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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전기획 및 책과강연 대표기획자 <이정훈>

8/5/2019

 
국내 최고경영자, VIP의 죽음 위기관리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실제 상황에서 실무를 관리하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기업인 중앙의전기획의 대표! 또한, 개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며, 기회와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책과강연'의 대표! 사람의 장례를 관장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꿈을 선사하는 이정훈 대표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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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하는 기획자 이정훈입니다.
자기소개하면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선명한 사회적 정의가 될 수 있는 만큼 제 직업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 덕분에 인터뷰를 제안받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설계한다’라는 말을 쉽게 풀어 설명하며, 진로를 소개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시지만 대학에서는 사범대학의 일어교육과를 1996년에서 2005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다니셨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저는 학창시절에 진로를 고민해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X세대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97년의 IMF 금융위기가 대한민국을 휩쓸었습니다. 당시 전 스물한 살이었고, 매일 뉴스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서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옆집의 친근했던 아저씨로 불리던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딸린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고민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97년 이후 가족들의 단란하게 둘러앉아 먹던 저녁 식사의 풍경은 사라졌고, 불 꺼진 거실 식탁은 쓸쓸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 역시 그 시절의 중심에 있었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리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채업자들의 독촉을 피해 수년간 죽은 듯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그 빚으로부터 자식들을 지켜내느라 삶이 누더기가 될 지경까지 내몰렸었죠. 동생은 공장으로, 전 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게 99년 말즘이었어요. 학교를 10년 만에 졸업한 이유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체류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고교 시절, 제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생에게 진로를 묻는다는 것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대학)’을 묻는 거니까요. 고등학생에서 ‘진정 되고 싶은 것’이란 질문은 ‘이상적’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코 ‘이성적’인 질문은 아니죠. 저는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고, 대학이야 당시에도 갈 생각만 있으면 갈 곳은 많았었으니, 진로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여유가 있었어요. 사람들도 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다 적절한 시기에 결혼하는 것이 제가 봐온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목적이 행복을 담보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았던 세상은요. 
그랬었기에, 저 자신에게도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인식을 바꾼 것이 97년 금융위기입니다. 당시, 제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처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삶은 불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경제적인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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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동국대의 장례비지니스 아카데미 과정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 후에는, 생사문화산업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셨는데요. 흔치 않은 공부를 시작하고, '교사'라는 정규직을 포기하면서 고민과 걱정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 입학 후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고, 밥숟가락 하나라도 덜자는 생각에 서둘러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복무 중에도 제대 후 돈 벌 생각만 했습니다. 일본행을 결심한 이유도 돈 때문입니다. 취학 비자를 받고 도쿄로 떠났습니다. 당시 3개월 치 기숙사비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17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2년간은 하루 두 곳 이상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습니다. 눈뜨면 일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7만 원으로 시작한 가난한 유학 생활이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의 사회인으로 길이 열리면서, 7년간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일했습니다. 유학 생활 당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배경은 물론, 인맥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한동안은 무척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순됩니다만, 그런 환경 안에서도 삶을 변화시킨 질문을 제 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평범하지만, 한 번도 저 자신에게 해 본 적이 없는,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일본어 한마디 할 수 없었던 저는, 일본 현지에서, 말 못 하는 장애가 있는 존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저 자신에게 되물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현재 ‘내가 가진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요. 당시 전 간절했고,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일자리는 곧 생계였기에 절박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면접을 할 기회가 생겼고, 감사하게도 채용이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일한 지 수개월쯤 됐을 때, 사장이 그러더군요. ‘언어도 못 하는 당신을 채용한 것은 다름 아닌 좋은 웃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면서요. 전 그때 처음, 웃음에도 ‘좋은 웃음’이 있을 수 있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장의 말을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학창시절에는 무엇을 해도 대충이었고, 삶에 대한 애착도, 꿈도 없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살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고 있단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 어느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죠.
 
일본에 있는 동안 후지tv에서 통·번역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철강회사에 정직원으로 입사해 2년간 직장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순탄할 것만 같았던 일상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룸메이트의 자살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겁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죽음이 제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퇴사했고, 자연히 7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룸메이트의 죽음이 장례를 사업 구상으로 직결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에서 기업 최고경영자의 회사장 장례를 몇 차례 본적이 있었는데, 제 사업을 고민하던 중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국내의 대행업체를 찾아보니, 당시에는 이러한 장례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기획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7년간 유학하면서 분명히 배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배움에 늦을 때란 없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이 매우 단순한 편이어서, 필요한 것이라면 배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늦었다’, ‘오래 걸린다’라는 핑계를 댈 시간에 먼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장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처음’이란 과정은 거쳐야 하는 법이니까요. 


 당시 기업회사장을 다룬 전문서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출판된 원서들을 있는 대로 사들인 다음, 한동안 그 책들을 읽고, 정리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정리한 자료를 한 권의 매뉴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기업의 위기관리시나리오(최고경영자의 죽음) 대응 매뉴얼의 초안입니다. 그게 벌써 11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후,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동국대학교 생사문화산업학과의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그곳에서 업계 전문가분들과 인맥을 쌓았고, 부족한 경험도 쌓았으며, 사업에 필요한 네트워크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동국대 생사문화산업학과 석사과정에서 졸업이 아닌 수료로 남게 된 이유는 졸업장은 제게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 필요한 것을 얻었고,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적잖이 필요한 시간을 썼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계획은 없지만, 대중매체에 대해 공부를 하고자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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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표 기획자로 활동하고 계시는 <JCP>는 국내 유일한, 그리고 국내 최초의 기업 최고경영자의 죽음에 위기관리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실제 상황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기획사입니다.

기업위기관리시나리오 컨설팅은 ‘기업 최고경영자’의 갑작스러운 상황 즉 죽음에 대비해 미리 위기관리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일을 말합니다. 국내 최초의 전문기획사로 창업 16년 차의 기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인의 장례는 사후 장례식장에서 통상 3일간 장례를 치릅니다. 장례가 간소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처음 장례를 치른다 할지라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반면, 회사장(최고경영자의 공식의례로서의 장례식)은 의전, 행사(빈소 운영, 언론대응, 의전, 영결식, 안장식, 분향소 설치 운영 등)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므로 사전에 구체적인 계획 없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장례 기간 중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특히 기업 내에 기업회사장에 대해 경험자가 없으므로, 배경지식과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이를 사전에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이 JCP(중앙의전기획)의 역할입니다.
 
창업 이후 처음 6개월간은 전혀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죠. 죽음을 비즈니스적인 시각으로 성급히 접근하다 보니, 정작 죽음이란 민감한 문제에 기업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던 겁니다. 1인 기업을 창업했을 당시, 국내 1000대 기업에 ‘기업 회사장 매뉴얼’을 발송했는데, 회장님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거센 항의를 해 왔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기에,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강한 회의가 들 즈음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업 비밀유지 원칙에 따라 사명은 밝힐 수 없지만, 모 기업의 최고경영자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제가 보낸 매뉴얼이 총무팀장의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이죠.
 
연락을 받고 여의도로 달려갔고,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황과 실제와의 간극은 컸습니다. 위기도 있었고, 반전도 있었습니다. 장례 마지막 날, 고인의 운구를 회사에 모시고, 영결식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분들이 회사장 영결식장에 다수 참석하셨고, 그때 JCP(중앙의전기획)의 존재가 기업 사회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각 기업의 수행 팀장이 회사 명함을 받아서 갔고, 그 한 장이 연결고리가 되어 본격적으로 ‘회사장’을 ‘컨설팅’이란 전문영역으로 구축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업은 성시할수록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만, 죽음이 반가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죽음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JCP(중앙의전기획)는 사전에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고 관리합니다. 죽음은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짧게는 수 주, 길게는 5년 이상 관리한 기업도 있습니다.
 
현재 34곳의 기업을 관리하고 있고, 평소 기업별 시나리오를 변동 상황에 맞게 수정 및 업그레이드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기업 최고경영자에 관한 변동정보관리와, 그에 따른 행사 진행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자연히 해당 기업과 대상자의 행보에 대해 주의 깊게 살피게 됩니다.
 
과거 척박한 환경에서 기업을 일구신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치와는 오히려 거리가 멉니다. 어느 기업의 회장님께서는 슬리퍼를 기워가며 20년이나 신으셨을 정도니까요. 이런 분들의 일상은 공개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기업의 역사는 곧 창업주의 역사입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존경심도 생기게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런 분들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비록 소속된 기업은 아니지만, 직원 이상으로 대상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JCP>가 주관한 장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는 무엇이며, 누군가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맞이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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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기획했던 장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라면, 안산세월호합동분향소를 디자인했던 일입니다. 이후 한동안 운영관리를 하면서, 몇 달간 안산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유족들의 울음소리가 동트기 직전까지, 그 넓은 분향소 천막 위를 떠돌았습니다. 허공으로 찢겨나간 카랑카랑한 울음들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매일 밤 그 울음을 듣는 게 참을 수 없이 힘들어, 자리를 피했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영정이 제단 위에 놓일 때마다, 그 앞에 쓰러져 우는 유족들을 대면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앞에, 무너져 우는 것 외에, 유족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이들이 어떻게 기억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세월호는 제게도 큰 숙제를 던져준 사건이었습니다. 떠나는 분들의 삶이 좋은 의미로 기억되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호흡이 멎는 순간 죽음으로 삶은 온전히 동등해집니다. 변동 가능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결과를, 우린 ‘진리’라고 합니다. ‘죽은 이에게 허락된 것은 한 평 땅’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 광경을 일 년에도 수차례씩 봅니다. 타자의 죽음이, 몸에 스미는 산 경험으로 다가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며 사는 것’과 사는 대로 ‘휩쓸리듯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제게 ‘의식을 깨우치는 망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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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JCP>와는 현저히 다른 분야인 <책과강연>이라는 출판에이전시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지난 2년간 67명의 글을 투고하여 100% 계약 유치 성공이라는 기록을 쓰기도 하였는데요. <책과강연>의 대표로의 활동상을 소개한다면?
 
죽음을 다루는 JCP와 정반대로 ‘책과강연’은 개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출판기획에이전시입니다. ‘책과강연’을 한 단어로 붙여 쓰는 이유는 이 브랜드가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상징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기반을 제외하고 나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기회란 배경이나 잔고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본인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책과강연>은 당사자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찾아서 책이라는 기회로 연결하는 ‘북 닥터’의 역할을 합니다. 개인의 삶을 들어 올리는 기회의 지렛대가 <책과강연>의 역할인 셈이죠.
 
JCP라는 별난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연을 하게 되었고, 전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소통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대중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변화와 성장을 갈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힘들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신을 한계 짓는 유리천장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기회를 기획하라’ 문신처럼 가슴에 새긴 말입니다.
 
저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믿을 구석은 자신뿐이고, 그 안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JCP가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일이라면, <책과강연>은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 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JCP를 운영하면서, 네 종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10여 년 이상의 비즈니스 경험을 더해 <출판기획 에이전시 책과강연>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간 출판을 처음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공부해가며, 들어오는 원고를 철저히 편집자의 관점에서 고민했습니다.
 
‘기획’의 본질은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에도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어서, 새로운 영역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알게 된 지금에야 두려움을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몰랐던 것들이 더 많아지니까요.
 
JCP(중앙의전기획)과 <책과강연>은 별개의 회사여서 사무실도 다릅니다. 대게 <책과강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일주일에 한 번 JCP에서 근무합니다. 회의는 유선이나 메일로 진행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사업에 체계가 생기니, 업무의 루틴이 잡혀서, 일에 혼선이 생기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제가 도맡아 하기보다,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직원들의 역량에 파악하여 맡기고, 직원들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 또한, 기획자로서 제가 맡은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년간 <책과강연>은 제 전문분야가 아니었기에 배경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제 책을 몇 종 냈다고 해서 출판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창업 전 1년간, 출판업을 알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출판편집에 관한 각종 서적을 읽고, 강연이란 강연은 다 찾아다니고, 출판기획, 편집, 인쇄, 마케팅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가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습니다.
 
68명이 투고한 원고를 읽고, 첨삭하는 과정에서, 마치 제 원고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100% 계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운도 따랐고, 함께한 동료들의 헌신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지난 2년간, 주말, 평일 저녁 시간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한 것도 있었지만요.

<책과 강연>을 통해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 그리고 사업 성장을 위한 전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책과강연>은 ‘지식생태계’입니다. 변화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이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가장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커뮤니티입니다. <책과강연>은 출판기획에이전시로서, 계약을 염원하는 저자들의 기획과 집필을 돕는 동시에, 출판사로서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출판사만 5만 곳이 넘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 숫자보다 출판사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작은 출판사가 좋은 원고와 만날 기회가 적습니다. <책과강연>은 연구생이란 제도를 통해 실력 있는 저자를 양성하고, 그 제도 안에서, 저자와의 직접출판도 동시에 기획하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만든다’라는 것이 <책과강연>의 성장전략입니다. 앞으로 2년 안에 연간 20종 이상 신간을 낼 수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는 것이 단기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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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JCP(중앙의전기획)와 <책과강연>은 과정이 목표입니다.
 
저는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앞으로도 기존 관습과 선입견을 탈피하여, 도전하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안에만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조건상 불리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생각의 방향에 따라 기회는 언제든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올해로 마흔셋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지만, 여전히 절반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배우는 게 즐겁고, 만드는 것을 변함없이 동경합니다. 몸은 늙어도 생각만큼은 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시대에 발맞춰 변모해 나갈 <중앙의전기획>과 <책과강연>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이정훈, J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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