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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제진흥원 원장 <박기식>

7/5/2019

 
공기업에서의 '신화는 없다'는 존재한다! 국영 무역진흥기관으로서, 현재 전세계 약 130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국내 가장 국제화된 조직,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지 27년 만에 상임이사로, 단 다섯 명 뿐인 임원 자리까지 승진한 인물!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것은 '자신감'이었다는, 부산경제진흥원 박기식 원장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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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 4대 부산경제 진흥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인 박기식입니다.

작년 10월, 현 직책에 부임하기까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약 30년을 근무한 것이 오늘날 저를 있게 한 가장 큰 경력입니다.

그 이후, 저는 작년 현직에 도전하여 최종 선택을 받기 전까지는 상장 대기업인 ‘한미약품’(6개월), ‘도화엔지니어링’(4년) 경력을 비롯한 중견기업 ‘평화엔지니어링’(1년) 에서 해외 담당 부사장과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GSM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직접 창업해서 1년간 영세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해외시장 개척 활동을 직접 전개한 바도 있습니다.

그 외, 전략기술 경영연구원(STEMI), 무역투자연구소 등 민간 연구원에서 부원장 혹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미얀마 무역진흥기관 설립 자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항공기부품 투자 유망 기업 조사 등 컨설팅 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KOTRA 출신 임원들로 구성된 글로벌 비즈니스 리서치 센타 (GBRC)라는 산업부 산하 연구법인 (사단)의 등기임원으로 참여하여, 외국의 방한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한 강의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KOTRA에 입사 전, 학창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경남 양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의 부모님은 농부이셨습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9년간을 전교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 면에서는 우수했습니다만, 고교평준화 이전, 당시 부산 명문인 부산고교에 낙방하면서 인생 최초의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재수의 길도 없이, 동아고교로 진학했습니다. 일류고는 아니지만, 부산고, 경남고 낙방생들이 많이 진학하던 이류고 중에서는 이름이 있던 학교였는데, 거기에서 저는 입학 당시만 해도 전교생 600명 중 약 120명이 포함된 특별반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 끝에, 특별반에 진학할 수 있었고, 1학년 수료 시에는 전체 607명 중 5등의 우수한 성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에 힘입어, 저는 2학년 및 3학년 때에도 우수한 성적을 지속할 수 있었고 특히 졸업하던 해에는 서울대 반이라 할 수 있는 3학년 특별반에 속했는데, 졸업 시에는 최우수 졸업생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초등 및 중등학교에 이어 고교에서도 저는 교육감 상을 받았으므로 수석 졸업의 연속이었습니다.

전교 수석인 데다, 서울대 특별반 출신이기에, 저는 처음엔 서울대 법과대학 진학을 고려했는데, 그때까지 동아고교에서 서울법대를 진학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혹여나 서울법대에 낙방하게 되면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집안 사정상 그럴 상황도 못 되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백부님 집에 기숙하며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사촌 형이 넌지시 건넨 ‘부산대에 진학해서 행정고시를 준비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저는 국립대이자 부산의 명문인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부산상대에 진학한 이후, 청년기의 방황이 시작되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상아탑의 학문에서 새로운 탐닉을 하는 것보다, 학교 바깥에서 같은 또래이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원했던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부모님의 과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운 것도 크게 한몫했었습니다.

대학교 3년을 마치기까지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철학 서적을 탐닉하는 한편, 저는 학교를 한 달 이상 그만두고 산사에 들어가 저 자신을 되돌아보던 때도 있었고, 여느 청춘과 같이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전투경찰에 입대해서, 2년 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방황기도 끝났습니다. 저는 부산과 울산을 잇는 해안초소에서 군 복무를 하였는데, 제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였기 때문에, 저보다 나이가 어린 상사들도 많았고, 그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분초소 9명의 밥 짓는 일을 혼자 하는 등, 군 생활의 규율에 점차 저를 단련시키면서, 제대 마지막 가까워서는 양산경찰서 경비부서로 옮겨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제대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 평생의 파트너이자,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아내는 친구의 사촌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 중 연애를 하던 저희 부부는, 제가 제대함과 동시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아내는 서울 출신이었기에 직업까지 그만두며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저는 결혼 후,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대학 옆의 신혼방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공부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LG, 현대 중공업 등 대기업 입사시험에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신혼인 데다가,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제가 입사를 선택한 곳은, 민간기업이 아닌, 안전성 높은 공공기업, KOTRA였습니다. 또한, KOTRA의 입사시험에서 수석이었다는 것은 입사 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KOTRA 입사는, 제게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 세계를 누비는 또 다른 도전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도 직장을 다니면서 이루어낸 자기연마의 과정이었다는 점에 있어, 2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 퇴임 때까지,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대상이었습니다.

KOTRA 재직 중, 런던, 동경, 멜버른, 후쿠오카 등, 4개의 해외무역관에서 약 13년간의 해외 생활을 경험하였고, 세계 경제 무대에서의 우리 한국 기업의 수출과 투자유치 등 국익 차원의 진흥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입사 당시, 저는 기획관리실장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입사 25년만인 2006년에 이 꿈을 이루어냈고, 상임이사로 승진하여, KOTRA의 신기능 사업을 주도하는 ‘전략사업 본부장’으로서 본분을 마치고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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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서 경제학을, 석사는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다른 분야의 경영학을,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경제학/지식경영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애초 저는 서울대 법과대학 진학이 목표였으나, 가정 사정으로 포기한 이후, 사촌 형의 권유로 취업전선도 생각하면서, 행정고시 준비도 할 수 있는 경제학과로 진학하였습니다.

제가 두 개의 석사, 그리고 한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별도의 진학 과정이 아니라, KOTRA 재임 중, 회사 측의 인재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가 지원하여 이룩한 성과들입니다.

별도로 유학을 가거나 한 것은 아니고, 주말, 야간과정 등의 형태로 학업을 진행한 것으로, 업무의 연장 선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차원에서 학교에 진학했고, 그런 과정에서 학위는 자연적으로 취득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영을 전공한 것은, 제가 영국 런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당시 ‘소련 동구의 구상무역’을 보다 이론적으로 해부해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실무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관련 논문은 실제로 실무자 시절 업계 지침서로 활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석사학위인, ‘정보기술 경영’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의 국내 1년 인텐시브 과정이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비즈니스를 KOTRA에 도입하는 업무의 연장 선상이었습니다.

연세대 석사과정과 마찬가지로 직장을 다니면서 주경야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 과정은 영어로 강의가 진행되었으며,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대학 본교에서는 약 한 달간의 현지 연수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박사학위는 일본 후쿠오카 무역관장으로 발령받고 난 다음, 큐슈대학에서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보임 직전, 본사 최초의 지식경영 팀장을 맡아 KOTRA 지식경영을 실천하는 역할을 했는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식경영 사이트 KMS (Knowledge Management System)를 그룹웨어와 통합하고, 지식승인 및 업데이트 등, 나름의 기초는 마련했지만, 이를 전 조직에서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실망스러웠던 차에 지식경영에 성공적인 일본에서 그 원인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보고자’하는 차원에서 박사학위의 논제 목표를 경제학으로 정했습니다.

당시 DJ 정권 시절, 통치 철학 차원에서 지식경영이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의 경영 대가인 지식경영 대가 ‘노나카 이쿠지로’ 선생의 책도 제가 많이 읽고 있었는데, 그 선생의 수제자가 마침 큐슈대학의 강사로 부임해 있어서, 그와 담론을 주고받으며 세미나 토론 위주의 면학을 통해 신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구 끝에 저는 ‘지식경영 통합 모델’이라는 제목의 영문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큐슈대학 경제학부 교수 2/3의 인준을 얻게 되면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박사학위는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고 통상 6년 정도의 연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KOTRA 지식경영 팀장으로서 제가 쌓은 경력은 물론이고, 그를 위해 당시 국제적 논문과 이론 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던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연구를 통해, 저는 ‘지식경영이란, 단순한 정보인프라 차원뿐 아니라, 조직문화와 제도를 위해, 지식의 창조-> 가공-> 공유-> 관리라고 하는 지식 프로세스 측면도 동시에 고려되야 하는 프레임워크라는 것’을 제시했으며, 이를 토대로 ‘통합 모델’을 처음으로 발표함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논문은 한국전문가 대상 설문조사는 물론, 사례조사도 겸비하여 상관관계와 회귀 계수를 사용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지식경영을 위한 실천 지침서로써도 활용이 많이 되었으며, 한국의 후학들에게 논문이 많이 읽히면서, 제게 문의해 오는 석·박사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1991년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영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후,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의 정보기술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셨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10년 만에 다시 석사학위 과정을 선택한 이유는 런던무역관 근무 귀국 직후, 제가 헝가리 등 구 동구 사회주의국가와의 교류 창구를 담당하던 부서, 즉 ‘특수사업부’에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구 국가들과의 구상무역도 업무를 하게 되었었습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과정을 통해 발표한 내용은, 책자로 발간하여 업계에 널리 배포, 활용되었고, 박사학위 생들에게도 인기리에 탐독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2001년의 정보기술 경영은, 제가 e-KOTRA 팀장과 지식경영팀장을 역임하면서, ‘KOTRA의 정보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면서 정보기술을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하는 관점을 구상하던 중,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에서 당시 한국 IT 기업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국내 과정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등록을 한 것이 또 다른 석사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의 선진 IT 역량과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되었고, Michael Porter 교수의 ‘다이아몬드 이론’을 활용하여 한국의 정보기술 서비스 기업 간의 경쟁력을 비교하고, 모델을 분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이 과정을 수행한 지 1년 만에, 저는 전 세계 최초로 ‘화상상담 시스템’을 구현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3월, 제가 기획하고, 한국산업기술대학 및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실무적으로 구현한 이 시스템은 바이어와 셀러, 통역 등이 인터넷상에서 만나 시공을 떠난 상담을 자유롭게 수행하고 문자와 음성까지 녹음할 수 있는 획기적 시스템으로서 종래 오프라인 전시회에 의존하는 상담 관행을 인터넷 베이스로 개선한 최초의 케이스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주목한 일본 큐슈 산업대학의 디자인 학부장은 그의 저서에 ‘세계적인 창조혁신 사례’로 제 연구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뉴욕주립대의 석사과정은 국내 인텐시브 코스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과정은 2001년 1월, 과정을 시작하여 12월 말, 학위논문 집필을 마친 후, 여름 1개월간의 뉴욕 현장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의 업무를 하면서, 주말에 8시간 내내 영어로 강의를 듣고, 과제를 영어로 써내면서,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는 것은 일반 회사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버겁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IT 기업 실무자들과는 달리, 영국 런던에서 3년간 근무한 바 있고, 특수사업부에서 동유럽을 누비며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뉴욕주립대 석사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뭐든지 도전하려고 하는 자세 때문인지, 저는 즐겁게 학업에 임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어로 석사학위를 진행하고, 일본 대학에 재학 중이었지만 박사 논문을 영어로 작성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이미 직장에서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던 데다, 관련 레퍼런스 논문이나 자료가 영어로 된 게 많았으므로,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의 경우 벨기에 친구가 제 영어 초록을 감수해 주기도 했고, 일본어 발표 시에는 일본 지인이 감수를 해 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박사학위의 경우 학회 발표는 일본어로 진행했어야 하였습니다. 저는 과거, 91년~94년, 3년간 동경에서 근무하면서 일본어를 익혔기 때문에, 논문 발표를 현지어로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제가 외국의 세 개 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진행하면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도전정신과 성취감, 그리고 자신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아니지만, 초교에서부터 고교까지 내리 수석을 해 왔고, KOTRA 입사에서 수석 입사를 해 왔던 제 이력에서 볼 수 있듯, 지적 호기심과 도전정신은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가치 있는 덕목인 것 같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통해 새롭게 습득한 지식과 이론을 KOTRA의 현장 업무에 다시 적용하면서, 저는 업무에 대한 성취감은 물론, 자기실현에서 오는 자신감을 더욱 성숙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KOTRA에서 퇴임 이후, 8년간 제가 다른 기업체와 연구기관에 종사하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언제나 ‘자신감’은 늘 저를 지탱해 주는 자양분이었고, 석사와 박사학위 자체도 다른 담당 업무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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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보직을 거치셨는데 그중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저의 도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라, ‘성공기’를 언급하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KOTRA에서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5명 밖에 없는 임원진의 한 사람으로 승진하였고, ‘전략사업 본부장’으로서 KOTRA의 ‘신기능 신사업 업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제 이름인 ‘기식’이 ‘터(基)에다 나무를 심는다(植)’라는 의미인데, 우리 한국의 무역업계 혹은 젊은이들에게 세계 시장을 향해 진출하는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 KOTRA가 그 방향과 사업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저는 제 이름의 의미대로 충실한 삶은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 웃음 )

KOTRA는 아시다시피 국영 무역진흥기관으로서, 현재 전 세계 약 130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국내 가장 국제화된 조직의 하나입니다. 조직에서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수출시장을 개척하고, 무역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전시회 참가, 세미나개최, 무역사절단 교류 등 무역진흥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1962년도, 故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입국을 위해 직접 주도해서 만든 것이 이 기관으로, 제가 입사했던 1981년도에는 정책 종합상사 고려무역을 인수 운영했고, 적자에 허덕이던 KOEX(현 COEX, 코엑스)도 한때 경영을 맡아 정상화하는 등, 다방면적으로 사업을 하였습니다.

한때, 입사시험 경쟁률이 100:1에 이를 정도로, 많은 청년이 취업을 선망하던 직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KOTRA에 수석 입사해서, 누구보다도 한발 앞서 생각하고, 한발 앞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등, 창의적으로 일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한 예로, 1988년 중반, 제가 영국 런던무역관에서 귀국했던 시기는, 마침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헝가리 등 동구공산권 국가에서 한국과의 경제 관계 개선에 대해 물밀 듯이 제의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그에 관한 실무부서에서 근무하면서 미수교 상태의 동구공산권 국가들을 오가며 많은 현장지식과 교류경험을 쌓았습니다.

제가 연세대학에서 소동구 구상무역을 연구하여, 나중에 대북한 청산결제의 한 시범 사례를 제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현장경험에 바탕을 둔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90년대 초반, 저는 남들이 가기를 꺼리는 일본 근무를 자청하여, 동경무역관에서 조사 담당으로 근무하면서 ‘가깝고도 먼 ’일본을 배웠습니다. 그 탐구생활의 와중에서 저는 일본의 광학기기 회사인 니콘 등, 주요 기업들의 성공기를 책자화하여 공저 형태로 발간하는 한편, 조총련계 간부와의 교류, 금강산 그룹과의 접촉 등, 대북 교류를 위한 지원 활동도 관계기관과 함께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1994년 10월에는 인터넷 초창기, 일본경제신문의 해설 등을 번역해서, KOTRA 직원들에게 인터넷 활용이 용이할 수 있도록 앞장섰었고, 정보기획부장의 담당 업무를 맡아, 인터넷 수출거래알선 시스템인 ‘Digital KOTRA’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정보화에 앞장서는 새로운 도전을 지속하였습니다.

그 후, 멜버른 무역관에 부임하여, 현지 ‘UN Trade Point Development Center’이라는 유엔기관과 협업하여 KOTRA 정보화 수준의 업그레이드에 노력하였습니다.

1999년 귀국 후, e-KOTRA 팀장을 맡아 KOTRA의 지식경영 및 정보화 역량 보강의 ‘책임을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각종 정보화 관련 역사와 향후 방향 등을 ‘KOTRA 40년사’(2002년 발간)에 대거 포함되도록 기고하여, 같은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도록 하였으며, 지식경영시스템, CRM 시스템 외, 앞서 설명한 사이버 상담시스템 등도, 제 손을 거쳐 탄생하여, 현재도 KOTRA 정보시스템의 바탕을 이루도록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남보다 한발 앞서, 정보화를 위해 앞장선 것에 대한 기여로, 2001년 ‘무역의 날’에 총리 표창을 받았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나중에 임원 생활을 끝내면서 산업포장이나 훈장을 받아가기도 했지만, 저는 퇴임 9년 전에 받은 총리 표창이 저의 KOTRA 생활 중 받은 최고의 영예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KOTRA 퇴임 이후에도 제가 쌓은 정보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지금까지 많은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을 STRONG이라는 첫 글자를 따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저는 Spirit for Dream and Challenge/ Target / Relationship/Only/ Network & Ground의 앞 자를 따서, STRONG을 후배들에게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선, ‘STRONG’이라는 단어 자체가 강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기에, 자기 자신에게 ‘강해야 한다’라는 점 자체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약해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 시선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말하고 싶네요. 생존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강한 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는,
1) 꿈과 도전정신
2) 목표의식
3) 상호적인 관계 형성
4) 유일의 전문가 정신
5) 네트워크와 기본기 구축
이렇게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꿈을 정해서 도전하는 정신’은 기본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상호적인 관계 형성’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서 ‘나를 잘 알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고객이든, 직원이든, 가족이든 간에, 일방적인 관계가, 서로 간의 친밀한 관계로서,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쌍방향 소통이 기본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유일의 전문가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generalist’보다 ‘expert’ 즉, 전문영역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존의 무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학문이든, 업계현장의 실무이든 간에, 자기 혼자만의 전문가 영역을 갖고 이를 지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리더가 될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트워크와 기본기’는 자신의 ‘know-how’나 ‘know-where’를 보유한 다른 전문가 그룹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전문성’이라는 기본기도 가져야 하는데, 인간으로서의 ‘신뢰성’과 ‘인격’도 아울러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자질은 정신적인 태도와 사고방식도 포함하여, 기본적 소양의 토대가 됩니다.
 
저의 경우, 이런 여정을 KOTRA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견지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처음 덕목인 ‘꿈과 도전’ 부분은 다섯 항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저의 경우를 들어 좀 부연 드릴까 합니다.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저도 비록 자주 바뀌기는 했지만 꿈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사회과 지리부도를 보면서, 세계 100여 개국의 지도와 각국의 수도 이름을 외운 것이 저의 꿈과 도전적 적응력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외운 이름 중, ‘온두라스’의 수도가 ‘테구시갈파라’는 것도 제 뇌리에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세계 지도를 보면서, ‘지구 저 끝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동경심이 어린 저의 동심을 자극했었는데, 성인이 된 후, 저는 다른 어떤 기업 중에도, 한국 무역을 책임지며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는 직장인, ‘KOTRA’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꿈은 항상 새롭게 구체화해 나가야 합니다. 저의 경우, KOTRA 입사 초기에는 ‘기획관리실장’이 되는 것을 꿈으로 정하고, 달성했습니다. 그 후, 상임이사까지 승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대로 꿈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란, 환경여건의 산물로서, 자주 바뀌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주변 여건을 도전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봅니다.

저의 경우, 첫 해외파견부터 네 번째까지 선망의 대상인 미국파견을 희망했지만, 한 번도 보임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해외파견기회는 뉴욕으로 거의 굳어지던 상황이었지만 다른 경쟁자가 갑자기 내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선으로 가게 된 영국의 ‘해외무역관’의 보직에서, 제 목표를 수정하고, 도전적으로 꿈을 일구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영국 파견을 계기로 정통 영어습득과 현대문명의 요람인 유럽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영국 현장 속에서 대처리즘을 이해하고, 아일랜드와의 통상투자 관련 교류를 통해 수교로 이르도록 지원하는 등, 나름대로 성공적인 무역관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해외파견 기회에도 처음에는 미국을 지망했으나 경영진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제게 많은 보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 외에도,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현상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한일 경제 관계를 재인식하고, 한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본 사회에 대해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비록 경영진의 권유를 수락하는 형태였기는 하나, 제 삶의 귀중한 경험이자, 현재까지 제 지식과 경험의 원천으로서, 제 사고체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해외파견 역시 미국을 지망하였지만, 저는 호주 멜버른의 무역관을 재개방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1인 무역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는 호주 제조업의 본거지이자, 연방 초대 수도인 멜버른에서 IT 전시회 참가기획, 유엔 산하 거래알선 기구와의 협업, 투자유치 등, 의욕적이고 정열적인 업무수행으로 직원 3~4명의 시드니 무역관에 못지않은 실적으로 거양할수 있었습니다. DJ 정권 말기, 전 세계 최대 인력진출회사 ‘Adecco’사의 한국 진출을 실현한 것도 이 지역에 설치된 ‘아주지역본부’를 제가 접촉하면서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해외무역관 파견도 저의 강력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대신, 일본 후쿠오카 보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조직의 명령이므로 이를 수용하고, 인구 150만의 이 중소도시에서 제가 할 일을 생각하던 끝에, 큐슈대학의 사회인 박사과정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Knock(Kyshu Network of Collaborating with Korea/큐슈 일한 경제교류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큐슈의 경제인들과 한국 기업 간의 활발한 온라인 네트워크를 마련하는 한편, OKTA(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을 창립하는 등 후쿠오카 무역관의 기능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해외파견’이라는 지역선정에서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결코 실의에 빠지지 않고, 대안으로 가게 된 지역들에서 저 스스로 좌표와 실천적 도전 과제를 찾아, 무엇이든 이루어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데, 새로운 지역들에서도, 도전적으로 적응(adaptive challenging)하면서, 제 영역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청년 여러분들도, 주어진 목표나 희망이 어떠한 환경여건으로 인해 좌절된다 해도 결코 실의에 빠지지 말고, 차선이라도 온 지혜와 용기로 극복하면, 처음 목표보다 더 바람직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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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경제진흥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신 지 약 9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어떤 곳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지난 2001년 설립된 부산시 산하 재단법인으로, 광역자치단체 산하에 대구와 경남을 제외하고 15개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자금, 마케팅, R&D 등을 지원하는 기구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저희 BEPA(Busan Economic Promotion Agency)는 직원 수 약 150명 규모로, 서울, 경기, 인천에 이어 조직 규모로서는 4번째로 큽니다.

제가 KOTRA 등에서 지난 38년간 여러 나라를 누비며, 현장에서 통상, 투자진흥, 연구업무 등을 맡은 바 있기에, 저는 국제 통상 분야에서 가장 깊이 있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작년 10월 10일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저는 내부 조직정비에 이어, 조직원들의 혁신역량 향상에 힘을 쏟으며, 현장도 자주 챙기고 있습니다. 부산시의 신남방, 및 북방 교류의 최일선에서 시장님과 함께 이들 지역의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원장은 조직과 사업관리의 ‘Top Management’로서 주요의사 결정의 주체입니다. 저는 조직의 관리방식과 경영 세팅 변화를 주도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외, 적재적소 인재를 발굴, 배치하는 일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탁한 세 명의 팀장은, 지금도 조직 혁신의 기수로 일을 잘해 주고 있어서, 저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 그간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통합하여, 승진 및 전보 인사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의 주요 공공기관장으로서, 부산시를 비롯해 유관기관에서 행하는 각종 모임에 대표로 참석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즉석연설도 해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해야 합니다. 특히 시의회에는 연 2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여, 업무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질의에 답변하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부산시 공무원 인력개발원 등에서 외부강연을 갖는 기회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관의 업무를 관련 공무원이나 업계 인사들을 상대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일 또한 수장으로서의 업무이기도 합니다.

또한, SNS시대에 발맞추어, 개인 페이스북을 활용해, 제가 하는 일을 거의 매일 업데이트해서 발신하는 역할도 스스로 챙겨서 하고 있습니다. 그 외, 지역 TV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언론 기고 활동 등의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행하는 일상업무 중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항은 윤리경영 중, 투명경영 활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KOTRA 재직시절의 경험을 살려, 부산경제진흥원에서도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를 맺도록 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산하는 주체로서도 관심을 두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월 급여 자투리 돈을 모아 장애인 유아원에 기증한다든지, 환경미화 캠페인과 함께 관광지 쓰레기 줍기 행사를 진행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주도하는 것도 저의 책무 중 하나입니다.

부산경제진흥원에서는 스타트업 창업지원과 일자리 알선,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추천, 산업단지 관리 운영, 금융 도시 추진센터 운영, 신발산업 진흥 센터 등 여러 가지 기능들을 종합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산시 소재 기업들과 소상공인들에게는 현장 밀착적으로 성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원장으로서 많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부산은 제가 대학과 군대 등 청년기 10년을 보낸 제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38년의 세계경험을 토대로, 이 지역 소재 기업들을 직접 고객사로서 지원하는 일이 매일같이 신나고,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부산경제 진흥원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내외의 평가도 많이 접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만하지 않고, 진흥원의 업무를 개선 시키면서, 동시에 직원들의 역량도 개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가 부임한 지 1개월이 되는 날, 직원들이 저를 환영해 주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게 남습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여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풍선으로 바닥에 꽃길을 만들어 놓고, 그 사이를 제가 걷도록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제 사무실 입구 즈음에서 축하 케이크를 자르도록 해 놓았더라고요. 저도 순간 뭉클했습니다만, 직원들이 저를 이렇게 환대해주는 것은 38년 조직 생활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접점으로, 세계 물류 5대 도시에, 기업이 자리를 잡기 좋은 도시로 향후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부산시와 함께 부산시 소재 기업의 국제화와 신성장 동력 창출을 통해 부산경제가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만전의 지원을 다 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임 8개월 2주째를 맡고 있습니다만 지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정말 바쁘게 지냈습니다. 초기 6개월은, 사내 경영혁신의 기반을 만드는 데 온 역량을 할애했습니다. 저의 결재를 받기 위해 녹산청사에서 일부러 연산동까지 사람이 왔다 가야 할 정도로 권위주의 문화와 습관적 반복문화에 젖어있는 현실을 보고, 과감한 수술에 착수했습니다. 위임전결 규정을 전면 개편하여, 권한을 하부에 위임하되, 부서장 책임을 강화하고, 명목뿐인 기구였던, ‘북방도시교류 협의회 사무국’을 ‘글로벌 사업본부’로 흡수, 통합하는 한편, ‘산단 관리센터’를 ‘일자리본부’에서 분리하여, 고객 접점 역할을 맡도록 확대 개편하는 등, 조직개편도 단행했습니다.

또한, 취임일성으로, 직원 개개인의 역량 강화가 부산경제진흥원 경쟁력의 원천인 점을 들어, ‘SMART’를 조직운영 캐치프레이즈로 도입해서, 직원들이 일상생활하면서 유념하도록 했습니다.

‘SMART’란 ‘Strategic Standpoint(전략적 관점)’, ‘Meticulous Mindset(세심한 마음가짐)’, ‘Ardent Attitude(열정적 태도)’, ‘Right and Relevant(올바르고 적절하며 Transparent & Trustworthy(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부산경제진흥원인이 되자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스마트 폰처럼 유연한 조직을 지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글자를 두 개씩 알파벳으로 연결하여, 조직운영의 원리로 삼기로 하고, 이를 22개 시설물 어디에도 부착해 놓고 실천을 다짐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구호는 제가 CEO 후보로서 임원면접 당시에 제시한 내용이었는데, 취임 후, 실제로 업무에 반영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KOTRA 재직 시절, 최장수 기획조정 실장으로서, 조직 및 사업관리, 예산과 정보화 관리 등, 조직관리 경험을 활용해서 부산경제진흥원의 경영에도 참고하고 있습니다.

부산경제진흥원 소속 직원들은, 저에게는 최대 고객으로서, 이들이 행복해야 고객들에게도 행복한 지원을 해 줄 수 있으므로,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Playing manager’형 리더십으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하는 노력을 현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팀장 역량 강화 교육에서, 저는 ‘Knowledge’, ‘Skill’, ‘Attitude’ 등의 덕목을 제시하면서, 특히 ‘Knowledge’의 경우, ‘know-how’ 외, ‘know-where’의 중요성을 소개하는, 한편 sharing(공유), unlearning(학습 해소)의 노력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팀장들에 의한 ‘middle up-down’ 경영 실천에 나서주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우리 진흥원은 올해 19년째 되는 해인데, 내년이면 성년 나이 20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년 부산경제진흥원이 더욱 역동적이고 활력있는 공공기관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우리 진흥원의 변화와 혁신은 지속할 것입니다.


경제와 경영 분야의 실무를 일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부산경제진흥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이십니다. 평생을 경제학자로 걸어오신 원장님에게 '경제'와 '경영'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선 저는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도’로서, ‘경영학’도 섭렵해온 실천가, 즉 ‘Practitioner’라고 정의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경제학은 순수학문으로서 미시, 거시를 막론하고 시장 구조와 정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경제 행위를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경영은 기업을 염두에 두고 조직의 전략이나 재무 회계, 생산 및 마케팅 등 실천적 이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경제와 경영을 함께 전공해 왔는데, 무역학도 부전공으로 대학 때 수학한 바 있고, MIS나 ERP 등, 전산 운영 분야도 KOTRA에서 실무를 익힌 바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섭렵한 것이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는 ‘뉴노멀’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론적 지식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문이든지 진화하고 발전해야만 그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 아직 노벨상을 하나도 변변히 타지 못한 것은 한국인인 저부터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경제, 경영이든, 물리, 화학이든, 학문에서는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 등, 인류사회에 이바지해야만 ‘합목적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저는 한때 ‘지식경영’을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대학의 교수나 강사들이야말로 가장 혁신하고 변화해야 할 대상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존경받는 교수들도 많지만, 학생들 취업을 챙기고, 정부의 과제나 타내서 연구비로 충당코자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경제는 경세제민의 약자로서 세상을 구하는 학문인데, 이론에만 함몰하다 보니 현실적인 적용에서는 커다란 약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을 두고 이를 케케묵은 정책, 혹은 임금 주도 성장으로 폄훼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 잣대는 뭐가 되어야 하는지, 진솔하게 반성하는 바탕 위에서 논의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영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경영학을 열심히 잘 가르친다고 그 교수가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영은 기업이라는 조직 내 의사결정을 최적화하는 ‘방법론’이므로, 개별기업별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업 특유의 경쟁우위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가져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경영의 관점이지요. 그렇기에 경영은 개별기업마다 접근방법과 강조 포인트가 달라져야 하므로 학문적인 깊이 면에서는 경제학에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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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부산경제진흥원장으로서 임기 초반이라 당분간은 진흥원의 기능과 역할을 향상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이기도 하고요.

부산경제진흥원은 부산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기관인 만큼, 부산시의 경제 담당 실무 창구로서, 부산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현재 조선 및 자동차 등 전통 주력산업이 세계적 경제불황과 미·중 무역갈등 등으로 인해 경쟁력 약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발, 섬유 등 경공업 제품의 경우 역시, 최근 B2C 온라인 거래 등, 마케팅 분야에서의 변화가 일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라인의 해외이전 등으로 인해 국제 밸류체인에서 부산이 집중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저는 부산경제의 지식산업화가 가장 큰 과제라고 보고 있으며, ‘스마트 팩토리’, ‘공장 자동화’ 등, 제조혁신에서 우리 진흥원이 자금, 연구·개발 지원 등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산업의 소프트화, 서비스화에 부응하여, 산업간 융복합이라든가 협업 등의 문화를 시급하게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은 세계적인 항만으로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요충지입니다. 진흥원은 현재 담당하고 있는 북방도시교류협의회를 더욱 내실화하여, 중국, 일본, 러시아와 한국의 많은 도시를, 이 협의회에 동참시키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원산, 청진 등도 이러한 협의회에 가입도록 하여, 부산이 동해안 물류와 북방 교류의 최대 수혜지로 정착되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부산에서 철도를 타고 한반도 횡단철도를 통해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날이 언제가 오겠지만, 그 전에 동해안 선박을 통해, 북한의 원산과 나진, 청진항을 오가며 물자와 인력을 수송할 날이 곧 오리라 확신합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은 북방 도시교류협의회를 통해, 관계 및 당사 국간의 실천적 의제 설정 논의를 주도하여, 그런 날을 앞당기는데 노력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신남방 지역의 경우, 인도와 아세안 10개국, 서남아시아도 포괄하여 부산의 경제영토를 확장하는 의미에서 통상 투자 교류를 활성화하고, 부산과의 실리적 경제교류를 확장하는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및 일본과의 교류는 주요 수출대상국이자 투자유치 대상국으로, 그 중요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최근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향후 교역과 투자 양면에서 성장 가속도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그 관건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경제진흥원은 기존의 오프라인 프로모션 수단인 전시회, 사절단, 상담회뿐 아니라, ‘B2B marketplace’ 등의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여 국제 전자상거래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부산진흥원의 원장으로서 2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끝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부산경제진흥원을 국내 지자체 산하 최우수 공공기관으로 역할 및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고 싶습니다. 저의 청년기를 키워주고, 세계를 향한 저의 꿈을 품게 해 준 이 고향 도시에서, 저는 퇴임 이후에도, 후진 양성과 기업컨설팅 등으로 저의 미래를 계속 열어가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해 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실천하는 리더십을 통해 제가 속한 기관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해 왔다고 봅니다.

KOTRA에서 재직했던 30년이 그랬고, 한미약품, 도화엔지니어링, 평화엔지니어링 등에서도 저는 연봉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해외 진출을 위한 개척자의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선배, 동료, 후배, 그리고 독자분들에게 지금의 제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느 조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창의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리더’로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박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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