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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산재 분야 변호사 <손익찬>7/1/2019 세상에서 '노동'이야 말로 어쩌면 가장 정직하지 않을까? '노력한 만큼' 그리고 '그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 그리고 노동장에서의 '산재'란 가장 '공정'해야 한다.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것'. 이 간단한 이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찾을 수 없는 쟁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쟁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과 '산재' 분야의 변호사인 손익찬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노동자의 권리와 건강을 지키는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의 손익찬 변호사입니다. ‘일과사람’은 노동사건과 노조자문, 그리고 산재 사건을 합니다. 이런 사건에서 전혀 회사 측을 대리하지 않고, 오로지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하고 생각한다는 점이 우리 사무실의 강점이자 특징입니다. 저는 2013년도에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2016년도까지는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했습니다. 후에, 첫 직장으로 경기도청에서 임기제 공무원으로 잠깐 있다가, 2017년 3월부터는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에서 노동사건, 노동조합 자문, 산업재해 사건을 담당했습니다. 2019년 2월부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회 회원이면서, 노동자건강권팀의 팀장을 하고 있고,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비상근)으로 위촉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개를 하자면, 2014년, 교회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다섯 살과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습니다. 막간을 이용해 홍보하자면 제 아내는 용인 수지에서 ‘언니들 방앗간’이라는 이름으로 떡케이크 가게를 하면서 앙금플라워 케이크, 백일 떡, 돌떡, 답례 떡을 만듭니다. 많은 진로 중 왜 '법대' 진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법대 재학 시절, 사법시험이 없어지고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시험 합격 전, 학창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파트 숲속의 신도시에서 자랐고, 큰 고민 없이 살아서, 직업적인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무언가를 하면서 살고 싶긴 한데, 뭐가 하고 싶은 것인지,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살면서 큰 계기가 없었고 롤모델도 딱히 찾기 어려웠다고 말씀드리면 정확하겠습니다. 고등학생 때 그런 고민을 저의 친형님한테 털어놓았습니다. 저의 형님이 저보다 두 살이 많고 공부도 잘하셨거든요. 저의 형님께서는 저에게 우선 성적을 잘 얻고 그 좋은 성적으로 대학진학에서의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일리 있는 말씀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성적이 잘 나와놓고 보니까, 대학도 성적에 맞춰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인이 이상이나, 생각이 없으면, 성적이 잘 나와서 학과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도, 주변의 기대대로 선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당시 법조인이 될 생각이 없이 법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대 신입생 때는 외무고시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제2외국어도 전문가 수준이어야 하고, 제3외국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하여야 한다기에, 외무고시는 빨리 포기했습니다. 사실 대학교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딱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 없이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수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고, 책을 깊이 있게 보고, 생각하고, 빠져들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도서관 가서 정말 여러 가지 책을 접했습니다. 법학 서적을 보더라도 수험서를 안 보고, 교수님들이 쓰신 법학 서적도 밑줄 그어가면서 거기에 저 혼자서 교수님 생각도 비판하는 견해도 쓰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면 법대생으로서는 자격 미달로 살았던 셈입니다. 동아리나 이념서클, 종교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것도 아니어서,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대신, 저는 도서관에 가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7년, 저는 동문 다 하는 사법고시 공부도 해봤지만 1차 시험에 떨어지고, 바로 봄학기에 복학한 다음에는, 정말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늦게나마 고민했습니다. 앞으로 3학기만 다니면 졸업이어서 군대를 가야 했습니다. 제겐 시간이 없어 보였어요. 그때가 2008년이었는데, 한창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 한반도 대운하, 의료민영화 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1년 만에 나라가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에 ‘2MB’나 ‘쥐박이’같이 대통령을 욕하는 댓글만 달아도 경찰서에 불려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 시절 때는 그런 면에서 덜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문재앙’이라고 댓글 달았는데 경찰서 불려간다고 상상해본다면 그때 사회 분위기의 느낌이 오시겠죠. 법대생으로서 시국을 바라보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헌법 수업에서,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뽑아놓은 사람’이고, ‘명예직인 국가원수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불과한 국민의 한 사람’인 거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나은 답이 도출되는 거’라고 배웠는데, 모든 게 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살아본 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사는 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2008년, 그 한해,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혼자 외롭게 나갔습니다. 경찰들이 집회 나온 시민들을 때리고, ‘닭장차’에 연행하고, 전경들이나, 경찰들은 역시 밤새우면서 고생하고, 시위대는 경찰차 때려 부수고,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결국, 우리는 다 별 볼 일 없는 국민인데, 정치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진 ‘어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뭘 했나?’ 싶은 거죠. 저는 그때 대학교 졸업도 앞두고 있고, 남들이 보면 명문대 법과대학 출신으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여길 텐데, ‘나는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도대체 뭘 했나?’ 돌아봤는데, 정말 ‘하나도’ 없는 겁니다. 대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시위한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남들 고시 공부할 때, 공부하고 '위닝 일레븐' 할 때, 같이 '위닝 일레븐'하고, 혼자 도서관 가서 책보고 그게 전부인 거에요. 그때부턴 ‘누굴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몇 년이 지나면 결국 똑같은 어른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에 법과대학에 개설된 박경신 교수님 수업을 듣고, 교수님이 주도하신 ‘리걸 클리닉’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리걸 클리닉’이라는 것이 미국제도로서 로스쿨 내부기구인데, 비교하자면 인턴십이 로스쿨 학생들이 외부의 기관에 나가서 실무가들에게 일을 배우는 것이라면, 클리닉은 실무가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실무도 알려주고 교육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고려대가 2009년 개원할 로스쿨 시대를 대비해서 학부생들 대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했는데 저도 구성원이 된 것이지요. 박경신 교수님의 지도하에 소위 말하는 인권변호사들, 공익변호사들을 만나고, 또한, 언론노조나 외국인노조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2008년을 지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변호사 중에서도 공익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꽤 있고, 보람차게 사는 모습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롤모델로 삼을만한 분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과 상관없이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어요. 사회 전체를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보수는 정치, 재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가 지금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방식으로 굴러가는 게 보였거든요. 하지만, 진보,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쪽은, 모든 면에서 자원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나’ 보니까, 그나마 잘 하는 게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론적인 연구를 더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로스쿨 체계가 도입된 이후여서, 앞으로 법과대학에서 학문하는 사람을 뽑더라도 실무가 출신을 선호할 거라는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 초에 법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다행히 부모님의 지지 아래, 2010년,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바로, ‘인권법학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때가 2010년도였는데, 사회 분위기가 ‘새벽이 오기 전’의 2시, 3시 같았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해가 뜨긴 뜨겠지만 언제 뜰지, 해가 정말 다시 뜰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질식해버릴 것 같은 시기였지요. ‘용산 참사’나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도파업’ 같은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는데, 뭐 하나 잘 되는 게 없고, 파업하면 업무방해죄로 끌려가는 등, 민사 손해배상이 줄줄이 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 시대를 지나며 저는 자연스럽게 노동문제와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모든 사람의 출발선이 공평할 수는 없습니다. 출발선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한 만큼 공정한 대가가 주어져 정의로운 사회겠지요. 말하자면 부모의 출신이나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한 개인을 존엄하게 여기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아야겠지요. 현실은 잔혹하더라도 목표는 그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사회문제 중에서도, 특히 ‘노동문제’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가장 왜곡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업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이 너무도 달라지는 것이죠. '얼마나 육체적인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하느냐', '월급은 얼마를 받느냐', '고용불안이 있느냐 없느냐' 등. 사회에 좋은 일자리가 너무 없으니까, 어떻게든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하고, 사교육에 과도한 비용이 들어가고, 온 국민이 줄 세우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기 전에는 그냥 모든 국민이 줄을 서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까 결국은 ‘돈 앞에 국민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걸 ‘자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념적인 공부를 한 게 아니어서 그게 적절한 표현인지를 알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표현하진 않겠습니다. 이제는 정치 권력보다도 경제적인 부, 돈을 가진 자가, 사회적인 자원, 문화적인 자원, 미적인 우위까지 모두 독점하고 있는데, 거기에 잘못 보이면,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힘듭니다. 그만한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객관식 답을 열심히 찍어왔고, 제 생각을 마음껏 펼치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왔던 것입니다. 제 생각대로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기는 사는데, 적극적으로 ‘남을 위한’ 인생을 사는 방법만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노동문제’ 중에서도 ‘산업재해’ 문제는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노동문제야 살면서 어떻게 싸워나가면서 노조도 만들고, 모순도 해결하고, 투쟁하며, 개선해나갈 여지가 있지만, 산재는 죽으면 그거로 끝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남은 자들은 괴롭고 슬퍼할 여지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이 세상이 너무도 무관심한 게 눈에 보였습니다. 오로지 비용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노동자도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저렇게까지 대우할까 싶을 정도였어요. ‘자기 부모나 자식이 죽었더라도 저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는 겁니다. 고용자들이 노동자를 자기 이웃으로,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당사자가 권리를 찾기 위해서, ‘싸우기로 했으면 끝까지 함께 싸워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를 돕는 단체인 <반올림>에 가서 유가족분들, 노동 안전 활동가분들 외, 노무사와 변호사님들을 만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마침 또, 제가 <반올림>으로 실무수습을 갔던 때에 산재 사건 중 역사적이었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1심 판결 선고도 있었고, 그때 당시 저를 지도해주셨던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조지훈 변호사님, 그리고 ‘민주노총 법률원’의 임선아 변호사님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봤던 사건들이 대법원에서 산재로 인정받았습니다. (대법원 2015두3867-다발성 경화증, 대법원 2016두1066-뇌종양) 또, 사건인터뷰를 했던 ‘매그나칩 반도체 엔지니어 산재 사건’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관여한 위 사건들에서 제가 법률적으로 한 것은 없고, 그야말로 변호사님이나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님 쫓아다니고, 노동 안전 활동가분들 따라다니는 정도만 하고 관련 판례 공부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우연히 한 사건 원고 분을 부산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제 또래였습니다. 제가 빠른 87년생인데, 그 원고분은 84년생 여성이셨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것 없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좋은 성적 덕택에,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남들과 다르지 않게 일했고, 일하다 보니 병에 걸렸다.’ ‘안전교육은 받은 것이 없고, 안전병에 대해 들은 바도 없다. 그저, 물량을 많이 빼야 해서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했다.’ ‘그러다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걸렸다.’ 이게 끝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서 이 분이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삼성반도체 최초 피해제보자인 故 황유미 씨는 85년생입니다. 故 박지연 씨는 87년생이었고요. 꽃다운 청춘이지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고 언제부턴 저보다 어린 피해자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삼성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을 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나 저와 같은 가장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보면서, 이 ‘노동 안전 문제’만큼은, 앞으로 어떤 분야의 변호사가 되든지, ‘관여해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전업’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영화 '재심'에서 정우(이준영 역)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대사를 합니다. '비싼 돈 들여 어렵게 공부한 이유가 뭐예요? 돈 많이 벌고 싶어서 아니었나?' 변호사의 분야도 다양하지만, 특히나 '노동 관련 변호사'라고 하면, '노동인권', '노동자', '프로보노' 등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금전적인 소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분야에 대한 분명한 소신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신혼집은 투룸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술집이 많고, 다방도 많고, 모텔도 많은 동네에 신혼집 차렸는데, 거기서 첫째가 태어났습니다. 밤에 창문 열어놓으면, 술병 깨지고, 사람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종종 들리는 동네여서, 밤에 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가는 것도 무서운 동네였습니다. 지금은 용인 수지에 살고 있습니다. 제 취미가 달리기인데, 수지지역을 달리다 보면 원룸, 투룸부터 작은 아파트, 고급아파트에 고급 주택까지 다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있다 보니 돈 많으면 애들이 해주고 싶은 대로 다 해주고, 미국유학도 보내주고, 여러모로 편리하겠지요. ‘노동 관련 변호사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못 버는가?’ 이렇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열심히 일하면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아무리 의미 있는 사건이어도 웬만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수임료를 받습니다. 대개, 해고사건이나 임금사건, 산재 사건을 맡기는 의뢰인이나 유족분들은 그렇게 수임료를 아끼진 않으십니다. 그만큼 의뢰인분들께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많은 분야 중에서도 하필 노동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앞선 질문에서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사회의 모순에 메스를 대자면 남북문제, 교육, 공정거래법 등이 있겠지만, 제가 직업을 선택할 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분야가 노동과 산재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그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저에게는 ‘티핑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왜 노동사건을 하면서 노동자, 노조 측만 대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자면, 양심적인 기업인을 대리하고 자문하는 역할은 저 외에 다른 훌륭한 분들이 많이 해주고 계십니다. 굳이 저까지 거기에 힘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물어보시는 말이,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해서, 사 측 사건은 아예 안 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이나 개별 단체의 도덕성을 떠나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편에서 사건을 하는 일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힘이 센 노조나, 힘이 센 개별 노동자는 우리 사무실에 사건을 맡기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영향력 있는 큰 법무법인에 사건을 맡기는 때도 있습니다. 노동문제에 있어서 회사자문을 주로 하는 법무법인도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노조나 노동자 대리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은 좋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의 자문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사회에서 ‘노조’, ‘노동조합’이라는 말은 상당히 불온하게 여겨지지요. 과거에는 노조원들이 ‘빨갱이’로 매도되면서 북한과 연결성이 있다고 생각된 적이 있고, 타당하지 않은 지점까지 비난해가면서, 경영인들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로 비치기도 합니다. 80년대 MBC 문화방송에서는 노동조합이 촛불을 켜놓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연출되어 방영된 적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노조가 조직된 회사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대부분, 임금이나 노동환경 면에서 다닐만한 회사인데 그래도 불만 사항이 있는 경우입니다. 단 그 업계가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이 철저하게 이뤄진다고 구성원들이 ‘여기면’ 노조가 조직화하기는 어려운데, 보상이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실리콘밸리나 변호사, 의사업계에 노동조합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면, 같은 업종의 노동환경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로 열악하여서 이 회사에서 한번 뿌리박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환경을 좋게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조직된 노조도 꽤 있습니다.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니까 더는 도망 다니지 말고 이 회사를 좋게 만들어보잔 거죠. (다만 일 자체가 오래 못할 일이라고 여겨지면, 예컨대 지나친 저임금에 과도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는 곳이면, 다들 짧게 일하고 직종을 옮길 생각을 하므로, 노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낮습니다) 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기업가 쪽에서는 생산성을 깎아 먹는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반대로,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노조가 있는 회사나 없는 회사나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은 별반 달라질 게 없는데, 노조가 잘 굴러가는 회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동환경이 나아서 욕먹는 것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는, 비정규직 소속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몫을 뺏어간다’라고 여기고 공격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장마다 논박하지는 않겠습니다. 상황마다 비판이 맞는 일도 있고 틀린 일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어용노조, 즉 회사의 편에 서서 조합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노조도 꽤 있고, 비정규직 문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정규직 노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사람 사는 곳은 결국 정치투쟁의 연속이고, 혼란스럽더라도 이걸 허용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라는 점입니다. 그런 혼란을 국가권력이 인위적으로 억압해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이 독점되었던 시기의 부작용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는 다원주의 사회를 용인하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노동조합 문제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한데, 개별 노동자들의 힘이 너무 약하니까, 노동자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그걸 국가와 회사가 억눌렀을 때의 부작용이, 허용했을 때의 혼란보다 더 컸다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그 성질상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강경투쟁만 할 수는 없고, 끊임없이 조합원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노조는 주식회사와는 달리 한 사람이 한 표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강성노조가 들어와서 조합원 민심을 사지 못하고 정치를 못 하면, 탄핵당합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유약한 노조가 들어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이제는 복수노조 시대여서, 과거에 노조원이 많은 다수노조였어도 회사내에서 노조활동을 똑바로 못하면, 소수노조와 다수노조가 역전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경영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자문한 공기업이나 금융권 노동조합의 사례를 보면 노동조합이 경영의 감시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항상 주주와 경영자의 불일치로 인한 대리인 비용이 문제가 됩니다. 경영자가 단기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지, 혹은 회사의 이익이 아닌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가 감시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노조와 주주는 이해관계를 같이 합니다. 회사가 지속해서 오래 성장하고, 이익을 많이 남겨야, 조합원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노조자문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자문하게 됩니다. 노조자문은 우리 사무실의 정승균 노무사님이 전문이십니다. 노조 설립부터, 조직화 전략, 규약 검토, 회사와의 교섭, 교섭 외에 공문 보내는 것, 회사의 비리 잡아내기, 파업, 해고, 소송 등 모든 분야를 자문합니다. 일반적인 회사자문 하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노조는 노사관계를 좋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싸우려고 노조를 설립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오면 또 싸워주는 게 노조의 역할입니다. 싸울 일이 없으면 다시 잘 지내고요. 그 모든 과정, 언제 싸울지, 언제 화해할지 등 법률적이지 않은 부분도 조언해줍니다. 노동조합 자문 외에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노조 외의 ‘단체법’ 분야입니다.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제가 기독교인이다 보니 교회, 종중,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회의 등 민주적으로 의사결정 해서 조직원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단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정해야 하는 분야가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NGO나 NPO 내의 법률자문 필요성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노조자문의 한 우물만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노동 관련 외에 산업재해, 산업 안전 관련 변호도 하고 계십니다. 변호를 맡았던 소송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제가 지금 맡은 사건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이 없고 진행 중인 사건이 많아서 구체적인 사건을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산업재해에 관한 관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산업재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삼성전자 직업병> 투쟁, <반올림>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동기 부여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운 싸움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지만, 혹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내 뒤에 올 사람은, 내가 실패한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니까’, 길게 보면 ‘노동 안전’이 더 좋아지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반복해왔고요. <반올림> 투쟁을 보며 그런 점을 배웠고, 저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 하나 보태는 심정입니다. <산업재해의 탄생>이라는 책을 봤습니다. 19~20세기 영국의 노동 안전 분야의 발전사를 압축한 책입니다. 예전에는 굴뚝 청소를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맡겼는데, 그때도 똑같이 인과관계를 따졌어요. 지금 반도체공장 산재 사건에서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굴뚝 청소하는 어린이들이 온갖 병에 다 걸렸는데, 그건 작업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주거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그렇다는 논변입니다. 일리 있는 부분도 있지요. 또 굴뚝 청소에 직업병을 이유로 아동노동을 금지하거나 규제를 하게 되면, 아동이 들어가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으므로, 청소가 제대로 되지 못해서 건물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논변도 있었습니다. 방직공장에서의 노동도 그렇고, 탄광이나 철도 산업,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교적 원인이 명백한 사고의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직업병의 경우에는 대개 인과관계를 문제 삼거나, 인과관계를 연구할만한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그때에는 전체 경제에 미칠 영향을 언급하면서 규제가 타당하지 않다는 논변이지요. 그런데도 지금 영국은 어째서 대한민국보다 산업재해 ‘만인율이 압도적으로 적은’ 나라인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긴 어렵지만, 노동조합의 투쟁도 있었고, 인도주의적인 의사나 정치인들, 학자의 도움도 있었고, 그런 사회의 여론화 과정을 통해서 입법을 통하여 안전규제를 강화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국이 우리나라보다 더 안전한 나라인데, ‘그 나라는 규제가 많아서 나라가 망했는가?’ 아닙니다. 영국에서 산업 안전 규제가 처음 생겼을 때의 내용 중 하나가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면 방어 울타리를 세워서 노동자의 신체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안화력의 故 김용균 씨는 그 방어 울타리 역할을 하는 뚜껑을 열고 귀를 대고 소음이 어떤지를 들어보고 이상 여부를 확인하는 업무를 하다가 옷가지가 말려 들어가서 컨베이어 때문에 온몸이 갈라지고 터져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영국과 똑같은 규제가 있는데도 아주 기초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이게 제 요즘 생각입니다. 추가로, 산업재해 개별 사건에 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업재해 사건 대부분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이 질병이나 죽음이 업무와 관련된 것임을 다퉈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도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이미 공단에서 산재를 승인받고 추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죠.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의 내용이 무엇인지, 무엇이 위험한지, 왜 질병이나 죽음이 업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의뢰받는 사건 대다수가 당사자가 이미 죽어버려서 얘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법원을 설득하려면 업무를 객관화시켜서 보여주어야 하는데 문서나 CCTV 같은 증거를 얻기도 어렵고, 얻게 되어도 그 의미를 밝혀내는 것도 어려워요. 회사도 협조를 잘 안 해줍니다. 과로사 사건을 예로 들어볼까요.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사망하기 12주 동안 1주 평균에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하고,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1가지 이상이 있으면 산재로 인정받기가 쉬워집니다. 이런 업무부담 가중요인은 교대제 근무나 휴일 부족, 정신적인 긴장, 육체적 부담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 처지에선 사망하기 12주 동안의 업무시간을 입증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힘듭니다. 산재 인정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싸움이고, 산재로 인정되어도 사업주가 입는 불이익이 거의 없는데도 협조를 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사업주에게 묻게 되는 민사책임을 경감시켜주는 게 산재보험인데도 말입니다. 사업주들은 굉장히 불명예스럽게 여기고, 또 ‘다른 사람은 안 죽었는데 유독 그 사람만 문제가 있고 그것은 개인적인 게 아닌가?’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렇게 사업주가 근태명세를 안 보여주면 결국 교통카드 내역이나 하이패스 내역 같은 것이라도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과로사가 이런데, 사업장 내에서 물리적 화학적인 요인에 노출되어 사망한 직업병 사건의 경우에는 증거를 얻기란 훨씬 어렵습니다. 사업주가 직접 내놓은 일은 기대할 수가 없어서, 사업주 측에서 관련법에 따라 측정한 작업환경 측정자료 등을 공공기관을 통해서 입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위험을 키우는 일이지요. 그 대신 임금을 받는 겁니다. 위험을 부담하지 않으려면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 게 가장 안전한데 그러면 굶어 죽게 됩니다. 결국, 성경에 나온 대로 ‘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종신토록 수고해야만 땅의 소산을 먹는 것’입니다. 일해야지요. 일해서 가족도 부양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개별 노동자나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재해 보험이라는 게 있는 것인데, 자료수집부터 만만치 않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시는 것 외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노동자건강권 팀장,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이십니다. 각각의 기관에서는 어떠한 업무를 맡고 계시는가요? 민변 노동위원회에서는 노동자건강권팀의 팀장을 하고 있습니다. 팀장을 맡은 지 한 달이 막 지났습니다. 노동자건강권팀은 민변 노동위원회 내에서 산업재해나 산업 안전 문제를 연구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한 소모임인데,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변을 통해서는 주로 공익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들을 하게 됩니다. 개업이 자리가 잡히면 민변 활동 비율을 더 늘려갈 생각입니다. 또한,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비상근 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있는데, 대략 분기에 1회꼴로 위원회에 참석해서 안건을 심의하고 의견을 냅니다. 제가 주로 하는 산업재해 사건 중에서 직업병 사건은 모두 질 판 위의 심의를 거치게 되는데 그 위원회의 위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라는 노동자 안전보건 단체의 회원으로 있습니다. 최근엔, 유튜브에서 <당장멈춰 TV>라는 채널의 패널로도 가끔 출연하고 있습니다. <당장멈춰 TV>는 국내 유일의 노동 안전 채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맡는 소송들이 짧게 끝나는 단순 사건이 아닌 만큼 감정 소모도 굉장할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와 피로도도 많이 쌓일 것 같은데, 시간은 없고, 이런 것들을 한 번에 해소하는 특별한 취미가 있나요? 가장 확실한 것은 잠과 운동입니다. 문제는 일이 많으면 잠을 못 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주중에는 잠을 줄이고 대신에는 주말 중에 하루만큼은 확실하게 잠도 많이 자고 일 생각을 안 하고 쉬려고 합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잠을 자는 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아직은 사업 초기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늦잠을 잘 때는 자고, 깨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과 놀려고 노력합니다. 일과 가정을 양립시키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사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지요. 자다가도 생각납니다. 그래서 찾은 다른 취미가 달리기입니다. 여러 운동을 찾고, 달리기를 선택한 다음에도 여러 방법을 찾아봤는데, 지금은 주말에 딱 하루, 1시간 반 정도를 달립니다. 달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기분이 좋습니다. 또, 일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는 달리면서 일 생각을 하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일주일에 이 정도 달리기하고, 주말에 하루 정도 잠을 많이 자면, 주중에 체력적으로 힘든 일은 크게 없습니다. 한 줄 요약을 하면 스트레스라는 것도 결국 몸이 버텨주지 못할 때 오는 현상인 것 같아서 체력관리에 우선을 두고 있습니다.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올해 초에 개업한 법률사무소를 안정화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저를 포함해서 변호사 2명과 노무사 2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공동대표인 최종연 변호사는, 저의 법과대학 학부 동기이자 법학전문대학원 선배로 저와 함께 여러 노동 사건을 수행하고 있는 동시에, 제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참 고마운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외, 산업재해 문제의 대가이신 권동희 노무사님, 그리고 노조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정승균 노무사님이 계십니다. 각자 전문성이 확고하면서도 팀워크도 좋으므로 금방 자리를 잡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이상은 이 분야에서 일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이 노동조합/노동자 측 사건만 전문적으로 하면서, 지속해서 고용을 만드는 ‘기업’으로서,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저도 법학전문대학원을 재학할 때, 그런 갈증이 있었는데, 이 분야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질적으로 전문성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고용을 매년 늘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북한 관련 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일전에 개성공단 노사관계에 관련된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습니다. 몇 가지 꼽자면, 개성공단에서는 남측의 경영진에 대응해서 북측에서도 ‘노동자기구를 만들어서 협상했다’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권 지원을 받는 강력한 ‘노조’가 있는 셈입니다. 물론 북한 내부의 노사관계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개성공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북한 정권이 세팅한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고 경협을 하게 된다면, 결국 남한 기업들은 그런 노동자기구와 상대를 해야 합니다. 반면에 북한 정권이 급속도로 붕괴한다면, 그야말로 노동자 측에 불리한, 아비규환의 무법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산업안전도 최악으로 치닫게 될 수 있겠지요. 어느 경우가 오든지 남한에서 노동과 산업재해를 다뤄본 경험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은퇴를 언제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은퇴할 때가 되면 피아노가 있는 라이브 바를 차리고 싶습니다. 이제 사무실을 개업한 처지에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제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한 것 같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또 합주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바빠지면서 그 즐거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 아닌데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야구팬인데, 양준혁 선수가 언젠가, ‘1루까지 늘 최선을 다해서 뛰는 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꿈이 있다면, ‘맡은 사건에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산업재해/노동조합 문제에 전력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변호사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손익찬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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