 일의 결과보다는, 정직하고 성품이 바르며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책임감 있는 음악가가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무명 음악가며, 부족한 저에게 이런 소중한 인터뷰 기회를 주신 [Avec G] 미디어 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음악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기도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독자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최영호, KBS 영상 제공: KBS K-POP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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