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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문의 <김경훈>

7/17/2019

 
​2017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 되었던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문의 김경훈 교수! 그와 함께 100세 시대,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정형외과가 끼칠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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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대전 바로세움병원에서 관절센터장이자 진료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경훈입니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직장을 옮기면서 대전에 내려와 살고 있습니다.

대전에 내려온 지 만 5년이 좀 넘었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갑갑한 도시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살기 좋은 도시라 생각됩니다.
 

지난 2017년 '대한민국 100대 명의'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지금은 실력 있는 의사가 되셨지만, 학창시절의 꿈은 의사가 아니셨었다고요?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장씩 그림과 만화를 척척 그렸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책을 친구들이 돌려보면서 재밌어하는 것을 보며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꼈었습니다. 만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반대하셨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락실을 자주 출입했다는 것 정도?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어서, 지금도 좋아하는 농구를 그때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는 만화를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부모님 직장문제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 삶을 바꾸는 일이 있어났습니다.
보통 전학을 가게 되면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누가 떠나게 되니 작별인사를 하자’라는 식으로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때 제 귀를 의심할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반에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경훈이지만, 전학을 간다고 하니 서로 인사를 나누렴.’

저는 어린 마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 나도 공부 한번 잘해보자. 그래서 인정받아보자.’
 
기본이 부족했던 상태였는데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중학생이 월화수목금토일을 영어 단어로도 몰랐습니다. 다행히 전학 간 학교에서 세 명의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저와 비슷하게 농구를 좋아하면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대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맘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학 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닥치는 대로 구매하여 매일 새벽 3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앞집 아파트에 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전학을 갔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둘 시기에는 상위권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난생처음 반장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면서는 학생회 부회장도 맡게 되었습니다. 성적은 계속 전교 1~3등을 유지했습니다. 성적이 나오면서 진학목표도 조금씩 높아졌습니다. 예전엔 의대는 꿈도 못 꾸는 성적이기도 하고, 그림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디자인과 관련된 학과를 갈까 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꿈이 ‘의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는 의대에 진학하길 바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대에 입학하는 것은 성적이 좋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굳이 의학 쪽으로 진학한다면 의사보다는 수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약사셨기 때문에 매일 약국에서 환자들을 응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입학원서를 접수하는데 부모님 뜻대로 한양대 의대에 하나, 제가 원하는 서울대 수의학과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 3차 지망으로 한림대 의대에 하나, 이렇게 세 곳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모든 곳에서 합격 통지가 왔고, 부모님께서는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면서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승낙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가족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고, TV로 뉴스를 시청하던 중, 세계뉴스 시간에 한 사건이 방송된 것입니다. 인도의 수의사 얘기였는데요, 인도의 수의사가 변비에 걸린 코끼리를 관장하다 똥이 터져 나와 똥에 깔려 질식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뉴스를 보자마자 어머니께서는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절대로 수의학과에 못 간다고, 수의사 되려면 어머니랑 연을 끊든지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의대 진학 결정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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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과 중에서도 '정형외과'를 진로로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과 쪽보다는 외과 쪽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의대생 시절에는 외과 쪽 선생님들은 과를 불문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수술 가운을 입고 병원을 활보하고, 수술로 병을 치료하고, 상처를 돌보는 모습은 어렸을 때 상상해온 의사의 모습과 일치했습니다.
 
그중, 단연 제 마음을 빼앗은 과는 정형외과였습니다.
수술 전날은 아파서 서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다음 날 하루 만에 일어나 안 아프다면서 교수님께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랬듯, ‘일어나 걸으라!’ 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형외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렵게 정형외과 전공의가 된 후에는 힘들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외과 의사가 힘들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겁니다. 전공의 1년 차 때 소위, ‘백일당직’이라고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은 1년 차 전공의에게 100일 동안 당직을 세우며, 집중 트레이닝을 시킵니다. 당연히 백일 동안은 병원에서만 생활하며 집에 가지 못합니다. 온갖 정형외과 내 잡일을 맡아서 하고, 응급실 비상 전화도 독박으로 받게 됩니다. 백일당직이 끝나고 나면 꼴이 말이 아닙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습니다.
 
제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백일당직이 끝나는 날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둘러메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저를 쓱 보더니 따라오는 겁니다. 엘리베이터도 같이 따라 타시더니, 이상한 눈으로 계속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도 문을 닫지 않고 저를 지켜 보시기래, 저는 ‘뭐지?’ 하는 생각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경비아저씨가 저를 말리십니다. ‘저기! 그 집 얼마 전에 이사갔는데!?’, ‘이 집 아들이었구나, 행색이 하도 수상해서 도둑인 줄 알았지 뭐야.’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부모님께서는 제가 하도 집에 안 들어오니, 연락도 없이 이사를 가신 거였습니다.
그날 밤은 결국 차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둘러메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수련의 생활을 했던, 한일병원 정형외과 의국은 당시에 전공의 수가 감원되면서 업무량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약 70~80명의 입원환자를 보았는데 년 차마다 한 명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화상 전문병원이라 2~30명의 화상 환자가 항상 깔려 있었기 때문에 1년 차 주치의 때 전신 화상 환자분들이나 전기화상 환자들 상처 치료 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고는 했습니다. 못다 한 상처 치료는 새벽 3시가 되건 4시가 되건 자는 환자를 깨워가면서 했습니다.
 
시스템상, 1년 차는 입원 병동과 응급실을 맡고, 2년 차는 수술실 보조와 외래 보조를, 3년 차는 후반기부터 치프 역할을 하면서 수술실을 전담하게 됩니다. 대신 4년 차 졸업은 빠른 편이어서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치프 업무를 3년 차에게 인계하고 병원 일에선 대부분 손을 떼게 되고 전문의 시험을 대비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많고 의사 수는 부족하다 보니 스텝들도 그 많은 환자를 다 소화할 수가 없어서 전공의 앞으로 수술이 많이 떨어집니다. 3년 차 치프를 마칠 때쯤이면 웬만한 수술은 다 할 수 있는 수준이 됩니다. 그렇게 힘든 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고 할까요?

요즘은 전공의 선생님들이 수술을 받을 일이 없어, 전문의를 따더라도 수술을 배우기 위해서 전임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임의가 되어서도 수술보다는 논문 쓰느라 대부분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형외과 중에서도 전문 분야가 다름 아닌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이십니다. 일반 정형외과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정형외과가 영어 단어로는 ‘Orthopedics’입니다.
세부적으로 떼어서 보면, ‘Ortho’라는 말은 ‘곧게 하다’, ‘반듯하게 하다’라는 뜻이고, ‘Pedics’는 ‘소아’,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소아를 곧게’, ‘반듯하게’ 하는 학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과거, 소아마비, 뇌성마비, 측만증 등 여러 선천성 변형 및 기형 질환이 많았을 시절에 아이들을 곧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소아·청소년 정형외과라는 것은 정형외과의 시작이고 근본이 됩니다. 다만, 의학의 발달로 소아마비가 정복되면서 옛날만큼 소아 환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비중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그러나, 척추측만증, 뇌성마비나 그 외 선천성, 유전성 근골격계질환, 편평족이나 요족과 같은 족부질환, 팔다리가 휘는 각 변형이나 길이 차이가 나는 상하지부동증에서는 성인에서는 치료가 어려우므로 소아·청소년 정형외과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환자들은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몇몇 대학병원에서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집중현상이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정형외과 전문의라 하더라도 위와 같은 질환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소아·청소년 정형외과를 분과 전문으로 선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름 국가에서 인정한 전문의 자격증을 당당히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아 환자만 만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둘러대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소아·청소년 정형외과에 대해서 꼭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전공의 시절에 스텝으로 계셨던 선생님을 학회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 정형외과 전임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병원에서 벗어나 현재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므로 주로 경증의 척추측만증, 평발, 내외반슬 환자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수술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무의미한 보조기나 깔창에 의지하다 수술 시기를 놓쳐서 오는 경우는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매우 안타깝고, 부모님들께 설명해 드리다 보면, 가끔은 원망 섞인 하소연을 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평발 수술을 받은 여학생의 경우, 근처 대학병원을 비롯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수술에 관한 설명은 들어본 적도 없고 무조건 깔창만 착용하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제 소문을 듣고 수술을 받기 위해 찾아온 환자였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학생이어서 교정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현재 재활치료 중입니다.
 
소아에서 시행하는 교정술은 대부분 잔여 성장을 이용한 수술이기 때문에, 성장판이 서서히 닫히는 시기, 즉 남아의 경우 (만) 15세, 여아의 경우 (만) 13세가 지나면 수술적 교정이 어렵습니다. 수술을 시행한 뒤에도 교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려면 몇 년간의 잔여 성장 시간이 필요하므로, 수술 대부분은 (만) 11세에서, (만) 13세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많은 환자분이 이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외래를 보다 보면 안타까운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자식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좋아할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근골격계 변형의 치료에서 운동요법과 보조기에만 의지한 채 수술적 치료를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인에서 휜 다리를 교정하려면 뼈를 잘라야 하는 절골술이 필요하고 뼈가 붙을 때까지 목발 보행이나 재활과정이 필요하지만, 소아에서 시행하는 편측성장판고정술의 경우 수술 후 다음날 퇴원이 가능할 정도로 수술이 간단하고 일상생활에 제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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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 전문의 자격 획득 후, 1년간 서울 아산병원의 전임의로 재직하시다가, 지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병원을 옮기셨지만, 계속 개원의가 아닌 봉직의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봉직의로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저도 이렇게까지 한 병원에서 오래 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개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현재 근무 중인 병원의 병원장님과 더불어 직원들이 좋아서 지금껏 함께하고 있습니다.
 
병원장님 역시 대전 출신은 아니십니다. 고향은 진주이시고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오셨으며, 서울 아산병원에서 수련을 마치시고,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셨고, 몇 해의 봉직의 생활 끝에 현재 병원을 개원하셨습니다. 병원을 훌륭하게 키우셨고 병원발전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고 계시며 여러 사회 분야에서 존경받으시는 분입니다.
 
제가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 일면식 없는 저에게 신뢰를 보여주시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저는 전임의를 마치고 첫 직장을 대학교 선배님이 개원하신 신생병원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환자를 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교적 환자 수가 적은 신생병원이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병원은 대학병원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철저히 환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과 같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생병원이 그렇지만 수익이 나지 않으면 병원이 버티기 힘들고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의료진 중에서는 제가 막내였기 때문에 병원이 힘들어지자 퇴사 조치가 되었고 첫 직장에서의 생활은 1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습니다.
 
실직 후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과정은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관절, 척추 전문병원이 많이 생겼지만 제가 개원가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의사에게는 스펙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문병원도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유명하고 실력 있는, 소위 스타급 의사를 모셔오고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직 시에 이전병원에서의 매출액이 의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 있었습니다.
 
며칠 간격으로 두 군데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한결같은 첫 질문은, ‘매출 얼마나 올려주실 수 있으세요?’였습니다. 저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제가 배운 의술은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의사가 매출경쟁을 하는 존재가 되었나….’ 싶었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학병원을 나오지 말걸….’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래도 교과서적으로 배운 대로 소신껏 진료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면접일 저녁, 병원 쪽에서 입사가 결정되었으니 언제부터 근무가 가능하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저는 그런 의사가 아니라고. 그다음 병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달 가까이 이 병원, 저 병원을 알아보면서 직장을 구하던 중, 우연히 지금 병원장님에게서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병원장님께서 말주변이 없으시다며 이메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메일의 내용은, ‘본인이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믿고 맡길만한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본인은 신경외과 의사라 정형외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또한, 본인도 지역 출신이 아니라 주변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다.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다. 매출은 신경 쓰지 말고 제대로 된 정형외과 진료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김경훈 선생의 이력서와 블로그 내용을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 낯선 곳이지만 내려와서 같이 일해주면 고맙겠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심신이 지쳐서였을까요? 저는 그 메일을 보고 드디어 제가 찾던 병원을 찾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병원장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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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언론조사에서는 대한민국 평균 수명을 82.5세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로 인해 그 수명은 점차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흔히 '100세 시대'라고 부르지요. '100세 시대'에 끼치는 정형외과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제게는 가장 부담되는 질문이네요. 제가 어떤 분야의 권위자이거나 해당 분야에서 금자탑을 쌓은 사람이 아니므로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정형외과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상당히 기대되는 것은 몇 가지 있습니다.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진단 장비에 의한 진단 정확도가 높아질 겁니다.
기존에는 영상진단 장비로 검사를 진행 후에 의사가 검사물을 판독해야 했다면, CT나 MRI 촬영 후 AI가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문제가 있는 부위를 알려주게 되겠지요.

의학계에서 이런 흐름은 반드시 정형외과 영역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암세포를 더 잘 찾아낸다든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희소한 질병의 발견 확률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블 코믹스에서 제작한 영화 ‘아이언맨’을 기억하시나요?
영화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본인이 착용할 아이언맨 수트를 디지털 영상화하여 이렇게도 만들어 보고, 저렇게도 만들어 보면서, 실제로 착용한 것처럼 시뮬레이션을 돌려 봅니다.
 
의학도 그렇게 발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술할 환자의 해부학적인 구조, 위치 등을 미리 디지털 영상화하여 수술 전에 시뮬레이션을 돌려 볼 수 있을 겁니다. 수술 시뮬레이터로 모의 수술을 미리 해봄으로써 더욱 안전하고 정확한 수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는 기증된 사체(카데버; Cadaver)를 이용하여 모의 수술이 유일한 수술 연습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체를 이용한 모의 수술기회는 흔치 않고, 반복해서 연습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술 시뮬레이터는 언제든지 데이터베이스에서 불러와 연습할 수 있으므로 교육용 프로그램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3D 프린터를 이용한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환자의 몸에 딱 맞는 인공관절이나 몸속에 삽입될 다양한 임플란트, 보형물 등을 3D 프린터로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환자의 몸에 딱 맞는 임플란트는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기성품보다 우수하므로 3D 프린터를 이용한 보형물 제작과 이를 이용한 수술은 성형외과 영역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외과 영역에서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인공관절술과 더불어, 3D 영상장비를 이용한 로봇 인공관절 수술이 대표적입니다. 로봇인공관절술을 이용하면 뼈의 절삭면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하지 정렬을 맞추는데 유리한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가 고령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더불어,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예전에는 난치병으로 여겨지던 질환들이, 현대의학의 발달로 하나하나 정복되어 가거나, 극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늘어난 평균 수명만큼 관절 수명이 늘어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외래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노인성 질환이 바로 퇴행성 관절염입니다.
사람의 대부분은 60대에 접어들면서 관절연골의 마모되기 시작하고, 뼈가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뼈가 부딪히게 되니 통증이 심해지고, 통증이 심해지니 육체적 활동이 힘들어집니다. 육체적 활동이 어려우면 직장생활이 곤란해져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운동량이 줄어들면 심폐기능이 떨어져 전신질환이 악화할 수도 있으며, 골다공증이 악화하여 척추골절이나 대퇴부골절의 위험성이 증가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환자는 우울해지기 쉽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게 되므로,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망가진 관절은 원래대로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자가연골이식술이나 줄기세포이식술을 이용하여 관절연골손상을 회복시킬 수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고 모든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며, 회복된 연골 역시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인공관절술에 의존해야 하나, 인공관절도 마모가 일어나고 수명이 있으므로, 이른 나이에 수술을 받게 되면 재수술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재수술은 아무래도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의 인공관절수술로 평생을 쓰려면 되도록 늦게 수술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 인공관절을 시행할 수술 시기도 늦어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과거, 65세 정도의 심한 퇴행성 관절염 환자라면 따질 것 없이 인공관절을 시행하였으나, 요즘은 65세도 이른 나이입니다. 그렇다고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무조건 버틸 수도 없습니다. 인공관절수술이 필요하면 해야죠.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런가요? 수술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요?
 
퇴행성 관절염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질환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질환의 특성을 이해하고 본인의 관절을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관절을 아껴 쓴다고 해서 마냥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체중조절은 필수이고, 적절한 운동을 통한 근육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육은 관절을 보호하고, 안정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합니다.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며 본인의 수준에 맞는 운동이 좋습니다.

추천할만한 운동으로는 걷기운동, 하이킹, 자전거, 수영 등이 있겠습니다. 생활습관을 바로잡음으로써 관절을 더 건강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활습관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병원을 이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간혹 관절염으로 오신 분들께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드리면 마치 통증만 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약을 안 드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관절염이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염증 물질, 이화 세포 등이 관절을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관절염의 진행을 늦출 수 있습니다.

외래에서, '연골주사'라고 불리는 하이알루로닉산(hyaluronic acid) 주사는 윤활유 역할을 하여 손상된 관절연골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얼마 전 일어났던 모 제약의 ‘인보사’ 관련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나, 4차산업 혁명 시대, 다가올 미래에는 유전자,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가 주를 이루게 될 것이고,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하여 관절 수명을 한층 증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임상 자문의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십니다. 의사들은 이미 출중한 재원임이 분명 합니다. 그 외에, 특별히 정형외과의로서 가장 필요한 재능은 무엇일까요?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영상장비, 검사장비들이 개발되면서 환자를 진단하기가 무척이나 용이해졌습니다. 의사들 자신도 환자를 직접 살펴보는 이학적 검사방법보다는 초음파, CT, MRI 같은 영상의학적 진단 장비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환자분이 진료를 보러 오셨습니다. 제가 진찰을 해보겠다고 진료실 침대에 누워보시라고 하였고,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진찰을 하고 있었는데, 환자분 말씀이, ‘여러 병원에 다녀봤지만, 이렇게 자세히 만지면서 진찰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라며 감격해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관절질환 환자를 진단하려면 영상장비를 이용한 검사도 중요하지만 직접 만져보고 움직여도 보고 해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검사상에서는 발견되는 소견이 환자의 증상과는 전혀 무관한 때도 있으므로, 무턱대고 검사결과만 믿고 치료를 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박리다매가 강제되는 대한민국 의료환경에서 환자 한분 한분을 꼼꼼히 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의사라면, ‘의술뿐만 아니라 인술을 펼쳐야 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환자분들의 아픈 부위를 한 번이라도 짚어보고 어루만져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소위 말하는 ‘인술의 시작’이라고 배웠고, 그 정신은 이어 나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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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는 지금 병원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같이 근무하고 있는 동료 의사분들 모두 훌륭하시고, 직원들 모두 가족 같습니다.
 
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하신 병원장님을 모시고 지금 병원을 훌륭한 병원으로 만드는 것도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의사입니다. 의사들이 가장 보람과 기쁨을 느낄 때는 환자들이 좋아졌다며 활짝 웃어 보이실 때입니다. 그 미소와 웃음을 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환자를 대하는 것이 무서웠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보다 ‘아픈 동물’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이없게도, 전에 설명한 인도 수의사 덕분에 제가 의사의 길을 가게 됐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타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일하니, 이보다 고귀하고 보람 있는 직업이 있을까요?
이 순간에도 환자의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의사 선후배님들께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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