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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동기부여가 <권혁탁>8/3/2019 '국내 1호 동기부여가'로 활발히 활동하는 권혁탁.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대다수가 경험하지 못하는 기적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을 부여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글과 이야기, 노래를 통하여 알리며,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치유하고, 공감하고, 변화 시키는 힘을 전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공식 질문)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국내 1호 동기부여가이자, 매일 꿈을 쓰고, 노래하는, ‘꿈 쓰는 피터펜’(Pen) 권혁탁입니다. 저는 저의 삶을 담은 글, 이야기, 그리고 노래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연출 전공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십니다. 초, 중학교 시절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정말 잘 따르는, 더 없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결석 한번 하는 것도 무서워하고, 매번 반장을 도맡아 하며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수학, 과학 과목의 3년 성적 평균이 5%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는, 과학영재 시험에 응시하여 2차까지 붙기도 했습니다. 3차가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친구와 노느라 미처 제때 응시를 하지 못해 끝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또래보다 일찍 다가온 사춘기는 제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껏 부모님의 말씀,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이견 없이 순응하고, 따르던 제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삶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길 원했습니다. 그 무렵 한창 가수 비(정지훈)가 가요계에 데뷔하여, ‘안녕이란 말 대신’이라는 노래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제2의 비가 되겠다‘라며, 안양예술고등학교 (이하 안양예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거다‘ 싶어, 저도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사실 진로를 정하기에는 어린 나이었던 제가, ’연극영화과‘에 대한 큰 거부감이 없던 이유는, 중학교 1학년 즈음, 어머니께서 주부극단 소속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그때 몇 차례 공연을 보며 익숙한 얼굴들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직접 본 경험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제2의 비’를 꿈꾸며 안양예고 입학을 꿈꾸던 친구는 약 6개월간, 그리고 저는 2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입시 준비를 하고, 안양예고의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엔 경쟁률이 10:1 정도로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전국 각지에서 시험을 보러 온 재능 넘치는 학생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고, ’당연히 떨어졌겠지‘라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날, 함께 본 친구는 떨어지고, 제 이름만 올라와 있었습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하던 현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평생지기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며, 욕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다 같이 기뻐하고, 많은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연기자로서 앞길이 창창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그 후,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다고요? 2005년 출연했던 <애나 어른이나>라는 단편영화로 제6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남우연기상 수상했고, 2006년 촬영했던 <젊은 날의 초상화>라는 단편영화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경쟁부문의 역대 부산국제영화제 ’고교생 최초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입시생으로서, 연극영화과로 명망 있는 대학교에 쉽게 입학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6월을 맞으면서, 제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집을 사느라 대출을 받아 빚이 꽤 많았습니다. 그 여파로 저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힘들어졌고, 때문에, 저는 학교도 다니면서, 또 재능을 살려 용돈 벌이가 가능했던 홈쇼핑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당시엔, 제 몸이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가까이 (아르바이트, 실기, 입시, 체육대회 준비, 게임, 축구 등)을 깨어서 활동하였고, 그런 일상이 몇 달간 지속 되었습니다. 가방을 멘 자리에 몇 달 동안 멍이 지워지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발톱에도 멍이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몸은 제게 계속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몸속에 있던 시한폭탄이 터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고, 옆에는 어머니와 큰이모가 함께 계셨는데, 진단받은 병명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습니다. 삶에서 많은 것이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잠깐 쉬고 나면, 여느 때와 달리,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였지만, 퇴원하지 못한 채, 백혈병을 위한 치료를 받으며, 몇 주가 지나고 나니, 지난날의 사고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병원에서 제가 했던 생각은 오로지 ‘살아 나가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채워지는 경험은, 죽음에 이르기 전 느낄 수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체험이었고, 그 순간 제게 힘을 주었던 것은, 당시 고통을 함께한 가족도, 지인들의 응원도 아닌, 제가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연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현재‘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버텼습니다.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싫었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저를 ‘삶’이라는 양지로 이끌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티다 보니, 결국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삶이란, ’미래의 기대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백혈병의 치료과정이 너무 힘들어, 잠시나마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미래의 제 모습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습니다. 제2의 삶을 얻게 된 현재, 제가 지금 존재할 수 있도록, 수많은 분이 노력하셨고, 기도해주셨다는 것을 알기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정적으로 사는 만큼, 미래를 기대하게 되고, 새로운 꿈들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활동명 '꿈쓰는 피터펜'으로 현재 국내 1호 동기부여가로 활동 중이십니다. '동기부여가'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꿈 쓰는 피터펜’이라는 별명은, 작년 ’피터펜의 꿈’이라는 앨범을 발매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피터펜‘이 아닌, ’피터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수로서, 작가로서, 연사로서, 행사나, 강연회 등의 무대에 오르게 되니, ‘네 덕분에 내가 더 열심히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 ‘당신의 삶은 저에게 힘이 됩니다’ 등의 반응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 ‘내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을 줄 수 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더는 상상 속에서 숨어 사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나와, 매일 꿈을 쓰고, 이루는 꿈 쓰는, ’피터펜(pen)이되자‘라고 마음먹게 되면서, 활동명을 확실히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직업명은, 얼마 전 귀인처럼 만난 ’국내 1호 개인 브랜드 매니저‘인 국도형 PD님께서 지어주신 개인 브랜드입니다. 개인 브랜드라는 직업이 생소하게 들리실 수 있는데요. 개인 브랜드 매니저란 직업은 이미 북미에서는 대중성을 가진 직업으로, 인물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개인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장점을 계발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입니다. 저는 국도형 PD님과 함께 제가 살아온 삶, 지나온 역경들에 대해 진지하게 나누게 된 후, PD님께서 ‘타인을 이롭게 하라’라는 본인 직업의 슬로건처럼, 절 사회에서 이롭게 쓰고자, 앞으로의 진로를 제시해주시며,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직업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 이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개인 브랜드로 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최초이기 때문에 오는 무게감도 좀 느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제가 걸어온 삶을 공유함으로, 타인에게 삶에 동기를 유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내 1호 동기부여가‘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모든 동기부여가를 대표하여, 활동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기적을 경험한 이후, 하루하루가 새로울 것 같은데, 본인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힐링 뮤직&토크 콘서트 <첫번째인생>의 '기획자', '연사', 'MC'를 모두 맡고 계십니다. 저는 평소에 재미있고, 가슴 뜨겁게 할 수 있는 일, 북적북적 사람 냄새 나는 일을 좋아합니다. 본격 힐링 뮤직&토크 콘서트 <첫번째인생>의 역사는 저의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제인‘이라는 친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초, 제인이 뜬금없이 ‘야, 피터펜, 내가 곧 뭔가를 할 건데, 그냥 넌 참여만 하면 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현재의 팀원인 윌로우, 제인, 자유 그리고 저(꿈 쓰는 피터펜)까지, 이렇게 네 명이 모이게 되었고, 그때 계획을 세웠던 것이 <첫번째인생>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던 콘서트는 각자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연이 되며, 우여곡절 끝에, 5월, 첫 번째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렇게 7월 27일, 3회째 행사를 마쳤습니다. <첫번째인생>은 매일이 처음이라 서툰, 모두를 위한 콘서트입니다. 무대 위에서, 저는 연사가 되기도 하지만, 저희 무대에는, 매달 새로운 연사들이, 콘서트 속, 또 다른 콘서트인, <꿈의 무대>를 통해, 일반인도 무대에 올라, 자신이 준비한 공연을 선보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평범한 삶을 살던 그들이지만, <꿈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들을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라이퍼’가 되고, 무대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자신의 삶, 느꼈던 감정, 마음에 품어왔던 자신만의 무대를 꾸미게 됩니다. 한 ‘라이퍼’는 지난 20년 동안 갖고 있던 울렁증을 극복하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으며, 다른 ‘라이퍼’는, 평소 가게에서만 조용히 해오던 디제잉의 정식 데뷔를 <첫번째인생>을 통해 가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라이퍼’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생일축하를 받고 또 울기도 웃기도 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첫번째인생>을 꾸려나가는 저희는 인지도가 높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묵묵히 한 달에 한 번씩, 쉬지 않고, 자신의 서투름과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고, 해소할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각자의 삶을 나누며, 치유하며, 공감을 할 수 있다면, 분명 찾아와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유난히 학벌을 많이 중시하고 있고, 심지어 어느 대학 출신이냐에 따라 사람의 배경을 판단하기도 하지요. 안타까운 현실인데, 활동하면서 본인이 활동 분야의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단점보다, 강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저는 부천대학교 관광경영과를 야간과정으로 졸업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대학교, 자격증, 스펙 등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취업 준비를 한다거나, 어느 곳이든 지원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할 때면, 한없이 작아져야 하고, 배경으로만 판단하는, 그런 사회가 싫었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세상의 시선이나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것이 저의 가치관이고, 있는 그대로의 제 능력을 인정해 줄 일들을 찾았습니다. 공기업이나 대기업 등, 보편적인 직장에 입사를 준비다면, 서울 내 대학 출신도 아니고, 어학연수나,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 저는, 다른 취업준비생들에 비교해 많이 부족하고, 채용조건에는 부족한 지원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펙만을 최선으로 여기는 세상의 편견에 조금씩 맞서다 보니, 지금처럼 제 능력과 경험을 인정해주는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잃었던 꽃 같은 학창시절을 보상해주듯, 많은 사람이 제 뜻에 동참하며, 제가 계획하는 사업에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시도, 취업도,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목표’와 올바른 ’방향‘이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막연하게 행동하게 되고, 그러면 분명 망설이고, 돌아가게 될 거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갈 방향을 정해놓고 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그리고 취업준비생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권글'이라는 필명으로 SNS에 글을 올리고 계십니다. 혹시 그동안 올리신 글 중, 추천해주고 싶은 글귀가 있으신가요? 권글은, 하루에 하나씩 당신에게 ‘권하는 ‘글’ 의 약자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타인에게 제 생각을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기 이전에, ‘브런치’라는 공간에 글을 연재하기 위해 작가신청을 다섯 번 정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올릴 수 있으면서도, 사적인 공간인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게 되었고, 벌써 70개 정도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글의 개수도 그리 많지 않고, 인지도도 낮은 작가이지만, 나중에는 ‘권글’ 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에 딱 떠오를 수 있는, 이미지와 개성이 뚜렷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호평을 받았던 권글을 몇 개 공유하자면: - 상처받는 것에 무뎌지지 마세요. 무뎌지는 것이 꼭 강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더 이상 참지 말고 말하기 위해 애쓰세요. 참지 마세요. - 빠른 걸음보다는 바른 걸음이 중요하고 사치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 중요하다. 삶의 자세. 공식 질문)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그 어떤 것보다, ‘남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인의 말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고, 죽이기도 할 수 있으며, 그 무게는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작년 내내, 휴식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무너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두렵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안하고, 흔들리는데, 누구의 삶에 관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저는 약 3개월가량 외부 활동을 끊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자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제대로 마음먹었습니다. 김은숙 작가가 집필한 2013년 방영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의 부제목이기도 했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문장처럼, ‘우연히 시작했지만, 이 ’동기부여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자.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 삶에 희망을 주고,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목표는, 올해 안에 제 삶의 ‘뮤즈’를 만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투병할 당시, 삶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는 것이, 죽음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희망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때 꿈꿔왔던 그 사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터뷰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인터뷰 Avec 'G' 글렌다박 수석기자 사진 제공: 권혁탁 <ⓒ “Avec G” 무단전재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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